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맨
- 감독
- 트래비스 자리니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써머 H. 하웰, 키넌 레만, 카일 스트라웃츠, 린 쉐이, 가브리엘 호우, 로버트 잉그런드
사진: “ 졸업 ”, tvN 올 한 해 TV와 OTT를 통해 공개된 시리즈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관심을 끌어모은 화제작부터, 스쳐 지나갔지만 돌이켜 볼 만한 문제작들까지 정리합니다. 이 글을 구상할 즈음 ‘비상계엄’이 도둑처럼 선포됐다. 용감하게 국회로 달려간 많은 시민들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투를 벌인 공직자들 덕분에 비상계엄은 해제됐지만, 한국사회의 시간은 ‘12.3 내란 사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이 모든 상황이 차라리 ‘드라마’였으면 하고 생각하다가 지난 여름에 본 < 돌풍 >(김용완, 2024)이 떠올랐다. 한국 정치사를 압축한 것 같은 <돌풍>이 재현한 한국사회는 ‘대의 민주주의’ 대신 음모와 폭로가 난무하는 세계였다. 당시 나는 이 드라마의 위험한 상상을 비판했었다. 그러나 그 위험한 상상은 몇 달 뒤 현실이 됐다. 참으로 유해한 것들이 도처에 깔려있다. 비상계엄이 아니더라도 이 세계는 이미 비상시국이다. 먼 곳에서 전쟁 소식이 끊이지 않았고, 기후위기가 코앞까지 도달했음을 절감했고, 경기침체로 인해 온갖 사회 지수는 지속적으로 나빠졌다. 사회적 갈등뿐 아니라 여성, 장애인, 이민자, 퀴어 등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도 지긋지긋하게 반복됐다. 마치 지구 종말 200일을 앞둔 < 종말의 바보 >(김진민, 2024) 풍경처럼. 이런 유해한 세상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자극적인 맛, 즉 도파민을 상승시킬 무언가를 찾고 또 찾았다. 드라마 세계도 마찬가지다. 사적 복수극, 고자극 장르물, 이번 생은 망했으니 과거로 돌아가서라도 욕망을 실현하는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서사가 줄을 이었다. 남편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역사를 바로 세우며 남편에게 복수하는 <내 남편과 결혼해줘>(박원국, 한진선, 2024)가 주목을 받았고, < 살인자ㅇ난감 >(이창희, 2024), < 더 에이트 쇼 >(한재림, 2023), <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모완일, 2024) 등 사적 복수물이나 고자극 장르물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런 드라마들이 예전처럼 큰 화제를 모으지는 못했다. 넷플릭스를 중심으로 생산되던 고자극 드라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다 보니 피로감을 느끼게 된 탓이다. <돌풍>, <종말의 바보> (사진: 유튜브 넷플릭스 코리아) 뜻밖에도(!) 올해 가장 인기가 높았던 드라마는 <눈물의 여왕>(장영우, 김희원, 2024)이다. 이 드라마는 ‘너무 늦게 도착한 과거’와 같은 드라마이다. ‘퀸즈’로 대표되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재벌가(가부장제)를 선하고 무해한 집단으로 재현하며 무너진 퀸즈 일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여기에 불치병과 기억상실증 등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가 빠지지 않았다. 위기를 통해 부부 관계와 가족애를 회복한다는 방향성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혈연·혼인 중심 가족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주목받은 이유는 간단하다. “생각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일상의 피로감이 높아질수록 단순한 맛을 찾기 마련이다. 맵거나 달거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자극 드라마에 피로감을 느낀 우리는 순하고 달달한 드라마를 도피처 삼아 그 세계에 몰입하여 울고 웃었다. <눈물의 여왕>은 그런 우리의 필요를 잘 반영했기에 진부한 설정에도 선택을 받은 것이다. 시청률은 낮았지만 마니아층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모았던 <선재 업고 튀어>(윤종호, 김태엽, 2024)나 시원하고 무해한 제주도의 풍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웰컴 투 삼달리>(차영훈, 김형준, 2023~2024) 등도 비슷한 이유로 관심을 모았다. 사진: “ 눈물의 여왕 ”, “ 선재 업고 튀어 ”, tvN “생각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 곁에는 서로를 구원함으로써(쌍방구원) 위로를 전하며 치유적 기능을 한 드라마들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 ‘먼치킨’ 주인공이 위험으로부터 인간-사회를 구하거나 악을 제대로 응징하여 ‘사이다맛‘ 정의를 구현하는 히어로물이 인기를 모았으나 그 히어로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히어로’가 사라진 자리에 ‘힐러(healer)’가 찾아왔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조현탁, 2024)은 우울증, 불면증, 비만이라는 ‘현대인의 질병’에 걸려 초능력을 상실한 가족 이야기다. 이들이 초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화재 참사로 인한 상실감과 죄책감 때문이었다. 어디 드라마 속 인물들뿐일까? 사회적 참사가 반복되는 한국사회 속 우리들 또한 같은 이유로 현대인의 질병에 걸린 게 아닐까? 드라마는 상처로 인해 무기력에 빠졌던 인물들이 “히어로는 아니지만” 서로의 행복을 바라며 구원하고자 애쓰는 것에서 희망은 시작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 Mr. 