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화
- 감독
- 권예하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김가람, 김민채, 석류민, 김윤서, 이진숙, 권요셉, 전효정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대일본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 조선권번기생 오은희 한성권번기생 최옥진 종로권번기생 박금도 빠-「멕시코」 여급 김은희 영화여우 오도실 동양극장여우 최선화 경무국장게 보내는 아등의 서 삼교경무국장 각하여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줍시사고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하략)” 1)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며 경무국장에게 편지를 보낸 장안의 내로라하는 문화계 인물 중에는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卜惠淑(馬利),1904~1982)’도 있었다. 한국의 대중문화, 연예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예의 복혜숙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연극, 영화, 방송에서의 연기 생활은 물론 가수와 성우 활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연예사의 곳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빼놓을 분야는 없기 때문이다. 연극 연기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마호정, 이월화에 이은 세 번째 여성 영화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영화계를 점령했던 예쁘장하고 다소곳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성 배우와는 거리가 멀었던, 배우 복혜숙은 초창기 조선영화에서 담대하고 현대적인 역할을 맡아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복혜숙은 한국 대중연예사에 살아있는 성좌로, 원로 여성영화인으로 선구적인 역할을 해내며 60여년의 연기생활을 이어갔다. (사진1) 왼쪽부터 배우 전계현, 배우 복혜숙, 홍은원 감독 (사진2) 배우 최은희(가운데)와 함께 한 노년의 복혜숙 (오른쪽) 충청남도 대천에서 태어난 복혜숙은 서학을 공부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버지와 담대하고 영민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에게 한글은 물론 한학도 배워 당시 배우로서는 보기 드문 학식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니며 배운 수예에 흥미를 느껴 수예 선생이 될 요량으로,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갔다. 정작 일본에서는 영화, 연극, 가부키에 마음을 빼앗겼다. 특히 <충신장 忠臣藏>에 감동을 받아, 그녀는 연기자가 될 생각에 수예학교를 나와 시와모리 모리노무용소에 입학했다. 하지만 딸을 찾아 나선 일본까지 건너온 아버지는 복혜숙을 자신이 관여하던 강원도 금화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만들어 버렸다. 1920년,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상경한 그녀는 단성사의 인기 변사 김덕경의 소개로 김도산을 알게 되어 신극좌에 입단했다. 이듬해 복혜숙은 <오! 천명>으로 첫무대에 서게 되었다. 복혜숙은 극단이 지방 공연을 다닐 때면 악대를 앞세우고 공연 홍보를 위한 거리행진(街廻り)을 도맡았다. 또 일본에서 여러 번 관람하여 대사를 기억하고 있던 <대위의 딸 大尉の娘>을 각색한 <누교 淚橋>를 직접 쓰고 주연까지 맡아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사진3) 젊은 시절의 복혜숙 극단생활을 이어나가면서도 1925년에 복혜숙은 연기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현철이 세운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했다. 비슷한 시기 극단 토월회에도 입단했다. 토월회의 인기 배우 이월화를 대체할 배우로 복혜숙이 등장했던 것이다. 복혜숙은 토월회가 공연한 <춘향전>의 ‘춘향’ 역으로, <카쥬-샤>의 ‘카쥬-샤’ 역으로 이월화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됐다. 2) 그 뒤에는 조선극우회와 중앙무대로 옮겨 무대에 섰다. 무대에서 인기를 얻은 그녀는 1926년부터는 최초의 방송국 경성방송국에서 시험용으로 내보낸 첫 방송극 <새벽종>(1926)에도 성우로 출연했다. 3) 또 복음성가를 잘 부르던 복혜숙이 음반도 냈다. 영화대본을 직접 연기하듯 읽어 녹음하는 영화극 음반인 <장한몽>(1929)이 그 시작이었다. 이어서 <쌍옥루>, <부활>, 그녀가 출연한 <낙화유수>에서 주인공의 비련의 운명을 담은 주제곡 ‘강남 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강남달>을 선보였다. 그 후로도 <숙영낭자전>, <심청전>, <춘희> 등의 수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곧 1930년 <애(愛)의 광(光)>을 발표하고는 장안 최고의 재즈가수로 불리기도 했다. 4)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다재다능한, 명실공이 그녀는 ‘만능 탤런트’였다. 