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약속
- 감독
- 박은하
- 제작년도
- 2007
ㅁ 1. 유락관 유락관은 오쿠라구미(大倉組)의 오쿠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郎)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자본금 7만5천원의 연예주식회사가, 세계관이 가진 활동사진흥행권을 5,000원에 매수하여 1915년 설립한 영화관이다. 개관식은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가 한창이던 1915년 9월 12일에 열렸다. 9월 19일에는 개관과 영업을 축하하는 신축낙성축하회(新築落成祝賀會)가 개최되었고 영업은 9월 20일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극장의 운영은 출자자 중 한명인 경성호텔(京城ホテル)의 나카하라 테츠오미(中原鐵臣)가 맡았다. 유락관은 혼마치 중심지에 건립되었는데, 인접해 있던 다카키상점(高木商店), 미쓰코시오복점(三越吳服店), 백삼십은행(百三十銀行), 쓰카타니잡화점(塚谷雜貨店) 등이 화재의 위험을 이유로 설립에 항의하면서 당국으로부터 월 2주의 활동사진흥행 허가만을 얻었다. 또한 대정관과 수좌가 상영하고 있는 닛카츠 필름을 똑같이 상영하면서 일본인 상설관 3곳이 닛카츠 필름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유락관은 개관 초기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1915년 말에 이르면 5,000원에 가까운 적자를 보았고 극장운영을 책임진 마쓰이(松井) 지배인이 야반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자료] 희락관의 외관(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개관 이후 장기간의 휴관과 개관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유락관은 결국 매물로 나왔고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 마쓰타로가 이를 매수, 황금관을 대신하여 근거지로 삼게 된다. 하야가와연예부가 운영하는 유락관은 1917년 3월 22일 개관했다. 이후, 1917년 7월 27일부로 연중무휴의 활동사진 흥행 허가를 받은 유락관은 고바야시상회에서 필름을 배급받게 되면서 황금관과의 필름 중복문제도 해결하여 큰 폭의 약진을 하게 된다. 유락관은 닛카츠나 텐카츠에 비해 소규모 영화회사이던 고바야시상회의 필름을 공급받았기에 연극부 변사들을 이용한 연쇄극과 실연을 통해 관객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고바야시상회가 도산하여 유니버설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자 유락관에서는 유니버설로부터 필름을 공급받아 유니버설의 연속영화와 블루버드, 레드페더 영화를 상영하는 양화관으로 전환하게 된다. 하야가와연예부는 유락관으로 이전하기 직전, 울산 배경의 연쇄극 <문명의 복수(文明の復讐)>를 제작하여 황금관에서 상연한바 있었다. 이후 유락관으로 이전하고 나서는 황금관과 경쟁하기 위해 영화제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19년 황금관에서 제작하여 상영한 부산의 출정군인 나카후치 센타로(中淵仙太郞) 일가의 비참한 삶을 그린 <누의 가(淚の家)>에 자극을 받아 유락관에서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제작했다. 하야가와연예부에서 직접 각색하고 도쿄의 고바야시상회에 의뢰하여 제작한 <아, 스즈키교장(嗚呼鈴木校長)>이 바로 그 영화이다. 1918년 12월 5일에 용산 원정심상고등소학교(元町尋常高等小學校)에서 발생한 화재로 교사가 소실되자 그 책임에 불속에 몸을 던져 자결한 스즈키(鈴木志律衛) 교장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1919년 4월 28일 개봉되어 5월 6일까지 연장 상영되었다.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하야가와연예부는 유락관을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둔 만카츠에 매각하였다. 만카츠가 인수한 유락관은 1919년 5월 8일 만카츠의 다른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희락관(喜樂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닛카츠계통의 영화관으로 운영된다. 2. 희락관 1919년 5월 8일 만카츠 직영으로 개관한 희락관은 서양영화 전문관으로 쇠퇴하고 있던 유락관과 달리 일본영화와 서양영화를 섞어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이중 일본영화로는 대정관이 독점하고 있던 닛카츠 영화를 상영하였다. 1920년 닛카츠가 경성출장소를 설치하고 고지마 사다시치(小島定七)를 주임으로 임명했다. 닛카츠의 부사장 요코다 에이노스케(横田永之助)가 희락관의 주주이었던 관계로 희락관은 만카츠 직영에서 닛카츠 직영으로 바뀌었다. 만카츠가 직영하던 시기부터 희락관에서 활약하던 요코야마 후미오(橫山富美雄)가 계속하여 운영을 맡았는데 요코야마가 운영하던 희락관은 설명을 잘하는 변사가 많기로 유명했다. 