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판17: 남자들의 17가지 성적 판타지
- 감독
- 송은주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최재환, 박경희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생물학, 북극의 얼음, 동물의 살점, 알프스의 풍광, 채식주의, 생과 사, 언데드. 당신은 메리 셸리의 소설이 이런 맛깔나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에, 이 작품에 대한 생태비평이 수백 편쯤 제출되었으리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티모시 모턴은 2016년 “『프랑켄슈타인』과 생태비평”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지난 20년간 발표된 약 2천 5백여 편에 달하는 관련 비평에서 생태학을 명시적으로 다루는 작업은 1%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주변적이라고 평가한다. 최근 ‘인류세’ 담론이 대중화되면서 이런 판도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이 위대한 고전에 대한 생태적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다. 어쩌면 가장 흥미로운 생태비평은 지면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구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 프랑켄슈타인 >(2025)을 떠올리고 있다. 2025년 겨울,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최신작에서 델 토로는 셸리의 원작에 내재되어 있는 생태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끌어내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여기서 생태적 관점이란 단순히 기후재난이나 생태위기 등의 문제를 다룬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문명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非)생명적인 것 사이에 그어져 있는 허구적 경계를 질문하고 폭로함으로써 문명적인 것의 폭력성을 성찰한다는 의미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잃고 한낮 물질로 ‘전락’한 시체의 생기 없는 신체 조각들로부터 ‘피조물’을 창조했다. 누더기처럼 짜깁기한 피조물의 몸은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체현하는데, 사실 그 자체가 생명에 대한 사실이다.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명확한 경계란 것은 없다. 예컨대 바이러스는 동물의 생을 가능하게 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바이러스는 생명인가 비생명인가? 모턴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모든 생명체는 이미 “좀비”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빅터가 피조물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피조물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드러내는 임계점, 즉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쾌한 골짜기 역시 인간과 비인간, 정신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근대적 사유가 빚어낸 허상이다. 이런 이분법적 세계관이야말로 인간이 ‘자연’, 즉 ‘대상’으로 규정한 것들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가능하게 한다. 모턴은 불쾌한 골짜기가 확장되면 비로소 ‘유령적 평원(spectral plain)’이 열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생태적으로 각성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 주제는 델 토로보다는 셸리가 더 잘 다루고 있다. 피조물에 대한 빅터의 혐오를 매우 세밀하게, 기이한 열정을 담아,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델 토로는 피조물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재창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를 숭배하게 만든다. 피조물의 피부는 유약을 바른 것처럼 반짝이고, 봉합선은 괴물성이 드러나는 벌어진 틈새라기보다는 공들여 세공한 예술작품 같다. 그는 선하고 서글픈 눈매를 한 패셔니스타다. 델 토로의 피조물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고귀한 타자로서 우리에게 불쾌함의 작은 조각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화려한 미장센에 접붙여진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지만, 생태비평의 관점에선 가장 큰 약점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생태비평의 관심을 견지하고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피조물은 단지 소외된 타자가 아니라, 인간이 인식과 통제의 대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끝내 실패한 어떤 생태적 실재에 대한 의인화로 읽히기도 한다. 이는 델 토로의 작품 목록 안에서 견지되어 온 파시즘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논해질 수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중 사진: “ The Shape of Water ”, “ Guillermo del Toro’s Pinocchio ”, IMDb (© 2017 Twentieth Century Fox Film Corporation / © 2022 Netflix, Inc.) 델 토로는 < 악마의 등뼈 >(2001)와 < 판의 미로 >(2006) 등의 인상적인 초기작에서부터 전쟁이 세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특히 아이들의 생을 어떻게 박탈하는지 강변해 왔다. < 셰이프 오브 워터 >(2017)와 <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2022)에서는 이 문제의식이 생태적인 것으로까지 확장된다. ‘물고기 인간’은 다른 어떤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말살당하고 있는 아마존의 생태적 타자성에 대한 은유로서 등장했고, ‘피노키오’는 숲의 정령의 생기를 나눠 받은 ‘기물(器物)’로서 인간의 얇고 가벼운 시간을 넘어 심원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였다. 이제 <프랑켄슈타인>에 이르면, 세계에 대한 이해를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세계에 대한 정복으로 이해했던 북반구 근대주의자들의 탐욕과 광기가 어떻게 전쟁 및 자연에 대한 식민화와 분리 불가능하게 연루되어 있는지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이 관심사는 엘리자베스 캐릭터를 통해서 다루어진다. 