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e
- 감독
- 오태윤
- 제작년도
- 2015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1. 2013년, 영화진흥위원회가 홍릉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30여 년간 운영해오던 필름 현상 업무를 종료했다. 이를 끝으로 국내의 모든 필름 현상소가 문을 닫게 되었고, 사실상 한국의 상업적 필름 관련 산업 대부분도 정리되었다. 이제 무비 필름을 현상하고 프린팅 하려면 해외로 보내야만, 무질서하게 흩어진 필름의 은입자를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필름이라는 매체의 물성을 점점 더 멀리 밀어내고, 디지털 이미지의 매끈하고 평평한 표면만을 우리의 시각 경험 중심에 남겼다. 미디어의 발전은 흔히 필름에서 비디오, 그리고 디지털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궤적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비디오와 디지털을 먼저 접한 뒤 필름을 경험한 내 입장에서, 적어도 필름은 과거의 매체가 아니라 디지털 이후 새롭게 등장한 ‘뉴미디어’였다. 그러나 내가 필름이라는 매체를 알게 되었을 때, 이 ‘뉴미디어’는 이미 영화산업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있었다. 사물의 가치가 경제적 효용성과 합리성을 통해 판단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름은 디지털 매체의 편리성과 효율성에 밀려 점차 추방되었던 것이다. 나조차도 효용의 관점에서 퇴보한 기술로 여겨졌던 이 사물을 직접 다뤄 보기 전까지는 필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흔히 필름은 그저 과거의 감성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소비되거나, 디지털과 이분화된 대립 속에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지금의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이 사라진 매체를 추억할 기억도, 향수에 젖을 과거도 없다. 이들은 단순히 필름과 디지털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두 매체가 발생시키는 관계 를 통해 필름을 이해하고, 다룬다. 오히려 이런 관계가 미디어가 하는 일을 더 잘 알 수 있게 하며, 선형적 시간성에 대한 기성의 인식을 갱신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과 마주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투명한 감각>(2022) 독일 하메른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의 뒷이야기를 다룬 <투명한 감각>(2022)은 이와 같은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필름 애호가들의 실천을 사라진 친구를 기억해 내기 위한 세 사람의 분투로 알레고리화한다. 카메라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남겨진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간다. 다리를 저는 아이,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아이. 이 세 아이는 피리 소리를 쫓아 사라져 버린 친구들이 남기고 간 사물들을 매개로 그들을 기억해 낸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조각을 덧대고 연결해가면서 서사를 작동시키고자 하는데, 이들이 재연해 낸 서사는 사라진 친구들의 시간을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지금 공동의 증언을 통해 새로이 구성되는 것이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 시대에 여전히 필름으로 작업하는 이들의 창작하는 방식에 관한 은유로, 이들은 더 이상 산업적으로 생산되지 않는 장비와 장치를 3D 프린트를 이용해 직접 생산하고, 그것들을 온라인 공간에 올려 자신과 같은 애호가들과 공유한다. 3D 모델링으로 새롭게 고안되어 공유되는 16mm 현상장비 3D 모델링 영사기 부품 중 필름 롤러 (사진: Thingiverse ) <투명한 감각>이 공동의 실천을 통해 과거의 매체를 ‘지금, 여기’로 불러냈다면, <베르팅커>(2022)의 경우 상상력을 통해 실존하는 별자리와 가상의 신화를 연결하여 매체를 ‘지금 여기’로 소환한다. <베르팅커>(2022) <베르팅커>는 실제 존재하는 별자리 ‘파리자리’에 착안해, 별자리가 된 사물의 삶을 은유한 작업이다. 1603년, 독일의 천구 지도 제작자인 요한 바이어(Johann Bayer)가 만든 천체 지도 ‘우라노메트리아(Uranometria)’에는 51개의 별자리가 표기돼 있는데, 그중 하나가 파리자리이다. 