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 감독
- 박찬현
- 제작년도
- 2012
- 출연
- 김시현
사진: “ 부천에서 우주 속을 걷다 뉴미디어 끝판왕 프로그램 ‘비욘드 리얼리티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아바타를 제외한 3D가 산업과 영화에서 사라진 것처럼, 새로운 영상의 미래처럼 울려 퍼지던 VR의 장밋빛 미래가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앞다퉈 VR 영화를 내세우던 영화제들은 AI가 등장하자, 이제는 AI가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꿀 것처럼 쉽게 갈아탔다. VR 영화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VR이 갖고 있는 잠재성과 미학을 아직 우리는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VR 360° 영상은 구면 전체(수평 360°, 수직 180°)를 제공하지만, HMD는 사용자가 고개를 돌리는 방향을 중심으로 장치에 따라 약 110°(수평) × 90°(수직) 안팎의 제한된 영역만 보여준다. 따라서 관객이 정면을 중심으로 머무를 때, 실제로 한 순간에 지각하는 영역은 구면 전체가 아니라 정면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시야다. 관객들은 VR 영화에서 360° 시야를 다 관람할까? YouTube VR 시청 분석에 따르면 사람들은 360° 영상에서 재생 시간의 75%를 정면 90° 안에서 보낸다고 한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정적인 360° 장면을 처음 접했을 때 관객들이 넓은 영역을 탐색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 영역으로 시선이 수렴하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했다. 360° 영상이 제공하는 시야와 관객이 실제로 사용하는 지각적 영역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360°의 공간 전체가 주어졌다고 해서 관객이 그 전체를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VR 영화 시청 시 관객은 주로 정면 영역의 요소에 집중하고, 고개를 크게 돌려야 하는 뒤쪽 영역은 덜 찾아본다. 관객이 몸을 움직여 돌아볼 때도 화면 안의 사건이나 서사가 제공하는 중심적 단서를 따라가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일부 VR 영화 제작 현장 가이드에서는 관객의 주의가 정면 중심 90° 원뿔 안에 집중되므로, 서사적 이미지는 정면 중심 90°~120°에 집중되도록 설계해야 한다고 안내한다. 360° 공간 전체를 활용하려면, 감독이 관객의 360° 시선의 이동을 설계하고 유도해야 한다. 지금까지 VR 영화 연출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의 시선을 특정 방향 중심으로 고정하거나 감독이 의도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집중해왔다. VR 영화 < 동두천 >(김진아, 2017)의 도입부, 동두천 역 앞에 배치된 360° 카메라가 롱테이크로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적하고 활기가 없어 보이는 거리, 역 앞이지만 오고 가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미군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역 앞을 지나간다. 프레임 안에 무엇을 따라가야 할지 모르겠다. 커다란 변화가 없는 화면이 계속된다. 관객의 시선을 유도하는 서사도, 명징한 피사체도 없는 화면이 지속된다. 이 지루한 화면이 VR이란 매체의 선입견과 만나면서 관객은 체험을 스스로 찾기 시작한다. 앞을 주시하던 머리와 시선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도 자극적이거나 시선을 끄는 장면이 없다. 이제는 몸도 움직인다. 회전의자에 앉은 몸이 무언가를 찾아 돌기 시작한다. 머리와 몸이 움직이고 이 시간의 지속을 함께하다 보면 화면 안 낮은 해상도를 넘어 아주 사소하고 작은 움직임과 변화들이 나타난다. 바람이 부는 것 같다. 먼지가 날리고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린다. 평소에 관심도 갖지 않은 비닐봉지가 화면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인다. 이 비닐봉지는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관객의 머리와 몸이 360° 화면 안에서 그 위치를 향하고 있지 않다면 만날 수 없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화면 안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관객의 신체가 그 방향을 향하지 않는 순간에는 현재의 지각적 이미지가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컷에서는 어딘가 강아지가 들어온다. 내 몸이 놓인 위치에 따라 우연히 등장하는 이 강아지를 처음부터 목격할 수 있고, 내 몸이 다른 위치에서 시작되었다면 강아지가 프레임 인 될 수도 있다. 화면 안 피사체의 등장과 퇴장도 우연이지만, 그 피사체가 화면 안에 등장하는 시간도 나의 신체와 만나면서 우연적으로 구성된다. 이때 발생하는 이미지는 화면 안의 피사체와 헤드셋을 쓰고 멈춰 선 나의 신체가 만나 발생시키는 몽타주다. 아주 사소한 화면 안의 변화들을 따르거나 변화를 발견하지 못해도, 컷 안의 물리적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헤드셋을 쓴 머리와 몸이 회전한다. 머리와 몸이 작은 움직임을 찾아 따라 움직이다 다음 컷으로 전환된다. VR 360°의 특성상, 관객의 머리와 몸이 자신이 향하고 있던 방향에서 다음 컷의 첫 장면을 만난다. 두 번째 컷도 360°의 화면을 담고 있지만, 컷이 이어지는 순간 관객이 현재 향하고 있는 방향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시야에서 시작된다. 