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추적
- 감독
- 김시현
- 제작년도
- 1972
- 출연
- 나갑성, 모사성, 우연정, 홍금보, 당위성, 나기석, 남미리, 최삼, 김기주, 이예민, 최준, 진봉진, 박기택, 한명환, 이태진, 남충일, 이현성, 정규영, 조대건, 유화춘, 김민수, 김진수, 윤정호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영화가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 유명 연예인과 셀럽을 초청해 개최하는 VIP 시사회라는 것이 있다. 관객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 위한 홍보 수단의 하나로, 영화는 이곳에 참석한 셀럽의 사진 한 장만으로도 대중에게 그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다. 그런데 VIP 시사회라는, 나름 효율성 높은 이 홍보 방식은 언제부터 도입된 걸까? 굳이 홍보 목적이 아니었더라도, 유명 인사들을 초청하는 시사회는 언제부터 개최되었던 것일까? 영화 < 집없는 천사 >(최인규, 1941)의 시나리오 작가, 니시키 모토사다(西龜元貞)의 컬렉션 을 들여다본 순간부터 이런 궁금증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1910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니시키 모토사다는 1924년, 조선총독부 위생과에 부임한 부친을 따라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중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고등학교를 나왔고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대학을 중퇴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경성일보 학예부 기자로 취직했다. 니시키는 여기서 조선영화계의 여러 인물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덕분인지 이후 그는 영화의 길을 걸으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 < 수업료 >(최인규, 방한준, 1940)를 기획했고, <집없는 천사>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이 외에도 이 시기에 그가 시나리오를 쓴 작품 중 현재 필름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 병정님 >(방한준, 1944)이 있다. *주1 고려영화협회 단체사진(1940년 여름께 추정)_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1열] 최인규(좌1), 김학성(좌2), 김신재(좌3), 이창용(좌7), 강홍식(좌8), 니시키 모토사다(좌9),박기채(좌11) [2열] 방한준(좌5), 심영(좌7), 왕평(좌8) [3열] 임화(좌6), 서광제(좌7) 2005년과 2008년, 니시키 모토사다의 유족, 니시키 유리코가 기증한 그의 컬렉션에는 그가 조선에서 활동했던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의 조선영화 관련 사진들이 모여 있다. 일부는 그가 기획했거나 시나리오를 집필했던 <수업료>, <집없는 천사>, < 우르러라 창공 >(김영화, 1943) 관련 사진들이고 일부는 경성일보사 학예부의 조선영화 담당 기자로 재직할 당시에 수집했을 것으로 보이는 사진들로, 총 21편의 영화에 대한 것들이다. (좌 상단부터 시계 방향) <집없는 천사>, <우르러라 창공>, <한강>, <도생록> _시나리오 작가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 조선영화 편 < 도생록 >(윤봉춘, 1938), < 한강 >(방한준, 1938), < 무정 >(박기채, 1939), < 복지만리 >(전창근, 1941) 등, 대부분 필름이 남아 있지 않은 영화인지라 그가 생전에 소중히 간직했을 이 사진들은 잃어버린 영화에 대한 상상을 무한히 자극한다. 와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사진이 한 장 있다. 바로 영화 <무정>의 시사회에 참석한 원작자 이광수 와 주연배우 한은진 , 감독 박기채 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무정>의 공식 개봉 하루 전인 1939년 3월 14일, 지금의 서울 중구 을지로 4가에 위치한 황금좌 (黃金座, 국도극장의 전신)에서 개최된 시사회에는 춘원 이광수를 비롯해 각 방면의 인사 백여 명이 참석했는데, *주2 박기채 감독은 이 시사회를 위해 이광수에게 의전 차량까지 보냈다고 전해진다. *주3 그만큼 이날은 무척이나 특별한 날이었을 것이다. 이 특별한 날의 행사는 지금으로 치면 ‘VIP 시사회’라 해도 무방할 테지만, 당시 언론은 이를 ‘시사회’라는 보통의 용어로 소개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이 특별함을 강조할 용어가 딱히 없었던 까닭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한 이래로 일반인 대상의 시사회라든지 관계자 시사회(지금의 기술 시사회), 언론 시사회 등이 개최되었다는 소식은 왕왕 보도되었지만, <무정>처럼 유명 인사들을 대거 초청한 시사회는 당시에 흔하게 목격되는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정> 시사회에 참석한 한은진, 이광수, 박기채 (1939년 3월 14일, 황금좌) _시나리오 작가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 조선영화 편 어찌 되었든 이 특별한 날의 분위기는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의 이 사진에서도 여실히 전달된다. 