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순정인가
- 감독
- 서석주
- 제작년도
- 1959
- 출연
- 김석훈, 최준, 이해랑, 고향미, 도금봉, 임선자, 최남현, 백성희, 성소민, 이인범, 김백초, 이종철, 박옥초, 김희갑, 이경희, 현인, 신세영, 도성아, 신카나리아, 황금심, 김백희, 백설희, 조금앵, 김진진, 김경수, 임춘앵, 원방현
문화영화는 특정한 사상의 전파와 일반 대중의 계몽 혹은 지식의 전파를 증진할 목적으로 제작되는 각종 형태의 영화를 일컫는 용어이다. 보통은 관에서 주도하여 제작한 홍보영화와 계몽영화 등이 이러한 범주 안에 들어가는데 이러한 영화의 상영은 관에서 조직한 활동사진반의 순회영사 등을 통해 무료로 상영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문화영화를 통한 시국선전활동이 이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1939년 제정된 일본영화법 15조에서는 문화영화에 관한 규정을 두어 그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도 문화영화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조선문화영화사, 조선문화영화협회와 같은 영화제작회사가 설립되었고 조선영화사와 고려영화협회 같은 기존 극영화제작사에도 문화영화부가 설치되는 등 기존의 영화회사도 문화영화 제작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문화영화를 위주로 상영하는 영화관의 설립 역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문화영화 전용관의 설립은 기존에 영화관 출입이 어려웠던 학생 관객들을 수용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일본정부가 든 문화영화관 설립의 주된 이유는 정부에서 지정하는 문화영화 혹은 각 지방 장관이 문화영화로서 추천하는 영화를 학생들에게 공개하여 널리 구경시켜 지적인 면을 함양케 하는 동시에 정서 교육으로 많은 도움이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문화영화에 관한 관심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서도 문화영화 관람 기회를 늘리기 위해 문화영화관 설립이 가시화 된다. 조선에서 문화영화관은 백화점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설립이 추진되었다. 일반 영화관처럼 대극장이 아니어도 괜찮을 뿐더러 많은 관객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지리적 장점도 고려되었다. 당시 백화점 업계에서는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지속적인 불황을 타개하려 백화점 내에 극장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국의 문화영화관 설립 움직임과 맞아 떨어지면서 백화점 안에 영화관 설립이 추진된다. 1939년 서울의 백화점들은 상품선전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영업방식을 강구했다. 전통적으로 일본인 백화점으로 알려진 미쓰코시(三越), 미나카이(三中井), 조지아(丁字屋) 등 남촌의 세 백화점은 연합하여 미나카이 백화점 뒤편 소화통에 영화관을 지어 일정 상품을 구매한 사람들에게 무료입장권을 제공해주는 계획을 세운다. 문화영화관 설립을 추진 중이던 조선총독부는 백화점 업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백화점에 영화관을 설치하는 것을 허가해 준다. 