플랑크톤 >(홍종찬, 2024)은 뿌리를 모른 채 딛고 설 땅을 상실한 채 부유하는 “모든 물고기들의 밥”이자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 바닷속 가장 미천한 존재”인 플랑크톤과 같은 인물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구원했다. 세상은 유해한 것들로 가득하지만, 인간은 끝까지 ‘선함’의 본능을 잃지 않고 서로를 구원하고야 만다는 단단한 신뢰를 이런 드라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Mr. 플랑크톤> (사진: “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 JTBC / 유튜브 넷플릭스 코리아) 드라마가 단지 도피처, 위로와 치유적 경험만 제공한 것은 아니다. 장르를 망라하여 저마다의 방식으로 ‘오늘’을 구현함과 동시에 ‘내일’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올해 드라마가 담은 오늘과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다양한 가족의 형태와 가능성을 보여준 드라마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눈물의 여왕>이 절절하게 보여주었듯 기성사회와 미디어는 여전히 가부장적이며 혈연·혼인 중심 가족을 대표적 가족 모델로 반복재생 하지만, 한국사회의 전통 가족 모델은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재구성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전통 가족의 모순성을 보여주거나 가족의 경계를 허물어 확장하는 지향성을 가진 드라마들을 통해 구현됐다. <정숙한 세일즈>(조웅, 김미진, 2024)나 <가족X멜로>(김다예, 2024) 등에서는 가부장 중심 가족의 해체를 보여주었고, <우리, 집>(이동현, 위득규, 2024)이나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송연화, 2024)를 통해서는 가족이라는 관계가 신뢰와 애정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의심과 오해로 조각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가족이라서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우리는 이 드라마들을 통해 씁쓸하고 서늘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 당연하지도 않고 심지어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드라마들도 있었다. < 트렁크 >(김규태, 2024)는 ‘계약결혼’이라는 파격적 설정을 통해 가족과 부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결혼이나 혈연을 넘어선 가족들도 등장했다. <조립식 가족>(김승호, 2024)과 <손해 보기 싫어서>(김정식, 2024)와 <Mr. 플랑크톤>은 ‘정상’ 세계에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인간들이 혈연·혼인이라는 관습과 제도를 넘어 서로의 ‘가족’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가족이 아니라면 무엇이 가족일 수 있을까? 가족의 재구성의 문제는 관계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생활고 때문에 관계마저 소원해진 젊은 부부가 돈을 벌기 위해 불륜 커플을 협박한다는 신박한 설정의 < LTNS >(전고운, 임대형, 2023)는 ‘불륜’이라는 키워드로 (부부) 관계의 복잡성을 상기시켰다. 부부, 가족, 인간관계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이토록 친밀’한데 ‘배신자’ 일수도 있는 법이다. 드라마는 이런 인간의 복잡성을 흔들리거나, 해체되거나, 재해석되고, 재구성되는 가족을 통해 다채롭게 보여주었다. (상) <우리, 집>,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사진: “ 우리, 집 ”, “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 MBC) (하) <트렁크>, <LTNS> (사진: 유튜브 넷플릭스 코리아 / 유튜브 CJ ENM 글로벌)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하게 늘어난 여성서사가 올해도 다양한 얼굴로 우리와 만났다. 여성서사는 주인공 혹은 중심인물 다수가 ‘여성’인 경우를 의미하지만, 그 여성‘서사’에 무엇을 담았는가도 중요한 문제다. 올해도 드라마들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얼굴을 응시했고, 용감하고, 슬기롭고, 끈질기게 사회적 관습에 저항하는 여성들을 통해 새로운 인간-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낮과 밤이 다른 그녀>(이형민, 최선민, 2024)는 뜻밖의 사건으로 낮에는 ‘아줌마’로 호명되는 50대 여성으로, 밤에는 ‘취준생’ 20대 여성인 본래 몸으로 살게 된 이미진/임순을 통해 사회적 존재감을 잃어버린 여성들이 존재감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졸업>(안판석, 2024)에서는 대치동 학원가 1타 강사, 서혜진( 정려원 )이 퍽퍽하고 고단한 30대 여성 직장인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밤에 피는 꽃>(장태유, 최정인, 이창우, 2024)은 사별한 여성에게 자결하여 열녀가 될 것을 강요하는 사회적 관습을 거부하고 의적으로 활동한 조여화( 이하늬 )의 액션 활극을 시원하게 보여주었다. <정숙한 세일즈>는 1992년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생계를 위해 성인용품 방문 판매를 하게 된 여성들을 통해 여성들이 ‘정숙’하기를 강요하는 사회에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또한 무능하고 유해한 가부장들과 능동적이고 협력적인 여성들의 연대를 대비시켰다. 