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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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 김용훈 , 2020)은 그 제목에서부터 자신이 어떠한 인물을 담고 있는지 밝히고 있다. 그 제목에 따르면 그들은 ‘짐승들’이다. 영화는 그들이 짐승이 되어가는 과정보다는 짐승들이 얽히고설키며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잔혹한 광경을 보여주는 일에 방점을 찍는다. 나는 이 잔혹한 풍경을 보면서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이 짐승들로 가득한 세계의 이치라고 말한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긴 하다. 하지만 생존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린 세계를 반복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야말로 ‘비평적 개입’을 포기하는 일이자 스스로를 짐승의 세계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어쩌면 <지푸라기라도…>는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 인물들이 지배하는 지금의 한국영화(또는 한국사회)를 또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징후인지도 모른다. <지푸라기라도…>는 돈가방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우리는 누가 이 돈가방의 주인인지 알지 못한다. 영화가 원하는 것은 이 돈가방의 주인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이 가방 안에 돈이 담기는 과정에서 탐욕에 눈먼 자들이 보여주는 짐승 같은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애인이 사라지며 짊어진 빚을 허덕이며 크게 한탕을 노리는 태영( 정우성 ), 그런 그를 이용해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은 연희( 전도연 ), 돈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사채업자 두만( 정만식 ), 하루하루의 생활비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중만(배성우)은 각자의 사연으로 돈가방을 차지하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물론 돈가방을 사이에 둔 쟁탈전에서 인물들의 광기어린 탐욕을 보여주는 것은 장르 영화의 클리세다. <지푸라기라도…>가 여섯 개의 장으로 에피소드를 나누고, 과거의 사연을 현재의 사건인 전개하는 트릭을 쓰며, 신체를 요란하게 절단하는 잔인한 장면 등을 보여주는 하드고어적인 표현을 차용하는 등의 잔재주를 부린다 해도 이 전형성에서 탈피하지는 못한다. <지푸라기라도…>는 돈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독하고 잔악해질 수 있는지 그리려 한다. 애인을 배신하는 것 정도는 애교에 가깝고, 차로 산 자를 깔아뭉개고 신체를 난도질하는 살인도 서슴치 않는다. 가진 것 없는 자에게 더 매정하게 구는 것이 자본주의의 이치고, 그래서 돈 앞에서 절박해지는 것이 없는 자들의 인지상정이긴 하지만, 인물이 절박한 것과 그런 그들의 행동이 설득력을 갖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들은 각자의 사연을 보여줄 뿐, 그것을 가지고 자신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불나방처럼 돈에 날아가 자신의 몸을 불태울 뿐이다. 그러니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의미한 피의 향연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그들은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설득력을 갖지 못한 절박함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고문 같은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지푸라기라도…>의 제목에 삽입되어 있는 ‘짐승’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알리바이 역할을 한다. 그들은 짐승이기 때문에 인간성이 거세되어야 하고, 그래서 돈가방 앞에서 자동기계처럼 자신의 탐욕을 분출하면 그만이다. 그들은 ‘살아남는 것’이 삶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지금 한국사회의 초상화다. 이러한 면에서 <지푸라기라도…>가 하나의 징후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 곡성 >과 < 부산행 > 이후 유행하는 좀비 영화에서 오로지 살아남는 일에 천착하는 인물들을 마주하곤 한다. 지금의 한국 영화가 관객에게 전시하는 것은 (유무형의) ‘괴물’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이다. <곡성>의 종구( 곽도원 )는 칼에 찔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왜 이런 파국을 맞이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부산행>과 <서울역>, < #살아있다 >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세계에서 인물이 할 수 있는 것은 안간힘을 다해 도망치는 것이 전부다. 한마디로, 오로지 생존만을 위한 전력 질주. <지푸라기라도…>와 일련의 좀비 영화 등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삶’이 아니라 ‘생존’의 절실함이다.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워질 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 영화에는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생존은 인간적 삶의 기본 전제다. 그렇기에 생존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아니고, 선도 악도 아니다. 생존의 추구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이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것과 그것만이 유일한 가치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것은 구분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푸라기라도…>은 그 엔딩에서 (원작과는 달리) 중만의 부인(진경)에게 돈가방을 선물한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돈가방의 존재를 몰랐던 인물에게 돈가방이 흘러 들어간다는 점에서 어떤 아이러니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결말은 영화적인 우연 그 이상이 아니다. 돈가방은 생존을 가능하게 할지라도 삶의 가능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삶의 희망이 아니라 서사적 기만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한국영화를 휩쓸고 있는 생존주의는 “사회적인 것의 성스러운 환상이 벗겨진, 인간의 생물학적 나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회적인 불가능이 생산하는 마음의 형식”(김홍중, <사회학적 파상력>, p.292)이다. <지푸라기라도…>가 절망스러운 것은 단지 생존주의에 빠진 인물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상상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절박한 인물을 낭떠러지 앞으로 몰아가는 지금의 한국 영화가 앓고 있는 병일 것이다.
사회복지학과 졸업을 앞둔 성희는 장애인 활동지원 아르바이트 활동 중 허리를 다치게 되고, 어떠한 산재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이용자로부터 해고당하게 된다. 학자금 대출, 생활비, 치료비 및 스페인 출국을 위한 자금 마련 등을 이유로 일을 그만둘 수 없었던 성희는 활동보조센터 담당자에게 산재 처리를 요구하지 않는 대신 일이 많지 않은 새로운 이용자 배정을 강력히 요구한다. 이후 하루 종일 의식 없이 누워만 있는 중증 장애인을 새 이용자로 배정받은 성희는 별 일 없이 업무시간을 채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지만, 성희의 형식적인 업무 수행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용자의 아들 현목과 갈등에 놓인다. 다른 일자리에서 비해서 비교적 높은 시급을 받고 있지만, 고용 불안정과 이용자의 부당한 업무지시에서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장애인 활동지원사와 장애인 수급비와 활동지원 서비스를 받고 있지만 보통의 삶을 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장애인 가족의 빈곤과 결핍. 이들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운 < 에듀케이션 >( 김덕중 , 2019)은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복지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로만 정의하기에는 여러 함의들이 내포되어 있다. 걷기 어려울 정도로 허리를 심하게 다쳤음에도 일을 쉴 수 없는 성희에게 장애인 활동지원사는 대학 졸업을 위한 실습 시간을 채워야하는 아르바이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성희가 직업의식이나 장애인 운동에 관한 사명감 없이 오로지 졸업을 위한 수단 겸 시급 높은 생계 수단으로만 활동지원 노동을 생각한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성희에게 깊은 정서적 유대와 감정 노동을 원하는 현목과 이를 거부하는 성희 이 둘 중 누가 더 잘못했다고 명확히 판단하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불협화음을 내다가 기어코 파열로 끝나는 <에듀케이션> 인물들은 신체적·정신적 한계로 인해 자유의지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현목 엄마를 제외하곤 자신의 입장만 앞세우는 경향이 크다. 가령 활동지원사의 시급이 다른 직종보다 높다는 이유로 가사노동과 친밀감을 요구하는 현목에게 성희는 “(활동지원사가) 가사도우미, 파출부는 아니다.” 식으로 맞서는 설정이 몇 번 등장하는데 상시 업무 외 업무를 강요받는 활동지원사의 열악한 노동 환경 및 고용 불안정을 생각하면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아직 정서적 돌봄과 지지가 필요한 미성년자 현목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는 성희가 야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용자(혹은 이용자 가족)와 활동지원사간의 과도한 친밀감과 그로 인해 형성된 공고한 관계는 활동지원 노동 현장에서 주요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고, 오히려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는 장애인의 자기 결정권과 자립을 방해한다는 의견 또한 제기되고 있다. 1) 그렇다고 성희와 같은 활동지원사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려드는 중증 장애인과 그(녀)의 가족들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무조건 근절할 수도 없는 형국이다. 필요 이상으로 타인의 일상에 끼어들고 싶지 않는 활동지원사 성희와 그녀에게 정서적 유대와 친밀감을 간절히 원하는 장애인 이용자 가족 현목. 허나 <에듀케이션> 속 성희와 현목의 갈등은 두 개인의 갈등 혹은 장애인 활동지원사와 장애인 이용자 (가족) 간의 문제를 넘어 현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 제도만으로는 장애인(가족)의 자립과 사회 활동 참여 증진이 어려운 현실과 맞물린다. 몸이 아픈 와중에도 밤낮없이 일해서 겨우 최저생계비를 면할 정도의 수입으로 먹고 살아야하는 성희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청년 도시 노동자의 비애를 대변한다.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시험 준비를 포기한 이후 스페인 이주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성희의 일상은 답답함과 무기력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막연하게라도 자신의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성희와 달리 중증 장애인의 보호자라는 이유로 많은 활동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는 현목의 상황은 더욱 참담하다. 자기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인 현목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는 있지만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성희와 자칫 잘못하면 엄마는 물론 스스로에게까지 위협을 가할 수 있는 현목의 관계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실패한 성희와 현목은 우려했던 대로 파국을 맞는다. 영화 <에듀케이션>은 장애인 활동지원 사업의 문제점을 전면으로 제기하기보다 복지 정책에서 완전히 소외된 청년 간의 갈등에 더 집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로 규정하고 이기적인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바쁜 성희와 자신의 미숙한 언행을 돌아볼 여력조차 갖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리는 현목. 승패 없이 서로에게 자괴감과 모멸감만 남기는 이들의 다툼은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각자의 불행을 이유로 자신의 입장만 내세울 뿐 정작 타인에 대해서는 몰이해로 일관했던 성희와 현목의 갈등을 극대화시키면서 엔딩 이후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한다. 과연 영화가 보여준 엔딩은 절망과 분노 밖에 남지 않은 혼돈의 끝인가 아니면 미약하게나마 새로운 내일을 기약하는 희망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까? 스포일러가 될 까봐 더 이상 언급할 수 없지만, 단언컨대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문제적 엔딩이다. 1) <‘활동보조 갈등’을 바라보는 3인 3색 시각들>, 에이블뉴스, 2013.12.16.
