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
- 감독
- 이선희
- 제작년도
- 2005
2003년 | KM컬쳐 감독, 각본: 김용화 | 제작: 박무승 | 촬영: 박현철 | 미술: 박일현 | 음악: 방준석 김덕윤 CAST 오상우: 이정재 | 오봉구: 이범수 | 정 반장: 이문식 | 허기태: 류승수 | 은하: 김준희 지금은 < 신과 함께 > 시리즈로 두 편의 ‘천만 영화’를 거느리게 된 김용화 감독의 시작은 16년 전의 < 오! 브라더스 >였습니다. 몇 번 말씀 드린 적이 있었지만, 2003년은 한국영화의 ‘은혜 받은 해’였죠. 신인급 감독들이 다양한 장르에서 상업적 성공과 함께 평단의 호평을 받았던, 한국영화의 다양성과 실험성이 정점에 올랐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오! 브라더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추석 시즌 개봉된 이 영화는 < 불어라 봄바람 > < 조폭 마누라 2 > 그리고 <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 >와 < 분노의 질주 2 > 등을 꺾고, 31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최종 승자가 되었죠. 이 영화의 현장 공개는 두 번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첫 번째는 2003년 5월, 오상우(이정재)가 배다른 형제인 오봉구(이범수)를 찾으러 간 장면이었죠. 봉구는 어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12살인, 조로증 환자입니다. 장소는 남양주에 있는 서종초등학교. 형을 따라 학교를 떠나야 하는 봉구의 모습이 조금은 슬퍼 보입니다. 1994년 < 젊은 남자 >( 배창호 )로 영화에 데뷔한 이정재는 10년차를 맞이해 <오! 브라더스>에 출연했고, 이 영화는 그때까지 그의 최고 흥행작이 됩니다. 이때 시작된 김용화 감독과의 인연은 <신과 함께> 시리즈로 이어졌고요. 이정재는 상우라는 캐릭터가 “사랑을 믿지 않는 남자”라고 말하는데요, 봉구를 통해 변하게 됩니다. “상우가 지닌 상처를 봉구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런 동질감을 느끼게 되면서 마음이 바뀌게 되고요.” 2003년 이범수는 < 싱글즈 >( 권칠인 )와 <오! 브라더스>가 모두 좋은 반응을 얻으며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오! 브라더스>는 힘든 영화였습니다. “부담이 컸어요. 아무리 시나리오가 뛰어나고 감독의 연출력이 좋아도, 내가 어린아이처럼 보이지 않으면 이 영화는 무의미했으니까요.” 그래서 초등학교 수업에 참여하고 같이 뛰어놀며 아이들의 모습을 관찰했다고 하네요. 한편 이범수는 김용화 감독의 중앙대학교 영화과 2년 선배로, 현장에서 맏형 역할을 했습니다. 김용화 감독에게 <오! 브라더스>의 시작은, 역시 두 형제의 이야기인 단편 < 자반 고등어 >(2002)였습니다. 김용화 감독은 상업영화로 진출하게 된다면 이 영화를 업그레이드 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때 < 잭 >(프랜시스 코폴라, 1996)을 보게 되면서 ‘조로증’이라는 모티브를 얻었다고 합니다. 두 영화의 차이가 있다면, <잭>은 인권에 대한 메시지가 강하다면 <오! 브라더스>는 형제애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죠. 이정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감독에 따라 다르지만 배우의 연기는 60퍼센트 정도만 보고 나머지는 앵글, 음악, 편집, 효과로 채우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김용화 감독님은 배우의 연기를 80퍼센트까지 보더라고요. 철저히 배우의 감정에 맡기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래서 시사회 앞두고, 제 연기가 어떻게 나왔을지 더 걱정됐어요.” 이날 촬영 분량은 없었지만, 상우의 동료 기태 역을 맡은 류승수가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쉬는 시간 빙과류로 초여름의 더위를 식히고 있는 이범수와 류승수의 모습입니다. <오! 브라더스>의 두 번째 현장 공개는 7월 양수리 종합촬영소에서 이뤄졌습니다. 흥신소 박 사장(박영규)와 상우 그리고 봉구의 신이었습니다. 박 사장은 상우에게 돈 받아오는 일을 시키지만 상우는 싫다고 하죠. 이때 갑자기 봉구가 등장하고, 박 사장은 봉구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합니다. “주먹을 불끈 쥐어 보는 게 어떨까?” ““탁자 위에 발을 올려놓는 건 어때?” 이 장면을 위해 감독과 배우들은 1시간 동안 디테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정재에게 ‘흥신소 직원’이라는 캐릭터는 < 태양은 없다 >( 김성수 , 1999)에 이어 두 번째였죠. 