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 감독
- 김남이
- 제작년도
- 2014
대한극장 이 영화 상영관으로서는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아쉬움 가득한 회고가 쏟아진다. 과거의 화려했던 극장 건물이 허물어지고 고층 빌딩으로 변신한 지 20년이 넘었건만, 안녕을 고하는 이야기들을 살펴보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20세기 대한극장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1958년 4월 4일과 1998년 4월 4일 1998년 4월 4일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인 CGV 강변 이 정식 개관하기 전까지 극장의 규모나 흥행수입에서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곳이 서울 중구 충무로의 대한극장이었다. 우연인지 한국 극장역사의 필연인지, 대한극장은 최초의 멀티플렉스 개관으로부터 40년 전인 1958년 4월 4일 개관했다. 개관작은 1994년 리메이크해 국내에서도 사랑받았던 < 러브 어페어(Love Affair) >(글렌 고든 카론, 1994)의 원작인 < 잊지 못할 사랑(An Affair to Remember) >(레오 맥캐리, 1958)이었다. 극장 측은 대지 660평, 연건평 1,432평의 무창(無窓) 5층 건물에 냉난방 장치와 고급 좌석, 최신식 상영 설비 등을 갖춰 외국 극장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건전한 오락과 영화문화를 위하여 많은 기여가 있기를 바란다”라는 위풍당당한 출정 소감을 밝혔다. *주1 하지만 1년도 채 못돼 운영난을 겪게 되면서 1959년 2월 극장의 운영권은 영화 수입으로 사세를 확장하고 있던 세기상사로 넘어갔다. 세기상사는 폴 뉴먼의 대표작 중 하나인 < 상처뿐인 영광(Somebody Up There Likes Me) >(로버트 와이즈, 1956)을 ‘신발족(新發足)’이라는 야심찬 문구를 곁들여 광고하며 대한극장 인수를 알렸다. 한편으로는 입장객에게 피아노와 고급상품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마련하고,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내한공연을 올리는 등 새롭게 출발하는 대한극장의 다양한 면모를 알리기도 했다. (좌) <잊지 못할 사랑> 전단 (우) <상처뿐인 영광> 전단 대형극장의 위용을 갖추다 여러 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말까지는 국도 , 명보 , 단성사 등을 잇는 후발주자의 느낌이 강했던 대한극장이 본격적으로 대형극장, 흥행극장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국내 최초로 70밀리 초대형 영화를 상영하면서부터였다. 1961년 9월 21일 대한극장에서 개봉한 < 남태평양(South Pacific) >(조슈아 로간, 1958)은 영화의 내용과 평가를 넘어 영화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케 하고, 당해 연예계의 주요 뉴스에 꼽히는 등 영화 매체의 큰 변화로서 관람객의 시선을 끌었다. <남태평양> 이후 대한극장이 국내 제일의 대형극장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한 영화는 < 벤허(Ben-Hur) >(윌리엄 와일러, 1959)였다. <벤허>는 1962년 2월 1일 대한극장에서 개봉해 10월 8일까지 무려 8개월 동안 장기 상영했고, 10월 9일부터는 세기상사가 소유한 또 다른 개봉관인 세기극장으로 이동해 상영을 이어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때의 기록적 흥행과 초대형 영화관람의 경험은 여러 차례에 걸쳐 <벤허>가 재상영될 때마다,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대중을 극장으로 이끄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벤허>가 대한극장에 관한 회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할 터이다. (좌) <벤허> 국내 포스터 (우) 1986년 대한극장의 모습 <벤허>와 더불어 < 오클라호마(Oklahoma!) >(프레드 진네만, 1955), < 캉캉(Can-Can) >(월터 랭, 1960), < 왕중왕(King of Kings) >(니콜라스 레이, 1961) 등 70밀리 영화들의 연이은 상영은 대한극장의 이미지가 대중에게 각인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대형 스크린과 좌석 수 2천이라는 규모, 그 위용에 걸맞은 초대형 영화, 그리고 극장 앞 인산인해를 이룬 관람객의 모습을 삽입한 광고는 1990년대까지 대한극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했다. 