이 작품은 ‘파리자리’에 대한 가상의 설화를 만들어 필름의 의미에 대해 질문한다. <베르팅커>는 과거에 사물과 장소를 실로 묶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내는 정령에 대한 이야기로, 존재한 적 없는 ‘베르팅커’라는 대상을 상실된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세계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디지털로 이미지를 촬영하고, 3D로 이미지를 생성한 뒤 이를 필름에 프린팅하고, 필름 위에 잉크로 직접 드로잉하는 과정을 통해 제작되었다. 디지털 작업을 통해 추상화된 이미지는 필름의 물질적 표면 위에 드러나며, 그 후 잉크라는 물질 자체가 필름 표면 위에 새겨지는 화학적 과정을 거친다. 이처럼 디지털과 아날로그 기기 사이를 반복적으로 오가며 제작된 <베르팅커>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익숙하지 않은 시각적 경험을 제안한다. 2. 디지털 시대에 우리의 경험은 더욱 개별화된 가운데 선택의 폭은 더 넓어졌다. 영화 역시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제작 과정에서도 물리적·시간적 제약으로부터 한층 더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이렇게 확장된 선택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알고리즘이라는 체계는 우리의 선택의 폭을 익숙하고 비슷한 관심사 안에 가두고 있으며, 디지털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 역시 정해진 프로그램과 에셋(Asset)의 사용에 의존하여, 역설적으로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George Walton Lucas Jr.)는 디지털 기술이 전례 없는 창작의 자유와 효율성으로 모두가 영화를 제작, 배포할 수 있는 민주적 시대를 열 것이라 예견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대로 디지털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환상적인 세계가 과연 우리의 경험을 민주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확장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패터슨>(2016) 영화 < 패터슨 >(짐 자무쉬, 2016)의 주인공 패터슨은 버스 기사이자 시인이다. 그의 시는 버스 안에서 만나는 무작위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패터슨이 좋아하는 시인이자 소아과 의사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시 또한, 진료 현장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탄생했다. 영화 속 래퍼가 읊조리는 윌리엄스의 시구 “관념이 아닌 사물로(No ideas but in things)”는 이러한 ‘직접적 접촉(immediate contact) *주1 ’이 창작의 본질임을 상기시킨다. 이렇듯 ‘직접적 접촉’은 단순히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과정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사람이나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확장해가는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는 접촉을 통해 개별화된 ‘나’ 라는 존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경험이었다. 이 접촉의 중요성은 비단 창작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데,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관람이라는 행위를 통해 예상치 못한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낯선 이야기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것. 영화는 그런 낯선 접촉을 통해 우리의 시야를 확장한다. 반면 최근 디지털화된 우리의 경험은 점차 통제 가능하고 선택된 것들로 제한되며, 예측 불가능한 접촉에 대한 면역력을 잃어 가는듯하다. 