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부자
- 감독
- 권영순
- 제작년도
- 1958
- 출연
- 이종철, 양훈, 양석천, 김희갑, 구봉서, 최남현, 복혜숙, 안나영, 김정옥, 김미선, 김애자, 주리애, 최지희, 주선태, 정철, 고선애, 정애란, 이일선, 김학, 백송, 이성일, 임향, 도미, 숙자, 애자, 민자, 김숙일, 박시춘
1.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한국고전영화를 보는 이유는 전부 비디오에세이 만들기와 관련이 있다. 한국고전영화를 ‘본다’기보다 다음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해 ‘탐색’하는 것이다. 누가 들으면 ‘비디오에세이깨나 만드나 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부끄럽게도 그건 아니다. 재작년에 어도비 프리미어 프로그램을 구입한 이후 계속해서 결과물들을 산출하고 있기는 하나 누군가와 함께하는 작업이 아닌 이상 혼자 하는 것들은 다 재미를 위해 하는 것일 뿐이어서 그냥 폴더에 담아두기만 한다.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영화를 본다’라고 얘기하는 지점에서 이미 나는 ‘땡’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수년 전 미디액트에서 ‘오디오비주얼크리틱’을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이 들으면 혀를 차실 얘기이기 때문이다. 영상을 영상으로서 비평하는 시도로서 ‘오디오비주얼크리틱’이 의미 있는 작업이 되려면 역시나 그 작업의 최종 목적지는 여러 영상을 짜깁기해서 그럴듯하게 붙여놓고 거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깔아서 산출하는 mp4 파일이 아니라, 상대하고 있는 대상(물)과 그 대상(물)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적절한 통찰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자체로 매혹적인 또 하나의 작품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시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영화를 이것저것 보다가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비디오에세이를 만든다고 하면 그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겠다고 작정하고 그것에 걸맞은 영상을 탐색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행위이다. 하지만 그 수업에서 선생님들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안 보던 고전영화들을 본다면, 그것 자체로도 좋은 일이라고. 사실 ‘한국고전영화’야말로 아도르노가 정리한 대로 “문화적으로 형성된 특수한 대상에 대한 고찰”1)이라고 하는 에세이적 방법론의 대상으로 삼기에 가장 좋은 소재다. 여튼 그런 불순한 목적으로 한국고전영화를 보는데,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소재를 말하기 위해 내가 만들다가 만 한 편의 비디오에세이 <60년대 샐러리맨의 하루>를 말해보려 한다. 1959년작 < 여사장 >(한형모)부터 < 구봉서의 벼락부자 >(김수용, 1961), < 삼등과장 >(이봉래, 1961), < 월급쟁이 >(이봉래, 1962), < 골목안 풍경 >(박종호, 1962), < 두고만 보세요 >(김봉환, 1964), < 떠날 때는 말없이 >(김기덕, 1964), < 회전의자 >(이형표, 1966), < 억울하면 출세하라 >(심우섭, 1969) 등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 사이의 영화에서 직장인들의 출퇴근, 회의, 월급날, 신입사원 채용, 면접, 점심시간, 사내연애, 근무 중 농땡이 부리기, 상사의 꾸지람 등의 장면들을 골라 붙여 만든 것이다. 부끄럽게도 어느 정도 만들고 나서 조금은 재밌지 않나 하는 생각에 몇 명에게는 보여주고 반응을 살핀 적도 있었다. 그중 몇 명으로부터는 냉철한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려는 생각으로 처박아 두었다. 이 <60년대 샐러리맨의 하루>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 오발탄 >(유현목, 1961)을 갖다 쓴 부분인데, 바로 김진규의 직장 동료인 여성 타이피스트가 등장하는 두 장면이 그것이다. 첫 번째 장면은 계리사사무소에서 상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타이피스트가 분첩을 꺼내 찍어 바르며 “육시랄하게 시간도 안 가지”라고 말하고 김진규에게 상사 없을 때나 쉬지 언제 쉬냐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곧바로 상사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 타이피스트는 후다닥 분첩을 집어넣고 다시 바쁜 손동작으로 타자기를 친다. 