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연기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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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63개
정확도 순 필터
영화정보
더 그레이트 스톤 페이스
- 감독
- 베논 P. 베커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버스터 키튼, 해리 모간, 르네 아도르, 로스코에 '패티' 알버클, 필리스 하버
투박하고 선 굵은 연기자 영화배우 신영균
- 감독
- 박상홍, 양창주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이봉준, 김기덕, 김수용, 김정훈, 윤일봉, 전계현, 조희문, 한갑진
수집자료
영화인 다큐 <신영균 편> [Master Dup.02]
- 매체규격
- Digi-Betacam
- 상영시간
- —
- 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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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관위치
- —
영화인 다큐 <신영균 편> [소스01]
- 매체규격
- Betacam SP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영화인 다큐 <신영균 편> [소스03]
- 매체규격
- Betacam SP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영화 연기라는 예술 ①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기사/스크랩
- 보관위치
- —
영화 연기란 무엇인가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기사/스크랩
- 보관위치
- —
영화 연기라는 예술 ④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기사/스크랩
- 보관위치
- —
제26회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영화연기]
- 매체유형
- 트로피/상패/상장
73' 스타의밤 기념 트로피
- 매체유형
- 트로피/상패/상장
1965 대일영화상 특별상 희극연기상
- 매체유형
- 트로피/상패/상장
콘텐츠
은막에 등용된 첫 신극배우 김동원
[사진]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에 출연한 김동원, 오른쪽은 배우 신성일 구경꾼들 폭소 자아낸 <밤의 태양>의 야외 촬영 1948년 밀수 근절을 위한 수도청 후원의 정책 홍보영화 <밤의 태양>(박기채 감독)에 출연한 김동원(金東園)은 신극배우로서 은막에 진출한 첫 사례가 된다. 그동안 극단 황금좌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영화에 출연한 황철, 심영 등 해방 전 신파배우들과는 달리 그는 신극을 지향한 극예술협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역은 최은희, 조연으로 전택이, 한은진 등이 합류했다. 그는 영화가 연극과 장르는 달라도 연기의 이치는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 서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관된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 무대 연기와는 달리 감독의 콘티에 따라 진행되는 토막 촬영이어서 감정을 잡지가 쉽지 않았다. 거리에서 교통사고로 쓰러진 애인(최은희)을 안아 일으키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긴장한 나머지 여자를 안고일어서다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구경꾼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음은 물론이다. 그의 첫 출연은 이렇게 ‘실망스럽게’ (김동원, 『미수의 커튼콜: 나의 예술과 삶』, 태학사, 2003, 144~145쪽) 끝났다. <밤의 태양>에 출연한 후 다시는 외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김동원이 문화영화 <코리아>(신상옥, 1954)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로부터 6년 만이었다. 명승지와 그곳에 담긴 일화를 소개하는 이 영화에서 그는 남원을 무대로 전개되는 <춘향전>의 이몽룡 역할을 맡아. 춘향 역인 최은희와 다시 호흡을 맞추게 된다. 그사이 그는 악몽 같은 ‘6,25 동란’을 겪었다. 극단 신협이 앙코르 공연으로 마련한 번역극 <뇌우(雷雨)>(부민관)가 끝난 지 이틀 만이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종로구 필운동 처가에서 숨어 있다가 붙들려 한밤중에 연극인 일행과 함께 북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임박한 때였다. 