그는 강인하고 우아한 사마귀처럼 스크린을 활보하면서, 원작과 이 작품이 가장 극적으로 달라지는 부분을 담당한다. 셸리는 엘리자베스를 빅터의 고귀한 사촌이자 지고지순한 연인으로 묘사했다. 델 토로는 엘리자베스에게서 순정을 지우고 일종의 매개자(medium)로서의 자질을 더했다. 이성과 과학, 정복의 언어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자연’과 만날 수 없는 빅터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세상의 “가장 작은 것들,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존재들”의 다채로운 모양과 빛깔에 감응하는 자다. 그가 곤충학에 조예가 깊은 이유다. 피조물은 근대적 지식의 격자 속에서 탄생했으나, 그 격자로는 충분히 포착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의 스케일을 초과하는 생태성을 그 뿌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근대적 이성과 비인간적 감응 사이에서 진동하는 자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피조물의 동선을 따라 펼쳐지는 ‘유령적 평원’의 유일한 목격자다. <프랑켄슈타인> 중 엘리자베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엘리자베스는 확신에 찬 반전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생과 사를 정복하겠다는 꿈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것인지, 그것이 어떻게 세계를 파괴하는 전쟁과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고 있다. 빅터와의 첫 식사 자리에서 전쟁과 빅터의 야망을 비교하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이상을 품었을 때” 벌어지는 비극이며, “그 비극을 부추긴 자”들은 죽음 앞에서 “모르는 척한다”라고 분노하는 이유다. 델 토로의 피조물은 피노키오의 또 다른 판본이다. 인간(혹은 아버지)의 목적을 위해 조립되었지만, 그 총합은 인간의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만 델 토로는 언제나 이 ‘기물’들에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선한 마음을 부여한다. 델 토로의 아름다운 판타지 월드의 또 하나의 한계는 어쩌면 이런 선량한 마음일 지도 모른다. 자연이란 그렇게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제임스 러브록의 경고처럼 ‘가이아’는 자신의 시스템을 망치는 존재를 오작동으로 인식하는 냉정한 피드백 루프임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손희정(문화평론가) l 미디어 그룹 '프로젝트38' 멤버.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2024) 집필.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질한 인물을 그리는 데에는 정도가 있다. 추악하거나 성질이 더럽거나 못난 부분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타인에게 드러내야 할 때는 일정 부분 미화하거나 정당성을 가지고자 하는 본능적인 자기방어가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지질한 인물은 사랑스러움이 함께 공존한다. 대중에게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외적 특징을 가진다거나, 혹은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주기 위한 장치로서 캐릭터가 존재하고 있다거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주인공은 정도가 없이 등장한다. 커다란 등짝을 비추며 시작하는 카메라는 단지 등짝을 비추려는 게 아니다. 삐져나온 뱃살과 함께 무료한 듯 등을 긁는 주인공의 모습은 관리되지 않은 인물이 등장함을 알린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칼과 구부정한 어깨, 뭐가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한 무기력한 눈빛으로 세상을 보는 인물에게는 나를 투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영화 속 인물은 더는 미래가 없는 이 세상을 대변하듯 존재한다. 별것 아닌 다툼에 쉽게 폭발하고 밥상을 엎어버린다. 동생과 몸싸움을 벌일 때도 큰 소리 한번 내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내재되어 있는 깊은 분노와 좌절감이 느껴진다. 자전거는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어슬렁거리며, 그 위에 올라탄 인물 역시 속도와 방향을 모두 잃은 듯이 삐걱댄다. 주인공은 영화가 절반 이상이 흐르는 내내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정도가 없으나 일면 뻔한 캐릭터다. 다만 이 영화가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주인공이 < 백엔의 사랑 >(2014) 속 이치코(안도 사쿠라)라는 점에 있다. 나는 이 정도로 ‘정도를 모르는’ 여자 캐릭터를 별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서사와 캐릭터는 보통 남성에게 부여되어왔다. 세상과 단절된 채 무기력한 모습으로 등장한 인물이 어떤 사건을 거치며 세상과 감응하게 되는 이야기. 여성 캐릭터는 비록 지질하고 못났더라도 그 못난 모습에서조차 매력적으로 보일 것을 요구받기 때문에 여자 배우가 이런 역할을 맡을 때에는 훨씬 많은 용기가 필요하기도 하다. 이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들었을 배우를 생각한다. 살집을 분장하는 대신에 실제로 살을 찌우고 부스스한 머리를 유지하는 일.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로 우스꽝스럽게 길거리에서 넘어지는 일. 몸에 맞지 않는 이상한 속옷을 입고서 거울 앞에 서는 일. 세상의 기준에서 ‘아름다운’ 몸매와는 동떨어진 몸을 드러내는 일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지 생각해본다. 판타지 속의 인물이 아닌 지극히 현실에 발붙인 이야기를 대변하여 존재할 때는 더더욱이 그렇다. <백엔의 사랑> 중 이치코 (사진: ART INSIGHT ) 여전히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이른바 ‘외모’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여성으로서의 ‘상품성’을 내려놓아야 하는 선택은 오로지 시나리오의 완성도만을 염두에 두고 이뤄지기는 어렵다. 물론 화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로 남성이 맡아왔던 캐릭터를 여성이 연기할 때면 더 화제가 되기도 하니까. 이미 익숙했던 장르와 플롯이 여성 캐릭터의 등장으로 특별해진다는 건 이성애 로맨스 플롯이 퀴어 서사에서 특별해지는 원리와 같다. 