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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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399개
정확도 순 필터
영화정보
수집자료
제명미상(미국 자연사박물관의 경성 기록영상)
- 필름규격
- 35mm
- 필름종류
- RP
- 색채
- 흑백
자연의 아이들
- 필름규격
- 35mm
- 필름종류
- RP
- 색채
- 컬러
한국의 자연과 산업
- 필름규격
- 70mm
- 필름종류
- ON
- 색채
- 컬러
제명미상(미국 자연사박물관의 경성 기록영상)
- 자료유형
- 본편
- 종류구분
- DSM
- 파일형식
- DPX
제명미상(미국 자연사박물관의 경성 기록영상)
- 자료유형
- 본편
- 종류구분
- DSM
- 파일형식
- MOV
자연으로
- 자료유형
- 본편
- 종류구분
- DSM
- 파일형식
- MOV
한국 자연생태 영상도감 Disc 5 : 자연의 놀라운 생명력
- 매체규격
- DVD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윤무부 교수의 자연탐사 5 자연편
- 매체규격
- VHS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자연의 손짓(음악이 있는 아득한 날의 그리움)
- 매체규격
- DVD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유아를 위한 자연소리 모음 2-신비한 자연의 소리
- 매체유형
- CCT 콤팩트카세트
- 연주시간
- —
효과음(效果音) 제1집-자연(自然)
- 매체유형
- CCT 콤팩트카세트
- 연주시간
- 56:37
자연의 소리 제1집
- 매체유형
- CCT 콤팩트카세트
- 연주시간
- 27:59
문화영화"자연의교훈"제작신고수리및시정사항통보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 보관위치
- —
문화영화 "자연보호활동의 이모저모" 제작신고수리 및 유의사항 통보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 보관위치
- —
장편문화영화 "자연교실(16m/m장편문화)" 검열합격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 보관위치
- —
콘텐츠
비밀의 언덕
올해도 열 편을 뽑았는데, 한국 영화가 다섯 편, 외국 영화가 다섯 편이다. 아홉 편이 극영화이고 한 편은 다큐멘터리다. SF는 세 편,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작품이 세 편 또는 네 편이다. (< 수라 >의 주인공을 누구로 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단 다큐멘터리인 <수라>를 뽑았다. 좋은 영화이기도 했지만 의무감을 느낀다. 올해 나온 영화 중 더 이상 우리가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켜 생각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는 걸 <수라>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있을까. < 당나귀 EO >와 < 다섯번째 흉추 >는 모두 비인간 주인공이 인간사회를 떠돌며 겪는 여정을 그린다. <당나귀 EO>가 < 당나귀 발타자르 >의 보다 발랄하고 화려한 버전이라면 (그렇다고 결말의 가차없음과 서글픔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다섯번째 흉추>는 매트리스에 붙어 살면서 인간의 감정과 기억을 뽑아 먹으며 결국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 변신해가는 곰팡이가 주인공이다. 두 작품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좋은데, 나로서는 <다섯번째 흉추>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장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단 가장 많이 본 영화이기 때문일까. OTT에 들어온 뒤로 거의 배경음악처럼 틀어놓은 영화이다. < 아니말리아 >도 여정에 대한 이야기다. 아무리 생각해도 외계 종족의 접촉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세상에서 임산부 주인공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정 중 인간이 당연시하는 모든 것들의 우선순위가 파괴되는데, 정말 내 취향의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 A.I. 소녀 >는 아슬아슬하지만 단단하기 짝이 없는 하드 SF다. 인터넷에서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들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A.I.가 서서히 인격을 갖고 성장해간다. 이 장르 특유의 판타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의 압도적인 치밀함과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아름다움은 결코 가볍지 않다. < 플라워 킬링 문 >은 스콜세지의 첫 서부극이다. 아마도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미국 영화사에 대해 빠삭한 이 노장이 이 장르에 대한 존경과 원죄의식이 빽빽하게 차 있는 이 네 시간에 가까운 영화를 보며 압도되지 않기는 힘들다. 