배우 한은진이 입고 있는 두툼한 외투는 3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꽃샘추위로 코끝이 시렸을 그날의 날씨를 짐작하게 한다. 다소 경직돼 보이는 한은진과 박기채 감독의 표정은 또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당대 최고의 작가, 춘원과 함께 앉은 데서 오는 긴장감과 훗날 근대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기록될 소설 「무정」을 영화로 만든 데서 오는 결연함 등이 교차하는 표정이지 않았을까. 더욱이 이 작품으로 스크린 데뷔식을 치른 배우 한은진에게는 긴장감과 결연함 사이 어디쯤의 감정이 더욱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같이 성대한 시사회가 개최될 정도로, 영화 <무정>은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된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동시대인이라면 반드시 읽었어야 할 소설 「무정」을 원작으로 한 만큼 소설 팬들이 영화에 거는 기대가 컸고, <무정>을 제작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이하 조영)는 조선영화계에서 최초로 설립된 주식회사로, 고려영화협회와 함께 영화계를 이끌어갈 기대주로 주목받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영은 창립 제1회 작품 <무정>을 홍보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크랭크 인(1938년 3월)과 크랭크 업(1938년 7월) 소식, 평양 로케이션 촬영 소식, 현상과 녹음, 편집을 위한 일본 도쿄 출장 소식 등이 일간지에 틈틈이 단신으로 보도되었고, 크랭크 업 후인 같은 해 10월에는 최남용 과 장세정이 주제가를 취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등, *주4 영화 <무정>에 관한 소식은 1938년 한 해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적극적인 홍보는 작품에 그만큼 자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 그 같은 자신감은 영화가 한창 촬영 중이던 1938년 5월, 대중문화잡지 《삼천리》에 <무정> 시나리오를 공개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주5 여기서 다시,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 속 <무정> 시사회 사진으로 돌아가 보자. 사실 이 사진은 2008년, 유족 니시키 유리코의 이름으로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될 당시 “조선영화주식회사” 이름이 인쇄된 낡은 봉투에 다른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담겨 있었다. 봉투 겉면에는 경성일보 학예부 니시키 모토사다에게 김정혁 이 보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조선영화주식회사 발행 봉투 (한구영화박물관 상설 전시 자료) 이는 경성일보 학예부 기자로 재직 중이던 니시키가 조영 소속으로 <무정>의 시나리오를 윤색한 김정혁에게 받은 사진이라는 말이며, 역으로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언론 홍보를 위해 경성일보사에 보낸 사진이라는 의미이다. 실제 발행된 《경성일보》에 실리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근대문학의 거장 춘원 이광수와 전도유망한 엘리트 감독 박기채, 촉망받는 신예 배우 한은진이 함께한 이 사진은 여러모로 특별한 순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전례 없이 특별한 순간에 이들이 느꼈을 긴장감과 결연함을, 언젠가 이 영화를 보게 될 우리도 느끼게 될까? 1939년 영화 <무정>의 필름이 우리에게 돌아올 날을 기다려본다. *** 주1. 니시키 모토사다의 이력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KMDb 컬렉션, “시나리오 작가 니시키 모토사다 컬렉션: 조선영화 편”에 수록된 이화진의 「해제: 니시키 모토사다와 조선영화」를 참조할 것. 주2. “<무정> 봉절 15일부터 황금좌에서”, 《동아일보》, 1939. 3. 16., 5면. 주3. 춘원, “영화 <무정>으로 공개장, 감독 박기채 씨에게 보내는 글”, 《삼천리》 제11권 제7호, 1939. 6. 1., 132쪽. 주4. “무정의 주인공 주제가를 취입”, 《조선일보》, 1938. 10. 22., 4면. 주5. 이광수(원작), 박기채(각색), “토-키 씨나리오, 무정”, 《삼천리》 제10권 제5호, 1938. 5. 1., 275~295쪽.
