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삶
- 감독
- 찰리 채플린
- 제작년도
- 1918
- 출연
- 찰리 채플린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채플린은 언제 ‘위대한’ 채플린이 되었을까. 물론 채플린은 처음부터 훌륭했다. 심지어 맥 세네트가 연출하고 채플린이 주연을 연기한 초기 영화들부터 훌륭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을 위대하다,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마 누군가는, 여기에 해당하는 이들은 대부분 채플린의 전문적인 연구자들인데, 1915년에 < 방랑자(The Tramp) >에서 채플린 자신이 만들어내고 있는 인물을 이미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세상 속의 버림받은 방랑자에서 그 관계를 반대로 뒤집어서 그 자신이 방랑자라는 선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만의 문제 설정을 발명했다고 설명할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방랑자로부터 주인으로서의 방랑자로의 전도. 하지만 나는 좀 더 뒤로 더 물러나고 싶다. 어디까지? <방랑자>가 훌륭하긴 하지만 잠시만 그 주변을 돌아보자. 여전히 여기에는 채플린이 자신의 희극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고정하고 일정 거리만큼 물러난 다음 영화 프레임을 무대처럼 사용해서 곡예사의 재주를 한껏 보여주는 데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이 남는다. 문장을 바꿔보겠다. 채플린의 영화를 모두 본 우리는 <방랑자>를 통해서 < 황금광 시대 >(1925)를 보지 않으며, ‘또 다른’ < 방랑자(The Vagabond) >(1916)를 통해서 < 시티 라이트 >(1931)를 보지 않는다. 반대로 < 서커스 >(1928)를 통해서 < 이민자 >(1917)를 볼 것이며, < 모던 타임즈 >(1936)를 통해서 < 개의 삶 >(1918)을 볼 것이다. 그 둘 사이에 어떤 도약이 놓여있는가. 장편 영화 < 키드 >(1921)가 놓여있다. 채플린이 카메라 앞에 선 1914년 첫해에 키스톤 영화사에서 35편의 단편 영화를 찍었다. 빠르게 영화를 배웠고, 그 해가 끝나기 전에 이미 채플린은 직접 연출을 하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는 누구나 그랬다. 그리고 1919년 7월 20일 새로운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가제(working title)는 <방랑자(The Waif)>. 마치 단편 영화와 같은 간단한 줄거리. 미혼모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간절한 편지와 함께 고급 자동차에 놓고 자리를 떠난다. 그 자동차를 악당 두 명이 훔쳐 가고 아이는 길거리에 버린다. 그리고 그 아이를 방랑자가 떠안게 된다. 여차저차해서 방랑자는 아이를 키우게 된다. 그리고 둘은 마치 파트너처럼 이런저런 사고도 치면서 서로 아끼는 부자지간이 된다. 그리고 다시 우여곡절 끝에 아이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고 방랑자와 아이는 행복하게 재회한다. 시작하자마자 이 영화는 채플린 없이 5분 동안 진행된다. 연출자 채플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채플린이 빈민가 골목에서 등장한다. 게다가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채플린이 아니라 ‘영화사상 가장 귀여운’ 아역이라고 해야 할 네 살 소년 재키 쿠간이 자기보다 큰 소년을 상대로 빈민가 작은 광장에서 일대일 맨주먹 권투를 하면서 혼내주는 씬이다. 이 장면은 아무리 반복해서 보아도 매번 웃게 된다. 그런 다음 채플린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 장면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키드> 중 (사진: “The Kid( 1 , 2 , 3 )”, IMDb / “ Charlie Chaplin – The Kid – Fight Scene ”, Youtube Charlie Chaplin) <키드>는 채플린의 68번째 영화이다. 필름 길이 5,250피트. 상영시간 1시간 8분. 이 상영시간에서 채플린은 1970년에 재개봉을 위해 15분을 단축했다. 새로운 관객들에게 일부 장면이 구태의연하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53분 판본은 1972년 4월 4일 뉴욕 링컨센터에서 프리미어 상영되었다. 이 자리에는 채플린이 참석했다. 이 상영본이 공식적인 <키드>의 판본이 되었다. 채플린의 나이 32살. 아마 이 영화에 담겨있는 모든 파토스와 유머, 그리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에피소드들, 아니, 보는 쪽에서도 계속해서 보고 싶다는 기쁨을 안겨주는 이 영화의 힘은 말할 것도 없이 재키 쿠간에게서 온 것이다. 