단지 미국 선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거칠 수밖에 없는 당사자성에 대한 논의를 피해가기는 어렵다. < 지옥만세 >는 올해 내가 본 한국영화 중 가장 신나는 모험담이다. 그리고 이 모험담의 재료는 내가 질색하는 것들, 그러니까 학교 폭력, 집단 따돌림 그리고 종교와 같은 재료를 갖고 만들어졌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발랄한 결과물이 나왔다니, 볼 때마다 신기하기 그지 없다. < 너와 나 >는 올해 한국 영화 중 최고의 로맨스다. 화사한 청춘 코미디이기도 하지만 가장 비극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기만적일 정도로 소박하고 단순한 재료들로 만들어졌지만, 이 영화처럼 교묘하게 관객들의 마음을 후벼파는 작품도 많지 않다. 나머지 두 편은 창작자에 대한 영화다. < 어파이어 >와 < 비밀의 언덕 >. 두 편 모두 창작자라는 인간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이기적이고 치사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둘 다 재미있는데, 비교해 보면 <어파이어> 쪽이 훨씬 편안하고 즐겁게 볼 수 있다. 아무래도 독일인 백인 남자 작가에게는 충분한 거리두기가 가능하니까. 하지만 <비밀의 언덕>을 볼 때는 그게 좀 어렵다. 이지은의 <비밀의 언덕>은 내가 올해 본 한국 영화 중 두 번째로 힘들게 본 작품이다. 첫번째는 < 서울의 봄 >이고 이 영화를 보면서 왜 괴로워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다. 다행히도 <서울의 봄>의 고통스러움과는 달리 <비밀의 언덕>의 고통스러움은 재감상 때는 많이 사라지는 종류다. 초등학교 5학년생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다. 하지만 주인공 명은은 결코 안전한 아이가 아니다. 일단 이 아이를 따라가기 시작한 관객들은 러닝타임이 10분을 넘기기도 전에 ’큰일났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 수 없다. 시작부터 경고음이 들린다. 명은은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다. 거짓말쟁이에도 종류가 있고 등급이 있는데, 명은은 그 중 가장 까다로운 부류이다. 일단 이 아이는 영화 시작부터 부모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시장에서 일하는 부모가 부끄러워 가상의 중산층 부모를 창조해낸 것이다. 그냥 거짓말만 하는 게 아니라 스파이처럼 가짜 가족 앨범까지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명은이 다니는 1996년 수도권 소도시 초등학교라는 시공간에서 부모의 계급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도 아니다. 단지 명은에겐 가족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 이 아이에겐 현실이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현실을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 대부분 관객들은 명은과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심각한 서스펜스를 경험하게 된다.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작은 동네에서 거짓말은 쉽게 숨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명은은 여러 면에서 우등생이다. 그건 기준을 세워놓으면 최선을 다하는 아이의 성격과도 연결되어 있다. 아이는 여러 모로 좋은 반장이다.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추진력 있고 부지런하며 무엇보다 리더 자질이다. 아이는 좋은 작가이기도 하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열심히 준비를 하고 열심히 글을 쓴다. 통일에 대한 글을 쓰라는 과제가 주어지면 명은은 혼자 판문점까지 가서 직접 견학을 한다. 후반에 가면 아이가 표절을 한 것이 아니냐고 몇 초 동안 의심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짓말을 했다면 모를까, 표절은 명은이 절대로 하지 않을 일 중 하나다. 단지 아이에겐 상한선이 있다. 아주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 불안불안 위태롭게 유지되던 명은의 우주는 학교에 혜진과 하얀이라는 학생들이 전학오면서 흔들린다. 교장선생님은 이 아이들에게 될 수 있는 한 평범한 배경을 주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아이들은 그 주어진 허구를 가볍게 하나씩 깨트린다. 평범한 집안의 이란성쌍둥이로 소개되었지만, 아이들의 엄마는 유흥업소 사장이고 하얀은 업소 직원의 딸이다. 명은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숨겼을 사실인데, 혜진과 하얀은 이를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기네 삶을 소재로 글짓기를 하는데, 이들이 별 노력없이 쓴 글은 명은이 판문점까지 가서 취재한 글을 가볍게 넘어선다. 명은의 질투심은 하늘을 찌른다. 자연스럽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 대한 오래된 전설이 떠오른다. 