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초
- 감독
- 오즈 야스지로
- 제작년도
- 1959
- 출연
- 나카무라 간지로, 교 마찌꼬, 수기무라 하루코, 와카오 아야코, 가와구치 히로시, 노조에 히토미, 류 치슈, 미츠이 코지, 타나카 하루오, 이리에 요스케, 호쉬 히카루, 우시오 만타로, 우라베 쿠메코, 타카하시 토요코, 사쿠라 무츠코
<성벽을 뚫고>의 육군 하사로 시작 1미터 60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황해(黃海)가 극장 화면에 처음 얼굴을 비친 것은 1949년 한형모 감독의 데뷔작 <성벽을 뚫고>(김보철프로덕션 제작)부터였다. 이 영화는 해방 후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을 배경으로, 육군 소위(이집길)인 처남과 공산주의자(권영팔)인 매부 사이에 벌어지는 이념의 갈등과 반목을 그린 것이다. 매부는 처남을 매수하려 하고, 처남은 매부를 설득하려 하지만 실패하자 서로 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황해는 이 작품에 조연급인 육군 하사 역으로 출연했다. 남북 분단이 가져온 동족상잔의 비애를 담은 최초의 영화였다. [사진]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서의 황해 이렇게 영화계에 나왔으나 황해는 한동안 후속 출연작을 내지 못했다. 6.25전쟁과 연극 때문이었다. 그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한 것은 ‘뚱뚱이 양훈’과 겨룬 코미디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이었다. 이후 <나는 고발한다>(김묵, 1959)를 비롯한 <안개 낀 서귀포>(임한림, 1959), <햇빛 쏟아지는 벌판>, (정창화, 1960),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현상 붙은 사나이>(김묵, 1961), <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권택, 1962), <폭력지대>(김묵, 1965),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 등 액션물과 <한많은 청춘>(권영순, 1958), <자장가>(하한수, 1958), <목포의 눈물>(하한수, 1958), <울지 마라 두 남매>(서석주, 1960), <울려고 내가 왔던가>(김화랑, 1960) 등 신파 멜로, <박서방>(강대진, 1960), <마부>(강대진, 1961) 등의 서민영화,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 <심봤다>(정진우, 1979) 등 문예영화에 출연했다. [사진] <자장가>(하한수, 1958)의 황해. 왼쪽은 배우 한미나(사진제공: 김종원) 황해가 <자장가> 유의 신파와 액션 연기에 강한 것은 일찍이 악극단 등에서 쌓은 15년 경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버라이어티 쇼적 재능과 과장된 표정연기는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차츰 탈색돼 69년 <독짓는 늙은이>를 계기로 내적 연소의 연기양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단지>(이원세, 1975), <부초(浮草)>(이한욱, 1978)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신장의 한계 극복한 무대 경험 황해는 1920년 3월 6일 동해의 푸른 물을 끼고 뒤쪽으로는 외금강 줄기가 뻗어나간 강원도 고성군 장전읍 경동(京洞)에서 태어났다. 정어리 기름공장을 경영하는 전병근(全炳根)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큰 아들과 네 살 터울인 그에게 홍구(弘玖)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아들을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는 큰 아버지 댁에 보내 주교(舟橋)국민학교를 다니게 했다. 졸업 후 경신중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3년제인 경성상공업 기계과에 들어갔다. 졸업(1936년) 후에는 미쓰비시(三菱)백화점 식료품 점원을 거쳐 중앙우체국 집배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집배원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변두리 로 나설 때면 무료를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어느새 동료들 사이에서 ‘노래하는 집배원’으로 통했다. 