① 평양가부키좌(平壤歌舞伎座), 금천대좌(金千代座) 평양가부키좌는 1910년대 초반 평양 수정(壽町)에 설립된 극장이다. 가부키 공연용 극장으로 규모가 웅장한 건물이었다. 1914년 6월 이곳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된다는 기사가 발견된다. (<演藝界>, 《每日申報》, 1914.6.9) 1923년 가부키좌는 시설이 낙후하다는 이유로 사용중지 명령을 받고 철거되었다. 1924년 평양의 양조회사인 제등주장(齊藤酒場)의 사이토(齊藤久太郞)가 주도하여 가부키좌가 철거된 자리에 새로운 극장을 짓기로 하고 그 이름을 제등주장의 명주인 “금천대”라는 이름을 가져와 금천대좌라 정한다. (<平壤に大劇場新築>, 《朝鮮新聞》, 1924.09.23.) 2년에 가까운 공사 끝에 1926년 6월 완공되었다 .(<近く竣工する平壤の金千代座>, 《朝鮮新聞》, 1926.06.28) 해방 당시까지 남아 있었던 평양을 대표하는 연극극장이었다. ② 평안극장(平安劇場 ) 침동(砧洞)이라 불리던 평양 남문통 2정목에 있던 활동사진관으로 1914년 12월 30일 개관했다. (<광고>, 《매일신보》, 1914.12.27) 1915년 7월 위생강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衛生講話場所>, 《每日申報》, 1915.07.23) 같은 해 10월 30일부터는 조선인 전용 영화관으로 운영되었다. (<평양 상설활동>, 《매일신보》, 1915.11.02) 1919년 2월에는 종래의 5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체하던 것을 3일 간격으로 교체하기로 한 내용이 보도 되었다. 1922년 8월 무렵까지 운영이 확인된다. (<반도 고학생 착발>, 《동아일보》, 1922.08.27) 그 무렵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③ 해락관(偕樂館) 1921년 5월 1일 평양부 수정에 설립된 활동사진관이다. 설립자는 평안남도 평의원과 상업회의소 의원직을 맡고 있던 구보(久保順吉)이다. (<평양 해락관 개관식>, 《동아일보》, 1921.05.10) 평양의 대표적인 활동사진으로 인정받던 해락관은 1937년 12월 총 공사비 30만원의 비용을 들여 신시가인 앵정 8번지로 이전 신축되었다. (<평양 해락관 신축코 낙성>, 《동아일보》, 1937.12.26)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구보(久保兵二郞), 지배인은 오카(岡妻男)이다. 좌석수 902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④ 제일관(第一館), 명성영화극장(明星映畵劇場) 제일관은 평양부 수옥리에 자리한 영화관으로 1923년 3월 4일에 건립되었다. 설립자는 평양상업회의소 부회두인 박경석(朴經錫)이었다. 이 극장은 평안극장이 사라진 이후 설립된 평양의 대표적인 조선인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1941년 무렵에는 박경석의 일가로 보이는 박순옥(朴淳玉)이 관주를 맡았다. 이후 제일관은 이름을 명성영화극장(明星映畵劇場)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순옥(창씨명 木山淳)이었으며, 지배인은 박종식(창씨명 木山宗植)이었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⑤ 평양키네마(平壤キネマ), 사쿠라극장(さくら劇場) 평양키네마는 1924년 평양부 앵정 53번지에 설립된 영화관이다. 설립주체는 주식회사 평양키네마로 평양상업회의소 상무위원을 역임한 오쿠타(奧田延之助)를 대표로 한 자본금 10만원 불입금 2만 5천원의 주식회사였다. 개관 당시 평양키네마에서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였으며 유명 변사 이코마 텐라이(生駒天雷)를 고빙해 오는 등의 활약으로 일약 해락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화관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1928년 3월 5일 극장 내에서 발화한 화재로 극장 일부가 소실되는 사고가 일어나 한동안 극장운영을 쉬기도 했다. 1943년 4월 1일을 기해 ‘미영색채 일소’를 위해 평양키네마라는 명칭을 사쿠라(櫻, さくら)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모리(森鍬市)이며 지배인은 시게마츠(重松安紀)이다. 