전설이라고 한 건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다룬 < 아마데우스 >는 옛 헛소문에 기반을 둔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천재와 범재로 딱딱 맞아 떨어지는 단순한 세계의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명은과 혜진 & 하얀의 관계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명은이 은근슬쩍 혜진을 사보타지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세 아이는 곧 친구가 된다. 무엇보다 명은은 두 아이의 작가로서의 능력과 인간적 매력을 알아보는 소수이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이야기가 아니냐고? 아니라니까 그러네. 여기서부터 영화는 명은의 작가로서의 성장을 보여준다. 아이가 엄청나게 정신적으로 성장했다는 게 아니다. 단지 아이의 세계관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추구해왔던 전략과 목표 상당수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좋은 글에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대범함과 솔직함도 필요하다. 그리고 영화가 배경인 1990년대 중반은 정말로 이런 글이 먹힐 수 있는 시기이다.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명은은 혜진 & 하얀 콤비와 같은 수준의 글을 쓸 수 있다. 이미 작가로서 꾸준한 훈련을 해왔던 것이다. 단지 전략만 수정하면 된다. <비밀의 언덕>에는 천재와 범재를 구분하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없으며, 평범한 작가의 노력도 인정을 받는다. 아니, 명은도 평범한 작가는 아니다. 학교 글짓기를 위해 판문점까지 가는 부지런함,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글을 쓰는 집요함도 재능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가장 정직하면서도 특별한 지점은 명은의 정신적 성숙이 좋은 작가가 된 이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보통 창작자에 대한 이야기는 반대의 순서를 따르기 마련이지만 영화는 그런 판타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훌륭한 예술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은 기본적으로 기술이며 아무리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만든 창작자라도 여전히 그냥 개*#₩일 수 있다. 아니, 그 개*#₩는 사람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개*#₩이기 때문에 더 위험한 개*#₩다. 하지만 명은은 성장한다. 갑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경멸했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랬다면 좋은 작가도 못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쓴 글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 자신의 기술적/예술적 성취가 늘 우선순위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주변의 결점있는 우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명은은 작가가 되었을까. 명은을 연기한 주연배우 문승아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려고 한 것부터가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혜진을 따라하고 싶어서였기 때문에. 이 단계를 거쳐 성장했으니 더 이상 글을 쓸 이유가 있을까? 멋진 캐릭터 해석인데, 나는 다른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타고난 글쟁이인 혜진과 하얀은 자신의 삶에서 밑천이 떨어지면 그냥 글을 멈출 수도 있다. 하지만 명은과 같은 작가는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것이다.
텅 빈 산수경석으로부터의 응시와 계급화된 얼굴
똑바로 보자. 파국이 아니라 난국이다. < 기생충 >(봉준호, 2019)의 기택(송강호)과 충숙(장혜진) 가족은 지배계급에 제대로 손상을 입히지도 못하고 폐허의 잿더미에 올라서 미래를 볼 용기도 없다.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다시 말하면 재현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상태로, 순간적으로 출현했던 계급의식을 계급상승 욕망과 부유층 선망으로 다시 환원하며 건축가 남궁현자의 집을 떠나지 못한다. 유령은 애도를 가능하게 하며 마침내 무엇이 끝났는지 역사로부터 어떤 유산을 물려받을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한다. 파국은 과거를 파괴하는 폭력적 힘을 갖고 있지만 그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기택은 햄릿의 아버지처럼 유령이 되지도 못하며, 이 모든 연극의 조종자를 노출시키고 완전한 파국을 이끌어 낼 저력도 없다. 결말에서 기택은 박사장(이선균)을 죽인 후 방공호에서 근세(박명훈)가 있던 자리를 문자 그대로 대신한다. 기택은 자기 가족들한테 ‘친절했던’ 박사장에 미안함을 느끼고, 근세처럼 고장 난 복도의 센서등을 자신의 몸으로 대신 켜고 끈다. 