닛카츠 직영인 희락관이 닛카츠의 주요 영화를 상영하게 되면서 닛카츠 조선대리점인 대정관과 갈등을 빚게 된다. 희락관은 대정관과 협의하여 대정관에서는 마키노 쇼조(牧野省三)가 연출하고 이치카와 아네조(市川姉藏)가 출연하는 니카츠 대장군촬영소(大將軍撮影所) 제2부의 영화(현대물)를 주로 상영하고, 희락관은 일본 최초의 대스타이자 1,0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오노에 마쓰노쓰케(尾上松之助)가 출연하는 닛카츠 대장군촬영소 제1부의 영화(시대물)를 상영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대정관과 희락관의 협정은 1921년 닛다연예부가 더 이상 닛카츠 영화를 상영하지 않기로 하면서 깨졌고 이로써 희락관은 경성의 유일한 닛카츠영화 개봉관이 된다. 1922년, 희락관의 운영자가 요코야마 후미오에서 유바 시게미츠(湯場重光)로 바뀌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 해락관(偕樂館)에 있던 마쓰다 마사오(松田正雄)가 운영을 맡게 된다. 마쓰다가 운영하던 시기 희락관은 영화선전에 가장 능한 영화관으로 정평을 얻었고 경성의 일본인 상권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기에 대표적인 경성의 일본인 영화관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당시 수준 낮은 오락영화라고 평가받던 연속영화나 오노에 마쓰노스케가 주인공을 맡은 인술(忍術)영화를 주로 상영하여 언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위치상 이점으로 인해 희락관은 다른 영화관들에 비해 많은 관객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1924년 대정관을 경영하던 닛다연예부의 닛다 슈키치(新田秀吉)가 마쓰다 마사오를 지배인으로 두고 희락관을 잠시 경영한 적도 있었다. 닛다 슈키치는 1925년부터 대정관 운영에서 손을 떼고 희락관을 쇼치쿠 계통의 영화관으로 전환하려 했지만 희락관의 대주주가 닛카츠의 요코다 에이노스케였기에 이에 실패한다. 닛다 슈키치에 이어 마쓰다 마사오가 다시 희락관의 운영자가 되면서 희락관은 경성의 흥행계를 주름잡게 된다. 1927년 무렵 닛카츠 직영관 중 굴지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경성 제일의 인기관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1928년 무렵 경성과 용산 사이에 위치한 경룡관이 닛카츠 계통이 되고 과거 경성부청 자리인 혼마치 입구에 제국키네마 영화를 상영하는 낙천지(樂天地)가 생기면서 희락관은 관객 동원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당시 희락관의 주요 관객들은 영화관 뒤편의 게이샤 거리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희락관은 닛카츠 시대극이 인기를 끈다는 평을 얻었다. [자료] 마지마 우메기치의 모습 (조선신문 1937.02.09) 1930년대 들어 희락관의 운영주는 마쓰다 마사오(松田正雄)에서 마지마 우메기치(間島梅吉)로 바뀌게 된다. 희락관의 새로운 경영자가 된 마지마는 일찍이 조선으로 건너와 명치정에 마지마상회(間島商會)를 열어 크게 성공한 실업인이었다. 희락관을 운영하게 된 마지마는 1931년 10월 거액을 들여 희락관을 증축하기로 계획하고 스팀설비를 갖추는 것을 비롯해 발성영사기 설치, 관람석의 개조, 해설 음악 선전부를 충실히 하는 등 대대적인 개조를 하게 된다. 여기에 1933년 4월 1일부터 닛카츠가 가지고 있던 희락관에 관한 권리를 포함하여 일체를 인수하게 되면서 희락관은 닛카츠 직영에서 마지마흥행부로 그 운영 주체가 바뀌었다. 희락관을 인수한 마지마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닛카츠와 특약을 맺고 우수한 토키영화를 상영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자료] 희락관의 개장기념 광고 (조선신문, 1931.10.10) 희락관은 1936년 9월 다시 한 번 크게 개축된다. 희락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가장 크고 호화로운 영화관인 명치좌가 들어설 예정이어서 희락관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1939년 토키영화관으로 신축한 황금좌가 오랫동안 희락관이 가지고 있던 닛카츠 개봉관이라는 지위를 빼앗아 가면서 낡은 영화관이라는 인식이 있던 희락관은 닛카츠 2번관으로 전락하게 된다. 희락관의 위상과는 상관없이 희락관 운영주 마지마의 영향력은 점차 커졌는데 1935년 마지마는 경성부위원에 당선되었고 1942년 조선흥행연합회 이사장의 지위로 일제가 전시체제 하의 영화배급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조선영화배급사의 이사로 있었다. 희락관은 해방 직전까지 운영되다가 일제의 패전 직전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는데 해방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소실되기 전 희락관은 총 1,050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자료] “巡回活動 「愛の極み」 劇 撮影終了す”, 《京城日報》, 1922.03.21. 