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에베레스트
- 감독
- 임채유
- 제작년도
- 2005
- 출연
- 박선영
ㅁ 1. 유락관 유락관은 오쿠라구미(大倉組)의 오쿠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郎)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자본금 7만5천원의 연예주식회사가, 세계관이 가진 활동사진흥행권을 5,000원에 매수하여 1915년 설립한 영화관이다. 개관식은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가 한창이던 1915년 9월 12일에 열렸다. 9월 19일에는 개관과 영업을 축하하는 신축낙성축하회(新築落成祝賀會)가 개최되었고 영업은 9월 20일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극장의 운영은 출자자 중 한명인 경성호텔(京城ホテル)의 나카하라 테츠오미(中原鐵臣)가 맡았다. 유락관은 혼마치 중심지에 건립되었는데, 인접해 있던 다카키상점(高木商店), 미쓰코시오복점(三越吳服店), 백삼십은행(百三十銀行), 쓰카타니잡화점(塚谷雜貨店) 등이 화재의 위험을 이유로 설립에 항의하면서 당국으로부터 월 2주의 활동사진흥행 허가만을 얻었다. 또한 대정관과 수좌가 상영하고 있는 닛카츠 필름을 똑같이 상영하면서 일본인 상설관 3곳이 닛카츠 필름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유락관은 개관 초기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1915년 말에 이르면 5,000원에 가까운 적자를 보았고 극장운영을 책임진 마쓰이(松井) 지배인이 야반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자료] 희락관의 외관(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개관 이후 장기간의 휴관과 개관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유락관은 결국 매물로 나왔고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 마쓰타로가 이를 매수, 황금관을 대신하여 근거지로 삼게 된다. 하야가와연예부가 운영하는 유락관은 1917년 3월 22일 개관했다. 이후, 1917년 7월 27일부로 연중무휴의 활동사진 흥행 허가를 받은 유락관은 고바야시상회에서 필름을 배급받게 되면서 황금관과의 필름 중복문제도 해결하여 큰 폭의 약진을 하게 된다. 유락관은 닛카츠나 텐카츠에 비해 소규모 영화회사이던 고바야시상회의 필름을 공급받았기에 연극부 변사들을 이용한 연쇄극과 실연을 통해 관객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고바야시상회가 도산하여 유니버설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자 유락관에서는 유니버설로부터 필름을 공급받아 유니버설의 연속영화와 블루버드, 레드페더 영화를 상영하는 양화관으로 전환하게 된다. 하야가와연예부는 유락관으로 이전하기 직전, 울산 배경의 연쇄극 <문명의 복수(文明の復讐)>를 제작하여 황금관에서 상연한바 있었다. 이후 유락관으로 이전하고 나서는 황금관과 경쟁하기 위해 영화제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19년 황금관에서 제작하여 상영한 부산의 출정군인 나카후치 센타로(中淵仙太郞) 일가의 비참한 삶을 그린 <누의 가(淚の家)>에 자극을 받아 유락관에서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제작했다. 하야가와연예부에서 직접 각색하고 도쿄의 고바야시상회에 의뢰하여 제작한 <아, 스즈키교장(嗚呼鈴木校長)>이 바로 그 영화이다. 1918년 12월 5일에 용산 원정심상고등소학교(元町尋常高等小學校)에서 발생한 화재로 교사가 소실되자 그 책임에 불속에 몸을 던져 자결한 스즈키(鈴木志律衛) 교장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1919년 4월 28일 개봉되어 5월 6일까지 연장 상영되었다.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하야가와연예부는 유락관을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둔 만카츠에 매각하였다. 만카츠가 인수한 유락관은 1919년 5월 8일 만카츠의 다른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희락관(喜樂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닛카츠계통의 영화관으로 운영된다. 2. 희락관 1919년 5월 8일 만카츠 직영으로 개관한 희락관은 서양영화 전문관으로 쇠퇴하고 있던 유락관과 달리 일본영화와 서양영화를 섞어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이중 일본영화로는 대정관이 독점하고 있던 닛카츠 영화를 상영하였다. 1920년 닛카츠가 경성출장소를 설치하고 고지마 사다시치(小島定七)를 주임으로 임명했다. 닛카츠의 부사장 요코다 에이노스케(横田永之助)가 희락관의 주주이었던 관계로 희락관은 만카츠 직영에서 닛카츠 직영으로 바뀌었다. 만카츠가 직영하던 시기부터 희락관에서 활약하던 요코야마 후미오(橫山富美雄)가 계속하여 운영을 맡았는데 요코야마가 운영하던 희락관은 설명을 잘하는 변사가 많기로 유명했다. 닛카츠 직영인 희락관이 닛카츠의 주요 영화를 상영하게 되면서 닛카츠 조선대리점인 대정관과 갈등을 빚게 된다. 