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야
- 감독
- 린 아이훠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장백지, 진혁신, 사정봉
1 인간은 영화관에 가는 동물이다. -조르조 아감벤 2 정상적인 관객은 자신이 욕망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사람이며, 자신이 이미 인생에서 싫어하는 것을 영화관으로 보러 가지 않은 사람이다. -세르쥬 다네 3 일요일의 충무로는 처음이었다. 직접 차를 운전해서 간 것도 처음… 한때 매일같이 충무로에 가던 시절이 있었다. 충정로에 있던 회사에서 퇴근해 7011번 버스를 타고 매일경제본사 앞에서 내려 영한빌딩까지 걸어가 여자친구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던 20대 후반의 몇 년, 그리고 은평구에 있던 집에서 3호선을 타고 6번 출구로 나와 매일경제본사 맞은편에 있던 ‘동화삘딍’ 4층 사무실에서 아저씨들과 머리를 맞대고 한숨과 담배연기를 번갈아 내뱉으며 시나리오를 쓰던 30대 후반의 일 년.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그때 충무로는 내게 해질 무렵의 골목, 커피와 생맥주, 닭꼬치, 돼지껍데기, 철판스테이크, 복지리, 통북어, 하루종일 가시지 않는 지독한 담배 냄새, 낡은 당구장, 서지 않는 택시 같은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영화였고(여자친구가 참여한), 그리고 영화였다(내가 연루된). 그리고 오늘, 40대가 되어 처음 가는 충무로 역시 영화가 될 예정이었다. 나를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람들의 영화. 영화들. 얼마나 다행인가? 내 영화가 아니라는 게… 4 영화란 무엇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장 루이 뢰트라와 수잔 리앙드라 기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코 앞에서 볼 수 있는 진정한 악마의 소굴, 왕관을 다투는 시장, 배움의 장소—말하자면 감정교육, 많은 사람들의 오락, 일부 사람들의 직업, 어떤 사람들의 열정, 여기저기서 채취해 온 1-2시간의 소재, 별 아래서 보내는 온종일, 대낮 같은 밤, 어두운 밤으로 빨려드는 불빛, 친구와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토론, 계속되는 이야기들, 역사의 단편, 움직임-지속의 덩어리, ‘현실’과의 아주 특별한 관계 설정(현실을 회피하시오, 그러면 현실이 당신을 따라가고, 현실을 따라가시오, 그러면 현실은 당신에게서 도망간다!), 위험할 정도로 서로가 닮아 있는 영화 속의 얼굴과 신체들, 진부하거나 기상천외한 대상들과 풍경들, 마치 우리가 항상 살았던 듯한 느낌을 갖는 상상 속의 저택과 또 다른 화려한 저택들, 일시적인 경험, 은밀하고 격렬한 열정이나 몸짓들, 나를 끌어들이고 빨려 들게 하는 방식, 또는 단숨에 혹은 한순간에 불확실하거나 형성중인 사고나 상상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방식, 사회, 사람들이 말한 것, 타인과 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꿋꿋한 시선… 5 나는 이 목록에 두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브루스 윌리스와 니콜라스 케이지. 내게 영화는 브루스 윌리스다. 동시에 내게 영화는 니콜라스 케이지기도 하다.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다. 블록버스터와 컬트무비와 허섭쓰레기를 오가는 그들의 긴-긴 필모그래피에서 함께 출연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그나마 브루스 윌리스가 출연한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 플래닛 테러 >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 데쓰 프루프 >를 ‘동시상영’으로 묶은 <그라인드 하우스> 중간에 삽입된 4편의 가짜 영화 예고편 중에서 롭 좀비가 연출한 <나치의 늑대여인Werewolf Women of the S.S.>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한 경우가 가장 근접함). 따라서 브루스 윌리스가 실어증으로 은퇴를 선언한 2022년 3월 31일은 영화가 죽은 날(the day the movie died)이다. 적어도 반쯤은 그렇다… 6 충무로를 다시 찾은 건 『마테리알』이 주최한 릴레이 발표대회 [오픈 스페이스: 영화를 가르는 패스]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아침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4월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모두 여섯 명의 발표자가 발표를 한다고 했다. 토요일 한국 독립 영화 사운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 최지영(사운드 디자이너) 언제나 밝은 방에서 여러개의 창을 틀어놓고 / 윤원화(시각문화 연구자) 정당화하는 관점: 임흥순에 대한 불만 / 윤아랑(비평가) 일요일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 / 함연선(마테리알 편집인) 문화로서 영화: 누가 도대체 진지한 표정으로 영화 이야기를 들을까? 당신도 / 강덕구(작가,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 운영자) 해적질과 영화 문화 / 한민수 모두 매력적인 주제들 가운데서 특히 내 눈을 잡아끈 것은 함연선의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였다. 