그해 봄에 만든 < 양지바른 곳 >(1919)에서 오디션을 통해 재키 쿠간을 발견한 채플린은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재키와의 촬영이 끝나고 댄스홀에서 서로 마주 앉아 1시간 45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살 소년과 할리우드의 거물 사이의 다정한 대화. 재키를 돌려보낸 다음 채플린은 자신의 스탭들에게 말했다. “내 인생에서 만나 본 중에 가장 놀라운 사람을 지금 만났군.” <키드>의 촬영은 1919년 7월 21일에 시작되었다. 현장에서 채플린은 재키와 영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재키는 개미에 관심이 많았고, 채플린은 함께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자연의 신비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 다음 촬영을 할 때 채플린은 재키가 해야 할 장면의 연기를 그 앞에서 실현해 보였으며, 재키는 그걸 그대로 흉내 내면 되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했지만, 재키 쿠간은 천재적으로 채플린을 ‘카피’하였다. 재키 쿠간(좌)과 찰리 채플린(우) (사진: “ The Kid ”, IMDb) 여기까지 읽으면서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키드>의 줄거리는 장편 영화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군요. 좋은 질문이다. 채플린은 ‘가제’ <방랑자>를 처음부터 장편으로 만들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채플린이 준비한 영화는 재키 쿠간과 함께 출연한 세 편의 단편 영화였다. 그때 채플린과 계약한 퍼스트 내쇼널 영화사도 그것을 원했다. 그래서 <키드>는 세 편의 영화를 하나로 이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채플린은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다. 이 영화는 한 편이 되는 쪽이 훨씬 깊은 감정적인 호소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퍼스트 내쇼널 영화사에 편집 일부를 먼저 시사하였다. 경영진은 채플린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좀 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그때 채플린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첫 번째 아내 밀드레드 해리스는 채플린의 재산을 가압류 신청하였다. 채플린은 자신의 첫 번째 장편 영화가 가압류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여기에는 반대의 설명도 있다. 밀드레드 해리스가 가압류 대상으로 삼은 건 단편 영화들이었고, 채플린이 장편 영화를 제작할 것으로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채플린의 첫 번째 장편 영화 <키드>가 예술적 결단인지. 아니면 산업적 판단인지, 혹은 재산 분쟁을 둘러싼 변호사의 조언에 따른 것인지는 내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과 결정이 서로 실타래처럼 뒤엉킨 것일 수도 있다. 채플린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는 밀드레드 해리스 몰래 네거티브 필름을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유타 호텔로 가져가 편집실을 차려놓고 최종본을 완성했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비밀리 진행되어야 했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솔트레이크시티에는 현상실을 비롯한 후반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스튜디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0년 7월 30일에 작업이 끝난 <키드>는 1921년 2월 6일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키드>에 채플린은 만족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퍼스트 내쇼널과의 계약이 끝나자마자 그리피스,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세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로 옮긴 채플린은 이제 단편 영화로 돌아오지 않았다. 후일담.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된 것은 아니다. 채플린의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의 첫 번째 영화는 < 파리의 여인 >(1923)이었다. 이 영화는 채플린이 연출만 하고 출연하지 않은 두 편의 영화 중의 한편이다. 이 영화는 박스 오피스에서 재난을 맞이하였다. 채플린은 <황금광 시대>로 다시 돌아왔다. 영화가 길건 짧건 그건 상관없었다. 대중들은 채플린의 영화가 아니라 ‘방랑자’의 영화를 원했다. 후일담의 첨언. 