좌석수는 367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⑥ 욱좌(旭座) 1924년 10월 15일 평양부 욱정 13번지에 지어진 극장으로 약 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설립 당시 조합장은 부협의원인 松尾六郞이었다. 개관 직후부터 경영난에 봉착하였는데 1926년 3월 16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⑦ 대중극장(大衆劇場), 평양동보극장(平壤東寶劇場) 대중극장은 1937년 평양부 앵정 7번지에 설립되었다. 마루야마(丸山花)라는 일본인이 세웠다. 해락관과 이웃하고 있었다. 도호(東寶)영화의 개봉관으로 활용되면서 이름을 평양동보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루야마(丸山ハナ), 지배인은 아사이(淺井正夫)였다. 좌석수는 904석이었다. 해방 이후 이름을 다시 대중극장으로 바꾸었다. ⑧ 평양영화극장(平壤映畫劇場) 평양부 수정 82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평양매일신문, 지배인은 사사키(佐々木惣次郞)이며 669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⑨ 화산좌(花山座) 평안남도 진남포부에 세워졌다. 1916년 5월 매일신보사의 순회 활동사진 상영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즉위례대성의(卽位禮大盛儀)의 활동사진>, 《매일신보》, 1916.05.25) 이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⑩ 항좌(港座), 항극장(港劇場) 항좌는 1919년 10월 평안남도 진남포부 용정정에 설립되었다 .(<남포 항좌 삼년 기념>, 《매일신보》, 1922.10.14) 1937년 중락관이 설립되기 이전까지 진남포의 유일한 상설관이었다. 1938년 9월 무렵까지 항좌라는 이름으로 존속이 확인 된다. 1930년대 말기에 항극장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부치(田淵哲次郞)이며 지배인은 시미즈(淸水健)이었다. 좌석수는 776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⑪ 중락관(衆樂觀) 진남포부 후포정 27번지에 있었다. 1937년 진남포의 실업가 서이근(徐利根)이 세웠다. 철골콘크리트 건물로 된 지상 3층, 지하 1층의 현대식 건물로 총 900여평에 달하는 거대한 영화관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서이근(창씨명 大利根進), 지배인은 핫포(八方勝)이다. 총 886석의 좌석을 갖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순천극장(順川劇場 ) 평안남도 순천읍에 있던 극장이다. 1935년 3월 빈민구제를 위한 자선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린바 있다. (<순천 동정음악 오십여원이 수입>, 《동아일보》, 1935.03.02.) 이를 통해 볼 때 1935년 무렵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장현택(張賢澤)이며 300석의 좌석수를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다음, 평안북도의 극장은 아래와 같다. ⑬ 신극장(新劇場), 신영극장(新映劇場) 신의주의 활동사진관으로 정확히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22년 5월 경성일보 애독자 위안 활동사진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었으며 (<광고>, 《경성일보》, 1922.05.16) 1923년 7월 고국을 방문한 하와이 교포학생들의 환영행사, 1923년 12월 도청이전 축하회 여흥 활동사진 상영행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1920년대 초반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 관객 대상의 대표적인 극장이던 신극장은 1940년대 신영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듯 보인다. 1939년 신의주 지역 국방헌금 납부 내역에 신극장의 이름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939년까지는 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던 것 같다. (<신의주 국방 헌금>, 《매일신보》, 1939.07.14) 1943년 현재 신영극장의 흥행주는 임경범(林京範), 지배인은 마츠바라(松原寬)이었다. 