1992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낡은 서사로 여겨질 뻔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지향은 오늘날의 여성들과 공명하기에 충분했다. <굿파트너>(김가람, 2024)는 ‘이혼 전문 변호사’ 차은경( 장나라 )을 중심으로 가족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하며 여성들의 연대와 성장 서사를 보여주었다. 그런가 하면 <손해 보기 싫어서>는 ‘위탁모’로 봉사한 어머니를 둔 손해영( 신민아 )과 ‘위탁아동’으로 연결된 또 다른 ‘딸들’의 자매애를 보여주었다. <피라미드 게임>(박소연, 2024)은 한 달에 한 번씩 비밀 투표로 왕따를 정하는 ‘백연여고’ 2학년 5반을 통해 계급화된 사회의 문제를 환기하고 여성 청소년들이 연대하여 힘의 세계관에 저항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 정년이 >(정지인, 2024)는 19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중후반까지 유행한 ‘여성국극’을 재현하여 남성중심 사회 속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여성들과 여성들의 관계를 보여주었다. ‘여성국극’은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의 사회’라는 대안적 상상을 해보게 하는 담대한 시도였다. 여성서사를 표방하지 않더라도 드라마 속 여성들은 꾸준하게 진화하고 있다. 드라마 속 여성서사는 장르도, 시대도, 인물들이 처한 상황도 다르지만 지금-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처한 현실과 그에 대항하는 페미니즘적 지향성과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흐름이다. 사진: “ 밤에 피는 꽃 ”, MBC / “ 굿파트너 ”, SBS 드라마에서 여성서사의 공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단지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아졌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퀴어서사의 공간도 함께 늘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피라미드 게임>, <웨딩 임파서블>(권영일, 2024), <엄마친구아들>(유제원, 2024)과 같이 퀴어 캐릭터가 주요하게 등장하는 ‘퀴어프렌들리’ 드라마들이 있었고, <정년이>, < 대도시의 사랑법 >(허진호, 홍지영, 손태겸, 김세인, 2024), <옥씨부인전>(진혁, 2024) 등 퀴어가 중심이 된 드라마도 제작됐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소설가 박상영의 소설을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하여 호응을 얻었는데 게이 남성 고영( 남윤수 )을 통해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동성애’도 당연하고 보편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옥씨부인전>은 노비에서 양반으로 신분이 바뀐 여성, 구덕( 임지연 )을 중심으로 여성, 노비, 성소수자 등 ‘소수자’ 문제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정년이>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퀴어서사에 관해 고민하게 했다. 동명의 웹툰 원작에서 정년이와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는 인물인 ‘부용’이 드라마에는 삭제됐다는 면에서 그렇다. 부용은 페미니즘과 퀴어서사를 담당한 중요한 캐릭터였기에 타협적이고도 퇴행적 각색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대도시의 사랑법>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 단체의 거센 항의에 예고편을 삭제하기도 했다. 이 두 드라마를 둘러싼 논란은 드라마가 처한 모순적 상황을 절감하게 했다. 이화여대 퇴임교수 김훈순의 진단처럼 드라마는 “우리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에 적극 개입하는 문화적 생산물”임과 동시에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다양한 가치를 담아내는 문화적 공론장”이자 “시대 흐름 속에서 충돌하는 가치들을 담아내는 역동적인 텍스트”이다. 그렇기에 순응하거나 퇴행하는 면도 있지만, 관습의 저항을 피하기는 어려운 순간도 있다. <정년이>나 <대도시의 사랑법>은 충돌하는 가치들을 ‘뚫고’ 나아가는 서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사진: “ 정년이 ”, tvN / “ 옥씨부인전 ”, JTBC 한 해 동안 우리가 주목했던 드라마들의 흐름을 톺아봤다.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유해한 현실의 도피처로서 무해한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다가 위로를 받았다. <옥씨부인전>에서 구덕의 말처럼 드라마가 “하루하루 수고한 사람들한테 행복을” 주고 “시름을 잊게” 한 것이다. 또한 드라마가 구현한 작은 세계를 통해 우리의 ‘오늘’을 돌아볼 수 있었다. 드라마라는 거울은 우리의 ‘오늘’뿐 아니라 ‘내일’로 나아갈 길을 발견케 했다. 드라마가 비춘 현실은 자주 절망적이었지만, 관습을 깨고,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꾸준하게 성장하는 여성서사와 꿋꿋하게 등장하는 퀴어서사를 통해 우리 사회가 다양하게 넓어지고 있다는 희망적 생각을 해보게 됐다. <정숙한 세일즈>에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무대처럼 어떤 시도는 “시대를 앞서간 느낌” 때문에 저항에 부딪히지만 곧 그 시차를 극복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은 질문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인간다움’과 ‘가족’으로 상상된 사회공동체다(그렇기에 가족의 범위가 확장되는 걸 보여준 드라마들이 반갑다). 