두 번째 장면은 이들이 퇴근하는 장면으로, 타이피스트가 “월급도 받았는데 집에 그냥 가냐”며 김진규를 낚으려고 하다 김진규가 “월급을 아내에게 주는 것도 멋진 일이다”며 거절하니 “흥, 재~미없어”하고 사라지는 장면이다. 타이피스트가 쌩하고 사라지자 혼자 남은 김진규는 이가 아파 볼을 만지면서 제 갈 길을 가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노잼인증’을 당해 겸연쩍은 느낌으로 빠르게 자리를 뜨는 느낌으로도 보인다. 원작을 읽지 않아서 이 장면이 원작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진규 같은, 즉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짊어진 것 같은 매사 진지하기만 한 직장 동료에게 어떻게도 손쓸 수 없는 더없이 적절한 공격 타이밍으로 촌철살인의 일갈을 할 수 있는 젊은이 특유의 여유랄까,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오발탄>의 보석 같은 장면이었다. 심지어 ‘육시랄’이라는 욕설의 처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 대사엔 욕설이라곤 전혀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외의 영화들에서도 사무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에서 김숙일, 도금봉, 최지희 같은 여배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단역 여배우들이 김승호나 김희갑, 주선태 같은 문제적 상사들에게 속 시원한 한마디를 날리는 모습은 꽤나 자주 볼 수 있었고, 대사뿐 아니라 존재 자체로도 전통적인 규범이나 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전후 세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군의 여배우들 즉, 노경희, 양미희, 나애심, 안나영, 김의향 같은 배우들의 활약도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이중에 < 서울의 휴일 >(이용민, 1956)과 < 화심 >(신경균, 1958) 등에서 너무나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 양미희의 팬을 자처하며 그녀의 필모를 깨기 위해 보게 됐던 홍성기 감독의 < 열애 >(1955)에서, 나는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새로운 고찰의 국면을 만나게 되었다. 2. 한국고전영화를 가끔이지만 조금씩 보다 보니 어느 순간 한국고전영화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화를 보는 데에 익숙하고 안 하고 할 게 뭐가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고전영화를 픽션으로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는 쪽이다. 바꿔 말하면, 한국고전영화에서 내가 목격하는 ‘과거의 한국’이나 ‘과거의 한국인’은 내가 아는 현실의 그것과는 너무 다르거나, 반대로 내가 아는 현실의 그것들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이들의 작용이 픽션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영화’의 외피를 쓴 무의식의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잘 찍고 내러티브가 깔끔하게 떨어지는 영화를 볼 때도 뭔가 뒷맛이 씁쓸하고, 내러티브가 산만하고 완성하기에 급급했다 싶은 영화를 볼 때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 면에서 한국고전영화는 내게 있어 재미가 있다/없다, 이해가 잘 된다/안 된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충분히 익숙한가 아닌가의 단순한 문제였던 것 같다. 다만 ‘익숙해진다’는 것은 한국고전영화의 ‘디폴트값’을 알아챘다는 뜻이어서, 익숙해지게 되면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특이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왜 특이하게 여겨질까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가끔 의외의 재미가 찾아오기도 한다. 