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 105 (공 105)
- 감독
- 강수연, 이다혜, 이서진, 이현정, 장재호
- 제작년도
- 2003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취향에 맞는 영화라는 것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이미 정전으로 기록된 작품 목록의 외부를 끊임없이 훑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지영 감독의 이력에서 데뷔작인 <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 >(1982)나 대표작으로 꼽히는 < 남부군 >(1990), < 하얀전쟁 >(1992)을 아는 사람들은 많아도, < 산배암 >(1988)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당대의 영화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다음과 같이 보았다. “이 작품 <산배암>의 광고 문안이나 포스터를 보면, 바로 그런 류의 한탕 영화라는 짐작을 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그러한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오히려 ‘벗기기’와 ‘지방 장사’가 기피하는 사회현실의 반영과 약간의 정치의식마저 담고 있기 때문 이다. 필자는 이 작품이 중견 정지영 감독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요즘 나온 영화 중 장선우 감독의 < 성공시대 >와 더불어 사회성 영화로 퍽 드물게 성공한 예에 속한다고 보았다.” - 정재형, “[영화평] 한국영화가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 정지영 감독의 <산배암>”, 《스크린》 1988년 10월호(통권56호), 284쪽. “4년여의 긴 공백 끝에 만든 < 거리의 악사 >는 검열로 인해 부분적인 사회묘사마저 생략됨으로써 평범한 멜로드라마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으며 화제작이었던 < 위기의 여자 >는 과다한 나눠찍기에 의한 편집이 거슬리는 1930년대 할리우드의 여성관객용 멜로드라마의 재판이었다. 1988년에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 < 여자가 숨는 숲 >과 <산배암>은 정지영 감독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최악의 작품이었다. 정신분석학적 접근과 계급의식이 배제된 이 두 편의 여성 심리를 다룬 영화들은 충무로의 장르영화에 불과하다 .” - 전양준, “젊은 평론가가 본 한국 영화감독 10인 (5) 정지영”, 《한겨레》, 1990년 7월 1일자 11면 기사. 음?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평가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위의 글이 <산배암>의 사회현실 반영과 정치의식(이 글의 뒤에서 이를 계급의식이라고 보충한다)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반면, 아래의 글은 ‘계급의식이 배제된’ 영화로, 심지어 정지영 감독 작품 중 최악의 영화로 평가한다. 당연히 하나의 영화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같은 지점에 대해 전혀 다르게 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도대체 <산배암>은 어떤 영화인가? 탄실이는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뱀도 잡고 벌레도 잡는 이 구역의 최상위 포식자이자 순박한 산골소녀이다. 그러나 집은 가난하고 산골에는 일자리도 마땅치 않기에 탄실이는 소개를 받아 부잣집으로 들어간다. 마을 사람들은 떠나는 탄실의 뒤에서 ‘식모살이’를 가게 되었다고 수군대고, 일을 소개해 준 사람은 펄쩍 뛰며 ‘건강이 안 좋은 부잣집 사모님을 돌봐주는 일’이라고 정정해준다. 실제로 탄실이가 도착한 부잣집은 이미 나이 든 식모가 일을 봐주고 있으며, 탄실에게는 사모님의 휠체어를 밀어주거나, 목욕을 시켜주는 정도의 일이 주어진다. 오히려 사모님은 자신의 비싼 옷을 탄실에게 주며 앞으로 자신의 것은 모두 탄실의 것이기도 하다는 다정한(?) 말도 해준다. 하지만 이들의 평화로운 나날을 깨뜨리는 인물이 나타나니 이 집의 주인인 사장님이다. 사장님은 수상한 여자로부터 반복적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피하고, 사모님은 자꾸만 사장님과 탄실 둘만 방에 남을 기회를 만들려고 한다. 그렇다. 탄실이는 사실 불구가 된 사모님을 대신하여 씨받이가 되기 위해 이 집에 온 것이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1년 전에 < 씨받이 >(임권택, 1986)가 국내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강수연 이 여우주연상을 탄 이후라 이러한 소재가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아, 또 뻔한 이야기겠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묘미는 이 다음에 있다. 탄실은 결국 아기를 빼앗기고 집에서 쫓겨난다. 이런 상황에서 탄실은 무엇을 원할까? 복수? 우리의 탄실이는 이래 봬도 산골에서 뱀도 잡고 벌레도 잡고 놀던 건강한 소녀이다. 