때마침 JD와 나는 봉준호, 홍상수, 이창동 같은 이름에 전적으로 기대지 않고, 관객수로 줄을 세우지도 않으면서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를 이야기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참이었다. 우리는 그 모든 영화들이 없었던 것처럼 굴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모르는 영화를 우리가 ‘발굴’한 것처럼 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행사 안내 페이지를 캡쳐해서 JD에게 보냈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수학 학원 선생님의 질문에 "화산고"라고 대답한 학생은 망신을 당하고 맙니다. '차라리 <스파이더맨>이라고 말했다면 괜찮았을까...?' 수치의 순간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한 사춘기 청소년은, 결국 유사-스노브로 성장하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영화 경험의 근원에는 "비천한 영화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원고를 위해 저는 여기에 가야겠어요, 그리고 어쩌면 임창정에 대해 쓸지도 모르겠네요, 쓰고 싶지 않지만요. 쏘옥, 소리와 함께 아이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답장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지를 작성 중이라는 말풍선조차 뜨지 않았다. 나도 구태여 오픈 스페이스 날짜가 원고 마감일 이후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원고 마감일을 어길 수밖에 없다는 말은… 7 왜 모든 영화 관련 이벤트(GV, 강연, 세미나, 기타 등등)는 내가 가기 힘든 시간만 골라서 열리는지 모르겠다. 씨네필들은 가정이 없나? 아니면 가정이 없는 것처럼 가정하고 살아가거나… 다네는 말한다. “영화 팬은? 헛되이 두 눈을 크게 껌뻑거리는 사람이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사람이며, 프로다운 ‘영화 팬(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는 삶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는 행위들이다.” 뢰트라와 기그는 여기에 축제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믿는 표정을 지으면서 최대한 아주 늦게 도착하는 것이 틀림없이 사람들이 영화 팬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이라고 덧붙인다. 물론 나는 영화-어쩌고가 아니며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영화 팬의 핵심을 수행하긴 했는데, 짧게 이야기하면 이렇다. 내가 차를 몰고 갔다는 사실은 앞서 말했다. 오픈 스페이스를 마치고 처갓집으로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철거된 동화빌딩과 매일경제본사 사이에 있는 노상공영주차장(주말과 공휴일에는 무료개방)에 주차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빈자리가 없었고 그래서 (저렴한 금액으로) 주차할 곳을 찾아 빙글빙글 돌다보니 시간이 흘렀다. 결국 (구)극동빌딩 (현)남산스퀘어빌딩에 차를 세우고 오픈 스페이스가 열리는 대한극장 뒷골목의 서울지역영화교육허브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분도 더 늦은 시간이었다. 문앞에 선 채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일정에 따르면 첫 번째 발표에는 2시간이 배정되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축제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믿는 표정 을 지으면서 발표회장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설상가상, 빈자리가 없어 발표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맨 앞자리까지 빽빽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으며… 8 한숨을 채 돌리기도 전에 발표가 끝나버렸다. 스탠리 카벨은 누구나 자신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 자신의 인생이 이 시간과 장소라는 지점에 이르게 된 것, 자신의 역사가 펼쳐져서 이 방에, 이 길에, 이 곳에 이르게 된 것을 잠깐이나마 기이하게 여긴 적이 있을 것이라고 썼는데, 그때 내가 그랬다. 질의응답이 시작되었지만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다는 생각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문윤기를 보았고—나와 그는 JD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실은 나와 ‘트친’인 영화평론가이고, 그밖에도 이 좁은 장소에 내가 타임라인에서 보아 왔던 사람들이 득시글하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기이함the uncanny은 영화에서는 보통의 경험이다, 라고 스탠리 카벨은 계속해서 쓴다. 