희락관은 대정관과 협의하여 대정관에서는 마키노 쇼조(牧野省三)가 연출하고 이치카와 아네조(市川姉藏)가 출연하는 니카츠 대장군촬영소(大將軍撮影所) 제2부의 영화(현대물)를 주로 상영하고, 희락관은 일본 최초의 대스타이자 1,0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오노에 마쓰노쓰케(尾上松之助)가 출연하는 닛카츠 대장군촬영소 제1부의 영화(시대물)를 상영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대정관과 희락관의 협정은 1921년 닛다연예부가 더 이상 닛카츠 영화를 상영하지 않기로 하면서 깨졌고 이로써 희락관은 경성의 유일한 닛카츠영화 개봉관이 된다. 1922년, 희락관의 운영자가 요코야마 후미오에서 유바 시게미츠(湯場重光)로 바뀌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 해락관(偕樂館)에 있던 마쓰다 마사오(松田正雄)가 운영을 맡게 된다. 마쓰다가 운영하던 시기 희락관은 영화선전에 가장 능한 영화관으로 정평을 얻었고 경성의 일본인 상권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기에 대표적인 경성의 일본인 영화관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당시 수준 낮은 오락영화라고 평가받던 연속영화나 오노에 마쓰노스케가 주인공을 맡은 인술(忍術)영화를 주로 상영하여 언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위치상 이점으로 인해 희락관은 다른 영화관들에 비해 많은 관객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1924년 대정관을 경영하던 닛다연예부의 닛다 슈키치(新田秀吉)가 마쓰다 마사오를 지배인으로 두고 희락관을 잠시 경영한 적도 있었다. 닛다 슈키치는 1925년부터 대정관 운영에서 손을 떼고 희락관을 쇼치쿠 계통의 영화관으로 전환하려 했지만 희락관의 대주주가 닛카츠의 요코다 에이노스케였기에 이에 실패한다. 닛다 슈키치에 이어 마쓰다 마사오가 다시 희락관의 운영자가 되면서 희락관은 경성의 흥행계를 주름잡게 된다. 1927년 무렵 닛카츠 직영관 중 굴지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경성 제일의 인기관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1928년 무렵 경성과 용산 사이에 위치한 경룡관이 닛카츠 계통이 되고 과거 경성부청 자리인 혼마치 입구에 제국키네마 영화를 상영하는 낙천지(樂天地)가 생기면서 희락관은 관객 동원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당시 희락관의 주요 관객들은 영화관 뒤편의 게이샤 거리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희락관은 닛카츠 시대극이 인기를 끈다는 평을 얻었다. [자료] 마지마 우메기치의 모습 (조선신문 1937.02.09) 1930년대 들어 희락관의 운영주는 마쓰다 마사오(松田正雄)에서 마지마 우메기치(間島梅吉)로 바뀌게 된다. 희락관의 새로운 경영자가 된 마지마는 일찍이 조선으로 건너와 명치정에 마지마상회(間島商會)를 열어 크게 성공한 실업인이었다. 희락관을 운영하게 된 마지마는 1931년 10월 거액을 들여 희락관을 증축하기로 계획하고 스팀설비를 갖추는 것을 비롯해 발성영사기 설치, 관람석의 개조, 해설 음악 선전부를 충실히 하는 등 대대적인 개조를 하게 된다. 여기에 1933년 4월 1일부터 닛카츠가 가지고 있던 희락관에 관한 권리를 포함하여 일체를 인수하게 되면서 희락관은 닛카츠 직영에서 마지마흥행부로 그 운영 주체가 바뀌었다. 희락관을 인수한 마지마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닛카츠와 특약을 맺고 우수한 토키영화를 상영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자료] 희락관의 개장기념 광고 (조선신문, 1931.10.10) 희락관은 1936년 9월 다시 한 번 크게 개축된다. 희락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가장 크고 호화로운 영화관인 명치좌가 들어설 예정이어서 희락관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1939년 토키영화관으로 신축한 황금좌가 오랫동안 희락관이 가지고 있던 닛카츠 개봉관이라는 지위를 빼앗아 가면서 낡은 영화관이라는 인식이 있던 희락관은 닛카츠 2번관으로 전락하게 된다. 희락관의 위상과는 상관없이 희락관 운영주 마지마의 영향력은 점차 커졌는데 1935년 마지마는 경성부위원에 당선되었고 1942년 조선흥행연합회 이사장의 지위로 일제가 전시체제 하의 영화배급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조선영화배급사의 이사로 있었다. 희락관은 해방 직전까지 운영되다가 일제의 패전 직전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는데 해방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소실되기 전 희락관은 총 1,050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자료] “巡回活動 「愛の極み」 劇 撮影終了す”, 《京城日報》, 1922.03.21. 來月十五日から釜山から 全鮮を巡回上場す 來る四月十五日から本紙愛讀者慰安の爲め全鮮を巡廻する本社活動 寫眞は本社員八島柳當氏脚色 愛の極み を上演する事となり二月初旬 より撮影にかゝり仁川月尾島,京城市街,朝鮮の代表的靈山金剛山等を 背景に幾多の苦心を費し去る十七日漸く撮影を終り直に現像し旣報の通 り來月十五日から釜山を振り出しに鮮內各地を巡回上演の筈である。 劇の梗槪 本社主催仁川海水浴場大會が催された日は晴れ亘った、一際の凶變に は應はしからぬ日であったが、暑い陽光の降り注ぐ下を群を離れて獨り貝 拾ひをしながら磯を傳って行く小鳥の樣な乙女があった、彼女が岩を亘り 步くうちに可憐な凶變が釀されて居たのである。此の麗しの乙女こそは、今 京城に時めく銀行家朴炳熙氏の令孃貞玉で今日の催しに京城から伴れ來 のであった。又此の時, 名も無い一人の京城に在住する畵家が仁川の海邊 で熱心に、陽の下に憂鬱を海のスケッチに懸って居った、時の經ると共に潮 は膨れ上がって來て地續きで有った磯邊には急に島となる樣な處が多 かった。