그녀는 복수에서 더 나아가 이 집의 최상위 포식자가 되고자 하고, 그 과정이 영화 속에서 반전에 반전을 더하며 펼쳐진다. ‘산배암’이 된 탄실이는 독으로 상대를 단박에 물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커멓게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천천히 숨통을 조이며 이 집안에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나머지는 영화를 통해 직접 확인하도록 하자. 그래도 명색이 ‘구술로 푸는 한국영화사 미스터리’가 아닌가. 구술에 대한 이야기 한 마디 하지 않은 채 끝을 낼 수는 없다. 그럼 이제 한 집안을 집어삼키려는 ‘산배암’보다 더욱 어둡고 음습하고, 찝찝한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여러분 이 영화 한 번만 봐주세요 정지영과 1988년 정지영 감독은 여러모로 1988년 한 해 동안, ‘뱀’과 인연이 많았다. <산배암>은 8월 27일 코리아극장에서 개봉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미국 직배영화 < 위험한 정사 >(아드리안 린, 1987)가 한창 상영되고 있던 신영극장과 코리아극장에 영화감독 장길수 와 조감독 최진식 이 뱀을 풀며 소란을 피웠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업무방해혐의로 체포했다. (“미영화 직배 반대 시위 두 영화감독 즉심 넘겨”, 《동아일보》, 1988년 9월 27일자 14면 기사) 사건이 그렇게 끝나는 건가 싶었는데, 1년 뒤인 1989년 9월 4일 정지영 감독은 포항에서 <남부군> 촬영 도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혐의는 코리아극장과 신영극장에 뱀을 집어넣도록 사주했다는 것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정지영 감독에게 직접 들어보자. UIP 직배반대시위 (사진: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정: 매일 코리아극장하고 신영극장 양쪽에, 그때 미국영화 직배가 상영될 때니까. 남: <위험한 정사>. 정: 어어. 그래 양쪽에 가서 매일 데모를 하면서 저녁에 들어와서 회의를 하고 헤어지고, 매일을! 그랬어요. (중략) 그런데 그렇게 데모를 할… 그때 88올림픽을 앞두고 어느 구역 안에서는 일체의 시위가 금지돼 있었다구. 근데 그거를 우리는 무시하고 한 거거든? 근데 신문에 안 나. (웃음) 신문에 단신으로 “영화인들이 이렇게 데모하고 있다” 나오고. (중략) 그래 그것이 쌓이다가 사람들이 지쳐가고 그러니까 누가 뱀 얘길 꺼낸 거지. “언제까지 이렇게 싸울 거냐” 정부에서 무슨 반응이라도, ‘자, 보자. 왜 그러냐. 너네들 만나나 보자’ 이런 반응도 없고. 기자들이 와서 취재도 안 하고. “이거 어떡할 거냐.” 그래서 누군가가 “이거 사고 치지 않으면 신문에 안 납니다.” (웃음) 그래서 “사고를 어떻게 치냐” 그랬더니, “사고를 곱게 치는 법이 하나 있다. 지금 <위험한 정사>를 하고 있는 극장에 뱀을 놓으면은… 물론 독 없는 뱀을 놓으면은,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그걸로 크게 신문에 나면 극장은 며칠간 문을 닫고, 그럼 그건 사고다. 기자들이 안 다룰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됐는가를. 그걸 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을 하는데, 그 주장을 한 사람은 옛날에 그런 사건이 있었대요, 충무로에. 어느 극장에 뱀을 넣어서 며칠 뭐 ‘일주일간의 휴관을 했다’ 이런 게 있었대. (136~137쪽) ‘뱀 얘기’를 제안한 사람의 “어느 극장에 뱀을 넣어서 휴관을 했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이 사건도 매우 재미있으니,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살펴보고 가면 좋을 듯하다. 1958년, 충무로 극장 주변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깡패끼리 백주에 집단폭행이 일어나더니 그 보복을 하기 위하여 극장 관람석에다 뱀까지 집어넣어 관객들이 한때 혼란을 일으키고 다시 복수전을 전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중략)… 지난번 29일 낮 11시경 세기극장 주변의 주도권을 빼앗으려고 극장 주변에 모였던 소위 명동파와 종로파 간에 패싸움이 벌어져서 …(중략)… 2일 밤에는 세기극장 관람석에다 뱀 두 마리를 집어넣어 관객들이 일대혼란을 일으킨 일이 있으나 이 뱀은 어느 파에서 집어넣은 것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다. - “새로 개관한 세기극장에 뱀 소동”, 《조선일보》, 1958년 6월 5일자 2면 기사. 이전에 “ 한국영화 야인시대 ”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지만, 1958년에는 임화수 로 대표되는 종로파와 이화룡 으로 대표되는 명동파를 통하지 않고는 극장의 운영이 불가능했다. 이정재라는 든든한 뒷배를 갖고 있던 명동파는 틈만 나면 종로파와 세력 다툼을 벌였는데, 여기에 영화계에 갓 뛰어든 세기상사의 ‘세기극장’이 애꿎게 세력 결투의 장이 된 것이다. 사실 이 시기 명동을 중심으로 한 영화산업의 흐름은 조용히 충무로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건달 세력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명동도, 종로도 아닌 ‘충무로’에 사업가 출신의 영화제작자(수입업자)들이 새로운 터전으로 잡고 모여들면서 시작되었다. 