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의 도착
- 감독
- 유준상
- 제작년도
- 2011
사진: “ 부천에서 우주 속을 걷다 뉴미디어 끝판왕 프로그램 ‘비욘드 리얼리티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아바타를 제외한 3D가 산업과 영화에서 사라진 것처럼, 새로운 영상의 미래처럼 울려 퍼지던 VR의 장밋빛 미래가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앞다퉈 VR 영화를 내세우던 영화제들은 AI가 등장하자, 이제는 AI가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꿀 것처럼 쉽게 갈아탔다. VR 영화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VR이 갖고 있는 잠재성과 미학을 아직 우리는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VR 360° 영상은 구면 전체(수평 360°, 수직 180°)를 제공하지만, HMD는 사용자가 고개를 돌리는 방향을 중심으로 장치에 따라 약 110°(수평) × 90°(수직) 안팎의 제한된 영역만 보여준다. 따라서 관객이 정면을 중심으로 머무를 때, 실제로 한 순간에 지각하는 영역은 구면 전체가 아니라 정면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시야다. 관객들은 VR 영화에서 360° 시야를 다 관람할까? YouTube VR 시청 분석에 따르면 사람들은 360° 영상에서 재생 시간의 75%를 정면 90° 안에서 보낸다고 한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정적인 360° 장면을 처음 접했을 때 관객들이 넓은 영역을 탐색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 영역으로 시선이 수렴하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했다. 360° 영상이 제공하는 시야와 관객이 실제로 사용하는 지각적 영역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360°의 공간 전체가 주어졌다고 해서 관객이 그 전체를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VR 영화 시청 시 관객은 주로 정면 영역의 요소에 집중하고, 고개를 크게 돌려야 하는 뒤쪽 영역은 덜 찾아본다. 관객이 몸을 움직여 돌아볼 때도 화면 안의 사건이나 서사가 제공하는 중심적 단서를 따라가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일부 VR 영화 제작 현장 가이드에서는 관객의 주의가 정면 중심 90° 원뿔 안에 집중되므로, 서사적 이미지는 정면 중심 90°~120°에 집중되도록 설계해야 한다고 안내한다. 360° 공간 전체를 활용하려면, 감독이 관객의 360° 시선의 이동을 설계하고 유도해야 한다. 지금까지 VR 영화 연출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의 시선을 특정 방향 중심으로 고정하거나 감독이 의도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집중해왔다. VR 영화 < 동두천 >(김진아, 2017)의 도입부, 동두천 역 앞에 배치된 360° 카메라가 롱테이크로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적하고 활기가 없어 보이는 거리, 역 앞이지만 오고 가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미군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역 앞을 지나간다. 프레임 안에 무엇을 따라가야 할지 모르겠다. 커다란 변화가 없는 화면이 계속된다. 관객의 시선을 유도하는 서사도, 명징한 피사체도 없는 화면이 지속된다. 이 지루한 화면이 VR이란 매체의 선입견과 만나면서 관객은 체험을 스스로 찾기 시작한다. 앞을 주시하던 머리와 시선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도 자극적이거나 시선을 끄는 장면이 없다. 이제는 몸도 움직인다. 회전의자에 앉은 몸이 무언가를 찾아 돌기 시작한다. 머리와 몸이 움직이고 이 시간의 지속을 함께하다 보면 화면 안 낮은 해상도를 넘어 아주 사소하고 작은 움직임과 변화들이 나타난다. 바람이 부는 것 같다. 먼지가 날리고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린다. 평소에 관심도 갖지 않은 비닐봉지가 화면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인다. 이 비닐봉지는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관객의 머리와 몸이 360° 화면 안에서 그 위치를 향하고 있지 않다면 만날 수 없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화면 안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관객의 신체가 그 방향을 향하지 않는 순간에는 현재의 지각적 이미지가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컷에서는 어딘가 강아지가 들어온다. 내 몸이 놓인 위치에 따라 우연히 등장하는 이 강아지를 처음부터 목격할 수 있고, 내 몸이 다른 위치에서 시작되었다면 강아지가 프레임 인 될 수도 있다. 화면 안 피사체의 등장과 퇴장도 우연이지만, 그 피사체가 화면 안에 등장하는 시간도 나의 신체와 만나면서 우연적으로 구성된다. 이때 발생하는 이미지는 화면 안의 피사체와 헤드셋을 쓰고 멈춰 선 나의 신체가 만나 발생시키는 몽타주다. 아주 사소한 화면 안의 변화들을 따르거나 변화를 발견하지 못해도, 컷 안의 물리적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헤드셋을 쓴 머리와 몸이 회전한다. 머리와 몸이 작은 움직임을 찾아 따라 움직이다 다음 컷으로 전환된다. VR 360°의 특성상, 관객의 머리와 몸이 자신이 향하고 있던 방향에서 다음 컷의 첫 장면을 만난다. 두 번째 컷도 360°의 화면을 담고 있지만, 컷이 이어지는 순간 관객이 현재 향하고 있는 방향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시야에서 시작된다. 이때 만들어진 두 컷 사이의 몽타주는 전통적인 2D 영화에서처럼 하나의 공간적 관계로 완전히 결정된, 감독이 계산한 몽타주가 아니다. 감독이 결정하는 것은 두 쇼트의 시간적 순서와 절단의 순간이지만, 그 절단이 일어나는 순간 관객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는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사진: “ BIFAN의 순간들 Ⅶ : 비욘드 리얼리티 Beyond Reality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시간적 절단은 감독의 것이지만, 공간적 접합은 관객의 몸에 의해 발생한다. 관객은 변화를 좇거나 멈춘 자리에서 다음 컷의 첫 이미지를 만난다. 이렇게 이어진 두 컷의 몽타주는 편집실에서 하나의 관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관객의 몸이 찾고 머문 신체의 흔적을 통해 그때마다 다르게 발생한다. 관객의 몸이 변화를 찾다가 만난 이미지와 다음 이미지의 관계가 하나의 몽타주를 만든다. 화면 안의 체험을 따라 몸이 움직이고 몸의 반응에서 다음 컷을 만난다. 첫 번째 컷과 두 번째 컷의 연결로 발생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세 번째 컷에도 같은 관객의 신체가 만드는 몽타주가 발생한다. 이러한 몽타주가 축적되면서, 하나의 작품 안에서도 관객마다 서로 다른 이미지의 연쇄가 만들어진다. 한 명의 관객이 동일한 작품을 여러 번 봐도, 서로 다른 관객들이 같은 작품을 봐도 그때마다 동일한 상영 안에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미지의 관계가 계속해서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 VR 영화가 만날 수 있는 체험이 아닐까. 감독 개인의 생각과 의도로 배치되고 읽혀야 할 영화에서 감독은 시간에 대한 선택과 공간에 대한 카메라의 배치를 결정하고, 관객은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신체를 움직이며 자신이 만나는 이미지를 구성한다. 이때 관객은 감독을 대신하여 영화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도 자신의 신체가 만나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매번 다른 영화를 발생시키며 관객이 또 다른 창작자가 되는 순간이다. 