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 - 불사영웅 석수
- 감독
- 류신의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맹비, 왕낙용
박찬욱 감독의 11번째 장편영화 < 헤어질 결심 >(2022)의 제목은 주체의 ‘의지’를 강조한다. 제목의 주체는 이별을 방해하는 것에 대항해 자기 의지를 다지고 필요한 전략을 실행하고 목표에 도달하고자 한다. 제목만 보면 이 영화는 낭만적인 주체의 세계 대 자아 혹은 자율적인 이성 대 (무)의식적인 욕망 간의 투쟁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의 실체는 정반대다. 인간중심적인 주체의 의지를 강조한 이 제목은 반전을 위한 ‘미끼’다. 실제로 영화가 강조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들 사이의 정서적이고 투쟁적인 관계를 넘어,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 인공과 자연, 물질과 비물질, 감정과 행위, 데이터와 의미, 사건과 시스템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행위자들(actors)의 복잡한 배치와 네트워크이다. 그렇기에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영화와 가장 닮은꼴을 찾아본다면 < 파란만장 >(2011, 33분)일 수 있다. 이정현과 오광록 주연의 <파란만장>은 KT의 제작지원을 받아 미디어아트 작가인 박찬경과 함께 작업한 단편으로 당시 신형이었던 아이폰4로만 촬영을 해서 극장 개봉을 했다. 이 영화는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던 시점에 전문가적 역량을 어디까지 구현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캠페인 영화였다. 두 감독은 각종 취미 및 생활기계가 하나의 기기 안에 통합돼 있으면서도 휴대성과 편재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개별 기기들의 고성능 라인에 근접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있던 스마트폰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귀신의 시공간에 접속할 수 있는 영매의 역량으로 은유화 한다. 즉 비인간 기계와 초월적인 영적 존재 사이의 경계를 허물면서 이질적인 것들을 채널링하는 그들의 공통역량을 조명한다. <헤어질 결심>은 짐짓 ‘나’의 정체성을 허물 정도로 깊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의 파괴적 관계에 집중하는 전통적인 멜로드라마를 가장한다. 그러나 자아와 타자의 경계와 정체성의 “붕괴”는 인간들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시대 행위자들의 경계는 어떤 면에서 이미 ‘나’ 아닌 것에 매개되고 ‘지금-여기’ 아닌 시공간에 연결되어 있기에 이미 붕괴되어 있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근대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감정언어로 최종적으로 번역되기 이전의 현상, 즉 다층적으로 배치되고 네트워크 되어 있는 행위자들과 그들이 모이고 교차하는 마디점들(nodes)의 감각적 민족지학에 더 관심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의지(의식의 의미화)와 감정(정동의 의미화)이 있기 전의 사건들을 관찰한다. 경찰인 해준이 졸음 방지를 위해 동료인 수완(고경표)과 통화를 하며 밤 운전을 하는 장면에 나온 대사는 인간주체의 의지를 먼저 앞세우는 습관에서 벗어난 인과관계의 전복을 보여준다. 주체로서의 ‘너랑 나랑’을 강조하는 수완에게 해준은 “잠복해서 잠 부족이 아니라 잠이 안 와서 잠복근무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러한 경계의 무너짐과 네트워크 현상을 강조하기 위해 의인화를 탈피한 비인간 중심의 응시를 곳곳에 배치하고 이질적 시공간을 오고가며 낯설게 사건들을 연결하는 교차편집 기술을 부각시킨다. 특히 시체와 휴대폰부터 디지털 워치, 소프트웨어, 유튜브 플랫폼, 오늘날의 영화체계, 산과 바다, 폭력적이고 잔인한 이민 체계와 가부장제까지 무생물과 비물질의 응시가 이 영화에선 탈인칭 쇼트뿐 아니라 시점 쇼트로도 작동한다. 