하지만 이 일도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형과 함께 아버지가 하는 정어리 가공 일을 도왔다. [사진]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에서 황해와 윤정희 그런데 이 무렵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기회가 찾아왔다. 열여덟 살 되는 해 봄이었다. 서울의 성보(城寶)악극단이 전국순회 공연 중에 이 고장을 찾아온 것이다. 악극단은 관객동원의 수단으로 공연 첫날 노래자랑대회를 열었는데, 홍구 청년도 참가했다. 그의 노래를 들은 한 여단원이 소질이 있으니 서울에 가서 가수의 길을 걸어보라고 권했다. 그녀가 바로 ‘성보의 간판스타’인 가수 신 카나리아였다. 이에 용기를 얻어 성보악극단의 연구생 모집광고를 보고 응모, 1천 2백여 명의 경쟁자 가운데 12명을 뽑는 성보악극단의 제1기생으로 선발되었다. 이렇게 들어간 극단에서 처음 출연하게 된 것이 신 카나리아 주연의 <춘풍일가>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는 공연 때마다 객석에 나와 다른 배우들이 하는 동작이나 대사, 표정을 관찰하고, 화장술을 익혔다. 그런 열성 탓인지 그는 1년이 채 되지 않아 지방공연의 주연 배우로 발탁되었다. 지방공연은 밤차에서 새우잠을 자는 등 고달픈 일이었지만 무대에 서기만 하면 신명이 났다. 이렇게 시작한 연극이 1938년부터 4년 동안 10여 편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신 카나리아의 부군인 김화랑이 제일악극단을 조직하자 성보악극단을 떠났다. 2차세계대전으로 해초 가루로 만든 빵이나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그는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제일악극단에 머물렀다. 그런데 계속 조여 오는 징용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결국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천진에 내리자 미리 와있던 신 카나리아, 박단마 등과 함께 손목인이 이끄는 신태양악극단에 입단했다. 백파진(白波進)이란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사진] <인간단지>(이원세, 1975)에서의 황해(사진제공: 김종원) 군예대원으로 아내와 평양까지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잠시 수용소에 갇히기도 했으나 해방 이듬해인 1946년 6월 그는 간절히 기다리던 귀국선에 오르게 된다. 인천항에 내린 그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토록 그리던 황해 바다, 밟고 싶던 조국의 땅이 아닌가. 그는 “한국남자는 황해 바다처럼 넓고 거센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했던 한 광복군 노인의 충고를 떠올리며 예명을 다시 황해(黃海)로 바꾸었다. (황해, 「藝에 살다(13) 최초의 액션 스타(13)」, ≪일간스포츠≫, 1979년 11월 7일자) 이렇게 3년 만에 서울 돈암동 집으로 돌아오자 다시 신 카나리아 부부가 만든 새별악극단에 가담했다. 이 무렵 <자유만세>(1946)를 찍은 한형모(韓瀅模) 촬영기사가 만나자는 기별을 보내 왔다. 이번에 <성벽을 뚫고>라는 영화로 ‘입봉’하게 되었는데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해는 이렇게 하고 싶었던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연극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새별악극단을 인수하고 전성기로 올려놓을 무렵 가수 백설희(白雪姬)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자 동거생활을 결행하였다. 그들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살림을 꾸린지 15년 만인 1960년 서대문 밖 백련사(白蓮寺)에서였다. 그는 6.25전쟁을 겪으며 아내와 함께 군예대(軍藝隊)에 들어가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사진] <부초>(이한욱, 1978)에서의 황해와 윤세라(오른쪽)(사진제공: 김종원) 배우로서는 불리한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승부욕으로 관객 앞에 다가선 ‘작은 거인’ 황해는 1965년 장동휘, 허장강과 함께 동인프로덕션을 설립, 파월장병의 용맹상을 그린 <맹호작전>(1965)을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2월 9일 슬하에 노래하는 배우 전영록을 남기고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이만희 감독은 1965년 한 해 동안 < 흑룡강 >, < 7인의 여포로 >, < 흑맥 >, < 시장 > 등 네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 가운데 <흑맥(黑麥)>은 이 감독이 <7인의 여포로>로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재판 중인 과정에서 읽은 이문희 (李文熙)의 장편소설이 원작이다. 