來月十五日から釜山から 全鮮を巡回上場す 來る四月十五日から本紙愛讀者慰安の爲め全鮮を巡廻する本社活動 寫眞は本社員八島柳當氏脚色 愛の極み を上演する事となり二月初旬 より撮影にかゝり仁川月尾島,京城市街,朝鮮の代表的靈山金剛山等を 背景に幾多の苦心を費し去る十七日漸く撮影を終り直に現像し旣報の通 り來月十五日から釜山を振り出しに鮮內各地を巡回上演の筈である。 劇の梗槪 本社主催仁川海水浴場大會が催された日は晴れ亘った、一際の凶變に は應はしからぬ日であったが、暑い陽光の降り注ぐ下を群を離れて獨り貝 拾ひをしながら磯を傳って行く小鳥の樣な乙女があった、彼女が岩を亘り 步くうちに可憐な凶變が釀されて居たのである。此の麗しの乙女こそは、今 京城に時めく銀行家朴炳熙氏の令孃貞玉で今日の催しに京城から伴れ來 のであった。又此の時, 名も無い一人の京城に在住する畵家が仁川の海邊 で熱心に、陽の下に憂鬱を海のスケッチに懸って居った、時の經ると共に潮 は膨れ上がって來て地續きで有った磯邊には急に島となる樣な處が多 かった。此の翼を持たぬ小鳥貞玉も亦何時かその離れ小島の孤獨な守人 となって了った、然し未だ未だ潮は膨れ上がって來る。島は沈んで行く。彼 の女の悲鳴が平靜な溱の中に凶々しい悲調を投げた。一方スケッチに心を 取られて居った畵家はこの慘々しい悲鳴に依って呼び覺まされ小舟を求めて、 浪間の岩より貞玉を救ひ出した。事も無げに畵家に再び畵架に向った。 名を貞玉のために語ることをも仕なかったが、貞玉は繪道具の隅から勝 木と云ふ姓を認めた、又その執筆中の繪には今の危い岩も有った。勝木と は勿論畵家の姓で名は忠雄と云った。彼は父を戰場に失つて眼の惡い病 弱の母と妹の露子と三人のために、京城日報の配達に從事して居った。子 の苦鬪を見兼ねた病母は遂に自殺して失った。彼等兄妹の數日の後まで 續いた。そのうち勝木か或る鮮人邸に配達した時門前で思ひ懸け無く貞玉 に會った。 貞玉は恩人の忠雄を逃して失った貞玉は其の頃同じ銀行家の令息趙永 植から結婚の申込を受けて居ったが彼の女の魂の中では忠雄位光って居 るものはなかった。 其頃の京城では稀らしく盛大な新進畵家の展覽會が京城日報社の來靑 閣で行はれた、勝木忠雄も或海岸を出品した、その作品を見出して買び 上げたのは婦人であったが、婦人の求め樣とする價額の高價は淸廉な忠雄 を驚かした。婦人は忠雄の高潔な言葉を取次がれて益々憧れの心を燃し た。間も無く勝木は朝鮮美展出品製作のために金剛山に出た。兄を金剛山 に送るために妹の露子は工場に通って居ったが、自然の惡戱は益々烈しく なって來た工場の歸途一臺の自動車は彼の女を轢き倒した。車の中から驚 き飛び出して來たのは貞玉であった。露子は貞玉の家に引き取られた。姉妹 の樣に成つた貞玉と露子はふとした話から勝木との因緣を知り二人其金 剛山の忠雄を慕ふたので遂に二人は金剛山に向った。 是を見て驚いたのは貞玉に思ひを寄せる趙永植である、彼は直に彼女等 の自動車を追った。次は山中の光景であるが、誤つて趙永植が谷間に墜落 したので、露子が救け樣として是は遂に一命を落すに至る負傷をした。人の 性は善と云ふ例え、永植は立派に貞玉と走せつけた忠雄の爲めに彼等の握 手を助けた。遂に貞玉と忠雄の夢が現實と成る日か來たのである。 妹を失って戀人を得た忠雄は男の心を亂して悲喜交々として露子を歸らぬ旅 へ送り、貞玉をその傷める胸に抱き締めて泣した。此處に始めて勝木は人 生の明るみに出て來た樣な幸福を感したのである。 此の劇の中に植付けられた人情は總て可憐な美、正しきもの、淸楚なも のである是を以て本社が讀者の慰安會材料と爲すに決した事は家庭的見 物として實に應はしいからである。幸ひに讀者諸士よ、此の貧しい節書きを 離れてそのフヰルムの中に如何なる情景、如何なる美景が取入れてあるか な待たれよ。 愛の極み 撮影を了りて 八島柳堂 愛の極み の作者として又脚色から撮影監督迄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 た私は可也の苦心を味はされた第一筋が高尙であらねばならぬと云ふ事 と內鮮人向きたるは勿論學生に觀せそも差支のないものと云ふ難しい條 件附きなので何うしたら此條件を全ふし面白く觀せる事が出來るかに就 て隨分頭を疲れさせた。 或時は出張先の宿屋で思索に耽る事黎明四時に及びやっと書き上げて 脚色の段となって此處も工合が惡い彼方も拙いで又一苦勞させられた 愈々撮影に取掛って見ると折角選定して置いた室が意外にも暗くて撮影 技師から苦情を申込まれたりして眞實に苦しい思ひをさせられた、而し役 者は藝術の爲めにはドンナ事でもすると云ふ約束もあったので私の云ふ 事をよく聞いて働いて吳れた貞玉と云ふ婦人を貧乏畵家が救助の場面等 は此寒空に海ベラの夏衣裳で荒浪の海中へ飛び込まして活躍をさせたの で四肢の感覺を失ひ 殺す氣ですか と悲鳴をあげられたり又或場面では 妹に粉した女優に自動車に轢かれよ運轉手は彼を轢けと命じ今から思ふ とゾッとする程危險を犯させた又金剛山中の墜落の場面では高い斷崖か ら實際に墜落せよと命じ 恐いわよ恐いわよ と女優に泣かれ實際同情せ ずにはゐられなかった是は替玉を使へば何んでもない事であるが眞實に劇 を生かして見せる上から云ふと此位の危險は犯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 危險を敢て犯かさせた而し大した怪我もなくって胸を撫でなから天祐を 嬉んだ役者諸君は撮影監督としての私を隨分恨んだ事であろう而し之も 立派な寫眞が作り度い一念からである。
1958년도에 데뷔하여 육십여 년을 작가로 활동하신 김지헌(본명 김최연)은 1930년 9월 26일 평안남도 진남포 비송리에서 태어났다. 작가는 어린 시절 사업을 하는 부친을 따라 진남포와 경성을 오가며 살았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소개령이 내린 경성을 떠나 아버지가 운영하는 광산이 있던 강원도 평창으로 피난을 떠나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사진1] <만추>(이만희, 1966) 작가 김지헌 [사진2] 김지헌 작가는 시나리오 지망생 시절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인 최인규를 무작정 찾아가 영화에 대해 물었다. 최인규 감독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극영화, <자유만세>(1966)을 연출했다. 