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지
- 감독
- 유이선
- 제작년도
- 2024
- 출연
- 박세재, 오혜인, 오정석, 유이선
사진: “ Safety Last! ”,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때로는 영화보다 그 영화의 어떤 장면, 그 장면의 스틸 사진이 더 유명한 순간이 있다. 안경을 쓴 순진무구한 젊은 청년이 도시 한복판 높은 빌딩 시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아마 (스필버그가 제작한) 로버트 저메키스의 < 빽 투 더 퓨쳐 >(1985)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참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신이 방금 떠 올린 그 영화, 마이클 J. 폭스가 매달려 있는 그 장면은 오마주이다. 마틴 스코세이지도 조르주 멜리에스에 관한 3D 영화 < 휴고 >(2011)를 연출하면서 이 장면을 오마주했다. 성룡도 < 프로젝트 A >(1984)에서 시계에 매달렸다. 더 많은 예를 열거할 수 있다. 심지어 이 장면은 영화에서 ‘시간’의 문제를 다루는 아카데미의 영화 이론서 표지에도 등장한다. 나도 스틸 사진을 먼저 보았다. 영화사에서 빌딩 시계에 처음 매달린 사람은 해롤드 로이드이다. 위대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제는 거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름. ‘방랑자’ 채플린, ‘스톤 페이스(Stone face)’ 버스터 키튼과 함께 할리우드 무성영화 시대 슬랩스틱 코미디를 이끈 세 명 중의 한 명. 둥근 프레임의 뿔테 안경을 쓰고 (이 스타일의 안경은 이제 로이드 안경테라고도 불린다) 둥글고 납작한 보터 모자를 쓴 해롤드 로이드는 가난한 ‘모던 보이’. 그 소년이 시계에 매달린 영화는 Safety Last (1923)이다. 영어 제목으로는 금방 이해되지만 번역하기 까다로운 “Safety Last”는 공사장에 붙어있는 “Safety First(안전 우선)”에서 가져온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안전 마무리>라고 하겠다. 하지만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고, 더 좋은 제목이 떠오르면 수정하겠다. 역시 세 명의 위대한 대가들을 비교하면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채플린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위험한 상황에 휘말려 들지만 역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신의 도움을 받기라도 하듯이 거기서 빠져나온다. 버스터 키튼은 자기가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인간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으로 전력 질주하면서 벗어난다. 해롤드 로이드는 반대이다. 버스터 키튼이 스피드의 대가라면 해롤드 로이드는 위험한 상황에 온갖 장애물 속에서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늘리고 그 과정에서 계속 실수를 연발하면서 가까스로 거기서 벗어난다. 그 실수의 시간을 최대로 연장한 영화가 <안전 마무리>이다. <안전 마무리> 중 / 사진: “ Safety Last! ”, IMDb 이번에는 LA가 무대이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결혼하기 위해 지참금을 구해야 하는 (영화 속의 이름도 마찬가지인) 해롤드는 백화점에 취직한다. 그런데 함께 지내는 빌에게는 빌딩을 타고 올라가는 ‘스파이더맨’ 같은 재능이 있다. 백화점 지배인은 손님을 건물에 끌어모으기 위해 1,000달러를 내걸고 빌은 12층 빌딩에 1층부터 등반하겠다고 알린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여차저차 우여곡절 끝에 해롤드가 1층을 올라가게 된다. 일이 생긴 빌은 다음 층에 옷을 갈아입고 자기가 오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 층에서 이런저런 일이 생겨 바꿔치기는 그다음 층으로 미뤄지고 그러면서 가여운 해롤드는 계속 올라가야 한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게다가 그 자리에 여자친구도 도착한다. 층마다 새로운 장애물이 나타나고 너무 높이 올라가 이제 내려갈 수도 없는 해롤드는 위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클라이맥스는 빌딩에 달린 시계에 매달릴 때 벌어진다. <안전 마무리>는 해롤드가 12층 빌딩을 19분 50초 동안 등반하는 장면을 감상하기 위해서 보는 영화이다. 거의 슬로우 모션처럼 진행되는 이 등반은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다. 좀 이상한 비교이기는 하지만 이 씬은 < 전함 포템킨 >(1925)의 오뎃사 계단 장면의 거의 두 배이다. 물론 마지막은 여자친구와 키스로 마무리하는 해피엔딩이다. 사진: “Safety Last!( 1 , 2 )”, IMDb 해롤드 로이드가 이 장면의 영감을 받은 것은 1922년 7월 어느 날이었다. 다음 영화 회의를 위해서 영화사로 향하던 길에 LA 7번가 브록맨 빌딩 아래 사람들이 몰려들어 모두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상한 모습을 보았다. 자기도 올려다보니 한 남자가 건물을 타고 매달려 한 층씩 등산하듯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는 옥상까지 올라갔고, 마치 등반에 성공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옥상에서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돌면서 환호에 응답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회의 시간을 놓칠 만큼 시간이 흘렀다. 