此の翼を持たぬ小鳥貞玉も亦何時かその離れ小島の孤獨な守人 となって了った、然し未だ未だ潮は膨れ上がって來る。島は沈んで行く。彼 の女の悲鳴が平靜な溱の中に凶々しい悲調を投げた。一方スケッチに心を 取られて居った畵家はこの慘々しい悲鳴に依って呼び覺まされ小舟を求めて、 浪間の岩より貞玉を救ひ出した。事も無げに畵家に再び畵架に向った。 名を貞玉のために語ることをも仕なかったが、貞玉は繪道具の隅から勝 木と云ふ姓を認めた、又その執筆中の繪には今の危い岩も有った。勝木と は勿論畵家の姓で名は忠雄と云った。彼は父を戰場に失つて眼の惡い病 弱の母と妹の露子と三人のために、京城日報の配達に從事して居った。子 の苦鬪を見兼ねた病母は遂に自殺して失った。彼等兄妹の數日の後まで 續いた。そのうち勝木か或る鮮人邸に配達した時門前で思ひ懸け無く貞玉 に會った。 貞玉は恩人の忠雄を逃して失った貞玉は其の頃同じ銀行家の令息趙永 植から結婚の申込を受けて居ったが彼の女の魂の中では忠雄位光って居 るものはなかった。 其頃の京城では稀らしく盛大な新進畵家の展覽會が京城日報社の來靑 閣で行はれた、勝木忠雄も或海岸を出品した、その作品を見出して買び 上げたのは婦人であったが、婦人の求め樣とする價額の高價は淸廉な忠雄 を驚かした。婦人は忠雄の高潔な言葉を取次がれて益々憧れの心を燃し た。間も無く勝木は朝鮮美展出品製作のために金剛山に出た。兄を金剛山 に送るために妹の露子は工場に通って居ったが、自然の惡戱は益々烈しく なって來た工場の歸途一臺の自動車は彼の女を轢き倒した。車の中から驚 き飛び出して來たのは貞玉であった。露子は貞玉の家に引き取られた。姉妹 の樣に成つた貞玉と露子はふとした話から勝木との因緣を知り二人其金 剛山の忠雄を慕ふたので遂に二人は金剛山に向った。 是を見て驚いたのは貞玉に思ひを寄せる趙永植である、彼は直に彼女等 の自動車を追った。次は山中の光景であるが、誤つて趙永植が谷間に墜落 したので、露子が救け樣として是は遂に一命を落すに至る負傷をした。人の 性は善と云ふ例え、永植は立派に貞玉と走せつけた忠雄の爲めに彼等の握 手を助けた。遂に貞玉と忠雄の夢が現實と成る日か來たのである。 妹を失って戀人を得た忠雄は男の心を亂して悲喜交々として露子を歸らぬ旅 へ送り、貞玉をその傷める胸に抱き締めて泣した。此處に始めて勝木は人 生の明るみに出て來た樣な幸福を感したのである。 此の劇の中に植付けられた人情は總て可憐な美、正しきもの、淸楚なも のである是を以て本社が讀者の慰安會材料と爲すに決した事は家庭的見 物として實に應はしいからである。幸ひに讀者諸士よ、此の貧しい節書きを 離れてそのフヰルムの中に如何なる情景、如何なる美景が取入れてあるか な待たれよ。 愛の極み 撮影を了りて 八島柳堂 愛の極み の作者として又脚色から撮影監督迄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 た私は可也の苦心を味はされた第一筋が高尙であらねばならぬと云ふ事 と內鮮人向きたるは勿論學生に觀せそも差支のないものと云ふ難しい條 件附きなので何うしたら此條件を全ふし面白く觀せる事が出來るかに就 て隨分頭を疲れさせた。 或時は出張先の宿屋で思索に耽る事黎明四時に及びやっと書き上げて 脚色の段となって此處も工合が惡い彼方も拙いで又一苦勞させられた 愈々撮影に取掛って見ると折角選定して置いた室が意外にも暗くて撮影 技師から苦情を申込まれたりして眞實に苦しい思ひをさせられた、而し役 者は藝術の爲めにはドンナ事でもすると云ふ約束もあったので私の云ふ 事をよく聞いて働いて吳れた貞玉と云ふ婦人を貧乏畵家が救助の場面等 は此寒空に海ベラの夏衣裳で荒浪の海中へ飛び込まして活躍をさせたの で四肢の感覺を失ひ 殺す氣ですか と悲鳴をあげられたり又或場面では 妹に粉した女優に自動車に轢かれよ運轉手は彼を轢けと命じ今から思ふ とゾッとする程危險を犯させた又金剛山中の墜落の場面では高い斷崖か ら實際に墜落せよと命じ 恐いわよ恐いわよ と女優に泣かれ實際同情せ ずにはゐられなかった是は替玉を使へば何んでもない事であるが眞實に劇 を生かして見せる上から云ふと此位の危險は犯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 危險を敢て犯かさせた而し大した怪我もなくって胸を撫でなから天祐を 嬉んだ役者諸君は撮影監督としての私を隨分恨んだ事であろう而し之も 立派な寫眞が作り度い一念からである。
① 황금관 1913년 1월 1일 개관한 황금관은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건너온 다무라 기지로(田村義次郞)가 세웠다. 위치는 지금의 을지로 4가인 황금정 4정목에 있었는데 루나파크(Luna Park)인 황금유원(黃金遊園) 내 활동사진관으로 시작되었다. 설립 초기 황금관은 필름 수급의 어려움과 운영상의 미숙으로 고전하였으나 대정관 매점을 운영하던 하야카와 마쓰타로(早川增太郞)가 운영을 맡게 되면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하야카와는 대정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질이 낮은 영화를 상영했음에도 조선 내 일본인 관객들에게 가장 큰 인기가 있던 변사 유모토 교하(湯本狂波)와 여자 변사 아시자와 하쓰에(蘆澤初江) 등을 고용하여 많은 관객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황금관은 하야카와의 이름을 딴 하야카와연예부(早川演藝部)를 통해 운영되었다. 1914년 하야카와연예부는 텐카츠(天活, 천연색활동사진회사의 약칭)의 선만대리점으로 텐카츠에서 수입, 제작한 2색 칼라영화인 키네마칼라를 본격적으로 상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서울의 우미관을 비롯해 인천의 표관, 평양의 평안극장 등 지방의 영화관에 필름을 공급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필름 값이 폭등하게 되자 일반 영화보다 필름을 두 배 더 사용하는 키네마칼라 필름을 대신하여 활동사진의 일부를 변사들의 실연으로 보여주는 연쇄활동사진을 도입해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했다. 하야카와연예부의 영향력은 당시 조선의 영화산업을 주도하던 대정관의 닛다연예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황금관은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5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를 위해 만들어진 연예관(演藝館)을 사들여 기존 건물 옆에 옮겨지은 후 1916년 6월 10일 새로운 건물로 확장 이전하였다.