안식처
- 감독
- 호 유항
- 제작년도
- 2004
<도라지 불고기> 중 타인의 삶이 모이고 흩어지는 한 순간을 카메라로 붙잡기로 결심한 또 다른 순간에 대해, 프레임 밖에서 감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기획 배경 <도라지>의 주인공인 XX형과 나는 대학 동기다. 우리는 시각디자인과 축구 소모임에서 함께 뛰었다. 어느 날 형은 자기가 초·중·고교를 조선학교에서 보냈으며, 그곳은 일본에서 교포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 사실에 특별한 호기심이 생기지 않아 더 묻지 않았다. 2학년을 마친 뒤 나는 군대에 갔고, 형은 휴학 없이 졸업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 포수 >(2022)로 처음 영상 매체를 다루기 시작했을 무렵, 내겐 다큐멘터리를 많이 찾아봐야만 할 것 같은 긴장감이 생겼다. 그러다 조선학교를 다룬 영화를 접하게 되었고, 이어서 비슷한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영화들이 내는 목소리에 대체로 동의할 수 있었다. (동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영화임에도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차별 속에서도 조국과 정체성을 잊지 않고 투쟁하는 영웅’으로 그려져 있었다. 영화는 그들을 ‘우리 민족’이라 강조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상을 지우는 방식으로 그들을 철저히 ‘그들’로 격리하는 것 같았다. 이 영화들의 시선은 그들이 일본에서 핍박을 받더라도 조국을 잊지 않고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잊고 살아왔기 때문에 ‘늦게나마 돌봐야 할 불쌍한 사람들’이거나, ‘아픈 우리 역사의 교보재’였다. 선과 악, 피해와 가해의 구도가 분명하게 설정된 구조를 보며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라는 소재가 어떤 정치적 필요에 의해 선택된 대상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XX형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지만, 좀처럼 겹치지 않았다. 불온한 이미지 다큐멘터리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대체로 이렇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조선인을 향한 배제는 오늘날 조선학교를 향한 행정적 차별로 이어지고 있다. 고교무상화 제외는 제국주의의 잔재이며 우리 민족을 향한 차별이다. 이에 맞서 학교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조선학교 진학을 선택하고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더 훌륭하다거나, 일본인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지탄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는 수만 가지의 삶을 윤리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 어쩌면 스스로를 규정하려는 개인에게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은 이제 안식처가 아닌 억압의 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학교와 총련의 영향력이 점점 옅어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일 것이다. ‘북한’이라는 짐을 굳이 짊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조선학교가 북한을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등 인권의 가치에서 벗어나는 교육 내용을 유지하는 한, 일본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교육은 정치를 떠나 보편적인 인권의 영역이며, 아이들의 학습권이 정치적 논리에 의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인권’의 문제가 양쪽 모두에 공존한다. 이렇게 학생 수 감소나 고교무상화 배제의 이유를 일본인의 차별로만 단순화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영화는 이 복잡함을 가린다. <도라지 불고기> 중 밝히자면 나 역시 조선학교가 고교무상화에서 늘 제외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곳은 다양한 정체성의 가능성을 유지하게 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 논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면 먼저 가려져 있던 것들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슬픈 얼굴들을 앞세워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을 가리는 수법에 더 이상 진보가 있을까. 