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령: 귀신놀이
- 감독
- 손동완
- 제작년도
- 2024
- 출연
- 김예림, 이찬형, 서동현, 오소현, 김은비, 박서연
교과서는 언제나 역사를 재구성한 다음 요약한다. 독일 무성영화에 대한 오해는 영화사의 ‘매뉴얼’화에 관한 사례이다. 그때 영화사의 섬광은 사라지고 오류추론이 시작될 것이다. 독일 무성영화에 대한 대부분의 해설은 과도할 정도로 표현주의 영화에 기울어져 있고, 그런 다음 하나의 경향에 모든 영화를 수렴시키면서 현실의 반영이라는 도식을 끌어들인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저서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독일영화의 심리사>가 너무 훌륭했기 때문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지만 크라카우어도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물론 독일 무성영화의 위대한 전통이 표현주의 영화(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경향이 바이마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다른 하나는 사극영화(Kostüfilme)의 대중적인 성공이 있었다.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 개봉했던 1919년부터 쏟아져나온 영화는 사극이었다. 먼저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1918년 11월 11일 일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났고,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유럽동맹들은 독일 제국을 해체할 수 있는 경제적 보상금을 요구하였다. 무엇보다도 산업혁명 이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근대적인 무기가 동원된 첫 번째 전쟁에 유럽인들 모두가 공포에 질렸다. 여기에 독일 국민은 패전으로 인한 천문학적 화폐 가치 평가절하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의 구렁텅이에 떨어졌다. 빈곤과 허기에 시달리는 독일인에게 필요한 건 빛과 그림자로 표현주의 세트에 그려내는 암울한 실내의 심리극이 아니라 잠시라도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여흥과 웃음의 스펙터클이었었다. 여기에 늘 위대하다고 노래하던 게르만 민족의 낭만주의의 꿈을 산산조각 낸 ‘패전한 조국’에 대한 실망이 독일 관객들을 사극 장르로 이끌었다. 전쟁 전에는 무대 극장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오페레타가 여흥이었다. 하지만 전쟁 중에 대부분 극장이 문을 닫았다. 그 역할을 사극영화가 떠안았다. 경기 불황으로 제작비는 전쟁 이전으로 돌아갔고, 게다가 전쟁에서 돌아온 수많은 남녀노소가 실직 상태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값싸게 대규모의 엑스트라를 쓸 수 있었다. 폴란드에서 온 유대인 에른스트 루빗치는 1913년 막스 라인하르트 그룹에서 배우로 합류하였다. 하지만 배우로서는 별 재능이 없었다. 이듬해 단편 <비누 거품 아가씨>를 첫 연출 했다. 배우와 연출을 오가던 루빗치는 1918년 첫 장편영화 <엄마의 눈길>을 감독했다. 다소 놀랍지만 1919년에는 7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그런 일정에도 <즐거운 남편> 시나리오를 썼고, 레오 라스코가 연출했다. 그 해 연출한 <마담 뒤바리>는 9월 18일 베를린의 가장 크고 화려한 극장에서 개봉하였고, 상영이 끝나자 “우레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 영화를 보고 막스 라인하르트는 에른스트 루빗치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루빗치씨, 이 학생은 이제 스승을 넘어섰군요” 프랑스 대혁명 전야를 배경으로 실존 인물이었던 루이 15세의 정부 잔느 베퀴, 천민 계급이었지만 우여곡절을 거쳐 뒤바리 백작과 결혼한 다음 루이 15세의 ‘공식적인’ 정부였던 마담 뒤바리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혁명 관중들 앞에서 목이 잘리는 장면이다. 그래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문학적 표현으로 우회하지 않았다) 이렇게 설명했지만 에른스트 루빗치는 <마담 뒤바리>에서 프랑스 대혁명 전야를 재현하는데 아무 관심이 없다. 이 영리한 유대인은 처음부터 시대정신의 공기를 읽어내는 재능이 있었다. 루빗치는 1919년 독일 관객이 스크린에서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지를 읽었다. <마담 뒤바리>는 다가오는 혁명의 기운과 열광으로 클라이맥스이자 엔딩을 맞이한다. 독일인들은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매일 거리에서 보고 있었다. <마담 뒤바리>가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동안 거리에서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독일 공산당 스파르타쿠스당이 경찰과 바리케이드까지 치면서 무장투쟁을 하고 있었다. <마담 뒤바리>를 보면 두 가지 점에서 깜짝 놀랄 것이다. 첫째, 루빗치의 영화를 대부분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로만 알고 있을지 모른다. <마담 뒤바리>에서 이미 ‘루빗치 터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둘째, 동시대의 표현주의 영화들 속에서 루빗치는 완전히 다른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루빗치는 ‘여자’ 주인공 (1919년이라는 걸 먼저 염두에 두고 셈을 하기 바란다) 잔느 베퀴를 따라가면서 자유자재로 사회의 신분과 계급을 옮겨갈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남성 복장으로 변장(cross_dress_gender)하면서 영화의 모든 장면을 동기화하고 재구성해나간다. 