잠깐 본다고 생각했는데 등반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해롤드 로이드는 보는 내내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이 등반에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만일 이 건물 등반을 영화로 찍으면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스펙터클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특수촬영이 초보 단계였던 1923년에 이 장면은 쉽게 찍을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안전 마무리>가 첫 상영을 마쳤을 때 극장 안은 비명의 도가니였다고 한다. 관객들은 이 시퀀스를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처럼 받아들였다. 물론 해롤드 로이드가 ‘진짜로’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걸 찍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할리우드의 특수촬영은 이미 전문화되어가고 있었다. 이 시퀀스는 세 단계로 나누어서 촬영되었다. 처음 1층에서 올라가는 장면은 해롤드 로이드가 건물을 타고 오른다. 그런 다음 3층 높이의 세트를 지었다. 이 장면이 세트 촬영이고 거리의 풍경을 이중노출로 합성했다는 것은 매달린 해롤드 로이드를 보지 말고 카메라의 위치를 보면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이 장면을 그 위치에 찍었다면 정말 위험한 사람은 해롤드 로이드보다 촬영감독이었을 것이다. 시계에 매달린 장면을 위해서는 또 다른 세트를 건물 옥상에 지었다. 그래서 옥상에 세워진 세트에 달아놓은 시계에 해롤드 로이드가 매달렸다. 건물을 타고 오른 후, 시계에 매달리는 해롤드 로이드 / 사진: “Safety Last!( 1 , 2 , 3 , 4 )”, IMDb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이 장면에서 가장 정교하게 설계된 것은 카메라의 위치와 각도에 관한 콘티이다. 게다가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해롤드 로이드에게는 신체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하여튼 매달리고 올라가는 장면을 찍어야 한다. 그런데 1919년 촬영 도중 소품 사고로 해롤드 로이드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잃었다. 그러니까 오른손은 세 손가락으로 건물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는 뜻이다. 나는 <안전 마무리>를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촬영과정을 알고 난 다음에도 다시 볼 때마다 이 시퀀스가 위치와 각도, 편집 타이밍, 구도, 동작, 진행 사이로 끼어드는 장애물들의 리듬, 이 모든 것이 마치 정교한 마법 기계장치처럼 작동하고 있음에 감탄하면서 보았다. 하지만 해롤드 로이드의 손가락 이야기를 알고 난 다음에는 매달려 있는 장면을 마음이 아파서 다시 보기 힘들어졌다. 아직 이야기가 남았다. 해비 페리를 잊으면 안 된다. 해비 페리는 1919년부터 해롤드 로이드의 위험한 장면 대역을 연기했다. 더 정확하게는 위험한 장면에서 해비 페리는 해롤드 로이드의 상대 쇼트(reverse shot)를 연기했으며. 높은 곳에 매달리거나 혹은 위험한 순간에 멀리서 해롤드 로이드 대신 건물을 타고 올라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오랫동안 해롤드 로이드의 모험을 믿었다. 해비 페리는 자신이 대역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해롤드 로이드가 세상을 떠나는 1971년까지 입을 다물었다. 스턴트맨으로 경력이 60년에 달하는 해비 페리는 험프리 보가트, 피터 로레의 할리우드 영화들, 심지어 키가 1미터 52센티였기 때문에 매리 픽포드의 대역도 했다. 어떻게 그렇게 매리 픽포드가 달리는 말에 능숙하게 올라탈 수 있는지 비밀이 풀렸을 것이다. 물론 비밀이 풀릴 때도 있지만 할리우드는 스턴트맨들의 피의 역사이기도 했다. 해비 페리 (사진: “ Harvey Parry ”, IMDb / © 1980 Steve Banks_ mptvimages )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무소주>(2024)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차이밍량은 2012년부터 <행자(行者)> 연작을 찍기 시작했다. 장소만 달려졌을 뿐 내용은 모두 동일하다. 리캉성이 붉은색 가사를 입고 약간 고개를 숙인 다음 한 손은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어 불가의 공(空)을 표시하고 다른 한 손은 내린 채 펼친 다음, 혹은 마찬가지로 원을 만들어서, 천천히 걷는다. 맥락과 배경,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설을 달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 보는 건 그게 전부이다. 차이밍량은 2013년 < 떠돌이 개 >를 찍은 다음 더 이상 극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언젠가부터 점점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극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들이 희박해져 갔다. 그는 < 안녕, 용문객잔 >(2003)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이미 모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행자> 연작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시작되었다. 2011년 타이베이 국립극장에서 300석 규모의 무대에서의 공연을 제안받았다. 세 명의 배우를 무대에 불러 각자의 모노드라마를 올릴 계획이었다. 세 명은 양구이메이, 루이징, 그리고 리캉성이었다. 리캉성에게는 일인삼역을 부탁했는데, 리캉성 본인과, 차이밍량의 아버지, 그리고 현장(玄奘)법사였다. 