영화의 완성된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경험을 통해 매번 다른 이미지의 몽타주를 발생시키는 관객이 되는 것이다. 감독과 관객의 위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화의 한 부분을 결정하는 권한이 감독에게서 관객의 신체로 이동하는 순간이 발생한다. 감독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관객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전통적인 영화의 관계와 달리, 관객 모두가 감독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VR 영화일지 모른다. <동두천>의 도입부는 그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 낮의 공간이 밤으로 바뀌고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컷들은 그 여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카메라가 서고 관객들은 어둠 속의 골목에서 어디론가 향하는 그녀만을 바라보게 만든다. 앞선 장면에서 관객의 몸이 스스로 공간을 탐색하고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했다면, 이 장면부터는 영화가 관객의 시선이 향해야 할 방향을 강하게 지정하기 시작한다. 또 다른 창작자로서 영화를 체험하고, 자신의 신체를 통해 영화의 공간적 관계에 참여하며 각자 다른 영화를 만나던 관객들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가게 만드는 감독의 개입으로 시선은 고정되고, 몸도 묶인다. 그리고 어느 방으로 안내된다. 방 안에 카메라는 오랫동안 머문다. 하지만 첫 컷이 준 이미지와 달리 이후의 장면은 보다 강력하게 시선을 유도한다. 영화가 처음에 스스로 열어놓았던 VR 영화의 잠재성이, 하나의 강력한 의미와 서사 안으로 다시 수렴한다. 어쩌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VR은 바로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360°의 공간이 아니라, 관객의 몸이 영화의 구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비로소 발생하는 새로운 영화적 관계 속에. <열차의 도착> 중 / 사진: IMDb( 1 , 2 ) 뤼미에르 < 열차의 도착 >(루이 뤼미에르, 어거스트 뤼미에르, 1895)이 상영되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오는 기차를 처음 경험했다. 그 강렬한 체험으로 시작된 영화는 기존의 지각을 바꾸고,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첫 영화의 등장은 객석이라는 고정된 공간에 관객의 신체를 묶어 놓은 채 일어난, 강제적이며 수동적인 지각과 사유의 변화였다. 반면 VR은 관객이 몸을 구속받지 않고 능동적 신체로 맞이할 수 있는 체험이다. VR 영화는 <열차의 도착> 이후 가장 큰 체험과 사유의 변화를 품고 있다. 영화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한 지점에서 회화를 감상하는 시각이 아니라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촉각을 갖게 되었다. 그 지각의 변화는 인습적인 사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다. 감각이 바뀌면 지각이 바뀌고, 지각이 바뀌면 사유가 바뀌며, 행동과 삶이 바뀔 수 있다. 그것이 영화가 갖고 있는 사유의 능력이다. 들뢰즈는 세계가 이미지들의 체계이며, 영화는 그것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영화는 이미 도래했지만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들뢰즈는 영화가 인간적 지각을 넘어설 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지각을 만나고, 그 지각이 사유를 연다고 말한다. 그 출발점에 신체를 둔다. 『시네마 2(Cinéma II)』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내게 신체를 달라. 이것은 먼저 일상적 신체 위에 카메라를 걸쳐 놓는 것이다.” [1] 들뢰즈에게 신체는 화면 속 인물의 신체였다. VR 영화는 카메라를 관객의 신체 위에 얹는다. 헤드셋을 쓴 관객의 머리가 곧 카메라의 방향이 되고, 관객의 몸짓이 이미지와 이미지의 관계를 만든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매번 앞의 장면을 지우면서 현재의 장면을 만난다. 현재의 새로운 지각은 때로는 기억과 만나 내 안에 다른 이미지를 만든다. VR에서는 같은 영화를 봐도 관객마다 서로 다른 지각의 경로가 생긴다. 동일한 이미지의 공간 안에서 누군가는 왼쪽을 보고, 누군가는 뒤를 본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만나고, 서로 다른 영화를 경험한다. 각자의 신체를 통해 서로 다른 영화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관객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여러 지각들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며 도래한다. 들뢰즈에게 ‘민중’은 이미 존재하는 집단의 재현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집단으로 불러내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집단이다. VR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은 새로운 매체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다. 관객의 몸이 영화의 구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발생하는 새로운 영화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지각의 집단, 아직 구성되지 않은 영화적 주체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서로 다른 방향을 선택한 몸들이 하나의 시선으로 통합되지 않은 채, 같은 영화 안에 함께 있다. 어쩌면 이것이 도래하지 않은 민중의 도래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신체가 서로 다른 지각의 관계를 만들면서 하나의 작품 안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관객 모두가 창작자가 되어, 관객의 몸이 영화의 구성에 들어와 매번 다른 영화를 발생시키는 것. 어쩌면 VR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n명의 감독을 도래시키는 매체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영화를 통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민중의 도래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 [1] 질 들뢰즈, 『시네마 2(시간-이미지)』, 이정하 옮김, 시각과언어, 2005, 378쪽. More Than 라이브 액션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박홍열(촬영감독·다큐멘터리 감독) l 홍상수 감독의 < 하하하 >(2010)에서 < 밤의 해변에서 혼자 >(2016)까지 10여 작품, < 원더랜드 >(김태용, 2024),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박동훈, 2021), <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2016), < 간신 >(민규동, 2014) 등 100여 편이 넘는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현대미술 등의 촬영감독으로 활동. < 반칙왕 몽키 >(2026), < 음악만세 >(2026), < 풍경드리프팅 >(2024), <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2023),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1 , 2 ) 등 다큐멘터리 연출. 현재 《씨네21》에서 ‘박홍열의 촬영미학’ 기고 중.