최인규 감독은 김지헌 작가에서 숙제를 내줬고 그 숙제는 작가가 시나리오 작가의 길을 가는데 큰 가르침이 되었다.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작가는 소학교를 거쳐 명문 진남포공립중학교에 진학하여 수학했다. 당시는 일제말기로 대부분의 교사들이 일본인이었다. 때문에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수업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작가는 일본어를 쓰고 말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해방 후 작가와 가족은 서울, 장충동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작가는 경동공립중학교에 진학했다. 문학과 미술에 소질을 보였던 작가는 화가가 되기를 꿈꿨다. 화가가 되기를 꿈꿨던 작가는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무작정 부산으로 떠났다가 형님에게 발각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화가의 꿈을 접고 작가가 되기를 결심하게 된 것은 고향 형님의 권유였다. 형님은 소설이 아닌 시나리오를 써볼 것을 권유하였고 작가는 한달음에 국립도서관을 찾아가 시나리오와 영화에 관련된 책을 모두 섭렵하였다. 그 시절 처음 본 책이《키네마 순보》이다. 이 후 작가는 평생 《키네마 순보》를 구독하였다.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를 열망하며 당대 최고의 감독인 최인규 감독을 만나기 위해 고려영화주식회사에 찾아갔다. 몇 차례 문전박대를 당한 뒤에야 최인규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최인규 감독은 작가에게 한 영화가 몇 개의 커트로 구성되어있는지를 세어오라는 숙제를 내주고 돌려보냈다. 작가는 하루 종일 극장에서 영화의 커트를 세며 보냈고 결국 좋은 영화란 커트를 세기 어려울 만큼 흡인력이 강한 영화라는 결론을 얻었다. 작가가 터득한 결론에 최인규 감독은 관객을, 손님을 절대 놔주지 않는 흡인력 있는 시나리오를 쓰라는 것이 자신이 가르쳐 줄 수 있는 전부라며 작가에게 좋은 시나리오를 써서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작가 김지헌은 본격적인 영화공부를 위해 서라벌예술학교의 전신인 서울예술학원에 입학했다. 1949년에 설립된 서울예술학원에는 이광래, 김진수, 백철, 양주동, 박목월, 서정주, 오영진 등 당대의 문인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작가는 학교에서 시나리오 부장을 맡는 등 학교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이러한 학교생활도 한국전쟁과 함께 일단락되고 만다. 하지만 학교에서 맺은 인연은 전쟁 중에 소중한 인연으로 돌아왔다. 9. 28수복 이후 작가는 친우들과 함께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였다. 하지만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전투에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작가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해 논산으로 떠난다. 논산에서 만난 이가 서울예술학원 동문인 시나리오 작가 하유상이다. 하유상의 도움으로 잠시 논산에 머물렀던 작가는 자형을 찾아 광주로 갔지만 도착했을 때 자형은 이미 광주를 떠난 뒤였다. 극심한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작가에게 도움을 준 이가 문학평론가 장백일이다. 장백일의 도움으로 건강을 추스른 작가 광주 군관학교에서 발행하는 정훈잡지 편집관 모집에 응시하여 편집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 면접관이 작가 선우휘이다. 편집관으로 일하면서 작가는 서울에서 피난 온 그리고 광주의 문학청년들과 어울렸고 이들을 따라 광주에 내려와 있었던 시인 서정주와 만난다. 서정주 시인에게 보여준 한 편의 시는 후일 서정주의 추천으로《현대문학》에 실렸다. 작가의 시 <종 鐘>은 정전 이후 출간된《현대문학》4호(1955년 4월호)에 미당 서정주의 추천시로 실렸다. 정전이 되고 서울로 돌아온 작가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창간한《중앙일보》에서 문화부 기자생활을 시작하였다. 작가는 문화부 기자생활을 하면서 당대의 문화계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작가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만난 인연들과 경험이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데 자양분이 되었다고 구술하였다. 기자로 일하던 중 작가는《조선일보》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이 신설된 것을 알고 오랜 꿈인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위해 기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문학청년의 꿈을 일궈낸 광주로 내려가 응모작을 준비하였던 작가는 스승인 오영진의 부름을 받고 스승을 찾았다. 