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영화
- 감독
- 이정흠
- 제작년도
- 2025
- 출연
- 전여빈, 서현우, 이설, 서이서, 김은비, 박은우, 허정도, 주민경, 문성근, 권해효, 오경화, 이주승, 장재호, 서정연, 오민애, 전석찬, 예수정, 한종훈, 김정영, 손병욱, 김재철, 이상희, 정휘, 남궁민, 박효은, 공민정, 정영숙
이장호 는 70년대 '영상시대' 활동과 더불어 ‘청년영화의 기수’였으며 ‘최초의 스타감독’이라고 불린 시대적 문화 아이콘이었다. 특히 80년대는 이장호의 전성시대였다. ‘80년의 봄’, 4년여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 바람 불어 좋은 날 >은 당시 청년 영화인들의 교과서였다. 당대 발표된 ‘80년대 한국영화 베스트 10’에는 그의 영화가 4편이나 선정되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보선언 >,< 과부춤 >과 더불어 그 목록에 포함된 영화가 바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다. 85년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이제하의 단편 소설을 영화로 옮겼다. 85년 영화제작 자율화 시행 이후 그가 설립한 판영화에서 제작하였는데, 87년 어렵게 허리우드 극장에서 개봉을 했으나 관람 숫자는 미미했다. 당대의 지배적인 한국영화 관람 체험 속에서 이 영화는 낯설었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영화는 편안한 관람 행위를 허하지 않는다. 수려하지만 그 수려함을 세피아톤으로 톤 다운시켜 놓은 강원도 산길을 익스트림 롱 쇼트의 롱테이크로 찍은 화표면은 마치 정지된 스틸의 그것 같다. 화면 왼쪽으로 원경에서부터 쭉 뻗은 길로 남자와 여자가, 그리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천천히 다가온다. 그러나 화면 앞 가장 가까운 거리에 도달할 때 까지도 그들은 식별되지 않는다. 아울러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다른 내재적 사운드가 소거된 상태에서 마치 보이스오버처럼 원근감 없이 들려오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 소리는, 현재 그들이 나누는 대화인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이미지와 비동조화된 사운드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인과법칙에 기초하지 않은 서사의 진행, 행위에 대한 동기와 설명의 희박함,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지우는 쇼트의 배열, 극적 흐름과 맥락을 단절시키는 몽타주 시퀀스들은 시공간적 통일성과 연속성의 감각을 흩뜨리면서, 샤머니즘적인 운명론적 세계관의 묘사와 맞물려, 종국에는 불가해한 재현의 지점에 다다른다. 영화는 크게 황토 빛 모노크롬과 푸른 빛 모노크롬으로 처리된 두 개의 의미 계열체로 구성되어 있다. 몇 개의 시간적 재배치가 있으며 간헐적으로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허무는 주관적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황토 빛 모노크롬의 세계는 대체로 3박 4일의 여정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적 현재를 재현한다. 반면 그 황토 빛 시공간을 절단하고 틈입하는 푸른 빛 모노크롬의 의미 계열체는 인물들의 회상, 주관적 플래시백, 의식의 흐름, 운명적 암시 같은 현재 시제를 벗어나, 충돌하며 운동하는 이미지들의 배열이다. 이장호는 <바보선언>에서 실험했던 즉흥적이고 연상적인 연출법을 재도입하는데, <나그네>에서 그러한 연출 방식은 명확한 좌표 없이 강원도를 떠돌며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직면하는 인물들을 그리는 데에는 더없이 잘 맞아 보인다. 개성이 고향인 사내와 전쟁 통에 고향이 어딘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아내, 휴전선 부근 월산이 고향인 노(老) 회장 모두 전쟁으로 인하여 이산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속초, 원통, 강릉, 경포, 인제에 이르는 영화적 공간에서도 원통, 속초 등은 분단과 그 결과인 휴전선 아래 마을들이다. 영화는 이러한 공간의 지정학적 의미를 예민하게 포착한다. 