총독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백화점에 영화관을 설립, 많은 이들이 시국선전용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선전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1939년 12월 23일, 미나카이 백화점 뒤편 소화통에 경일문화영화극장이 준공되어 개장식을 거행하였다. 경성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이 영화관은 200석의 좌석을 가졌으며 어른 20전, 군인과 소학생은 10전씩 요금을 받았으며 매일 오전 10시 개관하여 <경일세계 뉴-스>와 <요미우리신문 뉴-스>와 같은 뉴스영화, 문화영화, 만화영화를 상영했다. 이 영화관에서 문화영화를 감상한 임화(林和)는 극장의 규모가 좁아서 기분이 아담하고 저렴한 가격, 상대적으로 짧은 상영시간(1시간 반), 아이들과 어른들 누구나 볼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의 프로그램과 같은 장점들을 나열한 후 북촌에도 조선어신문사가 운영하는 이런 문화영화관이 생기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문화영화가 극영화 중심의 재래영화의 신생면의 하나라면 문화영화극장은 영화흥행 및 감상에 새로운 경지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임화, ““뉴-스”와 만화 경일문화영화극장“, 《매일신보》, 1940.2.9.) 라며 문화영화관의 장점을 강조하였다. 남촌의 백화점이 적극적인 영업정책을 세우자 북촌에 자리한 화신백화점도 백화점 6층의 다목적 홀을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영화관으로 개조하여 영업활동에 이용하기로 한다. 1940년 5월 28일 화신백화점 6층에 개관한 화신영화관은 경일문화영화관과 마찬가지로 뉴스영화, 문화영화, 만화영화를 비롯해 각종 선전영화들을 상영하게 된다. 1940년 11월 1일부터는 문화영화가 모든 극장에서 강제상영 된다. 아울러 조선 내에서 문화영화 제작도 활발해진다. 이에 따라 지방에서도 문화영화관의 설립이 추진되는데 1941년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상인천역 앞의 400여 평에 현대식 건축물로 문화영화와 뉴스영화를 상영할 극장을 세웠다. 경일영화문화관과 화신영화관 같은 문화영화 전용관이 들어서면서 백화점 업자들은 극장을 운영하는 것에 더해 독점적 영화제작이나 영화배급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특히 일제가 중일전쟁 장기화를 이유로 영화산업의 신체제를 천명하고 독점화로 산업재편을 꾀하자 백화점업자들은 이 독점기업에 참여하게 된다. 1942년 경성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다나카 시계점을 운영하던 다나카 사부로(田中三郞)를 중심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발족했다. 이 당시 조지야백화점의 고바야시 겐로쿠(小林源六)와 화신백화점의 박흥식(朴興植) 등이 발기인 겸 주주로 참여하였다. 또한 문화영화관을 운영하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각각 독점적 영화배급사인 조선영화배급사가 설립될 당시에 자본금 총 15만원 중 각각 2만5천 원씩을 투자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전쟁선전활동의 주요한 장소로 큰 역할을 담당했던 문화영화관들은 해방 이후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이중 화신영화관은 일반상영관으로 전용되었으며 경일문화영화극장은 폐관 되었다. * [사진](상단) 미나카이백화점 뒷편 경일문화영화관 [ 자료 ] 《 매일신보 》 , 1939.12.24. 