한편 장남 기우(최우식)는 아버지가 실패한 신분상승의 꿈을 꾼다. <기생충>의 난국을 응시해보자. 이 영화에서 각 계급이 처한 환경에 대한 묘사는 매우 디테일하다. 계급의 물질성을 드러내기 위해 온갖 '감각의 클로즈업'을 동원한다. 촉각, 후각, 시각, 운동감각 등 다채로운 감각을 동원해 부유층의 대저택과 다가구 반 지하 생활을 생생하게 시뮬레이션 한다. 햇빛과 비 같은 자연적 현상마저도 계급화된다. 햇빛이 안 들어오는 반 지하는 늘 축축해 빨래가 잘 마르지 않으며 수압이 낮아 변기에 역류현상이 일어나고 하룻밤 비에도 집이 물에 잠긴다. 하지만 큰 통창과 완벽한 배수시설을 갖춘 언덕 위의 대저택에서 비는 가족캠핑을 취소하게 만든 정도의 가벼운 방해꾼이자 다음날 미세먼지를 날려주고 상쾌한 공기를 안겨주는 고마운 자연현상이며 운치있는 풍경이 된다. 이러한 디테일 묘사는 부자와 빈자들의 생활세계에 대한 정확한 묘사로 승인되고, 관객들은 '맞아. 진짜 저렇지.'라고 존재하는 것을 승인하는 구조를 취한다. 이것은 기존의 것의 인정형식이다. 이러한 감각의 클로즈업은 계급화된 얼굴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사실 각 계급, 직업, 세대, 거주지역 등에 따른 특징들을 추출해 그 디테일을 적확하게 묘사해 내는 표현물은 최근 <피식대학> 같은 유튜브 기반의 코미디 프로그램들에서 유행하고 있는 특정 집단 시뮬레이션이 더 뛰어나다. <기생충>은 시뮬레이션을 넘어 오늘날 계급의식의 발현 계기를 목도하고, 그를 통해 누가 적대계급인지를 파악하며, 어떻게 적대계급을 무너트리거나 혹은 좌절하게 되는지 까지 가려 한다. 문제는 <기생충>이 그 목표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난국에 빠졌다는 데 있다. 그 난국은 단순히 오늘날 계급구조가 극심한 양극화,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불안정한 새로운 계급의 출현, 생존게임에 가까운 경쟁사회, 지배계층에 대한 선망의식에만 있지는 않다. 사실 재현 그 자체의 난국도 있다. 봉준호 감독은 이미 계급의식의 출현과 혁명, 그리고 실패 및 대안에 대해 진지한 우화를 만든 적이 있다. 전작 < 설국열차 >에서 기후재난으로 빙하기에 접어든 지구에서 꼬리칸에 있던 잉여 취급받던 사람들은 영구엔진을 가진 기차에서 지배계층이 있는 앞 칸으로 직선적인 전진운동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미 이 움직임을 예측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기획하고 혁명 그 자체를 이용하는 시스템 내에서 '단순하고 뻔한' 전진운동의 계급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존의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영구엔진의 신화, 즉 시스템을 멈추고 아시아 소녀, 흑인 소년, 백곰으로 은유화된 소수자들은 탈출을 시도한다. 직선운동의 실패는 고전적인 진보서사의 몰락을 의미한다. <기생충>도 <설국열차>처럼 양극화 현상과 계층의 이동 사다리를 알레고리화 하기 위해 수직운동을 부각시킨다. 언덕 위의 부유한 단독주택과 저지대의 다가구 반지하 주택, 반지하 주택과 아예 보이지 않는 지하의 방공호, 실내외의 오르내리는 계단들, 하강하는 비, 산수경석은 모두 계급의 위계화와 계층이동을 알레고리화 한다. 여기에 수직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운동(pedestal down)은 그러한 수직운동을 더 부각시킨다. <설국열차>가 전진운동에서 탈출해 체제 바꾸기의 희망을 엿보는 것으로 끝났다면, <기생충>은 계층이동을 시도하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더 깊은 곳으로 추락하는 비극을 제시한다. 그 비극의 심연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기생충>은 계급재현의 곤란함을 자기 반영적으로 시각화하고 서사화한다. 기택(송강호) 가족은 몰락한 중산층으로 프레카리아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다양한 알바를 전전하며 안정된 직장 없이 살아간다. 영화 초반 그들은 전원 백수로 묘사된다. 그들의 유일한 자산은 가족 네트워크이다. 장남 기우(최우식)는 명문대생 친구 민혁(박서준)이 연결시켜준 고액 과외자리를 소개받고 학력을 위조해 IT 기업 CEO인 박사장의 딸 다혜(정지소)를 가르치게 된다. 기우는 박사장의 아내인 연교(조여정)의 의심을 받지만 수업참관 이후 신뢰를 얻고 동생 기정(박소담)을 아들 다송의 미술심리치료교사로 소개한다. 이후 기우와 기정은 계략을 세워 원래 근무하던 문광(이정은)과 윤기사(박근록)를 쫓아내고 아버지 기택과 어머니 충숙(장혜진)을 각각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로 채용시킨다. 모두가 불안정한 생존게임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유사계급에 속한 이들을 가차 없이 사다리에서 밀어낸 기택(가족)은 당연하게도 계급의식을 가질 수 없다. 그런 기택이 마침내 계급의식을 갖게 된 것은 이성적 논리나 도덕률이 아닌 '냄새' 때문이다. 기택은 자기를 고용해주고 매너도 좋은 박사장에게 고마워한다. 심지어 같은 가장으로서 동일시를 한다. 그러나 근세가 다송의 생일 파티에 난입하고 박사장이 더러운 냄새가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자 기택은 즉각적으로 분노하고 그제야 계급의식을 갖게 된다. 그 "(지하철 타는 사람들의) 냄새"는 이전에 박사장이 기택에게서 유일하게 선을 넘어 오는 것이라고 했던 것으로 언어화되기 이전에 신체적으로 환기되는 즉각적인 혐오다. 