좌석수는 522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상반좌(常磐座) 신의주에 있던 활동사진관으로 정확한 존속기간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2년 7월 경성일보 애독자위안 활동사진회 (<광고>, 《京城日報》, 1922.07.10) 와 1923년 12월 도청이전 축하회 여흥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한 기록이 있다. (<축하회의 여흥>, 《동아일보》, 1923.12.06) 이를 통해 1920년대 초반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6월 정주음악대교육활동사진반의 활동사진상영회와 (<정주악대 내신(來新)>, 《시대일보》, 1925.06.18) 같은 해 8월 열린 수해 관련 활동사진상영회의 기록이 남아 있다. (<七일 신의주에 수해영사 공개>, 《시대일보》, 1925.08.07) ⑮ 신선좌(新鮮座) 1927년 10월 1일 신의주 매지정(梅枝町)에, 일본인 히라바야시(平林正)와 조선인 이태영(李泰永), 고성건(高成建) 등이 1만원을 출자하여 설립했다. 연극과 영화를 두루 공연하던 곳이다. 1933년 12월에는 극단 신무대 공연 중 무대 막에 불이 붙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동아일보 주최 독자위안행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와타나베(渡邊治太郞), 지배인은 다무라(田村直太郞)였다. 좌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세계관(世界館) 신의주부 상반정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3년 12월 도청 이전 축하회 여흥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한 기록이 있다. (<축하회의 여흥>, 《동아일보》, 1923.12.06) 1927년에는 일본인 변사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관주는 이시하라(石原)였다.(<변사 태업, 대우 개선 요구>, 《동아일보》, 1927.02.23) 1930년대 중반 관주 노다(野田白水)가 사망하면서 부인 기미코가 운영했는데, 그녀는 매월 26일 하루치 수입을 빈민구제에 기부하는 등 선행을 통해 큰 칭송을 받았다. (<세계관주 미거(美擧)>, 《동아일보》, 1935.05.06)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카노(中野キミ子), 지배인은 이케하타(池畑晉造)였다. 좌석수는 5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선천극장(宣川劇場) 1932년 12월 평북 선천읍 본정에 사사키운송점을 경영하던 사사키(佐々木光藏) 등 수 명이 세운 극장이다 .(<선천극장 신축 낙성식 거행>, 《매일신보》, 1932.12.14)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다케시마(武島壽吉), 지배인은 카나자와(金澤二鳳)였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⑱ 정상극장(定商劇場) 1923년 무렵 평북 정주읍에 설립된 극장으로 정주수해구제연예와 국민협회순회강연이 이곳에서 이루어진 기록이 있다. 1935년 정주유학생회의 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렸다는 기록 (<정주음악연주>, 《동아일보》, 1935.08.10) 을 마지막으로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⑲ 정주극장(定州劇場) 평북 정주군 정주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5년 1월 31일 구기회 주최 소인극에 관한 기록으로 보아 이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정주 구기(救饑) 연극>, 《동아일보》, 1925.02.04)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케다(池田寅雄)이며 좌석수는 500석이었다. ⑳ 북진극장(北鎭劇場) 평북 운산군 북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우미하라(海原正植)였다. 박노홍은 그를 창씨한 조선인이라 했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㉑ 의주극장(義州劇場) 평북 의주읍 동부동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가네다(金田孝兵)였다. 