이와 같은 대형극장으로서의 위용과 이미지는 1990년대까지 단관극장으로 버티는 힘이 되었다. 1990년대 말 대한극장의 상영⋅배급을 담당했던 임철호 의 구술처럼 영화 한 편이 “터졌다 하면 하루에 만 명인데, 열흘 만에 십만 명이 되” *주2 는 규모를 여전히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화하며 극장 지형과 극장 문화 또한 변화를 겪었지만, 단관극장의 매력과 흥행의 묘미가 남아있었던 20세기 말 충무로의 풍경에 대한극장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70밀리 대형영화와 마무리한 단관극장의 여정 멀티플렉스의 성공적인 안착과 함께 단관극장으로서의 대한극장 또한 마무리에 들어가면서 들고 온 프로그램들은 역시나 70밀리 초대형 영화들이었다. 또다시 재탕이라는 소리도 들었겠지만, 대한극장다운 프로그램 선정이었다. 1998년과 1999년 상영한 <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 >(데이빗 린, 1962), <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데이빗 린, 1966) 등은 여전히 단관극장과 초대형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에게 호응을 얻었다. 국내에서 단관극장의 마무리가 어땠는지를 둘러보면 비교적 아름다운 행보였다고 할 수 있으려나.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던 단관극장으로서의 대한극장 21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대한극장도 멀티플렉스로 전환하면서 충무로의 풍경 또한 변했다. 그동안 충무로와 종로, 을지로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극장들을 계속해서 목격했다. 사라진 극장들과 20세기의 대한극장을 기억하면서 꽤 오래전 광화문 네거리의 동화면세점을 국제극장 이라 지칭하시던 택시 기사님이 불현듯 떠올랐다. 구술채록을 하면서 대한극장에서 원로영화인을 뵐 일이 많았는데, 그들과 나는 항상 최첨단의 시설을 갖춘 대한극장에서 만났지만, 그 기사님처럼 우리는 늘 20세기의 대한극장을 떠올리며 약속을 정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제야 해 본다. 어쩌면 나는 대한극장의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상영 전 대기할 변변한 장소도 없어 극장 밖 거리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장 순서를 기다리던 20세기 후반으로 돌아가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천 명이 함께 < 미저리(MISERY) >(롭 라이너, 1990)의 공포를 느끼고, < 라밤바(LA BAMBA) >(루이스 발데스, 1987)의 OST를 소리 없이 따라부르던 그 시절로 말이다. *** 주1. “새영화-잊지 못할 사랑”, 《경향신문》, 1958. 4. 5., 4면. 주2. 채록연구 공영민, 「임철호」, 『202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60~1990년대 수입외화의 변화 3』, 한국영상자료원, 2020, 153쪽. 공영민(영화사 연구자) l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인 구술사의 채록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영화사가 이영일은 스릴러-액션 영화가 1963년에서 67년까지 5년간, 한국 영화제작의 “주조가 되다시피 했다”고 썼다. 하지만 당대에 누린 상당한 인기나 산업적 파급력에 비한다면 이 장르에 대한 후대의 관심은 그다지 큰 편이 못된다. 이만희 나 정창화 같은, 이 장르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이 연출한 몇몇 영화가 작가주의적인 맥락에서 조명되거나 합작영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장르로 거론되는 정도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회고전 이후 작가로서 재조명된 정창화 감독의 작품들은 이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하겠다. 여전히 한국영화사에 대한 작가주의적인 접근이 지배적인 탓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해당 시기 스릴러-액션 영화의 대표작 대부분이 남아 있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다. 요컨대 오랫동안 장르 영화를 폄하하는 시선을 견지해왔던 한국영화 비평담론에 의해 그저 그런 상업영화로 치부되었던 스릴러-액션 장르는 대표적인 영화들이 사라짐으로 해서 재평가를 받을 기회마저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범구 감독은 매우 불운한 경우다. 1964년 당시 이만희 , 김수용 과 함께 “현역 젊은 감독의 대표선수 격”으로 꼽혔던(경향신문, 1964년 7월 13일) 강범구 감독은, 그러나 문예영화 붐을 이끌면서 영화작가로 입지를 굳혀간 이만희, 김수용과는 달리 상업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남았다. 