하지만 나는 박스 오피스에 동의하지 않는다. <파리의 여인>은 걸작이다. <키드> 중 (사진: “ The Kid ”, IMDb)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임권택 의 < 왕십리 >(1976)는 내게 기이한 몽환적 경험을 전해준 영화다. <왕십리>가 임권택의 초 중기 장르 영화 걸작 중 한 편이라는, 혹은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에서도 수작에 속한다는 공인된 평가와 나의 그 몽환적 경험이 어떠한 관련성을 맺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어쩌면 거의 관련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잊히지 않는 그 몽환의 경험 때문에, 동시에 임권택 영화 세계에 대한 나의 무지를 인정하면서, 나의 첫 번째 임권택 영화의 걸작으로 <왕십리>를 꼽고 싶다. < 왕십리 >에서 나를 혼미하게 만든 건 이 영화에서 한 차원 더 발전되었다고 평가받는 임권택 식 회상 장면들의 쓰임새가 아니라, 그 회상 장면들 이후에 찾아오는 기괴한 ‘출현과 재출현’의 장면들이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예외 없이 여주인공 정희( 김영애 )의 등장과 전부 관련이 있다. 주인공 준태( 신성일 )는 14년 만에 돌아온 고향 왕십리에서 옛 연인 정희를 다시 만나 보기를 원한다. 정희는 부잣집에 시집가서 아이 셋을 둔 행복한 귀부인이 되었으니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친구들이 말리지만 준태는 신문에 광고를 내고 마침내 정희가 나타난다. 그녀는 듣던 대로 귀부인이 된 것도 같고 영화가 회상 장면을 통해 보여 주었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청순함을 지닌 것도 같다. 이제 첫 번째 출현의 시간이 온다. 사기꾼 정희의 출현이다. 그녀는 사실 배다른 아이를 셋이나 키우는 왕십리의 소문난 바람둥이이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기꾼이다. 14년의 세월이 정희의 순진함을 더럽혔거나 준태가 그녀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리라. 남편의 사업이 망하고 홀로 어렵게 아이들을 키우는 것처럼 위장한 그녀는 준태의 유년 시절 친구이자 자신의 현재 애인인 충근( 백일섭 )과 짜고 준태에게서 돈을 뜯어내려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도 준태에게 연약하고 쓸쓸한 애정의 눈길을 보내던 정희는 준태가 떠나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아휴 살기 힘들어”하며 성질을 내면서 천박하게 병째 소주를 들이켜고는 아이들에게 입조심들 하라며 주의를 준다. 사기꾼 정희의 정체가 드러나는 이 순간은 너무 갑작스럽고 노골적이어서 잠시 어리둥절하다. 이 장면의 ‘결’은 적지 않은 상영시간을 들여 과거의 그녀를 소개하던 회상 장면의 ‘결’과 너무 다른 탓에 거의 우격다짐으로 여겨지거나 서사적 위반 혹은 거친 속임수처럼 느껴진다. 회상 장면의 정희는 순박했는데 이 장면의 정희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이 충격 요법이 전부였다면 < 왕십리 >는 그저 범작에 그쳤을 것이다. 정희는 그치지 않고 다시 출현한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준태 앞에 또 나타난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나는 이 이상한 가정을 마치 홀린 듯이 연거푸 읊지 않고서는 <왕십리>의 감동을 말할 능력이 없다. 정희의 사기 행각이 전부 드러난 뒤 그녀는 준태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 곱고 수수한 차림새를 하고 왕십리역 광장 목재들이 쌓인 그 좁은 틈 사이에서 그녀가 준태를 기다리고 있다. 정희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앞 장면의 천박한 정희와 지금 이 자리의 정희가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확연히 다른 톤으로 그려낸다. 그녀는 지금 천박하기는커녕 낮고 떨리는 음성으로 사랑을 배신한 것에 슬퍼하고 죄를 지은 것에 속죄하는 청순의 여인이다. 이 순간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답고 연약한 여인이다. 준태는 정희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충근과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결혼식까지 올려준다. 정희에 대한 이러한 양립된 인물 묘사가 투박한 서사적 결함에 불과하다고 지적할 순 있다. 그런데 그것이 결함이라 해도 그 결함을 능가하고 주관하는 기이한 무드가 정희의 출현 때마다 솟아난다는 걸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정희의 기이한 출현과 재출현마다 그 무드가 어김없이 생성된다. 그걸 잠재적 가능성의 무드라고 불러도 될 것인가. 가령 < 왕십리 >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두 명의 정희가 출현한다. 