물론 그녀가 이렇듯 많은 재능을 발휘하게 된 데에는 한국 대중문화사 초창기의 한계적 특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중문화에 투신했던 인원이 적기도 했거니와 연극배우, 영화배우, 성우나 가수 등의 역할 분할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복혜숙은 한국의 개척기 대중문화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쌓은 선구자이자 연예계의 지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주요 활동 영역은 영화였다. (사진4) 영화 <농중조>(이규설, 1926)의 현장. 복혜숙은 아버지의 엄한 감시 때문에 새장 속의 새처럼 집안에 갇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여학생 화숙을 연기했다. 연극계에서는 이미 장안에 이름이 났던 복혜숙은 1923년 영화에도 출연을 시작한다. 첫 출연은 마호정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계몽을 목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윤백남이 연출을 맡은 위생 영화 <방역 防疫>이었다. 5) 출연료 2원을 받은 영화에서 그녀는 길거리에서 파는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눕는 주인의 딸 역할을 했다. 곧 극영화에도 출연하는데, 첫 출연작은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 제국키네마의 <농중조 籠の鳥>(松本英一, 1924)를 번안한 이규설의 <농중조 籠中鳥, 새장 속의 새>(1926)였다. 유교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에서 젊은이들의 자유연애를 다루어 당시로서는 퍽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사랑을 쫓는 신여성 화숙으로 분한 복혜숙은 다리를 노출하기도 하고 안식(이규설)과 손을 잡는 러브신이 있어 인구에 회자되었다. 통속 신파 번역극이라는 비판 속에도, 남녀 학생들에게는 큰 환영을 받았다. 6) (사진5) <낙화유수>(이구영, 1927)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복혜숙은 주인공 기생 역할을 맡았다. (사진6) <낙화유수>(이구영, 1927)에 참여한 스태프들 이듬해 복혜숙은 조선배우학교 시절 선생님이던 이구영이 연출하는 〈낙화유수〉(1927)를 찍었다. 배우학교의 동기생 이원용이 남자 주인공이었다. 이번에는 기생 역할이었다. 당시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기구하게 기생이 된 여인과 젊은 화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린 이 신파극은 개봉 당시 장안의 기생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라며 치맛자락을 휘감고 구경들을 와 더 화제가 되었다. 7) 실연의 마음을 가누지 못해 여인이 투신하는 장면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는데, 장마철에 한강에 자살하기 위해 뛰어드는 장면을 회고하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오고가는 행인들이 여자가 자살한다고 구경이 났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대담한 연기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당대의 다른 여배우와는 달랐다. 그녀는 연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배웠다. 서예를 배우는가 하면 창과 러시아 댄스, 유도는 물론 자동차 운전을 배우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8) 그렇게 배운 솜씨들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사진7) 감독이자 배우 이규설. 복혜숙은 이규설의 작품 <농중조>(1926), <홍련비련>(1927), <순정은 신과 같다>(1928)에서 주연으로 열연했다. 그 뒤 ‘현대학생극’으로 불리던 〈홍련비련〉(이규설, 1927) 9) 에서 복혜숙은 지극히 우정이 깊은 두 대학생 김일과 현진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배우 편실 역할을 했다. 이어 이규설 감독과의 세 번째 작업은 <순정은 신과 같다>(1928)였다. 둘은 지주의 아들 이규설과 소작인의 딸 복혜숙로 만나 부부로 연기했다. 같은 해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에서 복혜숙은 어부의 딸 역을 맡아 사랑에 빠지는 연기를 선보였고, 만주 현지 촬영으로 이월화와 함께 출연했던 〈지나(支那)가의 비밀(일명 흑진주)〉(유장안, 1928)에서는 중국인 거리에 인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을 맡았다. 주연으로 활동하던 이 시절 ‘얼굴이 땡그랗’던 복혜숙은 쾌활하고 발랄한 왈가닥 ‘잇 걸(It girl)’로 불린 클라라 보(Clara Bow)를 닮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10) 해방 이전은 배우 복혜숙의 전성기였다. (사진8)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의 한 장면, 복혜숙은 사랑에 빠지는 어부의 딸 역을 맡았다. (사진9) <지나 가의 비밀>(유장안, 1928) 신문 광고. 만주 현지 촬영을 감행한 이 영화에서 복혜숙은 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이었다. 《동아일보》 1928년 5월 25일자 6면 하지만 배우 활동만으로 생활을 꾸려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1928년부터 8년간 카페 비너스를 운영했고, 이때 결혼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두 젊은이들의 사랑의 도피를 다룬 영화 박기채의 <춘풍>(1935)에 출연으로 영화계에 복귀했다. 