문예영화 감독이 되지 않거나 될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가 스릴러-액션 영화 장르에서 아주 잘 팔리는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 대표작들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 또한 역설적이게도 그 영화들이 ‘국제적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탓이었다. < 검은 꽃잎이 질 때 >(1962) < 안개 낀 거리 >(1963) < 창살 없는 감옥 >(1963) < 유랑극장 >(1963) 등이 대만과 동남아 시장으로 수출되었고 그는 곧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의 영화감독이 되었다. 1966년 그가 한국-대만 합작영화 < 탈출명령 >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작들이 대만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강범구 감독의 네 작품은 1963년과 64년 사이에 대만과 동남아시장을 묶어 작품당 만 달러에 수출되었다. 같은 시기에 신상옥 감독의 < 성춘향 >이 5천 달러를 받고 일본시장에 판매되었음을 상기해보면, 이것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성공적인 해외시장 진출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만으로 보내진 것이 영화의 원판이었다는 데 있었다. 강범구 감독에 따르면 대만은 원판과 프린트를 가리지 않고 작품 편수에 따라 관세를 매겼기 때문에 대만 쪽에서는 원판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대만과 동남아 시장을 포괄할 여러 벌의 프린트를 한국에서 만들어 내보내는 것보다는 원판을 가져가 대만에서 만드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1964년 작 < 동굴 속의 애욕 >과 < 소만국경 > 두 편뿐이다.(물론 1960년대 말 이후의 영화들은 몇 편 남아 있다. 하지만 한국 장르영화의 전성기이자 감독 강범구 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의 영화 가운데는 이 두 편만이 남아 있다.) 사라져버린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당대의 평가가 높지 않았던 이 영화들을 통해서도 감독의 솜씨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 아니다. < 동굴 속의 애욕 >은 권순영 판사가 춘천지방법원에 있을 당시 재판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쓴 이른바 ‘법정 수기’가 원안이다.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의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악명 높은 판결문을 남긴, 이른바 ‘박인수 사건’의 담당 판사가 바로 권순영이었다. 그는 박인수 사건 재판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던 그 해에 「법창(法窓)의 봄」(정문사, 1955)이라는 수필집을 내놓았다. 그 책에는 그가 판결을 맡았던 사건들의 내막이 때로는 소설 형식으로, 또 때로는 수기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원안 <동굴 속의 애욕>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의 땅이 되었던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한반도의 많은 지역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민군과 국방군이 번갈아 지배했던 그곳에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산(山)사람’, 이른바 빨치산이 되어야 했다. 적군에게 협력한 전력이 드러나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가 그들을 산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이 살인사건의 세 주인공인 유동록과 안태선, 그리고 이옥녀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공산치하의 마을에서 리(里) 세포위원장으로 권세를 누리던 동록은 태선의 아내 옥녀를 겁탈한다. 세 사람의 치정에 얽힌 관계는 9.28수복 이후 북으로 진격해오던 국방군이 마을을 점령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동록의 동생 동관과 그의 애인이자 여맹위원장인 정숙, 그리고 세 사람은 국방군을 피해 대성산 산마골의 동굴로 숨어들고, 그곳에서 그들의 ‘짐승 같은’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지배하는 그곳에서 옥녀의 마음은 점차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남편 대신 억세고 강인한 동록에게 기울어간다. 