“나는 영화를 보러 간다기보다는 전례 없는 시간성을 즐기기 위해 간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군. 그래서 영화관에 자주 간다고 말이야” - 장 루이 세페르,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 중 1. 영화는 처음부터 시간의 마술이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열차의 도착>을 처음으로 상영했던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시간의 마술사들이었다. 잘 알려진 일화지만 뤼미에르는 ‘움직임을 기록한다’는 의미의 시네마토그라프를 완성한 뒤, 자신의 공장(뤼미에르 형제는 카메라 부품공장을 소유한 자본가들이기도 했다) 사람들과 일상들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이내 그것을 유료 공개하였다. 뭔가 흥미로운 볼거리를 보여주겠노라고 그들은 호객했고, 호기심에 휩싸인 사람들이 1프랑의 돈을 내고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카페에 인위적 어둠을 만든 뒤, 공간 정면에 시오따 기차역 사진을 크게 영사했다. 이 순간 사람들은 속으로 ’별거 아니군. 그저 커다란 사진일 뿐이야‘라며 실망했다. 그 시대, 확인되지 않은 볼거리를 위해 1프랑의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70여 년 전(1820년대 사진 발명)에 처음 등장한 ’사진 이미지‘에 낯설지 않은 중산 계급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정지된 사진 속 이미지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화적 매혹‘의 탄생이었다. 영화사 초창기를 기록하는 자료들에 의하면 이때 뤼미에르 형제는 의도적으로 ’정지된 순간‘을 연출하였다. 익숙하다고 간주되는 것에 ’시간‘의 마술을 부여함으로써 놀라움과 매혹을 연출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 눈 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가상의 세계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한 순간을 소환한 것이었다. 지나간 시간을 현재화하는 능력, 영화는 시간을 지배하는 예술이었다. 영화 편집에 관한 다큐멘터리 <컷팅 엣지>(2004)에 인터뷰어로 등장했던 영화 감독, 롭 코헨이 했던 말이 인상적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편집할 수 있기 때문 일거에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편집하고 싶어 합니다. 나쁜 일, 지루했던 일은 잘라버리고 좋았던 것만 더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요.” 사람들이 정말로 자신의 삶에서 지루했던 일상과 나빴던 일들을 송두리째 들어내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를 통해 불가역적인 시간을 통제하고픈 욕망을 발현한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물리적 시간에 감금된 ‘평범한 인간’에게 영화는 (적어도 창작자에게) 시간 지배자의 위상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이쯤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는 오늘날 할리우드 감독들 중 가장 소란스럽고, 거창하며,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영화적 시간’에 대해 유희하는 인물이다. 늘 언제나 기대를 자극하는 멋지고 웅장한 트레일러를 선보이지만, 정작 본편인 영화는 늘 실망에 마지않는 유아적 영웅주의에서 멈춰서는, 그런 진부한 대작을 만들어낸다. < 인터스텔라 >(2014)와 < 테넷 >(2020)을 통해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병렬적인 세계의 차원과 열역학 엔트로피까지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그러나 현란한 언사와 스펙터클의 제스처 바로 뒤편에서 그의 영화들, 특히 이번 영화 <테넷>을 지탱하고 구성하는 본질적인 장치들은 팍스 아메리카를 설파했던 80년대식 하드바디 영웅주의 서사에 묶여있다. 팀 버튼의 분열적 반영웅 ‘배트맨’을 초국적 자본의 스펙터클 하드바디로 전락시킨 < 배트맨 비긴즈 >(2005)는 물론이고, 2차 대전의 애국적 영웅주의를 설파했던 <덩케르크> 그리고 이번 영화 <테넷> 역시, 미국의 CIA 요원이 탐욕스러운 구소련의 악당에 맞서 제3차 대전을 막아내는 새로운 위인 서사에 불과한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 터미네이터 >(1984)를 물리학 용어로 재각색한듯한 이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적 스펙터클로서 시간을 재구성한다. 미래의 침입과 인버전, 역행하는 시간의 언캐니한 속도감. 화려한 오페라극장에 대규모로 동원된 관객들이 순식간에 고개를 떨구며 수면으로 빠져드는 초현실주의적 모멘트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적 물질성에 입각한 세트 촬영의 지표적 이미지라 할지라도 그의 영화는 결국,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시간의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현실감을 창출하는 시간적 연쇄의 합리성으로 구성된 허구, 근대적 자본주의 권력과 질서를 인과론과 합리성의 체제 내에서 지각하고 수용케 하는 시간의 허구 말이다. 미래의 침입이라는 SF적 상상력이라면 이미 1962년, 크리스 마르케가 완성한 <환송대>의 영화적 체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포토 로망으로 호명된 이 영화는 정지된 사진 이미지의 연쇄와 단 한 순간 제시되는 움직이는 이미지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3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세계, 미래의 과학자들은 한 남자를 대상으로 시간여행을 실험한다. 