그래서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와 감정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영화 전반적으로 매우 소란스럽다(내가 끝내 이 영화에 몰입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뿐 아니라 다종다양한 무생물 행위자들도 네트워크에 연결된 자기의 행위성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시끌벅적한 눈들은 일종의 평등함을 부여받는다. ‘인간중심의 좌표를 벗어난 주체의 해체, 비인간적 주관성은 인간도 물질적이고 창발적인 세계의 질료 중 하나가 되게 만든다.’ (스테이시 알라이모) 비인간 시점은 영화사에서 여러 감독들에 의해 다양한 목적을 갖고 사용되어 왔다. 동물, 유령, 신, 사물들, 자연 풍경, 기계와 시스템은 비인간 시점을 표현해온 대표적 행위자들이다. 이 비인간-눈들은 장르적이든 그렇지 않든 대개는 친밀하고 낯선 기이함(the uncanny)의 느낌을 통해 자아와 타자, 내부와 외부,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흔들면서 불안정성을 만드는 데 기여해왔다. 비인간 시점의 미학적 실천은 최근 들어 한층 빈번해지고 있는데 주요하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기후위기에 대한 발본적 성찰로 인간중심성을 해체하려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디지털화로 인한 물질적인 것의 재규정이다. <헤어질 결심>의 비인간 시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사랑으로 번역된 것의 네트워크에는 두 사람의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인간과 비인간의 동맹이 있다. 영화는 그것을 종종 쇼트와 역쇼트를 하나의 쇼트 내에 보여주는 유사-주관적 시점으로 보여준다. 크레딧 타이틀 이후 나오는 첫 씬에선 서래의 남편인 기도수의 시체의 눈 안쪽으로부터의 응시를 보여준다. 시체 내부로부터의 시점으로 인해 눈동자의 실핏줄과 망막 위를 기어 다니는 클로즈업된 개미가 보인다. 그리고 저 멀리 역쇼트에 해당하는 암벽을 오르는 해준과 수완이 한 프레임에 담기게 된다. 쇼트에 해당하는 보는 주체와 역쇼트에 해당하는 보이는 대상이 한 프레임 안에 담긴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인 주관적 시점이 아니다. 시체를 ‘보고 있는 주체’로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영화는 보고 기록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기계와 같은 시스템으로 표현할 뿐이다. 해준이 그 시체를 보지만 시체 또한 해준을 보고 있다. 그 눈은 살인의 증거를 보았던 눈이기도 하고 살아있을 적에 서래를 폭력적으로 소유하고 통제하던 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눈이 현재 어떤 인간적인 욕망과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표현은 특히 병원의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띄워진 서래 몸의 멍든 사진을 보며 해준이 마우스로 이미지를 확대해 픽셀이 가시화될 때, 휴대폰으로 서래와 문자를 나누거나 녹음된 음성파일을 들을 때 두드러진다. 화면 내부로부터의 시선, 즉 시스템의 시선은 해준과 기계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준과 서래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이포와 부산에 떨어져 있을 때, 해준은 밤에 잠이 오지 않자 서래와 문자를 주고받는다. 서로만 아는 방식으로 농담을 할 정도로 관계가 발전해 가는 상황에서 서래가 문자를 쓰고 있는 중임을 표시하는 “…”는 해준의 마음을 동요시킨다. 그것은 기대와 설레임 등으로 언어화할 수 있다. 이 순간 카메라는 다시 휴대폰 내부로부터의 시선을 유지하며 스크린에 표시된 “…”와 휴대폰 스크린을 보고 있는 해준의 얼굴을 디졸브 시킨다. 해준은 “…”의 표현(농도, 깜박임, 지속시간 등)을 포함한 휴대폰의 문자 시스템과 동맹 중이다. 