쓰러져 있던 여성 캐릭터가 두 발로 세상을 딛는 걸 보게 될 때 훨씬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건, 아직도 이런 서사와 캐릭터에는 편견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세상에서 실패한 지질한 모습이 남성 캐릭터라면 어느 정도 익숙한 상태로 시작하는 것이기에 관객으로서의 저항감이 덜하다는 점에서, 여성이 맡은 캐릭터에는 훨씬 많은 설명이 필요해진다. 결국, 이런 캐릭터를 선택한다는 건 감독과 함께 하는 모험에 뛰어드느냐의 선택이 될 것이다. 섬세한 설계가 필요해지는 순간이다. 관객은 주로 자신과 닮은 주인공에게 스스로를 대입하며 이야기에 빠져든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대입하고자 하는 성별, 비슷한 연령대나 직업 등에서 공통점을 찾아내어 그 인물의 서사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인물이 너무 수동적이면 그런 인물과는 거리를 두고 싶어질 수밖에 없어서, 캐릭터가 미진한 반응으로 비호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을 땐 이 캐릭터의 선택들을 납득할 수 있는 서사나 후에 캐릭터가 가지고 있던 비호감을 상쇄시켜줄 장치가 필요하다. 극중 이치코는 반강제적으로 가족을 떠나 독립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보이는 이치코의 괴팍하고 모난 성격이 그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장면이 이어지면서 알 수 있다. 나는 그때 이치코에게 희망을 본다. 자신이 애용하던 백엔샵의 아르바이트 면접을 볼 때, 알고 보니 우울증을 앓고 있던 점장의 멍한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서 함께 따라가던 시선, 말이 많은 직원이 옆에서 계속 말을 걸며 방해해도 집중하려 노력하며 서툰 몸짓으로 일을 배우는 장면과, 의외로 근면하게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해내는 모습, 우연히 지나던 길에서 보게 된 권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눈빛에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게 아니라는 희망이 있다. 이치코는 권투장에서 권투를 하던 카노(아라이 히로후미)를 처음 본다. 얼마 뒤 이치코는 카노의 경기를 보러 가게 된다. 그 경기를 바라보던 이치코의 눈에 들어온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카노인지, 경기인지. 카노가 마지막 경기를 마친 후 이치코가 그에게 묻는다. “아는 사이에요?” “누구?” “상대 선수요.” “그건 왜?” “서로 어깨를 두드려주길래요.” “시합이 끝나면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러자 이치코가 말한다. “멋지네요.” 그러니까 처음 권투장을 지나는 모습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것이 권투인지, 카노인 것인지 알 수 없다. 둘 다여도 상관없다. 그는 연결되고 싶은 것뿐이니까. 나는 그 눈빛에서 비로소 이치코와 함께 이 이야기를 끝까지 함께 할 준비를 한다. 카노와 이치코 / 샌드백을 치는 이치코 (사진: ART INSIGHT , FILM MOVEMENT ) 나의 기대에 부응하듯 이치코가 점점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주저앉는 대신에 상흔을 딛고서 권투를 시작한다. 권투를 하기 위해서는 한껏 구겨져야 하는 법이기에 이치코의 자세는 여전히 구부정하지만, 자신을 숨기기 위해 움츠러드는 것과 가장 효과적인 주먹질을 위해 잠시 몸을 구부리는 건 분명 다르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눈빛이 흔들리며 세상과 감응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카노가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증오하지 않으면 때릴 수도 없어.” 무언의 비명을 지르며 갈 곳 없는 절망을 아무렇게나 표출하던 모습과 권투 글러브를 낀 채 샌드백을 치는 모습이 병치된다. 백엔샵에서 처음 일을 배우던 순간처럼 그의 주먹질은 여전히 서툴지만, 포기하지 않는 몸짓에서 배우가 캐릭터를 대하는 태도가 함께 드러난다. 연민하지 않는 것. 최선을 다해 경기를 준비하는 모습 그 자체. 내내 얻어터지기만 하는 인물을 배우 스스로가 비난하지 않고 존중할 때, 관객 역시 캐릭터를 함부로 동정할 수 없게 된다. 이치코가 포기하지 않았던 순간들이, 링 위에서 쓰러져 있을 때 잔상처럼 스쳐 지나가는 상흔의 순간들을 비로소 과정으로 만든다. 최선을 다해 뻗은 마지막이자 첫 번째 주먹질이 설령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것은 실패가 아니며, 단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었다는 이치코의 눈물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에 응원과 사랑이 담기게 되는 이유다. 이 영화는 일면 뻔하다. 정처 없이 흔들거리던 캐릭터가 비록 실패할지언정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찾아가는 과정. 하지만 내게 이 영화 혹은 캐릭터가 특별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영화 속 내내 구부정한 이치코를 보며 역시 구부정한 나를 긍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매끈하게 완벽할 수만은 없는 삶의 과정에서, 눈에 보이는 결과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안도 사쿠라의 이치코를 기어코 사랑하게 되었으니, 나의 실패도 언젠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이런 감각은 작품 안에서 우연히 만난 배우가 종종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 (사진: ART INSIGHT ) 손수현(영화배우) l 연기를 하며 종종 글을 쓴다. < 럭키, 아파트 >(2024), < 양치기 >(2024), < 마더 인 로 >(2019) 등에 출연했고, 『새드 투게더』(공저, 2024), 『쓸데없는 짓이 어디 있나요』(2022) 등을 썼다.
작년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김응산 교수 는 작품의 텍스트와 미학적 형식에 집중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퀴어영화를 연구한다. 특히 퀴어에 내재된 시간성을 반영하면서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통해 구현되는 작품들에 관심이 있으며,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의 측면에서 실험을 거듭하는 영화 작업을 포괄해 퀴어영화로 연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워싱턴대 아시아언어문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앞서 이야기한 관점으로 1990년대 이후 퀴어영화를 분석한 결과를 담은 저서 Future Imperfect 를 집필하고 있다. 