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K]11회 대구단편영화제_강진아 감독
- 제작년도
- 2010
2017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순간은 위험하다. 순진하다고 여겨지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경제적인 위협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비난까지도 분연히 개인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전고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 < 소공녀 >는 그 위험한 ‘지금 여기 개인’의 편을 드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주인공 미소를 바라보는 시선은 ‘우정’에 가깝다. 묵묵히 스스로의 길을 걷는 친구의 등을 토닥거리듯이 연출자는 스스로가 만든 캐릭터의 옆과 뒤를 든든히 떠받치고 간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아동 소설 <소공녀>는 부유했던 한 소녀의 극적인 삶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주인공 사라는 부유한 집안의 ‘소공녀’에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갑작스레 하녀로 전락하지만 결말에는 다시 부자로 돌아간다. 그러나 전고운 의 영화 < 소공녀 >의 주인공 미소는 부자였던 적이 없다. 일당 사만 오천 원에 가사도우미 일을 하는 미소의 유일한 행복은 하루의 일을 마무리한 후 마시는 위스키 한 잔과 손가락에 반지처럼 끼워진 담배뿐이다. 난방이 전혀 되지 않는 작은 방에서의 연애는 시리도록 슬프고 갑자기 오른 담배 값은 미소의 삶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된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집을 포기한 그녀는 오래 전 친구들의 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집을 짐처럼 메고 떠돌이로 살지만 그녀는 여전히 일을 하고 위스키를 마시고 담배를 태운다. 영화 < 소공녀 >의 영어 제목은 <Microhabitat>다. ‘미생물, 곤충 등의 서식에 적합한 곳’이라는 뜻이다. 눈앞의 현실을 긍정적인 환상으로 극복한 소설 <소공녀>의 사라와는 달리 영화 <소공녀>의 미소는 거대한 사회 속 개인으로서 하루를 버티어 기어코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성인 동화의 외피를 입고 있는 <소공녀>가 놀라운 유머감각, 따뜻하게 인물을 감싸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저릿한 추위처럼 보는 이를 놀래게 하는 건 지금 이 사회의 개인들의 존재를 명징하게 비추고 있어서다. 무언가를 포기해야 무언가를 가질 수 있다는 첨언들과 왜 궤도에 오르지 않고 비틀거리냐며 부유하는 충고들은 각자의 삶을 택해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무례한 화살이 된다. 기원을 알 수 없는 이 사회적 합의에서 조금이라도 비켜선 이들이 마치 과녁처럼 누군가의 대상이 되는 사회, <소공녀>의 인물들은 그 과녁에 함께 서서 서로를 보듬는다. 집을 찾아 떠도는 사람, 미래를 위해 떠나는 사람, 과거를 품고 잠드는 사람, 빚더미에 앉아 눈물 흘리는 사람 등 주변 어디에나 있는 소시민들의 퍼즐을 맞춰 나가듯 영화 <소공녀>는 세심하게 삶의 조각들을 모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전사를 나열하지 않으면서도 캐릭터의 지난 순간들을 쌓아 올리는 스토리텔링의 마법을 보여준다. < 1999, 면회 > < 족구왕 > < 범죄의 여왕 >을 제작한 광화문시네마의 신작 < 소공녀 >는 무구한 가치와 무해한 꿈의 힘을 믿는 제작사의 인장이 또렷한 영화다. 또한 < 마담 뺑덕 > < 하이힐 > 등의 작품을 통해 개성과 연기력을 선보였던 배우 이솜 의 근사한 대표작인 동시에 안재홍 , 최덕문 , 김재화 , 강진아 , 이성욱 , 김국희 등 모든 배우들의 이름을 찾게 되는 훌륭한 앙상블의 영화이기도 하다. 마치 술 좋아하고 사람 잘 챙기던 친구가 우편으로 보내온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영화인 < 소공녀 >는 시리도록 추운 겨울이 올 때마다 생각날 영화다. 담배 한 개비에, 술 한 잔에, 반가운 이의 안부에 눈 녹듯 얼었던 마음이 녹는 것처럼 앞으로의 겨울마다 이 영화의 순간들이 그런 위로가 되어줄 것 같다.