감출수록 더 미심쩍게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가려졌던 것들을 드러낸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하고 싶었다. 북한과의 연관성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남한과 일본 사회를 벌벌 떨게 할 만큼 실체적인 위협인지 되묻고 싶었다. 그래서 ‘불온한 이미지’를 원했다. 너무 당연한 모습이지만 조선학교와 재일조선인을 다루는 영화에서는 금기처럼 여겨질 법한 것들. 그러나 너무 당연한 모습들. 촬영 과정 XX형에게 종종 나고야로 놀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나고야에 갈 바에야 도쿄에 가겠다며 진심을 담아 거절해 왔다. 그런데 막상 ‘찍을 거리’가 생기니 촬영 장비를 꾸려서 쫄래쫄래 나고야에 갈 계획을 세우는 내 모습이 꽤 머쓱했다. 브이로그 형식을 택한 현실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오랜만에 보는 형은 물론, 처음 만나는 사람들까지 대뜸 카메라에 담아야 했다. 그러니 비교적 작은 카메라가 서로에게 덜 민망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작업에서 나는 사명감 넘치는 다큐멘터리스트가 아니라 재치 있는 브이로거여야 했다. 앞서 언급했듯, 실재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지우고 그들을 하나의 범주로만 불러내는 방식에 대해 나름의 대답을 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별다른 사건 없는 일상을 담기로 했다. <도라지 불고기> 중 / 편집된 장면 중 다행히 형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무사히 나를 소개해 주었고, 다들 내 카메라를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나 역시 촬영을 위해 웃기고 귀여운 동생처럼 보이려 부단히 노력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의 부모님에게는 늘 호감을 샀다는 경험에서 나온 자신감도 있었다. 서울과 나고야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많이 가까워졌다. 물론 내겐 꿍꿍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는 된 것 같았다. 덕분에 <불고기>를 촬영할 때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본격적인’ 카메라를 들이밀 수 있었다. 나고야를 방문할 때마다 약과와 참기름, 고춧가루, 안동소주, 도라지즙, 쫀드기 같은 것들을 챙겨갔다. 누나들과 형들의 어머니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정도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됐다. 비록 나의 불순한 의도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어느새 그들은 내게 소중한 친구들이 되었다. 그래도 이제는 나고야보다 도쿄에 가고 싶다. (상) 편집된 장면 중 (하) <도라지 불고기> 중 / 서울에 놀러온, 나고야에서 만난 친구들 (사진: 양지훈) 지워낸 얼굴 얼굴을 블러 처리한 선택은 예상보다 많은 말을 낳았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이를 두고 “존재를 부정당한 저들의 실체가 없는 아이덴티티의 시각화”라고 리뷰했지만, 그렇게 정의하면 내 의도와는 반대가 된다. 아마도 그 문장은 내 작업을 보호하기 위해 덧붙여진 수사였을 것이다. 보편의 윤리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익숙한 방식으로 묘사하는 편이 모두에게 안전했을 테니까. 블러 처리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나는 누군가 나를 카메라로 찍는 일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특정한 범주로서 누군가의 카메라 앞에 서야 한다면, 아마 더 힘들 것 같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을 내가 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근원적인 미안함이 있다. 그래서 가렸다. < 도라지 불고기 >(2025)에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자연스럽고 정당한 선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카메라에 기록되어 특정 범주 안에 위치 지어질 가능성을 생각했을 때, 그게 꼭 의미 있거나 유익한 방식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늘 미안함은 욕망에게 지곤 한다. 