올해 본 드라마 중 가장 좋아한 드라마가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졸업>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졸업>은 한국사회의 욕망이 집약된 ‘대치동 학원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정답’이 아닌 ‘지문 바깥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역량과 ‘인간다움’에 관해 이야기한다. 드라마는 자신의 삶과 연인을 지극히 사랑하는 성실하고 윤리적인 직업인 혜진을 통해 ‘인간답게 사는’ 길을 보여주었다. 혜진은 수업 시간에 에리히 프롬의 글을 학생들에게 들려준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이것은 나와 우리, 그리고 ‘유해한’ 세상을 향한 조언이기도 하지만, 드라마의 소명과도 같다. 사진: “ 졸업 ”, tvN 오수경(드라마평론가) l 인간과 사회에 관심이 많아 문학을 전공했고, 신앙인으로 살고 있으며, 드라마를 들여다본다. 여러 매체에 칼럼 기고. 『을들의 당나귀 귀 』(2019) 공동 집필, 『드라마의 말들 』(2022) 집필.
소설가 스티븐 킹이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유명해졌을까. 이런 질문으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스티븐 킹의 유명세에 비해 한국에서 도통 그의 번역된 소설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시기에 그를 인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영화였다. < 캐리 >(1976), < 샤이닝 >(1980), < 스탠 바이 미 >(1986), < 런닝 맨 >(1987), < 공포의 묘지 Pet Sematary >(1989), < 미져리 >(1990)의 원작자가 모두 한 사람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면서 ‘스티븐 킹’이라는 이름을 각인했고, 그의 책들을 찾아보려는데 번역본이 왜 이리 없단 말인가, 라는 놀라움과 탄식을 동시에 내뱉어야 했던, 아마도 그 시기는 1990년대 초중반이었을 것이다. 대학 도서관에서 검색 키워드로 ‘스티븐 킹’을 넣고도 그 결과가 허름해 절망하며 겨우 빌린 옛날 판본의 「캐리」를 기숙사 침대 위에서 읽으며 소름 끼쳐 했던 기억이나, 피터 스트라우브와 공저이긴 하지만 비로소 신간 소식으로 스티븐 킹의 소설이 나왔다는 신문 단신을 보고 기쁨에 복받쳐 곧바로 서점에 달려가 사버렸던 「부적 The Talisman」에 대한 기억, 대학교 교직원이 「신들린 도시 It」 읽는 걸 보고 동지를 발견한 듯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날렸으나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던 순간, 후배에게 「멈춰버린 시간 The Langoliers」(「스티븐 킹, 미스터리 환상특급 Four Past Midnight」에 실린 중편)의 줄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이야기해줬던 심야의 자취방 추억. 이때만 하더라도 이 글로벌 스타 작가는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나만의 작가이기도 했다. 주변에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 슬슬 많은 스티븐 킹의 소설들이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프랭크 다라본트의 <쇼생크 탈출>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후, 2000년대 초 황금가지에서 스티븐 킹의 대표작들을 시리즈로 내놓으면서 나는 나만의 작가를 놔줄 수밖에 없었다. 예정된,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로부터도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지금도 내가 읽는 속도보다 더 빨리 글을 쓰는 건 아닌가 할 정도로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성공적이거나 실망스럽거나 관계없이 그의 원작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들도 매년 시도되는 중이다. 특히 올해 여름은 빌 호지스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엔드 오브 왓치」가 번역 출간되었고, 미국에서는 1부인 「미스터 메르세데스」의 드라마가 막 시작되었다. 8부작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다크 타워」를 영화화한 작품이 곧 개봉되며 9월이면 많은 사람들이 꼽는 그의 대표작 < 그것 >이 이전 TV 미니시리즈 이후로 처음 영화화되어 개봉한다. 스티븐 킹의 단편 <더 미스트>를 10부작으로 각색한 TV 시리즈가 현재 미국에서 방영 중이고, 이 드라마는 국내에서도 넷플릭스를 통해 8월 중 공개될 예정이다. 자 다시, 약간 변형된 질문. 소설가 스티븐 킹은 이제 한국에서 유명한가. 말해 뭐하겠는가. 오래된 스티븐 킹의 팬으로서 이런 여름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고 그래서 KMDb에 미니 연재를 기획하게 되었다. ‘스티븐 킹, 여름, 영화’라는 두루뭉수리 한 칼럼 주제 아래 세 명의 필자를 섭외했다. 「다크 타워」 시리즈를 번역한 장성주 번역가의 「다크 타워」에 대한 글을 시작으로, 이다혜 북칼럼니스트의 ‘스티븐 킹의 무시무시함을 의외로 영상으로 옮기기 힘든 이유’와 그다음으로 조원희 감독의 ‘그럼에도 내가 사랑하는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들’에 대한 글이 1주일에 한 편씩 차례로 올라간다. 모두 내로라하는 스티븐 킹의 팬이다. 올여름은 유독 비가 많다. 