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PD]아름다운 이색(二色)정원-아침고요수목원
- 제작년도
- 2011
거창한 의미 부여할 것 없다. <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 >(요시하라 타츠야, 2025, 이하 ‘체인소맨: 레제편’)은 소년만화 저변에 깔린 결핍을 건드리는 고자극 드라마다. 원작 만화의 저변에 깔린 온몸 비틀기 삐딱선과 달리 이번 극장판은 떡밥을 뿌리고 정직하게 회수하는 모범생의 면모를 선보인다고 해도 좋겠다. 다만 강렬하고 직관적인 이미지 자극을 곁들여서. 스핀오프처럼 다소 결이 다른 스페셜 이벤트 같은 에피소드였기에 가능했던 잠깐의 일탈, 쉼표, 한여름밤의 꿈 같은 에피소드였다. 마찬가지로 고자극의 작화와 눈알이 시려울 정도로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곁들여서. 요란하고 화려한, 사상 최대의 연애 싸움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재밌지만, 시간의 풍화를 뛰어넘는 명작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표와 분기로 작용할 만한 깊이를 보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취향 저격의 안전하고, 검증되고, 무난한 작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므로 이 범상한 애니메이션은 매우 사사로워질 자격을 획득했다. 너도 재밌고, 나도 재밌었다는 취향의 확인. 그리하여 의미를 찾아 헤매기보다는 즐거움의 안도감을 안기는 고백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향한 애니메이션, 순애의 재발견 2025년은 애니메이션의 강세가 확연한 한 해였다. 넓게 보면 영화산업의 (쇠퇴와는 결이 다른) 구조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단 한국 시장만의 흐름이 아니지만 한국 시장에서 더 도드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 주토피아 2 >(자레드 부시, 바이런 하워드, 2025)가 2025년 전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건 기존의 관성을 비춰볼 때 당연하다. 가족 관객을 타겟으로 한 검증된 IP의 속편이, 완성도와 무관하게 더 큰 흥행을 거두는 건 늘 반복되는 공식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체인소맨: 레제편>을 향한 호감과 열기는 단순히 수치적인 흥행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흥행 면에선 <귀멸의 칼날> 등 재패니메이션과 같은 흐름으로 묶을 수도 있겠지만 작화를 통해 쾌감을 준다는 면을 제외하곤, <체인소맨>은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체인소맨>이 이번 극장판 레제편에서 맑게 길어 올린 부분은 한동안 일본 만화에 번졌던 유행 같은 감각, 이른바 순애의 연장선에 있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단순한 소년만화의 극장판 확장이 아니다. 차라리 폭력의 세계에 던져진 두 괴물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나누는, 가장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의 변주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 세계는 언제나 젖어 있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 그리고 끊임없이 내리는 비의 눅눅함이 화면 너머로 전해진다. 덴지라는 인물은 태생적으로 결핍의 덩어리다. 그에게 욕망은 거창한 세계 구원이나 정의 구현이 아니라, 잼 바른 식빵이나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이성을 향한 원초적인 호기심 같은 것들에 머물러 있다. TV 시리즈가 덴지의 그 동물적인 감각과 혼돈을 거친 선으로 그려냈다면, 이번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혼돈 속에 싹튼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의 심도를 깊게 가져간다. <체인소맨: 레제편> 중 / 사진: IMDb , ⓒ 2025 M/CSMP ⓒTF/S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가진 특권 중 하나는 현실의 물리학을 무시하는 과장된 움직임, 흔히 데포르메라고 불리는 의도된 작화 붕괴다. 하지만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과장됨 속에 기묘한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MAPPA의 제작진은 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 특히 레제의 얼굴에 스치는 홍조나 덴지의 당황한 눈동자 등 감정의 떨림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액션 시퀀스에서의 속도감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격의 무게감이 관객의 뼈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태풍의 악마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이나, 덴지와 레제가 공중에서 얽히며 싸우는 클라이맥스는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역동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미묘한 리얼리티의 근간에는 원작자의 시점이 투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TV 오프닝에서부터 고백하고 있듯 후지모토 타즈키 작가의 실천에는 영화, 달리 표현하면 카메라의 위치과 프레임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체인소맨: 레제편> 역시, 아니 더욱 노골적인 방식으로 거의 모든 컷의 근간에 실사 영화에 대한 향수가 묻어 있다. 겪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첫사랑의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는 영원히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피어난다. 덴지와 레제가 맺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애틋함의 감흥을 자아내는 것처럼, <체인소맨: 레제편>의 동력도 실사 영화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깔려 있다. 이것은 상하 혹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와 다르고 실사 영화가 될 수 없다. 그 구분을 전제로 하여 한없이 영화에 가깝게,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다르고자 할 때 여타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오리지널리티가 피어난다. <체인소맨: 레제편>의 오리지널리티는 노골적인 애정고백을 바탕으로 한 빽빽한 오마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덴지와 레제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타포인 이솝 우화의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는 덴지와 레제, 두 하이브리드(인간과 악마의 융합체)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시골 쥐의 평온하지만 배고픈 삶과 도시 쥐의 풍요롭지만 위협받는 삶. 덴지는 언제나 도시 쥐의 삶 속에 던져져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시골 쥐의 안온함을 갈구해왔다. 레제는 그런 덴지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고 싶으냐고. 이것은 ‘자유’와 ‘통제’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공안 대마특이과라는 시스템(도시) 안에서 사육되는 덴지와, 그 시스템을 파괴하러 온 외부의 존재 레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진영에 서 있는 듯하지만 실상 누군가의 도구로 쓰인다는 점에서는 거울상처럼 닮아있다. 레제는 마키마의 안티테제로 만들어진 캐릭터답게 첫사랑의 이상향을 응축시켜 놓았다. 