그들의 삶에 기대지만, 얼굴까지 팔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맨얼굴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었다.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에 대상이라는 매개가 있고,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의 ‘날 것의 얼굴’은 관객에게 가장 좋은 구경거리다. 우리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마주 볼 수 없다. 일방적으로 응시할 뿐, 타인에게 얼굴을 내어주지는 않는다. 가려진 얼굴을 보며 관객들이 이 불균형한 관계를 자각하기를 바랐다. 이미지(를 보는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얼굴을 탐닉하고 점유해 왔다. 그것을 윤리라고 믿는 방식으로. 편집된 장면 중 드러낸 주체성 얼굴을 블러 처리한 선택 때문에 많은 비판을 전해 들었다. 비판은 대체로 한 곳으로 향한다. “감독이 대상의 개별성과 주체성을 소거했다”라는 의견이다. ‘개별성’을 소거했다는 지적은 겸허히 받아들인다. 얼굴은 그 사람을 증명하는 상징이다. 그 얼굴들을 모두 같게 만듦으로써, ‘재일조선인’이라는 집단화된 이미지를 내가 가장 적극적으로 생산한 모양새가 되었다. 작업의 가장 핵심적인 형식이 정작 작업이 문제 삼으려 했던 것을 스스로 앞장서 재현하고 말았다. 내가 극복하지 못한 부분이다. 하지만 ‘주체성’의 문제에서는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창작자가 누군가에게 주체성을 주거나 뺏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도라지 불고기> 밖에서 그들은 각자 자기 삶의 주인이다. 하지만 작업(영화)의 주체는 작가(감독)이다. 프레임 안에 가둔 대상의 주체성을 드러내 보겠다는 고민은, 어쩌면 감독이 자기 윤리를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감독이 전권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대상의 주체성을 논하는 일은 그 자체로 시혜적이다. 감독이 ‘드러낸’ ‘주체성’이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며, 편집자의 손끝에서 빚어진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창작자가 제작 과정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태도는 자신의 욕망을 가장 앞에 두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욕망을 명분 뒤에 숨길수록, 영화를 향한 비평은 도덕의 문제로 치환되고 만다. 작품이 아닌 ‘의제’를 방패 삼아, 비판하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나쁜 위치에 세워버리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창작자는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숨어든다. 누군가를 위해 카메라를 든다는 사람의 말은 아직까지 믿지 못하겠다. 그 말은 카메라의 작동 원리를 타인에게 전가하며, 자신을 선한 주체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타인의 삶을 연료 삼아 예술가로 살아가려는 창작자의 야심과, 타인을 안전하게 관음하려는 관객의 시선이 만나는 지독히 탐욕적인 장소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 비대칭적이고 폭력적인 구조를 ‘대상의 주체성’이나 ‘재현의 당위’라는 말로 포장하는 순간, 예술은 비겁해진다. 감독이 ‘구원자’의 탈을 쓸 때 대상은 ‘수혜자’로 전락하지만, 감독이 ‘욕망하는 창작자’로 설 때 대상은 비로소 그 욕망과 거래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당사자가 된다. 물론 당장 이 기울어진 무게추를 평평하게 맞추지는 못하겠지만, 어쩌면 대상의 주체성이 생겨날 수 있는 희미한 가능성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불고기> 촬영 현장 (사진: XX형) 양지훈(시각예술가) l 다큐멘터리 제작에 수반되는 본질적인 폭력에 주목하며 다큐멘터리 이미지를 만든다. <포수>(2022), < 테이큰 >(2023), <도라지 불고기>(2025)를 만들었다.