풍크툼의 관찰자에서, 퀴어영화 연구자로 강연을 제안받은 이후, 영화학자로서의 여정이 시작된 지점을 반추해볼 수 있어 뜻깊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지인께서 주신 무료 관람권을 가지고 형과 지역의 단관극장을 찾았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개봉 작품들을 거의 다 봤을 정도로 극장에 자주 갔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영화에 빠르게 익숙해지고, 보다 일찍부터 영화를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이 단관극장 대부분이 아쉽게도 사라졌고, 영화를 접하는 매체마저도 노트북과 태블릿, 스마트폰으로 옮겨갔지만, 극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런 아련한 추억들이 내 영화연구의 출발점이 되어준 것 같다. 영화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를 마련해준 단관극장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영화학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어준 작품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롤랑 바르트는 보는 이를 ‘찌르는 듯한’ 이미지로서의 풍크툼(Punctum) *주1 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나에게는 두 편의 장르영화가 풍크툼을 경험하게 했다. < 양들의 침묵 >(조나단 드미, 1991)은 포스터 자체가 시선을 사로잡았을뿐더러, 작품 속 연쇄 살인범에 대한 인물 설정이 트랜스포비아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음을 알린 한 영화잡지의 기사, 그리고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던 작품 속 일부 장면들까지 작품의 여러 요소가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시 영화를 본 후 나는 트랜스나 동성애자 등이 악인으로 등장하는 경향을 꼭 부정적으로만 바라봐야 할 것인지에 대해 어렴풋이 의구심을 가졌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봤던 < 캐리 >(브라이언 드 팔마, 1976)도 비슷했는데, 흥미롭게도 주인공 소녀의 관점에 공감하며 작품을 감상했다.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던 소녀가 비극적 운명을 마주하기 전 복수를 감행하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관심을 받고 모두의 기억 속에 남는다는 설정이 가슴 아팠다. 그러면서 앞서 두 작품이 안겨준 충격을 풍크툼에 빗댄 것처럼, 영화는 배우거나 보는 것이 아니라 ‘ 느끼는 것 ’이라는 점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양들의 침묵>과 <캐리> 돌아보니 나는 공포영화를 볼 때 괴물이나 귀신, 복수하는 자들에게 감정을 이입했던 것 같다. 흔히 ‘빌런’으로 묘사되는 인물들에 자신을 동일시했던 당시부터, ‘퀴어’와 연관된 생각이나 태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최근에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 괴물 >(2023)과 같은 수작들을 지켜보면서도, 퀴어영화는 정체성을 그리는 영화, 미학적 실험을 하는 영화, 혹은 퀴어한 삶을 살아가는 관객들에 의해 재정의되는 영화 중 어떤 것에 해당할지를 깊이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성소수자에 관한 서사에 국한하지 않고, 퀴어영화가 얼마나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와 삶 을 담아낼 수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례가 아직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반복되는 형식적 특징은 발견되지 않기에 이를 ‘장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엄연히 영화의 한 양태로 자리 잡은 퀴어영화를 다각도에서 정의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동아리 차원에서 퀴어영화에 대한 정보를 담은 자료집을 만들고 관련 작품을 선정해 학내에서 상영하는 ‘이반영화제’라는 행사를 기획했다. 영화제에는 놀랍게도 아주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 안토니아스 라인 >(마린 고리스, 1995), < 화분 >(하길종, 1972), 그리고 대사의 구성 등으로 볼 때 퀴어문화의 맥락에서도 무리 없이 해석될 수 있는 <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0) 등의 작품을 상영했다. 이외에도 즐거웠던 기억이 또 한 가지 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 해피 투게더 >(1997)가 1997년 당시 존재했던 검열 제도로 인해 국내 상영이 불허되었을 때, 동아리 구성원들과 어렵게 테이프를 구해 학내 광장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그러자 퀴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수없이 몰려들었다. 아직 영화학을 공부하고 있지 않던 시절임에도, 이렇게 영화 상영을 직접 기획하는 경험을 거듭하면서 영화의 영향력과 효과를 몸소 체험했고, 영화만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을 확인했다. 영화는 문화와 예술, 산업 등 다양한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과 생각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운동’의 일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앞서 강연해주신 교수님들과 달리 나는 영화학계에 다소 늦게 입문했지만, 국내 여러 영화제에 다니며 ‘현장’ 참여를 중심으로 영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부산, 전주, 부천을 비롯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와 서울인권영화제 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서울인권영화제는 제2회가 이화여대에서 열렸는데, 퀴어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 하비 밀크의 시간들 >(롭 엡스타인, 1984)을 상영할 때 경찰 인력이 이화여대를 둘러싸고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그 시대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영화를 보는 시선을 발전시켰던 시간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지금의 자양분이 되어준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든다. 