그는 이미 전쟁으로 사라져버린 과거의 공간, 죽은 자들의 시간으로 침입해가고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금지된 사랑은 그를 실험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결국 그는 미래의 사도들에 의해 쫓기다 살해된다. 1958년에 공개된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에 대한 오마쥬와 병렬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시간 이미지, 그리고 그 시간을 살아갔던 남자에 대한 기억과 흔적, 죽음과 소멸에 대한 놀라운 은유로 가득 찬 이 작품은 이미 반세기 전 영화 역사에 등장해 시간에 관한 가장 매혹적인 사유와 이미지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이후 등장한 모든 영화는 <환송대>가 이미 성취한 예술적 경지 주변부를 배회할 수밖에 없다. 3. 그런데 개인적으로, 그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늘 궁금하다. 예전 사사로운 리스트에 < 덩케르크 >(2017)를 언급하면서, 그 영화를 이마무라 쇼헤이의 < 복수는 나의 것 >(1979)의 한 장면에 견주어 혹평을 했음에도 그 영화가 지닌 과감한 시간 배치의 모험은 흥미로웠다. <테넷>도 다르지 않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서사와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진부하고 보수적이지만, 그는 어쨌든 할리우드의 막강한 자본력과 인력을 동원해 첨단의 영화를 물리적으로 직접 찍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감독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장 첨예한 방식으로 그리고 동시대적 감각으로 영화를 통해 시간을 사유하고, 구축하고 그리고 압축할 수 있는 감독이기도 한 것이다. 맑스주의 학자인 데이빗 하비가 90년대 발표한 대표 저서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은 동시대 문화가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시공간을 압축하고 사유할 수 있는지에 관한 흥미롭고 정치한 논리를 선보인다. 그중 그가 분석 사례로 제시하는 < 블레이드 러너 >(1982)에서 인조인간 ‘로이’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욕망하고 동기화하는 시공간 압축의 가장 첨예한 은유로서 분석된다. 로봇에게 부여된 4년의 작동 시간, 고도록 집약된 노동 능력,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축적된 인공지능 로봇의 기억과 감정, 추억과 연민, 공포와 분노 등은 우리가 무심하게 신격화하는 용어 ‘휴머니티’를 반성할 것을 촉구한다. 즉 ‘로이’는 당대의 자본주의 경제가 지향하는 시공간 압축과 기계화된 인간 노동에 대한 욕망의 상징이자, 탁월한 SF 영화의 기념비적 캐릭터이자, 인간 삶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중층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가 흥미롭다는 것은, 달리 말해 데이빗 하비의 방식처럼(혹은 랑시에르의 방식처럼), 그의 영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문화가 집결한 그곳에서 영화적 시간을 구축하고 욕망하고, 재현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지각하고 감각하도록 강요하는지 흥미로운 것이다. 즉, 영화 제작의 최첨단에 선 그가 반영하게 될 지금 세계의 모습, 첨예한 속도전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시간에 대한 감각, 일방향적 속도를 넘어 이제 모든 차원의 시간을 다 통제하고야 말겠다는 전체주의적이고 전능주의적인 신화, 그리고 그 시간을 서사화하고 스펙터클화하는 전시주의의 욕망.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그러한 흔적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다. 4. 다소 러프한 방식으로 ‘영화적 시간’을 정의하다 보면, 2019-20년에 선보인 영화들은 꽤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에 대한 흥미로운 감각과 욕망을 드러낸다. 그중에서 가장 아쉽고 이상해 보이는 영화는 샘 멘데스의 영화 < 1917 >(2019)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경이해 마지않는 촬영 감독 로저 디킨스와 함께한 이 작품에서 그는 이냐리투 감독의 < 버드맨 >(2014)과 스탠리 큐브릭의 < 영광의 길 >(1957)에서 보여준 형식적 실험과 주제 의식을 매우 지루하고 나이브하게 모방하고 반복한다. 폭격을 막기 위한 지령을 들고 목적지까지 질주하는 병사의 시간을 추적하는 이 작품이 구사하는 카메라 워크는 이미 이냐리투 감독이 2014년, 뛰어난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벳츠키와 함께 선보였던 <버드맨>의 아류처럼 보이며, 전쟁의 불모함과 광기, 병사들에 대한 연민과 공포는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영광의 길>에서 선보인 참호전의 잔혹함과 기만성을 통렬하게 성찰했던 것에 전혀 가닿지 못한다. 과거로 향하는 시간 여행에서 눈에 띈 또 다른 영화는 켈리 레이카트의 < 퍼스트 카우 >(2019)와 폴 그린그래스의 <뉴스 오브 어 월드>이다. 이 두 편은 모두 1870년대 서부를 배경으로, 전통적인 서부 역사의 결을 거스른다. 그러나 폴 그린그래스의 영화는 자상한 백인 중년 아버지상을 대변하는 톰 행크스를 서부로 데려간 것 이외엔 아무 특이점이 없다. 반면 켈리 레이차트의 <퍼스트 카우>는 그녀의 전작 < 믹의 지름길 >(2010) 못지않게 완연히 새로운 서부의 시간과 사건을 기록한다. 서부 영화 속에서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가난하고 비루한 백인 남성과 중국계 남성. 이들이 살아가는 서부의 시간과 공간은 정복과 개척으로 포장된 승리의 서사도 아니고, 흑과 백, 문명과 야만이 이분법적으로 명확히 선을 긋는 신화적 공간도 아니다. 빈곤과 공포 속에서 오직 생존하기 위해 서부를 배회해야 했던 가련한 사람들, 그들에 대한 연민과 기억, 그리고 그들의 흔적을 상기하고자 하는 영화이다. 그 외 2019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마티 디옵 감독의 < 애틀란틱스 >(2019)는 매우 심플하지만 시선의 지형과 주체를 바꾼다는 점 그리고 현실의 시간과 초현실적 시간(죽은자의 시간)을 교차시킨다는 점에서 강렬하다. 이주 노동, 난민 등의 문제는 언제나 유럽 1세계 백인의 관점에서 서술되곤 하였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난민 문제를 포용하거나, 그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문제시하거나, 혹은 휴머니즘과 낭만적 서사를 결합하거나. 