그리고 그때 만났던 이범수와 <오! 브라더스>에서도 만났고요. 두 편 모두 이범수가 단발머리로 등장했다는 점도 재밌는 공통점이네요. 달라진 게 있다면 <태양은 없다>의 홍기가 가볍기만 한 ‘압구정 날라리’였다면, 상우는 절박한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현실적 캐릭터’라는 점입니다. 김용화 감독은 이 신의 촬영을 마친 후에도 뭔가 부족함을 느꼈는지 다시 찍겠다고 욕심을 냈습니다. 영화에선 평범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결코 쉽게 찍은 장면은 아니었던 거죠. <오! 브라더스>는 김용화 감독의 중요한 테마인 ‘가족’이 시작되는 영화입니다. 장애를 지닌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도 여전히 살아 있는 ‘김용화 영화’의 요소이고요.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 즐거운 나의 집 101 >은 밀양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관객들의 호불호가 비교적 둘로 나뉘었는데, ‘불호’ 쪽에 선 사람들은 대체로 땅과 자연에 대한 할매들의 애착, 국가폭력 앞에 내던져진 그들의 한(恨)과 의식의 각성, 그리고 몸을 던져 막아내는 격렬한 투쟁 이야기를 밀양 영화에서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는 그런 내용이 거의 없다. 이 영화는 오히려 “캠핑 왔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산속 농성장의 즐거운 농성생활을 그리고 있다. 고립된 농성장을 기본적으로 휘감고 있는 긴장과 불안을 어느 정도 균형감 있게 담았더라면 더 좋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아쉬움은 남지만, 이 영화는 밀양 투쟁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투쟁은 여러 얼굴을 하고 있다. 또 밀양에는 ‘할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외부세력’이라는 근거 없는 말이 왜 쉽게 타파되지 못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이 영화는 밀양 주민만이 아니라 연대자들도 밀양 싸움의 주체라고 말하고 있다. 밀양 싸움은 다양하게 말해져야 한다. 나는 적어도 < 즐거운 나의 집 101 >이 ‘밀양 투쟁’의 ‘다양성 영화’의 테이프를 끊었다고 생각한다. 갖다 붙이자면 말이다. 이 영화 제목에 나오는 ‘101’은 송전탑 번호이자, 그 송전탑이 세워질 자리에 들어선 농성장 이름이기도 하다. 다 알다시피, 밀양에는 총 69기의 765kV 송전탑이 세워졌는데, 송전탑 번호로 치면 82~150번까지이다. 이 중 단장면 용회동 뒷산에 세워질(지금은 다 세워진) 101번 송전탑 부지가 이 영화의 중심 무대이고, 이 부지에 농성 움막을 짓고 살면서 여기를 지켰던 사람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101번에 농성장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농성에 합류하러 처음으로 101번에 오르던 그 날 밤이 생각난다. 저녁 7시쯤이었지만, 초봄의 산속은 7시면 깜깜한 한밤중이었다. 한 손에는 카메라, 다른 한 손에는 랜턴을 들고 발밑만 겨우 비추면서 깜깜한 산을 혼자 오르면서도 전혀 무섭지 않았던 이유는, 내 딴에는 농성장을 지켜야 한다는 ‘투지’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투지는 얼마 안 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싸울 의욕이 없어진 게 아니라, 그런 전투적 자세는 농성에 별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전쟁터에 전투적 자세가 별 도움이 안 되다니? 영화 < 즐거운 나의 집 101 >은 이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당시에 나는 고립된 산속에서 농성을 하면서 잘 해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투지’로 똘똘 뭉친 농성은 밥이나 겨우 지어서 밑반찬 두세 개로 끼니를 때우며 견디는 것이었다. 전쟁터이지 않은가? 더구나 물도 전기도 없는 고립된 산속이다. 물을 비롯한 생필품을 일일이 등짐을 져서 날라야 했으므로, 양치질이나 세수는 물론 설거지도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주민과 연대자들은 개미처럼 등짐을 지고 나르면서 끊임없이 전을 부치고 과일을 깎고 산 아래서 순대를 쪄오고 닭발을 삶아 왔다. 고등어와 석쇠를 사 와서 불을 피워 고등어 장작 구이를 해먹었고, 오리 백숙을 끓여 먹었다. 