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함
- 감독
- 신희주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이슬기, 박예림, 박미란, 신혜리, 안지영, 이송이, 지혜경
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시대의 속살이 제대로 녹아들어 간 영화를 만나긴 의외로 그렇게 흔치 않다. 대부분의 상업, 장르 영화들은 배경이 되는 시대의 특정한 요소들을 일종의 개념의 형태로 서사에 반영하는 데 그치기 십상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건 재현의 관습이라 해도 좋겠다. 예컨대 2018년에 연출한 일제강점기나 2002년 월드컵 열기는 상황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별반 차이가 없다. 연출 방향에 따라 제한된 방식으로 특정 시점을 구현한 상상의 공간인 셈이다. 내가 언급하고 싶은 영화의 시대 반영성은 약간 결이 다르다. 영화와 시대의 관계를 조망하기 위해선 감독(작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녹아 들어가고야 마는, 다큐멘터리적인 속성에 가까운 반영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선우 감독은 누가 뭐라 해도 90년대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단순하게는 90년대에 대부분의 영화를 찍었기에 그렇다. 이건 생각보다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물질적으로 그의 필름들엔 90년대의 풍광들이 담겨 있다. 여기에 90년대를 압축할만한 통찰들이 자연스럽게 형식과 결합하는 순간 해당 영화는 시대의 지표로서 부상할 가능성을 얻는다. < 우묵배미의 사랑 >은 그런 종류의 영화다. 이 애처롭고 따듯하며 답답한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바래기는커녕 외려 선명해지고 있다. <우묵배미의 사랑>의 장르적 외형은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배일도( 박중훈 )는 서울 변두리 우묵배미로 이사를 와 봉제공장에 취직한다. 작부 출신에 억센 성격의 아내( 유혜리 )를 탐탁치 않아 했던 배일도는 함께 일하게 된 미싱공 공례( 최명길 )에게 괜히 눈길이 간다. 폭력을 일삼는 남편에 지쳐가던 공례 역시 자신에게 호감을 보내는 일도에게 끌린다. 쉴 곳을 찾던 두 남녀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지만, 유부남, 유부녀라는 현실을 넘어서긴 어렵다. 대개 멜로드라마에서 핵심은 두 사람을 가로막는 장벽의 존재다. 흔한 통속극이 시대를 반영하는 지점도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무엇을 장애로 설정하느냐는 시대의 욕망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우묵배미의 사랑>에는 압축된 도시화, 근대화 과정에서 변두리로 밀려난 것들에 대한 흔적이 새겨져 있다. 소외된 하층민의 삶이 묻어있고 당대의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공간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무엇보다 남루한 일상의 틈새로부터 배어 나오는 진득한 점성이 묻어 있다. 아마도 스토리에 따른 주제를 (공식적으로) 정돈하자면 이와 같은 단어들이 나열될 것이다. 장선우 감독의 일관된 스타일 중 하나는 흑과 백, 희망과 좌절, 전통과 변화 등 양립하기 어려운 요소들을 대치시켜 극명한 콘트라스트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는 제도, 시스템, 기득권의 압력에 대해 가라앉는 것과 저항하는 것, 두 가지 반응으로 화답한다. 하지만 <우묵배미의 사랑>이 시대를 반영한다면 그건 당대 변두리의 삶, 욕망, 사랑을 조망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중요하고 예리한 성찰이지만 그건 서사 차원에서 구성된 의식적인 메시지에 불과하다. 원작에서부터 묻어나온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영화가 진정 관객을 뒤흔드는 건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불편함이다. 일도와 공례의 멜로드라마는 전혀 애틋하지 않게 그려지지 않는다. 차라리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답답함과 처량함에 가깝다. 일도와 공례는 불륜이라는 일탈을 통해 탈주를 꿈꾸지만 우묵배미라는 공간은 두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얼핏 제도, 사회, 혹은 환경과 개인이 투쟁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영화는 철저하게 내부의 욕망이 충돌하는 모습으로 제한된다. 그 과정은 마치 폭력과 유머라는 장르적 쾌감과 에로티시즘으로 대표되는 성-정치학 사이를 넘나드는 영화의 모습과 닮았다. 관념과 통속, 희극과 비극, 연민과 냉소의 대비를 통해 관객을 불편함 한 가운데로 밀어 넣는 것. 장선우 영화의 미학은 거기서 출발하고 시대의 본질은 대개 그 틈새에 자주 맺힌다. <우묵배미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노동과 노동자의 남루함, 변두리의 피폐함을 리얼리즘적 전통에 입각해 그린다.