천박한 정희, 순수한 정희. <왕십리>는 기승전결을 지닌 내러티브 영화이므로 우리는 이 천박함과 순수함을 한 인물이 지닌 양면적 성격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 두 명의 정희의 출현을 좀 더 비상식적으로 받아들였다. 한 인물의 두 가지 성격이 아니라 한 인물이 가질 법한 삶의 두 가지 잠재적 가능성이 번갈아 출현하는 대목으로 느꼈다. 그 때문에 출현이라고 내내 말하고 있다. 정희가 그녀의 인생에서 가졌을 법한 두 개의 삶의 가능성의 출현인 것이다. 준태는 왕십리로 돌아와 정희라는 한 인물의 두 측면을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희가 가졌을 법한 두 개의 삶의 가능성을 차례로 혼란스럽게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준태를 따라 왕십리에 도착한 관객인 우리 역시 혼란에 빠지지 않기란 어려운 상황이다. 마침내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밤에 준태가 자신의 숙소 방문을 열었을 때 정희는 또 다시 홀연히 출현한다. 충근과 신혼여행을 떠났어야 할 정희가 준태의 방에서 그를 기다린다. 이번에는 누가 찾아온 것인가. 천박한 정희가 온 것인가. 순수한 정희가 온 것인가. 정희의 어느 쪽 삶의 가능성이 온 것인가. 이날 밤만큼은 애매하고 모호해서 확신할 수 없다. 그녀의 자태 그리고 고백의 말들이 후자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지만 정희는 끝내 준태가 잠든 사이 그의 지갑을 털어 조용히 방을 나선다. 그렇다고 온전히 사기꾼 정희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정희는 이날 밤 자신의 진심을 말한 것 같다. 그녀는 순수했다. 방을 빠져나온 정희는 마침내 새 삶을 다짐하며 이 날의 범죄를 모의한 충근에게도 헤어지자고 말한다. 정희와 정희의 삶은 잠재적 가능성을 짐작할 뿐 끝내 정의될 수 없다.“세월을 거슬러 그때로 돌아갔으면... 이대로 시간이 멎어 버렸으면...”그날 밤의 정희가 준태와의 첫 정사를 떠올리는 장면에서 영화는 그녀를 위한 한 치의 회상 장면도 허락하지 않는다. 애틋한 밤의 이 냉혹한 판단, 이것은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영화의 도입부에서 준태는 회상 장면을 따라 자신의 주관적 기억을 갖게 되고 자연스럽게 영화적 주체로 상정된 인물이다. 영화는 정희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주관성의 경로를 갖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녀의 주관적 기억이 형성되어 그녀 또한 준태와 같은 주체적인 인물로 상정될 때, 우리가 느껴온 그녀의 모호한 잠재적 가능성은 허물어지고 그녀는 정박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왕십리라는 기이한 고향의 땅에 출몰하는 가능성의 유령, 가능성의 정희로 머물다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새해가 밝는다. 애틋한 밤이 지나고 정희는 떠나고 냉혹한 현실의 낮이 준태를 기다린다. 준태는 자신을 짝사랑해온 젊은 호스테스 윤애( 전영선 )를 찾아가 함께 일본으로 가자고 말하려 하지만 오히려 윤애는 티 없이 밝게 웃으며 말한다. 고향 출신의 남자와 맞선을 볼 것이라고. 영화 내내 정희의 과거태로 현존했던 그녀조차 준태를 거부했을 때 비로소 준태의 정착이 결정되고 정희와 윤애가 떠난 자리에 준태가 대신 남는다. 그러니 우리의 가정은 지금부터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 시간이 흘러 14년 뒤 정희와 윤애가 돌아와 준태를 만나는 그때에 그들이 매 장면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출현하는 서로 다른 준태들, A라는 준태와 B라는 준태를 만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일련의 감상의 과정을 겪고 나면 < 왕십리 >에서 왕십리는 순박한 회귀적 고향보다는 흥건하게 무드에 젖은 몽환의 땅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 때문에 <왕십리>가 임권택 영화 세계의 본류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다. 많이 언급되어 온 한국 문화의 전통성이나 감독 자신이 강조해 온 인본주의 사상은 <왕십리>에서 희미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러한 희박함이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분이다. 임권택 영화에 무수하게 출몰하는 어떤 명장면들, 예컨대 돌출적이고 기괴하고 매혹적으로 무질서한 감각적 차원의 명장면들과 연계되는 비밀 통로가 <왕십리>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느껴지기 때문이다. <왕십리>의 길이 이후 임권택이 주력해서 걸어간 길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왕십리>가 지금보다 더 높은 주목과 재평가를 받아야 하는 걸작인 것은 더 확실하다.
