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청원경찰들의 폭력만행
- 제작년도
- 2010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1957년, 가설극장으로 시작하다 미림극장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민들과 함께 한, 인천을 대표하는 지역 상영관이다. 1957년 인천 동구 송현동에 고은진 씨가 천막을 세워 무성영화를 상영한 것을 시작으로 문을 연 미림극장은 이후 47년간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며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처음에 평화회관으로 시작한 천막극장은 이내 평화극장이란 이름으로 운영되었다가 최종적으로 미림(美林)극장으로 개명한다. 극장 운영은 고은진 대표의 아들 고용성 씨와 사위 오윤섭 씨가 맡아왔다. 이후 오윤섭 씨는 미림을 그만두고 오성극장을 설립하면서 미림극장은 고은진 씨의 아들 고희성 씨가 대표를 이어받았다. 19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외화 중심의 상영 영화들이 크게 흥행하면서 지역 문화 공동체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미림극장은 1970년대 중반 단층이었던 건물을 이층으로 신축하였고 그때 지금과 같은 2층 발코니 구조로 완성되었다. 1966년부터 미림극장에서 근무한 조점용 영사기사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에는 고희성 대표의 탁월한 외화 프로그램 구성이 소문이 나서 서울의 극장배급사에서도 찾아와 견학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인천 지역에 들어선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공세에 밀려 2004년 7월 29일 영화 <투 가이즈> 상영을 마지막으로 폐관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9년 뒤인 2013년 10월 미림극장은 ‘추억극장 미림’으로 단장하여 다시 돌아왔다. 미림극장 로비 추억극장으로 재출발하다 재개관한 추억극장 미림은 인천 최초이자 유일한 실버전용관을 콘셉트로 지역사회에 새롭게 자리 잡았다. 그 중심에는 140개 회원사를 가진 인천광역시 사회적기업협의회의 의지가 있었다. 원도심을 살리기 위한 복합문화공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가능성 있는 사업 중 옛 영화관을 살려내자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인천시에서 재정을 지원하고 비영리단체인 인천시 사회적기업협의회가 운영을 맡는 방식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천시의 정책이 여러 차례 변경되면서 약속되었던 인프라 구축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2016년 인천시는 사실상 지원 종료를 통보한다. 지원이 끊어진 후 여러 차례 진정서와 청원서가 제출되었지만 방침은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려낸 옛 영화관의 문을 다시 닫을 수 없다고 판단한 사회적기업협의회는 크고 작은 후원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운영해 오고 있는 상황이다. 2016년 2월 29일 공익형 사회적 기업 1호로 거듭난 추억극장 미림은 단지 영화 상영뿐 아니라 지역 기반의 커뮤니티 확장에 공을 들이는 중이다. 고령, 경력 단절 여성 등 취약 계층의 고용률을 60% 이상 유지 중이며 실버 세대의 자원활동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상영관 내부, "추억극장 미림에서 추억의 명화를 만나보세요"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무엇보다 추억극장이라는 콘셉트에 충실하되 그것에만 스스로를 가둔 채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재 ‘미림’(美林)은 ‘아름다운 숲’이란 의미처럼 세대를 아우르며 공존하는 문화공간을 지향한다. 문화 혜택의 사각지대인 실버 관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을 넘어 가족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2016년 문화관광부 예술영화전용상영관으로 지정된 이후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지역사회와 밀착 중이며 2016년 9월 SK사회성과인센티브 프로젝트와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2017년 인천광역치매센터 치매극복 선도기업으로 지정된 후 노인문화복지 증진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동시에 젊은 관객층 개발에도 소홀하지 않고 관객들이 직접 영화를 선정하여 상영하는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개발 중이다. 과거의 추억을 되돌아보는 고전영화 상영을 기본으로 하되 후배 세대와의 소통 창구를 꾸준히 개발하여 공존의 의미를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 복원을 위한 노력 10년의 폐관 기간 동안 미림극장의 많은 자료들은 안타깝게 유실되었다. 하지만 재개관 후 보관된 자료들을 복원하고 인천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기증받는 등 자료복원과 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극장의 3층에는 영화연구가 정종화 선생이 50년간 수집한 영화 포스터, 전단, 스틸 사진 등의 자료가 전시 중이다.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진행되는 정종화 영화연구가의 시네마데카메론 수업을 통해 과거의 낭만을 되짚어보고 청년세대에게 전하는 만남의 장이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공존의 현장이라 할만하다. 미림극장은 상영관 오른쪽에 바로 외부와 연결되는 문이 뚫려있는 독특한 구조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실과 영화의 세계를 오가는 건축물은 지역주민과 밀착하여 가깝게 소통하는 미림극장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3층 미림역사관에 전시된 미림극장의 역사 자료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주소): 인천시 동구 화도진로 31 (송현동 92-7) 2. 