사건의 폭발은 태선이 마을로 내려가 자수하겠다고 하면서 시작된다. 옥녀는 인민군에 나간 전력을 가진 남편이 자수한 뒤에 겪게 될 불안한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 자신의 공포를 잠재워줄 억센 팔을 가진 동록을 택한다. 그녀는 태선의 자수 의사를 은근슬쩍 정숙에게 흘리고 정숙은 이를 곧바로 동록에게 고발한다. 인민재판을 통해 동록은 태선을 반동으로 낙인찍고 낫으로 그를 살해한다. <선데이서울> 같은 주간지에 ‘짐승과도 같은 빨치산의 생태’ 류의 제목을 달고 실렸을 법한 이야기, 또는 얼핏 1950년대의 < 피아골 >을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강범구 감독의 영화에 와서 법정드라마의 외피를 입으며 전혀 다른 질감을 확보했다. < 검사와 여선생 >에서 < 어느 여대생의 고백 >에 이르는 한국 법정드라마들은 그 장르 특유의 심문(審問)의 형식을 기구한 운명을 감당한 여인네들의 고백의 장치로 흔히 활용하곤 했다. 죄지은 여성의 억울한 사연에 대한 공감이 차가운 법의 논리를 압도하면서 흥건한 눈물이 법정을 채우는 것이 한국 법정드라마의 관습이었다. < 동굴 속의 애욕 >은 그런 면에서 예외적인데, 이는 비정한 도시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능숙하게 다뤄온 강범구 감독의 영화적 수완이 발휘된 결과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 순간의 정황이 동록의 자백으로 먼저 재현되고, 이후부터 검사의 논고와 피고의 자백, 그리고 증인들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간부(姦夫)와 내통하여 남편을 죽였다는 이 치정 살인사건은 조금씩 그 내막을 드러낸다. 법정드라마의 장치들은 이야기의 정보들을 적절히 안배하고 그로부터 서스펜스와 스릴을 만들어내는데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여러 명의 화자(話者)가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놓는 형식은, 그 사건에 연루된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며 정부(情婦)의 남편을 잔인하게 살해한 동록조차도 절대적인 악의 화신이 아니라 인간적인 연민을 자아내는 존재로 그려지도록 한다.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옥녀의 증언 거부가 이야기 정보를 지연시키는, 서스펜스 영화의 고전적인 장치도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재판이 벌어지는 현장의 관객 역시 정서적 공감을 자아내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하는데, 특히 신문기사로 사건을 접하고 호기심을 느껴 법정을 찾아가는 젊은 부부를 배치한 것은 탁월한 설정이다. 전계현과 방수일이 맡은 이 부부는,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은 짧지만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사건을 소개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도록 한다. 전계현은 옥녀의 마지막 진술을 듣고 난 후에 “다른 사람들은 저 여자를 미워할지 모르지만 전 동정해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그 사건에 대한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후 남한사회가 품어야 했을 수많은 이적행위자들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가(물론 현실 속에서는 관철되지 못했지만) 그려지는 순간이라고 하겠다. 3선 개헌에서 유신체제의 출범으로 이어지는 1960년대 후반 이후의 정세 속에서 한국사회는 점점 더 경직되고 억압적으로 되어갔다. 이와 비례하여 한국영화에서 ‘반공’은 어떠한 경우에도 침범될 수 없는 영역으로 공고해졌다. 인민군의 묘사를 문제 삼아 감독 이만희 를 구속까지 했던 < 7인의 여포로 > 사태 이후에, 많은 영화감독, 비평가들이 반공의 이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공산주의자의 재현에 유연성을 보여줄 것을 검열 당국에 호소하곤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도시범죄에 한국전쟁의 경험이나 간첩의 소재를 활용했던 스릴러-액션 장르는 1960년대 후반이 되면 공산주의자의 비인간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철저한 반공영화로 변모하면서 점차 대중의 공감을 잃어갔다. 강범구 감독의 < 동굴 속의 애욕 >은 그 이전, 그러니까 한국의 장르 영화들이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고 때로는 사회의 통념에 도전할 수도 있었던, 그럼으로써 장르 영화의 활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대의 수작(秀作) 가운데 한 편이다.