그러면서 영화의 플롯은 잔느가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옮겨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장면들에서 잔느는 항상 중심을 차지한다. 이 사이의 긴장이 상황을 거의 난장판으로 만들어나가는데 거기서 루빗치는 희가극이라고 부를만한 코믹한 유머를 냉소적인 조롱을 끌어낸다. 이 장면들을 연출하면서 루빗치는 이미 공간 안에서 인물의 동선을 연결하면서 콘티뉴이티 편집을 비롯한 할리우드 문법을 자신의 영화에서 활용하고 있었다. 에른스트 루빗치는 독일 영화시장을 이미 장악한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다른 독일 감독들이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더 ‘독일적인 것’을 찾는 동안 대중들이 그것을 더 잘 받아들인다면 그 일부가 되어야 하는 방법을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였다. 잔느 베퀴를 연기한 폴라 네그리는 아마도 첫 번째 팜므 파탈의 계보에 속할 것이다. 폴라 네그리와 에른스트 루빗치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조셉 폰 스턴버그와 마를레네 디트리히에 버금가는 여배우와 감독으로 하나의 짝이 되었다. 놀라운 성공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담 뒤바리>는 이듬해 12월 12일 뉴욕에서 개봉하였다. 모두가 찬사를 보냈다.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미국 관객들은 독일영화를 혐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담 뒤바리>를 열렬하게 환영했다. 아이러니하지만 <마담 뒤바리>는 독일에서 만든 에른스트 루빗치의 ‘아메리카 영화’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토마스 엘새서는 재치 있게 제안했다. 나만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비평가들은 루빗치를 “독일의 그리피스”라고 불렀다. 유대인이었던 루빗치는 스튜디오에서 ‘독일에서’ 계속 영화를 만드는 것은 금방 한계와 부딪치게 될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이 열광은 루빗치에게 하나의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1920년 뮌헨에서 반유대주의와 범게르만주의를 당 강령으로 내세운 독일 노동자당이 창설되었다. 그 해 아돌프 히틀러가 당에 가입하였다. 에른스트 루빗치는 1923년 미국으로 떠나는 증기선에 몸을 실었다.
왕시린. 한자 이름으로 王西麟(pinyin_Wang Xilin). 1936년 12월 13일에 중국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에서 태어났다. 연도를 유심히 읽어 주기 바란다. 아직 국공내전은 끝나지 않았고, 일본 제국주의와의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군을 이끌고 18개의 산을 넘고 17개의 강을 건너 1만 2,500킬로에 이르는 대정정을 끝낸 이듬해이다. 왕시린은 음악에 대한 재능을 타고났다. 시골에서 악기를 변변히 가르쳐주는 교사가 없는 데도 스스로 음악책을 읽으면서 12살에는 중국 전통악기인 후친(胡琴). 아코디언, 그리고 몇몇 관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했고,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되었다. 1949년, 13살 소년 왕시린은 그게 무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때 왕시린은 간쑤성(甘蕭省) 핑량(平凉) 미션스쿨 졸업반이었다. 인민 해방군의 행진을 보았다. 그러면서 소년들에게 입대를 선전하였다. 가난한 왕시린은 가족 중의 입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입대하였다. 여기서 왕시린은 1957년까지 근무하였다. 음악과 먼 생활이었지만 다시 음악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때 군부 위원회에서 군악대 지휘자를 양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왕시린은 지원을 했고, 여기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래서 우수 인재로 발탁되어 상하이에 있는 상하이 음악학교(上海音樂學院)로 전출되었다. 왕시린은 여기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 이 학교에는 유럽에 음악 유학을 다녀온 선생님들과 연주자들이 있었다. 대기근으로 알려진 대약진의 시대를 왕시린은 피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천안문 안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1965년 11월 10일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吳晗)이 쓴 경극 희곡 <하이루이의 파면(海瑞罢官)>을 야오원위안(姚文元)이 대약진운동에 대한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지도자는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1966년 6월 1일 인민일보에 마오쩌둥은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새로운 강령. 이 문장에 들어있는 단어, 척결(剔抉). 살을 도려내고 뼈를 바르듯이 나쁜 부분들을 깨끗이 없애버려라. 부주석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손에 피를 묻히는 역할을 맡았다.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앞에 100만 명의 학생들이 집합하였다. 그들에게 붉은색의 비단 완장이 배급되었다. 