산에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과 함께 삶의 안정이 있었고, 같이 밥해 먹으며 연대가 무르익었다. 누군가 기타를 들고 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곧 우리는 밤마다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그리고 농성장 주변에 널린 벌목한 나무들을 자르고 다듬어 멋진 카페를 만들었다. 날이 좋은 밤이면 이 카페는 훌륭한 야외무대가 되어주었고, 낮에는 차 마시고 수다 떠는 장소가 되었다.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농성 중임에도 우리는 문화생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101번 하면 생각나는 것은, 사람이 묵을 수 있게 끊임없이 움막을 손보고 화장실을 만들고 난로를 청소하는 등의 부지런함과 함께, 그늘에 모여앉아 기타를 딩동 거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바람이 잘 드는 곳에서 낮잠을 즐기는 한가로운 모습이다. 아무도 이거 하라고 지시하지 않았고, 왜 거기 있냐고 여기 있으라고 구속하지 않았다. 할 일이 생기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나서서 했지만, 할 일이 없으면 각자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각자 취향대로 시간을 보냈다. 주로 밥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지만(남자보다는 여자가, 출퇴근하는 연대자보다는 상근하는 주민과 연대자가) 일도 안 하고 밥만 먹고 술만 마신다고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다. 하는 일이 없어 보여도 다들 무언가는 하고 있었기에. 재밌는 얘기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거나, 남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거나, 아니면 썰렁한 개그로 사람들을 웃겨주려 하거나. 이렇게 101번은 평화로운 공동체가 되었다. 피가 마르는 긴장과 무료함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이 정신이 피폐해지지 않고 끝까지 잘 싸울 수 있었던 힘은 여기에 있었다. 국가를 상대로 지는 싸움을 하면서, 사람들은 알아갔던 것이다. 송전탑은 밀양을 넘어서는 탈핵의 문제이며, 탈핵은 일상 속에서 꾸준히 실천해야 하는 싸움이란 것을. 송전탑은 반드시 세워질 것이지만, 우리는 그 이후의 싸움을 준비해야 하고, 그 싸움은 사람과 더불어 즐겁게, 잘 먹고 잘살면서 해야 한다는 것을. 행정대집행으로 인해 강제로 산을 내려온 밀양 주민들은, 이제 곧 송전탑이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임에도 “우리는 지지 않았다”고 외쳤다. 이 말은 당시에는 상당히 의심스러웠으나, 행정대집행 이후 1년 동안 내가 본 밀양은 과연 무엇이 승리인지 생각하게 해주었다. 101번을 지켰던 주민들과 연대자들은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마을에 바느질 방을 열고 매주 금요일마다 모여서 여전히 산에서처럼 수다를 떨고 뜨개질을 하고 수를 놓으며 예쁜 수예품들을 만들어냈다. 마을 뒷산에 101번 송전탑이 쑥쑥 올라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주민들은 (주문량을 채우기 너무 바빠)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으로 ‘탈핵탈송전탑 원정대’를 꾸려서 전국 각지에 핵발전소와 송전탑으로 고통받고 있는 지역을 다니며 실상을 파악하고 투쟁 경험을 나누었다. 밀양 주민들은 탈핵의 아이콘이 되었다. 밀양 싸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진행 중인 싸움에 승패를 나눌 수는 없지만, 101번 사람들은, 밀양은, 투쟁으로 얻으려 한 것을 이미 투쟁 과정에서 이루었다. 국가가 할 일이 따로 있지 않고 그저 놀러 가는 아이들 지켜주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듯이, 송전탑 반대 투쟁의 목적도 결국은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투쟁의 한가운데서 이 사실을 깨닫기는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루어낸 밀양 주민과 연대자들이 있었다. 나의 영화는, 거대하게 치솟은 69기의 철탑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밀양 싸움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알리는 영화이다.