기택은 근세와 구별 지으려 했지만, 박사장은 냄새로 그들을 같은 계급으로 묶는다. 그에 반응해 기택은 박사장을 적대적 계급으로 파악하고 그를 살해한다. <설국열차>의 '혁명을 위한 직선운동'처럼 <기생충>에 나온 수많은 계급적 상징과 알레고리는 체제 균열을 가져올 행동이나 사유를 촉발하지 못한다. 그것은 산수경석처럼 낡고 닳았기 때문이다. 직선적인 전진이나 수직운동과 구도는 이미 영화사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기호이고 지나치게 자명하다. 그것은 적극적인 의미독해를 요청하며 수많은 약호해독의 비평들을 양산해내지만 비판적 힘을 갖지 못한다. 오늘날의 '웰메이드'영화는 좁은 의미의 미스터리 장르가 아닐 때조차도 관객들의 문제해결을 기다리는 미스터리가 된다. 이것은 또한 비판이론과 비평이 처한 난국이다. 이론과 비평은 결코 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양과 접근성의 측면에서는 흥하고 있지만, 그것이 정보제공 혹은 연쇄적인 동어반복의 재승인과 서사풀이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어쩌면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봉준호 감독이 정교하게 여러 기호들을 흩뿌려 계급의 의미작용을 설계하면 할수록 암호해독의 쾌락만 커질 뿐 그 비판적 힘은 더 약화된다. 이미 <기생충>은 텍스트 내에서 비평을 초청하고 있으며 그 쾌락은 텍스트 가장자리의 안쪽을 끊임없이 맴돌도록 설계되어 있다. 봉준호 감독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는 “상징”이라는 말이 기우의 입을 통해 두 번 언급된다. 기우는 영화 초반 민혁에게서 할아버지가 수집하고 있다는 수석을 선물로 받고 말한다. “민혁아, 이거 진짜 상징적이다.” 클로즈업된 수석은 영화 전체를 은유화 하는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안이 이미 텅 비어 있고 믿음만으로 유지되는 물신(fetish)에 불과하다. 가부장제와 계층이동을 통한 계급상승은 여전히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가능성을 잃은 오래다. 기우는 수석 선물을 받고 집 앞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행인에 대적할 용기를 얻는다. 그 싸움은 슬로우모션으로 스펙터클하게 그려지지만 그래봤자 오줌을 뿌리는 순간일 뿐이며, 이미지의 스펙터클화는 기우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 뿐이다. 수석은 자명하게 계층상승과 출세의 욕망 그리고 가부장의 힘을 ‘상징’한다. 기택을 원망하는 충숙이나 기정과 달리 기우는 장남으로서 자기가 앞으로 물려받을 가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택을 존중하고 보호하고자 한다. 하지만 대책 없는 기택처럼 그 수석은 텅 비어있는 기호다. 심지어 기우가 빗물에 잠긴 집에 돌아왔을 때 수석은 말 그대로 물에 뜬다. 기우는 수석이 자신을 따라온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텅 비어있기 때문에 가벼워 물에 떴을 뿐이다. 유기성과 총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상징은 더 이상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그 의미의 무게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봉준호 감독이 시각적 기호와 의미가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꽉 짜여 있는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와 <기생충>에서 반복했던 모티브, 상징, 알레고리를 통한 의미화(signification) 작업 자체에 회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계급혁명이든 계급의식이든 문화재현의 정치학으로는 비판적인 무게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것이 정교하게 구체적 공간과 소품들을 통해 은유화 되고 시뮬레이션 될수록 오히려 모방과 복제의 과정을 거치며 온라인에 빠르게 퍼져나가는 ‘밈(meme)’이 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수석처럼 말이다. 한국에서 수석은 낡은 자명한 상징이지만 외국인들에게 수석은 미스터리하고 동양적이며 아름다운 소품으로, 수수께끼 같은 재밌는 밈이 된다. 한국인들은 소셜 미디어에서 외국인 관객에게 산수경석의 의미를 해석해 주며 문화적 우위도 가질 수 있다. <기생충>은 위에서 기술한 계급 재현의 곤란함을 모두 반영하고 의미화하면서도 물에 뜬 수석처럼 그 의미의 정치적 힘은 텅 비어 있다. 텅 빈 수석은 정치적 힘과는 전혀 상관없이 생산되는 관객의 암호해독 쾌락을 응시한다. <기생충>은 문화재현의 정치학의 아포리아를 수석에 이입시킨다. 재현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난국이다. 기우는 다송의 그림을 처음 볼 때 또 다시 "상징"을 언급한다. 기우는 벽에 걸린 다송의 그림을 보고 “진짜 상징적이다”라고 말한다. 기우는 기정을 미술교사로 데려오기 위해 다송의 그림 뒤에 해석할 많은 것이 있는 것처럼 과장한다. 기정 역시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로 연교에게 다송의 그림이 정신분열과 트라우마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해석해 준다. 