청진은 1930년대 후반부터 대도시로 급성장한 곳으로 1943년 인근의 함경북도 도청소재지인 나남읍을 포함하여 청진부가 되었다. 당시 이곳에는 8개관의 영화관이 있었다. 이는 경성 다음으로 많은 숫자로 급격한 도시화의 결과물이다. ① 청진좌(淸津座), 청진극장(淸津劇場) 청진의 대표적인 극장으로 연극과 영화 상영 외에도 다양한 행사들이 이곳에서 열렸다. 정확한 설립일은 알 수 없다. 1921년 무렵 이곳에서 부민대회가 열린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설립되었을 것이다. (<청진부민대회(淸津府民大會)>, 《매일신보》, 1921.05.04) 1932년 1월 23일 오후 11시 경 영화를 상영하던 중 필름에 불이 붙어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다 .(<淸津座全燒>,《朝鮮新聞》, 1932.01.26) 이후 재건되면서 이름을 청진극장으로 바꾼 듯 보인다. 청진극장은 청진부 서송향정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2층 벽돌건물로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쓰모토(松本浩德), 지배인은 마쓰모토(松本時雄)였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으며 총 객석수는 765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② 대화극장(大和劇場), 동보대화극장(東寶大和劇場) 동보대화극장은 청진부 포항정에 1936년경 3층 콘크리트 건물로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건립 당시 명칭은 대화극장이었으며 도호영화사가 극장을 운영하면서 동보대화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동보영화이며 지배인은 다카시마(高島次)이다. 총 객석 수는 678석이었다. 해방 이후 이름을 다시 대화극장으로 바꾸었다. ③ 제국관(帝國館) 청진부 북성정에 있던 제국관은 1926년 건립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35년 11월 27일 밤 영화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영사기사 조수 1명이 질식사 하는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으며 1938년에는 영사 중 발생한 화재로 영화관이 소실되기도 했다. 이후 재건된 제국관은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조필원(창씨명 祥原弼顯), 지배인은 조재정(祥原載正)이었으며 객석은 489석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④ 공락관(共樂館), 일본극장(日本劇場) 청진부 신암동에 건립된 공락관은 공회당 겸 극장으로 1924년 11월 개관했다. (<공락관낙성식(落成式)>, 《시대일보》, 1924.11.06) 극장 설립은 주식발행을 통해 자금을 모아 이루어졌으며 청진에서 조선인이 경영하던 대표적인 극장으로 관객들 역시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1934년 1월 7일, 온돌의 과열로 인해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을 당시 공락관의 운영자는 조필현(趙弼顯)이었다. 공락관이 전소되자 청진 시민들은 기부금과 은행대출로 총 공비 1만 3천원을 들여 새로운 극장을 낙성했다. 공락관에서는 영화와 연극 외에 공회당으로 각종 단체의 행사장으로 활용되었다. 박노홍에 의하면 2층 벽돌 건물로 무대도 연극하기 알맞았다고 하며 1940년대에는 연극과 악극으로 프로를 채웠다고 한다. 1943년 당시에는 이름을 일본극장으로 바꾼 상태였으며 흥행주는 마쓰시타(松下和三郞)였다. 총 872석의 극장으로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⑤ 소화좌(昭和座), 소화극장(昭和劇場) 소화좌는 청진부 포항정 청진역 바로 앞에 있었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35년 10월 청송유치원의 율동대회가 소화좌에서 개최된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35년 무렵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간도 대성중학교 후원 순회연주회(1936년 3월), 청진천주교청년회 주최 순교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성극 공연(1937년 8월), 협동예술좌 순회공연(1939년 10월)에 관한 기사가 발견된다. 1940년대 들어 소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듯 보이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키타 미노루(牧田稔), 총 좌석수는 616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⑥ 초뢰좌(初賴座) 청진부 초뢰정에 자리 잡은 대극장으로 1927년 나남극장주식회사가 설립했다. 나남극장주식회사의 취체역은 스기노(杉野政吉)였다. 영화상영관으로 큰 인기를 끌던 초뢰좌는 1932년 1월 22일 관객들의 실화로 전소되었다. 그러나 주주총회에서 재건축을 결정하여 관객 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근대식 극장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기노(杉野政吉), 지배인은 우치다(內田福次郞)이다. 총객석수는 948석의 극장으로 해방 후에도 존속했다. ⑦ 청진문화극장(淸津文化劇場) 건립일은 알 수 없다. 청진부 포항정에 있었던 극장으로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이토(齊藤武久), 총 객석수는 350석이었다. ⑧ 중앙관(中央館) 청진부 수남정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개관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다케무라(竹村英作)이며 총 객석수는 85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나남극장(羅南劇場) 1943년 청진부에 흡수된 나남읍에 위치했던 극장으로 1920년 말 설립되었으나 1922년 2월 14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손해액은 3만원에 달했다 .(<羅南劇場全燒>, 《京城日報》, 1922.02.16) 청진 외에 함북지역의 다른 극장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⑩ 유취좌(遊聚座) 성진의 유취좌는 1934년 주식발행을 통해 만들어진 주식회사유취좌에서 설립한 영화관으로 성진부 성진읍 본정 120번지에 있었다. 설립 당시 대표는 나츠메(夏目十郞兵衛)였다. 유취좌의 낙성은 1935년 2월 5일에 이루어졌는데 총 건축비는 1만 8천원이 들었다. (<성진 유취좌 낙성(落成)>, 《조선중앙일보》, 1935.02.16) 한동안 성진부 유일의 흥행장이었기에 일본인과 조선인들 모두 이 극장을 활용하여 각종 행사와 오락들을 즐겼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야타(宮田資嘉吉), 지배인은 마츠모토(松本豊治)이며 총 객석수는 568석이었다. ⑪ 성진문화극장(城津文化劇場) 성진부 본정에 있었던 극장으로 언제 개관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마나 마사오(山名正雄)였으며 총 객석수는 300석이었다. ⑫ 나진극장 나진부 욱정에 있었던 극장으로 언제 개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33년 10월 폭풍으로 전괴되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개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나진극장은 재건되었는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니하라(谷原信夫), 총 객석수는 905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⑬ 아오지극장 아오지읍 회암동에 있던 극장으로 건립연도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회암흥행사(灰岩興行社), 지배인은 마츠오카(松岡茂樹), 총 객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후 까지 존속했다. ⑭ 회암극장(灰岩劇場) 아오지읍 회암동에 있던 극장으로 건립연도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토(佐藤惣五郞), 지배인은 가나이(金井順郞), 총 객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⑮ 만년좌(萬年座), 회령극장(會寧劇場) 회령의 만년좌에서는 1922년 무렵부터 공연기록이 발견된다. 이를 통해 1920년대 초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1928년 당시 만년좌의 주인은 일본인 마에다(前田政)였다. 마에다는 만년좌를 중심으로 주식회사 형태의 극장 설립을 추진하여 1932년 주식회사 회령극장이 설립된다. 같은 해 만년좌를 대신하여 회령극장이 신축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회령극장주식회사, 지배인은 이와모토(岩本三峯)였다. 이와모토는 창씨한 조선인이라고 전한다. 총 객석수 745석의 극장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⑯ 웅기좌(雄基座) 웅기읍에 있는 극장으로 1930년 남녀유학생웅변대회가 그곳에서 개최된 것으로 보아 그즈음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타카 타카노리(位高隆則)이며 총 객석수는 506석이었다. 해방 후 웅기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⑰ 주을극장(朱乙劇場) 주을읍에 있던 극장으로 구체적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 그 내역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27년도에 공연한다는 소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카미야(神谷賴正)이며 총 객석수 880석의 극장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⑱ 영안극장(永安劇場) 영안읍에 있던 극장이다. 설립연도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사키(佐佐木太一郞)이며 총 객석 수는 285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⑲ 길주극장(吉州劇場) 길주읍에 있는 극장으로 1939년 협동예술좌의 순회공연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동수(東秀)이며 5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⑳ 남양극장(南陽劇場) 1940년 무렵 온성군 남양읍에 설립된 극장으로 김강연(金康燕)이 건립했다. 극장 설립에 맞춰 남양읍에서는 남양극우회가 창립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강연(창씨명 金城康燕)이며 총 객석수는 5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㉑ 무산극장(茂山劇場) 1940년 무렵 무산읍에 설립된 극장이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요나가(豊永保)이며 총 객석수는 703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5.02.16. 성진 유취좌 낙성(落成) 【성진】 성진의 유일한 오락긔관인 유취좌(遊聚座)는 작년 十一월 중부터 공비 一만 八천여원을 드려서 건축 중 준공되여 지난 五일 낙성식을 성대히 거행하엿다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22.02.17. 