<만다라>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스튜디오가 인플루언서들의 극찬을 수집할 수 있다면 누가 영화평론가를 필요로 할까요?” 2023년 7월, 《가디언》에 실린 기사의 도발적 제목은 영화 저널리즘이 직면한 현실을 꼬집는다. 평론가 마누엘라 라직은 < 바비 >(그레타 거윅, 2023)의 런던 시사회 경험을 크게 두 가지 풍경으로 일축했다.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인플루언서들 사이에 합류한 기자에게도 각종 굿즈를 건네주는 안내원. 그리고 이어지는 독려. “긍정적인 느낌을 공유해주세요!” 프리랜서 크리틱인 그는 자기 계정에 무슨 말을 쓰려다 말고 개봉 이틀 전에야 엠바고가 해제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당황했다고 쓴다. 기사는 가뜩이나 영화 매체의 대중문화적 위상이 위기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이와 같은 문제 제기가 무슨 소용인지 자조하는 모순적 자기검열로 마무리된다. 올해 칸 기자회견장 옆자리에서 통성명한 《인디와이어》 에디터에게 용기 내 이 기사를 본 적 있냐고 물었을 땐 심드렁한 답변이 돌아왔다. “뻔한 소리, 요샌 부정적 평가를 미리 예측해서 특정 비판은 하지 말아 달라는 식의 가이드도 오는데요 뭘.” 비평가를 위한 친절한 가이드라. 선댄스발 코미디 영화 제목 같다고 생각했다. 취재 기자의 실무는 산업적 관점에 자주 노출되고 그래서 홍보, 마케팅 환경에 질식하기도 쉽다. 잡지사의 생리는 작품의 시의성이나 신속한 이슈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영화는 너무 성급히 말하게 되고 어떤 영화에 대해서는 말할 기회를 놓친다. 다각의 요구와 마감 시한, 닥쳐오는 개봉작들을 포용하는 이 일은 자기 감식안의 모서리를 ‘업계’의 비바람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 극장에서 상영관을 확보하는 영화들은 중·저예산의 참신한 기획을 내건 작품들조차 아찔할 정도로 안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맞서지 않고 있다가는 예리해지긴커녕 시시각각 풍화될 가능성이 크다. 행여 영화기자의 호러라는 장르가 생긴다면 명대사는“그래, 그래도 이 정도면 좋은 영화지”일 것이다. 취재의 특권은 비평 앞에서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그보다 본질적으로는 분열하고 충돌하는 내면의 목소리들이 가끔 시끄럽다. 이 일은 자연스럽게 필름메이커들의 속내와 고충을 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과물로서의 작품 이전에 만드는 과정과 방식을 관찰하는 일도 중요해진다. 걸작이든 범작이든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말한)다. 주관적 진실 속에서 창작자의 자부심과 소통하는 저널리스트의 객관성은 늘 자기 의심의 대상이다. 현장 비평을 향한 열의가 때로 거의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겠다는 실의를 동반한다. 매주 지면 안팎에서 줄다리기가 열린다. 감독, 창작자, 제작진의 예술적 비전을 정확히 전달하고 해설하는 중간자의 본분이 한쪽에, 작품 본연의 의도보다 평자의 패러다임이 선명한 창조적 쓰기가 다른 한쪽에서 실랑이하는 형국이다. 잡지계의 악명 높은 평론가 폴린 카엘에 관해 《뉴요커》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반대자(contrarian)”라고 정의한 바 있다. 카엘의 탁월한 반대는 역설적으로 발굴과 호명으로 이어졌다. 그는 지금은 고전이 된 < 보니 앤 클라이드 >(아더 팬, 1967)를 구해내어 할리우드가 그 명성을 스스로 재창조하도록,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독려한 인물로 기억된다. 걸출한 반대자의 식견, 호전성, 무시무시한 헌신과 성실함을 동경하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가 않다. 문제는 지금 여기에 선 사람의 막막한 과제다. <만다라> 중 법운과 지산 번뇌 앞에서 임권택 감독의 < 만다라 >(1981)를 되짚어본다. 6년의 수행에도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자조 속에서 고뇌하는 승려 법운( 안성기 )은 술 취한 탕아 행색이 더 어울리는 행자 지산( 전무송 )과 스치고 헤어지길 반복한다. 법운은 지산에게서 구도의 가능성을 본다. 그의 야생성은 안쪽에 자리한 단호함과 순수를 동경하게 만든다. 그러나 법운의 갈망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지는 끝내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신당의 불상 점안식을 도운 뒤 마을 어귀에서 술에 의지하던 지산은 불탑 아래 엎드리며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얼어 죽는다. 지산을 발견한 법운은 그동안 자신이 찾아 헤맸던 깨달음을 하나의 형상으로 발견한 사람처럼 슬피 운다. 혹한의 날씨에 불상 앞에 납작 엎드린 자세로 굳어버린 수행자를 기리는 마지막 의식이 곧 법운의 몫이 된다. 지산의 죽음 이후 법운의 행적에 어떤 망설임도 없어 보이는 것이 신기하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처럼 움직인다. 