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20단 이해찬 직감 맞아 떨어진 정치공작
- 제작년도
- 2010
[사진] 영화 <불멸의 밀사>(1947, 서정규)에 출연한 한림(사진 제공: 김종원) 한림(韓霖)은 <자유만세>의 김승호에 이어 해방 후 두 번째 배출된 영화배우이다. 1947년 4월 21일 우미관에서 상영된 서정규 감독의 <불멸의 밀사>(1947)가 그 발판이 되었다. 고종의 특사로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돼 을사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다가 순국한 이준 열사의 이야기이다. 바로 이 16밀리 무성영화에 한림이 주연을 맡은 것이다. <자유만세>와 마찬가지로 애국심을 자극하는 내용의 특성상 전국적인 학생 단체 관람이 가능했다. 그런데 한림은 이에 앞서 김소동 감독의 <목단등기(牧丹燈記)>(1947)로 먼저 나올 뻔했다. 다음의 기사가 이를 말해 준다. “해방 후 첫 걸음을 내는 전혀 새로운 신인이다. 작품에는 내월 공개 예정인 <목단등기>, 또 제작 중에 있는 <불멸의 밀사> 등 함남 원산에서 출생하여 일본에 가서 일대 상경과를 마친 인텔리, 신장 5척7촌 어깨가 긁고 남성미의 넘버원! 지금 세상이 요구하는 남성에 딱 들어맞는다.(중략) 33세라면 늦은 감도 있지만 성격배우로서 등장하려는 씨의 배우생활은 아직도 장구하다. <목단등기> <불멸의 밀사> 양 작품의 주연인 씨는 조선의 획기적인 16밀리 탄생과 아울러 씨 역시 새로운 연기인으로서 탄생한 것은 16밀리 발전과 더불어 씨도 발전이 약속된 것 같다. 주로 연출자 김소동씨와 일을 하여 왔고 금후도 역시 김씨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고 한다. 김씨와 관계는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어 예술 방면에 전적으로 지도를 받아왔고 일상 존경하고 있다고 한다.” - 홍병삼, 「신성(新星)을 차저서(3)」 , ≪예술통신≫, 1947.12.7. - 1946년 ‘영화과학연구소’를 설립한 김소동이 벼른 끝에 첫 작품으로 선택한 <목단등기>는 한을 남기고 죽은 처녀 귀신(이정순)이 성불하기 위해 한 남자(한림)와 동침한다는 내용의 괴기물로, 중국소설 전등야화(前燈夜話)에서 소재를 빌려 왔다 .(김소동, 「나의 이력서(47) 영화편력 절정기」, ≪한국일보≫, 1982.5.20) 김소동이 녹음기사와 함께 직접 만든 녹음기로 도전한 이 데뷔작에 아직 검증되지 않은 세 살 아래의 신인을 기용한 배경에는 전공학과는 달라도 동경의 일본대학 후배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시골청년(현인)이 청운의 꿈을 펼쳐나가는 음악영화 <푸른 언덕>(1948, 유동일)의 보조 역할을 했으나 8년 가까이 영화와 멀어졌다. <백치 아다다>로 존재감 드러내다 활동을 재개한 것은 사극영화 <단종애사>(1956, 전창근)의 사육신 중 한 명인 하위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으나 몇 달 뒤 출연한 이강천 감독의 <백치 아다다>(1956)가 집중적으로 매스컴의 조명을 받으며 그에 대한 관심도 자연히 높아졌다. 그 첫 반응이 시사회장으로부터 나왔다. 미국공보원 영화과장 데일. E 하스 ( 「한국 최고작 ‘백치 아다다’」, ≪동아일보≫, 1956.11.22.) 는 “한국 농촌생활은 물론이려니와 극적 씬, 희비극의 교차 및 인간생활을 파고 들어간 현실주의적인 감각이 가득 찬 영화로서 확실히 한국영화 최우수 작품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고 했고, 작가 이봉구( 「신영화, 이상심리의 표현 ‘백치 아다다’의 예술성」, ≪조선일보≫, 1956.11.23)도 “오랜만에 보는 향토적인 서정과 날카로운 화면 정리와 이동에서 오는 정감이 영화를 성공케 한 바탕이 되어 주었다”며 “이 가운데서도 한림, 장민호의 연기는 페이소스하면서 박력이 있었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영화평론가 이청기 (「신경지의 발견, 영화 ’백치 아다다‘의 예술성」, ≪조선일보≫, 1956.11.26) 역시 “대담한 터치로 아다다의 생태를 해부하고 내면세계에 파고들어 내면의식의 흐름을 극히 감각적인 수법으로 추구한 작품”이라며 한림의 연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수룡 역의 한림은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으나 생리적 조건 탓인지 머슴 성격으로는 지나치게 유약한 인텔리전스가 풍겼다”고 아쉬움도 곁들였다. [사진] 이강천 감독의 <백치 아다다>(1956)에 출연한 한림, 왼쪽은 나애심(사진 제공: 김종원) 한림은 그 뒤에도 <마인>(1957, 한형모)을 비롯한 <아리랑>(1957), <돈>(김소동), <형제>(김성민), <길 잃은 사람들>(이상 1958, 김한일), <외로운 사람들>(박충현), <언제까지나 그대만을>(이상 1959, 권영순). <지상에서 맺지 못할 사랑>(김성민) <사랑해선 안 될 사랑을>(이상 1960, 이봉래) 등 13편에 출연했으나 <백치 아다다> 경우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외로운 사람들> 등 한 두 편을 빼고는 거의가 조연급이었다. 