설립일 - 1957.11월 최초 개관(평화극장) - 1958.10.5. 정식 개관(미림극장), 2004.7.29. 폐관 - 2013.10.2(재개관)~ 3. 대표자: 고은진(창업주), 고희석(폐관 당시), 최현준(현재) 4. 규모: 대지면적 477m², 연면적 745.79m², 바닥면적 437.79m²(지상2층, 지하1층) (1~3층 구조인데 건축물대장에는 이와 같이 표기되어 있음) 5. 극장 구성 - 단관극장, 재개관하면서 1층 206석, 2층 77석이였으나 2002년 3월 CGV 좌석기부를 통해 2층 좌석을 교체하면서 47석으로 줄어듦. 현재 253석. - 1층: 매표소(매점 겸업), 여자화장실, 커피자판기, 정수기 - 2층: 미림살롱(소공연장), 남자화장실, 커피자판기, 정수기 - 3층: 미림역사관(상설전시관), 영사실 6. 운영시간: 쉬는 날 없이 매일 9:30~20:30 7. 입장료 - 고전영화(기본 5,000원, 학생 4,000원, 65세이상 2,500원) - 개봉영화(기본 7,000원, 학생/65세이상 5,000원) 인터뷰: 최현준 대표(인천 미림극장) 미림극장 최현준 대표 송경원 _미림극장에 대한 간단한 개요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현준 _미림극장은 1957년도 지금 이 위치에서 평화극장이라는 이름의 천막극장으로 시작됐습니다. 오랫동안 인천시민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2004년도에 폐관을 했고, 다시 문을 연 건 2013년입니다. 인천 구도심의 오래된 영화관의 모습을 다시금 살려내어 향수를 추억하는 동시에 청년세대에게도 고전영화의 감동과 즐거움을 전하기 위해 운영 중입니다. 송경원 _9년 동안 폐관되었다가 어떻게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나요. 최현준 _1999년도에 인천 지역 멀티플렉스가 생겼습니다. 신도시로 인구 이동이 많았죠. 자연스럽게 동인천역 주변 지역은 구도심이 되었는데 그렇게 극장을 비롯한 상권의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2004년에 결국 미림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고 10년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재개발 이슈가 있었지만 당장 이뤄지는 건 아니라서 오히려 보존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원도심을 살려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중 하나가 옛 영화관을 부활시키는 거였습니다. 인천시와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미림이 다시 문을 열었죠. 송경원 _하지만 그 뒤로도 상황이 순탄하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최현준 _맞습니다. 원래 인천시가 인프라 구축과 재정지원을 약속했는데 이행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결국 포기해버렸습니다. 운영을 맡았던 사회적기업협의회는 한번 폐관됐던 극장을 다시 또 문닫게 할 수는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렇게 비영리 단체이 기업협의회의 주관 아래 다양한 후원과 관객들의 사랑으로 지금까지 운영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송경원 _미림은 '아름다운 숲'이란 뜻인데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최현준 _이름의 근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습니다. 원래 평화극장이었다가 어느 날 미림으로 변경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르기 쉽고 아름답고, 인근 수도국산이 있기도 하고 문화적인 쉼터라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처음에는 시장통에 천막을 치고 시작했다가 점점 사람들이 모여 동인천 인근의 문화공간으로 유명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시장 번화가이기도 하고, 맞은 편에 달동네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문화적 갈증을 채워주는 장소였던 셈이죠. 계단 벽, "미림, 아름다운 영화의 숲"이라는 슬로건이 보인다 송경원 _건물 형태가 독특합니다. 극장 바로 옆에 출입구를 열면 바깥으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최현준 _미림극장에 오래 근무하신 직원분들에게 여기에 얽힌 에피소드를 자주 들었습니다. 간판 그림을 그리신 김기봉 선생님, 극장 입구를 지키셨던 양재영 선생님, 그리고 영사를 맡았던 조점용 선생님이 있습니다. 전성기였던 1970, 80년대에는 200석 남짓한 극장에 하루 2, 3천 명씩 몰려들어 영화를 봤다고 합니다. 70년대 중반 관객을 좀 더 수용하기 위해서 극장을 확장했는데, 천장이 높은 장점을 살려 2층에 발코니를 만들고 80석 규모를 늘렸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몰려도 사고 한 번 나지 않았던 걸 오래 근무하신 분들은 다들 자부심으로 여깁니다. 문을 열면 바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 덕분이기도 한 것 같아요.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의 동선이 겹치지 않으니 사람이 깔릴 일이 없는 거죠. 한편으론 낭만적인 면도 있습니다. 2시간 남짓 영화의 세계에 푹 빠졌다가 오른쪽 출구 문을 여는 순간 현실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걸 보면 이곳이 영화관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셨다고 합니다. 미림극장을 추억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도 이런 건물구조라는 분도 꽤 계십니다. 상영관 출구가 거리로 이어지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송경원 _실버영화관 콘셉트의 추억극장 미림으로 재개관을 했습니다. 최현준 _문화 소외층인 노령층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영화관입니다만 거기에 국한되지 않고 가족 관객이 함께 찾는 지역 문화공간을 지향합니다. 