다양한 영화를 접하고 시야를 넓힐 수 있도록 도와준 영화제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영화학에 관한 여러 외국 도서가 유입되곤 했는데, 내가 퀴어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 관련 내용을 처음 접한 경로 역시 번역서였다. ‘퀴어영화’라는 개념이 논의되기 전 게이·레즈비언 영화를 다룬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로빈 우드, 1993), 『레즈비언 게이 퀴어 영화비평의 이해(호모 PUNK 이반)』(바바라 해머 외, 1999) 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고, 퀴어영화의 고전을 감상하면서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나를 관통한 또 다른 풍크툼이 된 작품들을 만났다. 먼저, < 세친구 >(임순례, 1996)는 게이 인물 한 명을 포함한 세 친구의 삶을 보여준다. 친구 한 명의 성적 지향성과 젠더 표현은 이들 사이에서 중요치 않으며, 그들은 절망한 청년들로서 1990년대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가난하고 힘겹게, 하지만 더불어 살아간다. 이를 지켜보면서, (만약 ‘퀴어성’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다면) 영화의 퀴어성을 결정하는 요소에는 성적 지향성만 해당하지는 않으리라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퀴어는 연대의 다른 이름”이라고 이야기한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퀴어성은 ‘누구와 연대하는지’를 결정하고 연대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하는 장치 이지 않을까? 퀴어를 둘러싼 맥락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런 영화들에서 벌써 나타나고 있었다. <올리버>(닉 디오캄포, 1983)는 필리핀의 게이클럽에서 유명인을 모사하는 올리버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올리버라는 인물은 성소수자이지만, 자녀를 낳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 살아간다. 이 작품을 접하기 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퀴어영화는 대부분 당사자의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밀도 높게 담고 있었다. 하지만 성소수자 남성이 가정을 형성하고, 그러면서도 게이라는 지향성은 잃지 않는 모습을 기록한 영상은 당시의 내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 게이클럽에 찾아와 올리버와 같은 필리핀 현지의 성소수자들을 착취하는 제1세계 외국인 관광객들도 카메라 너머에서 등장한다. 카메라의 시선은 관광객의 시선과 일치하고, 아동 성착취 기사와 동성 성매매로 삶을 연명하던 과거 어린 시절 올리버의 고백이 몽타주로 재배치되어 등장한다. 마르코스 치하에서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민중의 모습을 전경으로 삼아 하층민 퀴어들의 인터뷰를 담아내는 장면까지. 영화를 통해 그 착취의 행태를 관찰하다 보면, 식민주의적 억압을 자행하는 태도를 소위 자유롭고 글로벌한 게이라는 이미지로 포장하면서 제3세계 성소수자 집단 위에 군림하는 제1세계 성소수자들과, 빈곤한 현실에 부딪혀 자신의 성적 지향성에 대한 확신을 갖기도 어려워하는 현지 성소수자들이 절대 동일한 층위에서 분석될 수 없음을 지각하게 된다. 이들을 같은 종류의 집단으로 지칭하는 순간, 퀴어정치학의 본질을 망각하게 될 우려가 있다. <올리버>는 퀴어를 바라보는 서구의 시각으로부터 독립된 채 아시아 퀴어영화의 특수성을 보여준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가족 간의 유대, 가족 구성원으로서 이행해야 할 책임 등에 익숙한 아시아의 퀴어는 규범적이지 않은 자신의 정체성 혹은 젠더 표현과 자신이 속한 현실 사이에서 ‘ 타협 (Negotiation)’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퀴어와 관련해서는 자유주의적 측면에서 개인의 권리 문제를 중심으로 담론을 형성하는 서구의 관점에서 이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양태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흥미로워, 아시아 퀴어영화를 서구 이론의 틀에만 가둬 해석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면서, 아시아 영화를 주된 연구 분야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세친구>와 <올리버> (사진: " Oliver ", IMDb) 퀴어영화의 각기 다른 얼굴을 찾아 유학 중 영화를 공부한 경험으로 잠시 주제를 옮겨보자. 사실 주전공을 영화학으로 바꾸기 전 나는 영문학을 전공했기에, 미국 워싱턴대로 유학한 이후 퀴어이론을 방법론으로 하여 영미권 영화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토드 헤인즈 등이 이끌고 1990년대 퀴어영화의 대표적 경향으로 자리 잡았던 ‘뉴 퀴어 시네마’를 중심으로 미국의 퀴어영화를 연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토드 헤인즈의 작품 중 퀴어 및 비규범적 성정체성이 분명하게 재현되는 경우보다, 그의 영화적 스타일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퀴어미학에 더욱 관심이 갔다. 예를 들어, < 파 프롬 헤븐 >(토드 헤인즈, 2002)에서는 흑인 남성과 사랑에 빠진 여자 주인공이 이별을 통보할 때, 이들을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반응을 짧은 길이의 로우 앵글 숏으로 보여준다. 샷의 배치 역시 타인의 시선을 극대화하기 위해 짧으면서도 히스테리컬하게 구성되어 있다. 퀴어한 인물을 바라보는 규범적 이성애자의 시선을 재현하기 위해 기존의 퀴어영화에서 자주 사용했던 공식을, 서로 다른 인종 간의 금기시된 사랑을 묘사한 장면에도 적용한 점이 아주 흥미롭다. 이렇게 영화 속 퀴어적 순간을 보다 다양한 맥락으로 조성하는 시도가 궁금해, 관련 주제로 연구를 이어갔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성적 지향성에 대한 논의만으로 요약할 수는 없는 퀴어영화(특히 아시아 퀴어영화)의 미학적 특징 을 발견하고 싶었다. 대학원 과정 중에 출간한 두 편의 영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두 작품을 그 예로 소개하고 싶다. 두 편 모두 영화의 소재를 차별화하고 미학적 실험을 거듭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한국 퀴어영화 출현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들이다. < 줄탁동시 >(김경묵, 2011)는 내가 개념적으로만 구상했던 퀴어영화의 이론을 영화적 언어로 이미 구현하고 있었다. 한국의 퀴어영화 역시 성소수자의 권리 보호를 주장하는 담론이 아니라 미학적 대상으로 연구될 가능성이 충분함을 확신한 작품이다. 주인공 준( 이바울 )은 탈북 청소년이고, 자신의 성적 지향성과 관계없이 동성 대상 성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그는 타인에게 폭력적으로 착취당한 후 지금 보여드릴 장면에서처럼 청계천을 따라 정처없이 걷는다. 그 옆모습이 계속 롱테이크로 잡힌다. 천의 흐름을 거슬러 청계천의 끝으로 향하는 그를 보면서, 이 장면이 역사적 진보의 흐름, 즉 진보와 발전이라는 이성애·동성애규범적 시간성의 흐름을 거스르겠다는 의지 를 함축한다고 느꼈다. 