현장법사는 당나라 시대의 승려이다. 불교 교리를 연구하려고 했지만, 그때 중국에는 불교 경전이 없었다. 그래서 경전을 구하기 위해 천축국(지금의 인도)으로 길을 떠났다. 627년의 일이다. 둔황을 거쳐 천축국에서 불경을 얻은 다음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645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그 여정을 명나라 시대에 신괴소설(神怪小說)로 쓴 오승은 작가의 『서유기』이다. 삼장법사와 세 명의 제자,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는 온갖 요괴와 난관을 헤쳐 나가는 모험극. 하지만 무대에서 리캉성은 무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사각형으로 된 무대 끝 선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차이밍량은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무대에서 한 번 공연한 다음에 사라져 버리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걸 기록하고 싶어졌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옮기겠다. <행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모래>(2018)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하지만 무대에서 이미 한 것을 카메라 앞에서 반복하지 않았다. 차이밍량은 리캉성에게 붉은 가사(袈裟)를 입히고 길거리로 데려 나갔다. <무색>(2012)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행자>는 2012년 타이베이의 야시장(夜市場)에서 걸었다. 아주 느리게 걸었다. 이 해에 세 편의 <행자>를 더 찍었다. 처음에는 상영시간이 짧았지만, 점점 더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 번째 <행자> 연작인 <모래>(2018)에서 처음으로 1시간 상영시간을 넘어섰다. 아무 사건도 없고, 아무 이야기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대사도 없다. 리캉성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언제나처럼 붉은 가사를 입고 한 손으로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고 다른 손을 내린 채 맨발로 몹시 천천히, 아주 느리게, 마치 멈춘 것 같은 속도로 걷는다. 하지만 길거리로 나가자 구체적인 문제와 만나야만 했다. 기후의 가혹한 조건. 환경이 요구하는 한계. 한여름 뜨거운 햇빛으로 달궈지다시피 한 말레이시아 쿠칭의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걸었고(다섯 번째 <행자>인 <물 위 걷기>) 추운 한겨울 밤에도 도쿄의 길거리도 맨발로 걸었다(여섯 번째 <행자>인 < 무무면(無無眠, No No Sleep) >). 그래서 차이밍량은 모든 테이크를 단 한 번만 찍었고, 리캉성은 같은 장소에서 두 번 걷지 않았다. <행자>는 정신적인 여정이지만 육체적인 기록이다. < 곳 >(2022), < 무소주 >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열 번째 <행자>인 < 무소주(無所住, Abiding Nowhere) >(2024)에서 리캉성은 미국 워싱턴 DC를 걷는다. 아홉 번째 <행자>인 <곳(何處, Where)>(2022)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농 홍앙시가 등장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각자의 일을 각자 한다. 부사(副詞)로서의 각자(各自). 서로 따로따로. 어떤 일? 리캉성은 쉬지 않고 걷고, 아농은 외출하고 돌아와서 면을 끓인 다음 먹는다. 그 둘은 무슨 사이일까. 전주에서 만난 차이밍량은 내게 비밀을 알려주었다.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차이밍량 <행자> 전작 회고전을 했고, 차이밍량은 전주에 방문했다. 이때 긴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언지무(言之無)―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나는 이를 추구한다”, 《필로》 38호, 2024 May_June.) “<행자> 연작 일부분은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 예를 들면 내가 어릴 적에 읽은 『서유기』에 나오는 요괴 같은 개념들을 몰래 넣기도 합니다. 당신에게 알려줄 수는 있지만, 관객들에게 내 생각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한 건 <행자> 연작을 찍을 때는 어떤 방법을 통해 표현할지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파리에서 찍은 <곳> 속의 아농은 거미 요괴를 닮았습니다. 그가 리캉성, 그러니까 행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요괴를 닮았습니다.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차이밍량은 거기까지만 비밀을 알려주었다. <무소주>에서 아농이 요괴인지 그렇다면 어떤 요괴인지, 거기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무소주>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무소주>의 마지막 장면에서 석양이 저물어가는 물가를 리캉성이 걷는다. 그때 해가 저물어가면서 물 위로 반사광이 피어오른다. 구태여 비유를 빌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바세계(娑婆世界)를 건너서 극락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때 노래가 흐른다. ‘了悟心性究竟之上師祈請文’. 문자 그대로 옮기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스승들의 기도’이다. 