2층에 시네토크를 할 수 있는 소공연장 미림살롱을 마련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3층에는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인 미림역사관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재개관 2년 뒤인 2016년에 입사를 했는데 미림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도 과거 자료들을 찾는 거였습니다. 1957년에 개관한 영화관이니 얼마나 많은 자료가 있을까 기대했지만 사실 남아있는 자료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정종화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뜻있는 분에게 자료를 기증받았고, 공사를 하면서 발견한 작은 박스에서 예전 극장을 운영했던 장부 등의 기록 문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3층을 역사관으로 꾸몄습니다. 지금도 조금씩 수소문하며 과거의 자료들을 모으는 중입니다. 아직 많은 자료를 복원하진 못했지만 미림을 방문해주신 인천 시민분들께 이곳이 어떤 곳인지, 우리가 어떤 역사와 얽혀서 지금까지 왔는지 알리고 싶습니다. 시네토크를 할 수 있는 2층 미림살롱의 무대 공간 송경원 _미림극장에는 어떻게 근무하게 된 건가요. 최현준 _인천 지역에 개인적인 연고는 없습니다. 문화재단 관련 일을 오래 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예술 분야의 사회적 기업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과정에서 미림극장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천국제영화제가 첫 직장이었는데 그렇게 알게 된 영화에 대한 애정과 친숙함이 미림극장에서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송경원 _사회적 공익기업이 주체인 만큼 다양하고 특색 있는 프로그램이 눈에 띕니다. 최현준 _실버영화관이 시작이었던 만큼 인천광역치매센터와 함께 노령층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다만 지금은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생존하기 힘든 상황이라 저변을 넓히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업의 정신에 맞게 취약 계층 고용률을 60%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은 쉽지 않고, 피치 못한 사정으로 직원들이 떠나야 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신기한 건 인천시와 같은 외부 지원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어려운 순간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도움의 손길이 있다는 점입니다. 2016년에 인천시의 지원이 중단됐을 때 2500여 명의 시민들이 서명을 하여 청원을 넣기도 했습니다. 그런 힘으로 오늘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상영관 입구, 다양한 시민들의 메시지가 붙어있는 벽면이 보인다 송경원 _실버영화관에서 출발하여 지역 기반의 문화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최현준 _아직 갈 길이 멀고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70대 이상 관객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버영화관이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차라리 추억을 어떻게 함께 하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을 회상하는 공간으로, 젊은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고전 걸작과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되고자 합니다. 클래식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필요한 건 그걸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1957년에 문을 연 미림극장은 세월의 힘이 쌓여 있습니다. 거기에 지금은 오래된 영화관 이상의 특별함을 드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 중입니다. 어르신들은 물론 원도심 인근의 아이들에게는 이 극장이 유일한 문화공간입니다. 우리 동네 마을 극장이라고 할까요.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꾸준히 고민하면서 이 공간이 가능한 오래 지속되길 희망합니다. 인터뷰: 조점용 영사기사(인천 미림극장) 미림극장 조점용 영사기사 송경원 _미림극장에서 가장 오래 근무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조점용 _1964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6년부터 미림극장에서 영사기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미림극장의 흥망성쇠를 함께 지켜보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영사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자식 셋을 키워냈습니다. 오래 했지만 뒤돌아보면 뚜렷하게 남긴 건 없네요. 그저 쉬지 않고 했습니다. 미림극장이 문을 닫았을 때도 말이죠. 매주 월요일에는 간석동에 있는 노인 종합문화회관, 화요일에는 중구청 지역의 문화원, 수요일에는 부천지역까지 가서 영화를 틀었습니다. 지금도 미림극장에서 불러주면 영사기를 만집니다. 송경원 _미림극장에 처음 오셨을 때 극장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조점용 _내가 처음 왔을 때는 천막은 아니고 단층극장이었어요. 단층에 200석인데 손님은 미어터져서 건물을 새로 지었지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더 몰리고. 재밌는 외화가 한다고 소문나는 시기에는 매일 작게는 1천 명, 많게는 3천 명까지 와서 장사진을 쳤죠. 