서래와 해준이 서로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번역기와 녹음기를 사용하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번역기 사용으로 인해 둘의 표현은 문어체에 가깝거나 직설적이게 되고, 심지어 오역을 만들어 낸다. ‘마음’은 ‘심장’으로 번역된다. 사극 드라마를 통해 배운 서래의 한국어는 고풍스럽다. 해준은 서래가 ‘꼿꼿해서’ 좋다고 고백한다. 소프트웨어와 미디어의 사용은 서래를 더 ‘꼿꼿한’ 이미지로 만들어 준다. 해준과 서래가 이포에서 재회한 후, 해준은 서래가 입은 옷의 색상에 집착한다. 그 옷은 청색인가, 녹색인가. 서래를 목격한 사람들은 동일한 드레스를 저마다 달리 증언한다. 그리고 해준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진다. 이 장면은 다분히 2015년 즈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드레스의 색상 논란을 염두에 둔 농담이다. 당시 같은 드레스를 놓고 흰색 바탕에 금색 줄무늬로 보는 사람들과 검은색 바탕에 파란색 줄무늬로 보는 사람들로 나뉘어 뜨겁게 논쟁을 했다. 드레스의 주변 밝기가 동일한 드레스를 다르게 보이게 한 것이다. 인간은 대상만을 떼어내 색을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밝기에 맞춰 원래 색을 판별하려 한다. 뇌는 환경에 맞춰 색체보정을 하고 여러 번 보다보면 학습에 의해 색은 새로운 정보에 상관없이 고정된다. 해준은 서래를 판단함에 있어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때마다 지속적으로 조정한다. 해준은 끊임없이 정보를 찾고 주변 환경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며, 사건이 종결되기 전까지 의미는 고정되지 않은 채 열려 있어야 한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는 이상 잠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해준은 꾸준하게 정보를 잘못 읽는다(서래의 몸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운다고 착각했던 것을 생각해 봐라). 오늘날의 세상에서 정보는 쉴 틈 없이 생산되고 또한 왜곡되기 때문에 세계(사건)의 종결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서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종결하는 법을 안다. 그는 살인자다. 그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삶마저 언제 끝낼지를 주체적으로 정하려 하는 이다. 서래는 주변 환경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욕망을 응시하는 이다. 그렇다고 비인간 네트워크를 거부하는 자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갖고 있는 기기들을 목적에 맞게 이용한다. 스마트폰의 위치기록 기능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 기능을 역으로 사용해 정보를 기록하고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든다. 시스템에는 구멍이 있다. 해준은 ‘사랑’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이 없지만 서래는 해준이 범행증거를 없애버리라고 한 말과 해준 자신이 붕괴되었다는 말을 ‘사랑’으로 번역한다. 해준이 정보 수집가라면 서래는 번역하는 사람이다. 해준이 미결자라면 서래는 종결자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상대적으로 꼿꼿한 사람이고, 스스로 소프트웨어 혹은 시스템이 될 줄 아는 사람이다. 서래는 해준이 멀리 바다에 던져버리라던 휴대폰 대신 스스로를 바다에 묻는다. 위치기록 소프트웨어에서 그의 위치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사랑의 네트워크에 구멍을 낸다. 이제 사건 혹은 의미화의 종결은 구멍으로서만 가능하다.