사실 다송의 그림은 어떠한 것도 상징하지 않는다. 그 그림은 다송이 밤에 목격한 근세를 그린 것이다. 기호 해독의 과장되고 과잉된 의미화는 타자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린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기호가 더 이상 의미작용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완전히 엉뚱한 것을 가리킬 때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으며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은, 무게를 갖고 중력에 영향을 받으며 물리적으로 그곳에 존재하는 자연과 신체이다. 기정이 살해당했을 때에도 계급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던 기택은 박사장이 근세에게 불결한 냄새가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자 곧 자신이 적대해야할 계급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를 깨닫는다. 비판적 의식은 기호화하기 어려운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신체성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박사장의 태도는 근세의 신체와 기택의 신체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들고 즉각적으로 계급 정체성과 집단성을 구성한다. 냄새가 유발하는 구분 없음은 언어적이고 의식적인 기호를 초과한다. 그리고 드디어 행동을 할 힘을 얻게 된다. 비, 돌, 냄새 같은 자연적인 것의 사용은 유사한 맥락에서 고려될 수 있다. 계급의식은 계단과 산수경석처럼 의미화 되자마자 즉자적으로 가벼워지고 '밈'화 되는 기호 이전의 원초적인 기호들, 즉 보다 자연적이고 감각적이고 신체적인 이미지 기호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영겨진다. 기우가 기택이 박사장을 죽이고 사라진 후 텅 빈 기호가 된 산수경석을 다시 산 속 시냇가, 즉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그런 이유다. 하지만 역으로 홍수나 냄새와 같은 자연적이고 신체적인 단위가 아니면 계급의식은 형성될 수 없다는 뜻이며, 이러한 자연화 된 기호화의 반복은 저소득층 혹은 가난한 자들을 문명과 대립되는 비체적 존재로 낙인을 찍는다. 냄새로 엮인 그들은 개별적 존재로 구분할 수 없다. 계급화된 얼굴의 자연화는 계급재현의 실패와 계급의식에 대한 냉소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재현 실패의 원인은 오히려 과잉될 정도로 스펙터클하고 세련된 스타일, 디테일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클로즈업된 감각들, 정합적이고 정교한 의미작용으로 인한 약호해독의 '쾌락' 그 자체의 몰두와 네트워크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는 정보화된 영화 이미지에 근거한다. 기택은 근세와의 계급적 친화성을 신체적으로 자각한 후 방공호에 기거했던 근세의 자리를 차지한다. 근세의 자리를 차지한 후에는 박사장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근세와 구분되지 않는 비체적 상태의 기택은 순응적인 근세의 의식을 받아들인다. 근세와 기택의 몸은 그 자체로 센서등을 대신 작동하며 자본에 복종하는 부품이자 모스부호를 보내는 몸-기호가 된다. 몸이 아니면 의미화가 불가능하다. 기우는 산수경석의 상징, 즉 가부장의 자리와 신분상승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언어와 가시화된 재현을 포기하고 얻은 센서등을 통한 몸-기호로 주고받는 그들의 대화는 생존 신호 정도에 국한되며 계급의식이나 체제균열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어떤 면에서 <기생충>은 오마주한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와 봉준호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 보다도 퇴행적이다. <하녀>에서 하녀 명숙(이은심)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중산층 가족에 불길함을 불어넣고 그들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인지를 폭로하게 만들며 마지막까지도 그 불온함을 거두지 않는다. <설국열차>는 미미하지만 체제 바깥으로의 운동을 시도한다. 반면 <기생충>에서 봉준호 감독은 계급 상징과 알레고리가 더 이상 정치적 언어로서 작동하지 않는 재현의 난국을 회피하기 위해 하층계급을 자연화하며 생존만이 겨우 가능한 방공호로 추락시킨다. 의미의 무게를 만들고 물질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들은 몸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계급의식은 개별 신체가 구분되지 않는 자연적이고 비체적인 상태가 되어서야 가능하고 그마저도 지속되지 못한다. <기생충>은 결국 계급화된 얼굴을 재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설국열차>에서 '멈춤'이라는 다른 속도를 상상했던 것처럼, 수직 사다리를 흔들어 놓는, 전혀 다른 계급을 창안하고 호출해야 하는 것 아닐까?