이때 만들어진 두 컷 사이의 몽타주는 전통적인 2D 영화에서처럼 하나의 공간적 관계로 완전히 결정된, 감독이 계산한 몽타주가 아니다. 감독이 결정하는 것은 두 쇼트의 시간적 순서와 절단의 순간이지만, 그 절단이 일어나는 순간 관객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는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사진: “ BIFAN의 순간들 Ⅶ : 비욘드 리얼리티 Beyond Reality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시간적 절단은 감독의 것이지만, 공간적 접합은 관객의 몸에 의해 발생한다. 관객은 변화를 좇거나 멈춘 자리에서 다음 컷의 첫 이미지를 만난다. 이렇게 이어진 두 컷의 몽타주는 편집실에서 하나의 관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관객의 몸이 찾고 머문 신체의 흔적을 통해 그때마다 다르게 발생한다. 관객의 몸이 변화를 찾다가 만난 이미지와 다음 이미지의 관계가 하나의 몽타주를 만든다. 화면 안의 체험을 따라 몸이 움직이고 몸의 반응에서 다음 컷을 만난다. 첫 번째 컷과 두 번째 컷의 연결로 발생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세 번째 컷에도 같은 관객의 신체가 만드는 몽타주가 발생한다. 이러한 몽타주가 축적되면서, 하나의 작품 안에서도 관객마다 서로 다른 이미지의 연쇄가 만들어진다. 한 명의 관객이 동일한 작품을 여러 번 봐도, 서로 다른 관객들이 같은 작품을 봐도 그때마다 동일한 상영 안에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미지의 관계가 계속해서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 VR 영화가 만날 수 있는 체험이 아닐까. 감독 개인의 생각과 의도로 배치되고 읽혀야 할 영화에서 감독은 시간에 대한 선택과 공간에 대한 카메라의 배치를 결정하고, 관객은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신체를 움직이며 자신이 만나는 이미지를 구성한다. 이때 관객은 감독을 대신하여 영화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도 자신의 신체가 만나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매번 다른 영화를 발생시키며 관객이 또 다른 창작자가 되는 순간이다. 영화의 완성된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경험을 통해 매번 다른 이미지의 몽타주를 발생시키는 관객이 되는 것이다. 감독과 관객의 위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화의 한 부분을 결정하는 권한이 감독에게서 관객의 신체로 이동하는 순간이 발생한다. 감독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관객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전통적인 영화의 관계와 달리, 관객 모두가 감독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VR 영화일지 모른다. <동두천>의 도입부는 그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 낮의 공간이 밤으로 바뀌고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컷들은 그 여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카메라가 서고 관객들은 어둠 속의 골목에서 어디론가 향하는 그녀만을 바라보게 만든다. 앞선 장면에서 관객의 몸이 스스로 공간을 탐색하고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했다면, 이 장면부터는 영화가 관객의 시선이 향해야 할 방향을 강하게 지정하기 시작한다. 또 다른 창작자로서 영화를 체험하고, 자신의 신체를 통해 영화의 공간적 관계에 참여하며 각자 다른 영화를 만나던 관객들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가게 만드는 감독의 개입으로 시선은 고정되고, 몸도 묶인다. 그리고 어느 방으로 안내된다. 방 안에 카메라는 오랫동안 머문다. 하지만 첫 컷이 준 이미지와 달리 이후의 장면은 보다 강력하게 시선을 유도한다. 영화가 처음에 스스로 열어놓았던 VR 영화의 잠재성이, 하나의 강력한 의미와 서사 안으로 다시 수렴한다. 어쩌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VR은 바로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360°의 공간이 아니라, 관객의 몸이 영화의 구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비로소 발생하는 새로운 영화적 관계 속에. <열차의 도착> 중 / 사진: IMDb( 1 , 2 ) 뤼미에르 < 열차의 도착 >(루이 뤼미에르, 어거스트 뤼미에르, 1895)이 상영되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오는 기차를 처음 경험했다. 그 강렬한 체험으로 시작된 영화는 기존의 지각을 바꾸고,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첫 영화의 등장은 객석이라는 고정된 공간에 관객의 신체를 묶어 놓은 채 일어난, 강제적이며 수동적인 지각과 사유의 변화였다. 반면 VR은 관객이 몸을 구속받지 않고 능동적 신체로 맞이할 수 있는 체험이다. VR 영화는 <열차의 도착> 이후 가장 큰 체험과 사유의 변화를 품고 있다. 영화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한 지점에서 회화를 감상하는 시각이 아니라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촉각을 갖게 되었다. 그 지각의 변화는 인습적인 사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다. 감각이 바뀌면 지각이 바뀌고, 지각이 바뀌면 사유가 바뀌며, 행동과 삶이 바뀔 수 있다. 그것이 영화가 갖고 있는 사유의 능력이다. 들뢰즈는 세계가 이미지들의 체계이며, 영화는 그것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영화는 이미 도래했지만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들뢰즈는 영화가 인간적 지각을 넘어설 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지각을 만나고, 그 지각이 사유를 연다고 말한다. 