그러나 마티 디옵은 1세계의 시선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혹은 난민의 대지 바로 위에서, 그들 계급의 시선으로 ‘이주’와 ‘착취’를 묘사한다. 경제적으로 불모한 땅에 사는 젊은 청년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젊은 여성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을 청년들이 자취를 감춰버린다. 영문 몰랐던 여인들에게 들려온 소식으로는 그들 모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바다를 건너던 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들의 비통함과 부재의 흔적들. 그러던 어느 밤. 청년들이 돌아온다. 더 이상 산자가 아닌, 죽은 자의 영혼이 되어 그들은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들의 육체에 강신된다. 그리고 강신된 육체가 향하는 곳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고향의 착취적 자본가들. 바다 저편에서 죽은 자가 귀환해 그들의 원통함을 해결하는 것은 흡사 존 카펜터의 호러 < 안개 >(1980)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마티 디옵의 <애틀란티스>는 오컬트 호러라는 장르적 포뮬라나 컨벤션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정학과 계급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한다. 새로운 ‘제 3영화’적 포지션 속에서 포개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시간은 처연하면서도 인상 깊은 계급 정치학을 피력한다. 2020년, 압축된 시공간의 논리를 보다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냄으로써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은 샤디프 형제의 < 언컷 젬스 >(2019)일 것이다. 그들의 전작 < 굿타임 >(2017)에 이어 숨 가쁘게 이어지는 사건과 사운드, 대사, 움직임 등은 이번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모두의 찬사를 받았던 아담 샌들러의 연기는 곤혹과 절박, 신경증과 불안, 허세와 짜증에 관객까지 연루시키는데 여지없이 성공한다. 5. 그러나 2020년 영화 중 가장 정서적으로 공명할 수 있는 시간 이미지를 선보인 작품은 클로이 자오의 영화 < 노마드랜드 >(2020)이다. 사실, 사사로운 리스트를 제출한 이후에 접하게 된 이 영화는 매우 강렬한 하나의 이미지를 기억에 각인시킨다. 그것은 주인공 프랜시스 맥도맨드(극 중 캐릭터, 펀)가 텅 빈 사막지대를 배경으로 무심하게 서 있거나 걸어가는 옆모습을 클로즈업으로 팔로잉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유목적 삶을 선택한 노년의 여성을 따라간다. 60대 여성 ‘펀’은 낡은 자동차 한 대에 자신의 모든 짐을 싣고 1년 단위로 노동과 공동체를 찾아 이주하며 살아간다. 특별한 사건이랄 것도 묘사하지 않는 이 영화는 다만 유목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동, 얼굴, 회한, 소망 등을 가끔씩 응시할 뿐이다. 만들어진 모든 쇼트들에 유기적인 사건과 시간의 의미를 채워놓고자 했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과 이 영화가 대비되는 지점은 이 영화가 모든 쇼트들로부터 시간의 강박을 지워버리고, 특정 의미를 채우려 하거나 평가하지 않으며, 무한히 열어 놓는다는 점에 있다. 이 영화를 보고난 직후, 우연히도 읽게 된 글이 있었다. 앙드레 바쟁이 자크 타티의 영화 < 윌로씨의 휴가 >(1953)를 분석하며 썼던 평론 “윌로씨와 시간”.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윌로씨가 1년 중 10개월은 사라졌다가 7월 1일, 임시적인 시간이 형성될 때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나타남과 사라짐, 그러한 반복의 시간은 무용한 행위가 반복되는 시간이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리듬을 지닌 ‘의식의 시간’이라고 바쟁은 명명한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시간의 방향은 원인에서 결과로, 시작에서 끝으로 향해 간다. 하지만 <윌로씨의 휴가>는 이런 것들과는 반대로 나아간다. 아마도 시간은 그 점에서 이 영화의 소재가 아니라 이 영화의 목적 그 자체가 아닌가 한다.”(앙드레 바쟁, “윌로씨와 시간” 중) 바쟁은 따띠가 창출한 ‘윌로씨의 시간’에서 그가 영화 속 근대 사회 체제에 순응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 감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점에 주목한다. 영화는 윌로라는 캐릭터를 통해 근대적 시간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새로운 영화적 시간과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노마드랜드>가 감히 자크 타티의 영화에 비견될 수 있겠느냐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반복 관람한 직후, 우연히 접한 이 영화의 리듬과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속에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노동 이외에 다른 것을 갈구하지 않는 ‘펀’의 무심한 시간들과 표정은 <테넷>에서 묘사된 필사적인 그 모든 것들을 가볍게 눌러버리며, 놀라운 정서적 공명을 만들어낸다. 특정한 방향으로 질주하길 재촉하는 시간 이미지들에 대비되어 <노마드랜드>에서 프랜시스 맥도맨드의 얼굴 이미지가 선택하고 열어놓은 시간은 그 모든 시간에 대한 강박을 털어버리게끔 하는 것이다. 장 루이 세페르의 말처럼, 영화는 전례 없는 여러 시간을 체험하는 여행이다. 그 시간은 때로는 영화 창작의 주체가 치밀하고 꼼꼼하게 채워 넣은 플롯들과 서사의 시간이기도 하고, 지금 내가 들어가 관람하는 극장이 존재하는 동시대적 시간이기도 하고, 또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적인 기억을 끄집어내어 영화라는 외부적 이미지와 접촉해 만들어내는 감각 경험적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테넷>부터 <퍼스트 카우> 그리고 <노마드랜드>까지, 영화는 그 모든 다양한 시간에 대한 체험과 기억, 욕망과 불안을 모두 열어놓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영화가 구성하는 시간의 매혹이다.