이런 디지털 시대에, 필름 작업은 창작에서의 접촉과 제약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필름 장비를 구하기 위해서는 온라인 중고 거래 플랫폼을 통해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접촉해야만 하는데, 이 과정에서 때로는 퇴역한 군인의 삶, 때로는 사라져 버린 극장의 은퇴한 영사 기사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필름이라는 물질적 저장 매체는 단순 도구를 넘어, 창작자와 물리적 환경, 그리고 그 환경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일종의 연결 고리로 작용한다. 작업을 하며 만나게 된 사람들 (좌) 카메라 관련 장비수리 진영사 / (우) 서울아트시네마 전 영사 기사님의 작업실 또한, 필름의 물리적 특성은 창작에 있어 물리적 제약을 제시한다.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은 필름의 길이에 의해 제한되며, 이미지를 보기 위해 복잡한 현상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온도와 습도, 스크래치 등 물리적 조건에 민감한 필름은, 디지털 기술에서 간과되는 물질성과의 상호작용을 다시 일깨우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확실성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경험이다. 작업 중 만나게 되는 이러한 예상 밖 사람들과 물리적·시간적 제약은 상상력을 요청했고, 예상치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알지 못했던 세계와 연결될 수 있었다. 상상력은 현실적 제약과 접촉을 토대로 성장하며, 디지털 세계의 무한한 자유만으로는 물질적이고 유한한 우리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루프>(2024), 설치 전경, 아마도예술공간 (사진: 조준용) 최근의 작업 <루프>(2024)는 이렇듯 디지털 장치들의 물질적 조건이 신비화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디지털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환상적 세계는 디지털 매체가 지닌 물질성을 얇은 표면 안으로 숨기고 이음새를 보이지 않게 만듦으로써 마치 그것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특징은 디지털 이미지가 무한히 확장 가능하고, 물리적 한계에 구애받지 않는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신비화의 전략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단편만을 경험하게 한다는 비판 아래, 최근 이미지 지지체들의 얇아진 세계를 열어젖혀 이미지 기기의 기능 중 하나인 반복 재생의 기능을 루프라는 시스템으로 가시화했다. 보다 가볍고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디지털 미디어의 시간에서, 인간의 몸을 비롯해 유한할 수밖에 없는 물질세계와 마주해 보려는 의도로 진행한 작업이다. <루프>(2024), 설치 전경, 아마도예술공간 (사진: 조준용) 디지털을 경유한 필름의 이미지들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세계를 더욱 잘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필름 이미징 작업은 단순히 과거 매체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롭게 주어진 선택지를 활용해 지금의 선택지들을 재평가하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필름은 우리에게 ‘관념이 아닌 사물’로서, 일상 속에서 우리가 가진 제약과 타인의 이야기로부터 예상치 못한 응답을 이끌어내는 활동이 아닐까? 디지털 시대에 불편하고 현실적인 제약에 끊임없이 응답해야 하는 접촉과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궤도를 이탈하게 되는 필름 작업은 포스트-시네마 시대에 영화가 가진 힘을 재조명하며, 다양한 존재와 현실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시하는 상상력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 주1. 윌리엄스는 시는 도서관 같은 고독한 공간에서 벼려진 시인의 독특한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거의 무시되어온 사물이나 환경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면서 그것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쓰여져야 한다고 믿었다. (진은영, 김경희, 「영화 <패터슨>에 나타난 시와 예술의 공공성」, 『문학치료연구』 50호, 한국문학치료학회, 2019, 181쪽.) 