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황금관은 1917년 황금관 소유자인 다무라와 하야카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유락관으로 그 본거지를 옮긴 하야카와연예부를 대신하여 낭화관의 운영자 니시다 가조(西田嘉三)를 급하게 운영자로 섭외한다. 하지만 니시다는 영화관 운영 경험이 없었기에 영화관이 운영될 수 있게 틀만 잡아 두고 아라키 다이스케(荒木大助)에게 운영권을 넘기게 된다. 아라키가 운영하던 시기 황금관의 가장 큰 성과는 극영화를 제작했다는 점이다. 1919년 2월 21일 상영한 부산의 출정군인 나가부치 센타로(中淵仙太郞) 일가의 비참한 삶을 그린 <누의 가(淚の家)>가 바로 황금관에서 제작한 극영화이다. 이 영화는 경성일보사 기자의 지도하에 제작되었으며, 각본은 황금관 운영자인 아라키가 썼다. 이 영화는 조선거주 일본인들이 만든 최초의 극영화로 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재조선 일본인들의 삶을 소재로 삼았기에 경성의 일본인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사진] 황금관이 인수한 조선물산공진회 연예관 1919년 텐카츠가 해산되어 국제활영주식회사(國際活映株式會社, 곳카쓰[國活])로 바뀌면서 황금관에서는 곳카쓰(國活) 영화를 상영했으나 고전하게 된다. 1921년 말, 황금관은 유니버설 영화만을 상영하는 서양영화 전용관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서양영화전용관으로 전환하는데 앞장선 이가 새롭게 황금관을 운영하게 된 황금관 전무인 변사 난고 기미토시(南鄕公利)였다. 그는 서양영화의 설명에 능한 인물로 한때 서양영화전용관으로 운영되던 유락관에서 근무하다가 황금관으로 옮겨온 바 있다. 황금관은 1922년 9월 다이카츠 쇼치쿠와 계약을 맺고 쇼치쿠 계통의 영화관으로 운영되다가 1924년 1월부터는 새롭게 등장한 제국키네마(帝國キネマ) 조선 봉절장으로 있었다. 1925년 9월부터 다시 하야카와 마스타로가 운영을 맡았다. 그러나 1926년 2월에 하야카와 마쓰타로가 조선에서의 활동을 접으면서 마키노키네마(マキノキネマ), 도아키네마, 제국키네마 등이 직영하게 된다. ②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 1928년 4월에는 신문기자 출신으로 외화 수입업자로 활동하던 도쿠나가 구마이치로(德永熊一郞)가 황금관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직속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는데 도아키네마 영화뿐 아니라 다른 중소회사의 영화들도 상영했다. 동아구락부의 운영자 도쿠나가 구마이치로는 규슈 출신으로 1920년대 초반 대구로 건너와 흥행업에 뛰어 든 이후 1920년대 중반 서울로 근거지를 옮겨 외국영화 수입회사인 덕영상회(德永商會)를 설립하고 고베의 동서영화주식회사(東西映畵株式會社)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워너브러더스와 FBO영화사의 영화를 수입 배급했다. 덕영상회에서는 외화 수입 외에 도아키네마를 비롯해 중소 규모 영화회사의 필름을 상영했고 덕영프로덕션을 통해 영화제작도 했다. 덕영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영화로는 토성회와 함께 제작한 이규설 연출, 복혜숙 주연의 <홍련비련>과 <순정은 신과 같다>와 같은 관청 납품용 교육(문화)영화들이 있다. 동아구락부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이 인기 있는 작품들이 아니어서 저렴한 입장료를 매기는 대신 자주 프로그램을 바꾸면서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 동아구락부는 일본인 상설관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던 극장이었다. 1930년부터 조선에서 토키영화가 본격 상영되기 시작하자 닙튼 영사기를 구비하여 토키영화를 상영하였다. [사진] 1936년 신축되어 1999년 사라진 국도극장(1961년 경, 출처: 국가기록원) ③ 쇼치쿠좌(松竹座) 1934년 3월 말로 계약이 끝나는 쇼치쿠 영화에 대한 대정관의 독점권을 두고 서울의 극장들이 쇼치쿠 개봉관이 되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주도권을 쥔 것이 동아구락부였다. 동아구락부에서는 쇼치쿠 개봉관의 지위를 얻게 되자 이를 기회로 극장 이름도 동아구락부에서 쇼치쿠좌(松竹座)로 바꾸었다. 1934년 7월 13일이었다. 쇼치쿠좌는 정원이 1,033명이 들 정도로 거대한 극장으로 보통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으로 불리었다. 하지만 시설이 낙후하여 1935년 6월 토키영화관으로 신축이 결정된다. ④ 황금좌(黃金座) 쇼치쿠좌와 그 뒤 과거 광무대가 있었던 곳을 합하여 총 600평의 부지에 건설비 30만원에 무대장치 완비하여 건설되었다. 개관 당시 쇼치쿠의 흥행권이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마키노영화를 상영하게 되자 극장 이름을 쇼치쿠좌에서 황금좌로 바꾸었다. 개관일은 1936년 11월 15일이었고 정원은 1,136석이었다. 도쿠나가가 운영하던 황금좌는 1937년 12월 도와(東和)상사 조선지사의 고인문(高仁文)으로 운영자가 바뀌게 된다. 파라마운트를 비롯해 각종 외화를 수입하는 도와상사가 황금좌를 운영하게 되면서 황금좌는 서양영화를 비롯해 조선영화의 상영장으로 자리 잡게 된다. 특히 최남주의 조선영화사는 공식적으로 황금좌를 자사의 봉절관으로 정하게 된다. 당시 외국영화와 일본영화를 함께 상영하도록 했기에 도와상사가 운영하던 황금좌에서는 닛카쓰 영화를 상영하며 닛카쓰 개봉관이 된다. 