인근 지역에서 사람이 몰려드는 그야말로 화제의 중심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내가 여기서 영화를 튼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송경원 _개관 당시부터 꾸준히 인천 문화의 중심지였군요. 조점용 _맞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는 TV가 집집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관이 최고의 호사였으니까요. 당시 수도국산 산동네는 정말 못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로애락을 주는 영화가 더욱 소중했죠. 인천 동구는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이쪽으로 영화를 많이 보러 왔습니다. 왜냐면 서울에서는 개봉영화를 보려면 예매를 해야 하는데, 여기는 아무 때나 와서 자리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당시 인천 지역의 극장 시스템은 그랬습니다. 지금은 문을 닫은 문화극장이나 오성극장, 그 위쪽의 인천시민회관 등 인천 지역 영화의 산실이 바로 동인천 동구 이 동네였거든요. 송경원 _동구 지역 영화관 중에서도 미림극장이 특별했던 점은 무엇인가요. 조점용 _사장님이 흥행할 영화를 잘 골라왔어요. 당시 영화수입업자들은 다 충무로에 있었는데 인기 있는 영화를 얼마나 가져오느냐에 따라 수입 차이가 꽤 컸습니다. 한국영화는 별로 인기가 없어서 억지로 틀고 그 대신 외국영화 틀 날짜를 받아오곤 했지요. 당시 사장인 고용성 씨가 미 8군사령부 수석 통역관이었던 사람이라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했어요. 영어가 되니까 영화도 잘 고르는 거죠. 그래서 서울의 수입업자들이 고용성 사장을 찾아와서 어떤 영화를 수입할지 물어보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고용성 그 양반이 영화에 대한 식견도 높아서 당시에 해외영화 잡지 같은 것도 챙겨보고 그랬습니다. 영화가 미국에서 흥행했다고 한국에서 다 흥행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한국 정서에 맞는 작품을 잘 찾아야 되는데, 고용성 사장이 귀신같이 그런 걸 잘 골라냈습니다. 그런 자산을 가지고 영화를 빠르게 잘 배급해오기도 하고 그랬지요. 역사관에 전시되고 있는 80-90년대 상영되었던 영화 예고편 필름들 송경원 _40년 세월 영화를 틀어오셨지만 그 중에서도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영화가 있을까요. 조점용 _글쎄, 워낙 많아서. <킬링 필드>(롤랑 조페 감독, 1984)라는 영화가 공무원들이 인사고과에 반영된다고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라 단체관람객이 많이 왔던 게 생각납니다. 학생 단체관람도 많았고. 당시에 한국영화는 관객이 잘 안 드는데 스크린쿼터 때문에 억지로 틀기도 했어요. 그럴 땐 한국영화 간판만 걸어놓고 외화를 틀기도 했죠. 단속이 나와서 걸리다 보니까 나중에는 못하게 됐지만. 송경원 _2층 발코니 공간의 좌석이 특색이 있는 구조입니다. 조점용 _사람이 워낙 몰리니까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려고 공사를 했죠. 당시엔 건축학과 교수들도 와서 이야기하곤 했어요. 여기가 인천에서 영화 보기 제일 좋은 곳이라고. 다들 좌석 한 자리라도 더 늘리려고 하지 이렇게 영화를 보기 좋게 설계한 곳이 없다고. 상단, 하단, 구석 어디에 앉든 스크린이 가려지는 곳이 없거든. 280석이 정원이지만 계단에 앉아서 보기도 하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받았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어렵게 발걸음 했는데 많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손님이 하도 많으니까 여름에는 에어컨이 돌아가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들 열기랑 습기가 섞여가지고 유리창이나 렌즈만 닦는 아르바이트를 따로 고용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몇십 년을 운영하면서 이제껏 큰 사고 한번 안 났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도 그게 자랑거리입니다. 그만큼 직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다는 거죠. 상영관 2층 발코니 형 좌석 송경원 _그러던 게 1990년대 말, 2000년 초가 되어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 침체에 빠졌습니다. 조점용 _서서히 사람이 없어진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관객이 한 번에 사라졌어요. 시대가 바뀐 거죠. 한 번에 14개 관에서 여러 영화를 상영하니 단관극장으로 사람들이 올 리가 있나. 매일 미어터지던 입구가 정말 거짓말처럼 한산해졌습니다. 송경원 _2004년 문을 닫는 마지막 날까지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조점용 _지킬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본 겁니다. 손님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허전한 마음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이 길이 내가 갈 길이 아닌가 보다 싶기도 하고. 그래도 어쩌겠어. 평생 해온 게 이 일이고 내 자리가 여긴데. 에어컨도 없이 여름이면 지옥 같은 영사실에서 그렇게 오래 해왔는데 이제 와서 뭘 다른 일을 하겠어요. 우리 집이 바로 여기서 몇십 미터 앞이거든. 여기서 일하려고 집을 아예 구해버렸지. 일하기 좋았던 시절도 있고 어려운 시절도 있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니 오늘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극장이라는 공간이 많이 퇴색이 됐어요. 추억을 쌓고 잊히지 않는 공간으로 자꾸 발전되어야 하는데 그런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요. 미림극장이 다시 문을 연 건 반가운 일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쉽진 않지만. 필자: 송경원(씨네21) 사진촬영: 손홍주 인터뷰 일자: 2022년 5월 20일