예를 들면, 특히 서구의 여러 퀴어 담론과 운동들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주의적인 접근을 강조하면서 “앞으로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상황적 진보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러한 역학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퀴어들의 삶과 미래는 어떠할지에 대한 고민이 이 롱테이크 장면에서 드러나고 있다. 장면은 종로3가, 즉 게이 유흥업소들과 커뮤니티들이 자리한 일대에 다다르며 끝난다. 퀴어하지만 동시에 탈북 청소년이기도 한 준이, 성소수자의 공동체에 소속되고 구성원들과 소통하기가 어려운 현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성소수자라는 정치화된 집단, 혹은 이들이 속한 사회 공동체를 묘사하는 영화가 ‘퀴어하다’라고 인식되었다면, <줄탁동시>와 같은 작품들은 이를 넘어선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미학적 함의 를 퀴어와 연관지어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시 위 논의를 접한 지도교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에서 한국과 아시아 영화를 연구할 가치가 있음에 동의하셨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아시아 퀴어영화 연구를 시작했다. <줄탁동시> 중 < 죽여주는 여자 >(이재용, 2016) 역시 성 노동자인 여성 노인과 한국계 필리핀인(코피노) 아이의 삶을 중첩해 퀴어영화의 폭을 확장한다. 오프닝 시퀀스가 독특한데, 한국인 산부인과 의사 아버지가 필리핀에서 버리고 온 코피노 소년 민호( 최현준 )는 필리핀인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산부인과(재생산이 이뤄지고, 재생산 정치를 강화하는 장소)를 찾고, 병원 앞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주인공 소영( 윤여정 )이 안부를 묻는다. 작품 전체의 내러티브를 보더라도, 국가의 관심 밖의 영역에서 출생한 코피노가 국내 재상산 정치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그를 거두는 존재가 재생산 정치와 가장 거리가 먼 인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나이 든 성 노동자라는 설정이 특별하다. 작품 말미에서는 주인공 소영과 트랜스젠더 티나( 안아주 )가 민호를 함께 양육하기도 한다. 미국 퀴어 이론가 리 에델만의 견해를 빌려 설명하자면, 미국은 재생산의 미래지향적인 측면을 이데올로기화 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해왔고, 할리우드 영화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적극 반영하여 소위 아동들을 죽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존재로, 지속가능한 미래성의 상징으로 그려왔던 것이다. 따라서 재생산의 주체가 될 수 없는 퀴어는 사라져야 마땅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국가의 돌봄을 받지 못한 코피노 아이의 상징적 재생산을 돕는 주체는 퀴어 이다. 미국 내 주류로 자리 잡은 퀴어이론으로 동시대 퀴어영화를 비평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죽여주는 여자> 중 위의 여정을 토대로 정립된, 퀴어영화에 관한 나의 연구 방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간의 매체인 영화가 ‘퀴어’라는 개념에 반영된 시간성 을 표현하는 방식이 궁금한데, 특히 1990년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의 퀴어영화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미학적 실험 을 분석하고 싶다. 그리고 미국 중심적으로 해석된 뉴 퀴어 시네마 이론을 아시아 퀴어영화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관습에 저항하려고 한다. 최근 대두된 지역 영화 (Regional cinema)라는 개념을 퀴어의 측면에서 구체화해, 아시아 지역의 퀴어영화를 보다 객관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연구할 것이다. 더불어, 동시대 한국사회에서 공유되는 규범상으로는 부정할 수밖에 없는 개념인 퀴어는 영화에서도 절망 또는 실패의 형태로 나타나며, 유토피아적 상상력 을 통해서만 성립 가능하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며 그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퀴어만의 독특하고도 흥미로운 ‘변태적 시간성’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성애중심적 가치관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타협 과 돌봄 , 그리고 취약한 타인에 대한 연대 를 실천하는 퀴어의 면모를 영화에서 더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싶다. 미학적 실험, 타협 및 돌봄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아시아 퀴어영화 연구의 방향성 미래불완료의 아시아 퀴어영화, 계속 꿈꾼다 집필 중인 저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연구 주제를 더 자세히 소개하고 싶다. Future Imperfect , 즉 ‘ 미래불완료 ’라는 제목이다. 미래에 완료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미래불완료라는 (존재하지 않는) 시제로 설명할 수 있다면, 아시아 퀴어영화의 성격이 이와 유사하리라고 생각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퀴어문화를 제도권 안에서 존중하려는 노력이 아직은 부족한 상황이어서, 그 안의 퀴어영화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동원한 판타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한 영화의 형식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아시아 퀴어영화는 앞으로의 변화 양상을 짐작하기 어려운, 말 그대로 미래불완료 시제의 주체가 되는 영화 양태에 속한다. 그만큼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방식으로 발전하리라는 기대가 가득하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퀴어는 ‘ 시간 ’과 분리해 논의할 수 없는 개념이므로, 저서에서는 시간을 조작해 선보일 수 있는 매체인 영화가 이를 담기에 아주 적합하다는 점을 설명하려고 한다.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개념으로서의 유토피아가 현실에서 문득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푸코가 제시한 ‘ 헤테로토피아 *주2 ’가 몇몇 퀴어영화에서 공간성으로 구현된 사례도 기록했다. 