1. 2015년, 뜬금없이 눈앞에 다시 나타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의 매혹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36년 만의 귀환이다. 특히 1981년에 개봉했던 < 매드 맥스 2 >와 비교하자면, 이 영화는 크게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인다. 이미 이 당시 <매드 맥스 2>는 묵시록 이후,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펼쳐내면서 당대 유행했던 사이버 펑키한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흙먼지 날리는 웨스턴의 풍경으로 되돌렸었다.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낙후할 것이며, 이성과 합리성이 아니라 동물적 생존 본능과 폭력의 강인함이 지배할 것이라는 잔혹한 비전은 당대 날것처럼 생생했다. <매드 맥스 2>는 영화의 혼종성이 성취할 수 있는 쾌감을 이미 보여준 작품이었다.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풍경으로 제시되었다. 불모한 서부의 풍경이 미래 사회의 폐허를 대체한 것이다. 보수주의가 득세했던 80년대 초의 살벌한 정치 사회(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공세)는 야만과 폭력이라는 무정부 상태와 디스토피아적 환상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폐허의 풍경을 지배하는 것은 단 하나! 속도전이었다. 지금 이 영화 속에서 당신이 보고 있는 세계가, 과거가 아니라 미래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자동차’로 대변되는 문명의 흔적뿐이었다. 굉음과 속도로 질주하는 그것은 그들의 권력과 생존의 유일한 무기이자, 사실 이 영화 <매드 맥스 2>에서 가장 중요한 스펙터클의 동인이 되는 것이다. 2015년에 귀환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는 다시금 그 지점으로 되돌아간다. 서사의 측면이나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속도전의 전략에서 이 영화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 이 영화 개봉 이후 많은 글들이 페미니즘적 요소와 대사가 필요 없는 무성 영화적 수사학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나, 과연 그러한 요소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쾌락할 수 있게 하였는지는 의문스럽다. 이 영화가 즐거웠던 것은 여성들이 연대하고 해방을 이끌어서도 아니었으며, 또한 대사가 억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성영화를 끌어들이는 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좋은 근거도 되지 못한다. 2. 최근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들 중 유독 나의 주목을 끄는 작품들이 있다. 할리우드의 대자본과 기술적 숙련도, 그리고 산업 내 작가주의적 성향을 지닌 감독들에 의해 추동되는 일련의 SF 대작 영화들 말이다. < 프로메테우스 >의 리들리 스콧, < 그래비티 >의 알폰소 쿠아론, < 인터스텔라 >의 크리스토퍼 놀런.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가능한 미래’를 재현해 왔던 < A.I. > < 우주전쟁 > < 마이너리티 리포트 >의 스티븐 스필버그. 이들과 좀 다른 위치에서 주목할만한 감독으로서는, ‘쾌락’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정치적 올바름이나 이데올로기 문제란 개의치 않는 마이클 베이, 올드한 리버럴리스트 마인드와 고전적 영화 서사를 고수하는 < 아바타 >의 제임스 캐머런,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실사(live action) 영화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이미 오래전부터 개의치 않고 작업하고 있는 < 하늘을 걷는 남자 >의 로버트 저메키스. 그리고 드디어 36년 만에 자신의 존재를 새삼 입증한 < 매드 맥스 >의 조지 밀러가 그중 한 명이다.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를 위에서 열거한 작품들 중 어느 한 지점과 유사점을 찾아야 한다면, 아마도 손쉽게 언급될 수 있는 것이 리들리 스콧의 < 프로메테우스 >일 것이다. 70년 이상의 삶을 훌쩍 살아낸 두 노장들이 할리우드 내에서 여전히 대규모 예산의 SF영화들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할리우드 시스템의 노련함과 영악함에 경탄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감독은 이제는 ‘아날로그’로 치부되는 이미지의 ‘물질성’에 천착하는 감독들이다. 흔히 ‘실재의 힘’ 또는 ‘지표(index)의 힘’(퍼스와 마노비치의 개념으로서)이라고 부를법한 그들의 영화적 스펙터클의 공통점은, 영화란 여전히 ‘그리는 것’이 아니라 ‘찍는 것’이라는 데에 방점을 둔다는 점이다. 70년대부터 영화계에 적용되기 시작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훨씬 더 급진적으로 영화계 전반을 대체해가기 시작했다. 필름의 역사로 대변되는 영화의 프로-필르믹한 속성(실재를 기록-촬영한 것)은 디지털카메라와 제반 기술의 변화로 더 이상 ‘찍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에 기반한 ‘그리는’ 작업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캐머런 감독의 판도라 행성도, < 스타워즈 >의 우주공간도,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도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적 실체일 뿐이다(이런 점에서 애니메이션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 프로메테우스 >와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두 노장들은 여전히 영화적 이미지를 ‘찍는’ 행위에서 창조하고자 한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 실재하는 대상이 발휘하는 물질적 크기와 중력의 힘을 믿는다. 그 묵직한 존재감이 카메라를 통해 포착되면 관객에게 이미지와 시각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그들은 증명한다. (< 인셉션 > < 인터스텔라 >의 크리스토퍼 놀런도 대부분 실제 이미지를 찍는다) 그리고 시네필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그 긴장이 여느 그려진 세계들과는 차원이 다른 체험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간혹 의구심도 생겨난다. 괴력의 영화적 체험을 제공했던 <프로메테우스>나 < 매드 맥스 >의 힘은 정말 ‘실재의 힘’, ‘찍는’ 영화적 힘에서 생겨난 것일까? <인톨러런스>(위) <카리비아>(아래) 3. 