한국사회에는 유난히 중년 남자들의 기를 살리자는 식의, 이들을 달래는 분위기가 있다. 캠페인 같은 이 구호는 가장 사적인 집단, 집안에서 시작된다. 결혼 전, 친정엄마는 ‘너가 박 서방한테 잘해야 한다, 남자는 인정과 칭찬을 먹고 산다’고 조언했다. 심심치 않게는 ‘아들 하나 키우는 기분’으로 살아야 가정이 평화롭다며 훈수를 두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아빠들을 보면서 할머니들-현실은 황혼육아로 가장 고생하고 있음에도–은 ‘요즘 남자들 참 딱 하다’고 혀를 끌끌 찼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요즘 남자’라는 말은 다시 말해, 연장자 남성이 존중받는 시대는 지났다고 고백하면서도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창근( 김인문 )은 625전쟁 당시 어머니와 누이를 북에 남겨두고 아버지와 단둘이 남쪽으로 피난 왔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김일성 장군가를 부르며 북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해 극도로 집착하지만, 함께 내려온 아버지와는 그의 부고도 몰랐을 만큼 관계가 온전치 않다. 피를 쏟아내며 괴로워할 때도 그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며느리 호정(문소리)뿐, 아내나 아들은 외면하며 노망난 늙은이 취급을 한다. 창근의 가족은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 모형은 대물림 되었다. 아들 영작( 황정민 )은 변호사라는 번듯한 직업과 화목해 보이는 가정이 있지만, 깊은 관계의 애인 연( 백정림 )이 있다. 그는 정부도 마다하는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며 돈보다 정의를 위해 핏대를 세우지만, 집에서는 호정과 한 침대에 누워있어도 공허한 몸으로 등을 돌릴 뿐이다. 영작이 “짐승 같은 시간은 관두고 제발 사람답게 자존심 좀 지켜 가면서 살자”고 유가족들에게 연설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붕괴된 가족 안에 무너진 가장이 있다. 영화<바람난 가족>에 등장하는 남자들을 보면 가장의 역할은 물론, 어른으로서도 성숙하지 못하다. 창근을 요양원에서 모셔와 약주를 따르는 것도 호정이고, 창근이 피를 토하자 영작은 ‘호정아’를 외치며 자리를 피하기 바쁘다. 아이를 잃고 난 뒤에도 영작은 애인에게 쏟아내서 위로받으려 하지만, 호정은 산을 오르며 홀로 슬픔을 쏟아낸다. 우편집배원은 대책 없이 아이만 많은 무능력한 가장으로 그려지고, 소통이 안 되는 지운( 봉태규 )의 부자지간은 남보다도 못하다. 이들은 나름대로 가장의 역할을 해내려고 애를 썼겠지만, 현실은 권위 있는 존경받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다. 연이는 대놓고 “남자들은 다 미성숙해. 그냥 다 애’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상습적으로 절도를 일삼는 가정주부를 변호하던 영작에게 판사는 묻는다. “가정은 어떤가요?” 영작은 “남편은 회계사인데요. 가정적으로 아무 문제없는 중산층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답한다. 그러나 절도범 주부는 고개를 푹 숙인다. 이 대조 속에서 사회적 위치나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남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가정은 완벽하게 ‘정상적’일 것이라는 우리들의 편견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가족을 만든 것을 엿볼 수 있다. 영화 내내 ‘니들이 광국이를 알아? 주니어 웰터급 5위 광국이가 내 처남이야’라는 우편집배원의 외침은 처절하고도 처량하게 들린다. 챔피언도 아닌, 5위지만. 그리고 내가 아닌 처남이지만. 인정받지 못한 가부장은 그렇게 처남이라도 붙들고 체면을 세워야 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아버지가 가족의 권력자가 된 역사는 복잡하지만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들어 부계 중심의 가족은 조금씩 사라지고 가족의 형태나 개념 역시 이전보다 확대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 전통적 가족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한 뿌리, 핏줄에 집착하며 시대에 맞지 않는 속도를 낼 때가 있다. 그 속도에 밀려 가족 간의 애정은 바싹 메마르고 빈껍데기만 남아 단 한 번의 자극에도 바스락 부서진다. “엄마 난 입양된 거 몰랐을 때가 더 좋았던 거 같애. 