<즐거운 나의 집 101>은 밀양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관객들의 호불호가 비교적 둘로 나뉘었는데, ‘불호’ 쪽에 선 사람들은 대체로 땅과 자연에 대한 할매들의 애착, 국가폭력 앞에 내던져진 그들의 한(恨)과 의식의 각성, 그리고 몸을 던져 막아내는 격렬한 투쟁 이야기를 밀양 영화에서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는 그런 내용이 거의 없다. 이 영화는 오히려 “캠핑 왔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산속 농성장의 즐거운 농성생활을 그리고 있다. 고립된 농성장을 기본적으로 휘감고 있는 긴장과 불안을 어느 정도 균형감 있게 담았더라면 더 좋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아쉬움은 남지만, 이 영화는 밀양 투쟁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투쟁은 여러 얼굴을 하고 있다. 또 밀양에는 ‘할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외부세력’이라는 근거 없는 말이 왜 쉽게 타파되지 못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이 영화는 밀양 주민만이 아니라 연대자들도 밀양 싸움의 주체라고 말하고 있다. 밀양 싸움은 다양하게 말해져야 한다. 나는 적어도 <즐거운 나의 집 101>이 ‘밀양 투쟁’의 ‘다양성 영화’의 테이프를 끊었다고 생각한다. 갖다 붙이자면 말이다. 이 영화 제목에 나오는 ‘101’은 송전탑 번호이자, 그 송전탑이 세워질 자리에 들어선 농성장 이름이기도 하다. 다 알다시피, 밀양에는 총 69기의 765kV 송전탑이 세워졌는데, 송전탑 번호로 치면 82~150번까지이다. 이 중 단장면 용회동 뒷산에 세워질(지금은 다 세워진) 101번 송전탑 부지가 이 영화의 중심 무대이고, 이 부지에 농성 움막을 짓고 살면서 여기를 지켰던 사람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101번에 농성장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농성에 합류하러 처음으로 101번에 오르던 그 날 밤이 생각난다. 저녁 7시쯤이었지만, 초봄의 산속은 7시면 깜깜한 한밤중이었다. 한 손에는 카메라, 다른 한 손에는 랜턴을 들고 발밑만 겨우 비추면서 깜깜한 산을 혼자 오르면서도 전혀 무섭지 않았던 이유는, 내 딴에는 농성장을 지켜야 한다는 ‘투지’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투지는 얼마 안 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싸울 의욕이 없어진 게 아니라, 그런 전투적 자세는 농성에 별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전쟁터에 전투적 자세가 별 도움이 안 되다니? 영화 <즐거운 나의 집 101>은 이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당시에 나는 고립된 산속에서 농성을 하면서 잘 해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투지’로 똘똘 뭉친 농성은 밥이나 겨우 지어서 밑반찬 두세 개로 끼니를 때우며 견디는 것이었다. 전쟁터이지 않은가? 더구나 물도 전기도 없는 고립된 산속이다. 물을 비롯한 생필품을 일일이 등짐을 져서 날라야 했으므로, 양치질이나 세수는 물론 설거지도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주민과 연대자들은 개미처럼 등짐을 지고 나르면서 끊임없이 전을 부치고 과일을 깎고 산 아래서 순대를 쪄오고 닭발을 삶아 왔다. 고등어와 석쇠를 사 와서 불을 피워 고등어 장작 구이를 해먹었고, 오리 백숙을 끓여 먹었다. 산에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과 함께 삶의 안정이 있었고, 같이 밥해 먹으며 연대가 무르익었다. 누군가 기타를 들고 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곧 우리는 밤마다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그리고 농성장 주변에 널린 벌목한 나무들을 자르고 다듬어 멋진 카페를 만들었다. 날이 좋은 밤이면 이 카페는 훌륭한 야외무대가 되어주었고, 낮에는 차 마시고 수다 떠는 장소가 되었다.