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 감독
- 이한상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리리화, 천 옌, 이향군
[사진] <추억은 영원히>(전택이, 1960)에서 이민과 노경희 이민(李敏)은 1947년 서정규 감독의 <불멸의 밀사>(1947)의 이준 열사 역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딘 후 한중영화사 제1회작인 강춘(江椿) 감독의 16밀리 시대극 <연화(蓮花)>(홍서량, 박양실 주연, 1948)와 반공영화 <화랑도>(염매리 공연, 1951) 두 편에 출연했다. <불멸의 밀사>는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전후 시기의 독립운동의 이면을, <연화>는 조선조 제25대 왕 철종 12년에 일어난 대교육자의 분기(奮起)와 기생 도화(道花)의 비련을 그린 것이다. (『민주일보』, 1948년 6월 27일, 광고) 배역 모두 2천여 명의 응모자 중에서 선발하였다. (『대동신문』, 1948년 7월 8일) [사진] 이준 열사 역을 맡은 이민의 첫 출연작 <불멸의 열사> (사진제공: 김종원) <화랑도>는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이 헤어진 애인을 만나 반공전선에 나서는 얘기로, 촬영 중에 6.25를 만나 중단됐다가 피난지인 대구에서 완성한 것이다. 이런 내용의 특성상 <화랑도>는 개봉 후 상이군인들이 조직한 영화계몽반에 의해 남한 일대의 각 지역에서 상영되기도 (「상이군인들이 영화로 계몽운동」, 『조선일보』, 1952년 11월 13일) 했다. 그는 이렇게 일찍이 영화계에 발을 들여 놓았으나 한동안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춘향전>과 <자유부인>의 히트 전후 1953년 휴전과 함께 정부가 서울로 환도한 후에도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부산, 대구 등지에 남아 있었다. 그해 초겨울이었다. 대구의 자유극장 옆 단골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이민의 눈에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들어왔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와 <갈매기>(1948)로 유명한 이규환 감독이었다. 이민은 여종업원에게 차 한 잔을 시켜 보낸 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이 일은 결국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에 기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원의 기생 딸 성춘향(조미령 분)을 사랑하게 된 사또의 아들 이몽룡 역이었다. 이민은 연기뿐만 아니라 제작 진행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예정했던 남원 대신 촬영지로 선택한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이란 마을은 로케 장소로는 적합했으나 기계를 움직일 동력이 없었다.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가까이 있는 달성광산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행히 일이 쉽게 풀리느라 마침 그곳 광산소장이 이민의 경성제대 공과 시절 동기생이어서 전기를 끌어올 수 있었다. [사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 여배우는 조미령 이렇게 필름 길이 1만 2천자, 상영시간 2시간 15분으로 완성한 <춘향전>이 1955년 1월 16일 서울 국도극장에 개봉되자 첫 날부터 초만원을 이루었다. 관객들이 서울 변두리는 물론 인천, 수원 등지에서까지 트럭을 동원하여 단체로 몰려들 정도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50) ‘영화60년’」, 『중앙일보』, 1980년 2월 21일) 였다. 그 결과 <춘향전>은 20일 동안 10만 여명이 관람하여 당시까지 한국영화사상 최다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에 따라 이민은 여주연인 조미령과 함께 일약 국민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여세를 몰아 <막난이 비사>(김성민,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와 <애인>(홍성기, 1956), <자유부인>(한형모, 1956) 등에 기용되었다. <막난이 비사>에는 조선조의 홍문관 정오품 벼슬인 교리(郊理)로 등장했다. 진사의 외동딸(이경희)을 소실로 삼으려다 반대에 부딪치자 그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아 목을 치게 하는 악역이었다. <단종애사>에는 세종대왕에 이어 등극한 후 재위 2년 만에 어린 단종을 신하에게 부탁하고 죽은 비운의 문종대왕 역을, 김내성 원작 <애인>에는 요정마담의 딸인 여대생(노경희)을 좋아하는 청년으로 나와 아프레게르적인 끼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민에게 결정적인 돌파구를 열어준 것은 크레인 촬영을 시도한 정비석 원작 <자유부인>이었다. 가부장 중심의 유교적 인습사회에 외래문화가 들어오면서 변해 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한 대학교수 부인(오선영: 김정림 분)을 통해 보여준 이 영화에 춤으로 그 부인을 유혹하는 건달 대학생 신춘호역으로 등장했다. 그는 ‘마담 익스큐즈 미' ‘알러브유’ 따위의 영어단어를 읊조리며 능란하게 대학교수 부인의 탈선을 부추겼다. 이 영화는 1956년 6월 9일 서울 수도극장(현재의 스카라)에서 개봉되었고, <춘향전>의 흥행을 무색하게 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사진] <자유부인>의 이민과 안나영(오른쪽) 그는 잇따라 <실낙원의 별>(홍성기), <애원의 고백>(홍성기), <여성전선>(김기영), <찔레꽃>(신경균), <청실홍실>(이상 1957, 정일택) 등 5편에 이어 58년 <그 밤이 다시 오면>(노필), <꽃도 생명이 있다면>(홍일명), <낙엽>(박구),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모정>(양주남), <청춘비가>(이규환), <별만이 아는 비밀>(이선경),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촌색씨>(박영환), <흐르는 별>(김묵) 등 12편에 출연했다. 