홍성기 감독의 <열애>를 본 후, 나는 내가 배우 ‘석금성’과 ‘복혜숙’을 혼동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열애>에 나오는 복혜숙은 출연뿐 아니라 영화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내레이션을 담당하고 있기도 한데, 그 목소리가 석금성의 목소리인 걸로 착각이 되었던지 나는 <열애>의 그 인물을 한참이 지난 뒤까지도 ‘석금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닮은 꼴 배우를 헷갈리는 일은 흔한 일이다. ‘닮았다’ ‘안 닮았다’라고 하는 조형적 유사성에 근거한 판단조차 개인의 이미지 경험이나 레퍼런스에 영향받기 때문에 심지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닮지 않은 배우들도 가끔은 헷갈림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복혜숙과 석금성은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동그란 얼굴에 눈이 새까맣고, 항상 깔끔하게 뒤로 빗어넘긴 머리를 하고 있는 게 약간 비슷하다. 심지어 음성도 걸걸하면서 중저음인 게 비슷하다. 하지만 내가 헷갈린 건 그 둘이 외양과 음성이 비슷해서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복혜숙’이란 배우가 있고 ‘석금성’이란 배우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영화에서 할머니 역으로 많이 등장하는 그 사람을 나는 ‘한 명의 사람’으로 뭉뚱그려 생각했었다. 그 사람이 어떨 때는 착하게 나오고(복혜숙), 어떨 땐 고약하게도 나온다고(석금성) 생각했던 것이다. 왼쪽은 24세의 석금성이고 오른쪽은 26세의 복혜숙의 모습이다. 둘 다 토월회에 몸담고 있던 시절. 사진 출처: 석금성-1930년 1월 8일 자 《조선일보》, 복혜숙-1931년 8월 9일 자 《동아일보》 복혜숙과 석금성을 빠르게 구별하기 위해 찾은 김남석의 『조선의 여배우들』(국학자료원, 2006)은 연배마저 비슷한(복혜숙이 1904년생, 석금성이 1907년생으로 세 살 차이) 이 두 사람이 토월회라는 신극단체에서 함께 활동했던 인연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김수용 감독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1957년 여름 < 배뱅이굿 >을 찍기 위해 충청도 온양에 머물렀을 때 사이가 굉장히 나빠 각기 다른 민박을 쓰면서 서로를 비방했다고 썼다. 2) 석금성은 워낙 동료 연예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었고 3) , 실제로 모 배우가 석금성의 거친 성격을 증언하기도 했다고 영화사연구자 L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복혜숙이 남긴 ‘나의 교유록(交遊錄)’ 4) 을 보면 복혜숙의 성격도 만만치 않다. 토월회에서 활동하다 영화계에 들어왔고 영화에선 둘 다 주로 할머니 역을 했던 공통점도 있으니 거의 지척에서 서로를 봤을 텐데 사이가 안 좋았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니 두 배우에 대한 흥미가 더 커졌다. 3. 1904년생 복혜숙과 1907년생 석금성은 각각 10대 후반에 신극 단체인 토월회에 입단해 타고난 끼를 바탕으로 각각 인기 여배우로 거듭났지만 토월회 입단 전후로 기생 활동을 할 정도로 당시의 불안정한 쇼비즈니스계를 통과하고 있었다. 5) 20~30대 시절 영화에 단발적으로 출연했지만(복혜숙은 < 농중조 >(1926), 석금성은 < 심청 >(1937))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은 40대 전후의 나이였다(복혜숙은 < 수업료 >(최인규, 1940)에서 영달이 할머니로, 석금성은 < 마음의 고향 >(윤용규, 1949)에서 최은희 어머니로). 이들보다 불과 10살가량이 어린 문예봉, 김신재, 김소영 등이 당시 조선에 형성되기 시작하던 영화 저널리즘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현숙하고 정갈한 이미지로 전시 체제 프로파간다의 얼굴이 되어가는 동안, 복혜숙과 석금성은 현실 세계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이미 ‘여성’보다는 ‘모성’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복혜숙은 <수업료>에 영달이 할머니로 출연했을 때 고작 37세였다. 그녀의 당시 나이를 알고 <수업료>를 다시 봤더니 그냥 할머니 분장한 젊은이여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바로 그다음에 출연한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에서만 해도 그는 치마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라디오를 할부로 구매하는 활달한 커리어우먼으로 등장하는데, 그 후로 맡은 역할은 거의 다 온정적인 할머니나 어머니, 유모, 식모 같은 것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석금성은 <마음의 고향>에서 최은희의 완고한 친정어머니로 등장하는데 그 이후 < 그 여자의 일생 >(김한일, 1957), < 자유결혼 >(이병일, 1958), < 촌색씨 >(박영환, 1958) 등에서 표독스러울 정도의 거친 모성을 연기하거나 아예 무당(< 김약국의 딸들 >(유현목, 1963)이나 < 강화도령 >(신상옥, 1963), < 만고강산 >(최인현, 1968)) 같은 강렬한 역을 연기했다.