어둡고 음산한 여름 하늘 아래 여러분은 검은빛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꼬마아이의 한쪽 팔을 뜯어간 피에로가 도사리고 있는 검은 하수구, 돼지 피를 뒤집어쓴 십대 여자아이가 살육을 벌이기 직전 번쩍이는 검은색 눈동자, 리타 헤이워드의 대형 포스터 뒤에 은밀하게 감춰진 검은 동굴, 죽은 시체를 살려 돌려보내는 어둡고 깊은 인디언 묘지, 끝없이 걸어야 하는 소년들을 향해 장전되어있는 검은색 총구, 1963년의 역사를 바꿔버린 후 도착한 현재의 검게 휘몰아치는 하늘, 끝없이 희지만 암흑의 그림자로 가득한 오버룩 호텔의 미로 정원, 사랑한다 말하며 도끼로 내려찍는 애니의 검은 입, 가족에게 떨어져 길을 잃은 소녀가 헤매는 암흑의 숲, 전기의 힘으로 죽음을 초월하려는 목사가 불러내는 어둡고 끔찍한 사후 세계, 진흙이 잔뜩 묻은 이불이 별도 없는 시커먼 한밤에 선사하는 기이하고도 둔탁한 공포. 예상했겠지만 이 목록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고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2016)(이하 <설리>)에는 단 한 명의 죽은 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설리>는 2009년 1월 15일, 전 세계에 알려진 실화 사건에 기반한 일이다. 이 사건이 세계적인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55명을 태운 민항기가 사고로 인해 비상착수를 했는데, 승무원 한 명의 경미한 부상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죽거나 실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죽을 수 있었으나, 모두가 살아남게 된 사건. 미디어와 대중들은 그 기적적인 ‘생존’에 열광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 반대로 그들 누구도 ‘죽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같은 말인 것 같지만 방점이 다르다. 어떻게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진부한 응답은 기장 설렌버거(설리)의 영웅담에 그치겠지만, 이스트우드는 자꾸만 현실에선 벌어지지 않았던 설렌버거의 실패를 상상한다. < 설리 >에 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이전 그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죽음’을 기록하는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지속된 그의 초기 서부극은 ‘죽은 자’가 귀환해 복수를 가하거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영화였다(< 평원의 무법자High Plains Drifter >(1973) < 페일 라이더 >(1985)).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어지는 영화들은 아예 유령학에 가까웠다. 이 유령학의 핵심에는 현재로 침입해오는 과거의 망령들, 죄의식, 혹은 죽은 자를 증언하는 강신술사가 등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의 모든 영화에서 등장인물은 죽음을 맞이하거나 사라졌다. 가령 < 미드나잇 가든Midnight In The Garden Of Good And Evil >(1997)과 < 히어애프터 >(2010)는 죽은 자와 대화하는 자들에 관한 영화이다. 산자와 사자의 공존, 죽은 자들은 현세를 떠나지 못하고 자꾸만 말을 건네거나 복수를 감행한다. < 퍼펙트 월드 >(1994)나 < 밀리언 달러 베이비 >(2004)는 등장인물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화자들의 기억 혹은 편지에 관한 영화이다. < 미스틱 리버 >(2003)는 죽음이 예정된 자들의 벗어날 수 없는 잔혹한 숙명적 세계에 관한 영화이며,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출연작이 되어버린 < 그랜 토리노 >(2008)는 아예 장례식으로 시작해 그 자신의 죽음으로 마감하는 ‘비가’와도 같은 작품이었다. 그의 최고작들로 언급되는 < 용서받지 못한 자 >(1992)나 < 아버지의 깃발 >(2006)은 영웅 신화를 해체하는 영화임과 동시에 ‘과거’의 망령 혹은 죄의식이 현재를 증언하거나 기억의 책무를 남기는 영화들이다. 그 과정에는 무수한 죽음들이 필연적으로 수반됐다. 2010년대, 그의 필모그라피는 흡사 바이오그라피 시네마에 가까웠다. 미국의 밤의 대통령으로 군림했던 FBI의 에드가 후버를 그린 < 제이. 에드가 >(2011)나 이라크 전쟁에서 활동한 미군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에 관한 < 아메리칸 스나이퍼 >(2014) 그리고 이번 영화, 허드슨 강의 기적을 그린 < 설리 >까지. 특히 <제이. 에드가>나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주인공의 ‘죽음의 순간’이 중요한 작품들이다. <제이. 에드가>에서 후버의 죽음은 무서운 권력을 창출하고 지배했던 역사적 인물의 비장함이 아니라, 자신의 침대 아래로 처박힌 한 인간의 늙고 추레한 살덩어리, 죽음 그 자체의 쓸쓸함에 관한 소묘였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이라크 전쟁이 만든 미국적인 영웅의 정당성과 딜레마, 그러나 결국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던 그 이라크 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살해당하고 마는 삶과 정치의 아이러니를 피력하는 작품이었다. U.S. Airways Flight 1549 [출처]huffingtonpost.com 그런데 < 설리 >에선 아무도 죽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 속 한 구조대원이 한 승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아무도 죽지 않는 날입니다.” 아마 이스트우드 영화에서 우연적이건 필연적이건(혹은 주인공이건 주변 인물이건) 그 어떤 죽음도 묘사되지 않은 건 이 영화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아흔을 바라보는 미국의 완전작가 이스트우드는 이미 알고 있다. 위대하고 두터워 보이는 삶들이 사실은 얼마나 위태롭고 우발적인 방식으로(혹은 필연적인 숙명으로) 죽음의 순간들과 공존하는지 말이다. <설리>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눈 건 고작 208초의 순간이었다. 