해가 떠오르자 연단에 마오쩌둥이 나타났다. 붉은 완장을 두른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열광하였다. 린뱌오는 “착취계급의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관습을 타도하라”고 호소하였다. 지도자는 인자한 표정으로 그들의 환호에 응답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홍위병들은 처음에는 그들의 교사를 공격하였다. 상하이 음악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시린의 선생님들은 자아비판에 불려갔고, 그 과정에서 자살하거나 불구가 되거나 아니면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 다음에는 그들의 동료가 목표가 되었다. 그 중의 한명이 왕시린이었다. 왕시린은 학교를 비판하는 대중연설을 요구받았다. 왕시린은 거절하였다. 청년동맹에서 악질분자로 분류한 다음 10번도 넘은 자아비판을 요구했고, 그런 다음 “인민 속으로 들어가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다시 학습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시린은 시골로 하방(下方)되었다. 그가 보내진 곳에서 왕시린은 주자파로 분류되어 한밤중에도 불려 나가 사람들 앞에 서서, 자아비판을 하고 야유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이른바 제트기 자세라고 불리는 사상개조 고문을 받았다. < 흑의인 >이 시작되자마자 왕시린이 허리를 숙인 다음 두 팔을 길게 뻗고 서 있던 그 자세, 이 자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지금 이 글을 읽는 걸 멈추고 일어서서 해보길 바란다. 중국 전역에서 반혁명분자로 분류된 이들에게 요구된 자세. 그 자세를 추운 겨울날 운동장에서 밤새도록 요구하고, 한여름 뜨거운 뙤약볕 아래 세워놓고 종일 그렇게 서 있어야 했다. 쓰러지면 무서운 매질이 기다렸고, 그리고 다시 일어서서 계속해야만 했다. 왕시린은 문화혁명 기간 중에 자신의 치아를 잃었고, 청력의 20퍼센트를 상실했다. 왕시린은 음악가이다. 왕빙은 왕시린의 음악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첫 번째(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 극영화 < 바람과 모래 (The Ditch, 夾邊溝)>의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복잡한 사정으로 잘 안 되었다. 하지만 계획을 바꾸어서 왕시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 사이에 변화가 생겼다. 왕시린은 2017년 10월 24일 그의 거주지를 베이징에서 독일 라인할트- 팔츠주(州) 마인츠로 이사했다. 왕빙은 왕시린을 찾아가 집에서 인터뷰했고, 또 왕시린이 지휘하는 무대도 찍었다. 하지만 무언가 핵심적인 것이 거기에 빠졌다고 느꼈다. 계속해서 완성을 미루었다. 방법을 바꾸었다. 왕빙은 왕시린을 단 하룻밤 극장 무대에 세우기로 하였다. 프랑스 파리 10구 샤펠가 37번지에 자리한 극장 떼아트르 데 부프 뒤 노르(Théâtre des Bouffes du Nord)에서 2022년 5월 27일에 촬영하였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극장. 왕시린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말 그대로 발가벗고, 몸의 어떤 부위도 가리지 않고 무대 위로 걸어 올라온다, 이때 우리는 그 몸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몸에 새겨진 역사. 달리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온몸에 피어난 검버섯. 흘러내리는 것만 같은 살. 몸은 아직도 문화혁명을 기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대에 서자마자 제트기 자세를 한다. 그런 다음 자신이 처음 인민해방군의 행진을 보던 날부터 시작해서 긴 증언을 시작한다. 아니, 차라리 이건 공연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왕시린은 기억의 무게 앞에서 몸서리치면서 견딜 수 없는 그 시간을 물리치기라도 하듯이 노래 부르고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쾅쾅 두들긴다. 그건 아름다운 선율이 아니다. 노래는 비명을 지르는 것 같고, 건반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다. 그렇다. 이것이 왕시린이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와 싸워온 방식이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한다. “나는 오직 작곡을 하고 또 하면서 그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그렇게 악보에 그걸 기록했습니다. 누군가 그걸 연주할 때 그건 그 시간을 살았던 인간을 다시 불러내고 그 시간의 무게를 듣고 경험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영화의 제목에 관해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이 영화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黑衣人)’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왕시린은 마지막에 노래를 부른다. 노래 가사만으로는 이 내용을 따라올 수가 없다. 이 노래는 왕시린이 작곡한 ‘흑의인지가(黑衣人之歌,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노래)’이다. 이 노래 가사는 소설가 루쉰이 1926년에 쓴 소설 <주검>(鑄劍, 쇠붙이를 녹여 칼을 만들다, 한국에는 <도공의 복수>라고 김시준이 번역했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알지 못하면 이 가사의 뜻을 알 수가 없다. 단조롭게 줄거리를 소개하겠다. 