최근 진행하고 있는 신창영화사의 전석진 대표의 구술을 살짝 스포하자면, ‘화성영화사(이화룡)-한흥영화사( 최관두 )-대원영화사( 원선 )-한성영화사( 정진모 )’는 명동을 중심으로 하는 ‘명동파’의 대표들이었다. 이들은 각각의 회사인 듯 보이지만 하나의 쩐주를 통해 굴러가는 한 덩어리였다고 한다. 이를 깨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 무역을 통해 크게 성장한 기업가들이었다. 세기상사가 그랬고, 이우석 이 영화계에 뛰어든 것도 이 시기였고(아직 동아수출공사는 설립 전이다), 불이무역이나 동양영화사와 같은 영화사들이 모두 무역업으로 시작해 충무로에 극장을 세우고 영화계로 들어왔다. 이 이야기는 그 나름으로 크고 재미있는 얘기니까 이쯤에서 접어야겠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다루어볼 것이다. 아무튼 저 ‘뱀 소동’의 이면에는 이러한 충무로 vs 명동의 세력 다툼이 배경에 있었다는 사실만 알아두자. 직배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극장에 ‘뱀을 넣자’라고 제안한 사람은 무려 3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기억해내고 의견을 낸 것인데, 이는 다시 말해 그가 1988년 직배저지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당시 영화계 원로의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 번만 더 스포를 하자면, 역시 올해 진행하고 있는 주제사의 구술자인 정병각 감독은 이 시기 직배저지투쟁과 스크린쿼터사수투쟁을 떠올리며, “원로영화인들의 참여가 매우 활발했다”라고 회고했다. 당시 영화계에서 원로영화인들은 딱히 일거리를 찾지 못해 그 지위가 매우 약해진 상황이었는데, ‘직배’라는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자신들의 역할이 생긴 것에 내심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직배저지투쟁이나 이후 이어진 스크린쿼터사수투쟁과 영화진흥법 투쟁은 겉으로 보기에는 ‘미국영화 직배’라는 외부 세력과의 투쟁인 동시에 기존 충무로 세력과 새로 유입된 충무로 신진 인력들 사이의 세력 투쟁 또한 내재하고 있었다. 세력 다툼엔 역시 ‘뱀’이 등장하기 마련인가보다. 뱀은 사라졌지만… 다시 1988년으로 돌아오자. 저 뱀 제안을 듣고 회의가 진행 중이던 장내에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정지영 감독은 공식적으로는 저 의견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정: 내가 말은 나왔지만 이것은 공식화 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여러분들이 박수를 쳤지만은 이것이 실현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사고를 어떻게 칩니까. 일단 이건 없던 걸로 합니다. 회의록에도 지웁니다.” 이렇게 하고 헤어지고난 다음에 그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사람을 불렀어, 내가. “어떻게 뱀을 넣냐?” (모두 웃음) “뱀을 어떻게 넣냐. 누가 넣냐, 도대체?” “아니 이거 사람 사서 넣으면 되는 거지 우리가 어떻게 넣냐” “그러면 뱀은 어디?” “아이, 청계천 가면 뱀 많다.” (웃음)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해 시켜서 청계천 가서 꽃뱀 사 가지고, 사람 사 가지고 뱀을 넣었지. 그러나 ‘뱀들은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차갑고 거친 시멘트 위에서 독이 올라 몽글몽글 자기들끼리 엉킨 채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라고 한다( 2022년 주제사 1권 <김형종> 2차 구술채록문 , 90~91쪽 참조). 결국 뱀의 출현은 다소간의 소요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대세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조용히 지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사이 싸움의 방향이 바뀌었다. 영화인들은 ‘직배’가 영화산업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외교의 문제이기 때문에 저항을 한들 그 거대한 흐름 자체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직배저지’가 아닌 ‘스크린쿼터사수’와 ‘영화진흥법 제정’ 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런데 앞서도 말한 대로, 이 사건은 1년 후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남부군> 촬영 현장. 이 사진의 뒷면에는 ‘이 장면을 찍고 밤에 서울로 연행 당함’이라는 메모가 적혀있다. (사진: 정지영 기증) 정: 그러다가 어느 날 포항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데 형사들이 갑자기 와 가지고 나를 연행해 갔지. 여기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있는 건데, 내가 한참 촬영을 하는데 형사들이 왔다고. 계곡 위에서 찍고 있는데 형사들이 계곡까지 올라왔어요. 올라와 가지고 “왠일이냐?”고 그랬더니 “감독님, 서울로 올라가셔야 되겠는데요” 그래. “아니 서울은 왜 갑자기 올라가느냐?”고 내가 그랬더니 신문을 딱 주는데 보니까 거기에 ‘정지영 감독 구속’으로 돼 있어. 