좌석수는 350석이었다. ㉒ 강계극장(江界劇場) 평북 강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0년 7월 31일 배우 왕평이 이 극장에서 공연 중 뇌일혈로 사망했다. (<˝최후의 무대˝-왕평군 공연 중 급사>, 《매일신보》, 1940.08.02)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니시쿠라(西倉高盛)이며 8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㉓ 만포극장(滿浦劇場) 평북 강계군 만포읍에 있던 극장이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수헌(창씨명 金津守憲)이며 지배인은 마츠다이라(松平哲夫)이다. 좌석수는 620석이었다. * [사진](상단) 근천대좌 낙성 당시 기사 사진(조선신문 1926.07.18) [자료] 《朝鮮新聞》, 1926.07.13. 壯麗を極むる 金千代座落成 勘彌一行を招聘して 十八日より舞臺開き 平壤壽町の中央に一昨年九月より建築工事を進め來つた劇場金千代座は此程愈愈落成を告げ來る十八日に盛大なる落成を擧ぐる事となつた同座は淸酒金千代釀造元の齊藤氏が平壤に娛樂機關としての劇場なきを憂ひ十萬圓の巨費を投じ財界不況の折柄にも拘らず犧牲を見込んで建設に着手したもので建坪二百七坪の煉瓦建ての高壯華麗なる場內の設備整頓せる慥に滿鮮一を以て誇るに足る大劇場である舞臺開きに招聘せられた守田勘彌一行は十七日に乘込み十八,十九の兩日間花花しく開演する事となり久方振に名優を迎ふる事とて非常な人氣を呼んで居るから二千餘名を收容し得る大劇場も大入滿員の盛況を見るであらうと豫想されてゐる(平壤) 寫眞は=新裝なつた平壤の劇場金千代座 [자료] 《朝鮮新聞》, 1926.07.18. 平壤金千代座 落成式に續いて 舞臺開き興行 內外の設備完成し平壤市街に一偉觀を添へた劇場金千代座は愈愈十八日午後二時より落成式を擧ぐる事となり座主齊藤久太郞氏は官民多數に案內狀を發したが招聘された帝劇俳優の守田勘彌一行の柿葺落興行は落成式擧行後引續き開演の筈で非常な人氣を呼んで居る(平壤) [자료] 《朝鮮新聞》, 1924.10.18. 旭座柿葺落し 平壤旭町に建設中の劇場旭座は內外の設備全く完成したので十五日正午平壤官民有志を招待して柿葺落しの式を擧げた神官の修○終りて松尾創立委員長の挨拶長富委員の工事報告に次で宮館府尹來賓を代表して一場の挨拶を述べ夫れより開宴京阪女歌舞伎一座の餘興劇あり盛況を極めた(平壤) [자료] 《동아일보》, 1921.05.10. 평양 해락관(偕樂舘) 개관식 조선에 제이 도회라 칭하는 대도회로서 상당한 오락장소가 무(無)함은 유감(遺憾)이라 하야 평안남도평의원과 상업회의소 의원의 공직을 가진 당지 유력자 구보순길(久保順吉)씨의 경영으로 평양 구시가의 중심 되는 수정(壽町)에 일대 활동사진 상설관을 건설하고 차(此)를 해락관(偕樂館)이라 하엿는데 차는 작년 八월부터 기공하여 대판(大阪)에서 전문기사를 초빙하야 관내외를 최신식으로 건축한바 세멘트와 연와제로 하고 정원 一천명을 수용할 대건물인대 금번 준공되엿슴으로 거 七일 오후 二시부터 시내 각 관공직자와 신문기자 급(及) 유력자를 초대하야 개관피로를 하여 활동사진 시영(試映)을 하엿더라. 그런데 당일 관주 구보(久保)씨의 례사(禮辭)가 잇슨 후 楠野 평양부윤의 축사와 松井 평양상의회두와 長谷川 평남매일사장의 축사가 유(有)하얏다더라. (평양) [자료] 《동아일보》, 1937.07.02. 남포의 영화 전당 중락관(衆樂舘) 낙성, 총공비 二十만원 【진남포】 전조선을 통트러 비겨보아도 제일 첫손가락으로 꼽힐만한 대중영화극장(大衆映畵劇場) 중락관(衆樂館)이 진남포 한복판인 후포리(後浦里)에 그 위관을 나타내고저 지금 공사가 착착 진행되고 잇다. 이 극장인즉 진남포 실업가 서이근(徐利根)씨의 장남 서기선(徐基善)씨가 문화사업(文化事業)을 하랴면 어떤 것이 조을 것인가 하고 다년 연구한 결과 육만 인구를 갖고 잇는 대도시 진남포에 정원 겨우 사백명밖에 못되는 극장 단 하나로서는 부 체면 상으로나 부민의 위안 처소인 오락기관으로 보아 도저히 그저 볼 수 없다고 해서 작년 五월에 인가를 얻어 각 방면으로 조사를 거듭하야 외관이며 내용이 다 가치 정묘하게 설게하여 금년 三월에 비로소 공사에 착수한 이래 그 공사를 착착 진행하는 중이다. 이제 이 중락관의 대개를 소개하면 구조는 철골 콩쿠리-트로 지하실을 합하야 四층 총평수 九百여평 정원 一千五百명의 대건물로 총공사비 二十만원을 요하며 영사기(映寫機)는 R·C·A발성기(發聲機) 중에도 최고급형(最高級型)으로 조선에는 처음 장치되는 것이라 한다. 오는 가을까지 기어코 완성케 하도록 주야 겸행으로 공사를 진행시키고 잇는 중인데 이 극장이 준공되는 날에는 진남포 시가에 일대 위관이 될 것은 물론이오, 영화전당으로 민중을 위하야 큰 행복이 될 것이라고 일반은 크게 기대하고 잇다.