주로 신문연재소설과 연속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사진] <청춘비가>의 이민과 김아미(오른쪽) (사진제공: 김종원) <청실홍실>에는 사장 딸(엄앵란)의 구애에도 전쟁미망인(이민자)을 사랑하는 운전기사로, <그 밤이 다시 오면>에는 잡지사 여사원(이빈화)을 임신시키고 회사 돈을 훔쳐 이용하려다가 실패하자 자취를 감추는 회사원으로, <청춘비가>에는 일찍이 고아가 돼 헤어졌던 여동생(김아미)을 혈육인 줄 모르고 사랑하게 되는 기구한 화전민 출신의 오빠로, <별아 내 가슴에>에는 대학생(김동원)과 기생(주증녀)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사귀는 여대생(김지미)의 양부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모르는 출판사 사원으로, <흐르는 별>에는 아내를 두고 월남한 후 혼자 딸을 기르며 온갖 시련을 겪는 장님으로 각기 등장한다. [사진] <그 밤이 다시 오면>의 이민과 이빈화(사진제공: 김종원) 1959년에는 <가는 봄 오는 봄>(권영순), <꽃피는 시절>(최훈), <꿈이여 다시 한 번>(백호빈),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신상옥), <내 사랑 그대에게>(하한수),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동백꽃>(정일택), <동심초>(신상옥), <밤마다 꿈마다>(이사라), <별은 창 넘어로>(홍성기),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박종호), <사모님>(최훈), <아내>(김묵) <애모>(신경균),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등 27편으로 출연작이 증가된다. 태평양전쟁에 끌려갔다가 딸(전계현)을 남기고 죽는 <가는 봄 오는 봄>의 학도병, 6.25전쟁 때 작전을 수행하던 중 눈에 부상을 입고 국군병원으로 후송된 <꿈이여 다시 한번>의 육군 중위, 수절하는 전쟁미망인(이민자)을 사랑하는 <별은 창 넘어로>(홍성기)의 관상대 기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주목을 끈 것은 고아로 자란 한 여성(김지미)을 사랑하여 결혼 단계에 이르렀으나 전사했다던 그녀의 약혼자(최무룡)가 나타나면서 파국을 맞게 되는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의 미8군 소속 교포 2세 헨리 장 역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군복과 양복을 번갈아 입으며 때로는 양미간을 찌푸리는 특유의 표정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의 이민과 김지미 최훈(9편)과 홍성기 감독(8편)의 단골배우처럼 나왔던 그가 신상옥 감독의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동심초> 등 세편에 기용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미혼 여성(최은희)의 원치 않는 임신과 기혼 여성(주증녀)의 불행한 불임의 모순을 다룬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의 너그러운 약혼자, 구한말 20세의 청년 이승만에게 개화학문을 배우라고 권하는 신긍우, 전쟁미망인(최은희)을 도우려는 친구에게 차용증부터 챙기는 <동심초>의 냉정한 증권회사 사장 신동일 역할이 그것이다. [사진]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에서의 이민과 최은희 이민은 이처럼 영화계에 진출한 뒤에 가장 바쁘고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할까, 이 기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꿈이여 다시 한번>, <나는 고발한다>, <비오는 날의 오후 3시> 등 세편의 제작에 손댔다가 손실을 보기도 했다. 연극 경험 없는 명문대 출신 정상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는 법. 그의 독주는 얼마 못가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한다. 이미 <젊은 그들>(신상옥, 1955)로 주목받기 시작한 최무룡과 <피아골>(이강천, 1955)에서 두각을 나타낸 김진규의 도전으로 확고한 듯싶었던 인기의 성곽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한 조짐은 1960년대에 이르면서 뚜렷이 나타난다. 60년 한 해 동안 출연 편수가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추억은 영원히>(전택이), <투명인의 최후>(이창근),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등 10여 편으로 줄어들고 이마저도 예시한 네 편을 제외하고는 조연급에 밑도는 것이었다. <애수에 젖은 토요일>(1960)은 그동안 우리 영화가 즐겨 다뤄온 민족분단, 이산의 비극을 소재로 한 것이다. 6.25 때 헤어진 사람을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윤락가로 전락한 여자(김지미)가 죽은 줄 알았던 애인이 부상당한 군인의 모습으로 살아 돌아오면서 빚어지는 비극으로, 이민이 그 주인공 박경일 중위 역을 맡았다. <추억은 영원히>에는 6.25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정신이상자가 돼 거리에서 방황하는 여자(김지미)를 간호하는 착한 운전기사로, <투명인의 최후>에는 부족한 능력 때문에 애인을 빼앗기고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죽는 대신 투명인간으로 변해 복수를 하는 끈질긴 캐릭터로 나타난다. 이후 이민은 62년 안현철 감독의 <그리움은 가슴마다>를 비롯한 <양귀비>(최훈), <여자의 일생>(신경균), <운명의 골짜기>(전창근) 등 5편과 63년 <돈바람 님바람>(김수용), <상처받은 두 여인>(이규환) <백마고지>(김수길) 등 3편, 64년부터 66년까지 <처녀성>(홍성기, 1964), <대석굴암>(홍성기, 1965), <눈물 젖은 왕관>(하한수, 1966)을 만들고 칩거에 들어간다. [사진] <여자의 일생>의 이민과 이민자(사진제공: 김종원) 그랬던 그가 10년 만에 장미희의 데뷔작 <성춘향전>(1976, 박태원)에 이몽룡의 아버지 이진사역으로 등장하여 관심을 끌었다. 19년 전 서른다섯 살 이몽룡이 이번에는 쉰여섯 그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제작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이민은 1951년 <화랑도> 이후 4년여 동안의 공백기를 제외한 15년의 배우생활을 마쳤다. 그때까지 출연한 70여 편 가운데 <춘향전>(1955)을 비롯한 <막난이 비사>(1956), <단종애사>(1957),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 <양귀비>(1962), <대석굴암>(1965) 등 6편의 시대·역사극과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백마고지>(1963) 등 전쟁물을 제외하고는 60여 편이 넘는 작품이 멜로드라마였다. 그 후 영화계를 떠나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이민이 17년 만에 홀연히 서울에 나타났다.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이었다. 일흔 세 살 때였다. 