임권택 감독, 송길한 작가, 정일성 촬영감독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통과하며 청년들의 죽음이 들려오는 시절의 수치와 공허를 절감하는 중에 <만다라>를 만들었다. 지금 돌아보기에 <만다라>는 시대를 감당하기 힘든 이들의 흔들림이 걸어갈 수 있는 하나의 길, 우회로를 터 내는 영화다. 말미에 이르러 법운은 승려라기보다 매개자로 변모한 모습이다. 암자에 불을 붙여 다비를 마친 후, 법운은 지산이 잊지 못했던 여인 옥순( 방희 )을 찾아간다. 지산의 유품, 그가 직접 조각한 매우 고통스러운 얼굴을 한 불상을 전하러 간 것이다. 이어서 법운은 오랫동안 외면했던 어머니를 찾아가 더 이상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담히 전한다. 직접 불붙인 암자의 화마를 잠자코 지켜본 뒤 여관방과 다방을 향한 법운은 혼란을 거두고 세속의 안쪽을 통과한다. 유품을 건네고 어머니(들)에게 (대신) 안부한다. 이 뜻밖의 행로에서 법운은 자기 안에 지산이, 또 다른 죽음들이 들어찬 사람같이 부지런하다. <만다라>의 마지막에는 먼 길을 걸어가는 매개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다시 방향을 뒤집어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움직임이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그는 멀어진다. 물론 되돌아오기도 할 것이다. 불탑 앞 기도하는 자세의 지산 / 암자에 불을 붙인 법운 속세와 구도의 경계에서 겁먹은 수행자의 클로즈업이 종내에 아득한 롱쇼트로 바뀌어 갈 동안 나는 극장에 앉아서 짐짓 딴생각을 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말을 전하고 의식을 치르는 매개자의 역할이 품을 수 있는 쓸모 같은 것을 궁리했다. 창작자와 관객, 예술과 산업, 비평과 저널리즘 사이에서 각각의 형식과 규격, 정당성 같은 것을 찾고 또 찾는 것이 아니라 영화 매체의 본래적 지향과 그것을 만들고 보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태계에 제각기 충실할 수 있다면. 영화를 만드는 데 바탕이 되고, 이미 만들어진 영화가 관객에게 가는 경로를 터 낼 수 있다면. 한 주에 80페이지가 훌쩍 넘어 과연 어느 성실한 독자가 다 소화하고 있는 것인지 근심하게 되는 지면에 틈새를 더 파내어 보기로 한다. 이상할 정도로 말해지지 않는 영화들 쪽으로 조금 더 움직여보기로 한다. 슬며시 머릿속에 내게 주어진 길 하나를 그려본다. 직업적 특권 아래 남보다 조금 일찍, 그리고 조금 더 많은 영화와 영화 안팎의 사람들이 지나가게 하는 길. 이 길이 안녕하냐고 물어올 때 드리우는 암울한 직업적 자의식을 거둬내고 나면 답은 간명하다. 저널리즘과 비평가를 위한 가이드가 주어지는 현실은 동시대 영화 매체가 처한 메마른 환경부터 극명히 가리킨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중심에서 바깥으로 다시 밖에서 안으로 황무지를 횡단하는 시도의 필요를 믿어볼 때다. 영화 안팎의 안부를 그러모으는 매개자의 눈과 손이 겁을 떨쳐내기를. 말끔히는 어렵더라도 부단히, 부단히. <만다라> 중 김소미(영화기자) l 영화주간지 《 씨네21 》 취재팀장. 책 『불이 켜지기 전에』(2025)를 썼다.
사진: “ Jonas Mekas. Requiem ”, Francesco Urbano Ragazzi (© estate of Jonas Mekas) 돌아보니 2023년 한 해에만 상복을 네 번 입고, 네 점의 작품을 제작해 전시했다. 남아서 살아가야 하는 자들의 증상은 모든 의식이 끝난 뒤 발현된다. 2024년이 시작되자마자 몸은 소진되었고, 마음은 무력감으로 충만해졌다. 1년간 참 많은 영화와 콘텐츠들을 접했지만 소진된 육체와 무력감으로 충만한 마음으로는 잘 소화시킬 수 없었다. 사사로운 리스트에 올린 영화들은 그런 무감각 속에서 간신히 발견한 것들이다. 특히 요나스 메카스의 < 레퀴엠 >(2019)은 쓸데없이 흘려보낸 시청행위의 흐름을 끊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요나스 메카스의 유작 <레퀴엠>을 오랫동안 소문으로만 전해들었다. 특히 영상의 주된 사운드인 베르디의 ‘레퀴엠’은 이 영화의 전시 오프닝 때 현장에서 라이브로 연주되었다기에 기대가 컸다. 전시장에서 상영된 필름 영상과 실연된 사운드가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고 관객들에게 전달되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감독은 고인이 되었고, 우리가 기대했던 전시 상영은 이뤄지지 않았다. 만약 감독이 이 영화의 전시 방식에 따른 메뉴얼을 남겨두었다면, 훗날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뉴욕 복합문화예술공간 “The Shed”에서 <레퀴엠> 영상과 함께 작곡가 테오도르 쿠렌치스의 지휘로 연주되는 베르디의 ‘레퀴엠’ (사진: Kate Glicksberg, “ REQUIEM CONCERT PERFORMANCES ”, The Shed) 영화는 필름이란 긴 흐름 위에 감독이 여러 요소들을 자유롭게 띄워놓은 것 같다. 