나남극장 전소(全燒), 손해는 삼만원 지나간 십사일 오젼 열시에 라남(羅南)에 오직 하나 되는 연극쟝 오락쟝에셔 불이 나셔 건물 젼부를 태워바렷다는대 손해는 약 삼만원이오 원인은 알 슈가 업다는대 그 건물은 개인의 쇼유인바 대졍 구년 말에 낙셩된 극쟝으로 다시 지으려면 상당히 날짜가 걸니겟다더라(나남) [자료] 《동아일보》, 1928.01.17. 민중기관 『공락관(共樂舘)』, 유지회(維持會)를 조직하고 대활동 함북 청진항에 잇는 공락관은 청진에 거주하는 시민 전체의 힘으로 건축된 집인 만치 그 역할이 공회당과 여(如)하야 시민들의 집회와 각 흥행단체에 마다 편의를 준지 五개성상이나 되엇스되 건축 당시의 부채를 우금(于今)껏 변상(辨償)치 못하야 채권자들의 독촉이 심한 일방 또한 유지도 곤란케 되엇슴으로 차(此)를 애석히 여기는 유지 몃 사람은 공락관유지회를 조직하고 활동을 하든 터에 금번 동회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내(來) 음(陰) 정초(正初)를 기(期)하야 상(賞)타는 활동사진대회를 개최키로 결정한 후 대활동을 개시하얏다는데 동 유지회는 사회 각 방면 인사들의 동정이 잇기를 원한다더라. (청진) [자료] 《동아일보》, 1934.01.09. 청진 유일의 집회소 공락관이 전소(全燒), 원인은 온돌, 손해는 一만 五천, 물건 끄내다 감독 소사(燒死) 【청진】 지난 七일 오전 一시경에 시내 신암동(新岩洞) 좌청용 끝에 웅입하엿든 청진 시민의 소유인 동시에 역사적 집회 장소인 공락관(共樂館)은 의외에도 숙직실 온돌에서 발화되어 말숙하게 빈터만 남기고 전소가 되엇다. 그 공락관에 감독책임 잇는 임덕재(林德在)(四三)는 무슨 중요한 물품이나 잇섯든지 불붓는 집속으로 들어갓다가 무참하게도 나올 길을 찾지 못하야 공락관과 함께 타버리엇다. 이 급보를 접한 소방조와 청진경찰서에서는 맹렬한 활동을 개시하엿으므로 마침 화근이 인가에는 범치 아니하엿다하며 그 손해는 대개 一만 五천원가량이라 한다. 이 공락관은 대정 十三년에 청진 유지가 모여 청진에 중심한 집회장소가 없으므로 크게 유감으로 녀겨 곧 발기하야 동년 十一월 경에 준공한 것이라 하며 현재 五천원의 보험에 들엇다는데 관리 대표인 김병윤(金秉倫)씨는 불원간 대책 협의회를 열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28.03.01. 지방논단, 공락관 문제, 일반시민에게 고함 / 청진 일기자 청진! 북선에서 가장 자랑하는 良港이오 북간도와 노령을 접경으로 물화 교통 상 관문일 것이다. 또한 여기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청진을 관찰할 때 기후로나 지역으로서 북선(北鮮)을 중심으로 하고 어느 방면으로든지 활동하랴고 하면 먼저 청진! 그곳에 간판을 부치는 것이 아닌가? 반면(反面)에서 이곳의 주인이오, 더욱 조선인의 현재나 장래를 생각한다면 열혈의 정성과 비상의 노력이며 공고한 단결을 요하는 것은 재론할 바 업슬 것이다. 그러타면 청진 일반 시민은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그 일례를 들기 위하야 기자는 이제 공락관유지회 흥행부와 일반시민의 태도를 좀 적어 보려고 한다. 二 먼저 공락관은 누구의 집이며 그 집의 사명은 얼마나 중차대한 것이냐? 조선인만 일만오천의 인구를 산(算)하는 청진에서 시민의 유일한 집회장소인 공락관은 오직 청진시민의 품속을 떠나서야 어떠케 그것이 조선인의 공회당이라는 존재를 시인할 수가 잇슬 것이랴! 큰일! 작은일? 이제 당장에 죽는다고 하야도 모여서 단결의 성(聲) 한번이라도 외쳐볼 곳도 공락관이오, 의분에 뛰고 참패자의 하소연을 서로 할 곳도 공락관이 아니냐? 그리하야 이 공락관 때문에 몃 사람의 피와 땀을 모아서 청진 공락관유지회 흥행부를 조직하고 우리의 어린이들이 색동저고리를 닙고 뛰어다니는 구(舊) 정월 一일부터 활동사진흥행을 시작하야 『빡따드의 도적』 『황금광시대』 『따크라대왕』 『동도』, 이것을 차례로 개봉하야가지고 지금까지 북선 몃 개소를 순회하는 중이다. 일반 단원이 북풍한설을 무릅쓰고 갖은 고통을 바드면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청진이란 제 곳으로 돌아올 때 누가 따뜻한 악수한번이라도 하여 주엇든지? 하는 기억조차 그들에게는 업다고 한다. 더욱이나 공락관에서 흥행을 하게 되면 어느 사람이든지 그들을 일종 풍류랑들의 작희(作戲)로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三 청진에 있는 유지라고 자처하는 제군! 사람은 언제든지 참 사람이 되기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공락관 그것이 제군들이 보기에는 풍류랑들의 작희장으로 보이는지? 혹은 어떤 이색이족(異色異族)의 향락장으로 보이는지? 나는 이곳저곳에서 날마다 듯는다. 술집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색녀의 웃음소리에 장단을 마추어 술잔을 쉴 새 업시 할트면서 뼈 업시 안저잇는 소위 유지 자칭 신사인 제군들의 추태망동의 그 소식을! 마작대회에서 밤은 새우고 매음녀의 밀실에서 낙원을 찾아보려고 애쓰는 제군아! 사회 그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기에 노력하기를 절실히 늣겨야 할 것이다. 四 반성하라! 사람이 되라. 유산자 유지 신사 제군이어! 매음녀의 누각이나 색주가의 발전을 축복하기에 급급하지 말고 공회당인 공락관의 발전은 고사하고 개인의 손에 방매되랴는 죽어가는 그 목숨만이라도 구하여라. 도박으로 천원이니! 칠백원이니 하지말고 진정한 선(線)에 서서 인간다운 일기를 작성하라 비록 자신은 대아를 망각하고 장래나 현재에 생의 의의를 모를지라도 두상(頭上)에 떠도는 대공리의 벼락을 면할 수 업슬 것을 각성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청진의 제군이어! 시각으로 비참한 패배의 설움을 늣긴바 있거든 분초를 다투어 반성 행진 성공 있기에 힘쓰기를 바라는 바이다.
조이예환 감독의 < 불빛 아래서 >(2017)는 흔히 ‘홍대’로 불리는 인디 음악 씬에서 활동하는 세 밴드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불빛 아래서>를 ‘인디밴드 생태보고서’ 정도로만 규정하기에는 이 영화가 가진 함의가 상당해 보인다. 무대 위에서는 한없이 멋있게만 보이는 뮤지션들의 허당기 넘치는 일상과 다소 지질해 보이는 모습까지 보여주며, 흡사 리얼 예능 프로그램 같은 재미를 선사하는 <불빛 아래서>에는 크게 세 종류의 밴드가 등장한다. YB(윤도현 밴드) 테크니션 출신으로 갈고 닦은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독보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하며 ‘한국대중음악상-올해의 신인상’ 등 굵직한 상을 휩쓸었던 로큰롤라디오와 홍대 밴드로는 드물게 대형 매니저먼트 산하 레이블과 전속 계약을 맺고 공중파 포함 각종 오디션 경연 프로그램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웨이스티드 쟈니스, 락 스타가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홍대 인디 씬에 진입한 청년밴드 더 루스터스. 현재 인디 밴드들의 동향과 흐름을 영화에 출연하는 세 밴드로 압축해놓은 것 같은 <불빛 아래서>가 내린 결론은 인디밴드 생태계 내에서 더 주목받던 그렇지 않던 모두가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다. <불빛 아래서>가 주목한 로큰롤라디오와 웨이스티드 쟈니스는 그들 스스로도 인정한 것처럼 홍대 밴드 중 꽤나 잘 나가는 케이스에 속한다. 로큰롤라디오 같은 경우에는 매년 국내를 대표하는 락 페스티발 메인 스테이지 무대에 꾸준히 오를 정도로 실력과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해외에도 진출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조차 순수 공연·음악 활동만으로 버는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차기작을 준비하기 위한 창작·연습 활동에 전념하기에는 매우 빠듯해 보인다. 데뷔앨범으로 주목을 받아도 각종 오디션 출연과 아르바이트 활동으로 차기작 발매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심지어 해체로 이어지는 <불빛 아래서> 출연 밴드들의 흥망성쇠는 홍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인디밴드들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대형 메이저에서 기획, 제작한 작품만 돈을 벌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기형적인 구조는 비단 음악계에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라 현재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대다수 사람들이 처한 현주소다. 올해 초 6년 만에 정규2집 앨범을 발매한 로큰롤라디오는 모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불빛 아래서>가 첫 촬영을 시작한 2013년 당시보다 홍대에서 설 수 있는 무대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활동하는 밴드 수도 급감하는 현상을 토로한 바 있다. 홍대 클럽들이 계속 문을 닫는 이유는 천정부지로 치솟는 임대료와 젠트리피케이션 영향도 분명 한 몫 하지만, 음악으로 주목을 받고 활발히 공연을 이어간들 인디음악을 수용하고 소비하는 시장의 부재로 다음 활동을 쉽게 기약할 수 없는 현실은 밴드들의 미래를 더욱 어렵게 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밴드들의 한탄과 자조로 흘러갈 것 같은 영화는 의외로 다른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하고 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음악밖에 없고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 있기에 돈 빼고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인디 음악인들의 얼굴에는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진짜 사랑하고 즐기는 자의 자부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비록 오늘은 고기가 잘 잡히지 않더라도 내일도 모레도 한결같이 배를 타고 나가 만선을 꿈꾸는 뱃사람처럼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뮤지션들의 일상을 가까이서 지켜본 <불빛 아래서>는 이렇게 말한다. 현실 대신 꿈을 좇아 살아가는 뮤지션들의 삶만 힘들까. 무엇을 하던 부모에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지 않으면 힘든 세상,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며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그 순간을 즐기며 살아가면 그걸 로도 괜찮지 않을까. 무대 위 카리스마를 완전히 걷어낸 뮤지션들의 평범하면서도 재기발랄한 일상에 웃고 울다가 특별해 보일 것 같은 그들의 삶도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나만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니었음을 스스럼없이 위안 받게 되는 영화.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제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 청춘들의 자화상을 다룬 <불빛 아래서>는 인디밴드만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과 꿈, 실낱같지만 선명한 희망이 있었다.