한 도예공의 삶을 통해 장인정신을 기리는 <서편제> 유의 영화라고 했다.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는다는 이 영화의 예산은 일화 5억 엔으로 학창시절 친구였던 일본아시아문예협회 키누가와 고오이치(衣川耕日) 회장이 부담한다고 했다.(⸀‘자유부인’ 플레이보이 이민 73세에 영화 찍는 인생」, 『부산일보』, 1998년 2월 6일) 그러나 일본과 중국의 합작을 꾀한 이 계획은 얼마 못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민은 1921년 2월27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시중(李時中)이다. 삼형제중 막내로 선비들과 어울려 시조창을 즐기고 사군자 치기를 좋아했던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러나 춘천초등학교(1934년)와 춘천중학교를 졸업(1939년)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회고 (한국영상자료원 기획, 「이민」,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1』, 도서출판 이채, 2005, 272~273쪽) 에 따르면, 벽이나 전주에 걸린 일본 시세이도(資生堂) 화장품의 선전을 위해 도자기로 만든 선전용 레이또 크림이나 눈에 넣는 와카모도라는 영양제 광고를 봐뒀다가 밤에 몰래 뜯어내 고철로 팔았다고 한다. 이렇게 3년 반 동안 모은 돈이 여비가 되었다. 1940년경이었다. 동경에서 가까운 사이타마현(琦玉県)의 우라와(浦和)고등학교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1년 정도 다니다가 귀국했다. 이후 경성제국대학교(서울대 전신) 예과에 들어갔다. 그는 이 대학을 나올 무렵 길에서 발탁돼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다. 스물여덟 살 때였다. [사진] <여성전선>(김기영, 1957)에서 이민과 조미령 1950년대 중반 이후 한때 최무룡, 김진규와 함께 삼각경쟁 구도를 이룬 이민에게는 당시의 일반적인 배우와는 다른 삼유삼무(三有三無)라는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그만이 가진 세 가지 있음(三有), 즉 서울대학교(경성제대 후신)를 나온 명문대 출신이라는 점과 <춘향전>이나 <자유부인>과 같은 최다 흥행작을 일구어낸 광복 후 최초의 미국풍 댄디보이였다는 사실이다. 세 가지 없음(三無)은 연극 경험이 없는데다 본격적인 액션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고 연기 외에는 대외 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시기에 첨단적인 정장과 점퍼, 스웨터의 옷맵시로 여성들의 허영심을 자극한 대표적인 '니마이메(二枚目: 미남배우의 통칭)였다. *
정창화 (1928~ )의 < 죽음의 다섯 손가락 >(1972)은 홍콩과 한국 영화계 간에 조성된 일대 흐름이 맞물려 빚어진 시대의 산물이었다. 60년대 초에서 70년대 말까지 한홍 합작영화의 활발한 제작으로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이한상은 < 양귀비 >(1962)와 <무측천>(1963)과 같은 시대극을 한국 로케이션으로 찍었으며, 호금전은 <공산영우>(1979)와 < 산중전기 >(1979)를 해인사와 불국사, 설악산 등지에서, 장철은 <사기사>(1972)를 서울에서 촬영했다.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이 홍콩 쇼브라더스 영화사와 손잡고 다수의 한국-홍콩 합작영화를 기획해 문호를 개방하는 한편, 쉼 없이 다양한 영화를 찍어내면서 인력난에 시달리던 홍콩 영화계의 상황은 역으로 한국의 영화 인력이 홍콩 영화계에 진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 수업료 >(1940), < 자유만세 >(1946)를 만든 최인규 감독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정창화 감독은 1958년부터 홍콩영화계와 꾸준한 교류를 가졌고, 첩보영화 < 순간은 영원히 >(1966)의 홍콩 로케이션 촬영에서 쇼브라더스 사장 런런쇼의 주목을 받아 1968년부터 5년 전속계약으로 기용되어 홍콩으로 건너가 활동하게 된다. 밀수꾼을 소탕하는 내용의 데뷰작 < 최후의 유혹 >(1953), 누아르의 장르적 색채가 진한 < 노다지 >(1961), 일제강점기 학도병의 이야기를 그린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1965), 전통사극에 서부극을 끌어들여 검객물의 원형을 만든 <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 >(1968) 등, 일찌감치 한국영화 안에서 액션영화의 지평을 개척하던 정창화의 연출 성향은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무협, 권격 영화를 대량으로 양산해내던 홍콩 영화계의 필요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쇼브라더스 무협의 기법과 관습을 답습한 평작 < 아랑곡의 혈투 >(1970)와 < 래여풍 >(1971)의 시행착오를 경유한 뒤에 내놓은 <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은 정창화만의 개성을 무협영화의 역사에 각인시킨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은 왕우의 < 용호의 결투 >(1970)와 더불어 권격 영화의 유행을 일으킨 시효 격으로 꼽힌다. 그러나 영화사적인 의의에 비해 이 작품의 서사 자체는 지극히 평이하다. 제자 조지호(나열)의 재능을 아끼던 스승 송무양은 더 큰 성취를 위해 그를 상무국술관의 손금배 사부에게 보낸다. 주변의 질시를 견디며 묵묵히 수련에 정진하던 지호는 마침내 손금배의 인정을 받고 절기인 철장비법을 전수받게 된다. 함정에 빠져 손이 짓이겨지는 수난을 겪지만 역경을 극복하고 무공을 회복한 지호는 국술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다. 그러나 일본 낭인과 결탁한 상무국술관의 라이벌 백승무관의 주인 맹동산(전풍)이 지호의 두 스승을 모두 해치고, 분노한 지호는 철장비법의 위력을 발휘해 악한들에게 복수하고자 한다. 수련을 통해 고수로 거듭나는 주인공의 성장과 스승의 원수를 갚는 복수극이라는 천편일률적인 플롯과 모티브를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우직하게 답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기억될만한 컬트 걸작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연출의 차별성에서 드러난다. 장철이 슬로우 모션과 핸드헬드를 통해 유혈 낭자한 육신과 죽음의 이미지에 집중하고, 호금전이 유려한 수평 이동과 와이드 앵글로 자연과 공간, 그리고 인간에 흐르는 예민한 공기를 포착한다면, 정창화 는 광각렌즈를 중심으로 한 촬영과 컷 단위로 다듬은 편집, 명암과 색감이 두드러지는 조명 세팅으로 액션의 쾌감과 극의 분위기를 극대화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지호의 스승 송무양이 불의의 습격을 받는 도입부 액션부터 각기 다른 앵글과 사이즈의 컷을 빠르게 이어 붙여 충돌시키고, 무술 안무의 합을 도중에 건너뛰는 점프컷으로 액션의 박력과 속도감을 끌어올리는 불균질한 편집의 기교를 엿볼 수 있다. 