도주, 구출, 우연의 만남이나 근처에 있는 탓에 인생이 변모해버리는 것—이러한 우연과 만남은 영화의 모든 장르를 지탱해주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연한 만남은 우연한 만남일 뿐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 건 또 아닌데, 모든 만남은 크건 작건 우리 안에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위대한’ 영화가 우리의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백 편의 ‘비천한 영화’는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 제법 높은 확률로… 9 카벨은 음악이나 문학과 달리 영화의 경우에는 보통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높은 레벨의 영화를 진정으로 좋아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영화를 모른다면 높은 레벨의 영화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보통의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말하느냐다. 카벨 스스로 이미 ‘보통의 영화’와 ‘높은 레벨의 영화’를 구분 짓고 있는 판에 하물며 ‘비천한 영화’는 또 어떻게 말할 것인가? 질의응답 시간에 이어진 것도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2000년대 초중반에 몰려 있는 비천한 영화들, 혹자는 OCN 영화들이라고도 부르는 그것들이 영화 경험의 근원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굳이 복원시킬—비평적 공론장으로 끌어올릴—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나왔고, 현재의 영화 담론이 특수한 세대적 경험을 보편으로 인준하는 시스템 속에서 작동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영화들을 비평의 언어로 끌어들여 담론장에 균열을 낼 필요가 있다는 반론이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00년생이어서, 02년생이어서, 90년대 후반생이어서 오늘 언급된 < 달마야 놀자 >, < 신라의 달밤 >, < 두사부일체 >, < 조폭 마누라 > 같은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여기서 내가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인가? 다행히 그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마 나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10 항상 12살 짜리가 있는 법이고 그들에게 맞는 책이 역시 있는 법이다. 스탠리 카벨은 말한다. 하지만 영화는, 걸작이 아닌 다음에야, 예전 그대로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어지는 카벨의 목록: 찰스 로튼과 클라크 게이블의 <전함 바운티>, <십자군>, <유니온 퍼시픽>, <새벽의 성찰>, < 캡틴 블러드 >, <알제리>, <찰리 챈>, <폭풍의 언덕>, < 스텔라 달라스 >, <킹스 로우>, <교수와 미녀>, 로날드 콜만의 < 젠다성의 포로 >, < 마음의 행로 >, < 잃어버린 지평선 >, <후아레즈>, <데드 엔드>, <모히칸족의 최후>, <부러진 화살>, <장군, 새벽에 죽다>, <밀드레드 피어스>, <오페라의 유령>, < 스트라이크 업 더 밴드 >, <비에 노래하며>, < 캣 피플 >, <환상의 여인>, <도시의 절규>, <안녕, 내 사랑>, <화이트 히트> 등 그밖에 백 여편의 다른 영화들. 카벨은 계속해서 말한다. 이 영화들과 보낸 시간은 정말 전율의 시간이나 나날이었다. 중대한 순간이었지만 아주 일순간이었다. 기억과 회상에서만 포착 가능한 시간으로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다. 지금 당신이 이 영화들을 처음 본다면 재미있게 볼 뿐 아니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당시 내가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카벨은 지금 정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지식이나 교양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영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렇다: < 동감 >, < 번지 점프를 하다 >, < 친구 >, < 엽기적인 그녀 >, < 킬러들의 수다 >, < 공공의 적 >, < 결혼은, 미친짓이다 >, < 후 아 유 >, < 라이터를 켜라 >, < 연애소설 >, < 광복절 특사 >, < 품행제로 >, < 클래식 >, < 동갑내기 과외하기 >, < 선생 김봉두 >, < 와일드 카드 >, < 싱글즈 >, < 오! 브라더스 >, < 황산벌 >, < 그녀를 믿지 마세요 >, < 어린신부 >, < 효자동 이발사 >, < 늑대의 유혹 >, < 바람의 파이터 >, < 시실리 2km >, < 알포인트 >, < 슈퍼스타 감사용 >, < 귀신이 산다 >, < 말아톤 >, < 잠복근무 >, < 혈의 누 >, < 사랑니 >, < 광식이 동생 광태 >, < 태풍 >, < 작업의 정석 >, < 싸움의 기술 >, < 흡혈형사 나도열 >, < 음란서생 >, < 달콤, 살벌한 연인 >, < 사생결단 >, < 구타유발자들 >, < 천하장사 마돈나 >, < 미녀는 괴로워 >, < 1번가의 기적 >, < 좋지 아니한가 >, < 이장과 군수 >, < 즐거운 인생 >, < 스카우트 > 기타 등등… 이것은 내가 왓챠피디아에 평가한 1499편의 영화 중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를 구작순으로 필터링한 것 중에서 봉, 홍, 박, 이 등의 작품과 여기에 제목을 쓴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작품을 빼고 나열해본 것이다. 