윌리엄스가 다루는 대상은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그 주위의 시간과 공간은 이상하게 왜곡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오로지 평범함을 통해서 평범함을 벗어나([the] banal to escape the banal)(SE 236)고자 하였으며, 오로지 상상력을 통한 사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인해 사소한 일상 속에 감추어진 광대한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류기택,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적 상상력과 상대성 이론」. 『영어영문학연구』 41호(1), 32쪽.) 한우리(미술작가) l 물질이 만들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포털>(2024), <루프>(2024), <베르팅커>(2022) 등 작업.
나쁜 놈들에게 개과천선은 가능한 걸까? 성악설을 따로 들먹이지 않아도 늑대, 뱀, 피라냐, 상어, 거미 등 오래 전부터 무섭고 위험한 존재로 취급 받아온 이들이 새롭게 거듭나겠다며 착한 일에 도전한다. 하지만 기니피그로부터 제안된 이 실험은 시작부터 그리 녹녹치가 않은데, 지독한 편견과 고정관념 탓에 뭔 일을 시도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질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목숨마저 내어줄 만큼 가장 친한 친구 사이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 배드 가이즈 >는 변해버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서투른 고백이자 위로이고, 환대받지 못한 아싸들의 진솔한 우정을 그린 헌사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15권까지 출간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호주의 배우 출신의 아동 작가 애런 블레이비의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데, 영화는 크게 1권과 3권의 기둥 줄거리를 바탕으로 < 펄프 픽션 >과 <오션스 시리즈> 등의 전통적인 범죄 장르 영화들과 < 루팡 3세 >나 < 명탐정 번개 (홈즈)> 그리고 <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 같은 다양한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받아 재해석되었다. 특히나 실사적인 움직임을 강조해오던 그간의 미국 전통적인 CG 애니메이션 경향에서 벗어나 만화 특유의 과장된 움직임과 가변 프레임적인 연출을 강조하는 스타일은 <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공유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바로 음악을 맡은 이도 다니엘 펨버튼으로 동일하다는 것! 다니엘 펨버튼 1977년생의 다니엘 펨버튼은 현재 가장 핫한 영화음악가인 동시에,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온 뮤지션이다. 1994년 그의 나이 약관에도 미치지 않은 16살 때 만든 데뷔 앨범을 들은 TV연출자 폴 윌름스우스트(다큐 연출을 하다 방향을 틀어 <스트라이크 백>과 <다빈치스 데몬스> 등의 시리즈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베테랑) 눈에 띄어 픽업돼 그때부터 17년간 TV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경력을 쌓아왔다. 그 필모 안에는 <핍쇼>나 <헬스 키친>, <공룡 구출 대작전>, <더크 젠틀리의 전체론적 탐정사무소> 등 제법 우리 귀에도 익숙한 영국 프로그램들도 보인다. 그러다 2011년 비로소 경력에 비해 늦은(그러나 여전히 젊은 나이인 30대 중반에) 닉 머피 감독의 < 어웨이크닝 >으로 장편 극영화음악 데뷔를 한다. 그 후 리들리 스콧과 대니 보일, 가이 리치, 아론 소킨 등 여러 잘 나가는 감독들을 단숨에 만족시키며 영화계 주류 작곡가로 편입되었다. 