손을 망가뜨린 적들을 떠올리며 수련에 매진하는 지호의 플래시백에서도 나무를 때리는 타격음에 맞춰 (긴장감을 자아내기 위해 기울어진 앵글의) 컷을 번갈아 몽타주 하다 국술대회 참가인원을 선발하는 다음 상황으로 점프하는 등 시퀀스의 급격한 전환을 통해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에 빠른 템포와 리듬감을 부여한다. “액션영화란 어른들의 꿈과 상상을 실현시키는 판타지라고 생각합니다”라 말한 감독 본인의 인터뷰 발언이 시사하듯, <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을 통해 만개한 정창화 식 액션 연출은 영화가 줄 수 있는 오락적 쾌감의 경험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장르 감독의 본분에 입각한 것이었다. 술집에서 벌어지는 지호와 진랑( 김기주 )의 대결에서는 술 항아리를, 마음을 고쳐먹은 진랑이 지호를 대신해 일본 낭인을 막아서는 숲속의 결투에서는 잘게 부서지는 목재 소품을, 지호가 마침내 철장비법으로 일본 낭인을 처단하는 클라이맥스에서는 부딪치자마자 무너지는 벽을 배치하는 무대 세팅으로 타격감을 부각시키는가하면, 맹인이 된 한룡이 맹동산과 그의 아들을 급습하는 장면에서는 사물의 윤곽이 간신히 드러날 정도로 공간을 어둠에 파묻은 가운데, 인물의 두 눈에 슬며시 빛을 닿게 하며 명암대비를 극단화한 조명으로 누아르적인 분위기를 빚어낸다. 국술대회의 말미에 칼에 맞고 죽어가는 손금배와 일본 낭인에 의해 잘린 진랑의 목에는 별도의 녹색 조명을 비춰 죽음의 음울함을 강조하고, 지호가 철장비법을 쓰는 순간마다 펴진 두 손에 붉은 조명을 쏴 흥분과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는 등, 비현실적이지만 감정을 자극하는 조명의 표현주의적인 활용이 돋보인다. (철장비법을 쓸 때마다 사이렌 소리처럼 울리는 음향은 퀸시 존스가 TV 시리즈 <아이언 사이드>(1967)를 위해 작곡한 시그널 트랙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저작권 개념이 없었던 당시 홍콩영화계에서 흔히 있던 사례였다.) 처음에 정창화 감독이 염두에 둔 작품의 원래 제목은 < 철장 >(鐵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화권 관객의 취향을 의식한 쇼브라더스 사장 런런쇼의 입김에 의해 홍콩에서는 < 천하제일권 >(天下第一拳)이란 제목으로 개봉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저가에 영화를 수입하려 한 신상옥 감독에 의해 한홍 합작영화로 위장되어 검열과 재편집을 거쳐 < 철인 >(鐵人)이라는 제목으로 극장에 걸리는 수난을 겪었다. 영화는 한국에선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한 채 묻혔다. 정작 액션 장인 정창화가 인정받은 건 고국이 아닌 서구 영화계에서였다. 이듬해인 1973년, 워너브러더스의 배급으로 로스앤젤레스의 차이나타운에서 소규모 개봉한 영화는 열화와 같은 반응을 얻어 확대 상영에 들어갔으며, 잠시 < 대부 >(1972)를 제치고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훗날 ‘헤모글로빈의 시인’ 쿠엔틴 타란티노가 < 킬 빌 > 2부작에서 철장비법을 구사하는 장면의 연출을 오마주하면서 영화는 다시 주목받았으며, 2005년 칸 영화제 클래식 섹션에서는 루이 말의 < 도깨비불 >(1963), 마틴 스콜세지의 < 라스트 왈츠 >(1978)와 함께 초청되었다. <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은 명실상부한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액션 영화의 기술적 숙련도가 전에 비할 수 없이 높아진 오늘의 시선에서 <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의 액션은 철 지난 시대의 유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여전히 순수한 오락영화을 구현하고자 한 열정과 장르에의 매혹, 그리고 언젠가 세련된 형태로 다시 활용될지 모를 흥미로운 연출의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한국-홍콩 합작영화가 성행했던 역사의 한 페이지에 대한 증언이자, 동시대 액션영화가 해낼 수 있는 표현의 저변을 돌파하려 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의 가치는 변함없이 남아있을 것이다.
.... 요란한 총성과 함께 출동하는 사이도 카와 기마헌병대들이 심야의 장안 거리를 뒤흔든다. 1920년대, 사이도 총독의 폭살미수사건으로 투옥된 강우규 의사를 구출하기 위하여 이성우 선생 지도하에 조직된 학생 독립단이 서대문 형무소를 폭파한 독립밀사에서 취재한 민족수난사의 한 페이지. 조국에 발붙일 길 없이 만주로 망명하는 학생 일단들의 처절한 레지스탕스가 액션 푸레이로 전개된다. 핍박받은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러브 로맨스를 겻들여 엮은 활극이지만, 전편을 관통하는 민족애와 저항의지들이 쓰라린 회상을 되살린다. 이야기는 서울을 탈출한 학생단들이 산줄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기까지, 이들을 쫓는 이리떼와도 같은 일본 헌병대들과 그들의 주구(走狗)들과의 산악혈전이 이 영화를 피로 물들인다. 리얼한 박력감을 주는 총격전과 설상(雪上)에서 전개되는 스키전이 색다른 취향. 중간에서 템포가 처지고 설명조의 컷트 구성은 미숙하지만 신인 임권택 감독은 소지를 보인다. 이러한 액션 드라마에는 특히 시간 계산과 숨 쉬는 요령이 필요. 오락도 겸하여 청소년들의 역사교재로 해롭지 않다. 동아일보, 1962년 2월 5일자. (이 글에서 현재의 표기법과 다른 것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 나는 임권택 의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가 막 개봉했을 때 한국을 느껴보고 싶다. 박정희가 일으킨 5월 16일 쿠데타가 막 성공한 이듬해. 그해 1월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고, 그 해 3월에는 윤보선씨가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증권 파동이 일어나고 그해 6월 화폐단위가 ‘환’에서 (지금의) ‘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로 통과시킨 다음 박정희 씨가 대통령 출마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런 다음 이듬해 10월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대통령직에 당선하였다) 임권택은 여러 차례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때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그해 1월 20일에 처음으로 영화법이 발효되었다. 