경일 ( 京日 ) 문화영화극장 준공되어 성대히 개관 본정 ( 本町 ) 삼중정 ( 三中井 ) 백화점 뒤에 짓기 시작하든 경일문화영화극장 ( 京日文化映畵劇場 ) 은 저간에 준공되어서 23 일 개장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 이 영화극장은 반도의 새로운 문화를 소개하는 전당으로서 각 방면에서 오래전부터 긔대하던터이라 개장하는 날 각 방면 인사가 만히 와 관람하얏는데 좌석은 200 명을 수용할 수 잇고 입장료금은 어른 이십전 , 군인과 소학생은 십전씩이며 매일 오전 열시부터 개관하는데 경일세계 『 뉴 - 스 』 와 독매 ( 讀賣 ) 신문 『 뉴 - 스 』 문화영화와 밋 만화 등을 상연한다고 한다 . ( 사진은 경일문화영화극장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3.07.23. 예술가들도 총동원 , 호화롭게 전개될 징병축하행사 오는 팔월 일일부터 일주일간에 걸쳐 전개될 징병제 실시 감사의 기ᄲᅳᆷ은 전 동아에 펼쳐질 것으로 이 경축행사의 감격은 바야흐로 반도에 물 ᄭᅳᆯ듯 이러나고 잇는데 경성에서는 조선연맹 , 경기도연맹 , 경성부 등 삼연맹의 주최로 문화행사를 거행하기로 되엇다 . ▼ 팔월 삼일 오후 일곱시부터는 경성운동장 육상경기장에서 조선영화배급회사 , 조선음악협회 , 조선축음기제조협회 찬조로 음악과 영화의 밤을 개최할 터인데 제일부 음악데는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연주와 이인범 ( 李仁範 ) 씨의 국민가요 독창 , 현제명씨의 군가독창 등이 잇고 영화부에는 조선시보 , 일본 『 뉴 - 스 』 , 무적전차 ( 無敵戰車 ) 공의 신병 ( 神兵 ) 의 상영이 잇슬 터이다 . ▼ 그 이튿날 사일 오후 일곱시부터는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연극협회 , 조선문인보국회 , 조선영화제작회사 , 조선축음기제작협회 협찬으로 연극과 낭독의 밤을 열 터이다 . 영화극으로 조선해협 ( 朝鮮海峽 ) 의 상연이 잇슬 터인데 이 극에는 조영배우 일동이 출연하고 연극으로는 제일악극대 ( 第一樂劇隊 ) 의 『 격멸하고야 만다 』 일장의 상연이 잇게 되엿는데 참관 희망자는 이십육일ᄭᅡ지 왕복엽서로 조선연맹문화과에 신청하여 주기 바란다 . ▼ 그리고 미술과 문학전람회는 팔월 일일부터 칠일간 삼월 ( 三越 ) 백화점 조선 미술협회 조선문인협회 협찬으로 문인보국회 동인의 작품을 미술가들이 붓을 든 작품전시와 육해군에 관한 회화와 만화의 전람회를 개최할 터이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1.11.02. 고려영화 신작 풍년가 스틸전 ( 展 ) 정자옥 ( 丁字屋 ) 서 개최중 고려영화 신작 방한준 『 씨나리오 』 , 연출 金井成一 카메라 , 『 풍년가 』 는 저간 경성서 제작종료 하야 십월 중순경 방한준씨가 원판을 동경으로 가저가 전부 완료하야 래 ( 來 ) 오일 『 프린트 』 와 함께 귀성하기로 되엿는데 , 이에 압서 고영 ( 高映 ) 선전부에서는 지난 삼십일일부터 삼일간 확대 『 캐비네 』 백여점을 정자옥 사층 홀에 진열하고 『 풍년가 』 스틸전람회를 개최중이다 . 동 『 스틸 』 전람회는 연일 성황을 이루고 잇는데 오전 중에는 출연배우 김신재 , 최운봉 , 전택이 제씨가 『 푸로마이트 』 에 싸인을 해주기로 되어 잇는데 방금 신곡감사제 ( 新穀感謝祭 ) 로 풍년제를 각 기관에서 거행 중인 이ᄯᅢ 영화 『 풍년가 』 는 큰 의의를 가진 작품으로서 그 봉절이 자못 기대되어 잇다 . ( 사진은 스틸 전람회장 ) [ 자료 ] 《동아일보》 , 1940.05.28. 화신 ( 和信 ) 영화관 입팔일 ( 廿八日 ) 부터 개관 , 화신백화점 ( 和信百貨店 ) 에서는 뉴 - 스 영화관을 계획 중이엇는데 요즈음 준비가 되어 이십팔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엇는데 상영영화는 내외 뉴 - 스 급 문화영화 등으로 장안 종로 일대에 영화오락기관의 한 거름을 앞서 뉴 - 스영화를 일반 부민에게 제공하기로 되엇다 .