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묵배미 역시 90년대를 관념적으로 압축한, 재현된 상상의 공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아마 지금 찍어도 우묵배미를 재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적 서사는 삶의 편린들과 마주할 때 생기와 부피를 얻는다. 예컨대 배일도의 어깨너머 기차가 보일 때, 일도가 공례와 함께 한 여관에서 구태여 양말을 빨 때 우리는 그때, 거기, 그 자리에 뒤엉켰던 일상의 반응들을 마주한다. 장선우 감독은 변두리의 삶에 피로한 일상에 분노하거나 동정하거나 연민하지 않는다. 대신 가만히 혹은 무력하게 바라본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슬쩍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카메라는 자연스레 시대와 눈높이를 맞춰 나간다. 숲 밖에서 숲을 보기보다 차라리 숲 안에서 나무를 보길 바라는 시선. 함께 뒤엉키고 고민하다가 끝내 통속의 한 가운데 털썩 주저앉아버린 감독의 선택은 <우묵배미의 사랑>을 진정한 의미에서 ‘90년대의 영화’로 만든다. <우묵배미의 사랑> 영화 보기 →
얼마 전 서울에서 체코의 애니메이션 감독 얀 슈반크마예르의 회고전이 열렸다. 조촐한 규모였지만 한국에서도 이 감독의 인지도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는 귀중한 회고전이었다. 체코에서 태어난 얀 슈반크마예르는 어린 시절부터 체코 전통 인형극에 몸을 담았으며, 초기 경력 역시 인형극 연출가로 시작했다. 그랬던 그는 1964년 첫 단편 <마지막 속임수>를 만들면서 애니메이션으로 영역을 옮겨가게 된다. 이후 체코 초현실주의와 접촉하게 되고, 슈반크마예르는 결국 노선을 변경해 초현실주의를 기조로 삼기 시작했다. 공산당 독재의 엄격한 검열 아래에서도 몇 개의 단편을 만들며 경력을 쌓던 슈반크마예르는, 1980년 < 대화의 가능성 >이라는 단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1988년 첫 장편 < 앨리스 Neco z Alenky >을 찍게 되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얀 슈반크마예르의 < 앨리스 >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슈반크마예르는 단편을 만들던 시절 이미 루이스 캐럴의 넌센스 시 ‘재버워키’를 영화화하면서 루이스 캐럴의 세계에 관심이 있다는 걸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이처럼 앨리스의 영화화는 슈반크마예르의 평생 프로젝트 중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슈반크마예르의 또 다른 평생 프로젝트는 ‘파우스트’다. 이것도 1994년 영화화되었다.) 슈반크마예르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앨리스의 각색물들이 원작을 동화로 해석하는 행태가 못마땅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이미 디즈니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거쳐 간 이 동화를 슈반크마예르는 어떻게 바라봤을까?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 특유의 환상성과 영어라는 언어를 통해 유창하게 쏟아지는 작가의 필력, 그리고 작품에서 풍기는 독특한 광기로 많은 창작자들이 재구성하고 해체하길 즐겼던 텍스트다. 주목할 만한 예로는 2000년에 출시된 미국 현대 고딕 문화와 만화적 상상력이 접목된 게임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가 있다. 아메리칸 맥기는 앨리스의 등장인물들을 마구잡이로 해체해 캐롤이 가지고 있던 긍정적이고 순진무구한 에너지를 싹 빼고 앨리스를 고딕 서브컬처와 그랑 기뇰적인 고어로 점철된 심리 호러로 재구성했다. 그에 비해 슈반크마예르의 < 앨리스 > 역시 각색이 이뤄지긴 했지만, 대체로 루이스 캐럴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과 서사, 캐릭터에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 앨리스 >는 맥기의 앨리스와 다른 방식으로 이상하다. 도입부에서 슈반크마예르는 앨리스의 입을 빌려 말한다. “당신은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아마도”. 이 “아마도” 야말로 <앨리스>를 이상함으로 인도하는 마법의 한 마디다. 우선 슈반크마예르가 기용해 앨리스를 연기한 아역 배우 크리스티나 코흐토바는 심술?을 정도로 원작 삽화가인 존 태니얼이나 디즈니가 정립한 앨리스 상에서 도망가고 있다. 원작과 상이한 비주얼도 그렇지만 이 앨리스는 대체로 위축되어 있으며, 이상한 나라의 주민들을 향한 반응도 어딘가 소극적이다. 슈반크마예르가 만들어내는 이상한 나라 역시 앨리스만큼이나 원작에서 멀리 있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가다가 이상한 나라로 떨어지는 시퀀스는 슈반크마예르의 재해석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원작을 읽은 사람이라도 이 시퀀스를 보는 순간 루이스 캐럴의 원작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잠시 믿지 못할 것이다. 박제된 토끼는 진열대 유리를 깨트리고 발에 박힌 못을 뺀 뒤 황무지를 달려가 책상 서랍으로 사라지며, 앨리스는 토끼가 들어간 서랍 속에 들어갔다가 컴퍼스를 비롯한 문구류로 깔린 터널을 헤쳐 지나간다. 