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이후 연거푸 전형적인 역할에만 캐스팅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출중한 연기력은 안타깝게도 개점휴업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6) 내가 이들을 혼동한 데에는 연달아 비슷한 역(온정적인 어머니냐 완고한 어머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으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연유도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두 사람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이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했을 수 있을 것 같다. 복혜숙은 자신이 ‘연기’를 좋아하고 원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기 때문에 연기를 지속하기 위해 기생 활동이나 다방 마담을 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고 7) 대한영화배우협회, 성우협회 회장을 맡는 등 영화계 대표 ‘인싸’였다. 심지어 임화수도 복혜숙 앞에서는 꼼짝을 못 했다고. 8) 하지만 석금성은 데뷔 전 기생 이력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하거나 9) 연예인 친구보다는 평범한 주부들이나 동네 부인들과 주로 어울리다가 흔히 말하는 '주부도박단' 사건에 두 번이나 연루되는 등의 사정으로 봤을 때 연예계에서는 전형적인 '아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부자>(권영순, 1958)에서 55세의 나이로 10대 처녀 시절을 연기하고 있는 복혜숙. 하지만 이 둘은 오히려 생애 말기에 연기자로서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또 다시 공통분모를 형성한다. 둘은 토월회 50주년 기념행사에 나란히 참여해 연극 <이대감 망할대감> 공연을 같이 하기도 했고, 10) 복혜숙은 79세에 사망하기 전까지 약 10여 년간, 석금성은 89세에 사망하기 전까지 약 10여 년간 활발하게 활동했다. 76세의 나이로 < 사랑의 조건 >(김수용, 1979)에서 한겨울 눈밭 한가운데서 연기를 펼친 복혜숙이나, 80세 넘어서 출연한 TV문학관 <사평역>, KBS 설특집 드라마 <너도 늙어봐라>, SBS 드라마 <분례기>,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 등에서 엄청난 존재감과 명연기를 선보인 석금성을 보면 생애 마지막 나날까지도 꾸준한 자기 관리로 일을 해나갔던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모습에 존경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유작인 SBS 드라마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1993)에 출연한 석금성의 모습. 4. "악역을 많이 맡아 욕을 무던히 먹어서인지 오래 살지요? 이제까지 살면서 한숨도 많이 쉬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이제는 오늘 일은 오늘, 내일 일은 내일 하는 식으로 산답니다.” 1983년의 인터뷰에서 석금성은 이렇게 말했다. 덧붙여 “지난해에 선배인 복혜숙 씨마저 타계하는 바람에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말했다. 복혜숙은 72년의 인터뷰에서 토월회의 가장 큰 성과로 1929년에 공연했던 <아리랑고개>를 언급하며 “처녀 봉이(석금성)가 일본인에게 농토를 빼앗긴 아버지를 따라 괴나리 봇짐을 들고 간도로 가면서 사랑하는 총각과 이별하는 구슬픈 장면이 나오는 것인데, 석금성의 눈물을 따라 온 극장 안이 울음바다가 됐으며 임검경관마저 같이 울었다”고 회고했다. 11) 이는 두 사람이 서로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흔적으로, 내가 찾은 바로는 이 두 개가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한 장 발견했다. 《동아일보》 1981년 5월 14일 자 11면. 함께 찍었다기보다 단순히 한 공간에서 찍힌 사진 같기도 하다. 