그 출발점에 신체를 둔다. 『시네마 2(Cinéma II)』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내게 신체를 달라. 이것은 먼저 일상적 신체 위에 카메라를 걸쳐 놓는 것이다.” [1] 들뢰즈에게 신체는 화면 속 인물의 신체였다. VR 영화는 카메라를 관객의 신체 위에 얹는다. 헤드셋을 쓴 관객의 머리가 곧 카메라의 방향이 되고, 관객의 몸짓이 이미지와 이미지의 관계를 만든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매번 앞의 장면을 지우면서 현재의 장면을 만난다. 현재의 새로운 지각은 때로는 기억과 만나 내 안에 다른 이미지를 만든다. VR에서는 같은 영화를 봐도 관객마다 서로 다른 지각의 경로가 생긴다. 동일한 이미지의 공간 안에서 누군가는 왼쪽을 보고, 누군가는 뒤를 본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만나고, 서로 다른 영화를 경험한다. 각자의 신체를 통해 서로 다른 영화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관객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여러 지각들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며 도래한다. 들뢰즈에게 ‘민중’은 이미 존재하는 집단의 재현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집단으로 불러내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집단이다. VR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은 새로운 매체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다. 관객의 몸이 영화의 구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발생하는 새로운 영화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지각의 집단, 아직 구성되지 않은 영화적 주체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서로 다른 방향을 선택한 몸들이 하나의 시선으로 통합되지 않은 채, 같은 영화 안에 함께 있다. 어쩌면 이것이 도래하지 않은 민중의 도래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신체가 서로 다른 지각의 관계를 만들면서 하나의 작품 안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관객 모두가 창작자가 되어, 관객의 몸이 영화의 구성에 들어와 매번 다른 영화를 발생시키는 것. 어쩌면 VR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n명의 감독을 도래시키는 매체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영화를 통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민중의 도래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 [1] 질 들뢰즈, 『시네마 2(시간-이미지)』, 이정하 옮김, 시각과언어, 2005, 378쪽. More Than 라이브 액션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박홍열(촬영감독·다큐멘터리 감독) l 홍상수 감독의 < 하하하 >(2010)에서 < 밤의 해변에서 혼자 >(2016)까지 10여 작품, < 원더랜드 >(김태용, 2024),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박동훈, 2021), <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2016), < 간신 >(민규동, 2014) 등 100여 편이 넘는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현대미술 등의 촬영감독으로 활동. < 반칙왕 몽키 >(2026), < 음악만세 >(2026), < 풍경드리프팅 >(2024), <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2023),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1 , 2 ) 등 다큐멘터리 연출. 현재 《씨네21》에서 ‘박홍열의 촬영미학’ 기고 중.
<백룸> 중 (사진: IMDb / © A24) 기억에 남는 불안이 있다. < 1917 >(샘 맨데스, 2019)에서 데번셔 연대의 무모한 돌진을 막아낸 스코필드가 블레이크의 형을 찾아 야전병원 막사에 당도했을 때, 나는 영화가 쌓아온 서스펜스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불안에 사로잡혔다. 막사 저 멀리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화 내내 스코필드에게 밀착해 있던 카메라가 거의 유일하게 인물을 놓아두고 홀로 날아오르기 시작했고 끝내 그 나무 아래서 이야기의 문을 닫는다. 눈을 뜬 남자가 한바탕 소동을 끝내고 다시 나무 아래서 눈을 감는 이야기. 헛웃음이 나올 만큼 도식적인 수미쌍관 구성은 경탄스러운 카메라 무빙을 한 편의 허탈한 동화로 바꿔놓았다. 극장을 나서며 이렇게 적었다. “대체로 무용(無用)한 것들을 사랑하는 편이다. <1917>은 카메라의 쓸모, 자신의 효용을 수다스럽게 떠들어대는 것 같아 왠지 안쓰러웠다. 문득 침묵할 줄 알았던 카메라들이 그립다.” 당시 편협한 판단을 요약하면 이렇다. <1917>은 촬영 방식이 제일 앞자리에 놓인 영화다.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 스스로 밝혔듯 이 영화에서 물리적인 아날로그 롱테이크는 최장 7분 남짓, 나머지는 교묘한 트릭으로 이어 붙인 착시다. 끊어지지 않는 카메라를 위해 서사가 설계됐는데, 결과적으로 이야기 구성은 기이하리만치 게임에 가까워졌다. 