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농성 중임에도 우리는 문화생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101번 하면 생각나는 것은, 사람이 묵을 수 있게 끊임없이 움막을 손보고 화장실을 만들고 난로를 청소하는 등의 부지런함과 함께, 그늘에 모여앉아 기타를 딩동 거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바람이 잘 드는 곳에서 낮잠을 즐기는 한가로운 모습이다. 아무도 이거 하라고 지시하지 않았고, 왜 거기 있냐고 여기 있으라고 구속하지 않았다. 할 일이 생기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나서서 했지만, 할 일이 없으면 각자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각자 취향대로 시간을 보냈다. 주로 밥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지만(남자보다는 여자가, 출퇴근하는 연대자보다는 상근하는 주민과 연대자가) 일도 안 하고 밥만 먹고 술만 마신다고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다. 하는 일이 없어 보여도 다들 무언가는 하고 있었기에. 재밌는 얘기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거나, 남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거나, 아니면 썰렁한 개그로 사람들을 웃겨주려 하거나. 이렇게 101번은 평화로운 공동체가 되었다. 피가 마르는 긴장과 무료함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이 정신이 피폐해지지 않고 끝까지 잘 싸울 수 있었던 힘은 여기에 있었다. 국가를 상대로 지는 싸움을 하면서, 사람들은 알아갔던 것이다. 송전탑은 밀양을 넘어서는 탈핵의 문제이며, 탈핵은 일상 속에서 꾸준히 실천해야 하는 싸움이란 것을. 송전탑은 반드시 세워질 것이지만, 우리는 그 이후의 싸움을 준비해야 하고, 그 싸움은 사람과 더불어 즐겁게, 잘 먹고 잘살면서 해야 한다는 것을. 행정대집행으로 인해 강제로 산을 내려온 밀양 주민들은, 이제 곧 송전탑이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임에도 “우리는 지지 않았다”고 외쳤다. 이 말은 당시에는 상당히 의심스러웠으나, 행정대집행 이후 1년 동안 내가 본 밀양은 과연 무엇이 승리인지 생각하게 해주었다. 101번을 지켰던 주민들과 연대자들은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마을에 바느질 방을 열고 매주 금요일마다 모여서 여전히 산에서처럼 수다를 떨고 뜨개질을 하고 수를 놓으며 예쁜 수예품들을 만들어냈다. 마을 뒷산에 101번 송전탑이 쑥쑥 올라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주민들은 (주문량을 채우기 너무 바빠)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으로 ‘탈핵탈송전탑 원정대’를 꾸려서 전국 각지에 핵발전소와 송전탑으로 고통받고 있는 지역을 다니며 실상을 파악하고 투쟁 경험을 나누었다. 밀양 주민들은 탈핵의 아이콘이 되었다. 밀양 싸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진행 중인 싸움에 승패를 나눌 수는 없지만, 101번 사람들은, 밀양은, 투쟁으로 얻으려 한 것을 이미 투쟁 과정에서 이루었다. 국가가 할 일이 따로 있지 않고 그저 놀러 가는 아이들 지켜주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듯이, 송전탑 반대 투쟁의 목적도 결국은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투쟁의 한가운데서 이 사실을 깨닫기는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루어낸 밀양 주민과 연대자들이 있었다. 나의 영화는, 거대하게 치솟은 69기의 철탑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밀양 싸움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알리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