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남자와 뒹구는 아줌마들
- 감독
- 강유정
- 제작년도
- 2024
- 출연
- 세리, 애라
어떤 영화들은 코드가 된다. 1960년대 < 맨발의 청춘 >이 그랬다면 1980년대 < 고래사냥 >도 그랬다. 20대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젊음은 그 시대의 상징을 경유하는 일종의 코드어가 된다. 어떤 20대가 어떤 사랑을 나누며 어떤 고민을 하는 지가 당대의 사사로운 삶의 표정부터 시대적 문제까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 건축학개론 >은 1990년대를 통해 2000년대를 해석하는 독특한 코드라고 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서사적으로 교직함으로써 향수와 복고, 아날로그적 정서, 추억과 현실과 같은 여러 용어들을 한 데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 건축학개론 >은 주인공이 20대를 누렸던 1990년대 대학 캠퍼스와 12년이 지나 35살이 된 인물들의 현재를 교차적으로 제시한다. 대학생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으로 묶여 있던 승민과 서연은 서른 다섯 살이 되어 건축 디자이너와 이혼녀로 나뉘게 된다. 출발점은 같았지만 12년이 지나고 난 후 두 사람의 삶은 어쩐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한 마음으로 손을 맞잡고 철로를 걸었던 그 시간은 다시 허락되지 않는다. 시간은 흘러갈 뿐 되돌이킬 수 없다. 추억은 가역성이지만 시간은 불가역성이니 말이다. 회귀 불가능성이라는 낭만적 노스탤지어는 1990년대를 쓰다듬는 세세한 미장센들에 의해 1990년대를 지나 온 세대들의 감수성을 관통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풍요로운 소비 문화 속에 급속히 감염되었던 상대적 격차의 징표들이기도 하다. 게스티셔츠, 삐삐, 압구정과 같은 기호들은 80년대 학번 선배들이 읽었던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공백을 빠르게 메꿨다. 세련됨과 낭비, 취향과 소비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의 지점을 찾아야했던 세대, 90년대 학번들에게 있어 20대는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대한 고민의 시작이기도 했다. 9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세대들, 그들의 기억 핵심에 바로 이 영화 < 건축학개론 >이 있다. < 건축학개론 >은 첫사랑이라는 보편적 소재에 대한 화법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투르게네프가 첫사랑을 환멸과 동의어에 두고 토마스 만이 첫사랑을 타협의 요구로 보았다면 <건축학개론>의 첫사랑은 순진의 오류로 기록된다. 순진의 오류란 이런 것이다. 사랑한다 한 마디면 될 것을 에둘러 상처를 주고, 좋아한다 말하면 그만인 것을 상대방의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다 결국 상처만 입고 돌아선 사랑 말이다. 순진의 오류는 30대 중반이 된 두 인물의 대조적 태도를 통해 아쉬움으로 변주된다. 뒤늦게 확인한 오해는 돌이키기엔 너무 먼 과거의 일이다. < 건축학개론 >이 말하는 과거는 현재에 대한 영향력의 부재라고 말할 수 있다. 서연과의 첫사랑, 그녀가 선물로 주었던 씨디 플레이어가 소중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흔적들이 현재의 삶을 바꾸진 못한다. 지금껏 많은 첫사랑 영화들이 그 징표가 화석화된 감정을 되살리는 열쇠였던 것과 달리 <건축학개론>에서 추억은 추억이라는 이름 안에 봉인된다. 첫사랑을 다루는 < 건축학개론 >의 태도는 사실 무척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영화 속 미쟝센을 통해서도 변주되는데, <건축학개론>의 미쟝센의 역할은 단순한 배경이나 이미지를 너머서 일종의 은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가령, 서연과 승민이 애틋한 첫 사랑을 키워가던 공간은 바로 빈 집이다. 이는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지만 사람의 온기로 채울 수 없었던 추억임을 보여준다. 서연의 제주도 집이 개축되지 못하고 증축되는 것도 그렇다. 35살 쯤 되면 지금껏 살아온 집, 그러니까 인생을 통째로 뒤바꾸기란 쉽지 않다. 서른 다섯 살에겐 이제 더 이상 개축이 허락되지 않는다. 개축 불가, 증축 가능이라는 메시지는 서연의 집을 통해 아프지만 아름답게 전달된다. 영화는 30대 중반이 된 두 남녀와 스무 살 무렵의 두 남녀를 각기 다른 배우를 통해 보여준다. 어떤 점에서 이십 대와 삼십 대는 다른 배우가 필요할 만큼 커다란 시간의 격차일 지도 모른다. 외모야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성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니 말이다. < 건축학개론 >의 더블 캐스팅은 세월의 힘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되어 준다. 누구에게나 이십 대는 있지만 아무도 이십 대에 머물 수는 없다. 젊음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향유하지도 못한 채 손바닥에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놓쳤다는 것, 대개의 첫사랑 서사가 기대고 있는 아쉬움이다. 우리가 첫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떠올리는 것은 바로 덧없이 흘려보낸 젊음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첫사랑은 그렇게 기억 속에서 더욱 굳건해진다. 집을 지어주고 현재의 아내의 곁으로 가는 남자의 마음은 어쩐지 첫사랑이라는 부채를 빈집처럼 안고 사는 남성 심리 드라마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첫사랑에 대한 시점의 전환, 바로 < 건축학개론 >이다