2002년 | 태원엔터테인먼트 감독: 정흥순 | 각본: 정흥순 최해철 | 각색: 김영찬 | 제작: 정태원 | 기획: 권영락 유정호 | 촬영: 김윤수 | 미술: 오상만 | 음악: 박정현 CAST 박대서: 정준호 | 장진경: 김정은 | 장인태: 유동근 | 장석태: 성지루 | 장경태: 박상욱 | 장 회장: 박근형 2001년 < 조폭 마누라 >( 조진규 )에서 시작된 2000년대 충무로의 ‘조폭 코미디’ 바람은 < 가문의 영광 >(정흥순. 2002)에서 정점을 맞이합니다. 로맨틱 코미디와 조폭 영화를 결합한 <가문의 영광>은 2012년까지 10년 동안 다섯 편의 시리즈로 이어졌죠. 그 중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건 물론 1편이고, 김정은은 ‘나 항상 그대를’ 장면과 함께 영화계에서도 톱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현장 공개는 촬영이 75퍼센트 정도 진행되었던 7월의 더운 여름날, 양수리의 한 레스토랑에서 이뤄졌습니다. 대서(정준호)와 진경(김정은), 양가의 상견례 장면이었죠. 대서의 아버지( 심양홍 )와 어머니(김해숙), 그리고 진경의 세 오빠와 아버지(박근형)가 처음으로 만나는 신입니다. 깡패 집안이랑 사돈을 맺을 수 없다고 버티던 대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릅니다. 반면 장씨 집안 남자들은, 마치 조직 이권을 둘러싼 협상 테이블에 참석한 건달들처럼, 거친 행동과 말투로 사돈들을 제압하죠. “아버지, 제 칼을 쓰시죠.” 식탁에 놓인 스테이크를 자르려는 쓰리제이 회장이 나이프가 영 시원치 않다고 하자, 세 아들이 재빠르게 각자의 연장을 꺼내 놓습니다. 더구나 샛째 경태(박상욱)는 다리 쪽에 비수처럼 감춰놓은 칼을 꺼내 대서 가족을 충격으로 몰아 넣습니다. 그러자 장 회장은 건네 받은 칼로 웃음을 머금은 채 스테이크를 난도질합니다. 상견례라고 하지만 진경은 마치 결혼식이라도 하는 듯, 웨딩 드레스라고 해도 손색 없을 하얀 드레스를 입고 부케까지 든 채 등장했습니다. 장면 내내 거친 오빠들 사이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은 내숭일 뿐, 맨손으로 뱀을 잡는 ‘강한’ 여성입니다. 정흥순 감독과 김정은이 연기 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애드립이 많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영화에서 김정은은 거의 애드립을 하지 않았습니다. “불필요한 애드립은 아예 안 하니만 못해요. 욕심을 부리다간 낭패를 보게 되죠. 영화의 흐름을 해치는 것은 물론, 편집 과정에서 잘려나가기라도 한다면 연기를 하다 만 것 같은 느낌만 남으니까요. 전 단지 제가 가진 말투로 편안하게 연기했어요. 가끔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철저하게 연습하거나 구사하지 않았어요. 캐릭터를 재밌게 살리는 게 관건이었으니까요.” 이 시기 김정은은 TV 연기와 CF 이미지에서 조금씩 영화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영화는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에 제가 잘 하면서 또한 사람들도 좋아할 수 있는 장르를 선택하고 싶었죠. 물론 코미디 장르가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어필 할 수 있는 저의 매력은 코미디 연기였어요. 전 연기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아요. 그래서 캐릭터의 색깔을 갑작스럽게 혹은 억지로 바꾸는 건 위험하고 또 싫어요. 전 욕심도 있고 열정도 있어요. 조심조심, 차근차근 저에게 맞게 바꿔가고 싶을 뿐이에요.” 1990년대 TV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정준호는 < 아나키스트 >( 유영식 , 2000)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쪽에 진출했고 < 두사부일체 >(2001, 윤제균 )과 <가문의 영광>은 그를 흥행 배우로 만듭니다. <가문의 영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배우는 다름 아닌 첫째 장인태 역의 유동근이었습니다. ‘왕' 이미지가 강했던 그는 이 영화에서 대변신을 하죠. 코믹하면서도 느물느물한 바람둥이 인태가 바로 그 역할인데요, 1980년대 이후 충무로를 떠났던 그는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장에선 어떤 배우들보다도 열심히 시나리오를 분석해서, 말없이 면학 분위기를 조성했죠. 정흥순 감독은 액션, 코미디, 로맨스가 버무려진 맛깔스런 영화를 만들겠다는 게 목표였습니다. 현장에선 부드러운 모습으로 배우들의 자연스럽고 편안한 연기를 이끌었는데요, 틈틈이 배우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애드립과 색다른 아이디어를 현장에서 만들어냈습니다. 쓰리제이 가문의 위풍당당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진경은 무엇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네요. 장 회장이 반갑게 악수를 청하자 대서의 아버지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손을 잡습니다. 하지만 인륜지대사인 결혼을 천천히 생각해보자는 대서 아버지의 제안에 성질 급한 장 회장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집니다. “혹시 시방, 우리 딸내미가 맘에 안 드신다. 이런 말씀입니까?” 깡패 서너 명쯤은 문제없다고 큰소리쳤던 대서 아버지, 무안한 헛기침만 할 뿐입니다.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발견되자 석태(성지루)는 웨이터를 부릅니다. “아야, 너 이것이 머시냐.” 죄송하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쌍한 웨이터는 석태에게 붙잡혀 어딘가로 끌려갑니다. 이때 막내 경태가 한 마디 거듭니다. “아버지, 오늘 여기 서비스가 영 거시기 헌디 확 엎어버릴까요?” 두 동생을 보며 큰형 인태는 흐뭇한 웃음만 짓습니다. 제작자인 정태원 대표가 현장을 찾았습니다. 김정은은 <가문의 영광>에 이어 < 나비 >( 김현성 , 2003)에서도 태원엔터테인먼트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정준호는 < 흑수선 >( 배창호 , 2001)에 이어 <가문의 영광> 그리고 드라마 <아이리스>(2009)까지 정 대표와 함께 했습니다.