그러나 다행히 평양을 지나 대동강 중류 연안의 순천지역에 이르렀을 때 유엔군과 함께 진격해온 국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다. (김동원, 앞의 책, 173~180) <자유부인> 이후 형성된 신사풍의 캐릭터 김동원이 관객들의 시선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부터였다. 1954년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정비석의 서울신문 연재소설(215회) 『자유부인』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 양품점 주인 안태석 역이 주어졌다. 검열 당시 그가 유부녀 오선영을 끌어안은 포옹 장면과 그녀가 이웃청년 신춘호(이민)와 가진 키스 장면이 한국의 도덕 기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상영이 보류될 위기 (“키스 장면이 말썽, <자유부인>도 상영 불허”, 『동아일보』, 1956.6.9) 를 맞기도 했으나 수도극장에 개봉되면서 15일간 15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안태석 역할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영화평론가 이봉래는 ‘완전한 미스캐스트’라고 전제하고 “그 신파조의 대사와 움직임이 없는 생경한 연기는 이분이 어떻게 연기를 한 분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근래의 쾌작, 영화 ‘자유부인’”, 『한국일보』, 1956.6.7)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원은 이 영화의 성공과 함께 대중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런 후광 덕인지 그는 잇따라 같은 해에 김소동, 김한일 형제 감독에 의해 각기 만들어진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1956)와 <여성의 적>(1956)에 출연하게 된다. [사진]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 출연한 김동원, 상대역은 여주인공 오선영을 맡은 배우 김정림 이후 그는 홍성기 감독의 <실낙원의 별>(1957)을 비롯한 <장미는 슬프다>(박상호, 1958),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1958), <한말 풍운과 민충정공>(남홍일, 윤봉춘, 1959)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1959), <연산군>(신상옥, 1961), <유정>(김수용, 1966), <엘레지의 여왕>(한형모, 1967),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엄마 결혼식>(조문진, 1973) 등 160여 편에 캐스팅 된다. 이 가운데 주연급이 ‘영화연기로서의 이행을 확실히 실증 ’(유한철, “57년 영화계 총평”, 『조선일보』, 1957.12.26) 한 <실낙원의 별>(소설가 역) 등 60편에 이른다. 1950년대 중후반 김동원은 그동안 연극배우로서 누려온 정상의 위상에 버금하는 인기를 누렸다. 이 사실은 당시 월간 대중지 《희망》이 독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현역 남녀배우 인기투표’ 결과 (“제2회 배우 인기투표, 제1위에 남 김동원, 여 조미령”, 『조선일보』, 1957.8.3) 가 말해 준다. 그는 2위의 전택이, 3위의 최무룡을 제치고 대중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로 선택받았다. 그동안 그는 왕(<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연산군>)이거나, 회사 사장(<장미는 슬프다>), 독립운동가(<별아 내 가슴에>), 충신(<한말풍운과 민충정공>,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대학교수(<낭만열차>(박상호, 1959), <일월>(이성구, 1967)) 소설가(<실낙원의 별>, <장군의 수염>), 초등학교 교장(<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 등 악역과는 거리가 먼 점잖은 신사풍의 인물들을 만들어 내었다. [사진] <장미는 슬프다>(박상호, 1958)에 출연한 김동원, 상대역은 여배우 김지미(사진제공: 김종원) 일본 유학 시절의 단역 출연 김동원은 1916년 11월 14일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양화점을 경영하는 김경순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혁(東爀)이 본명이었으나 해방이 되는 해 11월 <검찰관> 공연 때부터 획이 많고 딱딱한 본명 대신 대중들이 알기 쉽게 평소 좋아한 작가 이광수의 아호 ‘춘원’에서 원(園)자를 따서 새로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개성제일공립보통학교 4학년이 되자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자 배제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 후 처음 유진 오닐의 〈고래〉로 연극무대에 섰다. 