1981년. 신군부의 문화정책을 상징하는 행사 ‘국풍 81’이 열렸고, 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됐다. 이듬해엔 교복 자율화가 발표되고 프로야구 정규리그가 출범했다. 1983년 6월,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밤낮으로 전국을 울렸다. 그해 8월 셋째 주 일요일. 미국 망명 중 하버드에서 김대중과 이웃하며 지냈다던 베니그노 아키노가 마르코스 치하의 필리핀으로 돌아가자마자 마닐라 공항에서 총을 맞아 죽었다는 뉴스가 이산가족들의 눈물바람을 뚫고 종일 들려왔다. 10월 9일에는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이 터져, 대통령이 도착하길 기다리던 남한 정부 각료 등 21명이 죽었다. 이십 일 뒤인 10월 29일, 단성사에서 배창호 감독이 연출한 < 적도의 꽃 >이 개봉했다. 1983년 흥행 수위를 차지한 이 영화는, 서울 개봉관에서만도 15만 명이 넘는 관객들과 만났다. 배창호 감독은, 자신이 조감독을 맡았던 < 어둠의 자식들 >( 이장호 , 1981) 원작자 이동철의 동명 소설을 각색해 1982년 첫 장편 < 꼬방동네 사람들 >을 만든다. 개봉 전 프린트 검열과 더불어 존재했던 사전 시나리오 검열에서 어림잡아 67군데를 손보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뚝심으로 완성한 이 작품은 크게 흥행했다. 도시빈민의 현실을 생생히 살렸다며 비평계의 지지도 얻었다. 곧이어 “현대그룹 홍보영화” < 철인들 >(1982)을 만든 배창호는, 차기작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최인호 가 1981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 『적도의 꽃』을 선택한다. 직장을 다섯 번 그만두고 아버지가 주는 생활비에 의존하나 가족과 왕래하지 않는 미스터 M( 안성기 분)은, 혼자 지내는 자신의 아파트 이웃들을 망원렌즈로 훔쳐보며 소일한다(발단의 설정과 연출은 히치콕의 < 이창 >(1954)을 절로 떠오르게 하는데, 최인호 원작소설의 첫 장 제목도 ‘이창(裏窓)’이다). 어느 여름날, 맞은 편 아파트로 이사 온 오선영( 장미희 분)에게 반한 그는 그녀를 스토킹한다. 중년 기혼남 김성두, 바람둥이 사업가 정준환과 차례로 사랑에 빠지는 선영을 남자들과 떼어놓으며 그녀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는 미스터 M. 그러나 그의 편집광적인 사랑은 파국을 부른다. 출간된 『 최인호 시나리오 선집』(1987, 우석출판사)에서 남자주인공 미스터 M은 “월남전에서 뭔가 받은 충격으로 식물인간으로 변해가고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다. 한데 완성된 영화에서나,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존하고 있는 < 적도의 꽃 > 시나리오 원안과 심의대본에는 월남전의 흔적이 없다. 정신과 의사가 미스터 M을 문진하는 오리지널 시나리오 첫 장면은 M의 보이스오버로 시작하는 출판 시나리오나 심의 대본과 차이가 있으나, “명예와 욕망과 물질에 눈이 먼 사람을 경멸하”며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는 이방인”으로 자신을 일컫는 미스터 M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베트남 참전 언급을 원치 않았던 검열 당국의 수정 지시를 따랐다기보다는, 1980년 이후 당대에 집중하려는 작가와 연출자의 의도가 아니었을지 조심스레 짐작할 따름이다. 참전용사가 아닐지언정, 미스터 M은 여전히 프로이트가 진단한 바 “외상적 신경증”을 입은 주체로 남는다. 