한 소녀가 돌연 사라졌다. 경찰을 비롯하여 실종된 소녀의 엄마( 서영화 ), 학교 교사, 학생들 모두 실종된 소녀와 늦게까지 있었던 영희( 전여빈 )을 의심한다. 심지어 당시 영희와 함께 있었던 한솔( 고원희 ) 또한 영희가 소녀의 죽음을 부추겼다는 증언으로 영희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김의석 감독의 < 죄 많은 소녀 >(2017)는 ‘증명’의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사라진 소녀 경민( 전소니 )이 투신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경민의 죽음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자신은 경민의 선택에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증명하려 들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경민이 투신하기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주변 사람들이 경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을 영희에게만 묻는 탓에, 영희는 경민의 죽음을 슬퍼할 틈새도 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 죄 많은 소녀 >의 영어 제목은 <After My Death>다. 직역하면 ‘나의 죽음 이후’로 번역되는 영화는 중의적 해석을 내포한다. <죄 많은 소녀>는 강물에 투신한 경민의 죽음 이후의 이야기다.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죄 많은 소녀가 된 영희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영화의 출발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말을 하지 못하는 영희가 학생들 앞에서 수화로 인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살 시도를 벌인 영희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시퀀스 초입에서 반복 재생된 이 장면은 오프닝과 달리 자막이 곁들어져, 수화를 모르는 교사와 학생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영희가 돌아온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완벽한 죽음을 완성하기 위한 귀환’. 영희를 포함한 극 중 인물들은 모두 경민의 죽음에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다. 워킹맘인 경민의 엄마는 바쁘다는 이유로 딸에게 소홀히 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다. 영희는 자신을 좋아한다는 경민의 고백에 죽음으로 너의 사랑을 증명해보라는 무심한 한마디를 건넸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영희와 경민 사이를 질투한 한솔은 경민을 두고 영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보라고 조롱한 바 있다. 경민의 투신 이전에 이미 4명의 학생의 자살을 경험한 학교는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행여나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봐 지레 겁이 난 학생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희생양을 만드는데 몰두한다. 이들 중에 경민의 죽음을 특별히 부추긴 사람은 없다. 동시에 경민과 관련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방조자다. 동시에 그들은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는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경민의 투신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특정 인물을 지목해 단죄하고자 한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죄인으로 지목한 사람을 공격하고 손가락질하는 행위 또한 내가 경민의 죽음에 얼마나 아파하고 괴로워하는지에 대한 ‘증명’이다.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치는 토끼몰이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토끼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죽음’ 이다. 그들을 위해 죽여주거나 아니면 자신이 먼저 죽던가. 경민이 실종된 다음 날, 자신의 생리통을 믿지 않는 보건 교사에게 질 밑에 묻힌 피를 보여주며 생리 중임을 증명했던 영희는 경민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해를 택한다. 영희의 자살시도는 영희에게 쏠렸던 의심을 일시적으로 분산시켰지만, 완전히 해소시키지는 못한다. 더 이상 영희를 경민의 죽음을 부추긴 죄인으로 몰고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또 다른 타깃을 찾는다.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진 죄인에게 영희에게 씌웠던 죄를 뒤집어씌우고자 한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김의석 감독은 몇몇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 죄 많은 소녀 >를 통해) 모두가 패배하는 과정을 담고 싶었다.”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죄 많은 소녀>의 인물들이 취하는 행동은 크게 두 가지이다. 경민의 자살을 부추기지 않았고, 그 아이의 죽음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학을 하거나 자신은 경민의 죽음 혹은 영희의 자살 시도와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희생양을 만들어 위기를 모면하고자 한다. 스스로 세상을 등진 사람의 선택을 남은 자들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은 어느 누구의 특정한 잘못도 아니요, 이유가 있다면 모두가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나약한 인간들은 다른 이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려 든다.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까지 홀로 괴로워했던 누군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기 전에, 서로를 향한 의심과 질책만 남은 세상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다. 애도와 믿음이 사라진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죄인이 된 소녀는 죽음 아니면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던 세상을 향한 슬픈 복수를 감행한다. 그 이전에 또 다른 소녀는 자신이 혼자 외롭게 끙끙 앓다가 강물에 뛰어들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진 두 소녀 중 누가 죄 많은 소녀일까. 신뢰와 믿음을 잃어버린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사람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 < 죄 많은 소녀 >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나약한 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1980년대 충무로의 가장 독특한 발명품이라면 아동용 SF 액션 영화일 것이다. ‘연소자’ 관객층을 위한 영화들이 없던 건 아니었다. 1970년대 < 로보트 태권 V >( 김청기 , 1976)를 시작으로 본격화된 로봇 애니메이션은 1980년대에도 꾸준히 제작되었고, < 하늘나라 엄마 별이 >( 이영우 , 1981)나 < 저 하늘에도 슬픔이 >( 김수용 , 1984) 같은 신파 가족 영화도 명맥을 이었다. 이때 < 외계에서 온 우뢰매 >(김청기, 1986)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시작된 아동용 SF 액션 장르 영화들은, 사실 수많은 요소들의 기묘한 혼합이었다. 일단 애니메이션에서 완전히 분리되지 못했다. 두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당대의 아동용 SF는 장르적 시도이었을까, 아니면 애니메이션의 제작비를 낮추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까. SF 액션을 만들다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부분을 애니메이션으로 채운 것일까, 아니면 기존의 로봇 애니메이션에 일본 특촬물의 콘셉트를 결합시킨 것일까. 후자 쪽에 좀 더 기울긴 하지만, 아무튼 그 결과물은 실사 촬영과 조잡한 그래픽, 애니메이션과 초보적인 미니어처 촬영과 심하게 티 나는 합성 장면이 뒤엉킨, 가히 포스트모던하다고 할 수 있는 텍스트였다. 1. 하늘을 나는 에스퍼맨. 한국영화의 대표적 슈퍼히어로다. 2. 우뢰매 로봇의 위용. 3. 박사 캐릭터는 < 우뢰매 > 시리즈를 비롯 이 장르의 빠지지 않는 캐릭터다. 엄용수는 <우뢰매> 시리즈와 < 흑성마왕과 슈퍼왕자 >( 박옥상 , 1987)에 박사로 등장한다. 참고로 그는 화학공학과 출신이다. 4. < 우뢰매 > 시리즈의 보미는 당시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던 ‘국민 누나’였다. 걸 그룹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세또래’의 멤버인 우윤아 가 역할을 맡았다. 내러티브 부분엔 < E.T .>(스티븐 스필버그, 1982)의 개봉과 TV 시리즈 <브이>(1985) 방영 이후 불기 시작한 ‘외계인 열풍’이 가세했다. 1980년대는 UFO나 외계인이 비로소 한국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진입한 시기인데, 아동용 SF는 그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7~8년 동안 집중적으로 쏟아진 한국형 SF는 죄다 외계인이 등장했다. 스토리 라인 역시 천편일률적이었는데,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1. 은하계에서 외계인이 지구로 온다. 2-1. 