폴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 중, “영화, 그것은 ‘나는 본다’가 아니라 ‘나는 난다’이다”라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비릴리오는 비행술과 영화가 19세기 말,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미래파의 속도와 운동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영화적 비전과 유사한지, 무엇보다도 전쟁과 비행과 시각 사이의 접합으로서 항공투시법의 순간성과 ‘질주하는 관찰’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특히 이를 설명하는 중에 D.W 그리피스의 좌절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피스가 < 인톨러런스 >라는 작품으로 위대한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을 무렵, 뒤늦게 미국에서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 지오바니 파스트로네의 1914년 작 < 카비리아 >를 보고 의기소침해진다. 그 영화에 비하면 자신의 영화가 너무 뒤처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비리아>는 “기술효과와 시점 촬영의 역동적 완벽성을 높이기 위해 시나리오의 내러티브적 특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작품이었다. 파스트로네는 3차원적 공간에 집착하면서, 카메라를 지속적으로 움직여 시각적 구도를 분리함으로써 깊이의 환상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고안한 이동 촬영기(카렐로)를 사용하고 남용하면서, 카메라가 사물의 크기와 차원을 조작하고 위조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전쟁과 영화, 60-62p) 나에게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영화가 창조하는 시간과 운동. 그리고 속도의 문제. 이러한 키워드는 위에서 언급한 최근 할리우드 특수 장르 영화의 디지털 미학으로서 주목받는 지점과 다시금 연결된다. < 그래비티 >의 탈육화된 롱테이크 쇼트와 유동적 프레이밍, 이냐리투가 < 버드맨 >에서 위장된 롱테이크를 통해 만들어내는 공간의 통제와 시간의 재창조, < 인터스텔라 >에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병렬하거나 중첩된 어떤 것으로 간주되는 시간적 디제시스, 그리고 이 영화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제시되는 속도와 시간. < 매드 맥스 >에서의 시간 역시 여러 층위로 구성된다. 일단 두 시간에 달하는 러닝 타임으로서의 시간, 영화적 디제시스에서 제시되는 비확정된 미래사회-포스트 묵시록적 세계의 시간, 그리고 각 쇼트가 각자의 자율성(고속과 저속 촬영 등)을 통해 획득하는 파편화되고 분리된 시간. 그런데 이 모든 시간에 대한 창조와 감각은 하나의 목표로 집중된다. 그것은 ‘속도’라는 개념이다. 다시 비릴리오로 돌아가자면, 그는 영화가 사진과 다른 지점을 카메라의 운동이 만들어내는 시점의 유동성에서 읽어낸다. “영화에서 가짜인 것은 원근법의 효과가 아니라, 깊이 그 자체이며, 투사된 공간의 시간 거리다. 여기서 속도는 이미지의 본원적 위대함으로써 나타나며, 깊이의 근원으로서 나타난다” <제너럴>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기계 4.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를 초창기 영화와 연결짓는 지점은 대사의 억제가 아니라 이 영화가 온전히 영화라는 매체의 시간체험(속도체험)을 목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초창기 영화연구에서 제기된 일명 ‘매혹의 시네마’라는 개념은 오늘날 디지털로 재구성된 영화 전략의 주요 수사학이기도 하다. 초창기 영화 관객들에게 영화가 제공했던 것은 서사나 주제의식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의 새로운 형식 그 자체였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매체-시각 ‘체험’, 그리고 그 체험의 핵심에는 영화가 현실의 속도와는 대비되는 새로운 속도를 구성하고 질주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 열차 체험이 근대적 시각 경험의 혁명이었던 것처럼, 영화 역시 <열차의 도착>과 함께 관객들에게 도착했다.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라프 상영관에서 관객들이 정면으로 다가오는 열차에 놀라 뒤로 도망쳤다는 그 유명한 일화는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대 관객들 역시 자신들이 보는 것이 환영이고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놀란 것은 이미지의 사실성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지각하는 이미지 매체의 낯섦이었다. 낯선 이미지 형식이 제공하는 두려움과 경이. 그것이 근대의 새로운 ‘경험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초창기 영화는, 할리우드가 영화를 서사적 체계로 표준화하기 이전, 지각과 경험의 새로운 ‘형식 그 자체’로서 소구되었다. 이 형식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구성하는 경이로운 매체였다. 버스터 키튼의 < 셜록 주니어 >에서, 꿈을 꾸는 영사기사가 스크린 내부의 세계로 들어가 경험하게 되는 시공간의 불가해 한 전환능력은 초기 영화적 매혹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어쩌면 버스터 키튼이 < 제너럴 >에서 당대의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증기기차의 육중한 무게와 속도감, 무엇보다도 그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인간의 지배능력은 2015년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가 취하고자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경험하는 영화: <그래비티>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하늘을 걷는 남자> 5. < 제너럴 >에서 버스터 키튼은 질주하는 증기 기관차를 빈번하게 부감의 롱숏으로 제시한다. 이 거대한 기계와 그것을 담아내는 공중에서의 롱숏은 관객에게 이 모든 시각적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부여한다.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영화의 많은 쇼트들은 나미비아 사막을 조망하는 공중 쇼트로 구성된다. 미래사회의 폐허를 증명하는 쇼트들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관객에게 쇼트-이미지에 대한 지배의 위치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지배에 대한 감각은 초기 영화에서 골똘했던 ‘경험’의 사실주의와 연결된다. 