참호에서 트럭으로, 불타는 마을에서 강물로 이어지는 여정마다 이름난 배우들이 마치 게임 속 NPC처럼 배치되어 병사를 다음 구간으로 안내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서사를 위한 카메라가 아니라 카메라를 위한 서사가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1917>의 연결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의 결과가 아니라 ‘연결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 유려한 롱 컨티뉴이티 숏은 전장을 재현하는 대신 관객을 안전한 가상현실로 소환해 버린다. 영화적인 것,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을 극한까지 추구한 결과가 역설적으로 영화로부터 멀어지는 기이한 종착지에 다다른 셈이다. 2020년 무렵의 나는 그 어긋남을 두고 ‘영화를 향한 향수병’이란 딱지를 붙였다. 한없이 가까워지고 싶지만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앓는 병. 향수병은 애초에 돌아갈 수 없음을 전제로 성립하는 상태이므로 그리움에 사로잡히는 순간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고백한다. 그땐 일말의 허세와 더불어 형식주의자를 향한 결벽 비슷한 감정이 작동했던 것 같다.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에 유난히 위화감을 느끼는 편이다. 스타일에는 목적과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싶은 말이 어떤 결과물로 이어진 형태가 곧 형식이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렇기에 방향과 결과, 의지와 형태가 어긋난 순간들을 만나면 한참 생각에 잠기곤 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원래 하고 싶었던 게 뭘까. 시간이 흘러, 정확히는 새로운 세대의 물결을 겪으며 질문의 방향이 슬며시 바뀌는 중이다.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입에 올리던 ‘영화적인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런 고정불변의 대상이 있긴 한 걸까. 영화가 무엇인지 묻는 것만큼 본질적이고 동시에 바보 같은 질문도 없다. 그건 목적지라기보단 그저 지향에 불과하다. 본래 큰 질문에서는 답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법이다. 현 시점 내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영화적인 것’이란 지표에 절대성 따윈 없다는 믿음이다. 아주 협소한 경험에 근거하여, 영화적인 것의 실체는 ‘경험에 근거한 익숙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한 시절의 관습이다. 심지어 이 관습의 수명은 길어야 20~30년, 대체로 한 세대보다 짧은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체험을 절대적인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1950년대에 완성된 몇몇 형식들을 ‘시네마틱’이라 일컫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거칠게 말해 오늘날 영화적인 것이라며 유통되는 상당수의 기법은 1950년대 이후, 좁게 잡으면 1970~80년대에 유행하거나 영향을 미친 스타일에 가깝다. 이를테면 슬로우 시네마가 롱테이크를 거쳐 시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그렇다. <1917>의 롱 컨티뉴이티 숏이 증명하고자 한 ‘영화적인 접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도 그저 본인이 만들어온(그리고 지나온) 영화라는 영토에 대한 향수에 잠긴 게 아닐까 싶은 의심. <1917> 중 (사진: IMDb / © Amblin Entertainment, ㈜스마일이엔티, ㈜씨제이이엔엠) 의심을 심화시킨 건 <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2019)이었다. 그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내내 윤단비 감독의 심경을 상상했다. 이 젊은 창작자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무엇일까. 윤단비 감독의 영화에는 지난 세기의 끝자락, 그 언저리의 여름이 고여 있다. 2층 양옥집과 낡은 선풍기, 대야에 담긴 수박, 한없이 늘어지는 오후. 흥미로운 건 영화가 재현한 그리움에 정확한 원본이 없다는 점이다. 적지 않은 시네필들이 직접 살아보거나 겪어본 적 없는 1980년대 대만 뉴웨이브의 골목을 그리워한다. 요컨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추억하기, 원본 없는 노스텔지어라고 해도 좋겠다. 엉뚱한 고백 하나 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보다가 헤어진 적 없는 연인을 그리는 노래들을 떠올렸다. 최신 K팝, J팝을 들으며 애틋한 이별을 앓는 요즘 세대와 마찬가지로 돌이켜보면 나 역시 신승훈의 노래를 들으며 아직 겪은 적 없는 사랑을 먼저 배웠다. 그 감정은 가짜인가. 당연히 아니다. 경험의 원본이 없을 뿐, 패턴과 표현 방식을 공유하는 순간 감정은 실제로 발생한다. <남매의 여름밤>의 공간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인식 하에서 존재한다는 것처럼. 지정학적 시간에 얽매이지 않은 채 그리움의 새로운 층위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하여 그 여름밤은 감독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니면서 결국 우리 모두가 지나온 무언가를 자극한다. 직접 겪지 않아도 향수병을 앓을 수 있다. 이 단순한 사실이 내게는 작지 않은 균열을 남겼다. <남매의 여름밤> 중 / © 오누필름 최근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유튜버들을 보며 다시 생각에 잠긴다. < 백룸 >(케인 파슨스, 2026)과 < 옵세션 >(커리 바커, 2026)은 흥미롭게도 모두 고전적 문법의 영화다. 10대의 침실에서 태어난 유튜브 영상 <백룸>은 캐릭터도 서사도 없이 노란 방과 형광등 소음의 이미지를 가운데 두고 해석과 재창작을 댓글창과 위키트리에 맡긴 열린 텍스트다. 