예컨대 여행 첫날 사내가 아내의 유골을 바닷가에 뿌리려다 군인에게 제지를 당하고 결국 철수하는 것이라든가, 강릉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회를 파는 전주식당의 사장이 "전쟁 통에 나같이 된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냐"고 반문하는 것 등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몇몇 장면은 자유연상과 자동기법으로 이러한 역사적인 지정학적 트라우마 의미를 기입한다. 백사장에 놓은 가방 속 아내의 유골을 바라보던 시선이 “고향이 원산은 아니라예”라는 아내의 목소리 사운드와 연결되면, 강릉 앞바다 위로 포화와 피난 행렬을 담은 한국전쟁 당시의 뉴스릴이 오버랩 된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 시선의 주체를 알 수 없는 일련의 국도 이미지의 몽타주 시퀀스 끝에, 우리는 국방 한계선과 상판이 없이 끊어진 다리와 마주하게 된다. 그러한 시도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담대하다. 영화 전체에 걸쳐 산포되어 있는 분단의 트라우마가 영화적 주요 배음을 이루고 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샤머니즘적 운명이라는 또 다른 배음이 날 선듯한 감각으로 강화된다. 사내의 주체의 중심 없음 혹은 부유(浮遊)함은 실향(失鄕)과 상처(喪妻)의 중층 결정의 결과물이다. 실향의 감각은 아내의 죽음과 이중 노출되어 있으며, 그와 연합된 상실감과 죄책감은 노정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성매매 여성과 ‘색시’, 그리고 ‘미세스 최’에게 투사된다. (아내, ‘색시’, ‘미세스 최’는 모두 이보희 가 연기한다) 서사가 진행될수록 영화는 최가 몇 해 전 받았던 점괘, 즉 “나이 서른에 물가에서 관을 세 개 짊어진 남자를 반드시 만날 것, 그가 전생의 남편”이라는 운명론적 예언을 향해 가는데, 기실 색시와 최는 모두 아내의 더블들이다. 그와 간밤에 관계를 가졌던 ‘색시’의 죽음은 아내의 죽음에 대한 환시(幻視)로 대체된다. 최가 고향을 언급하며 “아우라지강을 아세요”라고 언젠가 죽은 아내가 했던 말을 똑같이 사내에게 건넬 때, 최는 정확히 아내의 도플갱어로 확증된다. ‘미세스 최’란 인물은 철저히 대리보충적인데, 그녀는 지난 2년간 중풍환자 회장의 ‘인간 핫 팩’으로서 그가 결여한 혹은 상실한 온기, 활력, 고향의 따스함을 대리보충 해왔다. 그 역할은 사장 아들이 특파한 상무에게 끌려가면서 회장이 손에서 놓아 버린 낡은 사진과 기능적으로 같다. 또한 그녀는 남자에게는 죽은 아내의 대리보충이며, 마지막에는 오구굿 중 신내림을 받음으로써 영혼에게 몸을 주는, 사령(死靈)들의 대리보충 역할이 된다. 결국 남자의 주체성의 위기는 복구되지 않으며 파국을 맞는데, 그것은 죽은 아내의 대리보충으로써는 온전한 애도작업을 완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완수되지 못하는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인 애도작업은 신내림의 형태로 최에게로 전이되며, 민족적 해원의 무게는 그녀의 무속 연행에 맡겨진다. 이장호의 80년대 작품 연보에는 사회적 참여의식이 강한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들과 대중추수적인 흥행 영화들, 그리고 작가의식이 녹아든 영화들이 교차했다. ‘황토빛 모노크롬 영화 한편 찍고 싶다’는 로망을 실현하고자 이장호가 직접 제작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처음부터 지방흥행업자들의 투자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 결과 그의 작품연보에서 그리고 한국영화사에서 아주 낯설고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 내었다.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고화질 VOD 보러가기 <<