왜 얘기해 줬어? 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놀릴 때마다 난 자꾸 엄마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 수인(장준영)이는 영작과 호정이가 입양한 아들로 혈연으로 맺어진 전형적인 의미의 가족과는 거리가 멀다. 수인은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자꾸 ‘엄마 생각’이 나는데 여기서 엄마는 호정을 말하는 건지, 수인을 낳은 엄마를 말하는 건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수인은 가슴으로 낳은 엄마를 따라 가족의 일원으로 다시 자리를 잡는데, 무엇이 진짜 가족인지 헤매고 있는 다른 남자들과 차이를 느끼게 한다. 겨우 욱여넣은 가장의 자리와 관계를 중심으로 맺어진 가족 사이에서 휘청거리던 영작과 호정은 결국 수인의 죽음으로 무너지고 만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엉망이 된 건가. 처음에는 모든 잘못을 다 네 아버지한테 뒤집어씌웠지. 나는 요즘에야 진짜 내가 어른이 된 기분이야. 내 인생 내가 책임지는. 인생은 솔직하게 살아야 되는 거더라. 그렇지 않으면 그게 사는 게 아니야. 하루를 살아도 사는 거같이 살아야지. 나는 이런 내가 좋아.” 영화 내내 가족들은 한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시선은 서로 엇갈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데, 창근의 장례식 이후 한 이불에 누워 얼굴을 마주한다. 이 한 컷으로 이들이 한때는 좋았던 가족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병한( 윤여정 )은 15년 만에 섹스를 하고 처음으로 오르가즘도 느끼며 산다고 고백하며 40년간 남보다도 못했던 가족을 벗어나 이제 진짜 삶을 살겠다 선언한다. 그리고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솔직하게 살자고 다독인다. 2003년 작 < 바람난 가족 >( 임상수 , 2003)은 시어머니, 아들, 며느리 모두 바람이 난다는 다소 자극적인 내용을 담으며, < 처녀들의 저녁식사 >(1998), < 눈물 >(2000)을 잇는 임상수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다. 이미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여자들의 솔직한 성 담론으로 한 차례 센세이셔널을 일으켰던 만큼 <바람난 가족> 역시 또 한 번 여자들의 ‘발칙한’ 영화라 홍보되었다. 막상 영화가 개봉되자 가볍게 배우들의 몸 감상에 나섰던 관객들이 어쩐지 찝찝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섰고, 예상대로 호불호가 분명히 나뉘었다. 영화 속 가족들의 모습이 판타지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을 담고 있었고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을 가족 콤플렉스를 미화 없이 직설적으로 늘어 논 까닭일 것이다. 가장들이 기가 죽어서 <바람난 가족>처럼 불량 가족이 되는 건 아닐 터. 결국은 서로가 완벽한 타인임을 인정하고 병한의 말처럼 ‘내 인생 내가 책임지는’ 어른으로 살아야 가족이 된다. 그리고 의미가 없는 낭만일지라도 결국은 사랑이 기본이고 답이다. 뒷머리를 멋쩍게 긁으며 쭈뼛대던 영작을 아웃시켰던 호정은 아마도 지금쯤 15살 아이를 키우며 기가 센 가장이 되어 즐거운 나의 집을 만들고 있을 것 같다.
장률 감독의 영화 중 재중 동포의 디아스포라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는 < 망종 >인데 거기서 최순희는 아들 창호에게 “너는 조선족 새끼다. 조선말을 알아야지”라고 말하면서 말을 가르친다. 창호는 ㅁ, ㅂ, ㅊ을 ‘므브츠’라고 발음하면서 조선어를 학습하는데, 별로 내켜 하지는 않아 하면서 TV를 사달라고 조른다. 최순희는 남편이 사람을 죽여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관계로 고향을 떠나 북경 근처 공장 지대, 기차 길 옆 버려진 집에 성매매 여성들과 이웃해 살면서 김치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간다. ‘조선포채’라고 쓰인 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행상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김없는 중국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조선인이다. 