복혜숙과 석금성은 복혜숙의 남편인 김성진을 사이에 두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는 미지수이지만 아마도 1973년에 있었던 토월회 50주년 행사 때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토월회에서 데뷔했다는 것 말고는 사실상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는 두 사람을 무리하게 묶어서 생각을 한다는 생각도 했지만 내가 두 사람의 행적을 파악하며 느낀 건, 진부하게도 ‘마지막에 살아남는 자가 승자’라는 문구이다. 두 사람은 그 어느 여배우보다도 길게 살았고, 길게 연기했다. 올해 40대에 접어들어 ‘위기의 중년’을 체감하는 나로서는 그 어떤 누구의 조언보다도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점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한 다음 비디오에세이에 대한 계획은 우선 여기까지이다. ※ '시청각연구인'이라는 바이라인에 대한 추가 설명: 지난해까지는 원고 쓸 일이 있으면 '한국영상자료원 직원'이라는 직함을 썼고 그전까지는 항상 '중앙대 대학원 박사과정생'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영상자료원 직원도 아니고 중앙대 박사과정생으로서 뭔가를 수행하고 있지도 않아 이 원고를 다 써놓고 '영화연구자'라는 표현을 이름 옆에 달아두고는 있었지만 뭔가 찝찝했다. '연구자'라고 하는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영어의 researcher가 아닌 scholar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쓰기 부담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영상자료원 4층 사무실의 복사기 앞에서 출력물이 나오길 기다리며 뭔가를 심사숙고 하고 있는 김기호 차장님을 봤다. 김기호 차장님은 복원팀에서 오랜 기간 아키비스트로 일했고 지금은 학예연구팀에서 조금은 다른 연구들을 수행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내가 팀을 떠났기 때문에 자세한 건 모른다.) 순간 그 어떤 연구자보다 자신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찰하는 김기호 차장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 KOFA Issue paper vol. 1 , vol. 2 )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대학원 따위(표준국어대사전에서 '따위'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1번, 2번 용례에 해당. 3번 아님)의 제도적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해서 저 사람을 '연구자'라고 부르지 못할 일은 없기는 하나 '연구자'보다 그럴듯한 표현이 없을까 하다가 '연구인'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시청각연구인'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됐다. 내 주변에는 확실히 '박사'라고 하는 학계에서 인증한 소위 '메이카'를 갖고 계신 연구자 선배님들도 많지만 내가 그들을 존경한다면 그건 '메이카'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항상 꾸준히 우리의 삶과 사회가 노출하는 모순들을 자신의 연구영역 안에서 이리저리 관찰하고 연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메이카'를 취득하지 못한 때문도 있지만 일단 나는 김기호 차장님 같은 '시청각연구인'을 표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말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보고자 한다. *** 1) Translated from the German by R. Hullot-Kentor and F. Will, 'The Essay as Form', New German Critique , No. 32. (Spring-Summer, 1984), p.151 2) 김수용,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한국의 여배우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공식블로그, 2014. (https://siwff.tistory.com/503) 3) '77세의 원로여우 석금성 씨 20년 만에 <백구야...>로 컴백하면서 또 악역', 《경향신문》, 1983년 1월 29일 자. 4) 복혜숙이 1981년 4월부터 두 달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5) 석금성은 데뷔 전 기생이었고 데뷔 후에는 권번생활을 하지 않았으나, 복혜숙은 오히려 데뷔 후에 이름이 알려진 것을 이용해 권번에 적을 두고 기생 활동 및 기생 교육 활동을 했다. 