한편, 파울 클레의 회화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1920)를 본 벤야민은 ‘ 역사의 천사 (der Engel der Geschichte) *주3 ’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진보하는 시대를 따라 날갯짓하면서도 수많은 상처로 얼룩진 과거로 시선이 향해 있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천사의 모습에는 동시대 퀴어영화의 숙명과 맞닿는 지점이 있다. 일종의 진보라고 볼 수도 있으면서 실제로도 진보라는 이름으로 선전되곤 하는 동성혼 합법화 등, 퀴어를 존중하는 제도 한 가지가 합법화된다고 해서 다양한 계급과 차이를 가진 퀴어 모두를 위한 유토피아가 펼쳐질 수 없고, 그들은 늘 어딘가에서 차별로 인해 고통 받았거나 받을 것이다. 그리고 퀴어 안에서도 계급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거나 혹은 성소수자로서 생활하기에 보다 안락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과, 끊임없는 착취의 굴레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차이는 더욱 도드라질 것이다. 따라서 갈수록 규범화되어 가는 퀴어의 영화적 재현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 상의 실험 을 통해서, 그리고 퀴어라는 개념이 포용할 수 있는 집단 혹은 주체의 저변을 확장 함으로써 퀴어영화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영화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때이다. 이렇게 진보적 흐름에 합류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존재들을 모두 아울러 더 나은 세상을 일구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퀴어의 윤리라고 생각하는데, ‘영화’에 이 윤리가 상당 부분 구현되었음을 추후 연구와 저서를 통해 계속 전달하고 싶다. 2000년대에 가까워지며 영화 촬영과 감상의 매체가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여러 감독이 각자의 특색을 반영한 퀴어영화를 다수 발표해왔다. 아시아 곳곳에서 활동 중인 그들 덕분에, 디지털 기술의 가능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미학적으로 실험을 거듭하는 작품들이 선을 보일 수 있었다. 특히 태국의 툰스카 판시티워라쿤 감독은 태국의 역사나 현실을 고발하는 장면을 그와 관련 없는 다른 쇼트와 병치하는 등 퀴어성과 정치성을 결합하는 독특한 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퀴어가 태국사회에 정착된 규범을 거스르는 데 기여하는 방법을 영화로 탐구하는 흥미로운 창작자이다. 한편, 퀴어한 영화에 대한 작업으로 국내에서 돋보이고 있는 창작자로서 임철민 감독도 언급하고 싶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퀴어한 촬영과 편집 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 프리즈마 >(2013)의 한 장면에서, 카메라는 값비싼 촬영기기 없이 단순 용도의 짐벌이나 핸드헬드로 구현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선보이며 부드럽게 유영한다. 사실 촬영 당시 짐벌이 고장 났고, 이를 수리할 여건이 변변치 않았던 임철민 감독은 고장 나서 제멋대로 돌아가는 짐벌을 가지고 하나의 쇼트를 촬영해봤다고 한다. 보시는 바와 같이 결과물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더군다나 임철민 감독은 <프리즈마>를 포함해 이렇게 우연과 실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시장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그 실험성으로 인해 배급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고, 작품들을 대중에게 무료로 공개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작품의 형식뿐만 아니라 유통 면에서도 퀴어한 방식으로 시스템에 저항하면서, ‘ 실패 ’가 곧 미학적 실험의 성과 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한 사례이다. <Santikhiri Sonata>(툰스카 판시티워라쿤, 2019)와 <프리즈마> 마지막으로 퀴어영화에 대한 재미있는 리메이크 사례를 소개하며 강연을 마치고자 한다. 이성애자인 남성 주인공의 연인이 숨진 후 남성으로 환생한다는 설정을 가진 < 번지점프를 하다 >(김대승, 2001)는 몇 년 전 국내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원작 시나리오 작가분께서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리메이크에 반대하면서 제작이 무산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품은 태국에서 생각지도 못한 서사로 리메이크된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동성으로 환생한 연인과 이성애적 관계를 이어가고자 죽음을 택한다. (사실 동성애 금기에 관한 통념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리메이크작 <듀, 우리 함께 떠나자>(추키얏 삭위라쿤, 2019)에서는 본래 동성 연인이었던 두 주인공 중 한 명이 숨진 후 이성으로 환생하고, 이들은 동성 연인으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하고자 극단적 선택을 한다. 인물이 지향하는 관계에 대한 설정을 완전히 뒤바꿨다. 여기서 한국 또는 아시아 퀴어영화의 특징이자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국이 아닌 어딘가에서 얼마든지 퀴어한 영화로 재탄생하며 더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그 영향력을 이어가는 힘. 한국 퀴어영화에도 그 힘이 가득하다는 점을 믿고, 응원해 주시기 바란다. <번지점프를 하다>와 <듀, 우리 함께 떠나자> * 질문과 답변 * (질문1) 퀴어영화 연구를 위해 영화학과 철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의 이론을 도입해 간학문적 연구를 진행하고 계신 듯하다. 다만 여전히, 해당 이론들만으로 아시아 퀴어영화를 완벽히 연구하고 설명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구 도중 이와 같은 이론적 공백 을 발견하게 되신다면 보통 어떻게 대처하시는지가 궁금하다. (답변) 말씀하신 대로 퀴어나 영화이론 자체가 영어권 중심으로 논의되어왔고,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이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퀴어이론에 대한 영미권 학자들의 저서를 번역하며 느낀 아쉬운 점을 역자 후기에 남기려고 노력하는데, 그럼에도 새로운 담론이 원활히 생성되지는 않는 것 같다. 영화학이 학문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곳이 영미권이며 퀴어영화 연구도 거의 미국 중심으로 이뤄져온 터라, 그간 형성된 패러다임을 전환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나는 이론적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영화의 텍스트 로 돌아간다. 