그녀는 허가증이 없어 경찰에게 자전거와 김치를 모두 빼앗기기도 하면서 힘들게 살아간다. 이런 최순희에게 김치를 사러 오는 남자들은 이러저러한 호의를 베풀거나 그녀의 육체를 요구한다. 김치를 사러 오던 경찰은 음식 판매 허가증을 내주고, 조선족 자동차 기술자 김 씨는 그녀를 노래방에 데리고 간다. 또 아들이 유리창을 깨어 사과 차 찾아갔던 이웃집 남자는 김치 납품을 주선하겠다면서 자신과의 육체적 거래를 요구한다. 이러한 와중에 최순희가 어느 정도 마음을 여는 것은 조선족 남자 김 씨다. 처음 김 씨가 김치를 사러 왔을 때 최순희는 그의 조선어에 반응하지 않고 중국어로 말한다. 김 씨는 최순희가 담배를 꺼내 물자 조선 여자가 웬 담배냐며 질책하듯 말하다가 괜한 간섭을 했다고 말을 거둔다. 이후 김 씨가 김치를 사러 다시 오자 최순희는 “뭐 사겠습니까?”라고 조선어로 묻는다. 그가 배추김치를 사자, 다른 김치를 덤으로 얻어 준다. 그러고 나서 최순희는 공안들에게 김치와 자전거를 빼앗긴다. 혼자 길을 걸어가던 최순희를 발견한 김 씨는 그녀를 자신의 자전거에 태우고 가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그녀의 배경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지 않자, 이곳은 조선 사람 보기 힘든 곳인데 조선 사람끼리 터놓고 이야기하자고 권유한다.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그래 남편은?” “사람 죽였어요.” “뭣 때문에?” “돈 때문에” “그래서?” “벌 받았지요.” 이후 김 씨는 최순희의 집을 찾아가 잠자리를 함께한다. 최순희와 이웃해 사는 성매매 여성들은 김 씨가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만류하지만 “나도 그리 좋은 여자는 아니지.”라고 대꾸한다. 김 씨의 부인이 경찰들을 데리고 오자 김 씨는 최순희가 매춘을 한 것이고, 자신이 돈을 주었다는 거짓 정보를 부인에게 흘린다. 경찰은 최순희에게 김치 파는 여자가 몸도 판다는 비방을 한다. 최순희는 경찰에 끌려가서 자신의 신상명세를 털어놓는다. 길림성 연길시에서 살던 조선족이며 32세다. 이후 자신의 김치를 사주며 호의를 보이던 왕 경관에게 바로 경찰서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아들을 잃는다. 왕 경관의 약혼녀가 그들 결혼식 연회 음식으로 김치를 부탁하자, 최순희는 김치에 쥐약을 섞어 버무린 후 배달한다. 결혼식장으로 많은 앰뷸런스들이 도착하고 최순희는 집을 나와 기차 길을 건너 보리밭을 향해 걸어간다. 조선족의 기표인 김치는 여기서 일종의 카타스트로프, 재앙의 기호로 바뀐다. 김치는 쥐약과 인접한 죽음의 기호가 된다. 영화의 이러한 결말에 다다르기까지 최순희의 김치는 여러 것들과 치환되는 은유이자, 그 이전 7위안의 돈과 교환되는 물물이었다. 영화가 그려내는 일상은 많은 부분, 김치를 담그기 위해 무를 손질하고 배추를 씻는 그녀의 노동의 과정이 차지하고 있다. 이 영화는 중국의 조선족이 구성하는 기호적 공간의 미장센을 김치 만들기와 그렇게 만들어진 김치가 팔리고 빼앗기고 또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과정을 따라간다. 김치 파는 사람이 몸도 판다는 조롱과 질타는 남편의 범죄로 조선족이 주로 살고 있는 길림성 연길 시에서 북경 근처의 산업 지역으로 이주했고 가부장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조선족 여자가 무엇을 매매해야 하는가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조선족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풀려난 후, 그녀는 창호가 조선어를 연습하는 것을 보고 연습장을 찢으면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창호의 죽음 후 그녀는 김치를 독극물로 바꾸어버린다. 장률 감독은 인터뷰에서 김치와 조선족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성일: < 망종 >은 김치를 파는 32살 조선족 최순희의 이야기다. 중국 사람들에게 김치란 어떤 음식인가. 