반면 영화 <백룸>은 오리지널 각본 위에 배우의 얼굴을 세우고 트라우마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통과하는 닫힌 이야기다. 배우 중심의 단단한 서사, 처음과 끝이 닫힌 세계. 하지만 정작 케인 파슨스는 <백룸>을 영화화하면서 자신을 스타로 만든 유튜브의 작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니 그럼에도 젊은 관객들이 극장으로 몰려들었고 함께 집단체험을 공유했다.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극장에서 본 인생 공포영화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소가 주는 경험의 확산은 바야흐로 새로운 세대가 극장영화로 융합되는 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것이 한 번에 변하는 경우는 없다. 어떤 것은 바뀌고 어떤 건 바뀌지 않으며 디졸브 된다. 기성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그러하듯 프리 프로덕션 중심의 예술이다. 현장에서 찍는다는 행위 자체에 무게가 실린다. 반면 디지털 미디어는 포스트 프로덕션 중심이다. 렌즈가 포착한 진짜보다 소프트웨어로 빚어낸 진짜를 신뢰한다. <백룸>의 VHS 질감이 아날로그 카메라가 아니라 무료 3D 소프트웨어의 후반작업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파슨스가 극장에 가져온 것은 유튜브의 문법이 아니라 유튜브의 프로세스였다. 문법이 아니라 프로세스의 융합. 무엇보다 그는 새로운 문법에 집착하지 않았다. 새로움을 향한 과도한 집착이 오히려 길을 가릴 수도 있는 법이다. 디지털 네이티브가 소프트웨어로 아날로그의 유령을 위조해낸 이 제작 방식이야말로, 겪지 않은 것을 그리워하는 우리 시대의 뒤틀린 향수에 대한 완벽한 은유 아닌가. <백룸>의 배경은 1990년, 화면의 질감은 VHS다. 주 관객층인 20~30대는 그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백룸>의 모방된 질감이 의도와 달리 그들에게 기이한 안락함을 주었으리라 짐작한다. 왜냐하면 <백룸>의 리미널 스페이스는 연결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쓸모를 강요받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디지털에는 그리워할 게 참 많다. 사진을 지브리풍으로 바꾸는 필터가 유행하고, 멀쩡한 고화질 영상을 VHS 질감으로 되돌리는 레트로 변환이 놀이가 된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아도 상관없다. 질감 그 자체가 그리움의 대상이, 마음을 눕힐 안정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남매의 여름밤>으로 대표되는 시네필 세대 창작자들과 본질적인 패턴은 다르지 않다. 사실 이건 봉준호 , 박찬욱 같은 앞 세대도 마찬가지였다. 비디오 가게와 시네마테크에서 자란 이들에게 영화는 태어나기 전의 시간까지 소급되는 고향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영화라는 고향에서 시간을 초월해 만난다. 심지어 디지털은 이 영토를 무한정 확장해 우리 앞에 소환 중이다. <백룸> 중 / 사진: IMDb( 1 , 2 ) / © A24 <백룸>을 극장에서 본다는 건 시간의 때가 묻은 노란 벽지와 형광등 불빛, 낡은 카펫에서 안식을 찾는 세대가, 인류가 가장 오래 사용해 온 어두운 방에 모여 함께 악몽을 꾸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극장이야말로 현실에서 두 시간 동안 잠시 미끄러져 나가는 이행의 공간,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리미널 스페이스다. 그리하여 출구 없는 방은 무섭고, 동시에 그립다. 아무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공간이 과잉 연결의 시대를 사는 세대에게는 지옥이면서 동시에 도피처가 되는 셈이다. 무서움과 그리움이 한 몸이라는 이 양가성이야말로, 겪지 않은 것을 추억하는 마음과 함께 한 세대를 극장으로 데려온 힘일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고전적인 영화는 그리워할 대상인가. 그럴 수 있다. 그럼 그 시절의 감각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향수병에 빠진다, 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향수에 빠진 사람들은 가만히 병을 앓는 대신 온갖 것을 시도한다. 로저 디킨스는 끊어지지 않는 카메라로, 윤단비는 원본 없는 여름밤으로, 파슨스는 위조된 VHS의 유령으로. 어쩌면 새로움은 바로 그 발버둥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도달할 수 없지만 계속 향할 수밖에 없는 욕망. 일치할 수 없음에도 한없이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 그것은 영화와 현실의 관계이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창작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1917>을 향수병이라 명명했을 때 내 감정의 바탕은 안타까움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겪어보지 못한 것을 얼마든지 추억할 수 있는 시대라면,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사실은 더 이상 병의 조건이 아니라 창작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자면 애잔함보다는 멈추지 않는 도전과 활력을 느낀다. 그 시절 나는 극장을 나선 뒤에도 질척거리며 달라붙어 있는 영화를 더 보고 싶다고도 썼다. 어쩌면 그건 시대를 구분하며 벽을 치는 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실시간으로 마주하는 건, 매체 간 문법이 섞이면서 공유되는 확장의 순간들이다. 침묵할 줄 알았던 카메라들이 그립다는 문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이제 그 그리움은 앓는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빚어내는 소리로 들린다. 