이론 자체는 서구에서 발생한 논의를 참고하더라도, 이를 반박할 근거를 영화 텍스트에서 찾는다. 작품 속 다양한 재현 양상,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영화의 특이성, 한국영화에서 타협과 가족이 중요한 이유 등을 살피다보면 길이 보이는 것 같다. 텍스트는 영화 분석의 필요조건이다. (질문2) 임철민 감독의 작품처럼 미학적 실험으로서의 퀴어영화들의 사례를 알려주셨다. 영화적 규범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는 작업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상영되는 장소로 ‘ 미술관 ’도 자주 언급된다. 혹시 퀴어를 소재로 한 미술 작업 중 눈여겨보신 사례가 있을까? (답변) 이 자리에 와 계신 김경묵 감독님께서도 몇 년 전 대안공간 탈영역우정국에서 VR과 AR 매체를 이용한 개인전 <QUARANTINE: 독방의 시간>을 개최하신 것처럼, 퀴어영화의 무대가 꼭 영화관이 될 필요는 없다. 임철민 감독 역시도 자신이 제작한 작품들이 ‘퀴어영화’라고 생각하고 영화제에 출품하고자 했지만 퀴어 관련 국내 영화제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퀴어영화의 성립 조건을 주로 동성애나 트랜스 재현 관련 내용으로만 한정하고 있는 국내 영화제의 한계가 드러난다. 임철민 감독도 그랬듯이 이 작품들은 오히려 미술관에서 상영의 기회를 얻었고, 많은 퀴어영화 감독 및 작가들이 미술관과 협업하며 자신의 작업을 공개할 대안적 공간 을 찾고 있다. 이런 기회들이 지속적으로 마련되어야 작품들 간의 유의미한 ‘차이’가 보전 되어 퀴어영화가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3) 대학에서 한국영화사 강의와 영화사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계시다고 말씀해주셨다. 영자원의 데이터베이스 KMDb의 영화글 카테고리 중 ‘ 한국영화의 퀴어한 허구들 ’이라는 코너에서는, 그간의 한국영화에서 시대적 한계 등으로 인해 미처 드러나지 못한 퀴어적 측면을 발견해 분석하고 있다. 혹시 선생님께서도, 한국고전영화 작품들 중에서 퀴어와 관련하여 맞닥뜨리게 되신 풍크툼 이 있으시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신재영) (답변) 현재 집필 중인 저서에서는 1990년대 이후의 영화들만 다루지만, 이후에는 한국영화라는 주제를 더욱 자세히 다루고 싶다. 한국고전영화 중에서도 퀴어한 순간들을 다수 포착할 수 있다. < 화분 >(하길종, 1972)처럼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더라도, < 여사장 >(한형모, 1959)에서는 규범화되지 않은 여성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성애의 맥락에서만 해석되어온 < 자유부인 >(한형모, 1956)에서도 아주 재미있는 순간이 등장한다. 극중 자유부인 오선영( 김정림 )은 처음으로 비어홀을 찾았다가 서구식 무용을 화려하게 선보이는 무희를 바라보고 크게 놀라며 깨달음을 얻는다. 자유부인이 각성하는 계기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자유부인의 내면에 있던 욕망이 여성 무희를 봄과 동시에 수면 위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 이어도 >(김기영, 1977) 역시 재생산을 언급하면서도 작품의 중심에는 여성 집단이 있으며 여기서 길러진 남자 아이들은 출가한다. 이성애를 규범으로 인정하고 재생산을 목표로 삼은 사회의 통념을 역이용한 서사로, 충분히 퀴어적으로 해석될 만한 텍스트이다. 이외에도 퀴어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한국고전영화에서의 순간들이 아주 많다. 여러 연구자분들께서 또 다른 사례를 활발히 발견해주신다면, 후에 이를 성실히 인용하며 연구를 이어가겠다. (상) <자유부인> 중 무희의 춤에 놀라는 오선영 / (하) <이어도> 중 (질문4) 현재 춘천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를 맡고 있는데, 올해(강연일 기준 2024년) <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와 < 딸에 대하여 >(이미랑, 2023)를 상영했다. 흥미롭게도, 상영 이후 관객들 대다수가 잘 만들어진 ‘가족영화’라는 감상을 전했다. 강연에서도 말씀해주셨지만 아시아 , 특히 한국 퀴어영화 는 가족 과 연결지어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싶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가족을 중시하는 아시아 문화를 고려할 때 아시아 퀴어영화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겠지만, 한국에서 특히 짙게 나타난다는 데 동의한다. 다만 (< 시인의 사랑 >(김양희, 2017)에서 볼 수 있듯이) 이성애 규범에 따르며 가족을 이룬 이들도 삶의 특정 ‘상황’에서 퀴어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이들을 규범화된 이성애자로만 인식할 수는 없음을 짚고 싶다. 퀴어를 논할 때 오직 당사자의 정체성(이성애자, 동성애자 등)으로만 퀴어 여부를 판단하려고 하는 본질주의적 태도는 지양 해야 한다. 한국 퀴어영화의 가족을 이해할 때 역시, 위와 같이 퀴어적 순간을 경유한 인물이라면 현재 소속된 가족에서 이성애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더라도 폭넓은 관점에서 ‘퀴어’로 바라볼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퀴어영화에 관심을 가진 관객들에게, 정체성 정치만으로 퀴어의 영역을 재단하는 경향으로부터 이제는 탈피하기를 권하고 싶다. <시인의 사랑> 중 *** 주1. 롤랑 바르트가 저서 La Chambre Claire (밝은 방, 1980)에서 사진과 관련하여 제시한 개념이다. 바르트는 사진의 관찰자가 지닌 개인적 측면을 건드리며 그를 찌르거나 뚫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우연적 요소로서 풍크툼을 설명한다. 관찰자는 사진 속 풍크툼을 통해 자신을 사적 개인으로 인식한다. 주2. 미셸 푸코가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말과 사물, 1966)에서 처음 설명한 개념으로, 현실의 장소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과 반하는 가치를 가지는, 하지만 현실에는 존재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현실화된 유토피아’와 같은 의미를 지녔으며, 푸코는 이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명명했다. 주3.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라는 글에서, 파울 클레의 작품에 묘사된 천사는 진보의 폭풍에 떠밀려 날갯짓하고 있기는 하지만, 폐허가 된 과거의 잔해더미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한다고 말한다. 미래로 향하는 진보의 흐름이 거세더라도 상처받은 과거는 치유되지 않은 채로 잔존함을 암시한다.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파울 클레, 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