부풀어 오른 그의 ‘대배우로의 야망’은 결국 일본대학 예술과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유학시절 그는 조선유학생들끼리 동경학생예술좌라는 연극 서클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일생에 연극의 동반자가 된 이해랑을 만나게 된다. [사진] <실낙원의 별>(홍성기, 1957)의 한 장면, 왼쪽이 여배우 주증녀, 오른쪽이 노경희(사진제공: 김종원) 이 무렵 그는 쇼치쿠(松竹) 영화사의 연기자 모집에 응모하여 8개월 동안 연수를 받고 ‘얼굴도 보이지 않는 단역’ 몇 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김동원, 앞의 책, 70쪽) 그러나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결국 1939년 5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에 오른다. 이후 그는 신협 등에서 활약하며 국내 최초의 <햄릿>(1951)에 출연, ‘한국의 로렌스 올리비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정확한 발성과 화술로 중후한 연기를 보여줬던 김동원은 2006년 5월 13일 아흔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초이스]나의 연기 워크샵
감정의 탐구라는 점에서 연기는 언제나 보다 더 알고 싶은 미지의 영역이다. 연기는 자기감정을 영민하게 쓸 줄 아는 배우가 상대 배우의 감정과 맞부딪히길 거듭하면서도 관객의 견고한 감정의 문까지 두드려야 하는 작업일 거라 짐작한다. 연기의 메커니즘과 감정의 메커니즘이 꽤 너른 교집합을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가장 극적이고 압축적으로 감정을 쓰는 일인 만큼 배우의 이 작업은 상당한 감정노동이기도 하다.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안선경 감독의 < 나의 연기 워크샵 >은 이런 내 궁금증을 자극한 작품이었다. <나의 연기 워크샵>은 영화의 형식 자체가 영화 속 ‘연기 워크샵’의 커리큘럼과 부합한다. 영화는 총 4장으로 구성됐고 영화 속 워크샵을 따라 진행되며 각 장이 마무리되면 영화도 중간중간 일단락을 맺는 식이다. 영화 속 연기 워크샵에 참여한 이들은 또래인 헌(이관헌), 은(김강은), 준( 성호준 ), 경(서원경)과 이들에게 연기를 지도하는 미래(김소희)다. 이들은 한 달 동안 몸의 긴장을 푸는 연기의 기초 훈련에서부터 인물을 창조하고 장면을 만드는 연기 워크샵의 전 과정을 경험한다. <나의 연기 워크샵>은 현실과 영화 사이의 장벽이 지극히 낮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한 영화다. 영화의 출발부터가 그렇다. 2011년부터 영화연기 교실을 직접 운영해오고 있는 안선경 감독은 2014년 이 수업에 참석한 이관헌 배우를 보며 이번 영화의 모티프를 얻었다. 자기 속내를 도통 드러내지 않는 이 배우가 수업을 거듭하면서 아주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에서 감독은 연기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뿐 아니라 영화적 이야기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감독의 전작인 < 파스카 >에 출연한 성호준을 제외하면 <나의 연기 워크샵> 속 워크샵에 참여한 이들은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아마추어 배우들이다. 이들과 감독은 <나의 연기 워크샵> 이전부터 <나의 연기 워크샵> 속 워크샵을 이어왔고 그 연장선에서 ‘영화’ <나의 연기 워크샵>을 완성한 것이다. 성글게 짜인 연기 스타터들의 연기를 이어 붙여주고 영화의 중심을 잡아나가는 건 미래 역의 배우 김소희 다. 연출가 이윤택에 이어 연희단거리패를 이끄는 핵심 배우다. 미래가 전하는 연기에 대한 말들은 곧 배우 김소희의 연기론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한 예로 워크샵의 1장 ‘균형과 교감’에서 미래는 ‘교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교감이란 널 완전히 맡겨버리는 것이 아니야. 상대를 완전히 믿으면서도 네가 완전히 있어야 교감할 수 있어.” 2장 ‘긴장과 두려움’에서는 “연기의 시작은 자기에서부터일 수 있으나 결국 연기를 계속하게 하는 힘은 (그 사람의 연기를 보고 싶어 하는) 남들에게 있다”는 유의 말도 잊지 않는다. 미래의 이런 가이드는 연기의 세계를 먼저 체험한 선배로서 들려주는 그럴듯한 조언으로 머물지 않는다. 워크샵 참여자들이 연기뿐 아니라 각자가 처한 생활상의 난처함 앞에서 주춤할 때 슬쩍슬쩍 ‘이쪽으로’라고 손짓하듯 미래의 말들을 삽입해둔다. 미래가 헌에게 “연기는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살짝 감정을 들켜주는 일이야. 그런데 너는 들키지 않는 기술을 너무 많이 갖고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은 헌의 연기뿐 아니라 헌이라는 사람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 말이다. 영화의 3장에 이르면 헌, 은, 준, 경은 미래가 준 ‘현의 일기’를 받아들게 된다. 현이 마주한 최초의 폭력과 고통에 대한 글이다. 그 일기를 살폈을 헌, 은, 준, 경은 처음으로 다 함께 마주 앉아 밥을 해 먹고 둥글게 원을 그리고 또 한 번 앉아 각자의 과거 한때와 현에 대한 저마다의 해석을 붙인다. 이후 이들은 그들이 이해한 현을 연기해 보인다. < 나의 연기 워크샵 >은 그런 면에서 ‘연기하기’의 체험적 학습을 옮겨둔 것이자 헌, 은, 준, 경 (혹은 이제 막 영화 연기를 시작하려는 영화 밖 네 배우들까지)의 감정 교육의 기록이기도 하다.