나는 여기서 지금 촬영을 하고 있는데 《조선일보》에 ‘정지영 감독 구속’ (1989년 9월 3일자 15면 기사-편집자 주) 그래서 “이게 무슨 소리냐?” 그랬더니 “아 글쎄 말입니다” 그래. “근데 왜 나를 연행해 가냐?” 그랬더니… 재밌다고, 이게. “아니 여기 구속으로 돼 있는데 감독님 여기 있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말이 돼? 그렇게 한심한 시대였다는 거지, 말하자면. (웃음) 그러니까 신문에 ‘구속’으로 돼 있으니까 나는 구속돼 있어야 된다는 얘기 아니야? 신문의 오보를 내가 몸으로 실현해 주라는 거 아니야, 그건? (웃음) 남: 아, 그러면 그거는 어디서 정보를 미리 제공받아서 나온 기사가 아니라 오보가 난 거였던 거네요? 정: 오보를 일부러 쓴 거지. 나를 잡아오려고 일부러 오보를 낸 거지 . 물론 본인을 잡기 위해 일부러 오보를 냈다는 것은 정지영의 추측이다. 그러나 오보를 실현시키기 위한 구속이든, 구속을 위해 일부러 정보를 흘린 것이든 둘 다 어이가 없는 이유이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정지영 감독은 1989년 <남부군> 촬영 도중 체포되어 UIP영화 상영 극장에 뱀을 풀어 영업을 방해한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구치소에서 석방된 날, 정지영 감독(2열 좌2)과 정회철 감독(2열 우2)의 모습 (정지영 기증) 어쨌든 시작은 이렇게 과격하고 무모했지만, 이후 투쟁은 대학가에서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새로운 세대의 합류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렇다고 1980년대 후반의 ‘직배저지투쟁’이 완전 실패라고는 볼 수 없다. 정지영은 이 시기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스스로 평가를 내렸다. 정: 우리가 이 운동을 통해서 ‘우리 영화는 우리가 살려야지 누가 보호해 주는 게 아니다’란 생각을 한 거지. 왜냐면은 직배저지투쟁할 때 극장 앞에서 막 데모를 할 때 관객들이 표를 사 가지고 들어가요. 영화인들이 와서 데모 하고 있는데 표 사 가지고 들어가. 누군가가 이제 “관객 여러분, 이거 직배영화입니다. 영화 구경하지 마세요!” 그랬을 때 뭐라고 대답을 들었냐면, “당신들이 영화 잘 만들어 봐. 우리가 한국영화 보지 왜 미국영화 보겠어, 이 사람들아. 영화나 똑바로 만들어!” 그러고 들어갔다구. 그만큼 한국영화가 관객들한테 우습게 보였을 때란 말이지. 그것이 나한테 자극을 줬는데 다른 사람한테 자극을 안 줬겠어? ‘우리한테 책임이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그래서 그런 것들이 모두 자극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 운동이 모든 영화인들에게 (사이) 용기도 만들어 주고. 또 열심히 해야겠다는 어떤 자세를, 사명감 이런 걸 만들어 주지 않았겠는가. 나는 직배운동이나 스크린쿼터투쟁이나 검열 투쟁 이런 것들이 그냥 ‘표현의 자유 문제를 우리가 지적한다’ 이런 차원이 아니고, 그 운동 자체가 영화인들 개개인에게 ‘우리가 우리 영화를 잘 만들어야 사랑을 받을 수 있어’ 이런 어떤 사명감 같은 걸 심어주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해요. 2023년 『1980년대 한국영화: ‘서울의 봄’부터 코리안 뉴웨이브까지』 중 ‘구술로 보는 1980년대 한국영화’ 챕터를 쓸 때도, 이 ‘뱀 소동’은 무조건 넣는다는 일념으로 글을 구성했었다. 개인적으로 이 ‘극장에 나타난 뱀’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상당히 무모하긴 하지만, 한편으로 굉장한 시대적 위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디아나 존스 >가 상영 중인 극장에 뱀을 풀었으면 완전 4D 체험이 가능했을 텐데’ 같은 상상을 해보면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한국 영화시장을 집어삼키기 위해 (질적으로나 물량적으로 한국영화와 비교도 되지 않는) 미국영화들이 물밀듯 밀려들어올 때, 한국의 영화인들은 뱀을 내세워 이를 물리치려 했다. 마치 거대한 폭풍 앞에 부채 한 장을 들고 서 있는 형세였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다시 <산배암>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해볼까 한다. 정지영 감독(우3)과 <산배암> 출연 배우들. (《스크린》 기증) 위 사진 속 집과 마당은 묘하게 < 기생충 >(봉준호, 2019)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산배암>과 <기생충>은 ‘계급’과 ‘계단’이라는 모티프에서 매우 유사함을 갖고 있다. 1988년 도덕적으로 타락한 상류층 가정에 들어간 순진한 산골소녀는 자신이 가진 건강한 생명력까지도 착취하려는 이들에게 ‘산배암’이 되어 저항했다. 그리고 지금 3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계급에 대한 인식은 ‘뱀’에서 ‘기생충’으로 바뀌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언제든 자신이 받는 억압에 대해 ‘뱀’으로 돌변해 상대를 위협할 수 있었던 이들이, 이제는 숙주에게 붙어 사는 기생충이 되었다. 기생충은 숙주가 없이는 살 수 없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숙주에게 붙어 그 체계 안에서 피와 고름 같은 것을 먹으며 살아남든가, 아니면 공멸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생존방식은 제3의 길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오늘날의 한국영화 안에, 그리고 극장 안에 다시 ‘뱀’이 나타날 수 있을까?