즉 자신이 보고 있는 이미지가 가짜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허구적 이미지를 진짜 경험으로 쾌락하는 이중적 인식의 문제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전략. 영화라는 매체를 진짜 경험처럼 느끼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매체의 흔적 자체를 지워야 한다. 매체의 새로운 형식을 쾌락하면서도 매체 자체를 지우는 일, 즉 ‘비매개적 매체’의 환각-가상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최근 디지털 시네마의 최전선에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주력하는 것은 서사의 촘촘함이 아니라, 거대한 스펙터클의 속도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일이다. < 그래비티 >에서 한없이 지속되는 공중회전의 순환이나,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단순하게 반복하는 추적의 스펙터클과 카니발적 회전운동을 구성하는 쇼트들에는 서사적 요소가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메키스 감독의 <하늘을 걷는 남자>의 후반부, 오로지 텅 빈 공간을 오가는 행위 말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에 대해 관객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과 결국은 같은 것이다. <그래비티>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가속화된 시간에 대한 지배를 제공한다면, <하늘을 걷는 남자>는 위태롭게 한발 한 발 내딛는, 지연된 시간의 감각을 제공한다(영화의 후반부를 지배하는 이 시퀀스들은 두 개의 경험적 위치를 제공하는데 하나는 줄 위를 걷는 남자의 주관적 시선으로 관객을 연루시키는 자리이며, 다른 하나는 빌딩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관람객들의 자리이다. 극장의 관객은 두 자리의 시선을 교차하며 3D 체험의 미장센으로 극대화된 영화적 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속도가 어찌하든 이러한 영화들은 모두 영화적 시간성을 영화의 비매개적 경험의 핵심 장치로서 구축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오인한다. 영화, 그것은 ‘내가 본다’가 아니라 ‘내가 경험한다’라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비릴리오의 말을 살짝 비틀자면, ‘난다’라는 개념은 ‘경험’의 자리를 관객에게 전지적으로 제공하는 주요한 쇼트들이다. 물리적 현실에서 발생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며, 쇼트와 프레이밍의 새로운 자리를 지배하는 자리이다. 2015년 첨단의 전략으로 무장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는 결국 초창기 영화에 해당하는 < 제너럴 >과 유사한 쇼트의 시간 감각에 집중한다. 버스터 키튼은(존 포드 역시 그랬던 것처럼) 남북전쟁이 한창인 광대한 공간들 사이를 통과하는 기차의 물질적 거대함과 속도를 강화하기 위해 개별 쇼트들의 속도를 전략적으로 달리한다. 즉 빨리 감는 방법으로 대상의 긴박감을 배가하는 것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워보이들을 소개하는 쇼트들은 자동차들의 질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속도를 조작한다. 마치 다른 종류의 인류를 목격하는 듯한 엑조티즘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철저하게 전쟁기계로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후 이 영화는 질주의 숙명을 위해 내달린다. 육중한 기계들이 자신들의 물질성을 증명하듯, 폐허의 사막을 모래바람과 함께 질주하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폭풍 속 자기장 속으로 질주한다. 거대한 폭발들과 그 순간 누군가의 시점인지 모를 상태로 제시되는 파편화된 쇼트들 (오로지 폭발의 외양을 가장 스펙터클하게 제시할 수 위치에서 구성된 쇼트들)은 이미지의 지배적 위치를 보장하기 위해 주로 공중 부감 쇼트와 롱숏들로 구성된다. 이 순간 관객들이 체험하는 영화적 속도는 일명 ‘라이딩 영화’라 불리는 체험 영화로서 구성된다. (실제로 1950년대, 미국에서 영화산업이 위축되자, 산업은 TV와 다른 영화적 체험을 강조하기 위한 거대한 스펙터클 구성에 골몰한다. 이때 등장한 것이 3D의 광범위한 활용, 와이드 스크린,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네라마나 아이맥스와 같은 그 어떤 매체도 제시할 수 없었던 거대한 크기의 제공이었다. 특히 시네라마나 아이맥스는 서사가 아니라 주로 공중에서 촬영한 나이아가라 폭포나 롤러코스터 같은 이미지들을 롱테이크로 포착해 관객들로 하여금 체험을 하는 듯한, 라이딩 영화 경험을 제공하였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6. 2015년,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서사를 배제하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거의 유아적 수준의 지능만 있다면 이해하고도 남을 스토리와 캐릭터가 제시되고 영화의 대부분은 거대한 ‘스펙터클’로 구축된다. 이 스펙터클이 가 닿고자 하는 끝점에는 롱테이크 전략(탈육화된 시선의 전능성과 지배의 감각) 혹은 극단적 쇼트 분할(주로 극사실주의에 기반한 클로즈업 쇼트들)로 제시되는 ‘영화적 체험’의 쾌락이 자리한다. 영화는 백 년 이상의 역사적 서클을 한 바퀴 순환하고 결국 초창기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테크놀로지 매체가 구성할 수 있는 형식적 쾌락으로 되돌아왔다(매혹의 시네마). 디지털을 동원한 할리우드 영화들이 가 닿고자 하는 것은 결국 3D와 이미지의 극사실주의(라이브 액션과 CG의 구분이 불가할 정도의 사실주의)를 통해 비매개의 환상을 획득하는 영화적 체험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영화의 최전선일까? 초창기 영화가 그랬고, 50년대 극장의 위기와 함께 찾아왔던 영화체험의 극대화가 그랬듯, 지금 영화도 어떤 전환점(디지털의 광범위한 확장과 산업 시스템의 전환,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매체 시대에 반복되는 극장의 위기)을 돌파하는 하나의 방법처럼 보인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이 강조하는 테크놀로지 그 자체의 경이로움과 매혹에 탐구하는 역사적 순환의 한 국면 말이다. 어쨌거나 산업이 추동했던 영화 미학과 매혹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된다. 초창기 영화나 지금 영화나 그것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영화는 운동이며, 질주이며, 그래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경험하는 매혹의 스펙터클이라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