그가 이처럼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명징한 멜로디 감각과 탁월한 아이디어, 재기발랄한 편곡 솜씨를 보유한 실력 덕택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진지한 드라마를 필두로 다큐멘터리, 범죄물, 블록버스터 액션 히어로, 시대극, 판타지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게임)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편식 없이 가리지 않고 모든 스타일의 음악을 매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엔 길고 길었던 TV시절이 받쳐줬기에 가능했다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 <배드 가이즈>에서도 이런 그의 유연한 다재다능함은 빛이 난다. 다니엘 펨버튼은 이번 애니메이션이 전통적인 하이스트 영화들에 기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착안, 1960-70년대 사이에 제작됐던 수많은 할리우드 케이퍼 영화들이나 캅 영화들의 스코어에 경배를 바치고 있다. 헨리 맨시니의 < 핑크 팬더 >이나 <피터 건>, 퀸시 존스의 < 이탈리안 잡 >, 랄로 쉬프린의 < 블리트 >, 데이빗 사이어의 <지하의 하이젝킹(펠햄 123)>, 돈 엘리스의 <프렌치 커넥션>, 그리고 존 배리의 007시리즈 등 당대 가장 인상 깊었던 그 쿨한 재즈 사운드가 고스란히 그의 손에 의해 재현되는데, 이를 위해 휘황찬란한 브라스 섹션에 그루브한 하몬드 오르간과 펑키한 퍼즈 기타,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리드미컬한 봉고 드럼, 짜릿한 무그 신디사이저 등 그 당시 악기들을 이용했다. 이미 앞서 다니엘은 그 시절 첩보물의 리메이크인 < 맨 프롬 엉클 >과 오션스 시리즈의 스핀오프 < 오션스 에이트 > 그리고 진지한 누아르 < 머더리스 브루클린 >에서 재즈라는 장르에 대한 애정과 실력을 마음껏 피력한 바 있기에 <배드 가이즈> 스코어의 완성도를 의심하는 건 시간낭비에 가깝다. 맞춤옷을 입은 것처럼 적재적소에 위치하는 활력 넘치는 레트로 사운드는 교활함과 긴장감, 위트와 낭만, 감동과 눈물을 동시에 아우르며 100분에 이르는 러닝타임 중 거의 내내라 할 수 있을 정도인 80여 분간 깔리며 기둥 분위기를 잡아준다. 하지만 단순한 스타일의 재현과 답습을 넘어 자신만의 색채를 입히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힙합 비트에 심포닉 사운드를 섞어 삽입곡들과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새로운 슈퍼히어로 스코어를 완성시켰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처럼 다니엘 펨버튼은 고전 하이스트 장르물 스코어에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색다른 악기들이나 모티브를 도입해 기발한 재미와 흥미를 자아내게 만든다. 인도의 전통 악기 ‘반수리(대나무 플루트)’로 재즈에서 사용되는 플루트를 대체해 작전 이나 잠입 시 독특한 은밀함과 영화 중반 등장하는 크림슨 포의 신비주의를 선사한다던지, 하프와 아코디언, 치터가 뒤섞인 것 같은 음색을 들려주는 일본의 전통악기 ‘다이쇼고토(大正琴)’를 들고 와 그 특유의 서늘한 공명감으로 섬뜩한 빌런의 음모를 암시하는 등 기존 장르 스코어에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실험을 펼쳐 보인다. 복잡한 사연을 지닌 입체적인 기니피그 캐릭터 마멀레이드 교수를 위해선 바흐에서 영향을 받은 피아노(대체적으로 영화에서 컨벤션화 된 악당 캐릭터들이 바흐 음악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를 대입하고 있으며, 후반 들어선 의도적으로 역시 바흐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프로콜 하럼의 히트곡 “A Whiter Shade of Pale”의 하몬드 오르간 전주를 따와 반전의 전조로 써먹는 재치도 발휘한다. 시종일관 질주하는 다니엘 펨버튼의 음악은 마치 갱단의 노련한 움직임처럼 지치거나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앤서니 라모스 이기 팝과 함께 작업한 영화 <골드>의 주제가 “Gold”로 골든 글로브 주제가상에 노미네이트되고, 셀리스트와 함께 한 <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의 주제가 “Hear My Dream”으로 오스카 주제가상에 올랐던 만큼 다니엘 펨버튼의 송 라이팅 실력 또한 무시 못 하는데, 이번 <배드 가이즈>에선 흥겨움을 담당하는 두 곡 “Good Tonight”과 “Brand New Day”를 들려주고 있다. 영화 중반 스네이크가 위기에 빠지자 피라냐가 마이크를 잡고 주위 환기용으로 불렀던 “Good Tonight”는 실제 목소리를 맡은 앤서니 라모스의 출중한 노래 솜씨를 맛 볼 수 있는 곡인데, 그는 뮤지컬 <해밀턴>과 < 인 더 하이츠 >, < 트롤: 월드 투어 > 등으로 이미 검증된 바 있는 가수이기도 하다. 