함께 영화를 만들던 여자 친구와 부부가 된지 2년이 되었다. 오늘은 바로 그 기념일이기도 하다. 결혼식 6개월 전에 혼인신고까지 마쳤으니, (행정적) 부부 기념일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 연애기간을 합치면 7년 가까이 눈빛을 마주치며 지내온 셈이다. 결혼 당시, 근황을 자주 주고받지 못했던 친구들은 내가 여자 친구를 임신시켜 어쩔 수 없이 결혼하는 거라고 짐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나온 내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뒤로도 가끔씩 술자리 같은 곳에서 ‘아이는 잘 크고 있어?’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때로는 ‘네 인생 좀 꼬인 게지?’라는 오묘한 뉘앙스와 함께 말이다. 아쉽게도 우리는 아직 아이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선방하면서 별일 없이 지내고 있는 편이다. 결혼해서 애 낳고, 보험에 들고, 반평생을 은행 대출금에 묶여 사는 대개의 삶을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과신했고, 피할 수 있다면 기필코 피하고 싶었다. 여자 친구와 결혼을 결심하고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이제 독립하면 어떻게 먹고 살지?’ 였다. 그 전까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나가는 웨딩 촬영, 가끔씩 있는 홍보영상 제작, 청소년 영화제작워크숍 강사 등으로 용돈을 벌었다. 그 외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를 만드는 일에 전부를 바쳤고, 돈 없이도 빨빨거리면서 다녔다. 결혼을 하면 더 이상 그런 배짱으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연애에 잘 걸리는 체질도, 아이들을 싫어하는 성격도, 어른에 대한 공경심도 별로 없는 내게, 결혼은 아무래도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한 때, 다른 예술가들의 프로필을 찾아보는데 열심이었던 적이 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전시회나 음악회에 가서도, 그들의 작품보다 내 마음을 움직인 예술가들이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더 궁금했다. 그들이 평생 혼자 살았다면, 왠지 나도 그래야만 그들이 이뤄낸 성취에 가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리석은 풋내기였다. 독립영화를 만드는 김모PD는 걱정 가득한 우리에게 ‘빌붙을 수 있을 때까지 빌붙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한 집에 살게 되었다. 방 한 칸이 딸린 월세 집을 얻느라 대출도 받았고,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와 건강보험료도 따로 낸다. 천만 원도 안 되는 연 수입에 이 모든 것은 낯설고 두려운 모험이었다. 버텨내려면 생활을 좀 더 단순하게 만들어야 했다. 가급적 걸어 다녔고, 생필품은 얻거나 주워온 것들이 많았다. 보험이나 신용카드는 없고, 식사는 늘 직접 만들어서 먹었다. 할인율이 높아도 필요 없는 것은 사지 않고, 쿠폰을 모으는 유혹에 걸려들지 않았다. 일주일에 이삼일, 알바 때문에 나가는 외에는 거의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만 일했다. 그렇게 작업을 마무리한 영화가 <회오리바람>이다. 우리로썬 독립적인 생활로 만들어낸 독립영화였다. 영화를 완성하던 날 밤, 아내와 동네를 산책하면서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이 영화의 성패와 상관없이 새로운 작업을 준비하자구. 어쩌면 평생 주목 받지 못하면서 살 수도 있어. 그렇더라도 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삶을 먼저 지키자, 여보.” 그리고 다시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우리의 생활은 여전하다. 다음 주까지 노인복지회관 연말행사에 쓰일 동영상 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 아직 모든 수입은 알바에서 나온다. 다음 작업 때까지 버티려면 어쩔 수 없다. 작은 변화도 있다. 걷는 대신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고, 친구들이 놀러 오면 내놓을 수 있는 요리 개수도 조금 늘었다. 며칠 전에는 거실에 작은 소파를 들여놓았다. 좀 더 포근한 겨울을 날 수 있을 것 같다. 내친김에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해볼까도 생각 중이다. 그리고 새로운 작업을 준비 중이다. 이제 다른 이들의 삶을 살피기보다는 우리의 삶에 집중하게 되었다. 막상 닥쳐보니, 시작해보지도 않고 가졌던 두려움도 조금 줄어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이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한 발씩 내딛기로 했다. 든든한 동지, 아내와 함께. - 결혼 2주년을 자축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