부민관은 1935년 12월 지금의 서울 중구 태평로 1가에 세워진 다목적 회관으로 각종 연극과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 장소이다. 부민관은 경성전기회사의 기부금으로 경성부에서 지었다. 1932년 전기사업을 독점하며 막대한 부를 획득하고 있던 경성전기주식회사에 대해 경성부민들을 중심으로 부영 계획을 세우는 등 움직임을 보이자, 경성전기주식회사는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100만원의 기부금을 경성부에 내놓는다. 거액의 기부금을 받은 경성부는 부민의 복리향상을 위해 이 기부금의 절반을 다목적 회관인 부민관을 짓는데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자료] “불원 착공할 부민관 정면도”(《매일신보》, 1934.06.27) 경성부는 일본기독교청년회관 부지 1,083평과 이왕직 소유의 덕안궁 터 873평을 매수하여, 부미관의 터를 마련하였다. 매수비용으로 이왕직에 4만원을 지급, 일본기독교청년회관에 대해서는 장곡천정 사회관 건너편 테니스장 561평을 대체부지로 제공하고 별도로 4만 2천원의 매수비용과 2만 3천원의 건물 이전 보상비를 지출하기로 한다. 부지 매수비용이 늘어나면서 예산은 60만원으로 증가했다. 공사의 시작을 알리는 지진제는 1934년 8월 15일 개최되었다. 1935년 7월 13일 상량식이 거행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0일 준공했다. 건축청부는 이키(三本) 합자회사, 냉•난방과 환기는 스기요시(杉由)제작소, 전기 시설은 가토(加藤)상회, 무대조명 시설은 가와베(川部)제작소가 맡았다. 부민관은 부지 1,780평, 건평 1,678평, 철근 콘크리트의 근대식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상자형태의 건물에 7층 높이의 높은 시계탑이 결합된 형태로 지어졌다. 내부에는 대강당, 중강당, 소강당, 담화실, 집회실, 부속실 등을 갖추었으며 이중 대강당은 3층 높이에 건평 301평 좌석 1,800석 규모였으며, 400석 규모의 좌석에 147평의 면적의 중강당과 40평에 좌석 160석의 소강당도 있었다. 경성부는 완공을 앞두고 부민관 사용 조례를 만들었다. 입장료는 무료입장, 유료입장, 영리목적으로 구분되어 차등적으로 정했다. 예컨대 1,800석의 대강당의 경우 주야간을 통틀어 사용할 시에는 하루에 60원(무료입장), 120원(유료입장), 300원(영리목적)의 사용료를 받았으며 난방이 필요한 시기에는 30원씩 사용료를 더 책정하였다. 1935년 12월 10일 개관식이 거행되었다. 개관식에는 조선총독이 참석하였고, 3일간 경성 5권번이 총출동하는 연예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부민관에서는 1936년 음력 설을 맞아 무용의 조택원, 만담의 신불출, 영화의 나운규가 출연하는 조선중앙일보 주최 “조선 3귀재 경연회”와 같은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다. [자료] 부민관에서 개최된 <3귀재 경연회> 신문광고(《조선중앙일보》, 1936.01.24) 거액의 운영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책정한 비싼 대관료로 인해 대관이 이루어지지 않는 등의 문제점이 개관초부터 발생했고, 그 타개책으로 토키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영사기와 발성기를 설치하는 방안이 고려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흥행업자들이 부민관을 대관하여 영화상영과 연극공연 등을 진행하자, 부민관이 흥행장으로 활용되는 것에 대한 다양한 비판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1939년 9월에는 본정서 관내의 명치좌, 낭화관, 중앙관, 약초극장, 희락관 등 5곳의 상설관이 부민관에서 흥행물 공연을 하지 말아달라는 진정을 당국에 제출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흥행업자들의 반발에도 부민관의 흥행은 계속되었다. 1941년 4월 언론에 발표된 1940년 부민관 사용건수를 보면 영화, 음악, 연극과 같은 흥행이 342건, 결혼식 200회, 간담회 162건, 총회 132건, 이하 강연, 강습회, 전람회 순이었다. 