그 가운데는 <돈>의 김순경과 같은 단역급도 있었다. 역할에 대한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사진] 한형모 감독의 <마인>(1957)에 출연한 한림, 앞의 여배우는 이빈화 한림은 1914년 12월 26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한정국(韓正國)이다. 일본대학 산업경영과를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비애, 실연이 담긴 감상적 인정극을 하고 싶어 했으나 그 희망이 얼마나 관철됐는지는 회의적이다. 간헐적으로 채운 12년의 배우생활 동안 대한영화배우협회 창립(1955년 4월16일)에 참여한 일 외에는 외부 활동이 거의 없었다. 프랭크 보재이즈 감독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1937)를 본 후 그 주인공인 샤를르 보외이에를 좋아하게 됐다는 한림은 젊은 시절엔 주량이 거의 무한대, 담배는 ‘전매국 굴뚝처럼 코에서 연기가 나올 정도’의 애연가였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영화계와 절연 상태에서 1994년 7월 28일 팔순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 영화 <돈>(1958, 김소동)에서 단역인 순경으로 출연한 한림 1. <불멸의 밀사>의 감독에 대해 『한국영화총서』를 비롯한 국내의 모든 저작물이 김명순 감독으로 기재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1947년 1월 14일자 ≪예술통신≫ 2면 「영화 ‘불멸의 밀사’ 남한 로케 견문기」에는 분명히 서정규(徐廷奎) 감독으로 명기돼 있다. 필자가 유족으로부터 받은 당시의 앨범 사진도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이 영화를 제주극장에서 단체 관람으로 봤다.
‘우미관’(1912~1982)은 70년 남짓이라는 긴 시간 서울의 종로 관철동에 위치하면서 도시 문화사의 한 축을 설명하는 키워드이자 어떤 장소성의 표식으로 기능해 왔다. 예컨대, 김두한(1918~1972)을 ‘영웅 협객’으로 그려냈던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 3부작(1990~1992)이나 TV드라마 <야인시대>(2002~2003)에서 1930년대의 우미관은 종로 주먹의 요람과 같은 장소로 등장한다. 실제로 우미관 주변을 근거지로 삼았던 주먹패가 있었고, 종로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내선(內鮮)’ 간 치열한 주먹 다툼도 있었다. 김두한이 해방 후 국회의원이 되어 오물 투척 사건으로 영웅 협객의 파란만장한 정치사를 써나간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미관의 김두한’ 혹은 ‘김두한의 우미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한동안 대중문화에서 우미관은 김두한으로 대표되는 ‘협객의 무대’로 표상, 전유되어 왔다. 열여덟의 나이로 우미관 일대를 제패하고 싸움 실력 하나로 일본인도 무릎 꿇게 했다는 협객 김두한. 일본인 자본가들이나 주먹 패거리로부터 조선인 상인들을 보호하려는 종로 주먹들의 민족적 의기와 의리. 이러한 재현이 우미관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도 우미관을 기억의 공간으로 자리매김시키는 데 중요한 문화적 기능을 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말 우미관은 김두한의, 민족적 의기와 의리의 성지였을까. 아니, 어쩌다가 우미관은 종로 협객들의 공간이 된 것일까. 어쩌면 이런 식의 기억하기는 극장이 ‘관객(만)의 공간’이며 ‘관람 행위’가 기대되는 공간이라는 상식, 즉 ‘극장=관람 공간=관객의 공간’이라는 상식을 넘어서는 극장 경험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근대 문화의 첨단에 있던, 그래서 ‘영화 보기’라는 문화 실천이 근대의 패션으로서 그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던 모던보이와 모던걸뿐만이 아니라, 부랑자, 불량소년, 걸인 등 도시 문화의 주변부에 위치한 하위 주체들에게 극장이라는 장소의 경험이 무엇이었을지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 한국의 첫 근대 장편소설로 기록되는 이광수의 『무정』(1917)은 작가가 일본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소설 집필 전인 1916년 여름, 그는 잠시 경성을 다녀간 일이 있었다. 