설렌버거 기장도 말하지 않는가. “42년 동안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는데, 고작 208초의 시간이 나를 설명한다”고 말이다. 그 208초의 시간이 155명의 사람을 살렸고, 설렌버거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반대를 가정한다. 모두가 살아남았지만 모두가 죽을 수도 있었던 그 208초의 운명 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화는 설렌버거의 비행기가 허드슨 강이 아니라 뉴욕의 마천루로 치달아 거대한 폭발과 함께 무수한 죽음을 발생시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물론 이 장면은 영화 서사 내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아니다. 영화는 이내 그것이 주인공 설렌버거의 ‘악몽’임을 드러낸다. 미국의 영웅 설렌버거는 이 영화 속에서 ‘악몽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자’로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순간, 자칫 죽음의 208초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그 고통과 불확실성의 순간으로 영화 속 설렌버거는 자꾸만 소환된다. 조사위원회의 회의나 청문회에 불려 나가 그 시간을 진술하는 실제적 순간으로의 소환 외에도 그는 악몽과 환영, 기억의 방식으로 자꾸만 그 자리에 불려 나간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누운 잠자리의 악몽으로, 꺼져있는 TV의 환각으로, 그리고 심지어 젊은 여성이 그의 볼에 감사의 키스를 한 직후에도 그는 창밖 뉴욕의 도심 풍경을 보며 자신의 비행기가 빌딩으로 충돌해 화염에 휩싸이는 환영을 보게 된다. 설렌버거는 영화 속 대사를 통해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돌아가는 지점은 사고의 순간, 그 208초의 시간 속이다. 죽음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으며, 명백한 자기 확신과 명예율로 살아가는 단독자들. 이런 캐릭터는 고전기 서부극의 남성 영웅들이었다. 60년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세르지오 레오네에 의해 그러한 반영웅 캐릭터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표면적으로 단일하고 명백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어떠한 내적 균열과 불안 혹은 자기모순에 찬 존재들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 용서받지 못한 자 >를 만들었을 때, 그 영화는 단순히 서부극의 90년대적 부활이 아니라, 자신의 스타 이미지(반영웅 아이콘)를 해체하는 영화였으며 서부의 신화를 탈신화하는 영화, 이상화된 영화적 시간을 현실의 시간으로 되돌리는 영화였다. < 아버지의 깃발 >은 그 정점에 있는 영화였다. “전장을 모르는 자들은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하지. 선과 악, 영웅과 악당,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2차 세계 대전 중 이오지마에서 벌어졌던 참상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노인은 후대의 젊은이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웅은 국가나 사회의 필요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며, 그 영웅으로 호명된 존재 자체도 그 신화 속에서 희생되어 가는 존재들이었다. 영화 속 이오지마에 깃발을 꽂은 영웅으로 조작된 인디언 아이라와 위생병 닥은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영웅의 거짓 선동 속에서 진짜 영웅들, 전장에서 무수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자리, 즉 “죽은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며 항변하곤 하였다. < 설리 > 역시 명백히, 이스트우드가 늘 묘사해왔던 영웅 신화를 해체하는 궤적에 있는 영화이다. 155명의 승객이 단 24분 만에 전원 구조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미디어와 대중은 즉각적으로 그를 ‘영웅’으로 추앙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그를 대중사회의 영웅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 앞에 두려웠으며, 불안과 회의 속에서 자기 확신을 하지 못한 채로 ‘두려움의 반복강박’(꿈에서 같은 자리로 자꾸만 되돌아가는 악몽을 표현하는 프로이트 용어)에 시달린다. 아내와의 대화 속에서 그는, 어쩌면 위원회 결정에 의해 퇴직금과 연금을 박탈당하고 소유하고 있는 빚과 건물을 잃을지도 모르는 노후에 대해 걱정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155명 전원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잘못을 저지를 뻔했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과 책무감에 시달린다. <설리>(2016) <아버지의 깃발>(2007) 가장 심플하고 명백해 보이는 이스트우드의 이번 영화 < 설리 >는 의외로 그의 가장 복잡하고 치밀하게 구조화된 걸작 <아버지의 깃발>과 같은 영화이다. 두 영화가 같다는 것은 서사적 구조와 테마, 그리고 ‘진짜’ 영웅들을 복권시키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설리>가 설렌버거의 악몽으로 시작했던 것처럼, < 아버지의 깃발 > 역시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노년의 닥(의무병 존 브레들리)의 악몽으로 시작된다. 