향수병은 나을 수 없다. 하지만 어떤 불치병은 도리어 불사의 동력이 되기도 하나 보다. 문득 윌 스미스 주연의 < 나는 전설이다 >(프란시스 로렌스, 2007)가 떠오른다. 이것이 절멸의 길인지 아니면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길인지 아직 단언할 순 없다. 내가 서 있는 장소가 구 인류의 땅인지, 신 인류에 편입될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이미 무언가 변했고 부지런히 더듬어가며 뒤따르는 중이다. <백룸> 중 (사진: IMDb / © A24) 다시, 비평 과거에 봤던 영화가 요즘은 달라 보인다면, 관점은 언제부터, 어떻게, 어떤 이유로 달라진 걸까. 시간을 따라 서로 다른 형태와 색깔을 남긴 비평의 궤적을, 필자가 직접 뒤따라가 봅니다.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 씨네21 》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 글항아리 도상해석학으로 유명한 독일 미술사가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시각예술의 의미(Meaning in the Visual Arts)』(1955) 서문에는 인간성(humanitas)에 천착했던 인류의 역사를 단 몇 줄로 요약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책에 따르면, 고대의 인간은 인간 ‘이하’의 어떤 것과의 대비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스스로 답하려 했다. 인간은 자신이 짐승, 야만, 속물과 구별되는 존재임을 대비 행위를 통해 발견하려 했는데, 이때 사용됐던 인간성의 토대는 교양이었다는 것. 그러던 인간이 중세에 이르러서는 인간 ‘이상’의 어떤 것과의 대비를 통해 인간성을 규정하고자 했다고 파노프스키는 쓴다. 신적인 것, 가령 신성과 대비되는 인간성 말이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인간 ‘이하’ 혹은 인간 ‘이상’의 것을 무대 위에 올리고 무대 위에 선 존재를 바라보면서 자기 존재를 두드러지게 만들기 위해 ‘대비’의 행위를 꾸준히 진행해왔다. 오래전 파노프스키의 이 책을 묵독하면서 나는 혼자 생각이 깊어졌다. 인간은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짐승이든 신이든 외적인 것을 질료로 삼으려 했다. 그렇다면 만약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인간이, 외부의 것을 가져오지 않고도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바라보는 일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해질 수 있을까. 열차에 앉은 탑승객이 자신이 탄 열차의 모습을 외부에서 바라볼 수 없듯이,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은 스스로가 속한 세계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더라도 그때 규정되는 인간성은 상상된 인간, 상상된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바라보기 위해선 열차 바깥에서 바라보는 ‘제3의 시각’이 필요해지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예술이라는 결론에 나는 이르렀다. 문자 텍스트로 집필된 문학이든, 스크린이라는 형식에 근거하는 영화든, 그것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므로 우리는 예술을 바라볼 때 우리 자신을 규정할 수 있게 되며, 또 그것이 예술의 존재 의의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며 우리 자신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자주 빠져들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골몰했던 특정한 분야는 원작 소설이나 원작 희곡을 가진 영화였다. 소설이나 희곡, 또는 그래픽노블 등 원작을 가진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가 두 개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참으로 묘한 장르다. 하나의 이야기가 두 개의 다른 예술 형식을 확보함으로써 작품 속에서 구현된 인간성을 외부에서 ‘두 개의 눈’으로 응시하도록 이끄는 매력을 가진다. 변주 과정에서 무엇이 추가되거나 삽입되었는지, 또 무엇이 의도적으로 생략되거나 비의도적으로 누락되었는지를 확인하면, 등장하는 인물의 탄생과 죽음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또 더 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게 된다. 흔히들 말하듯 문학에서는 소설가가 창조주의 위치를 점하고, 영화에서는 연출자가 창조주의 위치에 오른다고 할 텐데, 원작을 가진 영화의 경우 다른 눈을 가진 두 신(神)이 한 인물의 생성과 소멸을 입체적으로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발견되는 ‘차이’를 통해 우리는 한 세계와 그 속에 속한 인간을 더 웅숭깊은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파노프스키가 사용한 단어 ‘대비’의 원문 단어는 ‘contrast’이고, 내가 두 장르의 변주 과정에서 노출되는 차이를 발견하기 위해 사용한 ‘비교’는 ‘comparison’이기에 이 둘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대비가 뚜렷한 차이에 집중하는 반면, 비교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함께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개의 다른 대상을 ‘견주어 본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맥락으로 사용했고, 이러한 마음으로 『밤과 책: 영화탐문』을 썼다. 내가 이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건 2018년의 어느 날이었다. 