그들은 지구의 그 무엇을 가져가려고 온 침략자이다. 2-2. 그들은 사정이 있어 지구에 불시착한 망명객이다. 이때 외계의 악당들이 따라온다. 3. 지구의 슈퍼히어로가 외계의 악당을 제압한다. 4. 괴짜 과학자와 용감한 아이들이 가세한다. 2-2의 경우, 외계인과 아이들 사이엔 우정이 싹튼다. 5-1.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지구를 지켰다. 5-2. 지구를 지켰고, 착한 외계인과 지구 아이들의 슬픈 이별이 이어진다. 이외에도 다양한 영향력이 있었다. SF라곤 하지만 히어로와 악당의 대결 콘셉트는 무협 영화에서 왔다. 그들은 외계가 아니라 마치 소림사에서 온 듯했고, 각종 권법을 구사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생경한 광경이었다. 여기에 슬랩스틱 코미디가 결합되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심형래의 영향이었다. 당시 설문조사를 하면 아이들 사이에서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과 동급이었던 심형래 의 인기는, < 우뢰매 > 시리즈 탄생의 중요한 토대였다. 그의 장기는 넘어지고 엎어지고 미끄러지는 몸 개그. 심형태의 성공 이후, ‘뽀식이’ 이용식 , ‘밥풀떼기’ 김정식 , ‘공포의 삼겹살’ 김형곤 , ‘맹구’ 이창훈 그리고 ‘호랑나비’ 김흥국까지, 아이들의 지지를 받았던 연예인들이 이 장르에 뛰어들었고 수많은 개그맨이 조연과 악당으로 활약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완구 업체였다. < 외계에서 온 우뢰매 > 시리즈의 뽀빠이 과학, < 은하에서 온 별똥 동자 > 시리즈의 건양 과학 교재사, < 스파크맨 >( 김경식 , 1988)의 삼성 교재 완구사, < 우주의 용사 반달 가면 >( 임정호 , 1991)의 정일 과학 등 제작비는 영화를 통해 완구 판매를 노리는 업체의 주머니에서 나왔고, 이런 물적 토대는 이 영화들의 많은 부분을 결정했다. 일설에 의하면, 장난감을 만드는 금형을 일본에서 들여왔기에 ‘어쩔 수 없이’ 영화 캐릭터도 일본 것을 베낄 수밖에 없었다는 것. 우뢰매부터 시작해 수많은 로봇과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이 표절 시비에 시달렸던 건 그런 이유인데, 아무튼 완구 업체의 전략은 적중했고 새로운 시장을 형성한다. 영화와 장난감이 결합된, 한국영화 최초의 본격적 부가 시장 탄생이었던 셈이다. < 우뢰매 > 시리즈가 나왔던 1986~93년 동안 등장했던 아동용 프랜차이즈들. SF 이외의 장르도 포함시켰다. 당시 이 프랜차이즈들은 1년에 두 편씩(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내놓기도 했다. 1. 영원한 ‘데일리’ 천은경. <우뢰매> 시리즈 1, 3, 4, 8편에 출연했다. 2. 5편의 ‘데일리’였던 이혜진 . 3. 1987년 3편에 외계인 ‘삐용’으로 등장한 강리나 . 이후 그녀는 섹시 스타로 부상한다. 당시 천은경 , 이혜진 , 강리나를 비롯 < 은하에서 온 별똥왕자 3 >( 석도원 , 1988)의 우연희 , < 바이오맨 >의 신미아 , <우뢰매> 6편의 데일리였던 김종아 등은 성인용 영화와 아동용 영화를 겸업했다. 석도원, 방순덕 , 조명화 감독들도 마찬가지였다. 4. <우뢰매> 시리즈 최고의 파격 캐스팅이었던 7편 < 돌아온 우뢰매 >( 임종호 , 1992)의 이봉걸 . ‘인간 기중기’였던 씨름 선수 이봉걸은 외계인 ‘마주기’로 등장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 흐름을 살펴보면 일단 1986년 < 외계에서 온 우뢰매 >의 시작이다. 1980~85년에 약 30편 정도 장편 애니메이션이 극장 개봉을 했는데, <외계에서 온 우뢰매>가 등장하면서 아동 영화 시장은 실사 쪽으로 급격히 이동했다(1986~89년에 애니메이션은 대여섯 편에 불과했다). 공식 기록은 서울 개봉관 관객 5,527명이지만, 이 영화는 ‘상영이 가능한’ 전국 각지의 수많은 공간에서 공개된, 풍문에 의하면 100만 명 이상이 보았다는 영화였다. 이처럼 1980년대 아동용 SF는 기록 이상의 위세를 지니고 있었으며, 미취학 아동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10세 이하 어린이 시장에선 절대적인 콘텐츠였다. 그 힘은 비디오 대여점 시장까지 이어졌는데 1990년 전후 시기엔 극장 개봉을 거치지 않은 OVA 마켓이 형성된다. 여기서 <반달가면> 시리즈는 흥미로운 사례다. 대부분의 프랜차이즈가 극장에서 비디오 시장으로 넘어가지만, < 반달가면 >은 역주행을 했던 것. 1~2편인 <전설의 용사 반달가면>(임종호, 1990)과 <신비의 용사 반달가면>(임종호, 1991)은 비디오 영화였지만, 3편인 < 우주의 용사 반달가면 >(임종호, 1991)은 극장용으로 제작되었다(이후 다시 비디오로 돌아가 6편까지 제작되었다). < 외계에서 온 우뢰매 >가 포문을 열자 봇물이 터졌고, 한국영화는 비로소 장르 프랜차이즈의 시대가 열렸다. 어른들을 위해 < 애마부인 >과 < 산딸기 > 시리즈가 있었다면, 아이들을 위해선 <우뢰매>와 <영구> 시리즈가 등장한 것이다. 여기서 심형래 는 수많은 프랜차이즈의 조상이 되는데, <우뢰매> 시리즈를 비롯 SF 장르를 벗어난 < 슈퍼 홍길동 >과 < 영구와 땡칠이 > 시리즈가 그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제작자 겸 감독이 된 그는, 이후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가 수많은 구설에 오르는 영욕의 세월을 보내지만, 1980년대로 한정할 때 한국영화에서 ‘심형래’라는 이름은 절대적이었다. 물론 부실한 퀄리티로 ‘애들 코 묻은 돈’을 가져간다는 비난이 따라다녔지만, 이건 철저히 어른의 시각이었다. 아이들 입장에서 당대 ‘심형래 영화’는 거부할 수 없는 엔터테인먼트였다. 1. <별똥왕자> 시리즈의 이건주 . 당시 인기 드라마였던 <한지붕 세가족>의 아역들은 아동용 SF 액션의 단골 배우였는데 ‘순돌이’ 이건주를 비롯, 최정화 송정림 이종민 등이 있다. 2. <우뢰매> 6편에 오면 파워 슈트가 등장한다. 3. 당시로선 ‘고퀄’이었던 < 스파크맨 >. 여기서 심형래 는 슈퍼히어로가 되어야 하는 현실에 대해 고뇌하는, <우뢰매> 시리즈에서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준다. 4. 1990년대를 대표한 <반달가면> 프랜차이즈. < 영구와 땡칠이 >( 남기남 , 1989)는 그 절정이었다. 당시 상영관은 < 록키 호러 픽쳐 쇼 >(짐 셔먼, 1975)을 방불케 하는 컬트의 용광로였다. 영구의 부름에 아이들은 마치 그를 대면하는 듯 “예~~!”라고 대답했고, “영구~ 없다!”라는 대사 한 마디에 자지러졌으며, ‘소쩍꿍’ 장면엔 좌석에서 일어나 영구의 동작을 따라 했다. <영구와 땡칠이>의 공식 시리즈는 4편까지 이어졌지만, 이후 수많은 ‘ 심형래 시리즈’가 비디오 영화로 이어졌다. 엔터테이너 심형래, 그는 장르의 섭렵자였고 캐릭터의 만물상이었다. 포졸, 흑기사, 각시탈, 괴도 루팡, 탐정, 도사, 007, 돈키호테, 대부, 헐크, 황비홍, 할매… 흥행 트렌드에 맞춰 1년에 네다섯 편씩 쏟아지는 그의 영화들은 ‘질’과 상관없이 ‘양’으로 아이들을 공격하는 융단 폭격기였다. 다시 SF 장르에 집중해 보자. 사실 당대의 영화들은 한계투성이였다. 가장 심각한 건 윤리적인 부분이었다. 그 시절 아동 영화엔 아동에 대한 배려가 심하게 부족했다. 유해 요소로 가득 한 불량식품? 지금의 잣대로 재단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일찍 성에 눈뜬 아이들을 위한 숨겨진 배려였을지 모르겠지만, 아이들 보기 민망한 노출 장면도 심심찮았다. <외계에서 온 우뢰매 2>(1986)에서 데일리(송금란)는 “에스퍼맨에게 나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아요”라는 위험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특히 여성 캐릭터에 대한 시각적 표현은 과잉되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타이즈 타입의 의상은 거의 유니폼이었다. 악당의 경우 한껏 부풀린 퍼머 머리에 진한 눈 화장이 필수였고, 액션을 수행함에도 강인한 이미지보다는 섹시한 느낌의 여배우가 대부분이었다. 혹시 1980년대의 ‘시대 정신’이었던 ‘에로티시즘’이 아동 영화 장르까지 영향을 미친 것일까? 충분히 의심해볼 만하다. 섹슈얼한 측면만 있는 건 아니었다. <반달가면> 시리즈는 범죄 요소가 너무 강했고 폭력의 수위도 높았다. 언어적인 면도 심각했다. 각종 유행어가 난무한 건 개그맨들이 주로 출연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자. “병신 같은 것들!” 같은 욕설에 가까운 대사를 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술 마시는 장면도 간혹 있었고 흡연도 자유로웠다. < 텔레파시 여행 >( 왕호 , 1991)의 좀비들은 모여서 고스톱을 치기도 했다. 1. <우뢰매> 2편엔 보미의 노출 장면이 있다. 아동용 영화로선 파격적이다. 2. < 드래곤볼 >에서 부르마( 이주희 )의 샤워 장면을 엿보는 손오공(허성태). 전형적인 에로 영화의 앵글이다. 3. < 마카리안 고 >의 외계인 악당. 강렬한 메이크업과 풍성한 퍼머 헤어스타일은 클리셰였다. 4. < 외계인 코브라 >( 김병기 , 1988)에 외계인으로 등장하는 당시 인기 개그맨 황기순 과 이원승 . 외계인들은 대부분 파충류로 설정되어 있는데, 황기순은 새를 먹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 외계 번개용 >( 방순덕 , 1989)엔 쥐를 먹는 장면도 있다. 은근히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측면도 있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올림픽이라는 국가 대사가 이어지는 시기였기에? 실제로 여러 영화에 호돌이가 등장했고, 올림픽에 대한 언급도 있었으며, 많은 아역 캐릭터들이 태권도를 수련했다. < 마카리안 고 >( 김완기 , 1987)는 ‘독도’를 중심 배경으로 선택했다. 흥미로운 건 1987년에 1~2편, 1988년에 3편이 나온 <별똥왕자> 시리즈였다. 명성왕국에서 지구로 피신 온 별똥 왕자( 이건주 )와 지구 어린이들 사이의 우정이 중심인데, 1편엔 대표적인 ‘국뽕’ 가요인 ‘아, 대한민국’이 흐르고 3S 정책의 대표적 이벤트인 프로야구가 등장한다. 2편은 석도원 감독의 당부를 담은 자막으로 시작한다.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며 어른께 공경하고 도덕을 존중하는, 착하고 아름다운” 어린이가 되자고 약속하자는 내용. 그리고 영화엔 이런 장면이 있다. 아이들과 어른 사이의 대화다. 어른: 그 사람들은 우주인이야. 아이들: 우주인이요? 어른: 우주인 중에서도 아주 나쁜 우주인이야. 아이들: 그럼 북괴 공산당 같은 나쁜 놈들이군요? 어른: 응. 맞았어. 아이1: 그럼 우주 공산당이구나! 