독수리: I didn't know that
< 독수리 >는 올해(2022년) 네마프(Nemaf: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에서 관람했다. 아무 기대 없이 홈페이지 이미지만 보고 선택했는데, 영화가 너무 좋아 그날 본 다른 영화들은 생각이 안 날 정도였다. 그런데 함께 영화를 관람한 멤버의 한 마디가 우리의 마냥 좋음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16mm필름으로 21세기 캐나다 깡시골의 풍경을 담은 영화잖아.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새롭지? 필름 가지고 한 이런 작업들 많잖아. 우리가 너무 매끈한 디지털 작품만 보다 오랜만에 필름작업을 봐서일까.” 영화가 너무 좋은 건 당연한데 어느새 우리는 그 좋음마저 혹시 동시대 기술매체에 대한 염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지 스스로 의심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를 향한 우리의 반응이 지난 세기에 발명된 매체를 향한 향수에 그칠 수 있어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독수리는 색다른 영상미와 주제의식으로 무장해 우리의 영화적 지식을 충족시켜주는 그저 그런 영화로만 남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의 잔상이 꽤 오랫동안 우리 곁을 맴돌았고, 어느새 우리는 멤버가 던진 질문을 시작으로 이 영화를 해부해 보았다. <독수리>의 전체 구조는 약 2분 가량의 영상 조각들이 몇 초 간의 공백을 두고 여러 장의 사진처럼 느슨하게 연결돼 있다. 풍경사진 몇 장을 넘겨 보는 듯한 단조로운 구성이지만, 그래서 각 장면의 자연 배경과 동물들의 몸짓에 깊게 몰두하도록 만든다. 내용도 별 다를 게 없다. 목장의 울타리 안에서 소, 말, 돼지, 염소, 닭과 같은 가축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다. 울타리 밖 인간들도 함께 농사를 짓고 풀을 뽑고 가축들을 보살핀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들의 삶은 계속 될 것이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농촌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영화 자체에 몰두하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목초지 위에서 동물들은 끼리끼리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하며 자유롭게 뛰고 먹고 마시고 쉬길 반복한다. 그러다 커다란 말이 인간에 의해 강제로 울타리 밖으로 끌려 나가는데, 몇 번의 실갱이 끝에 말은 인간의 손을 벗어나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다시 울타리로 돌아온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변의 검은 소들이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 탈출한 말이 뛰자 자기들도 그 뒤를 따라 뛰기 시작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선 긴장감이, 종이 다른 동물들 간엔 유대감이 생성되는 순간이다. 이미 동물들은 독수리가 그렇듯 서로 싸우지 않고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가운데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동물들을 가두고 통제하려 하는 인간만이 철저한 외부인처럼 울타리 밖에 갇힌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울타리 밖에 있던 인간이 카메라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면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해진다. 동물들은 별 거부감 없이 카메라 앞에서 가만히 눈을 껌뻑이는가 하면 편안하게 누워 햇볕을 쬐고 뛰어다닌다. 아마도 촬영은 목장의 울타리 안과 밖, 창문, 경작지 등 정해진 장소에서 꽤 오랫동안 지켜보고 기다리는 가운데 이뤄졌을 거다. 영화의 처음 몇 장면은 필름 촬영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의 노이즈만 존재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미지 위에 굵고 강한 훼손의 흔적이 드러난다. 작가는 영상의 중반쯤에서 풀을 뽑고 그걸 끓이는 짧은 장면을 제시해 필름의 훼손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졌는지 대략이나마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영상 끝부분에 필름에 쓰인 재료가 공개되는데, 여러 종류의 꽃과 열매 같은 식물들이 주재료다. (참고로 우리는 식물들을 우려낸 액체에 며칠이건 담근 감독의 필름을 발효 필름이라 부르고 있다.) 실험영화와 사진 매체에서 곰팡이와 먼지 등을 이용해 필름의 물질적인 변형을 가한 작품들이 있다. 필름의 물성을 변화시켜 매체의 시간성과 이미지의 우연성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름이 만들어진 과정의 일부를 보는 동안 어쩐지 인간이 채집하고 끓여서 만든 재료를 필름으로 하여금 소화시켰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약하자면 이 영화에서 필름은 단순히 훼손되고 실험되지 않는다. 필름이 먹은 풀은 목장의 동물들과 하늘의 새들이 먹는 자연의 풀과 꽃, 열매 등이다. 돼지가 소의 젖을 빨고 있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있다. 돼지가 젖을 빠는 동안 소는 풀을 뜯어 먹고, 그 뒤에서 작은 새들이 들판 위에 떨어진 뭔가를 쪼아먹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맞은 편에 카메라 한 대가 놓여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풀과 꽃과 소금 등에 의해 발효된 16mm 필름이 뱃속에서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꽤 오래된 카메라일 것이다. 자연의 재료를 한 차례 소화시킨 카메라 앞에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다. 