[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이경희 - 배우 - 눈물과 천사표의 페르소나
한국여배우사를 훑어볼 때 '착한 여자 콤플렉스', '천사표 콤플렉스'로 관객들의 눈물주머니를 터뜨려 놓은 배우들이 있었다. 그 이름은 '눈물의 여왕'이라고 불리워졌던 전옥 을 필두로 김연실 , 김소영 , 문예봉 , 유계선 , 김신재 , 이경희 , 고은아 , 전계현 , 문희 등 기라성 같은 명성을 떨친 여배우들이었다. 이들 여배우들 중에서도 특히 '눈물과 천사표의 페르소나'로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준 여배우가 전옥에 이어 '제2의 눈물의 여왕'으로 알려진 이경희(李璟姬)였다. 이경희 는 1932년 9월 29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한성여고 졸업 수 한때 레코드가수 및 악극단에서 활동하다가 영화연기자로는 1955년 김성민 감독의 < 망나니 비사 >로 데뷔하였다. 이 영화에서 이경희는 전택이 , 노경희 와 트리오로 공연했다. 이경희는 어린 소년시절부터 재학 당시 서울방송국에 출연하는 기회도 자주 가졌으며 졸업 후 레코드사의 요청을 받아 <서울의 거리>, <서울 부기> 등의 히트곡을 취힙하기도 했다. 그 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 그곳에서 악극단 <희망>에 입단하여 <루루태자>, <라 콤파르시타>, <분홍치마>. <클레오파트라> 등의 연극에 출연하였다. 그녀가 애수에 젖은 음감으로 <라 콤파르시타>를 불러 젖힐 때 관객들은 주저없이 '순정의 가희', '눈물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던 것이다. 이경희 의 데뷔작 < 망나니 비사 >에 따른 에피소드(<여성영화인사전>69쪽 이경희.2001년 도서출판 소도)를 살펴 보자. 55년 서울 수복 후 여배우를 물색하던 김성민 감독은 이경희가 적역이라는 조언을 듣고 당시 국도극장에서 황해 등과 <님의 품에 안기리>라는 연극을 하고 있던 그에게 찾아봤다. 노경희 , 전택이 , 이민 등 당대의 빅 스타들과 함께 <망나니 비사>에 출연하게 된 이경희는 정조을 지키려던 자신 때문에 모함에 빠지게 된 아버지와, 본의 아니게 아버지의 목을 쳤지만 자신을 사랑하게 된 망나니 ''먹''(전택이)의 죽음까지 묵묵히 지켜보아야 하는 비운의 여인 ''채''로 분했다. 장옷를 뒤집어쓰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채''의 모습은 너무나 단아해서 잡시 발성영화에 잘못 캐스팅된 무성영화의 슬픈 페르소나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이 영화 이후 청순가련한 비극의 히로인은 이경희 에게 일종의 숙명처럼 고착되었다. 영화 < 망나니 비사 >에서 여주인공 '채'로 분한 이경희 와 역시 여주인공 '달'로 분한 노경희 는 양반집 규수(전자)대 술집 작부라는 상반된 신분의 여인으로 등장하였다. -어느 고을의 교리( 이민 )가 그 고을 진사의 딸 '채'( 이경희 )를 좋아한다. 그러나 진사는 자기 딸을 교리의 소실로 들여보내려 하지 않았다. 교리는 갖은 모함을 다해서 진사를 역적으로 몰고 그의 딸을 차지하려 했다. 그랬지만 딸은 도망을 쳤다. 그 딸이 도망친 곳은 바로 망나니인 '먹'( 전택이 )이네 집. '먹'은 그 딸을 숨겨주었다. 그것을 인연으로 망나니 '먹'은 진사딸 '채'를 짝사랑하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눈치챈 술집작부인 달은 사랑하는 '먹'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쓴다. - 이른바 삼각형 연애가 벌어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이경희 가 청순가련형의 여인상을 연기한 반면 노경희는 특유의 빈정거림으로 '먹'을 다루는 능동적인 하층민 여인상을 선보였다. 노경희는 이 영화의 '달'역으로 1955년 제1회 금룡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관객들의 가슴에는 '채'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마지막 대목에서의 이경희 연기가 아프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경희 는 이밖에도 < 모정 > '58. 양주남 감독 , < 육체의 길 > '59. 