꿈속에서 그는 2차 대전 중인 이오지마의 격전지에 홀로 서 있다. 고통에 찬 병사들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만 정작 그는 아무도 없는 전장에 홀로 서 있다. 그는 텅 빈 전장에서 두려움과 죄의식에 눈물을 흘리다 잠에서 깨어난다. 죄의식과 두려움의 반복강박에 시달리는 주인공들은 이제 진짜 역사와 기억을 증언해야 한다. 이스트우드는 그 방법론으로서 ‘플래시백’을 사용한다(이스트우드의 주된 수사학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플래시백은 과거와 현재를 서사적으로 연결하는 기능주의적 장치이지만, 이스트우드에게 플래시백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복권이자 진실의 구조이다. 그리고 때로는 죽은 자의 기억이자 증언이며 죄의식의 공유기법(서사적 시각화)이기도 하다. 먼저 < 아버지의 깃발 >은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소급하는 영화이다. 3명의 영웅 중 닥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과거의 시간을 추적하고, 살아남은 생존자들로부터 2차 대전 중 벌어진 진실을 추적하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증언과 기억에 따른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당시 이오지마의 영웅으로 위장된 아버지들이 결국 어떻게 국가로부터 이용당하고 버려졌는지, 그 과정에 그 아버지들이 어떠한 부대낌과 죄의식을 평생 강요당해야만 했는지를 기록한다. 파편적인 증언들은 영화의 중반부에 이르러 조각난 퍼즐이 맞춰지듯 하나의 진실로 그림이 그려진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가 걸작에 반열에 오른 진짜 이유는 영웅 신화의 진실을 폭로해서가 아니라, 진실의 순간 이후에 맞이하게 될 ‘애도와 상기’의 시간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아이라는 거짓된 깃발 퍼포먼스의 강요에 “죽은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말한다. “전장에서 내가 한 건, 내가 본 건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다. 난 영웅이 아니다.” 이 말과 함께 그는 국가에 의해 버려진다. 영화는 후반부 영웅으로 호명됐으나, 그 거짓 신화에 홀로 저항하고 거부했던 닥의 죽음을 묘사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 닥의 아들은 “세상에 영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릴 위해 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한 한 방식”으로서, 즉 애도의 방식으로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의 맨 마지막을 닥의 소망이미지로 대신한다. 잘려나간 시체들의 무덤이 아니라, 혹은 누군가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할 수 없는 전장의 두려움이 아니라, 평화로운 해변에서 아름다운 청춘의 모습으로 일군의 병사들이 자유롭게 수영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닥의 시선이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과 함께 오는 진짜 이오지마의 영웅들(평범한 군인들, 영웅 신화에 이용당한 병사들), 그리고 참혹한 전장의 풍경들. < 설리 >는 테마와 구조의 유사성을 공유하지만 정반대의 방식으로 같은 영화이다.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이며, 국가나 조직의 필요에 의해 영웅으로 조작된 사기극이 아니라, 오히려 회사로부터 손실의 책임을 강요당하는 일개 항공사 기장에 관한 영화이다. 국가나 대의명분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이 자신의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는 책무에 관한 영화이고, 그 과정의 완결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회의하고 두려워하는 보통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죽음을 이용해 영웅으로 올라서는 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통해 소소한 일상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수주의자로 낙인찍힌 이스트우드의 세계는 종종 남성 마초이즘과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적 이상을 찬미한다는 점에서 불편한 지점이 내재하지만, 그러나 우파 파시스트로 매도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시선과 태도가 존재한다. (심지어 한국적 정치 프레임에서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평가한다면 우파는커녕 좌파 극단주의자로 매도될지도 모른다. 전쟁의 광기와 불모함, 국가 권력의 폭력과 기만, 정치적 조작을 폭로하는 영화들, 기계적 시스템의 비인간성에 저항하는 영화들, 심지어 이주노동자의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거는 영웅이 등장하는 영화들이지 않은가) < 설리 >는 거대 담론이 아니라, 그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수행해내는 소시민들의 일에 대한 책무와 공동체적 연대로부터 진짜 영웅성을 발견해내려는 의지의 영화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 설리는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나’라는 영웅이 아니라, ‘우리’(승무원들, 승객들, 구조대원들)라는 평범한 사람들의 책무와 연대에 대해 언급하고, 엔딩 크레디트에 진짜 설렌버거를 통해 “155는 그저 생존자의 숫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의 집합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 설리 >는 죽음을 통해 진실을 피력했던 이스트우드가 이번엔 죽음에 거의 가 닿을 뻔했던 삶의 순간으로부터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삶과 희망은 이스트우드에겐 낯선 화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죽음과 절망의 반대극이라는 점에서 같은 이야기이다. 