전통적으로 닛카쓰영화를 개봉하던 희락관은 2번관으로 바뀌게 된다. ⑤ 경성보총극장(京城寶塚劇場)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수입제재가 장기화되면서 도와상사의 고인문은 황금좌 운영에서 손을 뗀다. 황금좌 소유자 다무라 미네(다무라 기지로의 미망인)는 황금좌의 운영권을 회수하여 요시모토 흥업과 보총극장이 제휴한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에 넘긴다. 황금좌는 1940년 5월 1일부터 이름을 경성보총극장으로 바꾸었다.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은 극장 운영을 위해 자본금 85만원의 주식회사를 성립하게 된다.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의 진용은 사장 하타 도요키치(秦豊吉, 동보), 전무 하야시 히로타카(林弘高, 요시모토), 취체역 나와 미쓰마사(那波光正, 동보), 하야사 쇼노스케(林正之助, 요시모토), 감사역 온다 다케이치(恩田武一, 요시모토), 마나베 야치요(眞鍋八千代, 동보측)이었으며 실무는 지배인 우메미야 사부로(梅宮三郞)가 맡았다. 1940년대 경성보총극장은 성보극장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다. 이 영화관은 조선영화의 개봉관으로 이용되었는데 <집 없는 천사>(1941), <복지만리>(1941), <창공>(돌쇠의 개제)(1941), <그대와 나>(1941), <신개지>(1941) 등이 경성보총극장에서 개봉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연예를 통한 선전활동이 강화되면서 1942년 9월 20일 경성보총극장 직속의 성보연예부가 신설된다. 연예보국의 영역을 확장키 위해 만들어진 성보연예부에서는 동보연예배급사 요시모토흥예배급부(吉本興藝配給部)의 지원과 만주연예협회와의 연락을 통해 내지 연극연예단을 조선에 소개하고 조선의 연극연예의 배급과 흥행을 맡았으며 그 산하에 성보이동연예봉사대를 조직하여 각종 위문연예를 제공했다. 경성보총극장은 1943년 7월 30일 조선흥행연합회에서 1급에서 11급까지 등급을 나누었을 때 서울의 영화관 중 명치좌와 약초극장과 더불어 1급관으로 80전의 입장료를 받을 수 있었던 대표적인 영화관이었다. 해방 직전 화재로 인해 문을 닫은 성보영화극장은 해방 이후 내부를 수리하며 재개관하게 되는데 이때 이름을 국도극장(國都劇場)으로 바꾸었다. 국도극장은 1999년까지 운영되었다가 폐관하였다. 현재 극장이 있던 자리에는 호텔이 들어서 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 [사진](상단). 황금유원 설립자 다무라 기지로(『京城府之卷』, 京城府) [자료] ≪경성일보≫,1919.02.21. 淚の家 全五卷 當館封切 黃金館 京城日報記者指導 黃金館主 荒木大助 脚色 釜山出征軍人 中淵仙太郞氏の家族 ▲夫の出征後妻は貧0の身に又一兒を産み産後の患ひより遂に歸らぬ旅0 の人となる、頑是なき七人の子は飢に泣き水よ飯よと取0る0他の見ろ 目 0實に哀れ悲慘の淚なり ●六人の子は飢に泣き妻は臨月の腹を抱つて病床に臥す出征軍人の大 悲慘なる家族、 噫々薄命なる勇士 ●0の難を見て惻隱の情を勤かすは仁の端と云ふ大方の士御觀覽の上一 掬御同情あらん事を43)(0은 판독불가-인용자) [자료] ≪경성일보≫, 1919.02.23. 初日 二日 滿員 黃金館 荒木大助 脚色 事實悲劇 淚の家 ▣ 當館特別撮影 大阪樂天地に京都京座に名古屋新守座に於て連日大盛況の本0は劇以上 に出色せしめたる實に現在釜山にある大悲慘事 此哀れなる寫眞を見られて誰れか泣かれぬ方ありや 本日 晝夜 開演 黃金館45)(0는 판독불가-인용자) [자료] "연기관의 대소요, 연극 즁에 큰 소동, 일반 연극의 주의" 《매일신보》, 1913.2.22. 십구일 오후 십시에, 남부 산림동(山林洞) 황금유원 안 연기관에셔, 한 소요 일이 잇셧 , 연기관에 , 혁신단 림셩구(林聖九) 일 이, 신파연극을 흥 즁, 그 시각에, 그곳에셔 고용 , 광도현인 포 신조(廣島縣人 蒲生信造) 삼십륙셰된 쟈가, 왼편 손에 연극에 쓰 , 폭발약을 만히 쥐고 셧다가, 그릇 불이 이러나, 굉쟝 형셰로, 젼부가, 폭발되얏슴으로 그 근쳐에 잇던, 흔 고용인, 즁셔, 쇼숑, 쇼뎐(中西, 小松, 小田) 등, 삼인도 즁샹을 입어, 젼귀 명을, 즉시 그 부근 지샹의원(池上醫院)으로, 메여다가 치료 즁인 , 그 즁 포 은, 왼편 손이, 젼부가 파괴되얏슴으로, 지샹씨의 집도로, 대슈슐을 시작 야, 팔을 버혓 , 지금 형샹으로 , 명에 , 관계가 없슬 듯 나, 눈망울과 기타 크게, 화샹 곳이 만아, 보기에 우 참혹 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8.07.05. 日本天然色活動寫眞株式會社 技術部 新案 米國式 스데-지 기네오라마 應用 事實劇 船長의 妻 黃金館은 新築二週年 記念 特別 大大興行으로 右 天活會社 技術部員 拾數名을 招 야 七月五日부터 公開 다 歐洲戰亂以來 敵 潜航艇으로 因 야 商船의 遭難이 不... 바 昨年 我 日本最初의 武裝船 ○○會社 ○○丸도 其 慘禍에 罹 얏더라 今回 黃金館은 其 巨大 舞臺 一面에 前記 天活會社 獨得의 「스데-지 기네오라마」를 應用 고 電氣仕掛로써 當時의 實況을 看客 諸君에 示코져 今 基 光景을 略述 지면 英國 包台 不飽히 探照燈을 照 야 獨히 潜航艇 並 飛行機의 襲來를 監視 月은 皎皎 야 海 照 고 金波 銀波 靜動中에 我 ○○丸은 警戒 中 航行 天候 俄然히 變 야 數千의 星은 急히 其 光을 沒 야 一天은 忽然 暗黑 敵艇 及 飛行機 其 機를 乘 야 「 버」海峽에 馳來 야 我 ○○丸을 發見 고 .....水雷를 發射 고 又 爆彈을 投下 ○○丸 其 ....의 活躍인 實로 慘劇 其 物을 目擊 에 不異 고 誰何든지 科學의 進步 光學 應用의 巧妙 에 驚치 안이치 못 이라 「스데-지, 기네오라마」에 就 야 內地에 旣히 定評이 有 고 今 玆에 ....言을 不要 고 黃金館은 鮮人 各位의 觀覽에 供 기 爲 야 特히 此 一團을 招聘 얏더라 米國 단호자會社 作 連續 二十三編 四十六卷 連續 大活劇 百萬弗의 秘密 第一 第二篇 上場 臨時觀覽料 特等 七十錢 一等 五十錢 二等 三十錢 軍人學生各等半額 黃金館.