열여섯 살이 되는 소년 미간척은 어머니에게 칼을 만드는 천하제일의 명인이었던 아버지 이야기를 듣는다. 왕은 어느 날 신비로운 쇳덩어리를 얻게 되고 미간척의 아버지를 찾아와 검을 만들어달라고 한다. 아버지는 삼 년에 걸려 두 자루의 검을 만든 다음 아내에게 한 자루를 주면서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알려준다. 의심 많은 왕은 틀림없이 세상에 둘도 없는 검을 바치면 자신이 또 다른 검을 만들지 못하게 자신을 참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아이가 열여섯 살이 되면 자신의 복수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왕궁에 가서 검을 바치고 참수당한다. 미간척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떠나지만 그만 왕의 부하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미간척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나타난다. 그리고 두 가지 제안을 한다. “만일 나에게 너의 목과 검을 바치면 네 복수를 해주마” 미간척은 망설임 없이 아버지의 칼로 자신의 목을 자른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미간척의 목과 검을 들고 왕에게 세상에 없는 구경거리를 보여주겠다고 아뢴다. 그러면서 큰 솥에 물을 끓여달라고 요구한다. 물을 끓이자 그 속에 미간척의 목을 집어 던진다. 그런 다음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솥 안에서 노래에 맞춰 미간척의 목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런데 오르락 내리락 하던 그 목이 갑자기 보이지 않자 왕이 어찌 된 일이냐고 묻는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솥 안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가까이 오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아뢴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왕이 솥에 가까이 와서 목을 들이밀자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왕의 목을 자른다. 솥 안에 굴러떨어진 왕의 목을 미간척의 목이 물어뜯으면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와 눈을 찡긋 맞춘다. 왕시린이 부르는 노래는 여기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사내가 부르는 노래를 가져와서 작곡한 곡이다. 루쉰의 소설에 관해서는 많은 해설이 있다. 아마 <흑의인>을 보고 나면 당신의 해설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왕시린은 평생동안 싸웠다. 어디서? 그의 악보 위에서. 혁명 속에서의 혁명. 선율과 피비린내. 리듬과 비명.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난 다음 왕시린은 무대를 떠난다. 왕빙은 텅 빈 극장을 둘러본다. 그런데 저기 누가 앉아있다. 왕시린이 앉아있다. 왕시린은 누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일까. 왕빙을? 영화를? 천안문의 지도자를? 아니면 역사를? 아니면 우리를? 아마도, 아마도 그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왕시린, 그 자신을,
(본문 속 사진을 클릭하시면 링크가 열립니다.)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 이 어두운 세계에서 희망 가득한 긍정의 말로 이 글을 시작하는 걸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영화의 현재는 참으로 좋지요! 이보다 좋을 수 없습니다! 최상이죠! 그런데 내 생각보다 더 좋다면 어떡한다. 하지만 호들갑 떨진 맙시다. 그것도 좋지만 누구도 심장 마비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쇼크받을 만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요즘 내가 LP를 자주 듣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브릿팝을 듣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더라도 뉴오더는 전혀 브릿팝이라고 할 수 없다. 1993년에 나온 여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Republic]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브릿팝은 90년대 영국에서 유행했던 다소 복고적인 기타 팝을 가리키는 다소 두루뭉술한 용어다. 전설적인 60년대에서 패션과 태도, 분위기와 멜로디를 빌려온 브릿팝은 그런지로 대표되던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20년 넘도록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차게 식은 차를 후후 불어 마시던 영국인들의 자존감을 채워주었다. 1997년 신노동당을 표방하며 18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룬 토니 블레어 정부는 브릿팝의 흥행을 등에 업고 쿨 브리타니아라는 이름으로 음악과 영화, 패션과 축구를 아우르는 일종의 문화 캠페인을 벌인다. 실제로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던 블레어는 하원 파티에 브릿팝 밴드들을 부르며 힙한 모습을 과시하기를 즐겼다. 하지만 훗날 펭귄북스에서 3권으로 출간된 대변인 알라스테어 캠벨의 일기에 따르면, 다우닝가에서 열린 총리 취임 기념 연회에 비비안 웨스트우드, 랄프 파인즈와 함께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가 참석할 거라는 소식을 전달받은 TB(토니 블레어)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가 그를 초대한 건지 모르겠군. 