게다가 여전히 이 영화에서도 그는 젊은이들의 치기가 아니라 삶을 오래 살아낸 노장의 원숙함과 혜안이 사건을 해결하고, 냉정하고 수학적인 기계적 시스템의 세계(비행 시뮬레이션)가 아니라 ‘휴먼 팩터’라 말하는 인간적인 판단과 선택을 신뢰한다.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기자는 이스트우드와 톰 행크스에게 트럼프 선거기간,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작업할 수 있었는가를 질문했다. 이스트우드는 잘 알려진 대로 공화당원으로서 트럼프를 지지했으며, 톰 행크스는 민주당 지지자였다. 이스트우드는 자기가 겪어온 역사적 시기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의 변화과정을 언급하며, 적어도 그는 사람에 따라 다른 정치적 의견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피력한다. 이에 기자가, 타인의 정치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점에서 당신은 ‘리버럴리스트’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수긍했다. - 사족(그러나 < 설리 >가 올해의 베스트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 이스트우드는 < 설리 >에서 허드슨 강의 기적으로부터 2001년 9.11의 트라우마를 상기한다. 민항기가 뉴욕의 빌딩과 충돌하며 빚어진 참상의 이미지들은 이 영화 속에서 설렌버거의 악몽으로 재현한다. 두 재난은 모두 뉴욕이 주인공이었으며, 하나는 수천 명의 삶을 앗아간 재앙으로, 다른 하나는 숫자로 환원할 수 없는 삶의 미래로 이어졌다. 허드슨 강으로 비상착수하기 이전에 상황들, 설렌버거의 악몽과 환상, 그리고 실제 비상착수 당시 민항기가 강으로 저공 비행하는 순간의 위기를 직감한 불안한 목격자들의 시선 쇼트들은 명백히 9.11의 트라우마이자, 208초가 갈라놓은 죽음의 잠재적 이미지들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고기에 간신히 탑승했던 한 청년의 말처럼 ‘오늘은 해피엔딩’으로 귀결됐다. 불과 25분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1,200명의 구조자들이 사고기 주변으로 몰려왔다. 아침 출근 선박들과 전문 구조요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객을 가장 먼저 탈출시킨 승무원들의 행동들. 실제로 설렌버거는 승객들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침몰해가는 항공기 내부를 두 번이나 들어가 혹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승객들을 살펴봤으며, 제일 마지막에 빠져나왔다. 이 순간 우리에게 < 설리 >는 어쩔 수 없이 세월호와 겹쳐지고, 슬픔과 회한의 시간으로 내몰린다. 모두가 살아나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300여 명의 삶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미국의 출근 선박들이 사고기 주변으로 제일 먼저 달려갔던 것처럼 우리도 주변 어선들이 제일 먼저 달려가 그나마의 생존자들을 구출했지만, 그냥 거기서 멈춰버렸다. 제일 먼저 도망친 선장과 승무원들, 납득 불가능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건과 시간이 아직 그곳에 침몰해있다. 위정자들의 음모와 태만, 폭력이 여전히 거기에 있다. 이스트우드는 모두가 살아남은 허드슨 강의 기적으로부터 혹시 발생할지도 몰랐을 참사의 이미지, 죽음의 이미지를 자꾸 상기하며 현재의 희망에 대해 역설하지만, 우리는 그 반대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시대의 알레고리)에 따라 그 자리에서 수장당한 300여 명의 죽음에 대한 무력한 방관자로서의 트라우마, 죄의식과 분노.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이스트우드와 반대로 죽음 속에서 가상의 구원을 그려내는 것이다. 어느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으로 시작된 ‘희망의 고래(아이들을 제 몸에 실어 날아오는 고래 일러스트)’가 SNS에서 공유되고, 촛불을 든 광화문에서 가상의 증강현실로 등장하고, 다시금 어느 건축가에 의해 실제 ‘고래와 아이들’ 풍선으로 등장하기까지, 우리는 그저 가상의 상상물을 구축하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위한하고 기억하고 애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스트우드는 < 제이. 에드가 >에서 무소불위의 권력과 좌파 이념에 대해 폭력적인 척결을 자행했던 에드가 후버의 말을 빌려 이렇게 이야기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개개인이 소중하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다. 삶은 인간이 만든 시스템을 초월하는 의미를 지닌다.” “도덕이 무너지면 선한 자는 아무것도 못하고, 악한 자는 번창한다. 모든 시민들은 자신의 가정과 아이들에 대한 위협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과거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 사회의 미래는 비관적이다. 절대로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결코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