주제가라 할 수 있는 “Brand New Day”는 영국의 소울 충만한 펑크 락 밴드 더 헤비가 소화해 그들 특유의 신명나는 그루브함과 화려한 스윙감을 선사한다. 그 외 배우이자 코미디언 롭 슈나이더의 딸로도 알려진 엘르 킹이 부른 “Feelin' Alright”도 쿨한 <배드 가이즈>만의 색채를 빛내주고 있으며, 사운드트랙 안엔 포함돼 있지 않지만 영화에서 흐르던 줄리 런던이 부른 고전 스탠다드 팝 “Fly Me to the Moon”이나 아니타 오데이의 “Whisper Not”이 분위기를 돋아주고, 더 블랙키스의 “Howlin' for You”, 케미컬 브라더스의 “Go”, 캔트 스톱 원트 스톱의 “Stop, Drop, Roll” 등이 유쾌함을 더한다. 개봉 전 예고편에선 재밌게도 빌리 아일리시의 딱 한글자만 틀린 제목의 노래 “Bad Guy”가 사용되기도 했다. 코로나 기간에 제작되고 상영돼 제약이 많았음에도 전 세계적으로 2억 5천만 달러가 넘는 흥행을 올린 <배드 가이즈>이기에 속편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있다. 실제로 넷플릭스에선 23년 연말을 목표로 홀리데이 스폐셜이 제작 중에 있다. 다니엘 펨버튼이 직접 참여할 진 미지수지만, 현재 애플TV+에서 <에프터파티>와 <슬로 호지스> 시리즈를, 24년 개봉 예정이었다가 무기한 밀린 대망의 스파이더맨 유니버스 삼부작을 마무리 짓는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를 작업하는 등 바쁜 스케줄을 이어가고 있어 그의 주가는 더욱 폭등할 것으로 보인다. 거장이 되어갈 다니엘 펨버튼을 지켜보며 <배드 가이즈>라는 제목과 달리 썩 나쁘지 않은 비장의 OST 하나를 기억해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Track List 1. The Big Bad Wolf 2. Meet The Bad Guys 3. Let's Bounce 4. Push Pop 5. Step 3 6. Security Surprise 7. The Dolphin Heist 8. Going to Go Good 9. Turn on the Charm 10. Marmalade Prelude 11. A Heist for Good 12. The Sharing Laboratory 13. Save the Cat 14. "Good Tonight" by Anthony Ramos 15. So Long Suckers 16. The Lair of Loot 17. Loot Loops 18. Bedtime Story 19. Double Crossed 20. Tricky Fox 21. The Crimson Paw 22. Secret Hideout 23. Evil Masterplan 24. The Sad Guys 25. One Last Push Pop 26. Finish Them 27. Huff + Puff 28. Just Robbing This Place 29. Freeway Escape 30. Who Said It Was the End? 31. Redemption 32. The Old Switcheroo 33. "Feelin' Alright" by Elle King 34. "Brand New Day" by The Heavy
1986년 제임스 호너는 이제 막 영화음악가로서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 시기였다. 70년대 전반에 걸쳐 UCLA에서 영화음악을 가르치던 그는 종종 미국영화협회의 의뢰를 받아 독립영화들의 음악을 작곡하며 이론보단 실제 작업에 더 큰 매력을 느꼈는데, 결국 가르치던 것을 그만두고 로저 코만의 도움을 얻어 B급 영화 <심해의 공포 Humanoids from the Deep>와 <우주의 7인 Battle Beyond The Stars>을 통해 상업영화에 데뷔하게 된다. 두 영화에서 각각 그 시절 유행하던 두 스타일, 조르지오 모르도와 반젤리스로 압축되던 전자음악과 존 윌리엄스와 제리 골드스미스로 대표되던 대규모 관현악 사운드, 모두 훌륭하게 들려준 바 있는 이 늦깎이 신인을 주목한 건 당연지사. 웨스 크레이븐의 초기작 <악령의 리사>와 올리버 스톤의 <악마의 손> <늑대인간의 습격> 등 다양한 저예산 장르물들을 통해 노련한 감각과 대담한 시도들을 펼쳐 보이며 실력을 인정받는다. 메이저의 발판에 올라서게 된 건 프랜차이즈 SF < 스타트렉 >의 속편과 월터 힐 감독의 액션 코미디 < 48시간 >이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하면서부터. 디즈니는 베테랑 영화음악가 조르쥬 들르뤼와 앨머 번스타인이 음악을 맡았던(그러나 해고된) <이상한 실종 Something Wicked This Way Comes>과 <머나먼 시애틀>에 제임스 호너를 대타로 내세우며 그의 실력에 깊은 신뢰감을 보냈고, 이후 < 코쿤 >과 < 코만도 > 등 잇따른 흥행작들을 담당하며 주가가 오르기 시작한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처음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 < 피블의 모험 An American Tail >과 세계적인 지성 움베르토 에코의 베스트셀러를 기반으로 제작된 다국적 프로젝트 < 장미의 이름 >을 앞둔 1986년은 제임스 호너에게 분명 또 다른 분기점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 그리고 또 한 작품. 20세기폭스가 7년 만에 속편 제작에 나선 < 에이리언 2 >의 음악도 그의 몫이었다. 