그는 분명히 미친 록큰롤 같은 소동을 일으킬 거고 나는 전설적인 사건의 희생양이 되겠지. 앨런 맥기(*오아시스를 발굴한 크리에이션 레코즈의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야겠어. 노엘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받아내야 해. 맥기는 떨고 있는 총리에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노엘은 괜찮을 거라고, 오아시스의 다른 반쪽(리엄 갤러거)을 초대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연회 당일, 아내를 대동한 노엘이 맥기와 맥기의 여자친구와 함께 총리 관저에 도착했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타리스트를 마주한 블레어가의 아이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하얗게 굳어버렸다. 노엘은 블레어의 성공을 축하했고, 블레어는 노엘의 성공을 축하했다. 그리고 둘은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고 싶지 않다… 영상 1. 다우닝가에 도착하는 노엘 갤러거 그날 노엘은 술을 진탕 마셨고, 별다른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으며, TB와 쿨 브리타니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물론 영원한 적은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 아편전쟁 당시 영국 수상을 지낸 제3대 파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의 말이다. 1997년은 브릿팝이 이미 프로파간다로서의 동력을 잃어가고 있던 해였다. 오아시스와 함께 브릿팝 전쟁의 당사자였던 블러가 브릿팝의 죽음을 선언하며 미국적인 향취로 가득한 다섯 번째 앨범 [블러]를 발표했고, 80퍼센트에 달했던 블레어의 지지율은 어느새 52퍼센트로 급락했다. 1999년 노엘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옵저버’에 입사한 햇병아리 기자였던 닉 패튼 월시에게 신노동당은 변장한 토리에 지나지 않는다며 불평을 쏟아냈다. 아무 것도 바뀐 게 없어, 그렇잖아? 똑같은 똥들이 있는 다른 날들일 뿐이지. 그 뭐야, ‘우리는 이제 모두 중산층입니다We’re all middle-class now’? 그건 정말 모욕적이었어. 중산층이 된다는 건 좀 있으면 자살할 거라는 말이잖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지루한 일이 바로 중산층이 되는 거라고! 그럼 애초에 총리가 주최한 파티에는 왜 참석한 거냐는 신참 기자의 질문에 노엘은 조금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난 그냥 이렇게 생각했지. 영국 총리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젠장, 내가 빌어먹을 괴짜라도 된 것 같군. 나는 그날 밤에 기사 작위라도 받으려는 모양이라고 확신했어. 누구나 살아가고 그러면서 배우는 거잖아, 안 그래? -한 마디로 하면 이거죠.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학이시습지불역열호. -…정연씨,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이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떠오르지 않나요, 지돈씨? 케이팝으로 시작해서 < 기생충 >과 < 오징어 게임 >으로 그리고 다시 BTS와 청와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이랑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걸 느끼지 못하겠어요? JD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그보다는 딸기와 퍼지로 코팅된 쇼트브레드가 들어간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떠오르는군요. 먹고 싶다 벤앤제리. -아니, 저기요. 과거에서 배운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전세계가 K-문화에 열광하는 지금… 음악 1 ‘Ice Cream as Main Course’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피아노 선율이 들려온다. 자비스 코커와 칠리 곤잘레스의 ‘Ice Cream as Main Course’ 전주다. 갑자기?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JD를 바라본다. 어느새 피아노 앞에 앉아 핀 조명을 받으며 건반을 두드리고 있던 JD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먹을 꼭 쥔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길을 닦은 사람들입니다 ♪쓰레기로 가득한 오늘날의 거리 말예요 ♪타투 바와 스포츠 바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생각을 들을 수 없죠 ♪그것들이 가라앉으며 내는 잘랑잘랑잘랑 소리뿐 ♪에너지 드링크를 섞은 보드카 한 잔 더 ♪그치만 옛날로 돌아가면 ♪우리도 쿨했었는데 ♪헐리우드의 Musso and Frank’s에서 ♪우리는 메인 코스로 아이스크림을 시켰죠 ♪실크로 된 터번을 쓰고 ♪초코 우유를 마시면서 ♪물론 럼주 한 잔은 옆에 두고서 ... ... ... 노래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우리는 후렴을 함께 소리높여 합창했고, 아마 어느 부분에서는 눈까지 감았던 것 같다. < 어바웃 어 보이 >에서 휴 그랜트가 그랬던 것처럼. 영상 2 <어바웃 어 보이>의 한 장면 정말이지 나는 뮤지컬 영화를 이해할 수가 없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슬프게도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나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콜라를 본다, 라고 정지돈은 [영화와 시]에서 말했다. 