영화 초반, 열기가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가로수 그늘에 기대 하품하는 그의 몸짓은, 권태와 무료를 드러낸다기보다는 소리 없는 절규에 가깝다. 80년대라는 “모멸과 폭압”의 시간이 주는 고통을 견딜 완충재(프로이트는 이를 위해 “자극에 대한 방어기제를 재조정”하는 “불안”이 필요하다 했다)를 지니지 못한 그는, “수용의 임계치를 넘어 쾌락 원칙에 심각한 손상을 가하는 압도적인 외부의 충격”에서 비롯하는 “경악”을 괴로움 없이 체현한다.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 복제판을 자신의 아파트 벽에 걸어둔 그는 선영을 순수한 사랑의 화신으로 여긴다. 그녀를 농락하고 모독하는 모든 이들을, 미스터 M은 “심리적 거리감”을 한순간에 지우며 망설임 없이 단죄하고, 자신의 기대에 어긋난 선영을 미련 없이 버린다. “주체와 대상의 가상적 경계”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고, “신체와 세계를 연출”하지 못하는 미스터 M을 재현하는 안성기 의 얼굴 근육 쓰기와 말더듬이 연기는 탁월하다. 그를 동반하는 초?중기 배창호 의 전매특허 360도 카메라 트래킹은, 결말에 이르러 트라우마를 회복하는 < 이창 >의 제임스 스튜어트와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미스터 M의 강박증을 뚜렷이 그린다. 정신없이 쏘아댔다고 감독이 회상하는 붉고 푸른 조명, ‘국풍 81’이 낳은 스타 이용 의 ‘잊혀진 계절’을 작곡해 당대 최고의 대중음악가로 떠올랐던 이범희 가 담당한 발라드와 디스코를 오가는 스코어도 M의 심리를 끈끈히 엮는다. < 고래사냥 >(1985) 등으로 80년대 충무로를 뒤흔들 배창호와 최인호 , 안성기 “트리오”는 이렇게 만났다(지극히 아름다우나 남성의 시선 앞에 “한 송이의 허망한 꽃”일 뿐인 장미희 라는 배우가 욕망이 깃든 피와 살을 지닌 인간으로 육화하기 위해선, < 깊고 푸른 밤 >(1985)까지 기다려야 한다). < 적도의 꽃 >의 숨은 주인공은 아파트다. 최인호 는 이미 1971년에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공간을 다룬 「타인의 방」이란 소설로 화제를 불러일으켰었다. 영화는 아파트 이미지로 시작하고 같은 장면으로 끝난다. 들끓는 여름 모래톱 너머에 신기루처럼 솟아오른 아파트 그림자가 일렁인다. 이어지는 컷은 전지적 시점, 한강 변 아파트 전경을 살피던 카메라가 베란다를 거쳐 미스터 M의 집으로 들어간다. 당시로선 드물게 중앙난방과 욕실을 갖추었고 최대형 면적이 80평에 달했던 신흥 부촌으로, 1978년엔 특혜 분양 때문에 물의를 일으키기기도 했다는 이 아파트 벽에는 ‘現代’라는 검은 글씨가 또렷하다(감독의 전작 < 철인들 >을 상기하노라면, 이 공간은 더욱 복합적인 파장을 부른다). 압구정 현대 아파트 세 채를 빌려 찍었다는 영화 속 카메라는 아파트 단지와 베란다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며 인간의 눈높이를 벗어나 “새로운 토건 권력”이 굳혀지는 시점을 포착하는 시선이 된다. “시선과 응시의 교환이 빚어내는 욕망의 경제, ‘현실과 상상 사이의 경계’ 위에 구축한 나르시시즘의 성채”인 아파트는 “도시-산업적 기술의 확산, 대규모로 진행된 사회적(성적) 관계의 해체, 대중 소비로의 이행이 실질적인 파괴와 결손을 초래하는 동안, 시선과 감각적 지각을 조직화하는 새로운 방식, ‘사물들’과의 새로운 관계, 모방적 경험 표현, 정서, 시간성, 성찰성의 다양한 형식”(미리엄 한센)을 보여주는 시대정신의 현현이었던 것이다.(박해천, 『콘크리트 유토피아』, 2011, 자음과 모음).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지속”이며 “정치적 보수화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던 아파트 주민 미스터 M과, 역시 한창 개발 중이던 동부이촌동 양옥을 소유한 김성두, 토착 부촌 평창동 저택에 사는 정준환. <적도의 꽃> 속 남자들이 이루는 삼각형은, 1980년대 초 서울이라는 시공간에 거했던 어떤 이들의 몸과 정서, 욕망이 변하는 경로를 따라가게 하는 지도가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