안종화의 <역습>(1936)에는 살인자의 아내 역으로 출연하면서 카페 비너스를 제작 사무실로 제공하면서 실질적인 제작에 참여했다.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는 배우가 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정희와 함께 방을 쓰는 음반회사 직원으로 등장했다. 조선인들의 영화 제작이 힘들어진 식민지 말기에는 <감격의 일기 感激の日記>(신경균, 1943), <그대와 나 君と僕>(허영, 1944)를 비롯한 다수의 어용영화에도 출연했다. (사진10) <역습>(안종화, 1936)의 한 장면 (사진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 음반회사 직원 모경숙 역의 복혜숙 1920년대 말 자유분방한 신여성의 아이콘이던 복혜숙이 연기를 전환하게 된 계기는 최인규의 <수업료>(1940)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동시녹음이 진행된 이 영화에서 30대 복혜숙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자식 내외가 행상을 하러 도시로 나가자 소학교에 다니는 손자 영달을 돌보기 위해 넝마를 주우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할머니 역을 맡았다. 당시 그녀 나이 37세였다. 이 영화 이후 그녀는 노역을 주로 맡았다. 인자한 어머니,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상인, 유난스런 할머니 같은, 그녀는 연기력을 요구하는 조역으로 이후 300여 편의 영화에 얼굴을 비쳤다. 또 텔레비전 드라마 <아내의 얼굴>(KBS, 1962), <아씨>(TBC, 1970), <옛날 나 어릴 적에>(MBC 신년특집, 1981) 같은 작품에도 종종 출연하였다. (사진12) <수업료>(최인규, 1940)에서 복혜숙은 병상에 누워서도 어떻게든 손자 영달이의 수업료를 마련해보려는 애달픈 할머니를 연기했다. 해방 후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재와 필름이 부족해 영화제작이 열악했던 시기,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계에서 그녀 역시 주조연을 마다않고 성실히 한몫을 했다.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에 간호사 혜자(황려희)의 어머니를,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에서는 똘똘이의 어머니를 맡았다. 또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여명〉(안진상, 1948), 〈수우〉(안종화, 1948),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도 작은 역이나마 출연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에 입대해 공연을 하며 전장을 누볐고, 잠시 머물렀던 마산에서 촬영한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에서는 전선에서 실명한 아들(최현)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주는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3) <여명〉(안진상, 1948) 신문광고 (사진14)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 신문광고 (사진15)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광고. 아들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 주는 어머니 복혜숙이 보인다. 전후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한국영화계에서 복혜숙은 전성기를 넘은 나이에도 활동을 이어나가는 거의 최초의 여성 배우였다. 더 이상 주연을 할 만한 시나리오가 없었지만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 <아리랑>(김소동, 1957), <조춘>(유두연, 1959), <삼등과장>(이봉래, 1961), <청춘교실>(김수용, 1963), <여판사>(홍은원, 1963), 그리고 미공보원(USIS-Korea)이 제작한 문화영화 <황토길 Litany of hope>(양승룡, 1962)에서 어머니와 할머니 역할을 전담하면서 꾸준히 식지 않은 연기력과 열정 보여주었다. (사진16)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에서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중학교 교사 명호(황해)의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7) <삼등과장>(이봉래, 1961) 구소장(구봉서)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사진18) <황토길>(양승룡, 1962)에서 한센 병을 앓고 있는 시인 한하운(김웅)의 어머니로 출연한 복혜숙 (사진19) <청춘교실>(김수용, 1963)에서는 손녀 셋을 거느린 왈가닥 할머니로 등장했다. (사진20) <여판사>(홍은원, 1963)에서는 치매를 앓고 있어 우연히 독을 마시게 되는 시할머니 역할을 했다. 김수용 감독이 배우 복혜숙이 자신의 영화에서 열연했던 강렬한 장면을 회고한 적이 있다. 해방촌 빈민들의 군상을 그린 김영수의 희곡을 영화화한 <혈맥>(1963)에서 김덕삼(김승호)은 새로 얻은 아내가 자신의 돈을 훔쳐 달아나자, 중신을 선 대폿집 주인(복혜숙)에게 무작정 따지러 간다. 아내를 찾아내라는 어깃장을 놓는 덕삼과 이 어이없는 주장에 맞서는 꼿꼿이 맞서는 대폿집 주인 아낙의 대단한 육탄전이 펼쳐진다. 이 장면에서 복혜숙은 담배를 입에 물고 김승호와 몸싸움을 하면서 거칠게 대거리를 하는데, 그녀는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생활 전선에 나서야했던 강단 있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몸소 보여준다. 