마찬가지로 집에서 영화를 소비할 때는 배스킨라빈스나 벤앤제리스를 보는 거라나 뭐라나. 나는 다른 많은 이름들처럼 벤앤제리스라는 이름도 정지돈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벤앤제리스는 뉴욕주 롱아일랜드 출신의 두 친구 벤 코헨과 제리 그린필드가 1978년 설립한 회사다. 2000년 다국적 기업 유니레버에 매각되었지만 독립적인 운영 방침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벤과 제리는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한 샌더스를 위해 2016년과 2020년 두 차례에 걸쳐 버니의 열망(Bernie’s Yearning)이라는 한정판 아이스크림을 출시했는데, 민트향 아이스크림을 덮고 있는 얇은 초콜릿 막을 숟가락으로 깨부수고 마구 뒤섞음으로써 상위 1퍼센트가 소유한 부를 99퍼센트에게 골고루 돌려준다는 의미가 있다고 할까요? 벤은 곧바로 이렇게 덧붙였다. 이 아이스크림의 맛을 표현하자면 참여(participatory)의 맛이 난다고 하고 싶군요. 참여하시겠습니까? 깔끔한 폰트와 배색이 돋보이는 벤엔제리스의 홈페이지에는 맛의 무덤이라는 섹션이 있다. 그곳에는 화석 연료(초콜릿 쿠키 조각, 공룡 퍼지 및 퍼지가 물결무늬로 스월된 스윗 크림 아이스크림), 거북이 수프(퍼지로 코팅한 캐러멜 캐슈넛과 물결무늬로 스월된 바닐라 아이스크림), 둔감한 신성(밀크 초콜릿 아이스크림과 화이트 퍼지 우유가 스월된 화이트 초콜릿 아이스크림 그리고 다크 퍼지 우유), 도시의 혼돈(코코넛 아몬드 퍼지 칩과 뉴욕의 슈퍼 퍼지 덩어리가 스월된 초콜릿 아이스크림의 만남 그리고 코코넛 아이스크림과 화이트 및 다크 초콜릿 덩어리, 피칸과 구운 아몬드의 조화), 악랄한 조합(피칸, 아몬드, 건포도와 초콜릿 칩이 들어간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은퇴한 아이스크림들의 묘비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쿨 브리타니아의 것도 있다. 그림 1 쿨 브리타니아 묘비 쿨 브리타니아 1995~1998 이 맛은 엄청난 강타자였지만 - & 파울로 아웃되었습니다. 딸기 앤 쇼트브레드 - 독실한 사랑의 조합 하지만 슬프게도 마땅히 누려야 할 명성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즐기기엔 너무 영국스러웠나 봅니다. 말라버린 강둑의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블러의 베이시스트이자 ‘알렉스 제임스 제공Alex James Presents’, ‘좋은 웨일스 공녀 모드Good Queen Maude’, 그리고 뉴오더의 노래 제목을 딴 ‘블루 먼데이Blue Monday’ 등 빛나는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다수의 치즈를 생산하는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성공적인 영농기업인 알렉스 제임스는 브릿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냐는 다큐멘터리 제작진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브릿팝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제 일부가 죽어요. 이런 식의 사카즘은 영국의 전통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조너선 스위프트에서 로렌스 스턴, 토머스 드 퀸시,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G.K. 체스터턴 등으로 이어지는 두터운 계보(절반 이상이 아일랜드계로 이루어졌다는 게 특히 영국적이다)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리씨는 자신이 이끌었던 전설적인 밴드 더 스미스의 재결합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꾸한 바 있다. 스미스라고? 그 이름은 내게 말라버린 강둑에서 죽어가는 물고기를 연상시킬 뿐인데? 브릿팝이요? 그건 그냥 똥처럼 들리는 소리죠. 펄프와 프로젝트 밴드 JARV IS...의 리더이자 최근 웨스 앤더슨의 영화 < 프렌치 디스패치 >와 함께 하는(companion) 샹송 커버 앨범을 발표하며 뜨뜻미지근한 솔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또 한 명의 영국 전통 사카즘 전수자 자비스 코커는 2017년 피치포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민족주의적인 아이디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건 깃발을 흔드는 음악 같은 게 아니었어요. 브릿팝이라고 불렸을 때는 정말로 불쾌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어떤 대안적인 문화를 전용해서 거기에 유니온잭을 꽂고 크레딧을 모두 가져가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심지어 다섯 번째 회고록을 출간한 유명인들이 득실득실한 영국의 문화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코커의 첫 번째 회고록은 2022년에야 출간된 예정으로, 책소개에 따르면 이것은 자비스의 독특한 삶, 펄프, 20세기 대중문화, 좋았던 시절과 그가 차라리 잊고 싶은 실수라고 말하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일생 동안 축적된 파편들은 글쓰기와 뮤지션십, 퍼포먼스와 야망, 스타일과 연출 기법 등 그의 창작 과정을 보여준다. 이건 인생 이야기(life story)가 아니다. 다락방 이야기(loft story)다. 회고록의 제목은 [좋은 팝, 나쁜 팝Good Pop, Bad Pop]이라고 한다, 세상에. 혼톨로지, 혹은 지나간 미래/도래할 과거의 유령 그림 2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한 장면 그러니까 문제는 책이고 음반이고 영화다. 