햇수로 8년 전이다. ‘원작을 가진 영화’에 관한 글을 오랫동안 써야겠다고 다짐하던 그 시절에, 헝가리 소설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장편소설 『사탄탱고(Sátántangó)』를 만났다. 이 소설은 1985년 처음 출간된 후 1989년 공산 체제가 무너진 뒤인 1994년 벨라 타르에 의해 영화화됐는데, 라슬로의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이 영화는 ‘7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악명이 더 높아지기도 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2016년 한강 소설가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현재의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직후였다. 맨부커상 홈페이지를 검색해보니 2015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이 『사탄탱고』였던 터라, 2018년 5월 한국의 알마출판사가 한국어 번역본을 출간한 직후 이 책에 빠져들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영화를 구해 7시간이 넘는 지옥과도 같은 길이의 영화를 아주 천천히, 원작의 세계와 비교하면서 확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진: La Cinémathèque québécoise / © Mozgókép Innovációs Társulás és Alapítvány, VVF, Vega Film 소설 『사탄탱고』와 영화 < 사탄탱고 >가 구현한 두 세계의 차이가 처음부터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원작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영화이므로 그저 소설의 줄거리에만 주목하면서 영화를 보면 그 차이가 두드러지진 않는다. 하지만 ‘괴취미’에 가까울 만큼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습관이 있는 나로서는 영화를 세 번쯤 보았을 때 차이가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가령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에 집착하는 ‘마을 의사’(이름 없이 마을 의사로만 거론된다)를 원작자 라슬로와 연출자 타르가 그려내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 작품의 줄거리 복습이 필요하다. 완전히 망한 헝가리의 집단농장의 마을 주민들은 가난과 궁핍 속에서 어떠한 희망도 없이 살아간다. 마을은 완전히 생기를 잃었고 재건의 희망은 허락되지 않는다. 생산수단이 마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술집에 모여 만취한 상태로, 현실을 탈출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한탄한다. 그때, 이미 처형된 줄로 알았던 이리미야시란 인물이 마을에 돌아와 마을 주민들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한다. 마치 재림 메시아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리미야시는 그들의 절망을 돈벌이에 이용하려 했던 천박한 사기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리미야시의 혀에 굴복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예정된 몰락일지언정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리미야시의 뒤를 따르며 스스로 망해버리기를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마을의 하층부 약자인 에슈티케란 소녀가 스스로 쥐약을 먹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막연했던 희망마저 사라지는 폐허의 소동을 지켜보던 마을 의사는 자신이 본 지옥도를 자꾸만 글로 써내려 한다. 내가 특히 주목해서 살펴봤던 인물은 편집증에 가까울 만큼 기록에 집착하는 마을 의사였다. 그 이유는, 원작과 영화에서 의사의 기록 행위를 다루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영화만 보면 그의 병적인 기록 욕망은 소설가 혹은 예술가의 필연적인 운명을 상징 혹은 은유하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는 인간이 가진 기억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고, 그래서 마을 의사에게 기록이란 필연적인 망각에 저항하는 행위다. 글을 쓰는 사람의 천형과도 같은 운명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러나 원작 소설은 마을 의사의 기록 행위에 신적인 위치를 부여하고 있다. 광기에 가까운 마을 의사의 기록 욕망을 두고 원작자 라슬로는 이렇게 쓴다. “그는 갈수록 사물들의 질서에 주의를 기울였다. 물건과 물건 사이의 거리, 이를테면 접시와 담배, 성냥갑과 일기장, 탁자와 창가, 안락의자와 벌레가 갉아먹어 부스러질 지경인 나무 바닥에 놓인 책들 사이의 거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중략) 그 중심에 안전하고 전능하게 서 있음을 발견할 때면, 그는 아늑함과 함께 어떤 뿌듯함을 느꼈다.” (86~87쪽) ‘전능함’은 신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원작에서 마을 의사는 목격한 사건을 단지 종이 위에 옮기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말과 사람들의 행동과 사람들의 전락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이로써 그는 ‘세계의 중심’에 서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며, 질서를 갖춘 문장 위에 무질서한 세상을 배열하면서 신과 같은 위치에 오르게 된다. 특히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마을 의사의 신적인 위치는 명료하게 판명 난다. 