이 노래가 들릴 때 리캉성은 마치 긴 여정을 마치는 것만 같다. 차이밍량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이 열 번째 <행자>가 연작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추신 _ 전주영화제에서 차이밍량에게 열한 번째 <행자>를 제안했고, 차이밍량은 다음 <행자>를 전주에서 찍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이것이 새로운 <행자> 연작의 첫 번째 영화가 될지, 아니면 열한 번째 <행자>일지, 그도 아니면 번외편이 될지, 또는 에필로그가 될지, 아무것도 정해진 바 없다고 했다. 나는 두근거리면서 기다리는 중이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영화박물관 교육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과제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의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영화에 관해서는 망설임이 더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는 남에게 지적받을 것도 없이 바로 나 스스로 순수한 영화인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TV 프로그램의 AD와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시절을 거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본인의 영화 언어가 텔레비전 방언이 밴 변칙적인 언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스스로를 ‘순수한’ 영화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2018년 5월, 그는 <어느 가족>(2018)으로 제 71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영화제에서 전 세계의 영화인들에게 가족 영화의 대가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 언어의 순도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그가 전하는 밀도 높은 감정일 것이다. 이별 후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이야기(<환상의 빛>), 뒤바뀐 가족에 대한 이야기(<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가 다른 가족의 이야기(<바닷마을 다이어리>), 헤어진 가족의 이야기(<태풍이 지나가고>) 등 줄곧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영화 속에 담아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에서도 다시 한번 가족의 의미를 재정의한다. 도둑질과 납치 <어느 가족>의 원제는 '만비키 가족'으로, 해석하면 '좀도둑 가족'이라는 뜻이다. 가르칠 것이 도둑질밖에 없다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세탁 업체에서 일하며 주머니 속 물품들을 빼돌리는 노부요(안도 사쿠라) 부부는 성매매 업소에서 여동생의 이름으로 돈을 버는 가출 청소년 아키(마츠오카 마유), 열 살 정도 되어 보이지만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는 쇼타(죠 카이리), 죽은 남편 덕분에 연금을 받는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와 함께 살아간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좁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가족’은 하츠에의 연금과 상습적인 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간다. 쇼타는 문득 노부요에게 질문을 던진다. “물건 훔치는 건 나쁜 일이야?” 잠시 고민하던 노부요는 쇼타에게 되묻는다. “아빠(오사무)는 뭐라고 했어?” 쇼타는 답한다. “가게에 진열된 물건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래.” 한편, 시간이 흘러 취조를 당하는 노부요는 하츠에를 땅에 묻은 사실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버린 게 아니라 주운 겁니다.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웠습니다.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어쩌면 정말 좀도둑 가족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주인 없는 것을 가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다툼을 피해 밖으로 나와 있던 5살 유리(사사키 미유)는 방치된 아이였고, 이 가족은 그런 유리를 품었을 뿐이니 말이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뭉쳐 서로를 보듬어주는 가족이 되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물건을 가지고서 겨우 겨우, 그렇지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게가 안 망할 정도로만, 사회에 커다란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만 살아가려 했는데 세상은 그것조차 내버려두지 않는다. 상처를 알아봐주는 존재 “팔 좀 보자꾸나. 여긴 왜 이러니?” 유리를 처음 만난 날, 하츠에는 유독 말라 있는 유리를 걱정하며 온몸에 난 상처를 살핀다. 상처에 꼼꼼하게 약을 바르는 하츠에의 행동은 애정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이다. 무심해 보이던 쇼타 또한 유리의 상처를 발견한다. “그 상처 왜 났어?” “넘어졌어.” “그거 화상자국이잖아.” 