닉 혼비의 소설(책)을 각색한 <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High-Fidelity>(영화)에서 챔피언십 바이닐이라는 이름의 레코드점(음반)을 운영하는 존 쿠색은 말한다. 정말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느냐다. 책들, 음반들, 영화들—이런 것들이 중요하다. 날 얄팍하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이것이 빌어먹을 진실이다. 블라블라블라. (어디선가 자비스 코커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온다.) ♪나는 내가 깊다고 말한 적 없어, 나는 아주 깊게 얄팍하지 ♪내 지식의 부재는 광대하고, 내 지평은 좁다 ♪난 내가 크다고 말한 적 없어, 똑똑하다고 말한 적도 없지 ♪만약 네가 내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찾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영원히 기다려야 할 거야 ♪여어엉원히 말이야 -책들, 음반들, 영화들은 중요하죠.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는지의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JD가 이어 말했다. -음,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책들, 음반들, 영화들이 중요한 건 우리가 그것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요. -같은 말 아닌가요? -아니요. 존 쿠색의 말을 생각하세요. 같은 영화에서 쿠색은 화면을 바라보며 이렇게 묻죠. 불행하기 떄문에 음악을 듣는 걸까, 음악을 듣기 때문에 불행한 걸까? 그 둘은 전혀 같지 않습니다. 정지돈에 따르면 그것들이 우리를 매혹하는 이유는 죽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매체는 늘 심령 현상을 전달해왔다고 키틀러는 말했습니다. 라캉에 의하면, 실재계에서는 시체라는 단어조차도 완곡어법이기 때문입니다. 정지돈은 계속해서 키틀러를 인용했다. 1837년 모스 부호가 발명된 후, 영매 강령술자들의 ‘노크를 하는 영혼들’이 망자의 영역에서부터 각자의 메시지를 가지고 즉각 뒤이어 등장했습니다. 또한 사진 건판들이 영혼이나 유령의 모상들을 지체 없이 전달하기 시작했고요. 1878년 에디슨이 ‘북아메리카 리뷰North American Review’에 자신이 최근에 발명한 축음기가 어디에 사용될 수 있을지를 예견했을 때, 그 열 가지 목록 중 하나는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말”을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루이 뤼미에르는 영화를 가리켜 죽은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도구에 불과하며 미래 없는 발명품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책은 어떨까요?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제논이 델포이 신전에서 무엇이 가장 훌륭한 삶인가에 대해 신탁을 청했을 때, 그가 받은 대답은 죽은 이들과 교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필로소피아라기보다는 네크로필리아에 더 가까운 신탁을 듣자마자 고대인의 글을 읽으라는 뜻이라고 이해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컴퓨터로 편집한 자료와 샘플을 구식 신시사이저 음색이나 어쿠스틱 악기와 뒤섞고, 라이브러리 음악과 영화음악에서 영감받아 만들거나 통째로 훔친 모티프를 인더스트리얼 드론과 추상적 노이즈에 엮으며 낭송이나 습득한 소리를 신비한 뮈지크 콩크레트/라디오 드라마풍으로 삽입해서 음악을 만드는 혼톨로지의 전략은 이미 고대에도 존재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편집과 전유, 샘플링과 빙의, 그리고 아카이빙은 최근에야 발명된 게 아니라 기록 그 자체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조건이라는 거죠.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사태를 명료하게 만드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지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거예요. 우리의 영화에도 혼톨로지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이용… 과거를 새롭게 상상하는 동시에 미래를 새롭게 기억… 다중적인 시간 축을 동시에 나열… 일종의 피드백 루프를 통해… 어째서일까? 그의 말은 마치 달콤한 자장가처럼 들렸고,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꽤나 길게… 꿈에서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죽은 존재들의 무언의 호소에 민감해지는 게 아닐까,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미래가 과거의 미래, 곧 역사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이론적으로 순수한 선행 기억상실 모든 것은 시간 문제다. 요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원고를 마감하는 것도 시간 문제고, 밀린 책을 쓰는 것도 시간 문제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돈? 물론 중요하지. 그렇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있기만 하다면. 시간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시간과 관련된 문제는 또 있다. 뭘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건 약간의 시간만 흘러도 까맣게 잊혀진다는 사실이다. 정지돈이 말하는 몇몇 고유명사들은 나도 익히 아는 것들이었다. 