우리가 정지영 감독에 대해 가진 이미지는 < 남부군 >(1990) 이후에 고정되어 있다. 빨치산의 이야기 통해 당대의 금기를 넘었던 그는, < 하얀 전쟁 >(1992) <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1994) 등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되새겼고, < 부러진 화살 >(2012) < 남영동 1985 >(2012) < 블랙 머니 >(2019) 그리고 아직 미개봉 상태인 최근작 < 소년들 >까지 공권력에 대해 문제 제기한다. 이른바 ‘사회파 리얼리즘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1980년대 호헌 철폐 운동부터 시작해 스크린쿼터와 영화법 개정과 스크린쿼터 수호 등 한국영화계 이슈의 중심에서 리더 역할을 했던 인물. 그가 바로 ‘감독 정지영’이다. 하지만 그의 1980년대 필모그래피는 사뭇 다르다. 첫 영화 <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 >(1983)는 프랑스의 작가 피에르 브왈로와 토마 나르스자크가 쓴 소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1952)를 각색한 스릴러였다.(이 소설은 프랑스의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1955년에 < 디아볼릭 >으로 영화화했고 할리우드에선 1996년에 이자벨 아자니, 샤론 스톤 주연의 < 디아볼릭 >이 나왔다.) 모델 출신 배우였던 오수미와 윤영실 자매가 등장하는 이 영화는 그 캐스팅 만으로도 압도적인 작품으로, 한 남자를 파멸로 몰아넣는 팜므파탈이 등장하는, 반전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작품이다. 이후 그에게 ‘여성’은 중요한 테마가 되는데,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1949)을 각색한 < 위기의 여자 >(1987)는 결혼한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었고, 한수산 원작의 < 거리의 악사 >(1987)는 여성의 운명을 중심으로 한 아픈 사랑 이야기였다. 그리고 1988년, 정지영 감독은 악녀 캐릭터를 두 가지 방식으로 변주한다. < 여자가 숨는 숲 >이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입은 여성의 성적 일탈과 이중 생활을 다룬 심리적 성향의 에로틱 스릴러라면, 이어지는 < 산배암 >은 김기영의 < 하녀 >(1960)를 연상시키는, 계급과 섹슈얼리티를 결합한 가정 파탄 스릴러다. 우리에겐 < 외계에서 온 우뢰매 6 >(1989)의 ‘데일리’ 캐릭터로 기억되는 김종아의 데뷔작이자 첫 주연작인 이 영화는 정지영 감독 필모그래피의 이색지대로, 지금 접하는 그의 리얼리즘 영화를 생각하면 꽤나 낯설다. 1988년 당시 충무로의 젊은 피였던 정지영, 장길수, 신승수, 이황림, 박철수, 곽지균 감독은 오디션을 열었고 총 5명의 배우를 선발했다. 그 중 한명이었던 김종아는 <산배암>의 주인공이 되었고, 함께 선발되었던 김홍제는 이 영화에서 박 기사 역을 맡았다. ‘원초적 관능’의 세계를 줄곧 추구해온 김지연 작가의 장편소설 『산배암』(1979)을 각색한 이 영화는 전형적 설정으로 시작한다. 지리산에서 뱀을 잡으며 살아가는 시골 소녀 탄실(김종아). 그는 가난 때문에 도시로 와 우 사장(남궁원) 집 하녀가 된다. 임무는 우 사장의 아내(김영애)를 모시는 것. 하반신 불구로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는 그는 탄실을 마치 딸처럼 여긴다. 하지만 그들에겐 빅 픽처가 있었으니…. 탄실을 씨받이로 사용하는 것. 불임인 그는 탄실을 우 사장에게 접근시키고 드디어 ‘일’은 벌어진다. < 씨받이 >(임권택, 1987)의 현대 버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임권택 감독의 영화가 유교 사회에서 대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희생당하는 여성을 보여준다면, <산배암>에서 탄실이는 ‘아이를 소유하고 싶다’는 부르주아 여성의 모성적 욕망을 위한 도구가 된다. 일단 우 사장 부부의 음모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탄실은 아이를 낳고, 우 사장 부부는 그 아이를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위장하며, 탄실은 집에서 쫓겨나 어느 아파트에 홀로 격리된다. <씨받이>에서 아이를 낳은 후 옥녀(강수연)가 처했던 상황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하지만 탄실은 옥녀처럼 자살하지 않는다. 아파트 생활을 끝내고 시골로 돌아갔던 탄실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선언한다. “오늘부터 저는 이 집의 떳떳한 식구인 거라예.” 그러면서 아이를 직접 키우겠다며 젖을 물린다. 현대판 씨받이인 탄실. 같은 침실 안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관계. 여기서 끝났다면, <산배암>은 탄실의 소심한 복수극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3중 반전으로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를 마무리했던 정지영 감독은 <산배암>의 결말에서도 이야기를 뒤틀며 탄실을 산배암처럼 독기를 지닌 악녀로 만든다. 