김수용의 또 다른 영화 <사랑의 조건>(1979)에서 일흔이 넘은 복혜숙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 필사의 힘으로 한 겨울 눈 내리는 대관령을 넘는 할머니로 특별출연을 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모진 날씨 따위에는 아랑곳없던, 여전히 두 눈에서는 광채를 내뿜으며 서슬 퍼런 연기를 해내던 노년의 복혜숙을 잊지 못한다. 12) (사진21) <혈맥>(김수용, 1963) 중 김덕삼(김승호)과 대폿집 주인(복혜숙)의 육탄전 복혜숙은 평생을 배우로 무대 위와 또 카메라 앞에 있었다. ‘남들이 안하던 때에 배우로 입문해 연예계의 여러 방면에서 초창기 증인으로 또 산 역사 노릇’을 했다. 다방면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여성으로서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 ‘복혜숙 여사의 연기생활 40주년 기념하는 스타의 밤’에는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기꺼이 함께 해줄 만큼 평생 한국영화를 지켜온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평가를 받았다. 또 ‘뭐든 뒤로 미루지 못하는 성격 탓’에, 또 연예계를 통찰하는 식견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로 영화인들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13) 18세부터 연기해 온 그녀의 일대기가 특별드라마 <얼굴>(1981, KBS)로 만들어질 만큼 그녀의 생 그 자체가 한국 대중연예사이기도 했다. (사진22) <대한뉴스>(제 387호, 1962) 연예계 소식 중. 962년 10월 12일부터 2일간 시민회관에서 복혜숙의 연기생활 40주년을 기념하는 스타의 밤‘ 행사가 열렸다. 당시 이원우 공보부 장관이 복혜숙에게 표창을 수여하고 있다. 스크린 밖에서도 그녀는 영화계의 원로로서 업계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발 벗고 나섰다. 1954년 한국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선봉에 섰고, 한국영화협회가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에도 앞장 서 힘을 보탰다. 1955년 대한영화배우협회를 창설해 10년간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1962년부터 한국영화인협의의 연기분과 위원장으로 배우들의 뒷바라지에 힘을 쏟았다. 그녀의 은막 인생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영화는 진용(박재호)의 할머니 역을 맡은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였다. 하지만 78세의 그녀는 아직도 ‘못 다한 일 많아 은퇴할 생각이 없’ 14) 었다. (사진23)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 포스터. ‘윤봉춘 복혜숙 지휘’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24)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에서의 복혜숙 1)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삼천리》 1937년 1월호 9권 1호, 162~166쪽. 2) “명우와 무대(7), 복혜숙 양의 『카쥬-샤』, 부활의 여주인공으로, 토월회 무대에”, 《삼천리》 제5권 4호, 1933년 4월, 11쪽. 4) 복혜숙의 생애는 다음 자료들을 참고해 요약 기술하였다. 『여성실화: 빛나는 성좌 복혜숙』, 명서원, 1976: 이영일, 「스크린을 빛낸 예도 60년-복혜숙」, 『한국영화인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황문평, 「여성 연예계의 선구자 복혜숙」, 『삶의 발자국』(1), 선, 1988; 조영만, 「여배우 복혜숙의 활약」, 『30년대 문화예술인들: 격동기의 문화계 비화』, 범양사, 1988;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복혜숙·이구영 편』, 도서출판 소도, 2003, 이순진, 「복혜숙」, 이승희 외 지음,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도서출판 소도, 2006; .한상언, “한상언의 <한국영화스타>3 :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한국영화의 어머니 복혜숙”, 오마이스타, 2004년 10월 13일,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214631 4) 이동순,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한국 최초 재즈가수 복혜숙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조선Pub, 2013년 10월 18일, 조선Pub 홈페이지 http://pub.chosun.com 5)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복혜숙 편」, 월간 《영화》 1974년 1월호, 53쪽;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3> 영화계 데뷔”, 《동아일보》 1981년 5월 6일 7면. 6) “영화평 농중조 조선키네마 작품”, 《동아일보》 1926년 6월 27일 5면. 7) 안종화, 앞의 책, 157쪽; 김남석, 「배우 복혜숙 연구」, 『인문과학연구』 13,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123~125쪽. 8)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1>”, 《동아일보》 1981년 4월 29일 7면. 9) KMDb에는 이필우가 