모든 영화가 내게 전율을 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한두 장면이라도 재미를 느낀 부분이 있었다고 말해야겠다. 나 역시 빙크스 볼링처럼 “못 만든 영화라도 일단 빠져들면 무척 행복”한 관객이기 때문이다. 11 다시. 문제는 이런 영화를 어떻게 말하느냐다. 카벨은 모든 시대의 12살에게 맞는 공통의 책들이 있는 반면, 서로 다른 시대의 12살에게는 그때그때의 영화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걸작 리스트는 공유가 가능하지만 어쩌면 평범하거나 비천한 영화들의 리스트는 공유 불가능한 게 아닐까(“지금 당신이 이 영화들을 처음 본다면 재미있게 볼 뿐 아니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당시 내가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사진에 대한 바르트의 구분처럼, 걸작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스투디움의 영역이지만 비천한 영화는 보는 사람의 주관에 달린 푼크툼 같은 게 아닐까? 여기에는 다양한 층위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을 위해서는 또 다른 자리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만이 (여전히) 남아 있다. 걸작을 나열하지도, 천만 영화 목록을 훑지도 않으면서. 다시 한 번,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우리는 한국 사람… 12 우리가 하려는 게 비평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둬야겠다.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내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카메라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다. 오픈 스페이스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곱씹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보다는 오픈 스페이스 현장을 찍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말이다. 에세이 필름을 만들어야 하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영화 그 자체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니콜라스 케이지가. 최근 케이지는 < 참을 수 없는 무게의 미친 능력 >에서 한때 잘나가던 슈퍼스타였지만 이제는 빚더미에 올라 아무 영화나 막 찍는 ‘닉 케이지’를 연기했다. 그가 자신의 광팬이자 억만장자 마약왕인 페드로 파스칼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가 예기치 못한 소동에 휘말리는 이야기라는데 내가 본 건 트위터에 돌아다니는 짧은, 그러나 영감으로 넘치는 클립이다. 으리으리한 페드로 파스칼의 집. 파스칼이 소파에 앉아 있는 케이지에게 와인을 따라준다. 케이지 고마워. (사이) 말 좀 그만 돌리고 대답해봐. 세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가 대체 뭐야?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파스칼, 결심한듯 내뱉는다. 파스칼 패딩턴 2 . 비명을 지르며 잔을 내려놓는 케이지. 케이지 뭐?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랑 <패딩턴 2>?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 말은, 잘난 척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파스칼 영화 보는 내내 울었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고. 케이지 야, X까! 장면 바뀌면, 화면을 바라보며 코를 훌쩍이는 케이지의 모습. 나는 JD에게 링크를 보내고, 기다린다. 여전히 답이 없다. 말풍선도… *다음 책들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 [영화를 생각하다](장 루이 뢰트라.수잔 리앙드라 기그, 김영모 옮김, 동문선, 2005) [눈에 비치는 세계](스탠리 카벨, 이두희.박진희 옮김, 이모션북스, 2014)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에는 작년 영화들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는 파리가 아니며, 런던이 아니며, 뉴욕이 아니며, 동경이 아니다. 서울에서 영화를 보는 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우리들은 언제나 한발 늦게 그 영화를 보아야 한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더 곤란한 건 그렇게 볼 수 있는 영화들조차 서울 시내에서 그 영화를 보려면 그 시간에 맞춰 한참을 떨어진 극장에 보러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영화를 하루에 단 한 번 밤 12시 40분에 상영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텅 빈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건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새벽 2시 반에 극장 문을 나선 다음 한적한 거리에서 택시를 잡아타기 위해 망연자실하게 두리번거릴 때는 약간 처량해지기까지 한다. 