1937년 벽두 《삼천리》에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경무국장에게 보내는 아등(我等)의 서(書)」 1 라는 제목으로 실린 공개서한은 식민지 조선 대중의 자본주의적 욕망과 문화적 욕구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자료로서 그동안 자주 언급돼 왔다. 이제는 너무 익숙한 제목과 내용이지만, 이 공개서한을 다른 맥락과 겹쳐 읽는 것으로 이 글의 서두를 열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공개서한에 연명한 이들은 “대일본레코-드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 조선권번 기생 오은희, 한성권번 기생 최옥진, 종로권번 기생 박금도, ᄲᅡ- <멕시코> 여급 김은희, 영화 여우(女優) 오도실, 동양극장 여우 최선화”이다. 한 명의 남성과 일곱 명의 여성. 일곱 여성들의 직업은 마담, 기생, 여급, 여배우로 그들은 모두 근대 도시의 유흥과 여가에 종사한다. 공개서한의 수신자는 부임 3개월째를 맞는 미쓰하시(三橋) 경무국장이었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라는 도발적인 제목과는 달리 “미쓰하시 경무국장 각하여”라며 공손한 어투로 시작된 서한은, ‘댄스홀’이 문명 도시를 가늠하는 상징적인 기준이며 ‘댄스’가 얼마나 건전하고 명랑한 오락인지를 극도의 존칭과 경어를 사용하며 조목조목 설득한다. 여기서 경무국장에 대한 존경과 자신들에 대한 겸양은 다소 과도할 정도인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당돌해 보이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이 공개서한은 경무국장에게 보내는 진지한 호소라기보다 경무국장에게 ‘댄스홀’ 허가를 요청하되 그 결과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의미 없는 메시지’임을 과시하는 ‘넌센스(nonsense)’다. 식민 도시 경성에서 벌어진 이 ‘넌센스’는 문자 그대로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에 누구도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다. 수신자인 ‘미쓰하시 경무국장’조차 이 공손한 서한에 공식적으로 화를 내지는 못했을 터이다. 그러나 경성의 모든 풍속에 대하여 취체의 책임이 있는 경무국장으로서, 그는 통제의 대상인 공개서한의 발신자들―끽다점, 권번, 바, 레코드, 흥행업 종사자들―과 《삼천리》의 독자들이 구성하는 공감 속에서 기실 유머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미쓰하시는 원래, 1936년 8월 조선에 부임한 미나미 지로 총독이 소위 ‘동아 정국’, 그러니까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한 정간된 상황에서 경무국장으로 임명한 인물이었다. 일본의 청년 장교들이 천황의 친정을 명분으로 쿠테타를 일으켰던 5.15 사건 이후 점차 짙어졌던 군국주의 기운이 조선에도 여파를 미치던 시점에서, 경무국장에게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는 내용의 서한을, 그것도 경성에서 술과 노래와 음악과 연기를 업으로 하는 이들이 보낸다는 것 자체가 당돌한 일이리라. 그렇다면 이 넌센스는 그저 의미 없는 농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이들이 놓인 권력의 위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긴장을 돌발적으로 노출한 사건일 수 있다. “만주사변 직후에 우가키 전(前) 총독은 서울 있는 신문 기자를 향하여 국가 비상시에 딴스는 허가할 수 없다고 말했읍니다. 그러나, 만주사변은 모다 이제는 평정하게 되고 평화의 기상이 세상에 차고 있지 않읍니까”라는 호소는 일본과 조선에서 ‘비상시(非常時)’라는 말이 다시 유행하는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도쿄에서도 댄스홀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던 터에, 식민지의 도시 경성에 댄스홀이 허가될 리 없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근 8년간은 ‘전쟁의 시대’이자 ‘총동원의 시대’였다. 식민지 조선의 삼천리 방방곡곡에 ‘총동원 체제’가 가동되고 ‘비상시’가 장기화됨으로써 ‘비상시의 상시화’라는 상황적인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된다. 1937년 벽두 ‘댄스홀을 허하라’는 이 느닷없는 호소문의 넌센스는 ‘비상시의 상시화’라는 상황적 아이러니에 대한 예보, 비상시의 일상에서 수도 없이 발생하는 ‘의미의 과잉’과 ‘무의미의 의미’에 대한 예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상시가 아니다’라는 이 단순한 의미의 ‘비상시(非常時)’는, 1937년 이후 보다 구체적인 맥락에서 사용된 ‘전시기(戰時期)’나 ‘전환기(轉換期)’, ‘신체제(新體制)’ 등과 계열을 이루게 된다. 중일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엘리트들 사이에서 이미 유행했던 ‘전환기(轉換期)’라는 표현이 어떤 혼란이나 불안을 내포한 것이었다면, 1940년 제2차 고노에(近衛) 내각이 출범하면서 내걸었던 ‘신체제’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전시체제에서의 선명한 수행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비상시’는 이러한 ‘전환기’의 불안과 ‘신체제’의 수행을 모두 아우르는 동시에, 통치 주체로 하여금 전시에 발생하는 그 어떠한 제도적 폭력과 비합리성도 정당화하면서 아무런 기약 없이 정상화를 유예할 수 있게 하는 주문과 같았다. ‘비상시가 상시화’되고 사회의 전분야가 전시체제로 재편되는 가운데, 식민지 조선의 각 주체들은 지역별(도시와 농산어촌), 직능별(노동자, 농민, 지식인, 문인 등등), 젠더별(‘청년’, ‘소국민’, ‘총후부인’ 등)로 자신이 어떻게 ‘봉공(奉公)’하고 ‘보국(報國)’하는지를 전시했다. 