『무정』의 일본어판 번역자이자 한국문학 연구자인 하타노 세츠코(波田野節子)는 작품 속 영채의 유서를 근거로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1916년 6월 말부터 7월 사이라고 추정했는데, 어쩌면 소설 속 다음의 대목은 이광수가 경성에 머물면서 체험한 종로 밤풍경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겠다. 밤은 서늘하다. 종로 야시에는 ‘싸구려’ 하는 물건 파는 소리와 기다란 칼을 내두르며 약 광고하는 소리도 들린다. (중략) 아직도 장옷을 쓴 부인이 계집아이에게 등불을 들리고 다니는 이도 있다. 우미관에서는 무슨 소위 ‘대활극’을 하는지 서양 음악대의 소요한 소리가 들리고 청년회관 이층에서는 알굴리기를 하는지 쾌활하게 왔다 갔다 하는 청년들의 그림자가 얼른얼른한다. 1 야시(夜市)가 열리는 종로의 소음들 속에서 “서양 음악대의 소요한 소리”를 가려들으며 우미관의 ‘대활극’을 연상하는 『무정』주인공 이형식을 그 여름의 이광수 자신이라고 했을 때, 그 ‘대활극’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매일신보 광고를 살펴보면, 1916년 6월 말 우미관의 주요 상영 프로그램은 23일부터 개봉된 ‘세계적 모험 탐정 대활극’ 연속영화 <명금>(The Broken Coin, 1915)이었다. 뉴욕의 탐정소설가 키티 그레이(Kitty Gray)가 유럽 고대 왕국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파란만장한 모험을 펼치는 영화 <명금>은 미국 유니버셜사가 총 22편 44권으로 제작한 연속영화로서, 1910년대 후반 미국발 활동사진 열풍을 불러 일으키며 우미관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을 장식한 흥행작이었다. 우미관은 1916년 개봉 이래 <명금>을 여러 차례 재상영했고, ‘명금 대회(名金大會)’라는 이름의 상영 행사를 열어 많은 관객들을 유인했다. 한국 근대소설에는 우미관에서 <명금>이 상영되었을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이 종종 등장한다. 박태원의 「오월의 훈풍」(1933)에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수전동 골목 아이들이 우미관에서 본 영화를 흉내 내며 ‘명금 놀이’를 하는 모습을 회고하는 대목이 있다. 아이들은 각자 <명금>에 나오는 인물—‘기지꾸레’, ‘싸치오 백작’, ‘후레데리꾸 백작,’ ‘로로’—이 되어 골목길을 누빈다. 이태준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사상의 월야』(1941)에서도 주인공 송빈이 우미관에서 이 영화를 보는 장면이 있다. 우미관의 2층 좌석에서 송빈과 함께 영화를 본 일행은 누가 ‘기지꾸레’이고 누가 ‘후레데리꾸 백작’인지를 이미 잘 알고 있다. 우미관의 <명금>은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는, 그런 영화였던 것이다. 우미관에서 이 영화의 해설을 진행했던 서상호에게도 <명금>은 변사 인생을 대표하는 흥행작이었다. 스물여덟에 경성고등연예관에서 변사 생활을 시작한 서상호는 우미관에서 생애 최고의 전성시대를 맞았다. 우미관은 김덕경, 우정식, 최병룡, 최종대 등을 견습 변사로 두고 영화 해설의 묘미를 선사했는데, 그중에도 서상호는 우미관의 ‘달러 박스’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명성이 높아지자 그는 우미관과 제2 대정관 사이를 오가며 몸값을 높였고, 단성사가 개관하자 극장주 몰래 변사, 악사, 종업원 등을 빼돌려 단성사로 옮겨버렸다. 이런 그였으나, 우미관에서 다시 ‘명금 대회’를 열었을 때에는 언제 배신했던가 싶게 우미관으로 돌아와 <명금>을 해설했다. 방탕한 생활과 아편 중독으로 생계가 기울고 결국 극장주도 관객도 꺼리는 변사가 되어 버렸지만, ‘우미관의 변사’로서 서상호를 빛나게 해주는 영화가 <명금>이었다. * 서상호의 변사 인생처럼, 우미관의 시대도 점차 기울어갔다. 북촌 조선인 상설관 중 단성사가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한 이래, 우미관은 상영되는 영화보다도 극장 주변에서 일어나는 범죄들과 함께 악명을 높여갔다. 공교롭게도 조선총독부가 활동사진필름취체규칙(1926)을 제정하고 영화 검열을 본격화하는 때를 즈음해 도시의 소년범죄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식민 당국은 영화가 미칠 악영향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근거로 검열을 정당화하며, 영화를 보고 국가의 권위에 도전한다든가 범죄 수법 등을 학습하여 공공의 안전을 위협한다든가 하는 범죄자가 양산되는 것, 그리고 영화에 재현된 퇴폐적이고 음란하며 불량한 풍속이 선량한 풍속을 해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조선인 사회의 엘리트들 역시 영화가 모방 범죄를 야기하고 ‘미풍양속’을 위협하는 악한 쓰임새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소년범죄를 영화의 ‘모방범죄’로 치부하는 사회 담론들은 영화가 ‘불량소년’을 제조하는 마술적인 힘을 내장하고 있다는 듯 논했다. 