감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문지상에는 이규설이 감독으로 명시되어 있다. “홍련비련”, 《동아일보》 1927년 2월 5일 5면. 10)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앞의 책, 144쪽. 11)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32세 때부터 노인역만”, 월간 《영화》 1974년 3월호, 68쪽. 12) 김수용,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탄 복혜숙: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2014년 2월 26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http://siwff.tistory.com/503 13)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7> 첫 TV드라마”, 《동아일보》 1981년 5월 26일 7면. 14)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100> 복혜숙 연예생활 60년”, 《동아일보》 1981년 5월 30일 12면.
< 개의 역사 >( 김보람 )는 2017년 다수의 국내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감독이 거주하는 서울 후암동 일대의 풍경 및 주민들과‘백구’라는 이름의 늙은 개, 감독 자신의 일상적 삶과 문제들, 감독의 새로운 주거지가 된 홍은동 주민들 등을 중심으로 촬영한 사적 다큐다. 관련하여 좋은 글들이 이미 있다. 개인적으로는 차한비, 설경숙, 변성찬이 쓴 세 편의 글을 읽었는데, 경청하고 공감할 부분이 많았다. 이들의 글보다 <개의 역사>에 관하여 더 사려 깊게 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개의 역사>를 인상 깊게 관람한 이들과 나의 경험을 짧게나마 나누는 동시에 약간의 다른 의견을 보태려는 마음 정도다. 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영화의 초반부에 감독이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수업 내용에서 일찌감치 드러난다. 우리의 삶 안에는 공공연하게 중요한 것으로 지정되는 몇 개의 사건과 사물들 외에도 눈을 돌려야 할 다수의 존재들이 많다는 것이다. 가령 동네의 늙은 개 백구가 그러한 존재일 것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감독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이 점을 시적으로 요약해 낸다. “쫓겨나고 밀려나는 것들, 신경 쓰지 못했을 때 사라져 버린 것들, 다시는 찾지 못할 그리운 것들. 이름 없는 것들의 찾지 못한 이름들, 사라져가는 것들의 지워져 가는 시간들.” 하지만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시적 표현이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동시에, 얼마간의 억측을 동원해서라도 그 안에 자리 잡은 민얼굴 그러니까 어쩌면 감독 스스로 드러내기를 주저한 것인지도 모를 적나라한 사적 항목들을 추론해보고 싶어진다. 첫째는 외로움이다. 영화 속에서 이 낱말은 감독의 가족사를 말할 때 한 번 등장할 뿐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힘이 세며 영화 전체의 분위기에 은연중 배어 있다. 외로움이 이 영화의 기초적인 감정이라고 말하면 이 영화는 유치하거나 나약해 보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 외로움의 정서가 주변의 무명한 것들에 관한 호기심을 자극한 동인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외로움은 영화 만들기라는 실천적 차원을 자극한 생산적 외로움이다. 둘째는 가난함이다. 이 가난함은 두 층위로 다시 나뉜다. 먼저 물질적 가난함이다. 감독은 영화 안에서만 두 번의 이사를 한다. 옥탑방에서 옥탑방으로 건너가는 열네 번째, 열다섯 번째 이사다. 부유하다면 그렇게 이사를 다녀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며 그걸 강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 개의 역사 >는 전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에의 비판성을 담고 있는 사회학적 영화라기보다는 자신의 물질적 가난함을 쫓겨나고 밀려나는 것들 중 하나의 수세적 예제로 인식하여 이 영화의 환경으로 포함시킨 뒤에 그걸 영화 속 주변의 환경들과 접속하고 연계해가며 만든 영화다. 이 물질적 가난함이라는 측면에만 한정한다면, 2017년에 나온 영화들 중 <개의 역사>와 유사한 동기를 보유한 영화는 < 소공녀 >( 전고운 )다. 두 영화는 양식적 범주도 다르고, 성찰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유사한 물질적 환경에 처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가난함이 있다면, 그건 관계의 가난함이다. 물론 이 관계의 가난함의 다른 이름은 앞서 지적한 외로움이므로 더 첨언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니 두 층위, 물질적 가난함과 관계의 가난함 모두 영화 만들기라는 생산성에 일조한다. 셋째는 불가피함이다. 부모의 이혼, 백구의 죽음, 오래 키워온 개 못난이의 죽음, 애인과의 연애사적 역경 등은 감독에게 불가피하다. 부모의 이혼은 설명되진 않지만 피할 수 없었고, 죽음은 사람이나 개나 그 종의 구분을 떠나 피할 수 없다. 이유를 알 순 없으나 전화상으로만 등장하는 애인과의 연애 혹은 동거 혹은 결혼에의 실패라는 불행도 감독에게는 불가피한 역경인 것으로 묘사된다. 이 비운의 불가피함도 감독에게는 카메라를 들게 하는 역설적인 생산적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일부러 같은 말을 반복했다. 