스포일러로 보일까 저어되지만 굳이 밝혀두자면,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마을 의사가 집필하는 글은, 바로 이 소설을 읽은 독자가 이 책의 첫 번째 장에서 읽었던 바로 그 대목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이야기가 실은 마을 의사의 기록이었음을 누출하는 것이다. 영화는 시간과 망각에 저항하려 했던 한 인간의 초상으로 마을 의사를 그리지만 소설에서는 명백하게도 그를 무력한 신으로 배치하고 있다. 소설 속 마을 주민과 마을 의사의 관계는 절망의 폐허를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를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는 신의 관계와 등가를 이루게 된다.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 Mozgókép Innovációs Társulás és Alapítvány, VVF, Vega Film 비교 혹은 대비라고 해도 좋을 ‘견줌’의 과정을 이렇듯 통과하는 동안 내가 느꼈던 감정은, 작품의 내부에 다가감으로써 이 세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는 놀라움과 즐거움에 가까웠다. 그러나 『밤과 책』에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와 벨라 타르에 관한 글은 일부러 제외했다. 그 이유는, 비교와 대비를 통해 차이를 발견하는 ‘인간의 감각’을 공유하는 책으로 이 책이 기억되기를 바라서였다. 자신이 읽은 책과 자신이 확인한 영화여야만 이 책은 독자들에게 소구력이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책은 ‘감각을 공유하는 장’으로서의 제 기능을 해내지 못하리라고도 봤다. 고민 끝에 책에 실릴 원고를 선별하면서는 가급적 수많은 이들에게 기억되는 영화부터 우선적으로 골랐다. 이제 대중적인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 아마데우스 >, < 패왕별희 >, < 색, 계 >, < 아이즈 와이드 셧 >, < 양들의 침묵 >,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 쉰들러 리스트 >가 우선적으로 꼽혔고, 현재적인 영화까지도 이 책이 끌어안기를 바라는 마음에 < 햄넷 >,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 콘클라베 >, < 파워 오브 도그 >, < 컨택트 >, < 그을린 사랑 > 등 상대적으로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화를 추가하기도 했다. 아쉬운 마음을 기록을 남겨두자면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과 < 룸 넥스트 도어 >는 원고 초벌 작업을 끝마쳤음에도 예정된 출간 일정 때문에, 그리고 좀 더 솔직해진다면 진력을 다한 뒤의 체력 문제 때문에 책에 담지 못했다. 한국영화의 경우 목차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배제했다. 현재 박찬욱 감독의 원작을 가진 장편영화 5편(< 올드보이 >, < 공동경비구역 J.S.A >, < 박쥐 >, < 아가씨 >, < 어쩔수가없다 >), 봉준호 감독의 < 살인의 추억 >, < 설국열차 >, 이창동 감독의 < 밀양 >, < 버닝 >) 등도 초벌 작업을 마쳤지만 싣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들 작품 가운데 몇 편의 영화를 고르는 일이 너무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다른 책으로 출간되도록 힘써볼 계획이다. 『밤과 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 ‘일러두기’ 1번에 이런 문장을 적어 두었다. “이 책은 영화평론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이 평론이나 비평의 관점에서 읽히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고, 그 점에 대해선 출판사와 수차례 의견을 교환한 바 있다. 과분하게도 영화기자로 몇 년간 일했지만 나는 평론에 능하지 않으며 그건 나보다 우수하고 탁월한 감식안을 가진 평론가 선생님들께서 해주실 일임을 알고 있다. 또 그럴 능력이 내게는 없다. 다만 이 책이 비교의 차원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감각의 차원에서 독자들과 만나기를 바란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공통의 DNA를 가진 두 개의 장르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고, 입구와 출구가 다른 두 개의 집을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면서 발견되는 감각에 대한 책으로 세상에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각색에 대한 책도 아니며 ‘원작의 의도에 충실한 각색과 불충분한 각색’이란 오랜 화두를 다시 건드리려는 시도 역시 아님을 밝혀둔다.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김유태(기자·시인) l 《매일경제신문》에 입사해 문화부에서 근무하며 문학, 출판, 영화를 담당했다. 프랑스 칸영화제, 이탈리아 베니스영화제, 독일 베를린영화제 등 글로벌 3대 영화제의 레드카펫 현장을 취재했다. 2024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인터뷰로 한국기자협회 주최 이달의 기자상과 한국기자상을 각각 수상했으며,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 및 만찬에도 참석했다. 문예지 《현대시》에 「무국적 체류자」 외 9편이 당선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시집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2021)와 독서 에세이 『나쁜 책: 금서기행』(2024)을 출간했다. 현재 미국 골든글로브 투표권자로(Golden Globes Voter)로 참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