한국영화사에 차례로 걸작이 도착하였다. 1960년에 김기영 의 < 하녀 >가, 그리고 그 이듬해 유현목 의 < 오발탄 >이 만들어졌다. 두 편의 거의 결정적인 영화. 두 편 사이에 놓여있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불안정한 긴장. 한국영화 속에서 비로소 시작된 형식의 기호들. 같은 해 이만희 가 < 주마등 >으로 데뷔하였다. 그때 한국영화의 중심에는 제국이라고 불러야 할 신필름이 있었고 신상옥 은 한국영화의 황제였다. 그는 이미 예술적으로 절정에 올랐으며 (< 꿈 >(1955년), < 어느 여대생의 고백 >(1958년), < 지옥화 >(1958년),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년)) 대중적으로도 성공하였다. (< 로맨스 빠빠 >(1960년), < 상록수 >(1961년)). 그리고 그해 < 연산군 >을 찍었다. 이 영화는 한국 사극영화의 거대한 모델이 되었다. 나는 조금만 더 1962년의 한국영화들을 호명하고 싶다. 그해 한국영화의 풍경. 신상옥 의 < 열녀문 >은 그가 끝내 거기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미조구치 겐지와 같은 예술적 비전을 지녔음을 보여주었다. 여인들의 숨결과도 같은 카메라의 선. 사건과 동선의 넘쳐나는 힘으로 가득 찬 건축 안의 구조들. 그때 집은 풍경과 뒤섞여버린다. 그 안에서 무엇보다도 비극. 그리고 다시 비극. 박상호 는 < 산색시 >를 만들었다. 한국영화사가 종종 잊어버린 이름들. 조긍하 의 < 아까시아 꽃잎 필 때 >. 최훈 의 < 양귀비 >. 누군가는 이 영화를 좋아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본 다음 무언가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유현목 의 < 아낌없이 주련다 >. 그런 다음 이만희 의 < 다이알 112를 돌려라 >. 지금 막 시작한 임권택으로부터 아주 가까이에 있었던 이름. 충무로에서 마주쳤을 때마다 아마도 느꼈을 감정들, 그리고 인상. 나는 인터뷰를 하면서 여러 차례 그 이름을 들었다. 임권택 이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찍고 있었을 때 이만희는 같은 영화사인 한흥영화사에서 <다이알 112를 돌려라>를 찍고 있었다. 같은 사무실. 같은 영화사. 우연의 일치.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만희가 힛치콕에게 끌리는 동안 임권택은 그 이름을 몸서리치게 싫어했다. 특히 < 싸이코 >. 그 대신 존 포드와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를 보면서 그 언젠가 할리우드 영화의 수준에 이르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이만희가 안토니오니의 영화에서 배우는 동안 임권택은 펠리니에게 이끌렸다. 아직 한국영화는 세계영화사의 시간 바깥에 놓여있었다. 부산에 피난 가서 보았던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의 경험을 가진 세대를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해방과 함께 한반도에 도착한 다음 한국전쟁을 거쳐 나머지 절반을 문화적으로 점령한 미국이라는 낯선 나라와 만나서 비로소 보게 된 1950년대 할리우드의 마지막 고전영화들로부터의 배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누벨바그 영화들은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다만 < 네 멋대로 해라 >가 개봉하고 그 영화는 그 어떤 한국영화 감독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 히로시마 내 사랑 >을 보지 못했다. 브레송의 <저항>은 개봉했지만 베르히만을 보지 못했다. 안토니오니의 <정사>는 개봉했지만 펠리니의 < 달콤한 인생 >은 보지 못했다. 그해 임권택 자신이 유일하게 스승이라고 부른 정창화 는 사극 < 칠공주 >를 연출하였다. 임권택은 그의 아래서 1956년 < 장화홍련전 > 제작부 일을 한 다음 이듬해 < 풍운의 궁전 >에서 소품부를 거쳐 58년 < 비련의 섬 >으로 연출부가 되었다. 그런 다음 1960년 < 햇빛 쏟아지는 벌판 >에서 조감독이 되었다. 그 후 네 편의 영화를 더 조감독을 한 다음 < 장희빈 >을 끝으로 데뷔작을 만들었다. 그는 정창화 이외의 다른 감독 아래서 연출부를 해본 적이 없다. 임권택 의 시작. 가장 첫 번째 영화. 말하자면 임권택이라는 좌표의 원점.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는 한흥영화사의 여덟 번째 영화이다. 한흥영화사는 액션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이 영화사에서 정창화가 영화를 만드는 동안 조감독 임권택을 눈 여겨 본 다음 그에게 데뷔작을 맡겼다. 말하자면 주어진 선택. 임권택은 “아마도 연출부 생활을 꽤 똘똘하게 하고 자신이 만든 예고편이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회를 주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이 시기의 한국영화는 대부분 흑백촬영의 시네마스코프였으며, <두만강아 잘 있거라>도 역시 그러하다. 시나리오와 촬영, 그리고 배우 모두 영화사가 결정하였다. “내가 데뷔 감독이니까 경험 많은 촬영이랑 스타 배우들을 붙여준 거지요. 주연인 김석훈 씨는 정창화 감독 연출부할 때부터 잘 알던 배우였구요” 종종 임권택은 자신이 영화를 연출하는 모든 방법을 정창화에게서 배웠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가 연출부를 하는 동안 정창화는 전쟁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영화를 아무리 여러 번 만들어도 자기가 만들어보지 않은 장르의 현장에서는 낯선 이방인이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임권택의 첫 영화이자 동시에 그가 경험한 첫 번째 전쟁영화이다. 물론 이 말은 다소 조심스럽게 꺼내들어야 한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라기보다는 액션활극이며, 그 중에서도 말과 총격전이 이어지는 웨스턴에 가까운 형식을 지니고 있다. 구태여 이름을 붙이자면 독립군 액션활극. 이 범주에 속한 영화들이 1960년대 말 이탈리아 스파게티 웨스턴과 만나면서 ‘만주 웨스턴’으로 잡종 장르가 되었지만 1962년은 셀지오 레오네가 이 장르의 첫 번째 영화인 < 황야의 무법자 >를 만들기 전의 일이다. 나는 아직 이 영화들을 서부극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임권택 자신도 이 영화가 서부극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 황야의 독수리 >를 설명할 때 임권택은 그 영화를 ‘사실상 서부극’이라고 불렀다) 혹은 독립군들이 만주에 도착하기 전에 이들은 아직 서부극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장르의 공간으로서의 만주. 