우 사장의 아내는 박 기사(김홍제)에게 탄실을 강간하도록 지시하지만 탄실은 또 다시 돌아와 말한다. “내가 박 기사에게 쉽게 당할 줄 알았능교?” 이후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아기는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다. 다시 여기서 끝났다면, 다소 황당한 결말의 드라마 정도겠지만, <산배암>은 갑자기 1년 후로 이동해 다소 충격적인 광경을 보여준다. 사고로 불구가 된 우 사장과, 휠체어를 밀고 있는 탄실. 그는 “아기를 다시 낳으면 된다”고 하지만, 우 사장은 더 이상 섹스를 할 수 없다. 여기서 탄실은, 이젠 안주인이 되어 집안을 장악한 그는, 한때 자신을 범하려 했던 박 기사와 몸을 섞는다. 사극 식으로 말하면, 씨받이였던 여자가 씨내리를 통해 양반 집안의 혈통을 잇는 셈이다. 백일 잔치 장면은 부르주아 가족의 위선과 균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신이다. 요약하면, <산배암>은 순수했던 한 여성이 도시라는 공간으로 오면서 욕망에 휘둘리는 이야기다. 그런데 우린 여기서 질문해야 한다. 탄실은 순수한 상태가 더럽혀지며 타락한 걸까, 아니면 자신에게 잠재되었던 악녀적 본성을 발견한 걸까? 마치 성선설과 성악설의 대립과도 같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영화의 마지막에 굵직한 자막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장일지도 모르겠다. “카인의 무리여, 네 형벌은 언제나 끝날 것인가.”
어쩔 수 없이 고다르를 베끼면서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우리들 사이에 '한국고전영화'란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걸까? 『한+ 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문화예술에서 논하는 고전이란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한 가치를 지닌 사상집이나 문예 작품"을 일컫는단다. "모범"이란 표현에 딴지를 걸고 싶어지긴 하나, '세계고전문학'이나 '클래식 음악' 같은 말이 통용되는 바를 떠올려보면 그래도 말뜻에 납득이 가긴 한다. 그런데 '한국고전영화'라? 나로선 이 말을 기어이 꺼내려다가도 결국엔 어색해서 주춤하게 된다. 과연 한국영화에 있어 고전이란 무얼 지칭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무엇이 고전일 수 있을까. 당신의 생각이 정말 궁금한데, 왜냐하면 나는 이 물음 모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쟁점, 한국영화에 고전기가 있다면 이는 언제부터 언제인가? 달리 말해 한국영화의 뼈대가 세워진 시기는 언제인가? 한반도에 영화 기술이 들어오고 식민지 조선인들이 그것을 활용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일까, 아니면 이 시기를 포함해 한반도 영화계의 짧은 해빙기였던 광복 전후일까, 그도 아니면 한국전쟁부터 5.16 쿠데타 직전까지인 이승만 정부 전후일까, 이도 아니면... 확언하기 어렵다. 사실 고전영화라는 말 자체가 실은 '옛날 영화'를 좀 더 고상하게 부르려는 세속적 용어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나, 미국이나 일본의 영화사 연구에서 고전기라는 범주가 이런 용법을 넘어 이론 안에서도 ('파벌'에 따라 구분은 상이할지언정) 어느 정도 설정되어있다는 걸 떠올리면, 한국영화의 경우는 역시나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는 식민지나 군사 정권의 경험을 가진 비 서구 국가들의 공통적인 현상이 아닐까? 하지만 (발리우드 스타일이 일찍이 굳게 자리 잡은) 인도나 (빈곤한 환경으로 인한 문화적 혼종성을 오히려 '내수용'으로 스타일화한) 브라질의 영화사를 떠올리니 금방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요컨대 한국영화사에 있어 "일제강점기"나 "유신 체제 시기" 같은 사회적 구분은 가능하더라도 자체적인 '고전기'에의 설정 및 구분은 임의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어째서? 아마 21세기 전까지 한국영화가 스스로 독자적인 문화로서 성립된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오해를 피하고자 서둘러 덧붙이건대, 나는 윗세대 영화인들의 문화적 투쟁을 폄하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들 다수의 오만한 행보와 의심스러운 작업에 대해선 깊은 불만이 있어도, 그들의 투쟁의 결과를 향유하며 살아가는 입장인 만큼 투쟁 자체에 대해선 오히려 깊은 존경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런 투쟁이 (사실 현재진행형으로) 오랫동안 이어진 것은 역시 한국영화가 독자적인 문화는 아니란 의식을 모두가 갖고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우리는 1998년 필름 발굴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국가가 일제강점기 때의 영화를 단 한 편도 소유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고, 1970년 이후 외국영화 수입쿼터제를 충족하기 위해 수많은 한국영화가 제작되기'만' 했음을 알고 있으며, 제작이고 비평이고 무관하게 1980년대의 '신세대'들이 총체적인 고립무원의 환경에서 활동을 겨우겨우 이어갔음을 알고 있고, 같은 1980년에 공개되었음에도 (당시 국산영화 최대 흥행작이었던) 〈 미워도 다시 한번 '80 〉 대신 〈 전원일기 〉를 '옛날'의 지표로 흔히 떠올리고 있다. 