종로의 영화상설관을 근거지로 절도 행각을 벌인 ‘불량소년단’의 검거 기사들은 제목부터 이 사건들이 범죄영화를 좋아하는 ‘영화광’의 ‘모방범죄’라고 암시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모방했다거나 영화에 등장하는 악한을 흉내 낸 범죄는 말할 것도 없고, 영화를 모방한 범죄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가 없어도 소년들이 돈을 훔쳐 극장 구경을 가려 했다는 진술만으로도 범죄 동기가 영화, 특히 이들이 좋아하는 활극영화에서 비롯된 듯 보도되곤 했다. 어떤 범죄의 원인이 ‘활동사진 중독’ 때문이라거나, 범죄의 발생 장소나 과정이 영화상설관과 연관되어 있다고 제시함으로써, 영화와 극장의 유해성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는 듯 보일 정도다. 영화의 필름을 검열하는 것은 총독부 도서과에서 이루어지는 출판경찰의 업무였지만, 영화가 실제 상영되는 흥행장 및 흥행 행위에 관한 단속은 관할 경찰서 소속 풍속경찰의 업무였다. 풍속경찰은 임검(臨檢)을 명목으로 관련 영업장에 자유로이 출입하는 막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입장권 없이 극장에 들어가려는 자를 단속하는 것부터 상영 행위가 검열 기준에 저촉되는지의 여부를 판정하는 것, 극장의 위생 상태와 관객의 음란폐풍 행위를 감독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임검에서 수행하는 업무는 매우 포괄적이었다. 말하자면, 극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범죄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임검 업무였다. 우미관과 그 주변을 근거지로 삼았던 불량소년들이 임검으로 대표되는 풍속경찰의 시야 안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김두한은 우미관의 불량소년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패거리의 ‘불량’은 식민지 경찰과의 긴장과 대치 관계를 통해 식민지인의 ‘불온’을 구성한 중층적인 측면이 있었다. 이들이 ‘일제’로부터 종로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들은 ‘보호’라는 명분으로 상인들에게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경성이 근대 도시로서 확장되어 가는 동안 그들의 근거지였던 우미관과 그 주변이 상대적으로 종족적이면서도 계층화된 공간으로 게토화될 때, 김두한과 우미관 패거리의 불량스러움은 종족적 혹은 계급적 불온성을 잠재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1938년도 경성 주요 극장의 관객 구성을 살펴보면, 2 우미관의 조선인 관객 대 일본인 관객의 비율은 9:1이다. 같은 시기 단성사가 8:2, 명치좌가 5:5의 비율을 보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미관은 확실히 조선인 관객이 절대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극장이었다. 이 시기에는 우미관 역시 이미 북촌의 다른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영화를 병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 관객 중 조선인이 9할을 차지하는 종족 비율을 극장 프로그램에서 기인했다고만은 할 수 없다. 우미관을 줄곧 ‘3류관’의 위치에 머물게 했던 낙후한 설비와 비위생적인 환경, 저렴한 입장료가 오히려 조선인 관객에게 문턱을 낮추었다고 할 수 있다. 불결하고 불량한 극장의 분위기에 눌려 혹여 불량패들의 표적이 될까 두려워하는 일본인 관객이 굳이 우미관을 찾아 영화를 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김두한이 종로에서 싸움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1930년대를 지나며 바야흐로 우미관과 그 주변은 경성 뒷골목의 불량하고 퇴폐적이며 자극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된다. 그와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걸인과 부랑자, 불량소년, 하층계급 노동자들에게는 안온한 공간이 된다. 공중화장실의 악취와 근처 우동집의 간장 달이는 냄새, 상경한 사람들이 묵는 싸구려 여관과 여인숙 특유의 음습함과 소음들. 