복혜숙, '나의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6> 복혜숙⑯: 권번시절', 《동아일보》 1981년 5월 11일 자; 김정은, 「일제시대 기생과 여배우의 관계: 대표적인 여배우를 중심으로」, 숙명여대 석사학위논문, 2007.; 이승연, 송지영, 「일제시대 인천권번에 대한 연구: 용동권번을 중심으로」, 『인천학 연구』 6, 2007.2. 6) 약간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준 영화도 있기는 했다. <오부자>(권영순, 1958)에서 복혜숙은 55세의 나이에 10대 처녀 시절을 연기했는데 어딜 가나 사람들을 웃겼다는 복혜숙의 진가가 이 영화에서 조금이지만 발휘되고 있다. 석금성은 <고려장>(김기영, 1963)에서 그나마 전형적인 표독스러운 계모를 탈피한 연기를 할 수 있었는데, 그의 강렬한 이목구비가 오히려 이런 톤 다운된 역할에 잘 어울리는 것으로 봤을 때, 그가 다양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는 점이 정말 안타깝다. 7) 복혜숙은 권번 활동이 적잖은 돈벌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최성해, 이월화, 김소진 등 토월회 멤버들과 함께 권번을 드나들었으며, 권번에서 돈을 벌어 연극을 하자고 의기투합했었다고 한다. 복혜숙은 특히 권번에서 기생들에게 일본어와 현대무용을 가르치기도 하고 후에 판소리 명창이 된 박녹주와 콤비를 이뤄 손님들을 웃겼다고 한다. 복혜숙,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2> 초창기의 여배우 복혜숙⑫: 초창기의 여배우', 《동아일보》 1981년 5월 1일 자;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6> 복혜숙⑯: 권번시절', 《동아일보》 1981년 5월 11일자. 8) 복혜숙,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6> 복혜숙 26: UN군 환영 연극', 《동아일보》 1981년 5월 25일 자. 9) 석금성은 1930년대의 언론 인터뷰에서 토월회 배우 데뷔 전 이력을 '개인 사정'이라고 표현하는 정도였고, 언론들도 '쓰라린 세파에 몸을 적시고 있었던' 시기 정도로 완곡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의 생애 후반기 인터뷰들은 토월회 입단 전에 그녀가 진명고녀 졸업생이었다고 쓰고 있다. '대리석 같은 여인 - 눈물을 흘리는 역이 적역, 신흥 토월회 스타편 - 석금성', 《조선일보》 1930년 1월 8일 자; '석금성 여사 - 처녀와 귀부인이 적역', 《동아일보》 1931년 6월 17일 자; '77세의 원로여우 석금성 씨 20년 만에 <백구야...>로 컴백하면서 또 악역', 《경향신문》, 1983년 1월 29일 자. 10) '토월회 창립 50돌 기념 공연', 《조선일보》 1973년 10월 23일 자. 11) '내가 겪은 20세기 (25) 복혜숙 여사', 《경향신문》, 1972년 6월 23일 자.
1. 시대물에서 괴기물까지 50편 연출 권영순 은 1956년 시대물인 < 옥단춘 >으로 감독 데뷔했다. 그는 1981년 < 사향마곡 >이란 영화까지 25년간 50편을 연출했다. 한국적인 영화제작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특정 장르를 고집할 수 없기도 하지만 권영순은 통속시대물로 감독 데뷔해서 코미디물, 액션물, 검객물, 반공물, 문예물, 괴기물, 멜로물 등 다양한 장르를 체험하고 선도했다. 그만큼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행동 구역이 넓고 시각이 트였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러면 권영순은 왜 시대물로 감독 데뷔를 했는가? 나는 시대상을 통해 그 필연성을 찾을 수 있었다. 1956년은 한국영화사적으로 성장기였다. 1953년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포성이 멈췄다. 사회가 안정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도 차츰 제작 열기를 더 해갔고 1954년부터 57년까지를 성장기로 부른다. 이 기간 4년 동안 총 100편의 한국영화가 제작되었는데 1956년에 30편이 개봉되었다. 1956년 개봉된 한국영화 30편 둥 절반이 역사물과 통속시대극이었다. 