주체들의 이러한 자기 전시 혹은 자기 증명은 전시체제 속에서 ‘진술적인(constative)’ 언어들이 ‘수행적인(performative)’ 언어로 전환되는 과정과 겹쳐지기도 한다. 예컨대, ‘나는 총후부인이다’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진술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참과 거짓의 판단과 연관되기보다는 오히려 ‘총후부인 되기’를 선언하는 것으로, 이를 끊임없이 자각하고 수행하는 실천을 동반하게 된다. ‘봉공(奉公)’이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이때의 ‘나’는 ‘나의 것’이기도 하며 ‘나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비상시의 ‘국민(國民)’이라면 심지어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는 것까지 일상의 매순간을 국가와 연관지어야 하며 ‘비국민(非國民)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공중(公衆) 앞에서 과잉된 언어와 제스추어로 자기를 전시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사회의 모든 혼란과 무질서의 원인이 ‘비상시’로 수렴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해득실이나 생존의 문제도 ‘비상시’라는 말뚝에 얽매여 있었다. 그런데 제국주의 전쟁이 초래한 ‘비상시’의 일상 속에서 이 수행적 언어들이 갖는 동원의 효과는 어디까지였을까. 전쟁이 장기화되고 비상시가 더 이상 비상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일상의 모든 것이 시국(時局)과 연관되어 있는 한편으로 그 시국의 긴장감은 둔화되어 버린 순간, ‘신체제’니 ‘봉공’이니 ‘보국’이니 하는 말이 어떤 감흥도 없이 상투어처럼 내뱉어지는 순간, 이러한 순간순간들에 ‘비상시’는 필연적으로 ‘의미의 과잉’이나 ‘무의미의 의미’를 낳는 것이 아닐까. 전시체제하 개개인의 신체가 일상적으로 국가적 의례와 결부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국가와 결속시키는 그 순간순간들에서, 의미의 충만을 넘어선 과잉들은 필연적으로 어떤 전도(顚倒)를 초래하지 않을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는 가장 ‘숭고한 것’이 가장 ‘통속적인 것’이 되고 ‘비속한 것’이 ‘성스러운 것’으로 뒤집히는 상황이다. 그림1. 「극장에 늘어선 사람들에게 일감을 준다면」 출처: 《신시대》1941년 5월호, 182쪽 그림2. 「악극단」 출처: 《신시대》1941년 5월호, 180쪽 중일전쟁 발발 이후 식민 도시 경성의 극장가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어트랙션(attraction)’은 ‘비상시’가 초래한 넌센스의 상황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관객을 극장으로 유인하기 위해 메인 프로그램에 부수적으로 편성된 쇼를 일컫던 어트랙션은, 당시 경성에서 연극이나 영화와 거의 맞먹을 정도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여 때로는 연극과 영화의 아성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1930년대를 지나며 담론화되었던 ‘도시=소비/농촌=생산’의 이분법적 구획이 전시체제기에는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한편에서 도시에 집중되었던 극장을 농산어촌, 공장, 광산 등의 생산지대로 확산시키는 ‘이동극장’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숙(自肅)’과 ‘내핍(耐乏)’이 강조되는 사회적 분위기라고 해서 전쟁 전에 이미 팽창해 있었던 문화적 욕구들이 경성의 극장가에서 아주 사그라진 것도 아니었다.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서양영화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던 시기 프로그램의 공백을 메워가던 악극과 어트랙션이 전쟁의 장기화와 더불어 점차 프로그램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상황, 그리고 그 버라이어티 쇼가 반서구 정책에 의해 부정되었던 ‘재즈(Jazz)’나 ‘양풍(洋風)’을 풍부하게 접속할 수 있는 장소로서 위치된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근대의 극장은 언제나 국가 권력의 통제 아래 있었지만, 철저하고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경무국장에게 보내는 我等의 書」《삼천리》1937년 1월, 162~166쪽. ‘친일’과 ‘반일’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무너뜨리며 식민지 시기의 다채로운 풍경에 주목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김진송의 저서―『현대성의 형성: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현실문화, 1999)―가 이 공개서한의 제목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은 상징적이다. 