시네필은 보헤미안들이 아니다. 아직 올해가 끝난 건 아니지만 지난 열 달간 본 영화 중 지금 내 두뇌의 스크린에서 가장 맹렬하게 상영되고 있는 영화는 유셴수의 < 인조공간 >이다. 도시의 명멸하는 이미지들. 이미지들의 반복되는 기호. 기호 안에 자리 잡은 시간. 시간 안에서 활동하는 모호한 세계, 세계라는 수수께끼의 이미지. 그 이미지 안에 이따금 바람이 불 때 갑자기 이미지에 구멍을 만들어내고 세계가 침입한다는 기묘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세계의 기기묘묘한 질서를 영화는 붙잡을 수 있을까. 어쩌면 지가 베르토프의 < 카메라를 든 사나이 >와 요리스 이벤스의 <비>의 중간 어디쯤에 자리 잡고 있을 이 영화는 수없이 본 이미지들을 불현듯 새롭게 반짝거리게 만든다. 여기에는 영화가 원래 갖고 있었을 힘을 잡아당기면서(attraction) 그 자리에로 우리를 되돌려 보낸다. 우리들이 처한 이 신기한 영화‘歷’사의 자리. 정확하게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가장 흥미로운 이름(중의 한 명)은 라브 디아즈이다. 처음 본 라브 디아즈의 영화는 < 필리핀 가족의 진화 >였다. 10시간 43분에 이른 이 영화를 본 다음 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경험이 시간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시간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의 방법을 밀고 나아갔다. (내가 본) 두 번째 영화 < 엘칸토에서의 죽음 >은 다시 한 번 9시간 동안 계속 된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 고통스러운 고백의 여정이 이어진다. 그러고 나서 < 멜랑콜리아 >를 보았다. 7시간 30분이라는 상영시간은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내가 라브 디아즈를 처음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첫 회의 심사위원으로 기꺼이 마닐라에서 서울까지 먼 초청에 응했다. 라브 디아즈는 쾌활하고 자기 의견을 말하는데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 그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의 영화가 그렇게 긴 상영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은 없나요?”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뇨, 그런 것 따위는 걱정할 겨를이 없어요. 나는 영화를 볼 때 닥쳐올 시간만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영화를 볼 거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에 대답하는 사람들이 제 영화를 보러 올 것입니다” 영화에서 닥쳐올 시간, 이라는 말. 나는 영화의 시간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그런 의미에서 라브 디아즈는 내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그런 다음 그는 계속해서 걸작을 찍었다. < 북쪽, 역사의 끝 >은 비교적 짧은 상영시간이지만(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4시간 10분이다) 이 영화는 라브 디아즈가 새로운 경지로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올해 로카르노에서 (이 이상한 제목을 <아프리오리>로 번역한다고 유운성 씨가 내게 일러주었다)로 작품상인 황금 표범상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 대신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라브 디아즈가 현재 진행 중인 < 폭풍의 아이들, 제1권 >을 볼 수 있었다. (이하 <폭풍의 아이들>) 라브 디아즈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같은 제목 아래 세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게 될 예정이라고 했다. 더 좋은 일은 이 영화 상영을 마치고 난 다음 라브 디아즈와 관객과의 대화를 내가 진행하게 되었다. <폭풍의 아이들>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사건은 2013년 11월 필리핀을 강타한 태풍 욜란다 ‘이후’의 풍경이다. 뉴스에 따르면 욜란다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태풍이었다고 한다. 라브 디아즈의 설명에 따르면 매년 필리핀은 평균 28개의 태풍을 맞이하고 그중 몇 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다고 한다. 하지만 욜란다는 이제까지의 태풍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찾아왔다. 재해가 지나가면서 6,293명이 사망했고, 1,061명이 실종됐고, 28,689명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으며, 1,140,332채의 건물이 부서졌고, 1,300만 그루의 나무가 뽑히거나 부러졌다. 라브 디아즈도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에는 규모가 너무 심각해서 미처 촬영을 시작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교통이 두절되어서 이동할 수 없었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화의 첫 장면은 한밤중에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칠흑 같은 밤. 