부민관이 흥행장화 되는 것에 대한 다양한 방면의 염려는 있었지만 전기료 등 고액의 고정비용을 부담하기 위해서는 흥행장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부민관의 호화로운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단체와 인물들이 많았기에 다양한 형태의 무대공연들이 끊임없이 부민관에서 개최될 수 있었으며 텐카츠(天勝)와 같은 일본의 유명 흥행단체들도 경성 공연 시 부민관을 흥행장소로 활용하였다. 최승희, 배구자 등의 무용공연과 계정식, 이인범 등의 서양음악과 아악이나 여류명창대회와 같은 전통예술 공연, 극예술연구회나 조선연극협회, 중앙무대 등의 신극공연과 “째즈와 무용의 밤”이나 “대중연예의 밤”과 같은 이름의 김해송, 이난영, 박향림 등 유명 가수들의 공연이 개관 초 큰 인기를 끈 프로그램이었다. 이중 1937년 5월 김영길과 미우라 타마키가 공연한 오페라 <나비부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공연으로 기록된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부민관을 시국강연장으로 활용하였는데, 방공방첩을 중심으로 한 사상전을 전개하기 위해 1939년 8월에는 연극인, 영화인, 가수 들을 총동원하는 방공음악영화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필름 수급이 불안정해지면서 연극이나 악극과 같은 무대극이 큰 인기를 끌었다. 박노홍은 부민관 무대에 가장 많이 공연한 단체는 조선악극단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외 라미라가극단, 반도가극단 등과 극단으로는 극예술연구회, 극단 고협, 극단 아랑, 현대극장 등도 이곳에서 다수 공연을 거듭했다고 전한다. 부민관 공연 중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소위 조선연극문화협회가 개최한 국민극경연대회이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극단들이 참여하여 3차례에 걸쳐 개최된 국민극경연대회의 1차, 2차 대회가 부민관에서 열렸다. 1942년 9월 18일부터 11월 25일까지 개최된 1회 대회에서는 현대극장, 극단 아랑, 극단 고협, 극단 성군, 극단 청춘좌가 각기 1주일씩 공연을 펼쳤고, 1막짜리 국어극(일본어 연극)이 추가된 제2회 대회(1943년 9월 16일부터 12월 26일까지)에는 1차 대회에 참여하지 못한 예원좌와 황금좌, 극단 태양이 추가되는 등 참여 극단의 수가 늘었다. 두 차례의 국민극경연대회가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자 3회 대회는 부민관이 아닌 부내의 일반 극장에서 나누어 개최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다양한 시국강연장으로 활용되던 부민관에서는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친일민족반역자인 박춘금이 개최한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이 폭탄을 설치하고 이를 터트려 대회를 무산시킨 소위 부민관 폭탄 의거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사실상의 마지막 의거였다. 해방 후 미군이 사용하던 부민관은 1949년, 서울시에 이관되었다. 1950년 4월 29일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로 2회 공연을 끝으로 국립극장으로써의 역할은 끝났다. 1954년 환도 이후 1975년까지 이곳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1975년 여의도에 새로운 국회의사당이 신축되면서 시민회관으로 그 용도가 변경되었고 1976년 시민회관인 세종문화회관이 신축되자 그 별관으로 사용되었다. 1991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서울시의회 건물로 용도가 변경되어 현재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던 당시의 모습(국가기록원) [ 자료 ] 《 동아일보 》 , 1935.12.06. 