언론계에서 일한 탓에 아는 이가 많은데다가 스승인 유치진과 오영진이 심사위원이라는 것을 알고 예명으로 출품한 작품이 최종에 올라갔는데 심사위원인 오영진이 당선 후보자의 면모가 궁금하여 작가를 부른 것이다. 오영진 선생은 당선 후보자가 자신의 제자인 것을 알고 놀라면서도 당연한 결과라며 당선을 축하했다. 작가는 이때 사용한 예명인 ‘김지헌’으로 영화계에서 활동했다. [사진3] 해방 후 신세대 영화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신예프로덕션에 김지헌 작가도 참여하였다. 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영화의 포스터이다. 영화는 전후의 암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방황을 그렸다. 태양족 영화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태양족 영화를 만든 오시마 나기사의 찬사를 받았다. 시나리오 당선과 함께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가의 길로 들어선 작가는 이성구 감독, 이강원 감독, 제작자 전홍식 등과 함께 신예프로덕션을 창립하였다. 영화계에 새로운 세대의 바람을 일으켜보자며 의기투합한 이들을 당대의 영화인들은 영화계의 젊은 그룹이라 칭하였다. 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신예프로덕션의 창립작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은 평론가 이영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영일은《영화예술》에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의 특집을 게재하였는데 이제 진짜 영화가 나왔다는 평을 실었다. 영화계 원로들은 이영일의 사무실을 찾아가 젊은 영화인들에게 지나친 호평이라며 항의를 하기도 했다. 일본의 태양족 영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인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은 태양족 영화를 만든 장본인인 오시마 나기사의 찬사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영화를 만들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신예프로덕션의 작품들은 언론과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그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전후의 암울한 현실에서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자화상을 담고 있는 이들 영화는 새로운 세대를 가로막는 당시의 불안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진4] 김지헌 작가의 대표작인 <만추>(1966)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 [사진5] 1966년 개봉한 신성일, 문정숙 주연의 <만추>(이만희)의 포스터이다. 안타깝게도 영화를 볼 수 없다. 작가는 이만희 감독의 세련된 감수성이 돋보이는 연출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사진6] 이만희 감독과 함께 한 또 하나의 작품 <원점>(1967)의 포스터이다. 설악산 여행을 함께 떠난 이만희 감독과 작가가 설악산을 배경으로 구상한 영화이다. [사진7] <용서받기 싫다>(김묵, 1964)는 작가가 가장 아쉬움을 갖고 있는 작품중 하나이다. 이만희 감독은 이 영화를 리메이크하고 싶어 작가에게 전화를 했다. 작가가 이만희 감독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사진8] 1982년 김수용 감독이 리메이크한 <만추>의 포스터 이다. 원작에서 문정숙이 맡았던 혜림역은 김혜자가, 신성일이 연기한 훈은 정동환이 맡았다. [사진9] <만추>(이만희, 1966)는 2010년 다시한번 리메이크 되었다. 연출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김태용, 민규동, 1999)와 <가족의 탄생>(2006)을 감독한 김태용이 하였다. 영화의 배경은 시애틀로 바뀌었고 혜림 역은 중국배우인 탕웨기가, 훈 역은 현빈이 연기하였다. 김지헌 작가는 40년의 간극을 두고 만들어진 원작과 리메이크 작품이 두 감독의 개성과 시대를 잘 담아내었다고 이야기했다. 1960년대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로 단단히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영화에 대해 토론을 하고 상생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나는 것에 목말라 했다. 그 갈증을 해소시켜 준 이가 바로 이만희 감독이었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만희 감독은 <7인의 여포로>(1965)로 인해 고초를 겪을 당시 만났던 동료 재소자를 만난 일화를 들려주었고 이를 예사로이 넘기 않은 작가가 시나리오 만든 것이 영화 <만추>(이만희, 1966)이다. 작가는 이만희 감독을 누구보다 뛰어난 연출력과 창의력을 가진 감독이라고 회고했다. 영화는 대성공을 거뒀다.