전창근 의 < 단종애사 >와 < 마의 태자 >, 윤봉춘 이 < 처녀별 >과 < 논개 >, 이규환 의 < 심청전 >, 김소동 의 <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 정창화 의 < 장화홍련전 >, 김기영 의 < 봉선화 >, 안종화 의 < 천추의 한 >과 < 사도세자 >, 이병일 의 < 시집가는 날 >, 홍일명 의 < 벼락감투 >, 신현호 의 < 숙영낭자전 > 등 13편과 권영순 의 데뷔작 < 옥단춘 >을 합쳐 14편에 달했다. 1956년은 정부가 서울로 환도했지만 전흔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어 멜로물과 청춘물이 자리매김하기 전 관객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로는 역사물과 통속시대물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권영순 도 1956년 < 옥단춘 >으로 감독 데뷔한 것은 이런 영화 흥행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옥단춘>은 온갖 유혹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절개를 지킨 평양기생 옥단춘의 생애를 그렸는데 윤인자 가 타이틀 롤을 맡았고 김진규 , 최봉 이 공연했다. 데뷔 이듬해인 1957년 권영순 은 김광주 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멜로물 < 나는 너를 싫어한다 >와 라이트 코미디인 < 오해마세요 > 두 편을 감독했지만 흥행적으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1958년 연출한 코미디물 < 오부자 >가 흥행에 대성공을 함으로써 일약 유명감독으로 단숨에 가치를 올렸다. 영화 <오부자>는 화목하게 살아가는 오부자(五父子) 가정의 아들 4형제가 합동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는 내용의 코미디물로 출연도 이종철 , 김희갑 , 구봉서 , 양훈 등 코미디언들 일색이었다. 이 영화는 1958년 4월 19일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흥행바람을 일으키더니 그 여세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제작자 권철휘 는 큰 돈을 거머쥐었고 감독 권영순도 스타덤에 올랐다. < 오부자 >를 감독한 1958년부터 1965년까지는 권영순 으로서는 감독 절정기였다. 감독 활동은 1981년까지 했지만 1958년부터 1965년 가지 이 기간 동안 권영순은 < 흙 > < 표류도 > 같은 문예물에 도전했고 대륙활극 < 정복자 >로 흥행의 줏가를 높였으며 역사물 <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 에서는 당대의 톱스타 김진규 . 김지미 . 김승호 . 박노식 등을 총출연 시켰으며 흥행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간 동안이야 말로 권영순 의 연출 감각은 최고 궝영순은 영출자로서 상승 곡선을 그었으며 다양항 장르를 체험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2, 폭 넓은 연출세계- 다양한 장르 섭렵 권영순 감독은 세 번째 작품 < 오부자 >가 흥행에 성공 했지만 코미디물이란 한 장르에 집작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 섭렵에 들어간다. 그 당시 한국영화 게작계 풍토나 감독 자신의 안전 항해를 위하여 계속해서 몇 작품 코미디물을 연출할만한데 권영순은 안주정착하지 않고 재빨리 방향을 바꾼다. 네 번재 작품으로 멜로물 < 한 많은 청춘 >을 감독한다. 이 영화는 소매치기와 그의 도움을 받는 여대생과의 순정 연애를 담았는데 황해. 김미선이 주연했고 안성기 의 아역배우 데뷔작이기도하다. 이때부터 권영순 감독은 거침없는 다양한 장르 섭렵에 돌진한다. 한국영화 감독 중에서 권영순 만큼 여러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도 드물다. 통속시대물로 데뷔해서 코미디물, 멜러물, 문예물, 반공물, 앳션물, 검객물, 역사물에서 말년의 괴기물에 이르기까지 권영순 만큼 다양한 영화 쟝르를 소화한 감독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연출시야가 넓고 감각이 빠르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이다. 그의 연출 작품을 장르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통속시대물 : < 옥단추 >(56) < 옥난 공주와 활빈당 >(60) < 가야금 >(64) * 코미디물 : < 오부자 >(58) < 오해 마세요 >(57) < 8통8반 여반장 >(64) * 멜러물 : < 나는 너를 싫어한다 >(57) < 한 많은 청춘 >(58)<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59) < 가는 봄 오는 봄 >(59) < 양지를 찾아서 >(59) < 장미의 곡 >(60) < 그리운 얼굴 >(60) < 정과 정 사이에 >(72) < 모정 >(72) <축배> < 산녀 >(73) < 불꺼진 창 >(76) * 역사물 :<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62) < 에밀레종 >(68) * 반공물 : < 국회 푸락치 >(74) * 문예물 : < 흙 >(60) < 표류도 >(60) *액션물 : < 목숨을 걸고 >(62) < 남아 일생 >(65) < 무적자 >(66) < 의리에 산다 >(70) < 6인의 난폭자 >(70) * 검객물 : < 비호 >(69) < 쌍용검 >(69) < 무정검 >(69) < 백면검귀 >(69) < 유정검화 >(70) < 복수의 마검 >(70) < 다섯개의 단검 >(71) * 괴기물 : < 대지옥 >(72) < 반수반인 >(75) < 용사왕 >(76) < 사향마곡 >(81) 권영순 이 연출한 50편의 작품을 살펴보면 기본이고, 반공물에, 액션물, 검객물에다 특히 이광수 원작소설 < 흙 >과 박경리 원작소설 < 표류도 > 2편의 문예물이 눈에 띈다. 