부민관 준공 부내 태평통 ( 太平通 ) 에 건축 중이든 부민관 ( 府民館 ) 은 드디어 7 일로써 공사는 완전이 끝낫으므로 오는 십일에 성대히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엇다 한다 . 그리고 동관을 일반에게 소개하기 위하야 십일부터 십삼일까지는 매야 육시를 기하야 연무 ( 演舞 ) 를 공연한다는 바 그 료금은 일등 오십전 , 이등 삼십오전 , 삼등 이십전씩이라 한다 . [ 자료 ] 《 동아일보 》 , 1936.01.29. 오십만원 들인 부민관 , 부민은 비난 부청은 두통 , 사용료는 비싸고 수지도 안맞아 , 사회과는 대책에 고심 경전 ( 京電 ) 이 전긔 독점 기한 연장의 조건으로 경성부에 백만원을 기부하야온 돈 중 오십만원을 뚝 띠어서 사십만 부민의 오락전당 ( 娛樂殿堂 ) 을 맨들겟다고 부내 태평통 ( 太平通 ) 에 지어 노흔 부민관 ( 府民館 ) 은 준공 후 겨우 일개월 밖에 되지 안흔 이즈음부터 부민의 비난에 싸혀 잇으며 또 부 당국으로서는 수입이 예상 의외로 적어서 경영이 곤난하다 하야 그에 대책에 머리를 알코 잇다 한다 . 즉 그 리유는 동관의 사용료 ( 使用料 ) 가 턱없이 비싸다는 것인데 가장 부민이 많이 이용하게 될 대 “ 홀 ” 의 사용료는 하로밤에 이백사십원 , “ 피아노 ” 대가 삼십원 , 겨울이면 “ 스팀 ” 값까지 붙여서 하로밤에 삼백여원의 사용료를 지불하게 된다고 한다 . 이와 같은 현상임으로 일반 흥행업자 또는 음악가협회 ( 音樂家協會 ) 같은 데서는 보고도 못 먹는 떡이라 하야 부에 대한 비난이 자못 높으며 , 따라서 동관의 수입으로써 동관의 유지를 꾀하든 부 당국에서는 수입이 적음으로 어떠케 경영해 갈 바가 문제인지라 직접 관게를 맺고 잇는 부 사회과 ( 社會課 ) 에서는 아직까지 동관의 예산 편성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한다 . 동관이 준공된 후 지금까지 사십팔일 동안에 대 “ 홀 ” 을 유료 사용한 날짜는 십삼일밖에 되지 안는다 한다 . [ 자료 ] 《 동아일보 》 , 1939.3.18. 영화연극으로 일할 ( 日割 ) 독점 , 영리장화한 부민관 , 부회 ( 府會 ) 에도 상정되어 상당히 파란 일 듯 , 본정서 ( 本町署 ) 에서 개선에 진출 최근 태평통 ( 太平通 ) 부민관 ( 府民館 ) 은 설립 당초의 취지인 일반 부민에게 이편을 주는 여러 가지 개최물을 하는 동시에 회합장소로 이용한다는 본래의 사명을 전연 망각하야 영리 ( 營利 ) 위주의 영화연극을 매일 같이 상영하야 업자들은 물론 학동을 가진 가정에서도 물의가 등등한데 이 문제는 금일 부회 ( 府會 ) 에서도 상정되어 상당한 파란을 이르킬 것인데 부민관은 상설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설관과 똑같은 역활을 하고 잇다 한다 . 이리하야 영화 재상연으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무리들이 오 , 육개월 전부터 날짜를 전부 게약하야 노아 보통 사람이 일반대중을 상대로 하는 강연 회합을 하려고 해도 날자가 비여 잇지 안어 부민관을 결국 사용치 못하는 형편이라고 한다 . 특히 모극단 모극장에서는 부민관과 결탁하야 언제나 토요 , 일요 , 휴일이 끼인 조흔 날이면 언제나 사용할 수 잇게 되어 잇다하니 이 역시 상설관 업자들이 불평을 일으키는 초점이라고 한다 . 그리고 상설관에 출입하는 생도 학생이면 학교당국과 보도연맹 ( 報導聯盟 ) 이 취체하야 엄벌에 처하지만 이 부민관은 상설관이 아닌 관게로 학생생도가 나뿐 영화를 보아도 무간섭하므로 이용자의 대부분은 남녀학생들이므로 학생교화상 ( 敎化上 ) 여간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 그런데 날짜를 미리 잡아 두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수수료를 받고 파는 뿌로커도 잇다는데 이 현상이 그대로 계속되면 앞으로는 영화 , 연극 상설관과 조곰도 다름없는 상설관으로 화할 터이니 일반은 회합에 이용할래야 도저히 이용할 수 없을 터이니 부민관 창설 본래의 사명은 잊고 말 것으로 이 문제는 학교와 사회 , 영화업자에게 큰 파문을 던질 것으로 그 귀취는 매우 주목되고 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