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야 하는 여자와 쫓기고 있는 남자가 함께 국수를 먹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울음이 터졌다. 역설적이게도 정작 스크린 안의 배우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이러한 연출이 이만희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작가는 설명하였다. <만추>(이만희, 1966)의 흥행이후 작가는 이만희 감독의 갑작스런 제안으로 설악산 여행을 떠났다. 이만희 감독과 작가는 설악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종일 술잔을 기울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작가는 이를 시나리오로 썼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이만희 감독이 1967년에 연출한 <원점>이다. 갑작스런 이만희 감독의 죽음을 작가는 많이 안타까워했다. 아쉬움이 많았던 작품인 <용서받기 싫다>(김묵, 1964)를 영화화 해보고 싶다는 전화통화가 이만희 감독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만추>(이만희, 1966)는 일본에서 상영되어 큰 호평을 받았고 1972년 사이토 고이치가 <약속 約束>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하였다. 한국에서도 1981년에는 김수용의 연출로 그리고 2010년에는 김태용의 연출로 다시 만들어졌다. 영화가 세 번에 걸쳐 각기 다른 감독에 의해 재해석 될 수 있다는 것은 오리지널 시나리오 안에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작품성이 숨 쉬 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유현목 감독이 연출한 <태양은 다시 뜬다>(1966)로 제5회 대종상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만추>(이만희,1966)의 흥행 그리고 <태양은 다시 뜬다>(유현목, 1966)의 대종상 수상까지, 1966년 한 해 동안 작가는 자신의 대표작들을 일궈냈다. [사진10] 1966년에는 김지헌 작가의 대표적인 두 작품, <만추>(이만희)와 가 개봉하였다. 작가는 <태양은 다시 뜬다>로 제5회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사진11] <태양은 다시 뜬다>(1966)를 연출한 유현목 감독은 당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특히, 문예영화 연출에 있어서 독보적인 감독이었다. 1960년대 작품성과 흥행성 있는 작품을 두루 발표하며 시나리오 작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작가는 1972년 한국영화인협회 시나리오분과위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작가는 1973년 유신과 함께 개정된 4차 개정 영화법과 시나리오 사전심의제에 강력하게 저항하며 영화계 전반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유신체제 하의 영화는 검열로 훼손되기 일 수였다. 작가는 이 시기 본인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차마 볼 수 없었다. 현대물에 대한 검열은 더욱 심해 이 시기의 작품 대부분이 시대물 혹은 코미디가 될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의 안타까운 현실을 작가는 이야기했다. 작가는 1973년 한일합작영화를 준비하였다. 한일 양국의 예인들의 삶을 다룬 영화는 연방영화사 주동진 사장이 제안하여 쇼치쿠 영화사와 합작을 계획한 영화였다. 시나리오의 원제는 <가야금-겨울의 가락>이다. 하지만 1973년 한일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영화의 합작계획은 표류하게 되었다. 작가는 국내영화사의 제안으로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을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유현목의 연출로 1977년 <문>이란 제목으로 완성되었다. [사진12] 1977년 개봉한 영화 <문>(유현목)은 김지헌 작가가 1973년 한일합작영화로 준비한 영화였다. 시나리오의 원제목은 <가야금-겨울의 가락>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예인들의 삶을 다룬 시나리오는 1973년 한일관계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제작의 어려움을 겪었다. 1977년 유현목 감독의 연출로 완성되었다. [사진13] 일제말기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임원식, 1977)는 극장 상영 중 상영금지처분을 받아 상영이 중지되었다. 후일 미국 이민을 떠난 뒤 비로소 본 영화는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다른 영화였다. 