대구에는 1910년 이전 달성관(達城館)이라는 연예회장이 있었다. 극장이라기보다는 각종 집회와 연회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1912년 폐관되었다. 그 외에도 대구 서문과 북문 밖에는 가설극장들이 존재했으며 금정(錦町)의 금좌(錦座)와 대화정의 낭화관(浪花館), 대구구락부와 같은 활동사진이 상영되던 극장이 있었다. 1910년대 후반 이후 대구지역의 극장들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① 칠성관(七星館), 대송관(大松館), 만경관(萬鏡館), 대경관(大鏡館), 호락관(互樂館) 대구부 촌상정(村上町)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으로 1916년 후루가와(古川文之助) 등이 청원하여지어졌다. 1922년 무렵 칠성관은 대송관으로 바뀌었다. 이후 대송관은 대영관(大榮館)에 인수되어 제2대영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8년 만경관(萬鏡館)을 운영하던 이제필이 만경관이 화재로 소실 된 후 대송관(제2대영관) 건물을 빌려 만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 활동사진관으로 운영했다. 이후 만경관이 신축되자 이제필은 이곳을 대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영화 대경관 신설>, 《동아일보》, 1929.01.02) 이제필이 운영하던 대경관은 1933년 8월 12일 윤무용(尹武用), 김상덕(金尙悳), 김파영(金波影) 등의 경영진 하에서 다시 이름이 호락관(互樂館)으로 바뀌었다. 1938년 시설 낙후 등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② 대구좌(大邱座), 대구극장(大邱劇場) 대구좌는 대구부 전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용산의 앵좌(櫻座)를 이전하여 건설한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던 대극장이었다. (<대구좌 신축 신보(新捗)>, 《조선시보(朝鮮時報)》, 1918.04.27) 1918년 5월 말 대구기업주식회사에서 세웠다. 극장의 운영은 나카무라(中村喜一)가 맡았다. 1925년 봄 야마네(山根初太郞)가 대구좌의 운영을 맡아, 외관과 내부를 수리한 후 9월 재개장 했다. 이 무렵 대구좌라는 명칭 대신 대구극장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대구극장은 경성의 부민관이나 평양의 금천대좌와 같이 다목적 회관의 성격을 지닌 극장으로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③ 조선관(朝鮮館), 만경관(萬鏡館) 조선관은 대구부 경정 1정목에 있었던 극장이다. 1920년 대구의 전당포업자들의 모임인 십일회(十日會)와 대구좌(大邱座) 주인 나카무라(中村喜一), 조선인 배모(裵某)가 합작하여 만든 극장이었다. (<대구에 극장 신설>, 《매일신보》, 1920.02.26) 하지만 건립 직후 화재로 사라졌다. 1922년 8월 조선관이 있던 자리에 만경관(萬鏡館)이라는 새로운 극장이 지어졌다. 삼층의 벽돌 건물로 대구지역의 대표적 조선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이었다. 192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시 만경관의 흥행을 맡아하던 이제필은 대송관(大松館)을 빌려 만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이어갔다. 1929년 화재로 사라졌던 만경관이 재건되었다. 1943년 현재 만경관의 흥행주는 니시야마(西山吉五郞)이며, 720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④ 대영관(大榮館), 소명관(昭明館), 신흥관(新興館), 대구송죽영화극장(大邱松竹映畵劇場) 대영관(大榮館)은 대구부 전정 14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으로 1921년 무렵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29년에 대영관은 소명관(昭明舘)으로 관명이 바뀌었으며, 1931년 4월에는 신흥관(新興館)으로 다시 바뀌었다. 신흥관은 1939년 6월 문을 닫았다. 18년 전 지어진 건물이라 시설이 낙후하였기 때문이다. 1940년 7월 5일 시마다(島田金四郞)가 대구송죽영화극장(大邱松竹映畵劇場)을 설립했다. 신흥관의 흥행권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1943년 현재 대구송죽영화극장의 흥행주는 이토(伊藤勘吾)이며 객석 수는 570석이었다. 해방 후 대구동보극장(大邱東寶劇場)으로 바뀌었다. ⑤ 영락관(永樂館) 1930년 무렵 대구부 전정(田町) 11번지에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인 영락관(永樂館)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당시 경영자는 나가오(長尾喜重郞)이었다. 1934년 영락관을 운영하기 위해 주식회사 대구영흥상회(大邱映興商會)가 조직되었다. 1936년 여름 시설을 크게 개선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대구영흥상회 사장 호리코시(堀越友二郞)이며 객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 이름을 송전극장으로 바꾸었다. ⑥ 대구키네마구락부(大邱キネマ俱樂部), 대구보총극장(大邱寶塚劇場) 대구부 동성정 2정목 88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대구키네마구락부는 1938년 호락관의 흥행권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1940년 이름을 대구보총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대구영흥상회 사장 호리코시(堀越友二郞)이며 객석수는 950석에 달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는데 한국전쟁 기간에는 국립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⑦ 김천좌(金泉座), 김천극장(金泉劇場) 김천좌는 1910년대부터 흥행장으로 활용된 경상북도 김천의 극장이다. 정확한 설립연대와 설립자는 알 수 없다. 1925년 무렵 낡고 협소한 공간이 문제가 되어 당시 관주인 후쿠시마(福島格一)가 영업을 중지했다. 대신 1923년 잠시 문을 열었다가 문을 닫은 활동사진상설관 조선관(朝鮮館)의 건물을 인수받아 영업을 이어갔다. (<金泉唯一の娯楽塲>, 《朝鮮新聞》, 1925.08.22) 1938년 김천읍내 유지들로 구성된 경북흥업주식회사가 김천좌의 흥행권을 인수한 후 성내정의 부지를 매수하여 그곳에 극장을 신축하게 된다. (<경북흥업 신축 재이(在邇)>, 《동아일보》, 1938.02.24) 신축된 극장의 이름은 김천극장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노(佐野秋千代), 지배인은 타니히치(谷久平)이다. 