거리에 핀 꽃, 성경 구절과 뒤섞인 작가의 말, 매체로 공유되는 세계의 참상, 그리고 베르디의 ‘레퀴엠’이란 조각들이 영화에 흐름에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이어져 독특한 수평의 흐름을 형성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글자를 읽고, 감독이 촬영한 자연물을 보다, 인쇄되고 방영되는 세계의 참상을 받아들여야 하며, 동시에 약 170여 년 전의 음악도 들어야 한다. 어쩐지 이러한 구성 자체가 베르디의 레퀴엠과 비슷하다. 베르디의 레퀴엠에선 소프라노와 테너를 비롯한 모든 파트가 독립적으로 각자의 아리아를 부른다. 꽤 매끄럽지 않지만 강렬한 조화를 이룬다. 요나스 메카스의 레퀴엠을 이루는 영상과 사운드 조각들이 수평을 이루며 동일한 층위에서 다소 거칠게 연결된 것도 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이 거칠고 다소 성글게 엮인 조각들을 전시장에서 상영하고 연주했다면 그 효과가 더 뛰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다. 물론 블랙박스에서의 사운드는 오픈된 공간에서의 라이브 연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감각하게 한다. 감독과 함께 LP판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마치 기계적 결함이나 일시 정지 버튼에 의해 발생했을 법한 단절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한 사운드의 빈틈은 감독의 신체와 카메라에 의해 포착된 사운드로 채워진다. 잠깐의 침묵, 노인의 숨소리, 무언가를 지칭하는 목소리, 나직한 웃음소리, 자연을 향한 감탄의 언어와 같은 것들이 음소거 된 사운드를 대신한다. 이러한 음악적 구성 외에 요나스 메카스가 수많은 진혼곡 중 베르디의 ‘레퀴엠’을 선택했던 이유를 반교권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요나스 메카스가 반교권주의자라는 얘기가 아니다. 영화 레퀴엠에서 요나스 메카스는 성경 구절을 인용함과 동시에 신에게 말을 건다. 그 말들은 교회가 아닌 DV-Cam 이미 위에서 펼쳐지며, 오직 신과 감독의 말만 존재한다. 신이 인간에게 전한 말씀과 인간이 신을 향해 내뱉는 말 사이엔 어떠한 중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관객들은 백지에 기록된 신과 동일선상에서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인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 인간이란 90대의 노인이 되어도 카메라를 놓지 않은 감독 자신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양 끝에 스프로킷뿐인 길고 거친 필름 위에서 감독이 남긴 손짓과 그림자, 그리고 쉰 목소리에 의지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장황한 사변이나 일기 형식이 아니더라도 잠깐의 감탄사와 읊조림, 그리고 숨소리와 짧은 문장 하나만으로 감독의 존재감이 영화 전체에 걸쳐 드러난다. 필름의 물질성과 감독의 정체성이 고화질의 투명함으로 인해 가려진 동시대의 영화 환경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기에 가능하다. 때문에 요나스 메카스의 ‘레퀴엠’을 보는 내내 우리는 추구하고 감춰야만 완성할 수 있는 동시대 영화로부터 떨어져 잠시나마 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사진: “ Jonas Mekas REQUIEM ”, CURA. / " Jonas Mekas's "Requiem ", e-flux Criticism (© estate of Jonas Mekas) 물론 해방감은 곧 ‘지금 우리는 카메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담을 수 있을까’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영화 레퀴엠에서 동시대 전쟁과 재난의 장면들은 출판물과 TV화면으로만 제시되고, 거리에 핀 꽃과 자연물들만이 직접 촬영한 것들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습관적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세계의 참상은 리얼하고 스펙터클하게 재현될 것이고 거리에 핀 꽃과 자연물들은 짧게 등장하는 배경으로 치부되거나 편집 과정에서 지워져도 무방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매체를 통해 접한 세계와 몸으로 체험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병치시켜 위계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 스펙터클하게 재현될 참상을 그가 접한 매체의 특성 그대로 담아 그 사건의 본질에 집중하게 만든다. 