이미 낡고 오래되어 어떤 ‘향수’의 공간이 되어버린 우미관의 화장실에서 왕년의 유명 변사 서상호가 자살하고, 김두한 패거리의 주먹질은 더욱더 골칫거리가 되었다. 우미관과 그 주변은 경성이라는 도시의 식민지적 이원성(식민자 일본인의 공간/피식민자 조선인의 공간)이 극장 문화에서 어떻게 굴절되어 나타났는지, 그 장소성의 다층적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해준다. 1) 이광수,『무정』,김철 편집, 문학과지성사, 2005, 116쪽 2) 「서울 관객 구별」,『삼천리』,1938년 5월호, 25쪽. 상단사진 1. 우미관의 흥행작 영화 <명금(The Broken Coin)>의 두 배우 출처: 송완식 역 『(사진소설대활극)명금』 경성: 영창서관, 192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영화를 모방한 가두 소년범죄」,《조선일보》,1935년 3월 6일 자, 2면. 이 역시 활동사진을 본뜬 소년의 탐정극 실연 일막 [一幕] ―4일 오후 한시 경에 시외 하왕십리 426번지 배추 행상하는 김사남(金四男, 14)은 배추 수레를 끌고 시내 관철동 우미관 앞을 지나는데 돌연 소년 한 명이 길을 막아서서 김사남의 호주머니에서 현금 60전이 든 지갑을 뺏어 가지고 도망하였으나 김사남은 곧 그 뒤를 추격하려 했더니 다른 소년 한 명이 또 나타나서 붙잡고 방해하였다. 마침 지나가던 종로서원 [鐘路署員] 이 보고 악 [惡] 소년 한 명은 현장에서, 한 명은 전차에서 뛰어오른 것을 쫓아가서 모두 붙잡았는데, 그들은 시내 돈의동 127번지 오량산(吳梁山, 29)과 초음정 14번지 김태산(金泰山, 14)으로서 우미관 부근에 근거를 둔 소년부랑패의 일당인 것이 판명되어 방금 엄중 취조중이다. 2. 일송생(一松生), 「극장풍경」,『영화시대』,1935년 10월호, 59~61쪽. (부분 발췌) 늦은 가을서부터 밤거리의 추워진 공기를 호흡하는 축만시(丑滿時)의 낭객(浪客)―. 텅 빈 종로 거리에 네온사인의 냉광(冷光)을 물리치는 듯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날라 온다. 오장육부 속속들이 사무치는 그 구수한 냄새야말로 진미(珍味)의 송곳 끝이 혓바닥을 콕콕 쏘아 한없는 침을 흘리게 한다. 얼큰히 취한 자는 ‘한 잔 더’의 미련으로 발이 안 떨어질 것이오, 맹맥한 노동자의 창자는 이 냄새에 십년은 감수하리라. 이 진미한 냄새. 밤거리의 낭객을 도취시키는 이 ‘구수한 냄새’의 출처는? 우미관 앞. 네 바퀴 달린 ‘오뎅(おでん)’ 장소에서이다. 원래 종로 가까이 있을 뿐 아니라 역사가 오래여서 비록 전신과 후신의 혈통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미관하면 모르는 이가 없고 또 따라서 연상되는 것의 세 가지가 있으니 1. 우미관 쌈패. 2. 우미관 조무래기 관상. 3. 우미관 문전의 ‘오뎅’ 장수 등이다. 근자에 와서는 경찰 당국의 경계로 경성 북촌 유일의 우미관 쌈패의 존재가 적이 미약해진 셈이고 또 네 바퀴 오뎅 장수보다도 그 앞은 카페를 위시하여 오뎅집, 바-, 만둣집 등등 동경(東京) 약초 [浅草, 아사쿠사] 풍경을 연상케 한다. 3. 이태준,『사상의 월야』,《매일신보》, 1941년 3월 4일~7월 5일 연재. (발췌는 1941년 5월 3일자, 4면.) 구경이란 말에 은주는 먼저 나서며 앞을 섰다. 배다리로 나와 광교 큰길을 건너 샛길로 관철동에 들어서니 벌써 군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무슨 곡조인지는 몰라도 잰 걸음을 걷는데 신이 나게 맞는다. 가까이 가보니 전등을 구슬 꿰듯 해 여러 줄을 늘이었고, 이층 노대(露臺)에서는 눈이 불거진 사람, 볼이 불룩한 사람, 배가 내민 사람들이 새로 닦은 놋그릇 같은 악기를 메고, 들고, 흥겨운 몸짓을 하며 불고 있다. 그 노대 밑에는 큰 간판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첫머리엔 ‘명금 대회(名金大會)’라 쓰여 있었고, 달리는 말 위에서 소나무로 뛰어오르는 그림, 큰 다리 위에서 그 밑으로 달아나는 기차로 내려 뛰는 그림, 천여만여한 절벽과 절벽 사이를 자동자전거를 탄 채 건너뛰는 그림,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보는 사람들로 마당이 그득 찼다. 윤수 아저씨는 2층표를 샀다. 은주는 자주 와보는 데인 듯 2층길이 어수선한데도 익숙하게 곬을 찾아 먼저 뛰어가 앞줄에 자리를 맡았다. 은주가 먼저 앉고, 윤수 아저씨가 앉고, 그 담에 송빈이가 앉았다. 앉아서 보니 청년회관 대강당은 어림도 없게 넓고 그런 아래웃층이 별로 남는 자리가 없다. 이윽고 밖에서 나던 군악소리가 무대 뒤에서 나더니 그 군악에 맞춰 변사가 나타났다. 변사가 무대 한가운데 머물러 관중을 향해 예를 하자 군악소리는 뚝 끊쳤다. “오늘 저녁에도 이 우미관을 사랑하사 이처럼 다수 왕림…….” 어쩌고 한참이나, 다음 주일에는 무엇을 상연하겠으니 그때도 많이 와달라는 말까지 늘어놓고야 다시 군악에 발을 맞춰 들어갔다. 이내 불이 꺼지며 사진이 나타나는데 모두가 서양사람들이다. 송빈이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데 은주와 윤수 아저씨는 어느 게 ‘기지꾸레’니 어느 게 ‘후레디리꾸 백작’이니 하고, 알아맞히며 지껄였다. 