한국전쟁은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부모형제들과 고향을 잃었다. 이제하의 원작을 각색한 이장호 의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는 알레고리와 은유를 통해, 한국전쟁의 비극과 분단의 상처를 그려낸 영화이다. 계해년(1983)이 저무는 12월 중순, 순석은 3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의 유골 가루를 갖고 속초에 도착한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출세를 위해 갖은 고생을 감내하며 병마에 시달리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의 아내가 “고향이 원산은 아니라오”라고 했던 말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다. 여기서 그는 죽음이 임박해 한사코 고향으로 가려는 노인과 마주친다. 강원도의 비무장 지대 어디쯤으로 추정되는 노인의 고향 월산은 분단 상황에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이지만, 그럼에도 노인은 간호사 영숙을 조르고 졸라 북쪽으로 향한다. 노인의 아들은 “남쪽에서 자수성가했으니 이제 남쪽이 고향”이라고 주장한다. 아들의 반대로 노인의 바람이 끝내 좌절될 때, 영화화면은 노인의 기억 또는 상상을 따라 그의 고향으로 나아간다. ‘통일의 길’이라는 표지석을 지나, 끊어진 다리를 지나,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을 지나, 마침내 고향 월산에 도착한다. 그러나 순석이 돌아다니는 현실의 이곳은 금지의 공간이다. 바닷가에는 초병이 소총을 겨누며 검문을 하고, 차도에는 바리케이트가 즐비하다. 또한 꽁꽁 얼어붙은 대지에 또 다시 대설주의보가 내려지는 공간이다. 눈 덮인 공간에서 사람들의 이동은 제한되고, 서로 고립된다. 뿐만 아니라 순석이 만난 두 명의 매춘여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사실 노인과 순석은 아무 사이도 아니며 어떤 접점도 없다. 그러나 노인의 ‘실향’과 순석의 ‘상처(喪妻)’를 통해, 영화는 기이한 접점을 만든다. 다시 말해서 분단으로 인한 노인의 상처가 순석에게로 전이된다. 여기에 더해 순석 앞에 펼쳐지는 한국전쟁의 한 장면과 “김일성은 죽어야 된다”고 끝없이 반복하는 청년과 하늘을 나는 까마귀 떼는 한국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트라우마를 드러낸다. 한국전쟁의 상처와 레드콤플렉스가 각인된 대한민국의 한 공간에서, 순석은 점쟁이의 예언처럼 ‘물가에서 관 셋을 짊어진 사내’가 된다. 그것은 자살로 추정되는 아내의 죽음과 또 다른 죽음들에 대한 그의 깊은 죄책감을 나타낸다. 노인에게 일종의 매춘행위를 했던 간호사 영숙 또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린다. 순석이 영숙의 전생의 남편이라고 했던 점쟁이의 예언에 따라, 그들은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 죄책감을 둘러싼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그들은 급속히 가까워진다. 이제 사랑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러면 두 사람은 괜찮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분단이 지속되고 있는 겨울이며, 급사한 영혼들이 떠도는 죽음의 공간이다. 순석이 여관 앞마당에 아내의 유골 가루를 뿌리기는 했지만, 그 죽음(들)을 애도하지 못하면 두 사람의 행복한 미래는 불가능하다. 순석은 먼저 서울로 가서 영숙을 기다리기로 하고 배를 타러 간다. 이때 강가에는 고향에 가지 못하고 죽은 자의 넋을 기리는 굿이 펼쳐지고 있다. 순석의 배가 떠나갈 때, 굿을 구경하고 있던 영숙은 갑자기 신내림을 받는다. 비로소 애도는 시작되지만, 영화 첫 장면에서 함께 눈길을 걸었던 두 사람은 이산가족처럼, 남북의 분단처럼, 끝내 헤어지게 된다. 순석은 다시 아내가 될 여자를 잃고, 영숙은 다시 전생의 남편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시급한 과제는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작업이었다. 그러나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분단 상황에서 애도는 불가능했다. 수행되지 않은 애도는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그에 따른 후유증도 해소되지 않은 채 남겨졌다. 그러므로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에서,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의 다음 세대인 순석은 관 셋을 짊어진 채 떠돌아다니고, 영숙은 애도작업으로서의 씻김굿을 수행하게 된다. 무당이 되어가는 그녀를 보며 경악하는 순석의 눈앞에 거대한 손바닥이 나타난다. 어지럽게 엇갈리는 손바닥의 금들은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뿐만 아니라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