독은기 (獨銀麒, 1910 ~ ? )는 출연작의 수에 비하여 전기적인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배우다. 일제의 영화인 등록 당시 본명은 ‘김영식(金永植)’으로 1941년 현재 31세라고 밝힌 일이 있으나, 중학 시절 한 방에서 뒹굴던 친구 김성칠(1913~1951)은 그의 본명이 ‘김춘득(金春得)’이라고 적고 있다.(?역사 앞에서?, 창작과비평사, 1993) 대구 출신인 독은기는 1930년대 전반기 대구를 거점으로 했던 이규환의 영화 제작을 돕다가 < 그 후의 이도령 >(1936)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했다. 이규환 은 < 바다야 말하라 >(1935)를 기획할 때 사재를 털어 제작비를 댔던 ‘김영식 소년’에게 토지 문서를 다시 찾아주고자 <그 후의 이도령>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김영식 소년’이 독은기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김영식 소년’이 독은기 든 아니든, 독은기의 영화 인생에서 이규환 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독은기의 출세작 역시 이규환이 연출한 < 나그네 >다. 이규환의 대표작이자 1930년대 후반 조선영화의 가작인 이 영화에서 그는 ‘복룡’(왕평 분) 가족을 비극으로 몰고 가는 ‘삼수’로 출연했다. 선 굵은 외모와 신인답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로 “성격적인 역에 꼭 맞는 타입”(남궁옥, ?조선영화의 최고봉 <나그네>를 보고?, ?매일신보?, 1937. 4. 25.)이라는 평을 들으며 토키 시대 주목할 만한 배우가 된 그는 성봉영화원의 두 번째 작품인 < 군용열차 >(1938)에도 출연한다. 독은기는 군용열차 기관사 ‘점용’(왕평 분)의 친구 ‘원진’을 맡았다. 기생인 애인의 몸값을 구하기 위해 스파이에게 군용열차의 정보를 누설하고, 그 죄책감 때문에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원진’의 서사는 이 영화를 끌어가는 중요한 축이었다. 이후 성봉영화원을 흡수한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제작한 < 새 출발 >(1939)과 협동예술영화사가 제작한 < 창공(‘돌쇠’) >(1941)까지, 이규환과 독은기의 인연은 이어졌다. 그러나 1942년 민간영화사들을 통폐합한 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출범하면서 그들의 영화적 교유는 일단 중단된다. 법인 조영에 가입하지 않았던 이규환 은 만주영화협회에 조선영화부를 설립하려다 좌절하고 귀국 후 연극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비행장에서 징용 생활을 했다. 반면, 법인 조영(朝映)의 연기부에 입사했던 독은기 는 < 젊은 모습 >(1943), < 조선해협 >(1943), < 병정님 >(1944), < 사랑과 맹세 >(1945) 등 여러 편의 선전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그가 맡았던 <젊은 모습>의 ‘금의환향한 지원병’, <사랑과 맹세>의 ‘전사한 지원병’은 늠름한 자태로 식민지 조선의 ‘아우’들에게 전쟁에 나가라고 부추기는 역할이었다. 또 평범한 농촌 출신 지원병 야스모토 에이치(康本瑛一)로 분한 <병정님>에서는 가장 계몽적인 발화자로서 ‘병영은 군인의 가정’이니, 걱정 말고 입대하라고 권유했다. 법인 조영 시대 독은기는 배우로서 가장 활력적인 시기를 보냈지만, 그가 맡았던 배역들은 식민지 청년들이 왜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되어야 하는지 추호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건강하고, 명랑한’, 평면적인 인물들이었다. 법인 조영에서의 활동은 해방 후 독은기 의 삶에 족쇄가 되었다. < 자유만세 >(1946)에서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 경찰의 사찰주임이 된 ‘남부’로 출연했던 것처럼, 일제의 선전영화 속 긍정적인 인물은 한 순간에 ‘매국노’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조선의 ‘아우’들이 우러르는 ‘형’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해방 후의 격동 속에서 그는 좌익 계열 영화인들의 조선영화동맹에 참여했다가 전향했지만, 남한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한국전쟁 중 월북하기까지 그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가난과 병마에 시달린 것은 물론, 식민지 말기의 ‘친일’과 해방 직후 ‘좌익’ 경력으로 남한에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한편, 그를 영화로 이끌었던 이규환 은 해방 후 조선영화동맹에 대항해 조선영화감독구락부를 결성했고, < 민족의 새벽 >(1947), < 갈매기 >(1948) 등을 연출하면서 다음 세대 감독들을 길러냈다. 독은기는 그와 함께 할 수 없었다. 재기를 꿈꾸었던 <하얀 쪽배>가 전쟁으로 중단되고, 국군의 서울 수복을 앞두고 있었던 1950년 9월 26일 늦은 오후, 독은기 는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지고 역사학자 김성칠의 집을 마지막으로 찾았다. ‘친일’에서 ‘좌익’으로, ‘전향자’에서 ‘월북자’로, 불운한 시대 전향을 거듭해야 했던 배우 독은기의 뒷모습을 옛친구는 몇 줄의 일기로 남겼다. “나는 오늘 저녁 한 사람의 양심적인 예술가를 또 북으로 떠나보냄에 있어 그가 이 몇 해 동안 병고와 생활난과 고문의 위협에 허덕이었음을 생각하고 이 땅의 문화 정책이 너무 빈약함을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 글: 이화진 (한국영화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