제임스 호너 녹음을 위해 영국 땅에 내렸을 때만 해도 호너는 부푼 꿈과 희망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영국은 유년시절 왕립음악학교에 다니며 음악을 배우던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고, 이미 1983년 <브레인스톰>과 < 혹성의 위기 >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와 협연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더욱이 제임스 카메론과는 앞서 로저 코만이 제작한 영화 <우주의 7인>에서 미술과 음악으로 만난 바 있기에 소통에도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다. 이는 호너의 오판이었다. <에이리언 2>의 작업은 지옥과도 같았으며, 일생일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치욕과도 같은 환경이었다. 영화의 개봉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에게 전달된 촬영분은 전무했다. 작업에 6주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3주가 지나도 촬영은 끝나지 않았고, 편집도 이뤄지지 않았다. 제작자인 게일 앤 허드는 어쩔 수 없이 오케스트라를 먼저 섭외했다. 기다리는 동안 호너는 촬영장과 편집실을 다니며 분위기를 익혀 곡을 쓰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편집이 덜 끝나 전체적으로 화면 분량에 정확히 맞추는 게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녹음이 이뤄질 애비로드 스튜디오는 당시 워낙 노후된 장비들로 차 있어서 전자음마저 제대로 구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에 쫓긴 호너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곡을 쓰고 연주해야 한다고 성토했고, 녹음 하루 전날엔 한 시퀀스가 통째로 편집이 바뀌어 36시간 동안 다시 작업을 해야 했다. 곡에 대한 의견 차이로 호너와 카메론은 수없이 다퉜고, 더 완벽한 사람을 찾아보겠다는 감독의 말에 그만두겠다며 강경하게 응수했다. 결국 호너의 곡은 의도와 상관없이 누더기로 마구 재단되고 반려당하며 삭제되었고, 그는 두 번 다시 제임스 카메론과 작업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호너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음악상에 처음 노미네이트되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에이리언 2 여러모로 제임스 호너의 <에일리언 2>는 제리 골드스미스가 음악을 맡은 전편 < 에이리언 >과 닮았다. 고딕적인 호러 분위기를 물씬 풍겼던 1편과 달리 밀리터리 액션 음악에 가까웠던 후속편이지만, 두 작품 다 영화상에서 스코어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 1편의 감독이었던 리들리 스콧과 편집자인 테리 로링스는 제리의 스코어가 너무 빽빽하다고 생각했고, 좀 더 미니멀한 사운드를 찾다 결국 제리의 다른 스코어였던 <프로이드>에서 여러 곡을 골라 배치했다. 엔드 크레딧엔 하워드 핸슨의 ‘Symphony No. 2, Romantic’을 삽입했다. 제리 골드스미스는 이를 두고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을 미워(?)했다. 제임스 호너가 음악을 맡은 속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제임스 카메론은 호너의 다른 스코어였던 < 스타트렉 2 >과 3편의 요소(정확히는 클링곤 테마)가 묻어나기를 요구했고, 오프닝과 엔딩 테마에선 아람 하차투리안의 ‘가야네 발렛 슈트’의 곡조를 인용하기를 바랐다.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에서 잠깐 동안의 평화와 안식을 보여줄 때 흘러나왔던 곡으로, <에일리언 2>에서도 모든 상황이 시작하기 직전의 평화스러운 모습과 모든 것이 종료된 이후 안식을 나타내듯 상징적으로 쓰이길 원했다. 호너가 만든 많은 곡들이 빠졌고, 원래 장면과 다르게 잘려져 부분적으로만 사용되거나 또는 다른 곡으로 대체되었다. 