쇼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유리에게 “나한테 애써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유리의 상처는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제껏 겪은 내면의 상처까지 포함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하츠에와 쇼타의 관심 덕분에 유리는 신체의 상처와 함께 마음의 상처도 거의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치유 받는 입장에 처해 있던 유리는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유리는 샤워하는 노부요의 팔을 보고 묻는다. “거기 왜 그랬어?”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팔을 내밀며 자신에게도 같은 위치에 상처가 있음을 보여준다. 얼굴이나 성격은 달라도 흉터의 모양이 꼭 닮은 둘은 정말이지 ‘모녀’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유리가 노부요의 팔을 쓰다듬는 이 장면은 결이 비슷한 단편영화 <손님>(2011)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손님>은 한국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로도 불리는 윤가은 감독의 초기작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손님>의 주인공 자경(정연주)은 잔뜩 화가 난 채로 아빠의 불륜녀가 살고 있는 집에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에는 죄 없는 어린 남매만이 있을 뿐이다. 남매 중 동생인 기림(송예림)은 이마에 밴드를 붙여주는 자경의 눈썹에 흉터가 있음을 발견한다. “언니 왜 그래. 아파?” 밴드를 붙이는 자경과 눈썹의 흉터를 만지작거리는 기림은 오늘 처음 만났지만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손님>과 <어느 가족>에서 ‘상처를 알아보는’ 행위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영화의 후반부,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유리는 친엄마의 상처를 발견한다. 유리가 상처를 만지자 친엄마는 “만지지 말랬잖아.”라며 짜증 섞인 말을 내뱉는다. 친엄마와 노부요의 차이는 여기에서 나타난다. 만지면 아플 정도의, 그러니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아이의 위로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물론 아이의 상처 또한 보듬어주지 못한다는 것. 홀로서기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각자 다른 프레임 속에서 취조 당하는 이 영화의 후반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작 <원더풀 라이프>(1998)의 장면과도 닮아있다. 화면을 꽉 채우던 가족들은 온데간데없이, ‘혼자’가 된 사람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족의 분리를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는 면회 씬에서도 적확하게 드러난다. 투명 유리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쇼타와 노부요는 사실상 같은 장소에 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들을 철저하게 떼어놓는다. 동그란 대화 구멍의 은색 테두리라는 또 하나의 프레임을 만들고 노부요의 얼굴을 가두어버린다.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거 아닌가요?’라는 쇼타의 질문은 이제껏 쇼타의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 말해주고 있다. 양쪽 손끝을 맞대고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주먹을 쥐어 얼굴에 콩. 훔친 물건을 숨기던 파란 가방 대신 책이 들어 있는 새 가방을 멘 쇼타는 이제 학교에 다닌다. 오사무 또한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라고 말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영화 초반부의 쇼타는 유리에게 밀개떡을 사준다. 천국에 있는 유리 할머니의 존재를 알고 “그러면 이제 잊도록 해.”라고 말한다. 이제는 쇼타와 유리가 노부요와 오사무, 그리고 야키와 하츠에를 잊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 버스 창문 너머의 오사무가 사라지고 나서야 마침내 ‘아빠’라는 말을 내뱉는 쇼타, 쇼타네 가족들과 부르던 노래를 아파트 복도에서 홀로 부르는 유리. 이름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름이나 호칭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 가족들은 서로가 함께였던 순간들을 쉽게 잊지 못할 듯하다. 사실 <어느 가족>을 따뜻한 영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마냥 슬프고 비극적인 영화로 해석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보통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가족은 마음뿐만 아니라 돈 문제로도 얽혀있는 보통 가족이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서로를 ‘선택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제는 홀로 서야 할 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비혈연 가족의 이야기가 아닌 모여 있는 가족과 흩어진 가족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