조긍하 감독, < 삼여성 > '59 박성복 감독, < 연산군 >'61 신상옥 감독, < 김약국집 딸들 > '63 유현목 감독, < 단종애사 >'63 이규웅 감독, < 모란이 피기까지는 > '63 김기덕 감독, < 혈맥 > '63 김수용 감독, < 추풍령 > '65 전범성 감독, < 신설 > '74 조문진 감독, < 들국화는 피었는데 > '74 이만희 감독, < 여자를 찾습니다 > '76 하길종 감독, < 깃발없는 기수 > '79 임권택 감독, < 내가 버린 여자2 > '80 홍성기 감독, < 아가다 > '79 김현명 감독>, < 영웅연가 > '86 김유진 감독, < 이장호의 외인구단 > '86. 이장호 감독, < 아다다 > '87 임권택 감독 등에 출연하였다. 이경희 의 대표작을 들라고 하면 < 망나니 비사 >, < 잃어버린 청춘 >, < 찔레꽃 > 등 3편을 통해서 보여준 연기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게된다. 그 가운데서 대표작 중 1편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에서 보여준 이경희의 연기(정애 역)를 평가하고자 한다. 영화 <잃어버린 청춘>의 주인공인 위진구( 최무룡 )의 직업은 전기공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전선 수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괴한과 맞부딪쳤다. 상대방은 바람처럼 달아나버리고 그 자리에는 돈다발이 떨어져 있었다. 위진구가 조심스럽게 돈다발을 집어들었을 때 근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진구가 그 사람을 발견, 일으켜 세우려고 할 때, 그가 갑자기 '강도다!'라고 소리치며 칼을 뽑아들었다. 진구는 옷소매를 붙잡고 달라붙은 그 자를 때려눕히고 위기를 벗어난다. 하지만 피를 많이 흘린 그는 죽었고, 진구는 억울하게도 살인범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단절된 진구는 신을 의지하는 애인 정애 이경희 )에게서 구원을 찾는다. 결국 젊은 전기공은 경찰에 자수하지만 애인의 따스한 눈물만으로는 냉엄한 현실의 절망감을 밀어젖힐 수 없었다는 내용의 드라마가 6.25전쟁 후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서울의 도심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의 운명이 리얼한 영상 속에서 속절없이 농락당한다는 ''쫓기는 인생''의 삶이 비정하게 묘사된 영화에서 여주인공 정애의 마지막 내뱉은 말은 '이젠 울지 않겠어요'였다. 필자는 < 잃어버린 청춘 >이 제작된 지 45년이 지난 며칠 전 유현목 감독을 만나 영화배우 이경희 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유감독님이 < 잃어버린 청춘 >을 연출한 당시 연기자로서 이경희 씨는 어떠했습니까?' '한 마디로 해서 청순가련형의 동양적 이미지의 배우였지요. <잃어버린 청춘>의 라스트신을 찍는데, 비오는 장면이었습니다. 때가 엄동설한이라 우중 신을 찍기가 용이치 않았어요. 소방차를 동원 호스로 물을 뿌렸는데, 물이 잘못 뿜어져 고압선에 닿으면 위험한 형국이었어요. 나는 이경희 씨에게 추우니 비닐 옷을 입으라고 권했지요. 그런데도 2시간 이상 촬영하는 동안 이경희 씨는 끝내 비닐 옷을 걸치지 않고 꼬박 혹한 속에서 물세례를 받았어요. 나는 속으로 그녀가 인내력은 물론, 프로 의식이 강한 외유내강형 연기자로구나 생각했지요. 성실하고 싹싹했고, 외모도 나무랄 데 없는 미인형이였지요.' < 눈내리는 밤 ''58>, < 목포의 눈물 ''58> 등 신파극 멜로 드라마를 연출한 바 있는 하한수 감독도 이경희 에 대해 연기평을 했다. '내 영화에 출연한 후 <눈물의 여왕>이라고 불리워진 전옥 씨는 정말 전설적인 여배우로 연기에 대한 열정은 가히 ''불꽃''이라고 부를만 했어요. 거기에 비해 이경희 씨는 소극적이며 내향적인 성품의 연기자였지요. 그의 매력은 항시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연약함에 있습니다.' 1958년 초여름 결혼했던 남편 김영건과 1963년 사별한 이경희는 딸 혜정의 강한 어머니로서 모정의 세월 속에서 연기생활에 전념했다. 이경희 가 출연한 최근 작품으로는 < 세상 밖으로 >''94 여균동 , < 닥터 봉 > ''95 이광훈 , < 도둑과 시인 > ''95 석래명 , < 애 > ''99 이두용 , < 가위 >2000 윤종찬 등이 있다. 영화배우 이경희 .... 그녀는 1950년대 중반에 데뷔한 이래 45년간을 현역 연기자로 활동하였다. ''눈물과 천사표의 페르소나''는 늙음도 마다 않고 항상 우리 곁에 있다. 변인식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출 생 : 1932. 4. 27 서울 데 뷔 : 1955년 김성민 감독 < 망나니 비사 > 주요 작품 : < 찔레꽃 >, < 망부석 >, < 두남매 >, < 잃어버린 청춘 >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