별미로 찾아 먹을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결혼식에 김치를 가져다 달라고 하는데, 전통적인 의례인 결혼식에 김치를 올리는 것이 한국인에겐 굉장히 낯설다. 이 영화에서 조선족 최순희가 다른 걸 팔 수도 있었을 텐데, 김치를 팔 때 어떤 울림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나. 장률 : 중국에 200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 한국에서 4,700만 명 중 200만 명은 굉장히 크지만 그것을 14억 중국 인구 중에 흩트려 놓으면 찾지도 못한다. 옌볜에만 가면 조선족이 많지만, 중국 다른 지방에선 알아보지 못한다. 생긴 것도 같고. 그런데 딱 한 부류의 사람들은 보면 안다. 전국 각지 어디나 김치 파는 아줌마들이 있는데 보면 다 조선족이다. 조선 부녀들의 생명력은 대단하다. 김치 팔아서 잘사는 사람은 없는데, 가난해도 성실하게 계속 그 김치를 밀고 다니며 판다. 중국에서 김치를 아는 사람이 그래서 많다. 그건 <대장금> 때문이 아니다. 그전부터 알았던 거다. 중국에는 행상이 많은데, 그중에서 제일 깨끗한 게 바로 김치 파는 사람들이다. 그건 모두가 인정하는 거다. 먹어도 문제없고 배탈 안 난다고. 그렇게 깨끗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볼 때는, 항상 멀리서 바라본다. 고생하면서 저렇게 열심히 사는구나, 라면서. 그들을 볼 때는 항상 나의 친척 같고 자매 같다. 그리고 김치를 중국 결혼식에 놓는다는 게 한국인들에게는 이상할 수 있지만, 중국은 요즘 급격히 변하고 있어서, 결혼식 음식이 완전 짬뽕이다. 중국 물만두 올라왔다가, 서양식 요리가 올라오고.... 32살 최순희가 김치 파는 아줌마로 등장할 때, 그녀는 위와 같은 김치-조선족 여자-성실-청결 등의 기호적 작용 속에서 감지된다. 조선족 여성의 김치에 관련된 재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김치가 독약으로 바뀔 때, 문화적 접촉이나 번역이 이루어지는 경계를 가지고 있는 세미오스피어(semiosphere)가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로 바뀐다. 두 세계를 잇는 마술사 대신 앰뷸런스가 등장하고, 조선족 여성과 나머지(여기에는 조선족 남성도 있다)의 적대는 폭발한다. 남편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가고, 그래서 연변을 떠나 이 북경 근처의 공장 지대에 왔던 최순희는 아들을 잃고, 생계의 수단이었던 김치에 쥐약을 타 몇 대의 앰뷸런스가 오는 재앙을 만든다. 청결한 맛은 치명적인 독으로 바뀐다. 김치는 두 개의 문화를 매개(catalyst)하는 대신 재앙(catastrophe)이 된다. 그녀가 독김치로 의미화하는 것은 급진적 거부다. 자신의 김치를 필요로 하고 샀던 모든 남자들에 대한 부정이다. 그녀의 김치는 7위안이라는 돈으로 교환되는 것이 기본이지만, 조선족 김 씨, 이웃집 남자, 왕 경찰관 등은 늘 덤, 잉여, 그녀의 육체를 원했다. 그래서 김치에 독을 탈 때 그녀는 그 잉여에 독을 놓는 것이다. 잉여가 저주의 몫이 되는 것이다. 특히 그녀의 독김치가 작용하는 곳은 왕 경관으로 대변되는 공안, 국가 소 권력 집단이다. 그녀의 복수는 국가로 향한다. 그녀는 헐벗은 삶, 무능력 즉 자유의 박탈 외에는 어떤 잠재성도 지니고 있지 않은 삶으로 가고 있는 듯 보였으나 세미오스피어의 변경을 보여주고 번역 행위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정적인 카메라, 장식이 없는 미장센, 판타지의 틈입이 없는 방식을 고수하다가 한 장면에서 다른 논리를 따라간다. 최순희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다. 이전 최순희의 아들 창호는 용이 그려진 연을 푸른색 스프레이로 뒤덮었다. 창호가 푸른색으로 색칠해나가는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자신만의 특이한 세계의 고집이고 창조다. 기차 길 옆, 집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최순희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그 프레임 속, 기차 길 옆 사람들이 모여 있고 앰뷸런스가 보인다. 사람들은 최순희를 본다. 최순희가 그들을 본다. 앰뷸런스의 닫혔던 문이 열리고, 최순희는 슬픔과 패닉에 빠진 표정이다. 이때 최순희를 보는 시선이 최순희에 포커스 인했다가 포커스 아웃되면서 그들의 집에 맞추어진다. 망자의 시선, 죽은 창호의 시선이다. 