이 시퀀스는 전원적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먼지와 녹이 슬어 있는 황폐함으로 가득하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도착하면서 < 앨리스 >의 이상함은 본색을 드러낸다. 슈반크마예르가 만든 이상한 나라는 화사하기는커녕 텁텁한 색감과 조명으로 이뤄진 폐쇄적인 공간이다. 과격한 프로덕션 디자인도 그렇지만 이 나라의 주민들은 한술 더 뜬다. 디자인부터 그들은 캐럴의 유쾌한 유머에 봉사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원전에 쓰여 있던 행동을 생기 없게 반복한다. 여기다 갑작스러운 음향 연출, 기괴한 소도구, 체코 인형극의 전통을 스톱 모션으로 옮겨 놓은 애니메이팅도 이들의 비인간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이 세계에서 유일한 인간인 앨리스 역시 그런 애니메이팅 속에서 종종 길을 잃곤 한다. 앨리스가 축소되어 인형이 되는 시퀀스가 원작과 달리 무시무시하게 다가온다면, 그 생기 없는 애니메이팅에 감염될 것만 같은 공포 때문일 것이다. <재버워키>에서 보였던 단초가 <앨리스>에서 본격화된 셈이다. < 앨리스 >의 세계는 기계적인 ‘음울함’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이 음울함은 영국에서 상상할 법한 질감의 음울함이 아니다. 오히려 변방의 유폐된 정서에 가깝다. 이 이상한 나라를 언급할 때 체코가 낳은 위대한 작가들인 프란츠 카프카나 카렐 차페크가 언급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이 슈반크마예르는 <앨리스>를 만들면서 원전을 자신이 살고 있는 체코로 옮겨 놓은 뒤 재해석하고 있다. 이 재해석은 마리오네트처럼 체코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며, 유럽에서도 다소 변방인 체코 사회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결과는 신선하다. 슈반크마예르는 원작이 가지고 있는 광기를 동유럽/체코 문화의 전통에서 재해석하면서, 그간 <앨리스>를 각색한 영미권 창작자들과는 다른 가능성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 앨리스 >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하나는, 대부분의 서사 전개가 앨리스의 독백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다. 이 애니에서 이상한 나라의 주민들은 대사가 없다. 정확히 말해서, 말하는 장면에서도 입만 뻐끔거릴 뿐이다. 대신 앨리스가 독백을 통해 그들의 생각이라든가 대사를 대신 전달해준다. 그런데 슈반크마예르는 이 독백을 화면밖에 배치하지 않고 독백을 읊는 앨리스의 입술을 확대해 찍은 뒤 중간중간에 삽입하고 있다. 슈반크마예르의 다른 작품들에서 입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를 드러내는 장치였다면 (단편 <자연의 역사> < 대화의 가능성 >, 장편 <쾌락의 공모자들>이 대표적이다.) <앨리스>에서는 조금 다르게 앨리스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에서 ‘애니메이팅’되지 않는 인물은 앨리스뿐이기 때문에 독백을 읊는 입술 샷들은 영화 전반을 차지하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과 충돌하게 된다. 독백 내용 역시 (원작의 서술을 차용한 거겠지만) 앨리스 자신의 생각마저 3인칭화해서 들려주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뤄져 있다. 요컨대 말을 할 때도 자기 목소리 없이 뻐끔거릴 뿐인 스톱 모션 인형들과,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데다 아예 전지적 시점의 내용까지 말하는 앨리스 사이에서 어떤 긴장 관계가 성립하고 있다. 이런 대립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다만 영화 속 ‘이상한 나라’가 체코의 문화적 전통에 기반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슈반크마예르 본인의 의도는, 자국에 대한 비평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슈반크마예르는 자신의 작품들은 ‘정치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 앨리스 >는 사람들이 떠올릴 법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다루는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하지만 발표된 지 3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많은 이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그 매력은 대체 무엇일까? 여기서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앨리스>의 원제 < Neco z Alenky >는 “앨리스의 무언가”라는 뜻이다 슈반크마예르는 타국의 고전 문학의 충실한 각색물을 만드는 대신, ‘무언가’를 끄집어내 새로운 걸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그 ‘무언가’는 체코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개성이기도 하고, 원전이 가지고 있던 다른 측면이기도 하며, 슈반크마예르만이 가능한 초현실적인 상상력이기도 하다. 이 ‘무언가’의 위력은 직접 봐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