그리고 권영순 감독은 말련에 괴기물에 심취하여 여기에 매달린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한 때는 다작 감독이기도 했다. 1960년과 1969년에는 한 해에 5편의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한해에 최고로 10편의 영화를 연출한 한국 감독이 있기도 하지만 한 해에 5편 연출도 대단한 다작으로 봐야 한다. 권영순 감독의 다작과 1970년 전후해서 낮은 제작비의 검객영화를 빠른 기일 내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빠른 작업 속도가 큰 몫을 했다. 권영순 감독의 현장 작업속도는 영화계에서 최고로 꼽는 기능인이었다. 그가 빨리 작업을 진행한 날은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할 정도였다고 그의 조감독들은 증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3, 현장의 고집 센 기능주의자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고집 센 독재자였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업 진행속도가 빠른 만큼 감각이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고 한다. 그만큼 두뇌의 순발력과 회전이 팍팍 돌아가 촬영 현장은 <레디 고> 소리가 거침이 없었다. 그대신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스탭들의 조언을 철저히 외면하고 배격하는 고집 센 독재자였다고 한다. 그는 조감독이나 촬영기자, 조명 기자의 조언을 일체 듣지 않고 자지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고 한다. 성격이 과격하고 신경질이 많은 권영순 감독이었지만 신통하리만큼 현장 촬영에는 한 치의 착오도 없었다고 당시의 조감독들은 증언했다. 그이 현장 고집은 유명해서 조감독이 조언하면 ''너가 감독되면 그렇게 하라''고 일축했다. 하기야 이런 고집과 뚝심이 없었으면 어떻게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했겠는가? 따라서 제작자들에게 권영순 감독의 인기는 최고였다. 촬영 속도가 빠른 만큼 제작 기간이 단축되고 제작비가 절감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촬영현장에서 진행속도가 빨라도 배우들의 연기지도는 권 감독ㅇ 몸소 시연을 해보일 만큼 적극적인 연출을 했다. 특히 액션물에서 격투 신은 몸을 아끼지 않고 연기지도를 했다고 한다. 이런 현장에서 열정이 촬영이 끝나면 엄습하는 허탈감을 떨치지 못한 탓인지 촬영장 밖에서는 술을 말술로 마셨다고 한다. 촬영장 안에서는 뜨거운 열정의 고집센 독재자였고 일상에서는 술을 사랑해 말술을 사양하지 않은 권영순 감독은 1992년 5월 23일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1923년 출생이니 69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여운이 남은 아쉬운 죽음이었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본명은 권영계(權寧桂). 일본대학 문학부 졸업. 유족으로는 부인과 스튜디어스 출신 외동딸이 남아 있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23년 3월 9일 경북 안동 출생 1992년 5월 23일 사망 1956년 < 옥단춘 >데뷔 <작품명> 1956 옥단춘 1957 나는 너를 싫어한다 / 오해마세요 1958 오부자 / 한많은 청춘 1959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 가는 봄 오는 봄 / 양지를 찾아서 1960 흙 / 표류도 1962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1965 모녀봉 1966 무적자 1968 풍운의 임난야화 1969 무정검 / 백면검귀 1970 유정검화 / 의리에 산다 / 복수마검 / 육인의 난폭자 1971 다섯개의 단검 1972 정과 정 사이에 / 모정 / 대지옥 1973 산녀 /축배 1974 국회프락치 1975 인사여무 / 태백산맥 1976 불꺼진 창 1988 칠삭동이의 설중매 등 5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