역사의 연속이나 단절을 논하기도 전에 이미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지 못해 독자적인 문화로 선 적이 없고, 그러니 (우스꽝스럽게도, 선후배의 엄격한 계열은 있어도) 스타일과 방법론에 있어 표준이나 관습으로 삼을 역사적 대상이 내부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에 고전기는 역시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두 번째 쟁점, 한국영화에 있어 고전으로 기능하는 영화가 얼마나 있나? 아마도 이 물음에 당신은 즉각 김기영의 이름을 거론할 것이다. 그래, 확실히 창작자든 관객이든 한국영화와 깊이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 하녀 〉를 비롯한 김기영의 영화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아니, 그 이전에 이 조건 자체를 뒤집어봐야 하지 않을까. 고전이란 이미 그 자체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후적인 (재)평가 속에서 (위태롭게) 성립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가령 에드거 앨런 포우가 오늘날 같은 문학의 정전에 등재되도록 선제적으로 상징투쟁을 벌인 건 당대의 미국인들이 아니라 샤를 보를레르를 위시한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이었으며, 이 상징투쟁의 영향은 포우가 죽고 한 세기 이후에야 미국에 도달했다. 또 오랫동안 잊혀졌던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바흐 사후 세간에 재발견된 것은 물론 젊은 펠릭스 멘델스존의 강력한 열정 때문이기도 했으나, 관습을 타파한 새로운 예술적 장을 마련하고자 한 (멘델스존을 포함한) 신세대 음악가들의 전투적인 의식과, 국가와 종교에 대한 세간의 믿음을 굳건히 하고자 한 지식인들의 계산적인 의식이 예기치 않게 연합하여 이끌어낸 결과였다고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김기영이 1990년대에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당대의 영화광들에게 공통적인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식? '우리에게도 컬트영화가 필요하다'라는 '국제적'인 의식. 많은 연구자와 비평가들이 합의했듯, 오늘까지 이어지는 김기영의 위상은 여기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에 더해, 영화사 연구자 금동현은 「협잡꾼 당신-『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1)」에서 김기영의 1971년 이후 영화들이 대부분 (해외 영화제 실적을 중요시한 문화융성정책에 따라) 시체스 국제영화제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음을 지적하며, "해외를 경유하여" "한국 혹은 한국영화라는 구조에 순응/활용하는 김기영의 행위성"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발을 내딛으면 우리는 "여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조건들에 의해 뒤틀린 (...) 한국영화의 부정교합 자체가 도착적인 미학으로 승화된 것"으로서, 곧 가장 한국영화적인 한국영화로서 김기영의 영화들을 재정의하는 영화평론가 유운성의 「이식과 기생 : 봉준호의 < 기생충 >을 계기로 다시 읽는 임화의 영화론」과 마주치게 된다. 그렇다면 김기영의 '귀환'은 역사의 관점에선 필연적인 결과였을까? 확신할 수야 없지만, 90년대 이후의 김기영 수용에 또 다른 (무)의식이 있었으리란 '잠재적인' 가설은 분명 흥미진진하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한국영화가 가진 것은 집단적인 스타일과 방법론이 자의적으로 형성된 고전기가 아니라, 각각의 스타일과 방법론 사이에 일말의 계열을 만든 환경인 게다. 한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김기영 같은 취급을 받은 이는 결국엔 김기영뿐이었다. 물론 이만희와 임권택 역시 한국영화사의 만신전에 올랐다. 하지만 이만희는 2005년 〈 휴일 〉의 발견과 함께 뒤늦게 관객들을 (다시) 자극한 경우였고, 임권택은 이미 영화계 내외에서 한국영화의 아버지상으로 군림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그를 제작자에게나 관객에게나 (부정적인 의미에서) 예외로 취급받도록 만들었다. (내친김에 부연하자면, 나는 한국영화의 가장 이질적인 작가는 다름 아닌 임권택이라고 보는 쪽이다) 요컨대 이들에겐 김기영 만큼의 폭넓은 애정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2000년대 들어 대기업 자본의 (재)진입으로 인해 통째로 재편되기 시작한 한국영화산업은 충무로에 기반을 둔 21세기 이전의 영화 혹은 영화인들 대부분을 망각과 은퇴로 몰아넣었고, 한국영화사에는 또 한 번의 극심한 단절이 일어났다. 