외로움, 가난함, 불가피함이 오히려 < 개의 역사 >의 생산적 관심을 촉구한 것이라고 거듭 썼다. 감독이 그 정서적, 물질적, 운명적 환경에 처한 자신을 자기 위로하거나 자기비하하며 지쳐가는 대신 영화 만들기라는 구체적 활동으로 관찰하고 성찰해 본 것임을 가리키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감독의 말 중에 가장 감동적인 것은 다듬고 세공한 끝에 찾아낸, 우리가 인용하여 옮겨 온, 저 시적 표현들이 아니다. 그 표현들은 오히려 너무 수사적으로 정식화되고 공론화되어 있는 느낌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중요하게 다룬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다름 아니라 이 짧은 말, “삶을 사랑하는 법을 찾고 싶었다”이다. 그리고 이 문장에 생략되어 있으므로 추가되어야 할 말은 다시 두 가지다. 하나는‘외로움과 가난함과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라는 조건절이고 또 하나는‘나는’이라는 주어다. 말뿐이지 않다. <개의 역사>는 삶을 사랑하는 법, 이라고 할 때의 그 ‘법’, 즉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고 싶은 자의 탐색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가능한 한 삶을 사랑 하고 싶어 할 것이다. 따라서 일반화에 가까운 이 소망의 피력만으로는 < 개의 역사 >의 특별함을 말할 수 없다. 때문에 관점을 옮겨, 이 영화가 삶을 사랑하는 법을 찾기 위해 시도하는, 아니 이 영화가 삶을 사랑하는 방법 그 자체인 그 탐색의 형식에 방점을 찍어야만 하겠다. 이 경우에 우리는 먼저 <개의 역사>가 어딘지 모르게 단번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해야만 한다. 복잡한 사건도 파악 불가능한 인물도 없는 이 영화는 그러나 결국 잘 잡히지 않는다. <개의 역사>는 떨어져서 보면 명료하고 싱거운 이야기인 것 같지만 들어가서 보면 애매한 경험이다. 화법의 문제가 우선 있다. 감독이 백구를 찍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암동의 주민 한 사람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감독에게 충고한다. 충고라기보다는 비난이다. 이 비난은 갑작스럽게 함부로 건네진 것이고 게다가 워낙 거센 강도여서 < 개의 역사 >를 인상 깊게 본 관객들 사이에서는 종종 못 잊을 대목으로 회자되는데, 사실 주목할 만한 것은 발언의 그 내용이나 수위 자체가 아니라 감독이 그 발언의 자리를 편집해내는 방식이다. 발언자의 목소리는 들려오지만 화면에는 목소리의 주인 대신 백구가 잡힌다. 감독은 생산적으로 살라는 비난의 말을 힘없이 오줌 누는 백구의 이미지 위에 겹쳐 편집한다. 발언자를 자기 영화의 화면에 담기 싫어 내린 판단일 수도 있다. 혹은 어떤 연유에서건 그를 카메라에 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효과는 분명하다. 생산적으로 살라는 비난의 말은 저 비생산적인 대상의 가장 비생산적인 행위와 겹쳐지며 괴이한 분위기 속에서 의미를 잃고 튕겨져 나간다. 발언자는 개를 찍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말이 흐를 때 그가 중요하지 않다고 지적한 그 대상이 무심하게 겹쳐지면서 오히려 이 위악적 논평의 권위는 은밀하게 추락하고 무화된다. 다만 그 발언자에게 반격하려는 공격성이 이 영화에는 없다. 기습해 온 저 말의 권력에 일직선으로 되받아치며 대항하는 대신, 영화는 그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 말의 핵심을 흩트리는 기술을 발휘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그 말이 미치려 했던 권능에서 결국 갈라져 나와 다른 영역에 닿게 된다. 이것은 < 개의 역사 >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된 화법의 일부 사례에 속한다. 그것을, 중첩-분산-수렴의 화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지속적으로 겹쳐 놓는 동시에(중첩) 가르고 흩트리는(분산) 과정을 거쳐 일부가 재차 돌아오거나 새롭게 형성되어 가는 것(수렴)을 가능케 하는 것이 <개의 역사>의 화법이다. <개의 역사>는 그렇게 지속적으로 들고 나며 중첩과 분산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수렴해 간다. 말과 시선, 사운드와 이미지, 주체와 대상, 원인과 결과, 위와 아래, 중심과 변두리, 안과 바깥을 바꿔서 옮겨 다니며 기존의 중심성을 붕괴시킨다. 그렇게 배열되어 가는 영화적 흐름의 과감함 혹은 섬세함으로 이 영화의 감동할 만한 정조가 형성된다. < 개의 역사 >의 들고 나는 이 중첩-분산-수렴의 화법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가 전제하는 시간의 혼재성 때문이기도 하다. <개의 역사>가 시간을 담지 하는 태도는 영화의 초반부에 놓인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압축된다. 영화는 대관령 슈퍼가 철거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뒤이어 카메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거리에서 언덕으로 오르는 중이다. 그 카메라의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대관령 슈퍼가 있던 자리, 백구네 집 등의 바깥 풍경이 언뜻 보인다. 하지만 보이기 시작한 그 풍경은 이제 보이지 않고 구성된다. 과거와 현재의 서로 다른 시간대에 찍힌 풍경들이 뒤섞여 편집된다. 백구는 그때 그 자리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 장면은 마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몇 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무작위의 상념 내지는 기억의 이미지인 것처럼 구성된다. 