아마도 그건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엔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렇게 비가 내리는 장면이 전부이다. 아니, 그 말은 정확하지 않다. 여기엔 비가 내리는 소리가 우리를 압도한다.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이 어른거리고 그 화면을 지워버릴 것처럼 그렇게 비가 내린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오면 강가로 수없이 많은 재해의 흔적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흘러내려 간다. 이미 도심은 물에 잠겼고, 사람들은 거의 무릎까지 물이 차오른 도로 위로 자전거의 페달을 열심히 밟으면서 힘겹게 이동하고, 마치 허우적거리듯이 삶의 리듬이 다시 시작한다. 라브 디아즈의 카메라가 멈춘 곳은 다리 위에서 강물 위로 쏜살같이 흘러내려 가는 재해의 흔적들을 건지는 아이들이다. 거기서 이제는 주인을 알 수 없게 된 물건들이 흘러내려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무언가 쓸 만한 것이 있을까, 그렇게 지켜보며 안간힘을 써서 건지는 중이다. 하지만 라브 디아즈는 이 아이들에게 말을 걸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의 카메라는 말을 걸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아이들은 자기 일에 바빠서 라브 디아즈의 카메라에 관심을 쓸 겨를이 없다.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닥쳐온 것일까,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닥쳐올까. 닥쳐올 시간. 그걸 바라보는 영화의 시간. 라브 디아즈의 카메라는 그 시간의 사이 안으로 들어간다. 오늘날의 영화에서 지아장커, 아핏차퐁 위라세타쿨, 차이밍량에 이어 라브 디아즈가 앙드레 바쟁의 계보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 거기 영화가 있어야 한다. 이 절대적인 호소. 그 안에 놓여진 시간. 거기 버티고 있는 세상.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21세기 아시아 영화들이 디지털을 선택하면서 일제히 바쟁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라브 디아즈는 마치 그 강물에 떠밀리듯 바다까지 흘러온다. 그리고 거기서 태풍에 밀려온 거대한 선박이 마을을 덮친 다음 그냥 거기 괴물처럼 놓여있는 모습을 바라본다. 이제 태풍은 지나갔지만 그 흔적이 남겨놓은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다. 거의 쓰러져가는 집들. 그렇다고 해서 라브 디아즈가 그들의 사연에 귀 기울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주 가끔 그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그들이 라브 디아즈에게 말하기도 하지만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는 것이 그의 목표는 아니다. 그의 카메라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서, 혹은 가끔 지나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서, 살아남은 자들을 바라본다. 여기서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내가 여기에 있다, 는 도착이다. 그게 아니라면 영화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때 이 영화는 손으로 들고 찍은 쇼트와 고정시켜 놓고 찍은 쇼트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두 종류의 촬영이라는 노동 사이를 오간다. 대부분의 촬영은 라브 디아즈 혼자서 소니 알파 NEX 알파 3로 진행했다. 작고 기동성이 있으며 동시에 노출에 대한 보정력도 뛰어나지만 결정적으로 장시간 촬영의 경우 배터리 충전이라는 문제와 부딪치게 되는 이 카메라를 들고 다큐멘터리를 혼자서 찍는 것은 좀 특별한 결정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장면들은 롱 테이크로 찍혔다. 전적으로 운에 맡긴 장면들. 게다가 단 한 장면도 예외 없이 야외장면이고 여기는 거의 전력 공급이 중단된 어촌 마을이다. 말하자면 충전이라는 절대적인 요구와 그 불가능성. 여기서 내가 보는 것은 라브 디아즈가 카메라에 주어진 생명의 시간을 고스란히 존중하고 싶다는 결정이다. 점점 영화에서 카메라는 하나의 결정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에게 무엇이 닥쳐올까. 죽음은 우리의 소재가 아니다. 거기 카메라가 있을 때 몸은 시간을 위해 살아낼 것이다. 거기서 우리의 사건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영화. 그걸 선택할 때 그건 그 카메라에게 주어진 생명을 받아들이겠다는 하나의 태도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 라브 디아즈는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내내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양,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그저 거기에 자신은 단지 카메라를 가져갔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거기에 카메라를 가지고 갔을 때 누구나 그렇게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그걸 알겠다. 