감독의 카메라에 포착된 거리의 흔한 꽃무더기와 자연물을 보다 보면 우리의 몸이 실제 세계에서 어떤 경험과 체감을 놓치고 살아가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이러한 방식이 무엇에 더 집중하거나 공감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길가에 핀 꽃과 해골이 쌓여있는 지구 반대편 어딘가의 불행을 등치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몸으로 보고 듣고 감각하는 실제의 현장과 물리적으로 먼 곳으로부터의 소식과 정보가 전해지고 교환되는 방식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공감 혹은 무감각은 그러한 현장과 방식에 의해 생성되는데, 문제는 이 두 세계의 균형이 깨질 때다. 이 영화는 두 세계를 담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스펙터클에 대한 숭배와 재현 의지, 그리고 작은 것들에 대한 무시 혹은 지나친 감성을 비껴간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을 피사체 삼아도 영화의 정서는 값싼 감성에 치우치지 않는다. 끔찍한 살육과 재난을 목격했을 때 감독은 그 참상이 담긴 매체를 촬영하며 스펙터클과 재현의 의지를 상쇄시킴으로써 오히려 본질적인 공감과 애도에 주목하게 만든다. 결국 그의 영화는 끊임없이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감각하고 경험하고 있는지 되묻게 하는 것이다. 사진: “ Jonas Mekas. Requiem ”, Francesco Urbano Ragazzi (© estate of Jonas Mekas) 물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조각들은 철저히 감독이 자신의 세계로부터 이끌어낸 것이다. 그의 몸이 경험한 현장과 그가 접한 매체 속 세계로부터 포착한 것이다. 그렇기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들은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For You”란 문장을 덥썩 물어선 안 된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레퀴엠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어쩐지 90대의 노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이 습관적으로 바라보고 가치를 부여했던 것들과의 작별로 이해했다. 가령 세속의 가치에 따라 이미지의 층위를 형성하고, 세계를 말끔하고 선명한 화면에 담아내며, 권위에 기댄 말에 복종하는 예술 행위와 같은 것들에 대한 저항 의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이 영화는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결국 감독 자신을 향한 것으로 읽힌다. 필름에 담긴 의식의 조각들 또한 철저히 그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그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요나스 메카스의 레퀴엠은 결국 그가 자신의 죽음을 위해 미리 마련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평생 열망해 왔고 앞으로도 유일하게 안식할 수 있는 곳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오랜 삶만큼이나 죽음 또한 결국 자기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죽음에 대한 애도와 위로 또한 자기 의지로 받고 싶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쩐지 요나스 메카스라면 가족과 친구들이 일반적인 장례식장에 몰려와 관습적 의식에 참여해 본인을 애도하는 방식은 원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오히려 직접 마련한 재단에 손수 만든 도구를 정렬한 뒤 자신의 영혼을 그곳에 뉘여 누구든 언제나 영화를 보고 만드는 행위로 위로하길 바라지 않았을까. 결국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다 보면 그가 배치한 조각들을 맞춰보고 그 사이에서 육신이 새긴 흔적을 찾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는 순간 그가 마련한 레퀴엠에 참여하게 되었다. 무진형제(미디어 작가 그룹) l 무진형제는 3명으로 구성된 작가 그룹이다. 세간의 지배적인 가치와 믿음체계로 굳어져버린 것들을(眞) 의심하고 해체시켜(無) 동시대의 ‘인간-환경 시스템’을 재구성한다. <삼속(三俗)의 담(談)>, <궤적(櫃迹)-기술된 선인(善人)들> 등을 작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