객석 수는 800석이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⑧ 영일좌(迎日座) 포항극장(浦項劇場) 1920년대 포항에는 영일좌(迎日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언제 만들어지고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영일좌에 이어 들어선 극장이 포항극장이다. 1936년 포항읍 대정정에 들어섰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마노우치(山之內學)이며 객석 수는 597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영천극장(永川劇場) 경북 영천읍 창구동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34년 무렵 신문지상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 즈음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하라(安原在玉)이며, 객석 수는 45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⑩ 상주좌(尙州座), 상주극장(尙州劇場) 경북 상주읍 서정에 위치하고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쿠쇼쿠(拓植光太郞)이며 3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⑪ 예천극장(醴泉劇場) 경북 예천군 예천읍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8년 1월 영업을 시작했다. 설립자는 예천 청년 김위진(金渭鎭)으로 1만 1천원의 비용을 들여 완성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위진(창씨명 正木渭鎭)이며 객석은 총 400석이었다. ⑫ 청도회관(淸道會館) 경북 청도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하라(大原基一)이다. ⑬ 안동극장(安東劇場) 경북 안동읍에 있었다. 1939년 무렵 개관을 했다. 특이하게도 이곳에서는 권투경기가 자주 열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가노(中野文雄)이며 객석수는 300석이었다. ⑭ 경주극장(慶州劇場) 경북 경주읍 동부리에 있던 극장이다. 1928년 8월 19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경주 학교조합관리자 기노시타(木下宇平)이다. (<慶州劇塲竣工>, 《朝鮮新聞》, 1928.8.17) 경주지역의 유일한 흥행장으로 연극, 영화의 상연은 물론 집회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939년 9월 17일 흥행주 기노시타(木下淸)가 낡고 좁은 건물을 증축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기노시타(木下淸)이며 객석 수는 350석이다. ⑮ 대인좌(大仁座) 구룡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1932년 11월 20일 설립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다(多田仁助)이며 객석 수는 3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영주극장(榮州劇場) 영주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히로타(廣田且吉), 지배인은 야스다(安田浩三)였다. 객석수는 5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강구회관(江口會館) 강구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후지하라(藤原英一)였다. ⑱ 의성회관(義城會館) 의성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히라노(平野文雄)이며, 객석 수는 600석이었다. [자료] 《朝鮮新聞》, 1928.08.17. 慶州劇塲竣工, 十九日落成式 (慶州)篤志家木下宇平氏は前學校組合管理者にして地方發展の爲慶州劇場建設を計畫し愈愈日頃竣工し上つたので新築落成式を兼ねこけら落しを擧行する事となり內地より松島家松鶴一座を招聘し來ろ19日午後3時より落成式を擧げ引續き6時から招待演劇を開幕すぺく多數各方面に夫夫招待狀を出しをりつあり [자료] 《매일신보》, 1940.11.11. 감포극장(甘浦劇場) 전소(全燒) 【경주】 감포극장(甘浦劇場)은 지난 八일 오전 二시경에 전소하였는데 원인과 손해는 방금 당지 주재소(駐在所)에서 조사 중이라는데 동 극장은 十여 년 전에 건축한 二층으로서 손해는 대략 三천원가량이라고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27.05.19. 대구의 대극장, 만경관(萬鏡舘) 전소(全燒), 십팔일 새벽에 불이 낫다 【대구지국특전】 대구에 잇는 죠선인 죠합 조직의 활동사진상설관 만경관(萬鏡館)은 젼에 불탄 극쟝자리에 새로 셰운 남선유일의 큰 극장이엇섯는대 십팔일 새벽 돌연이 불이 나서 대구 시내의 소방대는 일제히 츌동하야 진화에 노력하야 연소는 없섯스나 만경관은 젼소되고 악긔와 및 비품도 젼부 소실되고 마랏다는대 진화는 오젼 여섯시경이었다. 손해는 오(五)만원, 원인은 실화인 듯 츌화한 원인에 대하야는 아직 조사 즁이나 삼층 우에서 발화되듯하다 하며 손해액은 젼부 오만원 이상에 달하겟고. 보험에는 삼만원 드러잇다고 한다. 만경관은 최근에 신츅된 남션 유수한 극장이다. [자료] 《동아일보》, 1922.06.28. 대구 이오극장(二五劇塲) 신설 대구부 경정(京町) 一정목 전(前) 조선관(朝鮮館) 기지(基址)에 대구 유력자 十二인이 합명하야 극장을 건설하고 기(其) 명(名)을 이오관(二五館)이라 하야 활동사진 ᄭᅡ 지 겸영(兼營)하리라더라.(대구) [자료] 《동아일보》, 1939.09.20. 경주극장 신장(新裝), 거(去) 십칠일부터 개관 【경주】 二만여 읍민의 유일한 관극장소인 경주극장(慶州劇場)은 과거에 넘우 자리가 협소하야 왜지의 큰 흥행단체도 흥행 “코-수”에 엇지안코 통과하는 일이 만흘뿐덜어 또한 조곰 조흔 극이 오면 즉시 만원이 되어 일반의 관극 상 불편이 적지 안엇는터인데 금번 극장주 목하청(木下淸)씨가 다대한 돈을 엇고 수리를 시작하야 낭하를 물리이고 장내를 확장하는 등 어느 정도의 신장을 보이게 되엇다. 그동안 근 수십일을 두고 휴업중에 잇든 경주극장도 지난 십칠일 밤부터 참신한 면목으로 손의 앞에 개관케 되엇다. 앞으로 속속 조흔 흥행물을 골나서 관중을 마즈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8.01.12. 예천극장 개관 【예천】 예천 지방에서 일반이 갈망하든 극장은 예천읍 발전 상 긴요한 숙제이든바 당지 청년 김위진(金渭鎭)씨의 노력으로 一만 一천여원의 금전과 五개월의 시일을 소비한 결과 지난달에 준공하고 그동안 모든 설비도 완비되엇으므로 신년 벽두를 기하야 지난 五, 六 양일간 주야겸행으로 일반에게 피로 공개한바 연일 초만원의 성황이엇다. [자료] 《동아일보》, 1929.01.02. 영화 대경관(大鏡館) 신설 대구의 상설영화 만경관은 연전(年前)의 화재를 당한 후, 당시 경영자 이제필(李濟弼)씨는 촌상정동(村上町洞) 대송관(大松館) 집을 빌어 만경관 이름을 보게(保揭)하고 이래 적극적 노력을 하야 오든 바 금번 경정(京町) 소지(燒址)에 신관이 재성(再成)되고 신경자(新營者)가 현출(現出)됨으로 씨는 종래의 만경관 명을 해관(該館)에 양환(讓還)하는 동시, 신년 一월 一일부터 종래 씨의 경영하든 바 만경관은 『대경관』이라 개칭하야 더욱 확충에 진력하겟다는 바이로서 대구에 영화상설관은 양처(兩處)가 된다더라. 【대구】