아이2: 우주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자유와 평화를 없애려는 나쁜 놈들, 공산당은 나빠요. 아이3: 공산당은 싫어요!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 수많은 아이들을 ‘이승복 어린이’로 만들어 버리는 이 대목은 1980년대 아동 영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 어떤 단서를 준다. 반공 영화와 국책 영화가 사실상 사라진 1980년대 중반, 뚜렷한 이분법으로 ‘우리 편’과 ‘적’을 나누는 한국영화 장르는 SF 액션이 거의 유일했다. 물론 착한 외계인과 지구 아이들 사이의 우정도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시기 아동용 영화의 세계관은 이전의 이념적 영화들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 온 외계의 악당은, 남한의 체제를 위협하는 불온 세력과 오버랩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언급할 건 크로스오버 현상이었다. < 외계인과 콩콩 강시 >( 안승호 , 1989)는 198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강시 영화를 접목시켰고, 인기 만화를 각색한 < 드래곤볼 >( 왕룡 , 1990)도 등장했다. < 외계 번개용 >( 방순덕 , 1988)은 당시 < 돌아이 > 시리즈로 인기를 끌던 전영록 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역시 당대 청춘스타로 부상하던 박중훈 은, ‘전체 관람가’라곤 하나 사실 성인용 콘셉트가 만만치 않았던 < 바이오맨 >(조명화, 김청기 , 1989)에서 슈퍼히어로가 되었다. < 로보캅 >(폴 버호멘, 1987)의 영향을 받은 듯한 캐릭터들도 등장했다. 안 그래도 하이브리드의 성격이 강했던 당시의 SF 액션은 다양한 요소를 받아들이며 영토를 확장했다. 1. < 외계 번개용 >의 전영록 . < 돌아이 > 시리즈 캐릭터의 연장이다. 2. < 바이오맨 >의 박중훈 . 이 영화는 다소 성인용에 가깝다. 3. <우뢰매> 1편에 나오는 이재은 . 이외에도 안연홍 김민정 그리고 이병헌 의 동생인 이은희 등이 아역 시절 이 장르에 등장했다. 4. < 스파크맨 >의 오로라 공주 김진경 . 당시 CF 모델이었던 그녀는 수많은 남자 아동 관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이 장르는 1980년대 후반에 짧은 화양연화를 보낸 후 1990년대 초가 되면 급격하게 쇠락한다. 공룡의 몰락과도 같았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열악한 자본 구조에서 오는 완성도의 미흡함일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초 충무로에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면서 지각 변동이 일어날 때, 이른바 ‘<우뢰매> 류’ 영화들은 새 자본의 간택을 받지 못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장르 내부에 있었다. 진화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토대가 워낙 취약하다 보니 그 속도가 더뎠다. 초반엔 아예 애니메이션 장면과 실사 장면을 편집을 통해 이어 붙이는 수준이었지만, 이후 어설프지만 합성이 시도되었고, 미니어처 촬영도 있었다. 정도안(특수효과)이나 신재호(특수분장) 같은 장인들도 이 시기 경력을 시작하며 열악한 상황에서 열정을 불태웠다. < 스파크맨 >은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의상과 소품과 특수효과 등은 당대의 ‘고퀄’이었다. 그럼에도 극복하지 못하는 부분은 로케이션과 미술이었다. 이 시기 SF 액션은 그냥 주택가에서 찍었다. 액션이 벌어지는 우주선 내부는, 얼핏 봐도 아파트 보일러실 같은 곳이었고, 마분지나 은박지로 배경을 처리한 듯 보이는 후줄근한 비주얼이었다. < 우주의 용사 반달가면 >( 임종호 , 1991)에서 외계인들이 모여 있는 장면은 나이트클럽에서 촬영될 정도였다. 양적 팽창만큼 질적 성장을 이루지 못했던 1980년대산 아동용 SF 액션 영화들은 1990년대를 견디지 못했다. 특히 < 터미네이터 2 >(제임스 캐머런, 1991) < 쥬라기 공원 >(스티븐 스필버그, 1993) 등이 컴퓨터그래픽의 경이로운 스펙터클을 선보이며 관객의 눈높이를 한껏 끌어올렸다. 1. < 우뢰매 > 4편에서 에스퍼맨과 형래는 동네 제과점에서 만나 빵을 먹는다. 일상적 설정이라고는 하나… 조금 심했다.. 2. < 우주의 용사 반달가면 >에선 나이트클럽이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화면 위쪽에 사이키 조명이 보인다. 3. < 우뢰매 > 4편의 미니어쳐. 아동용 SF 장르는 나름의 기술 발전을 이루려 했다. 4. <우뢰매> 시리즈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엔딩. “안녕”이라는 자막은 이후 다른 프랜차이즈에서도 애용되었다. 1980년대엔 여러 장르적 시도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단명했다. 사회적 변화, 한국영화 제작 시스템의 격변, 장르 내부의 모순, 외부적 영향 등 그 이유는 다양했고, SF 액션의 소멸은 그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장르를 기억해야 한다면, 당시 가장 강력한 대중적 소구력을 지녔던 영화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오늘도 정의의 사도 에스퍼맨은 우뢰매와 함께 우리를 지켜준다.” 이 믿음직한 한 마디는, 현재 30대 후반~40대 초반 연령대의 관객들 귓가엔 여전히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을 것이다.
최근 개봉한 < 집으로 가는 길 >을 봤다. 안타까운 사연에 눈물도 많이 났지만, 다른 면으로는 우리나라 영화도 해외 로케이션이 많이 자연스러워졌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파리, 마르티니크 섬이 서울 쪽 연출과 어색하지 않게 연결이 되고 있었다. 프로덕션의 방식과 과정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겠고 연출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었으니, 한국 최초의 파리 올 로케이션 영화 <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 > 다. 제목부터... 살벌하다. 곱슬거리는 정동환 의 수염 상투를 튼 정동환 이 피리를 불고 있다. 그런데 그의 입 주변에 난 수염이 뭔가 살바도르 달리스럽기도 하고 하여간 조선사람 몸에서는 안 나올 듯한 꼬불꼬불한 수염이다. 뒤에 바라보는 외국인 부자(어쩌면 모자일지도 모른다)의 미묘한 표정은 또 뭔가. 이 한 장의 이미지가 <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 >를 대변한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은 일반 시민들에겐 요원한 이야기였다. TV, 영화를 통해 접하는 해외의 모습이 전부였을 것이다. 영화 제작 시 해외로케이션에 대한 열망은 당연하다고 느껴진다. 올림픽을 목전에 둔 1987년, 세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채비를 갖추던 한국인. 우리와는 생김새가 다른 외국들의 땅에서 활보하는 대한 남아(혹은 여아)의 모습을 당당하게 스크린에 담아 오겠다는 야심!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는 그런 생각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작자는 거기 갈 생각만 했지, 가서 뭘 할지는 충분히 생각하지는 못한 것 같다. 제목이 < OK 목장의 결투 >를 닮았지만 별로 비슷한 구석은 없는 영화다. 1987년에 개봉된 강대진 감독(제작자로 유명한 강대진 감독과는 동명이인이다.)의 <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 >는 앞서 말했듯 ‘한국 최초의 파리 올로케이션’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지금까지 안방극장의 지지않는 해로 존재하는 정동환 과 < 애마부인 > 하나로 모든 것을 평정했던 안소영 이 투톱으로 출연한다. 정동환 과 안소영 . 딱히 이 영화의 스틸컷은 아님. 아마도 빈센트 미넬리의 < 파리의 미국인 >을 느슨하게 가져오지 않았나 싶은 이야기다.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파리 유학을 떠난 진호( 정동환 )는 그곳에서 개인전을 여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다. 하지만 그의 파리 생활을 첫 도착부터 순탄치가 않다. 그가 신세를 지기로 한 황 화백의 집에서, 과거 미대 동기이자 연인이었던 희정( 이진경 )이 반라의 차림으로 나오는 것을 본 그는 파리에서의 첫 번째 좌절을 경험한다. 그녀는 돈 많은 재일교포이자 상업 작가인 황 화백의 재력과 박력에 넘어가 그와 함께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호는 이에 실망하고 곧 혼자 레스토랑 서빙을 하면서 그림 작업에 몰두한다. 그의 열정은 ‘다다이즘 거장’ 삐숑 선생님의 마음을 열게도 하는데, 한 달에 한 번 자신의 그림을 평가해달라는 진호의 부탁을 거절하자 그는 외친다.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러니 삐숑 선생님의 가정부가 감동하고 3초 만에 설득하여 그의 청을 받아주게 된다.(다다이스트들이란!) 이제 곧 개인전을 열 것 같이 꿈에 부푼 진호는, 아르바이트하는 레스토랑에서 만난 윤 여인( 안소영 )에게도 호감을 가진다. 그녀에게 모델을 제안하자, ‘사생활에 대해선 절대 묻지 말라’며 조건부로 제안을 수락한 윤여인은 급기야 누드모델까지 허락하지만, 술 취해 그녀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그에게 다시는 연락 말라며 매몰차게 내친다. 그렇게 두 번째 좌절. 이후로는 좌절의 연속이다. 아니, 그냥 외국인 부랑아라고 해도 좋다. 이 부분에 대한 연출이 꽤 재미있는데, 진호는 파리 내의 관광 명소들을 골라가며 방황을 한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려다가 쫓겨나기도 하고, 센 강 인근에서 술을 마시며 방황을 하며, 길거리에서 정치, 문화를 이야기하는 청년들에게 한국인의 세계사 지식을 뽐내기며 먹을 것은 얻어먹기도 한다. 진호의 방황을 핑계로 파리의 관광코스를 쭉 훑은 영화는 급기야 그를 프랑스인들의 새해 행사인 성 실베스트리의 날에 등장시켜 들뜬 사람들 사이에 혼자 심각하게 서서 술을 들이키게 한다. 그런 그의 방황은 한 창녀에게 이끌려 갔다가 바지가 벗겨지면서 끝난다. 이건 아니야! 이래선 안 돼! 