예컨대 이순재는 알아도 김지미를 아는 한국의 2~30대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한국영화에는 고전으로 기능하는 영화가 터무니없이 적은 것이다. (한국의 문학과 대중음악에서도 비슷한 단절이 일어났었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쟁점, 그렇다면 추후에 21세기 이전의 한국영화들이 고전으로 성립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터무니없는 도박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곧장 대답을 내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입을 떼보자. 지금 같은 단절의 상황이 연속되는 한은 역시나 어렵지 않을까? 이는 앞서 언급한 '대중적' 단절만 지시하지는 않는다. 옛날 한국영화를 새로운 고전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엔 (결코 많지는 않은) 국내 시네필들의 몫일 터이다. 한데 그들이 영화 제작 환경에 편입되는 것도, 옛날 한국영화를 끈질기게 보러 다니는 것도, 아예 이런저런 극장을 다니며 영화 관람을 지속하는 것도 요원한 게 요즈음의 상황이지 않던가? 한국영화를 이루는 행위자들은 갈수록 서로 간의 마주침과 뒤섞임 없이 분열되기만 하고 있다. 이 행위자들에게 책임을 온전히 돌리려는 것도, 행위자들이 서로 반드시 마주치고 뒤섞여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상황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대다수의 국내 시네필들은 (어느 시대의 작품이건 간에) 한국영화에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다. (2010년대 전후로 한국영화사 연구의 헤게모니가 국문학과로 옮겨간 것은 그 결과이자 원인일 테다) 후기 자본주의 하에서 '국제적인 것'이 대도시와 대도시 간의 연결로서 블록으로만 환원되는 것과 유사하게, 국내 시네필들은 한국영화와 거의 단절된 채 '국제적인 것'에 스스로의 위치를 잡는다. 그 원인에 대한 규명은 본고에서 책임지고 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므로 넘어가야겠지만, 하여튼 옛날 한국영화의 낮은 접근성은 (불균질한 더빙을 비롯한) 형식적 층위의 어색함에서만 기인하지는 않는 것이다. 부끄럽게 고백하자면 비평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 역시도 이런 상황의 바깥에 있지는 않아서, 불과 몇 주 전인 5월 7일에 강수연 배우 1주기 추모전의 일환으로 상영된 〈 경마장 가는 길 〉을 (거의 8년 만에 다시) 보고 나서야 나는 앞선 쟁점들을 포함한 '한국(고전)영화'를 문제다운 문제로 여기게 되었다. '한국'도 '영화'도 '한국영화'도 온전히 믿지 않는 장선우의 태도가 이 영화를 통해 순식간에 전염됐다고나 할까? 그동안 옛날 한국영화들을 찾아보고 그에 관한 연구들을 찾아보았어도, 또 동시대의 믿을 만한 동료들이 한국영화와 씨름한 결과물들에 지지를 보냈어도 나는 결국 '한국(고전)영화'를 개입해야 할 문제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혹은 다소 의무적으로 수행한 제스쳐들을 갖고 스스로가 이미 개입하고 있다 착각했던 건 아닐까. 말하자면 이 글은 그런 늦은 깨달음에 따라 서둘러 쓴 반성문이라 해도 좋다. 이렇게, '한국고전영화'는 몹시 잠정적인 개념으로 남는다. 하면 우리는 이런 잠정성에 대해 어떤 리액션을 취해야 하는가? 리액션으로서 큐레이션에 대해선 영화연구자 박진희가 이미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 – 나의 경우」를 통해 솔직하고 재밌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럼 리액션으로서 비평이나 연구는? 실망스럽게도 많은 이들은 두 개의 우회로만을 길로 인식하고 있던 것 같다. 이미 고전으로 꼽힌 작품들만 텍스트로 삼거나, 아니면 사회적 압력에 주목해 한국영화사를 연민해야 할 상처투성이로만 기술하거나. 나는 그 대신에, (21세기 이전의 한국영화들이 고전으로 성립될 리 만무한) 당장은 이 잠정성을 고스란히 전면화하는 길을 택하고 싶다. 허황된 관념이 된 '한국영화'가 환희에 이른 지 얼마 안 돼 금방 처참히 붕괴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 붕괴가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 있어 (실패와 망각과 단절과 분열로 나타났던) 오랜 기반이었음을 적극적으로 증언해야 하지 않을까? 다만 붕괴가 새로운 사유를 가능케 하리라는 식의 역전적 논리가 아닌, 붕괴 속에서 하여튼 '한국(고전)영화'라는 것이 잠정적으로나마 존재해왔다는 식의 '경험론적' 논리를 갖고서 말이다. 지난날 전복적이라 여겨졌던 형식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게 대안 우파들인 요즈음에 역전적 논리는 부정적인 조건의 부정성을 간과할 위험이 크다. 그러니 (헤이든 화이트를 따라)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기반이 주어진다는 것을 명심한 채 말을 이어가자. 가령, (한국의 모든 문화예술이 그렇지만) 이념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 있어 어떤 기형적인 형체로써 ‘반복’되어왔는가? 금동현과 유운성이 간접적으로 일러주었듯 한국영화에 있어 붕괴와 반복은 한 몸이다. 달리 말해 붕괴의 반복이야말로 한국영화의 조건이요 전통이다. 그렇기에 나는 새로운 것 대신 오래된 것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리와 단절된, 하나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오래된 것을. ‘한국영화’와의 대면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