불가능한 장르의 장소로서의 만주.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반드시 그 곳에 가겠다고 결심하는 대목에서 그냥 끝난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그들은 아직 역사 바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말하자면 아직도 살아있는 신체적 기억으로서의 역사 안의 멜랑꼴리. 해방이라는 단절. 그런 다음 한국전쟁이라는 한반도 전체의 경험. 그러나 1962년은 1945년으로부터 고작 17년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시간이다. 이때 나는 독립군이라는 역사 속의 ‘실재하는’ 인물들이 한국전쟁 이후 근대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1962년의 남한 대중들에게 어떤 ‘상상적’ 이미지로 남았을까, 를 상상해본다. 두 개의 상상 사이의 거리.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뉴멘트 벨리의 카우보이가 아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 잃어버린 조국. 대의명분이라는 비전. 그들은 누구보다도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때 1962년의 관객들은 만주에 가기 위해서 반드시 북한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불구가 되어버린 국토. 헤어진 사람들. 헤어진 시간, 저 너머. 고향이라는 호명. 그러나 지금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정교하게 설명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2시간 17분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프린트는 1시간 38분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사 속에서 사라진 39분. 물론 이 슬픔은 이 영화만의 비극은 아니다. 시나리오가 남아있긴 하지만 영화와 비교해보는 것은 오히려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나는 이 시나리오 대부분을 고쳐가면서 찍었어요. 그때는 모두들 그렇게 만들었어요. 급하게 시나리오가 나왔고, 그런 다음 감독과 어떤 의논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영화를 찍고 있을 때 작가는 이미 다른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거예요. 던져 놓으면 알아서 찍어야 하는 거지요. 그때부터 나는 시나리오를 고쳐가면서 찍는 습관이 생긴 거예요”) 나는 슬픈 마음을 안고 단지 이 영화를 느껴본 다음 남은 프린트만으로 이 영화의 기분을 막연하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영우와 경애 민사장과 경애 첫 영화를 보았을 때 나의 첫 인상. 내가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처음 보았을 때 난처해진 것은 단지 ‘사라진 39분’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일부는 아마도 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장황하고도 끝없는 사건으로 이어지고 있으면서 연속적으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 기구 절창한 이야기를 금방 요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름들을 잘 기억하실 것. 그런 다음 이야기의 선을 유심히 바라보아야 한다. 그 줄을 놓칠 때 이 영화의 질서들과 규칙들이 갑자기 흩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중으로 나눈 다음 다시 거기서 몇 개의 가닥으로 나뉘어 나간 사건들의 연쇄 망. 이야기는 두 개의 선을 따라간다. 하나는 영우의 선이다. 그는 독립군이었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홀어머니를 둔 학생이다. 그에게는 경애라는 애인이 있다. 경애는 일본군에게 독립군을 밀고하는 민사장이라는 삼촌과 살고 있다. 경애는 영우의 아이를 임신한 지 2개월이다. 그는 지금 서대문 형무소를 습격한 다음 독립군에게 합류하기 위해 떠나야 한다. 창환과 연화 연화와 현구 영우와 창환 다른 하나는 창환의 선이다. 창환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멀리 떠나있지만 서대문 형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돌아온다. 창환에게는 연화라는 아내와 아이가 있다. 연화에게는 현구라는 동생이 있는데, 그도 역시 독립군 활동을 하고 있다. 연화는 요정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녀에게 일본군 대장인 와까노가 한눈에 보고 반해서 치근덕거리기 시작한다. 영우와 창환이 같은 독립군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금방 이 두 개의 선이 하나로 모이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일단 하나로 모은 다음 이들이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두만강에서 합류하기 위해서 다시 둘로 나뉘어서 두 개의 선으로 황해도 구월산을 지나 두만강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이야기는 거기서 둘로 뻗어나가는 대신 다시 경애와 연화의 선으로 분리되어 나온다. 영우의 선으로부터 빠져나온 다음 바깥으로 이어진 선. 경애가 영우에게 빌려온 책 속에 있었던 사진을 훔쳐서 밀고한 민사장 때문에 동료와 어머니가 체포되자 영우는 경애가 배신했다고 오해하고 이별의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를 받은 경애는 민사장의 돈을 훔쳐서 영우를 찾아 나선다. 다음, 창환의 선으로부터 이어진 선. 연화는 일본군 헌병대장 와까노로부터 정보를 얻으려하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자 동생 현구와 남편 창환을 찾아서 아이와 함께 길을 나선다. 네 개의 선. 그러나 이들 선 사이의 관계를 다시 복잡하게 뒤섞는 것은 와까노의 앞잡이 노릇을 민사장이 하고 있고, 민사장은 경애를 뒤쫓으면 독립군들의 활동 본거지를 알 수 있다는 생각에 따라나설 때이다. 마치 수직으로 이어진 선을 수평으로 연결하는 것처럼 그들 사이를 가로지는 선. 