편집상에서 아주 드러내 감독판에서만 들을 수 있는 ‘Dark Discovery / Newt’s Horror’를 비롯해 착륙선을 타고 비행할 때 흐르는 ‘Combat Drop’이나 뉴트가 등장하던 장면에 쓰일 ‘Newt’, 그리고 여왕과 리플리가 대면하던 씬의 ‘The Queen’도 생략되었다. 해병대가 연구실에서 에일리언 숙주를 발견하는 장면에 쓰일 ‘Med. Lab’은 거의 음악 없이 진행되는 바람에 아주 적은 부분만 인용되었고, 대기정화시설에서 흐르던 ‘Atmosphere Station’ 역시 작은 레벨로 분위기를 자아내는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반면 여러 번 반복돼 사용된 큐도 있다. ‘Queen To Bishop’과 ‘Bishop’s Countdown’이 바로 그 곡들로 특히 후자 경우 녹음 당시 한 곡이 비었다는 걸 깨닫고 호너가 단 하루 만에 모든 작업을 마무리한 큐였다. 파워풀하고 아주 강렬한 액션 큐로 지금껏 북미 예고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곡으로도 유명하다. 진정한 지옥도를 맛보고 싶다면 ‘Futile Escape’가 제격이다. 이미 앞서 얘기한 ‘Bishop’s Countdown’과 리플리가 해병대들을 구하러 장갑차를 끌고 갈 때 흐르는 ‘Ripley’s Rescue’로 변주되긴 했지만, 진정한 묘미는 8분 30초에 이르는 이 대곡에 있다. 제임스 호너가 작업 중에 받았던 모든 스트레스와 고통, 분노, 좌절과 실망을 한데 뭉쳐 격정적으로 쏟아낸 것과 같은 이 악곡은 영화상 가장 긴 탈출 (액션) 시퀀스에 쓰인 트랙으로 가히 세상의 모든 아비규환과 절규, 광기와 공포가 흉포하게 담겨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듯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총공세를 펼쳐대는 관현악의 놀랄만한 비명은 강렬하고도 무시무시하다. 여기가 바로 지옥이구나! 를 깨우치게 할 만큼 모든 혼이 울부짖고 브라스가 포효하며 스트링이 빠르게 활강하고 약동한다. 세상의 모든 악기가 내지르는 공포의 처절한 소리들은 너무도 실감 나게 그리고 절절하게 이 악몽을 묘사한다. 어디에도 없는 출구와 뚫려버린 피난처를 찾아 헤매게 되는 심경을 담아낸 아우성은 극도로 강한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킨다. 그럼에도 결국 호너는 카메론을 100% 만족시키지 못했다. 카메론은 여전히 전편의 영향력이 남아있기(연장되기)를 바랬고, 그 분위기를 위해 골드스미스의 큐들을 몇 곡 골라 2편에서 그대로 사용했다. 1편 사운드트랙에 있는 ‘Parker’s Death’와 ‘Sleepy Alien’ 등이 그러한 트랙들이다. 2001년에야 이 모든 (생략, 변형된) 큐들을 온전하게 담아낸 디럭스 에디션 버전의 사운드트랙이 출반되었다. 타이타닉, 아바타 두 명의 제임스가 화해하기까지 대략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카메론과 호너는 각각 자신의 분야에서 거장이 되어 있었고, 시간은 완벽주의자인 그 둘을 조금 느긋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다. 호너는 카메론이 구상한 < 타이타닉 >의 이야기를 맘에 들어 했고, 카메론은 바로 전 해 작업한 호너의 < 브레이브 하트 >를 만족해했다. 둘은 첫 만남에서 5분 만에 화해하고 3시간 동안 <타이타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카메론과 호너는 이 영화로 처음 아카데미상을 거머쥐었다. 다행히도 이야기의 끝은 해피엔딩이다. 이후 둘은 다시 10 여년이 지나 < 아바타 >의 작업을 함께했으며 세상의 모든 영화의 수익에 관련된 기록을 싹 다 갈아치웠다. 그들은 다시 2016년 이후 <아바타> 후속편들로 세상을 지배할 계획 중에 있다. Track List 1. Main Title 2. Bad Dreams 3. Dark Discovery / Newt's Horror 4. LV-426 5. Combat Drop 6. The Complex 7. Atmosphere Station 8. Med. Lab. 9. Newt 10. Sub-Level 3 11. Ripley's Rescue 12. FaceHuggers 13. Futile Escape 14. Newt Is Taken 15. Going After Newt 16. The Queen 17. Bishop's Countdown 18. Queen To Bishop 19. Resolution And Hyperscape 20. Bad Dreams (Alternate) 21. Ripley's Rescue (Percussion Only) 22. LV-426 (Alternate Edit - Film Version) 23. Combat Drop (Percussion Only) 24. Hyperspace (Alternate En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