나는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역자 유현주 선생을 모시고 출간 기념 북토크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은 내개 전혀 새롭게 들렸다. 혼톨로지? 물론 알지.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와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물론 혼톨로지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은 아니지만)을 두어 번은 읽었으니까.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읽었다. 반쯤. 나원영과 강덕구가 번역한 마크 피셔의 글들도 읽었고, 큰 상관은 없지만 베리얼의 첫 두 앨범을 최근 LP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들은 내게 매번 새롭게만 느껴지는 걸까? 내게 아주 많은 시간이 있다면 책상 앞에 앉아 이것들을 찬찬히 다시 읽어볼텐데. 하지만 나는 시간이 없다 그리고 나는 마감을 해야 한다. 마치 나는 입이 없고 그리고 비명을 질러야 하는 것처럼! 그럴 때면 늘 그렇게 하는 것처럼 몇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구글링을 하던 나는 시간에 쫓기는 흔들리는 눈으로 검색 결과들을 빠르게 훑어보다가, 내가 찾는 줄도 모르고 절박하게 찾고 있던 것을 발견한다. 유레카. 나는 정지돈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한다. -자, 들어보세요 지돈씨. 혼톨로지 음악 경향의 창작 방식에는 작곡, 연주, 녹음 과정이 생략되어 있고 타인의 음반을 샘플링한 후 이를 편집하고 아날로그 음반의 노이즈를 증폭 혹은 삼입시키는 식으로 창작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창작 과정은 작곡은 쓰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빙의되게끔 허용하는 것의 문제라는 트리키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실제로 [Maxinquaye]는 정해진 구조 없이 트리키 본인의 맘에 든 몇몇 단편적 소리들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생략… 또 생략…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 속에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어때요, 제가 여기서 어떤 아이디어를 차용했는지 알겠어요? -빙의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홍상수에? -아니요, 근데 좋은 아이디어이긴 하네요. 그건 일단 키핑 해둘게요. 제가 꽂힌 구절은 이거에요. ‘정해진 구조 없이’ ‘본인의 맘에 든 몇몇 단편적 소리들을 토대로’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 속에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저는 이게 이번 원고뿐만 아니라 우리 영화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구태여 매끈하게 만들려고 애쓰지도 않고, 우리가 좋아하는 단편들로만 채우는 거죠. 장면들, 인물들, 대사들, 장소들, 소리들, 작은 이야기들. 그러니까 고다르가 언젠가 자신의 영화에서 한 인물이 단순히 여기에서 저기에서 이동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길을 걷는 장면을 찍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 것처럼요. 대신 우리는 그걸 다른 사람들의 작업에서 가져오는 거고요. -그게 뭐지? 어떤 건지 잘 와닿지 않는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어떻게요? -이렇게 하는 거라니까요. -??? -바로 이렇게요! (다음 회에 계속) *이 글은 다음 글들의 크고 작은 부분들을 조합해서 만들어졌다.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감기도령, 문피아, 2021) [참을 수 없는 가우초](‘크툴루 신화’)(로베르토 볼라뇨, 이경민 옮김, 열린책들, 2013) [영화, 축음기, 타자기](프리드리히 키틀러, 유현주.김남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 'Ice Cream as Main Course'(Jarvis Cocker and Chilly Gonzales) [영화와 시](정지돈, 시간의흐름, 2020) ''민주적 사회주의자'의 아이스크림, 무슨 맛?'(오마이뉴스) 'Tony Blair was worried Oasis would trash Downing Street'(NME) 'Noel looks back in anger at drinks party with Blair'(The Observer) <디스 이즈 팝>(S01XE05)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The 50 Best Britpop Albums'(Pitchfork)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스티븐 프라이스, 2000) <레트로마니아>(사이먼 레이놀즈, 최성민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7)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는 62인의 생각들>(전주국제영화제 엮음, 프로파간다, 2021)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12) '크래클의 형이상학- 아프로퓨처리즘과 혼톨로지'(마크 피셔, 420 옮김, 네이버블로그 '좋습니다') '레이브 이후의 런던'(마크 피셔, gkd 옮김, 네이버블로그 'K-atacccombb') '트릭놀로지의 유령들'(이엔씨, 포스타입 '알 수 없는 평론가들')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할란 앨리슨, 신해경.이수현 옮김, 아작, 2017)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