작가는 검열로 다른 작품이 된 영화를 이국 땅에서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하였다. [사진14] 김지헌 작가는 1972년 한국영화인협회 시나리오 분과위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3년 유신과 함께 개정된 영화법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던 작가는 검열로 영화가 훼손되어가는 과정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1970년 대 후반 영화의 검열은 더욱 엄혹해졌다. <야시>(박남수, 1979)도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 사뭇 다른 작품이 되어버린 영화 중 하나이다. [사진15] 김지헌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김수용 감독이 연출한 <망명의 늪>의 포스터이다. 작가는 1976년《조선일보》4월 23일자 5면에 「영화시책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국산영화 향상을 위한 제언’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에서 작가는 영화업의 허가제, 우수영화 수입추천제, 시나리오 사전 검열 한국영화의 발전과 창작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작가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영화인 모두가 공감하였던 것은 아니다. 일부의 영화인들은 박정희 정권과의 마찰을 두려워했다. 작가는 정부의 영화정책이 궁극에는 한국영화의 질적 저하를 야기할 것이라 예견했고 결국 스크린 위의 검열로 훼손된 영화들을 통해 그 결과가 보여졌다. 작가는 1968년 통혁당 사건이 발생한 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소환의 이유는 영화 <학사주점>(박종호, 1964) 때문이었다. 통혁당 사건의 관련인이 명동에 학사주점을 하였는데 그것이 이유였다. 영화 속 주인공(신성일)이 군에서 제대하고 아버지(김승호)를 찾아갔는데 아들을 본 아버지의 첫 마디가 “쌀값도 비싼데 왜 벌써 제대를 했느냐” 였다. 군대에서 제대한 아들에게 쌀값 운운하는 것이 말이 안 되고 또 남한이 그렇게 못사는 나라라는 뜻인지, 이는 이적행위라며 작가를 불러간 이들은 추궁했다. 다행히 작가는 풀려났지만 엄혹했던 한 시절에 벌어진 웃지 못 할 일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영화가 상영 중에 금지를 당하는 일도 일어난다. 1977년 작품인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임원식)은 검열에 합격해 극장에 상영되었으나 상영금지처분을 받아 결국 간판을 내려야 했다. 일제말기 신사참배에 저항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사전심의에서부터 불순하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기독교 측의 반정부 투쟁이 격렬했고 정부는 이 영화를 이러한 분위기를 부추기는 작품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국 영화는 상영이 취소되었고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뒤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에 합격하여 극장 상영을 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이미 미국이민을 떠난 뒤였다. 작가는 미국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다른 영화가 되어있었지만 작가는 영화가 만들어진 지난한 과정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검열로 원안과 다른 작품이 되어버린 영화를 보는 것은 작가에는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야시> (박남수, 1979), <망명의 늪> (김수용, 1978) 등 작가의 많은 작품들은 검열의 과정에서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사뭇 다른 작품이 되어버렸다. [사진16]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1980년 김지헌 작가는 미국 이민을 떠났다. 이민 생활 중에도 쉬지 않았던 창작 활동의 결과물은 2013년 집문당에서 발간한 『한일대역시나리오선집』에 실려 있다. 시나리오 선집은 한일 양국에서 출판되었다. 작가는 1980년 짧은 서울의 봄을 뒤로하고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1980년 1월 작가는《조선일보》1980년 1월 27일 5면에 「80년대의 한국문화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나, (9) 영화 제작-표현의 자유를. 자질 향상 위한 해외연수-기금확보도」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새로운 정치권력에게 한국영화계의 문제점들을 타파하고 발전을 모색할 것을 제안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희망은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고 작가는 미국이민을 결심하였다. 