그렇게 욜란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살아남은 아이들을 영화가 바라볼 때 그건 하나의 선언이다. 어떤 선언?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살아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들은 신 나게 (당신이 알고 있는 바로 그 노래) ‘Let it go’를 부른다. 소년은 담담하게 지난 태풍이 오던 날 밤에 아버지가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을 하면서 아이는 아무 원망도 담지 않은 채 바다를 바라본다. 라브 디아즈는 이 소년을 한참을 바라본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신들을 덮친 괴물 같은 배에 아이들이 기어 올라가 마치 휴가를 즐기기라도 하듯이 다이빙을 하기 위해 뛰어내린다. 이 순간은 그저 아이들의 여름방학처럼 보일 만큼 아름답게 찍혔다. 운동하는 이미지의 슬로우 모션. 삶의 슬로우 모션. 라브 디아즈는 그렇게 지금 생명을 찍는 중이다. 나는 어서 빨리 라브 디아즈의 다음 영화가 보고 싶다. 그는 우리가 이 힘겨운 세기를 함께 건너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이름(중의 한 명)이다. 올해가 막 지나가고 있다.
지난 2년간 한국 독립영화들의 가장 뜨거운 화두는 ‘집’이었다. 집을 지킨다는 것, 혹은 집을 빼앗긴다는 것에 대한 분노, 고통, 그리움, 두려움 같은 절실한 정조가 수많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들에 어른거렸다. 정권의 신념이 되어버린 자본의 개발논리와 용산 철거민 참사의 트라우마가 이제 우리는 집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마저 걸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슬픔과 위협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투쟁의 현장으로 카메라를 들고 나선 다수의 영화들은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증언하거나 쫓겨난 이들의 심정에 귀를 기울였다. 그 때 정재훈 의 < 호수길 >도 등장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상하다. 여기에는 전경과 철거민들의 대치 현장도,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억울한 외침도, 긴박하게 이들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다급함도 없다. 그 흔한 인터뷰조차 없다. 달리 말해, <호수길>은 철거민의 현실을 공유하면서도 전혀 다른 것들을 보고 있다. 그리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말한다. 푸른 하늘, 밝은 달빛, 아이들의 웃음소리, 산책하는 고양이, 싱그러운 바람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바로 그 곳에서 포크레인이 집을 부수고 주인을 잃은 강아지가 떠돌고 유령 같은 밤이 밀려온다. 도대체 지금 이 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파괴되는 터전 안에서 삭막해진 우리의 감각이 놓치고 지나친 것들, 그러나 <호수길>이 붙잡아 우리의 기억에 불러온 순간들. 죽음을 앞둔 은평구 어느 마을의 마지막 생생한 숨소리, 동시에 꺼져가는 숨소리가 여기 있다. 우리의 집이 부서진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산책할 장소를 빼앗긴다는 것, 우리의 추억이 켜켜이 배인 골목, 풍경, 공기를 더 이상 어슬렁거릴 수 없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적어도 < 호수길 >의 감독 정재훈 에게는 그랬던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그렇게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나의 동네’를 게으르게 숨 쉬며 걸어 다닐 수 있는 평화를 부당하게 잃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정재훈은 마을의 집들이 흙과 먼지로 사라져가는 그 시간에도, 아직 남아있는 순간들을 산책하며 구경하듯, 마을 사이사이에 고집스럽게 카메라를 세워두고 찍었다. <호수길>의 응시는 그러므로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스스로 한 마을의, 한 시절의 일부로서 사라짐의 시간 안에서 남아 있는 시간을 사는 것이다. <호수길>의 한없이 서정적이던 낮이 주인을 잃고 무너져 내린 집의 기괴한 울음소리(감독이 인위적으로 입힌 사운드는 정말 그렇게 들린다)가 가득한 밤으로 이어질 때, 카메라와 세심하게 시선을 교환했던 고양이가 얼마 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때, 우리는 이 마을을 잠식하는 낯선 시간의 그림자를 온 몸으로 느낀다. 무겁고 무섭다. 하지만 < 호수길 >을 보고나서 우리가 슬퍼하는 만큼 신기하게도 위로를 얻는다면 그건 이 영화의 건강함 때문일 것이다. 폐허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똑같은 폐허가 되어가는 자신을 내버려두는 대신, 어떻게든 자신의 심성을 지키려는 안간힘과 투명함이 이 영화를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