한 여고생이 고시원 앞에서 초조하게 무언가를 기다린다. 그리고 또래 남자 아이가 손짓을 하자 그 허름한 고시원 안으로 들어간다.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병희는 여자 친구인 목련을 자신이 사는 낡은 고시원으로 부른다. 이빨이 아프다는 핑계로 학교를 빠져나와 병희를 만나러 온 목련은 선뜻 병희의 침대에 앉는다. 그리고 둘은 사랑을 속삭인다. 유난히 점이 많은 자신의 얼굴에 대한 투정을 부리는 목련의 말에 병희는 그 누구보다 예쁘다며 그 점에다 키스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생애 첫 섹스를 경험한다. 서투르지만, 조심스럽게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첫 섹스가 끝이 나고, 병희는 간식거리를 사기위해 고시원을 나선다. 그런데 병희가 없는 사이, 옆방에 묵고 있던 한 낯선 남자가 병희의 방으로 들어온다. 이 영화는 전고은 감독의 졸업영화다. 나는 우연한 계기에 이 영화를 볼 수 있었고, 아직 이 영화의 여운이 남아있다. 보통 졸업영화는 소위 ‘센’ 소재를 이용해 자신을 좀 더 알리려는 욕심이 많이 들어가서인지, 정작 진정성이 느껴지는 작품은 별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전고은 감독의 ‘ 내게 사랑은 너무 써 ’는 진정성과 함께 감독의 연출력까지 보이는 훌륭한 작품이었다. 고교생의 첫 섹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그 소재를 과잉시켜 선정적으로 소비하거나, 무책임한 결론으로 도망가지 않는다. 이 영화는 목련과 병희의 첫 섹스를 소재로 사용했지만, 목련의 쓰디쓴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첫 경험을 떠올리며, 그리고 병희의 행동에 분노하며 같은 남자로서의 수치감을 느끼기도 했다. 병희는 목련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아프면 안 할게.” 정확하지는 않지만, 병희는 이런 식으로 목련을 지켜줄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옆방의 남자가 목련을 겁탈했을 때는 지켜주지 못한다. 얼굴의 많은 점까지도 사랑한다 말했던 병희는 과연 목련을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남자는 약한 여자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섹스에 있어 우위에 있다는 의식이건 무의식이건 나는 이것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본인도 믿고 여성에게 믿게끔 만들어놓고 책임지지 않는 남성은 역겹기 그지없다. 병희는 그렇게 슬쩍 사라지고 만다. 모든 것을 감당해내야 하는 것은 여고생 목련이다. 첫 경험과 동시에 끔찍한 경험을 한 목련은 그저 고삼 수험생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목련은 오지도 않는 병희의 전화를 기다리며, 문제지를 푼다. 감독은 절제된 감정과 과장되지 않는 샷으로 보여주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 감정에 개입하지 않고, 관객이 오롯이 그 감정을 느끼도록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이 영화가 끝이 났을 때 영화에 대한 감정이 쉽게 씻기지 않는다. 먹먹함과 먼지 같은 희망 그리고 분노 등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감정이 들게 하는 영화다. 이렇게 까지 훌륭한 영화로 완성 되는 것에는 연출자의 힘도 있었지만, 목련역할을 맡은 강진아의 연기력이 너무나 훌륭했다. 달콤한 사랑과 쓰디쓴 경험, 그리고 입시를 앞두고 있는 고삼 수험생 소녀 그대로를 보여준다. 눈빛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캐릭터와 동화되어있다. 연출자는 배우들과의 호흡을 위해 세달 동안 연극연기 연습을 하듯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런 노력의 결실이 너무나 잘 보이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본다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첫 경험이 떠오를 것이고, 본 이후에는 지금의 나를 떠올려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