박찬욱 은 한국형 작가주의 감독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웰 메이드와 작가주의는 그렇게 사이좋은 단어라고 말하기 어렵다. 웰 메이드라는 수식어 속에는 상업적으로 잘 만들어진 장르 영화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작가주의라는 말 속에는 대중과 타협하지 않는 고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개성이 담겨 있으면서도 장르적 관습을 유지하는 것, 이 행복한 조우가 박찬욱 영화에서 실현되곤 했다. < 올드보이 >는 이 가능성이 알맞은 농도로 희석된 최적의 작품이었다. 알려져 있다 시피 < 올드보이 >는 일본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원작에서 가져 온 것은 15년간의 감금, 사설 감옥이라는 설정 정도에 불과하다. 오히려 <올드보이>가 깊이 관련 돼 있는 작품은 소포클레스의 고전 비극 <오이디푸스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범인임을 알기 위해 복잡한 퀴즈를 풀고 험난한 미로를 헤쳐 나와야 했던 자, 그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이 오대수의 삶에 거울처럼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다. <오이디푸스>와의 공통점은 여러 지점에서 발견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공통점은 두 작품이 다 근친상간이라는 소재를 중요한 모티프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작품이 각각 최고의 플롯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플롯을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따른 결과로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 것, 이라고 말이다.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성장한 고장을 떠나 고향으로 되돌아 오듯 오대수 역시 스스로 질문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정은 점점 자기 자신에게로 좁혀 든다. 고대 그리스에서 오이디푸스의 몰락은 흠결없는 고귀한 영혼의 파멸을 의미했다. 오이디푸스처럼 지혜롭고 도덕적 인물도 신의 계획 앞에서는 어쩔 도리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하물며, 우리처럼 평범한 시민이야! 오이디푸스의 파멸은 곧 절대적 신을 생각게 했다. 반면, 오대수는 무의식 중 저지른 말 실수로 무시무시한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알고 저지른 죄와 모르고 저지른 실수 중 어떤 것이 더 무거운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까지 가능해 진다. 그런데 정말 전복적인 부분은 영화의 결말 부분이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박찬욱 은 오대수의 입을 빌어 관객에게 묻는다. “짐승보다 못한 인간은 살 만한 자격이 없는 건가요?”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에게 시민의 자격을 박탈하고 추방자의 숲으로 내몰았다면 박찬욱 은 현대의 오이디푸스, 오대수에게 항소의 권한을 준다. 삶과 인간성, 도덕성에 대한 질문을 과감히 관객에게 넘긴 것이다. 오대수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의 대가로 소문을 퍼뜨렸던 그 “혀”를 거세하고 기억을 지운다. 기억을 지우고 말을 않는다면,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는 “말”의 세계로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볍게 박찬욱은 법이나 질서라는 세계를 넘어간다. 이 주제적 파격은 박찬욱 이 조형한 미술과 음악, 편집의 리듬을 거쳐 막강한 에너지로 증폭된다. 미도의 의상, 벽지, 우산 등의 소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방사형 패턴은 스릴러적 긴장을 강화했다. 한편 극도로 인공성이 강조된 아파트나 감금실과 같은 공간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런 앙상블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미도의 테마와 같은 음악에서도 발견된다. 음악을 통해 오대수와 미도, 우진과 수아 간의 운명적 조우는 비극적 데칼코마니로 증폭되었다. < 올드 보이 >의 강렬함은 이야기와 미쟝센 그리고 그것을 유연하게 연결하는 편집의 황금 비율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박찬욱 의 작가적 개성과 스릴러의 장르적 관습 그리고 이종 결합적 장르 교배가 가져 온 에너지가 <올드 보이> 전반에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독특한 결과물이 해외 영화제 뿐만 아니라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주목과 사랑받았다는 사실이다. 한국 영화에 있어 가장 흥미로웠던 순간을 바로 이 영화 <올드 보이>가 함께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