뉴욕을 거쳐 LA에 정착한 작가는 미주 영화인들과 함께 영화화를 도모하는 한편 작품 창작도 쉼 없이 하였다. 작가는 각기 활동해 오던 한미영화학회와 미주한국영화인회의를 통합한 미주한국영화인회의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작가는 감독 홍의봉, 제작자 주동진 등과 함께 재미교포 이철수 사건을 영화화를 모색하였다. 또한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오는 한국영화인들을 지원하는 등 미국에 머물면서도 한국영화계와 밀접하게 지냈다. 작가는 1987년 미국에 머물 당시 <별의 유역>을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1989년 영화진흥공사 지원작으로 선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작가는 이민을 떠난 지 십년 만에 귀국하였다. <별의 유역>은 방대한 스케일 때문에 영화화되지 못하였지만 작품은 2013년 집문당에서 발간한 『한일대역시나리오선집』에 실려 있다. 한일 동시 출간된 이 작품집에는 미발표된 다수의 시나리오가 실려 있다. 십년 만에 돌아온 한국영화계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비디오 대여 시장과 케이블 TV의 영향으로 대기업이 영화제작투자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의 신진 인력들이 영화계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작가는 귀국 후 영화제작과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요동하는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였던 김지헌은 시나리오 작가의 삶을 꿈꿨다. 시인으로 등단하고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였던 작가는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종점에 피는 미소>가 당선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전후의 불안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당대의 젊은 이들의 삶을 스크린에 담고자 하였던 작가는 영화계의 신진들과 힘을 합쳐 신예 프로덕션을 설립,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을 만들었다. 전후의 영화계에서 새로운 영화의 바람을 일으켰던 이들은 누벨바그, 네오리얼리즘 등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바람을 한국영화계에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시도는 년 간 백 여 편 이상의 영화를 생산해내던 당시의 한국영화계가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것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바람은 기성의 영화인들에게는 불안함으로 느껴질 수 있었겠지만 영화에 대한 이들의 문제의식이 당대의 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였음을 앞서 기술한 평론가 이영일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자리매김을 확고히 하고 대표작으로 <만추>(이만희, 1966)를 꼽았다. 또한 1960년대를 자신의 전성기라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유신체제가 시작되면 작가의 삶은 녹록치 않아졌다. 작가는 유신체제하의 엄혹한 현실에서도 창작자의 당연한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위해 날카로운 비판의 글을 쓰는 한편 검열과 싸우며 수많은 작품을 완성하였다. 1980년 짧은 서울의 봄이 지나가고 작가는 다시 겨울로 들어서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작가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1990년대의 한국영화는 사뭇 달라진 환경이었다. 영화사의 설립과 관련한 법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이 되었고 수입자유화와 외화 직배 그리고 비디오가 활성화되면서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이 시작되었다. 작가는 영화제작자로 다시 영화계에 돌아와 무엇보다도 시나리오 작가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고 영화계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기회를 마련해 주고자 노력하였다. 1958년 이병일 감독의 <자유결혼>의 각색으로 데뷔한 김지헌 작가는 1990년 <홀로서는 그날에>(석래명)의 윤색에 이르기까지 60여 편의 각본과 20여 편의 각색과 윤색을 담당하셨다. 1990년 이후로는 제작과 후학 양성에 힘써 오신 김지헌 작가는 2014년 영상자료원과 함께한 원로영화인 구술사 작업을 마치시면서 좋은 작가란 동시대를 고민할 줄 알아야한다고 했다. 한국영화와 60여 년을 동거동락한 작가의 경험이 깊이 새겨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