영사막 옆에서는 아까의 변사가 다시 나서서 목청을 높여 어떤 일정한 장단이 나게 떠들어댔으나, 송빈이는 한마디도 자세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 재미있어, 하는 은주를 가끔 어스름한 속에서 엿보았다. 4. 이주홍, 「소년행」,《동아일보》, 1967년 12월 27일자, 6면. 저뭄이 깃들어오는 밤이면 영하 17, 8도의 매운바람을 가르면서 소년은 일과대로 종로를 향해 걸어갔다. 외투나 장갑이 있었다면 누가 투정을 할 것이랴. 열다섯 살 어린 소년의 살을 싸고 있는 것은 얇은 면 사지의 교복과 면 샤쓰, 그리고 물감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고 있는 까만 새 모자에 발가락과 발뒤꿈치가 튀어나와 있는 떨어진 양말과 운동화뿐이었다. 화신상회 건너편의 야시(夜市)를 누비고 나가 소년은 수표다리 못미처에 있는 영화관의 우미관 앞에서 서성대는 습관이었다. 아슬아슬한 장면의 <명금>과 <동도> 그림 간판의 뼁끼는 전등불에 번쩍거리고 있었고, 발코니에서 신나게 뿡빠거려대는 악대 소리는 시골 소년의 가슴을 용수에 넣어 흔들 듯 흥분시켰다. 5전짜리 우동장사의 외는 소리, 왜간장 다리는 냄새와 코크스 타는 냄새를 간지럽도록 맡으면서 소년은 조심조심 매표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표를 사려는 것이 아니었다. 손님의 턱밑에 내밀고 애원하는 것은 보인단(普仁丹)이나 영신환(靈神丸)인 것이었다. 지금 아이들만 한 간(肝)이 있었더라도 버스 안 승객들의 무릎 위에 갖은 미사여구로 엮은 삐라를 척척 나눠놓고서 한바탕 반(半)압력의 열띤 애국연설로 연필을 사달라 보챌 수가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지나치도록 암띠고 겁쟁이인 소년은 겨우 한마디로 익힌 대사 “학비를 벌어서 공부하는 고학생이올시다. 동정하시는 맘으로 약 한 첩만 갈아주십쇼”였다. 그러나 하룻밤에 세 첩의 약만 팔아도 두 때의 밥은 살 수 있는 것이었어도, 노상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잘해서 소금으로 반찬 해 먹는 4전짜리 팥밥 한 그릇, 아니면 세 때 네 때를 내리 달아 굶고 늘어져 있어야 하는 얼음장의 냉돌이었다. “배워야 산다.” 단 하나 끝까지 소년을 달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3.1 봉기 직후로 삼천리 전역에 불 지른 민족의 대구호,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행로는 촉도난(蜀道難). 세월이 꿈이 순을 잘라먹었음일까. 이것도 저것도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이, 그때만큼이나 추운 날,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효자동의 갈돕회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던 외로운 소년의 뒷모습을 회상해 보면서, 서글피 오십년 뒤의 그 소년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동대문활동사진소는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에서 전등의 편리함을 알리고 종업원을 위안한다는 명목으로 1903년 세운 극장이다. 1908년부터 그 이름을 광무대라 불렀다. 한성전기회사는 고종이 세운 황실기업이었다. 1896년 말 고종은 한성전기회사 자본금 총 20만원 중 내탕금(內帑金)으로 10만원을 내어 이근배(李根培), 김두승(金斗昇)의 명의로 창업을 준비시키고, 1898년 한성전기회사를 세웠다. 회사의 운영과 설비는 경인철도 부설공사의 청부인으로 조선에 들어와 있던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트윅(M. R. Bostwick)에게 맡겼는데 이때 이들로부터 차관 10만원을 받았다. 이때 받은 차관으로 말미암아 소유자인 황실과 운영자인 콜브란 측 사이에서 채무 분쟁이 발생한다. 이 문제는 1901년 7월 콜브란이 한성전기회사 사옥에 게양된 태극기를 성조기로 바꿔 달면서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1902년 8월 대한제국 정부는 한성전기회사에 대한 문부조사(文簿調査)를 실시하여 콜브란 측의 잘못을 따졌으며, 1903년 조선인들은 콜브란 측의 부당한 처사에 항거하는 뜻으로 통문(通文)을 배포하고 전차안타기 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움직임에 당황한 미국은 해병 100명을 파견하여 한성전기회사 사옥 주변을 경계시키는 등 사태를 악화시켰다. 한성전기회사에서 동대문활동사진소를 만들고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한 시점은 서병달(徐丙達)이라는 사람이 전술한 채무 분쟁과 관련하여 종로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콜브란을 성토하다 경무청에 구금되는 사건이 일어났던 1903년 6월이었다. 