그 상념 내지는 기억의 장면 끝에는, 대관령 슈퍼 자리에 새로 생긴, 말끔하게 차려진 편의점을 보여주는 정면 쇼트가 놓여 있다. 그러니까 < 개의 역사 >는 사건의 발생 순서로 시간을 따지거나 느끼지 않는다. 그건 시간에 관한 일반론일 뿐, 이 영화의 것은 아니다. 물론 많은 영화가 시간을 재구성하지만 <개의 역사>는 시간의 재구성에 필요한 논리조차도 따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오히려 시간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고 오해시킨다. 아니 시간에 대한 현기증을 일으킨다고 표현해야 더 맞을 것인가. 영화는 크게 보면, 후암동에서 홍은동으로라는, 감독의 주거지 이전이라는 평범한 연속성을 전제하고는 있지만, 그 사이에는 실제 벌어진 사건의 순차나 재구성의 논리와 무관한 무언가의 흐름이 자주 출몰하게 된다. 이때 이것들이 따르는 바는 오직 한 가지다. 사건에 대한 감독의 감정적 연상의 순서와 중요도다. 처음부터 그러하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등장하는, 가령 이 영화의 중대한 사건들을 제시하는, 다음 네 개의 문장을 유심히 보자. “백구가 죽었다. 백구를 돌봐주던 대관령 슈퍼는 29년 만에 문을 닫았다. 백구가 살던 창고 옆 계단에 엘리베이터가 세워졌다”는 문장이 자막으로 제시된다. 감독의 일상생활이 잠시 흐른 뒤, “열세 번째 이사를 했다”는 감독 자신의 근황도 자막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네 개의 자막 사용법은 굉장히 의아하다. 왜 그런 것일까. 이 자막은 먼저 이런 사건의 순서로 이해될 것이다. 백구가 죽고 난 뒤, 대관령 슈퍼도 문을 닫고, 백구가 살던 창고 옆 계단에 엘리베이터가 세워졌으며, 그 음 감독은 열세 번째 이사를 한 것이라고. 하지만 영화를 보면, 그렇지 않다. 이 자막들은 실제 사건의 발생순서와 완전히 무관한 질서로 구성된다(이하 괄호 안의 숫자는 자막이 기술된 순서). 사건 발생 순서로 보면, “열세 번째 이사를 했다”(4)가 첫 번째인 것 같다. 맥락상 이때의 이사가 감독이 후암동으로 들어온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때 백구와 대관령 슈퍼는 이미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백구를 돌봐주던 대관령 슈퍼는 29년 만에 문을 닫았다”(2)와“백구가 살던 창고 옆 계단에 엘리베이터가 세워졌다(3)중 어느 것이 두 번째와 세 번째인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3). 하지만 적어도 이 두 사건은 백구의 죽음 이전에 존재했다. 슈퍼가 문 닫은 뒤에도 백구는 그 자리에 살고 있었으며, 영화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백구를 내려다보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백구는 얼마 뒤에 죽는다. 그러니“백구가 죽었다”(1)가 마지막이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한 논평을 접해보진 못했지만, 상상컨대 누군가는 단순한 실수라고 지적할 것이다. 혹은 누군가는 더 강도 높은 차원에서, 사건들을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문장구조로 기술하려다 생긴 왜곡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단순한 실수이건 지나친 왜곡이건 이것을 사실적 시간의 질서에 연연하지 않고 구속받지 않으려는 이 영화의 첫 번째 증상이자 중대한 대목으로 받아들인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연상적 배열의 핵은, 무엇보다 백구, 백구의 죽음이다. 이 영화는 거의 아무도 중요하다고 보지 않는 백구의 삶과 죽음에 관한 언급을 절대적으로 중요한 첫머리에 위치시킨 뒤 그 밖의 사건과 시간을 연상적으로 재배열 해 나간다. 그리고 그 재배열을 주관하는 것은 치밀한 논리가 아니라 어떤 직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많은 이미지들은 일차적으로 가공하며 시작한 그 자막의 주요 네 가지 사건들을, 다시 본격적으로 중첩, 분산, 수렴해나가며 만드는, 혼재된 시간화이자 연상화의 결과물일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정작 백구의 죽음과 매장의 장면은 간결하게 다섯 개의 쇼트로 처리한다. 반면에 백구의 빈집을 보여주며 생전에 백구의 하루 일과를 되돌아보는 장면은 세심하게 기술한다. 영화는 죽은 백구의 생전의 삶을 그 자리에서 회고하며 일종의 주술을 읊는다. 그러자 그즈음 새로운 백구가 출현한다. 대관령 슈퍼의 백구는 죽었지만 아직 이름 없는 또 다른 흰 개가 전철역 인근을 배회하고 다니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렇다면 그 개도 백구일 것이다. “촬영을 시작하자 백구가 돌아왔다. 백구는 사라지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고 감독은 말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감독 자신을 포함하여, 백구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어디에나 있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지켜온 거짓말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고 감독은 백구가 살던 그 계단 앞을 보여주며 영화의 후반부에 말했는데, 관객인 나는 < 개의 역사 >의 무엇이 나를 매혹한 것인가 영화가 끝난 뒤 잠시 생각했다. 주변의 낡은 것들, 힘없는 것들, 오래된 것들, 무명한 것들, 죽음에 가까운 것들을 둘러보는, 중첩-분산-수렴에 관하여, 시간의 혼재성에 관하여, 연상의 힘에 관하여 말했다. 이것들이 바로 <개의 역사>가 삶을 사랑하는 특별한 방법이다.