연흥사(演興社)와 장안사(長安社)는 러일전쟁 직후 만들어진 조선인 극장이다. * 연흥사는 1907년 11월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송지만(宋芝萬), 이준동(李俊東), 이종진(李鍾振) 등이 절골, 즉 사동(寺洞) 장윤직(張潤稙)의 집을 개조하여 연희루(演戱樓)를 건축하고자 경시청에 청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연희장이 연흥사가 아닌가 한다. 이 정확한 위치는 탑골공원 왼편 훗날 조선극장 자리로,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30번지이다. 1912년 연흥사에서 연극공연을 본 바 있는 연극인 박진(朴珍)의 회고에 따르면, 동향(東向)에 비계목(飛階木)으로 만든 이층짜리 건물이었으며 일층 객석은 나무로 만든 장의자를 길쭉길쭉하게 놓았고 이층에는 삿자리를 깔았다고 한다. 당시 여느 조선인 극장과 마찬가지로 객석은 성별에 따라 나누어져 있어서 일층은 남자석, 이층은 여자석이었다. 1912년 여름에는 극장 천장에 선풍기를 달아 관객들로 하여금 한여름의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여 관람의 편의를 높였다. 사진 2. 딱지본 소설 『산천초목』의 표지에 그려진 연흥사의 모습(이해조, 유일서관, 1912) 초기 극장이 대게 그러하듯 운영자는 자주 교체되었다. 1908년 연흥사는 박원근(朴元根)이 총무를, 송종오(宋鐘五)가 감독을 맡았다. 개장 초기에는 창극을 주로 공연했으나, 극장을 경영해본 경험이 일천했던 데다가 전황으로 경영난이 닥치자 극장을 방매한다. 이후 전당포 주인 석숭환(石崇煥) 등이 돈을 대어 유지해 나갈 수 있었는데, 1909년 당시 석숭환이 연흥사에 투자하여 손해 본 액수만 3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연흥사가 언제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 1908년 초부터 신문지상에 연흥사 광고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대 들어 연흥사는 다른 어떤 극장보다 신파극을 자주 공연한다. 이로써 경영난을 극복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신파극은, 1910년대 초반 조선인 극장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는데, 특히 연흥사는 신파극 공연을 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신파극 전용 극장이라 선전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진 역시 연흥사에서 이뤄진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 공연을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당대 사람들에게 연흥사는 신파극의 본산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혁신단의 연흥사 공연은 1912년 2월 18일 <육혈포강도>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수전노(守錢奴)>, <소위휘선사자친죄(少尉揮善捨子親罪)> 등의 작품을 올렸는데, 쌀값 폭등으로 불경기가 도래하자 임시로 공연을 중단, 다시 개연하여 <선탐후개(先貪後改)>, <서승어적(庶勝於嫡)> 등을 공연했다. 이후 <눈물>이나 <장한몽> 같은 대표적 신파극 레퍼토리 공연이 큰 인기를 끌면서, 임성구의 혁신단은 신파극의 대표 주자로 인정받게 된다. 예컨대 <눈물> 공연을 본 ‘사동생’이라는 이름이 독자는, “나는 눈물 연극 구경을 갓다가, 부인셕에셔 일졔히 우는 것을 보면은, 졀로 눈물이, 것잡지 못하게 쏘다져요” 1 라며 극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장한몽>을 본 '애극생'이라는 관객은, “연흥샤 쟝한몽 연극은, 참 재미잇습듸다. 사람은, 엇지도 그리도, 만히 드러 가는지 매일 여젼하던 걸이오. 잇흔날브터는 즁편이라지오, 샹편 보고, 즁편 안 볼 슈 잇나, 불가불 일즉 언이 가, 보아야 하겟스니, 할인권 백인 신문이나, 오날은 일즉이 돌이게 하십시오” 2 라며 연흥사의 신파공연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을 표현했다. 신파연극의 흥행 성공과 더불어 연흥사는 탕자음부가 모이는 곳이라는 오명도 쓰게 되었다. 이에 조산부(助産婦)양성소의 자선연주회 같은 공익적 역할의 공연을 개최하는 등 인식 개선에 나서기도 했다. 1914년 10월 8일, 연극장이 협소하여 공연하기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경무청에서 허가를 취소함으로써 연흥사는 돌연 문을 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이 바로 철거되지는 않았는데, 신파극을 대신하여 김창환, 이동백 등 명창들의 판소리 공연장으로 활용되다가 1915년 5월 무렵 철거된다. 철거된 자리는 빈터로 남아 있다가 7년 뒤인 1922년에 조선극장이 들어선다. * 장안사는 동구(洞口) 내(內) 장대장동(張大將洞) 장사골에 건립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진은 장안사의 위치에 대해 “낙원동과 익선동 사이, 즉 단성사에서 동관대궐이라던 창덕궁을 향해 가는 큰 길과, 낙원동에서 경운동으로 가는 큰 길과의 사이”에 “동궐나뭇장(柴場)이라고 해서 넓은 공지가 있었는데 그 공지가 장안사가 있던 터”라고 회고했다. 