자연의 풍경과 생명체의 행위, 햇볕과 바람까지 완벽하게 차려진 만찬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멀리서 들리는 트랙터 소리는 인간이 만든 다소 거칠고 소박한 취향의 플레이트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오직 카메라를 든 인간만이 목장의 울타리 안에서 동물들과 공존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장에 인간이 나타나면 묘한 긴장감이 맴돈다. 목장의 주인인 인간은 먹이와 따뜻한 물을 주지만, 주변에 울타리를 쳐서 동물들을 통제하고, 때때로 고삐를 틀어쥔 채 강제로 끌고 나가기도 한다. 그랬던 인간이 카메라를 들면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다. 아마도 감독이 오랫동안 울타리 안에서 촬영하는 동안 동물들은 카메라를 든 인간만큼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함께 풀 뜯어 먹고 조용히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카메라를 든 인간은 경작하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들과 다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카메라를 든 인간 또한 그들과 함께 머무르며 아름다운 풍경을 섭취하고 자연으로부터 채집한 물질을 먹임으로써 그들과 밥상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때문에 이 영화를 단순히 매체의 특성을 이용한 실험영화나 목가적인 영화로만 볼 수 없었다. 식물을 섭취한 필름이 드러내는 건 시간이나 우연과 같은 관념적인 개념이 아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회화작품인 Homer Watson의 The Floodgate는 경작하는 인간과 가축화된 동물의 오랜 관계망을 보여준다. 유일하게 독수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이는 동물과 동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사자는 독수리의 위치를 통해 먹이감을 찾고, 독수리들은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한다. 이건 단순히 아이가 들려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속 목장의 동물들 또한 독수리와 사자, 혹은 독수리 무리처럼 먹고 마시며 공생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가 여타의 환경/자연 영화와 다른 지점은 막연하게 생명체의 공존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실제의 공존과 균형은 갈등과 긴장감의 조절을 통해 유지되기도 한다. 영화에서 동물들은 끊임없이 먹는다.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 경작한다.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 있는 동안 영화는 멀리서 들리는 트랙터 소리 같은 사운드 효과로 자꾸 이곳이 누군가가 농사 짓고 가축 키우며 먹고 사는 곳이란 걸 잊지 않게 만든다. 눈앞에 보이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동물이 어우러진 생태계의 균형이 실은 식량과 먹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비로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영화의 흐름은 매우 정적인데 그 안의 동물들은 생기있고, 인간들은 쉴 틈 없이 일한다. 정원이 딸린 집과 잘 정돈된 경작지, 나무 울타리와 농기계, 그리고 아이들까지 모두 인간이 만든 것들이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제외한 모든 장면이 운전 중인 트랙터 소리로 뒤덮여 있다. 발효된 필름의 노이즈와 백색소음처럼 깔린 이 농기계 소리로 인해 캐나다의 어느 시골마을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대한 환상이 지워진다. 사람이 먹기 위해 내는 소리는 이상하게도 동물들이 먹고 있는 모습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인간은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도 하루종일 땅을 일궈야 하고, 동물은 인간이 관리하고 통제한 너른 목초지에서 비로소 배를 채울 수 있다. 독수리의 먹이 또한 여기 이 땅 위에 있다. 트랙터 소리는 오늘날 이 땅의 생태계가 어떤 순환을 통해 완성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이 영화의 모든 실험/시도가 가리키는 곳에 막연한 관념이나 개념은 없다. 오히려 감독은 자신의 신체와 카메라가 놓인 구체적인 삶의 현장, 즉 그가 먹어 삼키고 소화시킬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 우리는 각자 어떤 물질적 조건 속에서 얼마나 깊이 숙고하고 관찰하며 실험/시도하며 작업하고 있는가. 영화에서 어린 아이가 독수리는 서로 싸우지 않고 살아간다는 말에 그의 아버지로 보이는 어른이 답한다. “I didn’t know that” 농부이자, 목장주이며, 혹은 카메라를 든 감독일 수도 있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등장한 어른의 목소리다. 기회가 돼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아이와 아버지의 대화를 몇 번이나 다시 들었다. 우리가 듣고 싶었던 말이 거기에 있었다. AI가 시를 쓰고 그림도 그리고 심지어 영상도 찍는 시대다. 인간과 기계, 예술에 대한 단정적인 말들이 너무 많이 들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물론 인간이 일방적으로 무너지고, 좌절하고, 끝났다며 판정패 당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미 누군가가 이전에 모든 걸 다 시도해봤고, 만들었다며 지금에 와서 인간이 자기 손으로 작품을 창조하는 게 무슨 의미냐는 회의적인 말들을 너무 많이 듣고 있다. 이런 말들의 효과는 한없는 무력감과 지나친 강박 외에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 그 단정적인 말들 속에서 남자의 대답은 확실히 다르다. 그의 대답은 동물들 사이에 삼각대를 세우고, 필름에게 먹일 식물을 구하기 위해 목초지를 이리저리 뒤질 수 있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이 이뤄진 상태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I didn’t know that”에서부터 시작되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