이 작품은 그가 처음 손댄 문예물이라는 사실과 당시 갓 여고를 나온 열여덟 살 대학 신입생의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그 신인 배우가 1천여 명의 공모자 가운데서 뽑힌 이순임(李順任). 바로 뒷날 윤정희 , 남정임 과 함께 트로이카 스타의 한 축을 이루며 한국영화에 기여한 문희 (文姬)이다. 이만희 감독은 그녀에게 본명 대신 원작자의 이름(발음)을 딴 ‘문희’라는 예명을 붙여 주었다. 전쟁의 후유증과 사회악에 대한 비판의식이 짙게 깔린 이 영화는 이만희 특유의 과감한 용인술과 캐릭터의 설정, 영상 감각이 돋보인다. 여기에는 서정민 (촬영)의 짜임새 있는 화면구도도 한몫을 하였다. 6,25동란 후 서울역 주변에는 깡패, 양아치들의 폭력과 절도, 매음이 만연되고 있었다. 이들 독초의 왕초는 목사인 아버지를 잃고 단신 월남하여 거리를 헤매다가 용산 패를 거느리게 된 독수리( 신성일 )이다. 이런 그 앞에 어느 날 미순( 문희 )이 나타난다. 하나뿐인 어머니를 여의고 서울로 일자리를 얻으러 왔다가 날치기 패들에게 걸려든 시골소녀이다. 독수리의 똘마니가 미순의 성경책을 훔치고 달아나는 바람에 생긴 일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미순은 비록 그들의 소굴에서 지내지만 두려움을 거두고 더러운 빨래와 끼니를 도와주며 잘 적응해 나간다. 마음도 열게 된다. 독수리도 미순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청순한 미순의 사랑이 빗나간 왕초의 마음을 녹인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그의 진심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미순을 사랑하면서부터 독수리는 두목으로서 박력을 잃기 시작한다. 이런 가운데 미순이 집을 나가자 독수리는 그녀가 몰래 나간다는 명동의 스탠드바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미순을 희롱하는 명동파 왕초를 보고 참다못한 독수리가 격투 끝에 그만 그를 살해하고 만다. 미순을 뒤에 남기고 수사관에게 끌려가는 독수리. 그는 수갑 찬 손을 미순이 보지 못하도록 성경책으로 얼굴을 가리라고 부탁한다. “인생이란 결코 뜻대로 운행되지 않는다. 본래는 허약했던 목사 아들이 도둑놈 우두머리로 출세했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 주고 있어. 기차를 탄다고 반드시 가고 싶은 델 갈 수 있는 건 아냐. 도중에 기차가 뒤집히는 수도 있거든.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이 장난감 기차뿐이야!” 피를 토하듯이 내뱉는 독수리의 독백이 화면을 덮는다. < 흑맥 >은 전쟁으로 인해 깜부기병에 걸린 보리처럼 사회에서 버림받은 부초(浮草) 같은 인생의 이야기이다. 이만희 감독은 여주인공 미순을, 때는 묻었지만 진흙 속에 핀 연꽃처럼 청순한 이미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녀는 독수리에게 신앙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이 영화에는 ‘쪼아온다’, ‘토꼈다’는 등의 은어가 많이 나온다. 이런 대사에서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전후 젊은이들의 비행과 일탈적 삶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의 특징은 등장인물을 거의 신인으로 충당했다는 점이다. 그들 중에는 배우지망생이 아닌 촬영 조수나 조명기사, 연출보 등 뒤에서 돕는 스태프들도 끼어 있다. 연기 면에서 독수리 역의 신성일 은 < 성난 능금 >( 김묵 , 1963) 이후 모처럼 분출하는 힘을 안으로 삭이려는 노력을 보여 주었고, 문희 역시 눈의 매력을 활용한 연기로 기대를 모으게 하였다. 아무튼 < 흑맥 >은 < 돌아오지 않는 해병 >, < 만추 >, < 삼포 가는 길 >과 더불어 이만희 영화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필름이 보존되어 있지 않아 기록상으로나마 반드시 남겨야 할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