2) 이 공개서한은 일본의 시인 사토 하치로(サトウ・ハチロー, 1903-1973)가 만주사변을 전후한 시점에서 발표했던 ‘넌센스’들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소설가, 수필가, 동요 작사가 등으로도 활동한 사토는 방탕과 기행을 일삼았다고 전해지는데, 단편집 『아사쿠사(浅草)』(素人社, 1931)는 특유의 넌센스가 넘치는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 「경시청감에게 드리는 글(警視総監に与ふるの書)」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는바, 어쩌면 이서구는 공개서한의 제목을 구상하며 사토 하치로의 넌센스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사토 하치로의 넌센스와 관련한 아이디어는 미리엄 실버버그의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근대 일본의 대중문화』(강진석·강현정·서미석 옮김, 현실문화, 2014)에서 얻었다. * 상단사진 1. 《삼천리》에 실린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기사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雙Q生「[거리의 수첩] 애트랙슌론(論)」《조선일보》1940년 6월 27일자, 4면. 흥행업자들에게 있어서 일 년 중 네 절기에 있어서 여름 같이 또 싫은 『씨-즌』은 없다. 우선 더워서 사람이 안 들어오니까 짐이고 낭패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름철만 어떻게 극장 문을 닫아버리고 그야말로 무슨 학교나 그런 곳 같이 ‘하기휴가’를 할래야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소위 요즘에 하나의 유행 같이 횡행하고 있는 『애트랙슌』인 것이다. 지금 서울서 우리가 『써-비스』 받고 있는 『애트랙슌』이란 얼른 말하자면 영화를 보고 또 거기다가 덤으로 노래나 춤을 공으로 보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애트랙슌』은 이러한 본질적인 의의에 견주어보아서라도 어디까지나 가볍고 명랑하고 즐거워야 한다. 한다가 아니라 했으면 한다. 그렇지 못하고 그저 우리들로서는 뭐가 무엇인지 이해키 어려운 것을 가져다가 그저 아쉬운 대로 『애트랙슌』이란 딱지만 붙여 내놓는다면 이거야말로 『애트랙슌』으로서는 낙제하지 않을 수 없을 비참한 『애트랙슌』이다. 그야 사람에 따라서는 그 사람의 취미나 교양에 따라서 영화보다도 『애트랙슌』에 끌리어 단순히 그것만을 보러 가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러한 관객이 하나라도 는다면 느는 그대로 극장으로서는 성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여튼 이 점에서 영화상설관은 연극상연단체나 극장보다는 유리하고 편리하다. 반대로 극단이나 연극만을 상연하는 극장은 그야말로 선전 『발류-』(value)가 찬란한 『애트랙슌』이 없이는 이 여름 한철을 무난히, 다시 말하면 결손 없이 돌파하기는 힘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화상설관에서는 『애트랙슌』이라는 미명 아래 값싼 오락물을 질서 없이 덤 주듯 한다면 이 역시 단순히 『애트랙슌』만을 보러 가지 않는 우리로서는 할 이야기가 과연 많을 줄 안다. 그것은 불평도 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항의도 될 수 있다. 2. 요시무라 고도 * 씨 담(談)「전시(戰時)의 생활 이대로 좋을까④ / 극장 앞에 늘어선 풍경 아메리카풍의 재즈와 레뷰 환영은 국민의 수치」《매일신보》1942년 1월 21일자, 4면. 생활에서 영미 양풍을 쫓아내자 총후를 명랑케 하는 수단으로서 건전한 오락을 건설하는 것은 국민을 위하여 국가에서 대단히 생각해온 바입니다. 시국과 관련하여 그처럼 건전 오락이 특별히 문제가 된 것은 지금까지의 오락이 건전치 못했던 때문이올시다. 그럼 지금까지의 오락이 왜 건전치를 못했나 하면 그것은 그 오락이란 것이 근대의 그 개인주의와 향락주의의 소산으로서 대개가 국민의 생활과 떠나서 순전히 향락적인 것으로 퇴폐해 갔기 때문이올시다. 만일 그 오락이 무슨 생활과 관계가 있었다면 그것은 도시의 유한(遊閑)한 젊은 남녀의 소비적인 향락 취미 생활에 뿌리를 박고 있었을 뿐일 겝니다. 그러니까 국민의 전체 생활로 보면 아무 관계없는 오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락이 저급해지고 타락이 된 데는 한편으로는 그것을 보아 온 여러분의 오락 취미가 그렇게 떨어져버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네가 자기의 취미를 돌아보면 잘 아실 겝니다. 극장에서 그 아메리카 풍의 재즈라든가 경박한 레뷰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극장 앞마다 장사의 진을 치고 젊은 남녀가 서로 어우러져서 몰려섰는 풍경은 이 시국에서 가장 보기 창피스러운 풍경의 하나인 줄 생각합니다. 이번 대동아의 전쟁이 되면서부터 당국에서도 적극적으로 통제를 하고 지도도 해서 일반 악극 단체에서도 많이 자숙해져서 이른바 악극에서 아메리카의 요소를 뽑아버리려는 노력도 있고 해서 퍽 색채가 달랐지만 근본 문제는 그 문제보다도 여러분 자신들의 오락에 대한 취미문제올시다. 여러분의 오락 취미로선 아직도 그런 아메리카의 경박한 향락적인 레뷰나 재즈를 좋아하는 경향이 마음에 남아 있다고 하면 이것은 국민으로서의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요, 또 자신네의 오락의 취미로서도 여간 부끄러운 바가 아닌 줄 압니다. 우리들의 모든 생활면에서 영미의 요소를 조사해가지고 청산해 버려야 할 이때에 우리 일상생활의 중요한 부분인 오락의 취미에 아직도 미국 같은 곳의 저급한 오락을 환영하는 경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것은 당국이나 지도 측에서 노력하고 지도할 점도 많겠지만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자진해서 깨닫고 오락에 대한 건전한 취미를 길러 가시기를 바랍니다. [강조는 원문] *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 :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소설가 등으로 활동했던 박영희(1901∼?)의 창씨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