이 소년 망자의 엄마 최순희는 연변에서 살다가 남편이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가자 북경의 외곽 지대에서 김치 행상을 하게 된다.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연변을 떠나 북경 외곽 지대에 있는 최순희는 두 번의 이주를 겪은 것이다. 한번은 그녀 부모나 더 먼 조상들이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것이고, 또 중국 내에서 다시 한 번 조선족 집단 거주지를 떠난 것이다. 최순희는 창호와 이곳에서 성매매 여성들과 이웃해 지냈다. 사는 집은 온기 없이 황량하고 쥐가 출몰한다. 나는 망자의 시선, 이러한 집을 들고나는 죽은 어린 소년의 시선으로 포착되는 엄마, 집 그것의 그러한 유령성, < 망종 >이 사유하는 모국, 엄마, 집의 문제가 흥미롭다. 친숙한 것이 낯선 것으로, 낯선 것이 친숙한 것으로 동요하는 이 운동. 예컨대 이 집, 폐가는 이들의 집이 아니지만 또한 집인 것이고 망자의 시선이 엄마에게 머물다 이 집에 머문 후 떠날 때 익숙한 것의 부재와 현존(un-home-liness)의 느낌이 지극하다. 친밀한 낯섦의 깊은 동요(the deep stirring of the uncanny)라고 부를 수 있는 망자의 시선으로 포커스 인 되는 이 장면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머무르거나 소유할 수 없는 집과 소수자의 관계를 보여준다. 자리를 잡았으나 머무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자의 시선이다. 나의 삶의 거주지로서의 세계(Oikos), 나의 존재노력으로서의 거주의 관리(Oikonomia). 이 사건이 종결되는 순간 엄마에게 부여되었다 집으로 이동하는 시선. 엄마의 얼굴과 집이 포커스 인, 아웃되는 이 장면을 레비나스 윤리학과 영화적 재현을 가능하면 관통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레비나스는 광학으로서의 윤리학, 즉 윤리학이 존재론적 철학이라기보다는 주체와 타자의 구제적이고 다양한 관계를 조명하는 광학(optics) 혹은 영혼적 광학이라고 본다. 이때 일종의 광학으로서의 윤리학은 개요적이고 전체화 시키며 객체화하는 시각의 특성을 배제한 이미지 없는 또 다른 시각이며 완전히 다른 종류의 도상이나 관계라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에서 얼굴의 클로즈업은 유리 로트만에게 있어서는 ‘친밀함’ 과 ‘내밀함’ 이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의 관찰이라는 일상의 경험을 자동적으로 연상시킨다.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세계나 지극히 친밀한 세계의 특징이다. 영화는 이를 통해 모든 등장인물- 친구와 적들 -이 관객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로 우리를 옮겨 놓는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의 친분 관계란 인물의 특징을 상세히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핏줄의 불거짐과 얼굴의 주름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매우 내밀한 관계인 것이다.” - 김수환, 「영화 기호학과 포토제니: 로트만의 ‘신화적 언어’개념을 중심으로」, 『문학과 영상』 208, 43쪽. 반면 엡스탱, 발라즈(Bela Balazs), 그리고 바르트(Roland Barthes)는 바로 얼굴에서 의미심장한 ‘타자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클로즈업된 인간의 얼굴, 그것은 기호학의 잠재적 위협으로서의 ‘자족적 실재’에 다름 아니다. 언제가 엡스텡을 그토록 매혹시켰던 클로즈업(그는 클로즈업을 영화의 영혼이라고 불렀다)은 발라즈의 이른바 “인상학적(physiognomic)” 영화 이론의 중심 테마이기도 했다. 이러한 클로즈업의 포커스 인과 아웃의 운동에서 아이를 잃은 소수자 여성의 얼굴은 타자성과 내밀함을 동시에 극대화한다. 이후 그녀는 자신을 경찰서에서 성폭행한 경찰관의 결혼식에 피로연 음식으로 가져간 김치에 독극물을 탄다. 그녀가 이렇게 얼굴을 잃을 때, 체면을 버릴 때 그녀의 괴물성이 생산한 중국 공안의 괴물성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