바지춤을 부여잡고 창녀의 집을 나서면서 본인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순간, 진호는 자신의 방황에 대해 반성하고 정신을 차리지만, 영화를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탄식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그림 그리기 그런 방황 중 우연히 버스킹을 하는 거리 예술가들을 본 진호는 기발한 생각을 해내게 된다. 몽마르뜨 언덕에 위치한 계단에서 한국 전통의 의상과 악기를 통해 색다른 문화를 선보이며 호객을 해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이를 통해 유명해진 진호는 파리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개인전 의뢰를 받게 되고,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된다. 이에 때맞춰 희정도 황 화백을 떠나 진호에게 돌아오고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개인전은 사실 윤 여인이 뒤에서 진호를 위해 기획한 것이었다. 근본도 알 수 없는 한국인 미술대생의 개인전을 개최하기 위해 윤 여인은 화랑 주인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던 것이다.(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윤 여인은 화랑 주인에게 눈물을 흘리며 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진호는 윤 여인의 집을 수소문해 찾아가 충격적인 장면을 본다. 윤 여인이 사생활에 대해 알리기를 극구 꺼린 것은 장애인 남편을 수발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휠체어에 앉아 선글라스를 낀 남자를 수발하는 윤 여인을 멀리서 바라보던 진호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랬군요. 그랬었군요. 멀찌감치서 그녀를 보던 진호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한다. 그때, 윤 여인은 진호를 불러 세우고, 둘은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 영화는 유럽에 대한 예술적인 동경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멜로 영화다. 물론 그 만듦새가 탄탄하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이 영화는 주인공 진호가 그렇듯 일단 외국에 나가긴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이야기는 중구난방이고 인물들은 저마다 심리적이든 물리적이든 모두 헤맨다. 비밀을 가진 듯 행동하는 윤 여인의 사정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이고 영화의 라스트씬에 가면 저 여자는 뭐하는 여자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말하자면, 80년대 우리가 ‘외국’, 특히 ‘유럽’을 생각하면 떠오를만한 이미지들을 대충 엮고 그 위에 ‘한국의 미술 대학생’을 쑤셔 넣은 영화가 <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 > 되겠다. 그래서 그 충돌이 재미있다. 이 글 초반에 올라가 있는 사진처럼, 미묘하게 안 어울려 충돌하는 이미지와 행동들이, 세계에 편입되고 싶은 대책 없는 욕망이 끓어오르던 80년대 중후반의 당시의 모습을 비춰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거지가 만든 두 세계의 이상한 만남. 이후로 세계는 급속히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인다. 진짜로 그렇게 되고 있는지는 뭐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동환 안소영 감독: 강대진 각본: 박철민 개봉극장: 스카라 관람인원: 4,618(서울)명
이만희 는 그의 창작활동이 질과 양 모두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1960년대 후반을 지나자 주춤한 듯 보였다. 1970년대 초부터 한국영화계에 불어 닥친 불황의 찬바람을 그 역시 피하지 못했고, 한 해 개봉작이 10편(1967년)에 이르기도 했던 작품 수는 1, 2편으로 줄었다. 그는 이 시기의 어려움을 < 고보이 강의 다리 >(1970) < 쇠사슬을 끊어라 >(1971) < 일본해적 >( 1972) < 들국화는 피었는데 >(1973) 등과 같은 전쟁/액션 스펙터클로 돌파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만희 가 액션과 스펙터클에 능했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오늘날 가장 인기 높은 이 시기 작품인 < 쇠사슬을 끊어라 >조차 액션 장면들은 정창화와 임권택이 일찌감치 과시했던 정교함이 부족하다. 물론 스펙터클에 대한 그의 몰두가 아무런 성과를 낳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폄하일 것이다. < 들국화는 피었는데 >는 엉성하고 산만한 실패작에 가깝지만, 그 틈새로 분출하는 남성적 힘에 대한 매혹의 씬들은 때로 숭고하리만큼 웅장하다. < 0:400-1950 >(1972)이 놓인 자리는 이상하다. 이 영화의 제목은 물론 한국전쟁의 최초 시점, 그러니까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된 바로 그 시각을 뜻하며, 무대는 국방군의 최전방 초소이다. 카메라를 전쟁의 심장부에 갖다 놓은 뒤, 이만희 는 이 시기 작품들을 특징짓는 스펙터클에의 몰두를 까맣게 잊은 듯, 초소 병사들의 움직임을 마치 실내극과도 같은 방식으로 찍어낸다. 전쟁의 현존은 보이지 않는 총포음으로 대체되고, 화면은 한계상황에 직면한 사내들의 침묵과 공포로 가득하다. 나는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에서 시작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이만희 의 모든 전쟁영화가 반공에의 태생적 강박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과 분단을 다룬 최근 젊은 감독들의 자유주의적 영화에 비할 수 없이 깊은 인간적 통찰과 미학적 성취에 이르렀다고 여전히 믿는다. < 7인의 여포로 >로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은 뒤 “진짜 반공영화 한번 만들자”는 의도로 제작된 < 군번 없는 용사 >(1966)에서조차 잔혹한 인민군 장교 영훈( 신성일 )이 구월산 유격대 앞에서 “나를 죽여라. 내가 아비를 죽인 놈이다”라고 말하고 입을 닫을 때, 이 비극적 운명론자의 단호한 침묵이 모든 차이를 사소화하며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 04:00-1950 >은 많이 언급되진 않았지만 여기엔 이만희 적 세계의 진경이 있다. 어린 병사들을 이끄는 박중사( 장동휘 )는 그 세속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 군번 없는 용사 >의 영훈과 한 핏줄의 인물이다. 인민군의 침공이 시작되자 곧 해일 앞의 섬이 되어버린 벙커 안에서 그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군인은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신념에 따라 움직인다. 아군이 다시 오리라는 신념.”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졌고, 그들은 고립무원의 연옥 속에서 죽어갈 것이다. 판단은 금지되고 신념은 배반당한 채 죽음에 이르는 침묵의 기다림만이 허락된다. 그러므로 이 고립된 사내들의 벙커는, <귀로>의 억압된 가정, <생명>의 매몰된 탄광, <물레방아>의 비극적 순환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마을, <검은 머리>의 지하 아지트와 완전히 동질적인 공간이다. 그것은 <휴일>에서 휴일이라는 시간으로까지 확장된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 곳에 내던져졌으나 한번 도착하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영겁의 폐쇄회로와 같은 장소. < 04:00-1950 >은 전쟁 장르를 빌어, 이만희 의 영화세계를 관류하는 삶이라는 장소의 폐쇄공포를 형상화한다. 영화의 3분의2는 벙커 안에서 찍혔고, 카메라는 이 왜소한 공간 안에서 믿을 수 없이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공포의 침묵에 빠진 병사들의 몸짓과 눈빛을 담아낸다. 이 영화를 보면 한하사( 김성옥 )라는 인물을 잊기 힘들다. 어두운 표정을 지니고 있지만 몹시도 충직한 이 거구의 병사는 다가오는 죽음의 폭음을 들으며, “긴장한 거야? 왜 그렇게 말이 없어”라는 전우의 물음에 무심하게 대답한다. “긴장은 네가 하고 있어. 나는 다만 조용할 뿐이야”(한국 영화사의 명대사 10베스트를 뽑는다면 반드시 넣고 싶은 바로 그 대사.) 그는 곧 폭격에 귀먹고, 영혼이 빠져나간듯한 멍한 얼굴로 그에겐 침묵의 바다와 같을 전장의 황야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피폭 직후 그의 얼굴이 후경에 잡힌 씬은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일 것이다.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으므로 비로소 죽음의 도래를 듣게 된 사내의 미동도 없는 한없는 적막의 순간. 단언컨대 이 장면은 이만희 가 완성한 수많은 스펙터클을 다 끌어 모아도 결코 미치지 못할 만큼 아득하게 넓고 깊다. 그리고 한 하사는 불현듯 일어나 들판의 교회를 향해 걸어가다 총알세례를 받고 쓰러진다. 나는 다른 전쟁영화에서 이 인물만큼 헤어나올 수 없는 비애에 침잠한 인물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정은 쓰레기이고 각성은 허위이며 사랑은 억압이 된 세계, 그 출구 없는 폐쇄공간에서 이만희 의 인물들은 죽어가되 원망하지 않고, 악한으로 단죄될지언정 변명하지 않는다. 40대의 이만희는 술을 거르지 않았고 육체는 안에서 무너져갔으며, 세상은 더 차가워졌다. 그는 직업인으로서의 감독으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상업적 스펙터클을 추구하다, 불현듯 멈춰서 깊은 신음과도 같은 전쟁 영화 한편을 만들었다. < 04:00-1950 >은 장르의 도식 위에 고도의 내면적 세계를 투영해온 이만희의 걸작 중 한 편일 뿐 아니라, 한국 영화사의 빼놓을 수 없는 보석으로 재평가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