< 개의 역사 >에 나오는 개의 집을 본 적이 있다. 그 옆을 무심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엘리베이터도 매우 익숙하다. 뜬금없는 곳에 붙어 있던 ‘개조심’ 푯말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것도 같다. <개의 역사>는 나의 ‘갸우뚱’에 답을 줄 것 같은 제목으로, 내게 익숙한 공간을 보여주며, 내 눈길을 화면 속 디테일 하나하나에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감독은 학교 앞 아이들, 동네 할머니 등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무작정 개에 대한 같은 질문을 한다.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별로 유용하지 않아 보이는 인터뷰 대답들이 길게 이어지며 영화의 초점은 후암동 어느 건물 옥상에 살던 그 개, 백구의 역사로 좁혀지기보다 그곳을 뒤로 한 채 주변 모든 방향으로 배회하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마주한 사람들은 왜 하필 개를 찍는지 의아해하고 좀 더 ‘생산적’인 것을 하라고 직설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백구의 뒷조사를 가장하고 동네 사람들의 주위를 대하는 여러 시선을 보여주던 영화는 개의 죽음과 함께 가장을 멈추고 ‘생산적’이지 않은 주민들의 삶 속으로 훅하고 들어간다. 이혼녀 독거노인을 비롯해 영화가 소개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매우 낯익은 동시에 생소하다. 누구나 오가며 동네에서 마주칠 법한 사람들이라 낯익지만 ‘중요하지 않기에’ 궁금해한 적 없는 그들을 프레임 안에서 정면으로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생소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과 유사한 인물들을 본 적은 많다. 생소한 이유는 그들이 흔히 말하는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지 않고 정말 소소하게도 “새들이 날아왔네”, “옛날엔 사는 게 힘들었지”와 같은 말을 해 줄 뿐이어서일지 모른다. 그리고는 더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고 별 궁금증을 자아내지도 않은 채 화면에서 사라지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 개의 역사 >는 다수의 시선이 비껴가는 곳에 위치한 존재를 주인공의 자리에 앉혀 목소리를 내게 하는 대신 ‘주인공’과 ‘귀 기울일 만한 이야기’라는 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구성을 취한다. 영화 속 대상들 중 누구도 보편적 다수를 대유하는 이야기를 독점하지 않고 하나로는 뭔가 부족한 상태 그대로 존재하며 전체를 구성한다. 별 볼 일 없는 여러 대상 사이를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느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나머지는 소수가 아니라 사실 우리가 마주치는 거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중요하지 않은 거의 모든 것 중에는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중요한 것만 바라보지만 실은 별 볼 일 없는 우리 자신도 포함된다. 영화 속 별 볼 일 없는 인물들이 그 소외된 공동체 안에서도 배척받는 존재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감독은 별 볼일 없는 자신의 처지도 대상들 사이에 끼워 드러내는데, 영화 속 감독의 수줍은 존재 방식은 전략적 어눌함으로는 얻기 힘들었을 진정성을 전달하며 영화의 독특한 구성을 완성한다. 소소한 인물들에게 접근하는 감독의 태도는 시종일관 소심하기 그지없다. 동네 정자에 앉아 소일하는 할머니들 사이에서도 가장 작은 존재감을 지닌 할머니가 혼자 남을 때를 기다려 예의 그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있는데요...” 라는 불명확한 문장으로 말문을 여는 식이다. 감독은 영화 안에서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며 좁은 집 공간에서 빨래를 넌다. 거의 기억되지 않지만 일상의 속내가 응축된 행위인 빨래 널기를 보여주는 감독의 모습은 대상의 목소리를 어떻게 전달하고 해석할지 고민하는 조정자의 모습이 아니라 수많은 ‘기억되지 않는 것들’ 중 하나다. 이렇게 영화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카메라의 권위를 벗어놓는다. 영화의 제목이 ‘개의 이야기’가 아닌 ‘개의 역사’라는 점은 영화가 하고자 하는 작업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것만 기록하고 나머지 모든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지워버리는 것이 역사라면, 이 영화는 현실을 이루는 중요하지 않은 거의 모든 이야기에 역사라는 이름을 붙여 그 가치를 기억하려는 안간힘이다. 동네에 찾아오는 새들과 백구의 행동을 기억하는 동네 아주머니의 인터뷰가 얼마나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는지는 그 인터뷰가 한참 지나서야 깨닫게 된다. 중요하지 않아서 보고도 지나쳤지만 영화가 주인공으로 만들어 들려줄 개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있었던 나에게 세상을 채우는 별 볼 일 없는 것들의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보여준 주인공 없는 이 영화,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