장안사의 건설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성사, 연흥사와 비슷하게 1907년 말에서 1908년 초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개장 초기에는 전통 연희를 비롯하여 중국의 경극을 상연하고,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개관 초기에는 관람자가 적어 여타 극장들처럼 경영난을 맞았지만, 연흥사나 단성사에서 연행하지 않는 “꼭두각시의 홍동지, 박첨지놀음과 광대 줄타기, 남사당패의 무동 서기, 서도잡가, 경기 입창 등”의 전통 연희를 주요 레퍼토리로 삼아 공연하면서 장안사만의 전문성을 살려 나갔다. 사진 3. 장안사에서 상연된 중국연희 공연(《황성신문》, 1909년 4월 21일자, 3면.) 장안사는 최홍석(崔弘錫)이 사장이던 1910년 4월 무렵 활동사진 영사기를 도입하여 프랑스 파테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3 이에 학부(學部)에서는 장안사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을 중등 이상의 학교 교육에 활용하도록 지도하기도 했다. 4 같은 해 5월부터는 파테회사가 아닌 일본인 흥행업자 가즈토키(和常)와 필름 배급계약을 체결하고 일본에서 오는 필름을 상영했다. 5 1912년에는 잠시 서양인이 극장을 임대하여 지만관(志滿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요컨대 1910년대 초반 장안사는 활동사진관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12년 말 대정관, 우미관, 황금관 등 본격적인 활동사진관이 설립되어 운영되기 시작한 이래로는 송만갑, 김창룡 등의 명창이나 채란, 해선 등의 기생들에 의한 노래 공연이나 소위 구(舊)연극을 상연하는 장소로 더 유명했다. 장안사는 1915년경에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단성사가 화재로 소실된 뒤 단성사에서 연행하던 김재종(金在鍾) 일행이 장안사로 옮겨 연행을 계속한다는 기사가 있는 한편, 그들이 연흥사에서 연행한다 기사도 있다. 미루어 짐작컨대, 장안사의 극장 상태가 공연에 부적절했다기보다 시설이 괜찮은 연흥사를 택해 연행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장안사는 아마도 이즈음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1) 「독쟈구락부」, 《매일신보》, 1913년 10월 29일자, 3면. 2) 「독쟈구락부」, 《매일신보》, 1913년 11월 4일자, 3면. 3) 「광고」,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1일자, 3면. 4) 「교육에 활동」, 《황성신문》, 1910년 4월 17일자, 2면. 5) 「활동사진 계약」, 《황성신문》, 1910년 5월 17일자, 3면. * 참고문헌 유민영, 『한국근대극장변천사』, 태학사, 1998, 116~151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50~52쪽. * 사진1(상단). 혁신단 단장 임성구(《매일신보》, 1914년 2월 11일자, 3면.) [자료] 《대한매일신보》, 1906.03.30. 奉常劃提調李苾和氏가 人民敎育하기를 爲하야 上䟽한 全文이 如左하니 續 此臣所謂敎育一事庶可以爲日後來復之基也雖然所謂敎育者亦有古今之異其泥於古而昧於今者子莫之執也 若專尙今而棄舊則忘其本者也盖有國有民必有宗敎故宗敎興則其國興宗敎衰則其國衰環天下亘萬古不易之典也 夫孔孟之道我 國之宗敎也惟我邦國之不振由於宗敎之不興如欲振興其邦國必先懋興其宗敎也 今以遭世界更新之運不得不學今之學者又事勢之不得已也孔孟之敎係是三綱五常之道也必使幼冲之子弟經之以三經五常之道使不失其本然之彜性然後學今之學則中散萬事末合一理可以並行之不悖矣臣願 陛下深留聖意於斯亟令學部益勵敎育之責任 規模則先興孔孟道學之宗敎次修開明之新學節次則特加尊崇文廟仰瞻羹墻而俎豆絃誦升降拜揖使靑年子弟咸知慕聖之本義而尊重其宗敎焉 以成均舘爲大學校而京師則一署各置一中學校而一面各置小學校一里各置一村塾 小學校卒業之人陞之中學校焉中學校卒業之人陞之大學校焉定其課程第其高下歲拔其優等者薦之於政府而充補其相當職不出十年之間而仕於 朝者皆大學校卒業之人至於農商工亦莫不然而隨其人才派送各國各修其藝焉 又錄其敎師之勤者而薦用之又採私立學校者優施補助者而褒賞之不數年之內不費國金而學校之設必遍滿於 國中 然則三千里內養成之聰明子弟亦不少矣夫何患乎人才之不能就乎雖然敎育一事爲近日之例套語而已則終未見其效而今日之勢惟在實踐二字而已 臣願 先下詔勅令學部改定敎育一致之法上自太學至于各郡鄕校置大中小學校實行其作成人才之方 今漢城及各道道臣上 奏學校私立之人以勳章褒章以勸以奬焉臣雖不學的知今日 國家之興惟在敎育之興惟在宗敎之興故 忘其僭陋而爲 陛下國家一言之伏乞 陛下勿以臣之卑微而少 垂察其言則 國家幸甚生民幸甚 完 [자료] 《황성신문》, 1906.04.19. ●李氏上疏 奉常副提調李苾和氏가 皇帝陛下께 上䟽한 全文이 如左하니 伏以臣向以興學校振敎育一事猥陳荒說優蒙 聖批至有令政府禀處之旨旣而大 詔煥發如綸如綍使於敎育人才事方專心講究俾有實効臣伏讀 詔書感極涕發窃有少湏臾無死之願而計以爲此時此 詔不啻若大旱之逢甘霈則其舉而行之宜必汲汲如不及以對揚休命矣伏竢累日以臣之躁妄實不能無滋惑焉盖今日百獘之本惟以虛文二字爲詐飾若幷此敎育一事而亦歸虛文則臣所謂國家來復之基永無其望矣然則臣安得不心枯膓焦疾聲㪅籲於 天陛之下哉我國素穪文明而至于近日禮義都毀而學問盡味則昔之爲文明者旣不可復見矣又於新學問者亦未有一人能窺其藩籬者然則可謂東敗西傷矣爲今之計莫如尊重太學申明先聖之道責任學部篤習當時之務使宗敎復明繼聖訓開來學以忠愛爲義務然後弱可爲强野可爲文國權可以光復文運可以賁篩臣旣以敎育不行爲憂而冒此煩陳則固不當㪅攙他說而區區忠激之意有不容不一陳者尙有數事焉其一即掌禮院旌褒例納錢事也夫忠孝烈旌閭乃是國家所以扶植綱常敦尙風化之大柄也有其實者亦當精擇審知然後可許其棹楔之典况乎無其實者乎今則不然不問事行之虛實惟視例納金八百之有無而許之碍之則是行迹爲虛而例納爲實也雖有忠孝烈實蹟必湮沒於千古而不得闡揚於世矣此豈 廟堂立法之本意哉伏乞 亟下嚴勅于掌禮之臣永革其旌閭例納錢凡干係 恩典者必令道臣博釆而審知之然後 奏聞請褒若有循私納賄誣虛而爲實者該呈狀人及道臣幷論罪以勵風化千萬幸甚其一即判任官及地方官俸金與兵丁巡檢掖庭所屬吏胥皂隷之月料事也夫仕者祿足以代其耕然後可以忘父母妻子之憂而能盡心職事不生他念矣今夫判任官及地方官之俸給僅足以資其一身而不能食其父母妻子則雖持心淸白者不爲事勢所牽者鮮矣書曰旣富方糓富而後能善古昔帝王之使臣工先富其身而使善其心此所以必先重祿使之忘其憂也伏乞陛下垂察焉內而府部院廳判任官巡檢兵丁掖庭所屬吏胥皂隷之屬外而觀察守宰鄕將吏輩使喚之屬當厚其俸給使之忘其家憂而盡其職事如是而有不用命者論罪而正法綱焉則千萬幸甚其一卽協律社貽獘事也臣聞孔子於顏子以爲邦之道必曰放鄭聲今夫協律社者臣雖不知其主倡之爲何人然臣聞其通宵設戱男女雜遝鬪爭易起亂淫相屬此豈非鄭聲乎大抵習舞演劇之戱於外國亦皆有之不過是俳優丐賤之軰區區營生者而如今協律社之穪以 宮內府所管發票營利者東西列邦所未聞見事也淫聲亂色眩惑耳目傷風敗俗年少之學問實業一不留心淫風從生實爲國家人民憂者此也伏乞 陛下亟令警廳不日嚴禁以絕亂階申飭掌樂之臣復講法樂千萬幸甚右臣所言諸條雖皆當今之可行而語其最急且大者則果能上下一心務進敎育之實而國家人民之知識一開則如貪賂之俗淆雜之風亂淫之戱雖不禁而人自耻焉而不爲矣伏望 陛下留 神裁察焉하소셔하얏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