아래는 활동사진 상영을 알리는 신문광고이다. [사진 2] 최초의 활동사진 상영 광고 “ 東門 內 電氣會社 機械廠 에셔 施術 活動寫眞 은 日曜 及 陰雨 를 除 外 에 每日 下午 八時 로 十時 지 設行 大韓 及 歐美 各國 의 生命 都市 各種 劇場 의 絶勝 光景 이 具備 외다 . 許入料金 銅貨 十錢 ” 1 콜브란은 기계창 안의 창고를 활동사진관으로 만들어 수익 사업을 펼치는 동시에 한성전기회사에 대한 조선인들의 좋지 않은 감정도 무마시키고자 했다. 순회 영사나 1회성 상영이 아닌 상설 상영을 추진한 배경이 여기에 있었다. 한성전기회사는 활동사진 기계를 구입하여 전차 기지가 있던 동대문의 전기회사 기계창과 전차 종점인 서대문 근처의 황실희대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이때 상영된 것들은 대한제국과 구미 각국의 도시 모습을 담은 실사영화와 짧은 길이의 극영화들이었다. 그러나 활동사진관이 개관한 이후에도 콜브란과 고종 사이의 채무 분쟁은 해소되지 못했다. 손진민(孫振玟) 등 민족주의적 성향의 인물 10여명이 한성 각 통에 전차안타기 운동에 참여하자고 촉구하는 통문을 배부하는 등 반외세 운동도 절정에 달했다. 악화되던 채무 분쟁은, 러일전쟁 발발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원한 고종이 한성전기회사를 미국에 넘기면서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한성전기회사는 미국에 본사를 둔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로 바뀌었고, 고종은 일개 투자자로 남게 된다. 한성전기회사가 미국 자본의 한미전기회사로 바뀐 뒤에도 동대문활동사진소의 운영은 계속되었다. 1906년 당시 한미전기회사의 활동사진 수입은 1,181.39원으로 회사 전체 수입의 0.6%를 차지했다. 1907년에는 625.84원으로 전체 수입의 0.2%, 1908년 1~8월에는 138.10원으로 전체 수입의 0.1%에 머물렀다. 결국 동대문활동사진소는 1908년 광무대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사진3]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 표지 동대문활동사진소로 운영될 당시의 시설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동대문활동사진소가 광무대로 이름을 바꾼 후의 극장 모습은 노래 책인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 [필자 주: 1910년대 일반에 유행하던 노랫말을 수록한 잡가(雜歌)집. 1915년 유일서관(惟一書館) 발행.] 의 표지에 그림으로 남아있다. 이 그림으로 추정컨대 극장의 객석은 2층 규모로, 2층 객석 한쪽에는 만국기가 걸려있고 활동사진관으로 이용해서인지 무대의 폭이 좁은 편이었던 듯하다. 가부키 등을 공연할 때 필요한 화도(花道)는 없다. 이는 다음의 회고를 통해서도 개략적인 확인이 가능하다. 무대에는 미국긔와 됴선긔를 그린 휘장을 처놋코 그 휘장 압헤 굵은 줄을 가로 매여 놋코 맨 - 먼저는 少女 광대가 나와서 줄을 타고 그 다음에 휘장을 거더 치우더니 조선 녀자가 춤 ( 僧舞 等 ) 을 몃 가지 추고 그리고 불이 지는 고로 『 익크 활동사진이 나온다 』 하고 기다렷더니 한참이나 캄캄한 대로 잇다가 식 언 외투를 닙은 서양 사람 한 가 웃둑웃둑 서잇는 것이 환 - 하게 빗취엿다 . 2 1908년 개장한 광무대는 1909년부터 박승필(朴承弼)이 운영을 맡는다. 이후 전통연희 상연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활동사진 상영을 그만 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프랑스의 파테사(Pathé)가 파격적인 가격으로 필름을 판매, 싼 가격의 필름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것이 상하이를 통해 조선에까지 들어와 광무대에서 상영되었다. 활동사진 전용관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광무대는 조선인들이 활동사진을 관람하던 대표적인 장소였다. 1909년 한미전기회사가 일한와사전기회사(日韓瓦肆電氣會社)에 인수되면서 광무대 연극장도 와사전기회사가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1913년 와사전기회사가 이 연극장을 창고로 쓰기로 하면서 광무대는 지금의 을지로 4가에 위치했던 황금유원(黃金遊園) 내 연기관(演技館)으로 이전되었다. 박승필은 이 연기관 역시 광무대라 이름 붙여 운영했는데, 1918년부터는 단성사의 운영권까지 획득하게 된다. 이후 박승필은 광무대를 구극(舊劇) 전용극장으로,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그 기능을 구분하여 운영하였다. 