그러나 이 선들은 거미줄처럼 서로 예민하게 묶여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거미줄이 그런 것처럼 무언가 하나가 그 줄을 건드리면 중심에 있는 거미에게 전달되어 신속하고 재빠르게 쇼트의 시스템 전체가 활동을 시작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이들 선 사이는 종종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나의 선이 활동하는 동안 우리는 다른 선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다. 거미는 어디에 있는가? 이 많은 인물들을 어떻게 일제히 작동시킬 수 있을까. 이 사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공명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임권택 은 이야기 안에서 방법을 찾는 대신 인물들이 속한 상황을 잘게 부순 다음 그들 사이를 교차 평행편집으로 연결해나가기 시작했다.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는 영화 전체가 마치 유일하게 거대한 교차 평행 편집이 활동하는 기계처럼 보일 정도이다. 종종 이것이 반복적으로 연결되고 둘 사이의 평행이 시간적으로 반드시 일치하지도 않지만 이 모든 선들이 하나의 장소, 두만강으로 수렴되기 시작할 때 이 씬들 사이에 놓여있는 칸막이는 점점 좁혀져오기 시작한다. 물론 시네마스코프는 쇼트를 교차하기에 유리한 프레임이 아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쇼트 대신 씬이 교차 평행편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들 사이의 교차는 서로 직접적인 대신 서로 다른 단위의 집합들이 오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우는 경애와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창환은 연화와 씬 안에서 만날 때에만 그들 사이의 감정을 교환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멀리 있는 동안 그들 자신을 전달할 어떤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평행편집은 항상 이 모든 씬이 이야기 전체의 부분 집합이며, 나머지를 상실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교차는 교집합이 아니다. 이때 잃어버린 상실을 찾아서 ‘그 모든 것을 다 가지지 못한’ 이야기가 항상 이미 선택되어진 인물들 사이로 옮겨 다닌다. 씬 사이에 이루어진 칸막이. 교차 평행편집은 언제나 이야기 안에서 분배의 계산법에 따른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서 임권택의 연출은 이 계산법에 있다. 그는 어떻게 계산을 하는가. 그 계산은 제대로 작동하는가. 그 안에서 분배는 올바로 되어있는가. 이때 시간은 이야기 속의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단서이다. 이때 이들이 그러는 동안 저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보충하고, 다른 하나가 또 다른 하나로 뻗어나간다. 그런 다음 재빨리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하나는 마치 그 사이에 그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종종 이 계산은 지나치게 단순할 때도 있고, 때로는 셈을 망설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영우가 산에서 길을 잃은 다음 산골지기 노인과 그 딸에게 보살핌을 받으면서 그 딸이 영우에게 이끌리기 시작할 때. 말하자면 거기서 뻗어나간 또 다른 선. 이때 원래의 이야기를 다시 작동시키기 위해서 이 씬 안으로 경애가 뛰어 들어오는 것은 이 얼마나 기계적인가. 도식적인 설명. 두만강에 가기 위해서 다시 교차 평행편집을 작동시켜야만 한다. 여기서 멈추면 반대편 창환의 씬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시간의 간접적 이미지에서 자기 영화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설명이 임권택의 영화가 오로지 구성의 리듬 안에 자리한 교환 장치만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이 영화의 가장 부자연스러운 장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어쩌면 모든 영화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성립시키는 순간영화는 아름다워진다. 힛치콕의 < 새 >에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새의 시선들.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둥지의 성>에서 안개 속을 걸어오는 숲.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본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던 1962년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두만강을 앞에 둔 눈 내린 계곡에서의 총격전 스펙터클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용인 스키장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가 아직 녹음실에 있을 때 기사에 따르면 “5백여 스키여를 동원했고, 5만 여발의 뇌관을 소비하는 등, 폭발사고로 엑스트라들의 치료비만도 1백만 환이 넘었다는 화제의 영화가 15일 촬영을 끝내고 목하 녹음중인 바”(조선일보 1962년 1월 18일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의 장면을 보면 5백 명에 이르는 스키 부대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른 기사에서는 치료비가 2백만 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런 문제를 따져 물을 생각이 없다. 그러나 이 장면을 분석하는 것은 (다른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차라리 더욱 더) 현재의 프린트로는 불가능하다. 이 시퀀스 전체에 이르는 대부분의 프린트가 손상되었으며, 일부 디지털 복원된 장면들은 현재 스틸 사진으로 대신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완전히 사라진 장면들이 있으며, 우리들이 지금 볼 수 있는 장면은 전체의 구성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이 장면은 아름답다. 내가 이 씬을 처음 보았을 때 그냥 그게 첫 인상이었다. 갑자기 영화는 이제까지의 이야기로부터 빠져나온 것처럼 완전히 다른 환경의 장소 속으로 들어간다. 영우와 창환, 경애, 연화, 심지어 민 사장조차 종종 그들은 숲에서 길을 잃기도 하였다. 미로에 가까운 이야기의 선. 넘나들 수 없는 칸막이들로 갇힌 것만 같은 가로막길. 끈질기게 일본군 헌병대의 추적이 이어지고 그들은 하나씩 죽어갔다. 