이런 식의 구분은 단성사가 직접 활동사진을 제작하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1924년 7월 단성사에서 이필우를 중심으로 촬영부가 조직되고 <장화홍련전>을 제작한다. 단성사의 변사와 광무대의 배우들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장화홍련전>은 1924년 9월 5일 개봉되었다. 이렇듯 박승필은 자신의 흥행 사업에 광무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전통연희보다는 활동사진과 연극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깨닫고, 광무대를 토월회(土月會)에 장기 임대하여 토월회가 광무대 시대를 활짝 여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27년 봄, 박승필은 자신이 일으켜 키운 광무대의 운영을 인척 박승배(朴承培)에게 넘기고 단성사 운영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그러던 중 1930년 5월 2일 화재로 광무대가 소실된다. 광무대가 사라지면서 토월회와 단성사의 박승필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단성사를 전용관으로 이용하려던 토월회 단원들이 건물주인 다무라 미네(田村みね)에게 접근하여 단성사의 운영권을 뺏으려 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토월회가 단성사를 포기하면서 일단락됐지만, 광무대가 사라지고 난 후 발생한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1) 《황성신문(皇城新聞)》 1903년 6월 24일자. 2) 「활동사진 이약이」『別乾坤』1926년 12월호, 91쪽. * 본문은 필자의 『조선영화의 탄생』((주)박이정, 2018) 42~45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하였으며 일부분 유민영의 『한국근대극장변천사』(태학사, 1998)를 참고하여 가필했음을 밝힌다. * 사진 1(글 상단). 동대문활동사진소가 자리했던 한성전기회사(후신 한미전기회사) 기계창 [자료] 「유완조액(游玩遭厄)」《황성신문》 1903.07.10. 近日 東大門 內 電氣鐵道社 中 에 活動寫眞 機械 를 購入 하야 士女 의 觀玩 에 供 으로 觀玩者 가 下午 八時 로 十時 지 電車 에 搭載 하야 紛紛往觀 하난 人山人海 를 簇聚 하야 每夕 票價 收入額 이 百餘元 이오 車票價 도 亦然 한 三昨日 은 新門 內 協律社 에도 如彼機械 一坐 를 排置 하고 觀玩 켸 으로 玩客 游女 數千人 이 聚集 하얏다가 忽然 電火 가 裂破 하야 滿屋 火光 이 奮迅 으로 衆人 이 一時 驚動 하야 自相 踐踏 하며 或 數仞 墻垣 에 自墮 하야 衣冠毀裂者 와 破頭折脚者 와 傷脅壞肢者 의 類 가 無數 한데 翌朝 에 視之 한 則 錦貝纓 香佩 等屬 이며 靴子 繡鞋 等屬 이며 紗羅 衣幅 等屬 이 或 半截 或 一隻 或 一片 이 紛紛堆積 하얏다더라 [자료] 광고, 《황성신문》 1907.10.26. ○本院 經費補充 기 爲 야 慈善演奏會 를 東大門 內 前光武臺 에셔 陰 九月 二十六日 爲始 야 限 三日 開會 야 順序 가 如左 오니 慈善 신 僉君子 枉臨 시와 觀覽 심을 望 홈 順序 一 奏樂 一 有志 紳士 慈善演說 一 世界 에 有名 活動寫眞 一 衛生幻燈 一 奏樂 一 臨時 야 滋味 잇 演藝 도 잇소 京城孤兒院 告白 [자료] 특별대광고, 《황성신문》 1908.05.26. 東大門 內 光武臺 에셔 陰 本月 二十七日 브터 諸般演藝 를 一新改良 야 古今 奇絕 事 를 摹倣 고 聖世風流 를 敎演擴張 야 僉君子 의 性情 과 眼目 에 感發愉快 케 玩賞品 을 設備 얏 오니 及期 光臨 심을 敬要 順 序 官妓男舞 佳人剪牧丹 劔 舞 梨衣舞 僧 舞 閑良舞 性 眞 舞 矢射舞 舞 鼓 電氣光舞 地 球 舞 舞童 項 莊 舞 法國 巴京 에셔 新購入 活動寫眞 隆熙二年 五月 日 時間 下午 七時半 으로 同 十一時 지 入 埸 券 英美烟草株式會社 에셔 製造 有名 紙券烟草 空匣 을 持來 시면 許入 북 표 二十匣 刀 票 十匣 히 이 로 十匣 滿 月 十匣 오 루 도 十匣 自行車票 五匣 人 物 票 十匣 鷄 票 五匣 만 부 十匣 靑 紙 烟 五匣 環 票 十匣 黃 紙 烟 五匣 以上 各種 中 一種 만 持來 시면 一人 의 代金 을 當 但 紙烟匣 이 無 야 不得已 境遇 에 代金 도 収入 [자료] "참신 굉장 활동사진", 《대한매일신보》, 1909.06.09. 佛蘭西 巴里城 떼 兄弟商會 漢城 特派員 이 東大門 內 光武臺 에셔 來 六月 捌日 부터 每日 午后 八点鍾半 에 活動寫眞 을 開設 空氣 를 應用 야 發出 留聲器 로 歐米 各國 奇妙 歌曲 과 壯快 軍樂 을 吹奏 며 仝 風景風俗 을 撮寫 야 新鮮美 麗 畵本 을 每日 別種 으로 交換 恒常 보아도 롭슴니다 觀覽料 壹等 四拾錢 二等 二拾錢 三等 拾錢 5 . 「극장 파순(泒巡) 보호」《황성신문》 1910년 2월 16일자. 近日 東大門 內 光武臺 에 光觀人 이 多數 故 로 何等 爭鬪 가 不無 다 야 東部警察署 에셔 巡查 八名 을 再昨夜 에 該臺 에 泒送保護 얏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