연화의 동생이 총상 당할 때 문득 떠오르는 질문. 결국 이렇게 모두들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선이 끊어져버린 것만 같은 중단. 무엇보다도 어둠과 그림자, 실내 공간 속에서 계속해서 이어지던 거의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교차 평행편집. 그런데 마치 이야기의 침점처럼 두만강으로 모이자 이제 교환 장치의 작동은 멈추었다. 그런 다음 산은 눈부실 정도로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다. 흑백화면이 주는 전체를 차지하는 하얀 색과 부분적인 검은 색. 우리는 이 장면이 시작하기 전 눈 오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미 산과 강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다. 아니, 차라리 여기를 눈이라는 대지로 이루어진 땅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래서 마치 이 씬을 보는 순간 어떤 공간 이동이 벌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물론 이 장면이 말이 안 된다고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심지어 임권택 자신조차 이 장면을 부정한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이 장면을 눈 위에서 벌어지는 스키 부대의 액션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마지막 설원에서의 전투장면에는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다. 이 영화에 등장했던 그 모든 인물들이 모두 죽기 위해서 마치 이 장면으로 모여든 것만 같은 인상을 줄 정도이다. 악인도, 선인도, 우리 편도, 저들도, 아니, 이들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살아남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전멸의 테마.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리고 당신은 임권택 의 영화에서 이 전멸의 테마를 반복해서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에서의 이 장면은 두 번의 전투로 나누어져 있다. 독립군들은 일본군에게 쫓기면서 전투를 하지만 이들이 위기에 빠진 순간 산 저편에서 어디선가 갑자기 스키부대가 나타나 이들을 물리친다. 산 전경을 보여주는 롱 쇼트. 프레임을 가득 메우는 스키 부대. 아래서 위로 올라오는 일본군 헌병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스키 부대. 두 개의 힘의 충돌. 이 힘의 운동 방향은 이미 이 전투의 승패를 가늠 짓는다. 이들은 승리의 만세를 부른다. 그들이 얻은 승리. 하지만 잠깐 동안의 기쁨에 찬 만세. 뒤 이어 어디선가 나타난 더 많은 일본군 헌병대가 이들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한다. 두 번의 반복적인 어디선가. 그러나 반대의 방향, 더 많은 숫자의 군인들. 거의 화면 아래를 모두 채우다시피 한 숫자. 승리의 화면은 갑자기 여기서 균형을 잃고 이 승리를 불길하게 만든다. 영화의 약속. 여기에는 어떤 중재의 가능성도 없으며, 반전의 기회도 없을 것이다. 이때 이 전투는 가망 없는 전멸로 이끌린다. 이제 남은 건 필사적인 총격전뿐이다. 일단 먼저 준 다음 다시 뺏어가는 승리. 이들은 여기서 서로 죽이고 죽어간다. 우리들을 이끌었던 하나의 선 영우도 총에 맞아 죽는다. 그때 하나의 선은 거기서 끝날 것이다. 그 대신 거기서 이어지는 경애의 선이 희미하게 남는다. 가까스로 여기에 도착한 연화도 총에 맞아 죽는다, 이제 창환의 선이 하나 남았을 뿐이다. 그때 여기까지 가까스로 온 연화(와 창환)의 어린 아들의 선이 그들 사이를 겨우 이어간다. 물론 그들을 여기까지 쫓아온 일본 헌병대 대장 와까노도 죽는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조차 우리는 무언가 해결되었다는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넓은 설원의 계곡을 가득 메우는 것은 시체들뿐이다. 너무 많이 죽어서 이제는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이때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이들의 전멸에 어울리는 이미지이다. 이 절망적인 액션의 스펙터클에 대해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인간들의 피 흘리는 전투에 대해서 그저 무심한 자연의 하얀 눈이다. 그리고 흑백화면 위로 펼쳐진 더 하얀 색으로 화창한 하늘. 우리가 거기서 보는 것은 이야기의 결론이 아니다. 여기에는 독립군의 승리도 없고, 일본 헌병대의 야만에 대한 분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 모든 이야기의 선이 일제히 중단되어버렸다는 망연자실한 순간의 장면을 마주할 뿐이다. 여기서 임권택은 자기가 이제까지 이끌고 온 이야기 전체를 무효로 만들다시피 하고 있다. 말하자면 중단. 이제 살아남은 사람은 네 명 뿐이다. 창환과 경애, 그리고 창환의 어린 아들. 그런 다음 독립군 중의 그 누군가. 나는 현재 남아있는 프린트만으로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영화중의 그 어떤 선을 타고서 여기에 온 인물이 아니다. 시체들이 펼쳐진 스펙터클의 풍경. 이 풍경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표면만을 건드리고 싶다. 임권택은 거기 죽어 넘어진 시체들 속에서 그런데 왜 눈 쌓인 이 계곡의 오후는 이렇게 아름답지, 라고 내게 묻는 것만 같다. 그 풍경의 오류는 오로지 역사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뿐이다. 하얀 바탕 위의 검은 점. 수 없는 검은 점. 나는 이 스펙터클의 풍경을 볼 때마다 자꾸만 기하학적인 도면을 보는 것만 같은 인상을 받는다. 물론 임권택 이 의식하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거기서 본 것은 말레비치의 하얀 바탕 위의 검은 점이다. 그때 이제까지 그가 만든 영화들이 돌아서서 이 장면을 본 다음 물어보는 것만 같다. 혹시 그 검은 점들은 당신이 멀리서 바라보는 역사 안의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하기도 싫은) 실재 속에 남겨진 블랙홀들은 아닌가요. 그 검은 점들은 계속해서 돌아오고 또 돌아올 것이다. 임권택은 지금 막 첫 번째 영화를 만들었다. 그 해 1962년. (계속) 1962년 99분 흑백 2.35 감독 임권택 제작 한흥영화사 각본 유한철 각색 정진우 촬영 최호진 음악 박춘석 미술 원제래 편집 김희수 김석훈 영우 황해 창환 문정숙 연화 엄앵란 경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