진정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면 악마로 변하는 이들의 능력이 아니라 소녀가 소년을 만나는 상황 그 자체라고 해도 좋겠다. 레제가 덴지에게 가르쳐주는 수영법,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그들이 ‘무기’가 아닌 평범한 ‘소년소녀’로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다. 사진: IMDb( 1 , 2 ) 감독은 이 딜레마를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한다. 레제의 폭발은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묘사되는데, 그녀의 머리가 폭탄으로 변하고 사지가 터져 나가는 그로테스크한 변신 장면은, 혐오스럽기보다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준다. 화약(gunpowder)과 꽃(flower).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레제는 치명적이지만 끝내 질 수밖에 없는 꽃이다. 덴지가 그녀에게 건네려 했던 꽃다발, 그리고 마지막 카페 씬에서 들리지 않는 종소리는 이 영화가 결국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체인소 역시 피를 뒤집어쓸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존재다.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올 때의 카타르시스는 체인소의 소음과 겹쳐진다. 그들에게 사랑은 서로를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부수고 태워버림으로써 완성되는 파괴적인 제의(祭儀)와 같다. 그리하여 이들이 빗어내는 시끄러운 소음, 불협화음은 불쾌감 이면에 애잔함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폭탄의 악마가 터뜨리는 굉음은 청각을 마비시킬 듯 몰아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폭발의 순간이 아니라, 폭발 직전의 고요함, 혹은 폭발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재(ash)의 정적에 있다. 태풍이 지나가고 당신의 뇌리와 망막에 남는 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던 덴지가 레제와 함께 학교 수영장에 잠입해 밤의 유영을 즐기는 시퀀스이리라 믿는다. 물의 질감, 달빛이 부서지는 수면, 서로의 몸짓을 훔쳐보는 시선은 액션 장르의 문법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서정적인 이 장면에는 이뤄지지 못할 순수이기에 성립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 불꽃의 반짝임이 예뻐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위태로운 아름다움. 고백하자면 한동안 좋은 걸 그냥 좋다고 말하지 못했다. 의미를 찾아다니고 가치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강박의 저주에 빠진 것 같았다. 때론 있지도 않은 의미를 찾느라 아는 척, 감동 받은 척, 거짓된 취향을 무장한 적도 있다. 어떤 척을 하는 걸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건 갈망이자 방향이며 강렬한 에너지다. 스스로 정한 이상에 도달하려고 발버둥치는 사이 단련되는 부분도 있고, 때때론 그 과정과 행위 자체가 자신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너무 멀리 와버려 지금 어디에 떠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순간이 다가온다.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때 발견한 작은 등대 같은 작품이다. 직관적으로 재미있고, 익숙하고 빤해서 더 마음이 가는 쉼터. 재밌는 걸 그냥 재밌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되돌아보니 우리는 모두 한때 덴지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그저 눈앞의 다정함에 목을 맸던 시절.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때 레제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야만 내가 살 수 있었던, 거짓말로 진심을 감춰야 했던 시절. 굉음이 남긴 이명(耳鳴)은 꽤 오랫동안 귓가에 머물 것이다. 사진: IMDb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 씨네21 》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사진: “ 복합 장애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어릴 때부터 장애가 있는 혈육 또는 이웃들과 별 이질감이나 불편함 없이 살아왔다. 20대에는 몸이 불편한 학우들의 활동 보조도 해보았다. 30대 이후, 장기 입원을 하거나 중병을 앓는 가족의 간병도 해보았다. 돌이켜 보면 삐거덕거리고 비틀대고 휘청이는 다양한 몸들과의 여러 활동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러한 활동들이 돌봄이란 단어로 일원화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의 활동 보조를 할 때도 돌봄이나 돌봄 노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못했다. 그야말로 보조였고, 치료를 받는 이의 간병인이었으며, 집이 필요한 고양이와 공간을 나눠 썼을 뿐이다. 모두 돌봄으로 환원할 수 없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돌봄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 영국의 한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부터 배리어프리 상영을 제안받았다. 우리의 영상이 시각장애인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궁금해 흔쾌히 허락했다. 상영일에 모니터를 가리고 사운드만 키운 채 영상을 청취했다. 영상의 사운드와 함께 누군가 장면 하나하나를 문장으로 읊어주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이미 수십 번도 더 보아왔던 영상을 오직 사운드에 의존해 각 장면을 떠올리며 관람했다. 그때 함께 했던 시각장애인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렇게 듣는 관람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시각장애인이라는 관객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야말로 우리 안의 장벽(barrier) 하나가 허물어진(free) 셈이다. 그때서야 ‘배리어프리’가 장애인들만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에게도 새로운 감각을 열어주는 장치임을 알게 됐다. <복합 장애> 포스터 (사진: “ Multi-Handicapped ”, IMDb)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 복합 장애 >(1986)를 보는 내내 몇 년 전 배리어프리 상영회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의 해방감이 상기되었다. 물론 이 영화에는 감독이 의도한 인터뷰나 설명 같은 건 전혀 없다. 헬렌 켈러 학교란 곳에 재학 중인 감각 장애가 있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교육활동으로부터 발생한 다양한 신체 언어와 공간 소음이 전부다. 게다가 영화 속 복합장애인들이 주고받는 고요한 수어 이미지와 그들의 신체가 외부 자극에 의한 감각을 다스리기 위해 내는 자기 자극음은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이다. 생각해보면 수어와 점자는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이 배우지 않아 모르는 언어인데, 복합 장애를 단순히 잘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몸의 어느 기관이나 감각의 결핍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외부 자극이 과도할 때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소 괴성처럼 지르는 소리를 내거나(자기 자극음), 상대의 소리를 그대로 따라하는(반향어) 등, 매우 적극적으로 신호를 내보낸다. 복합장애인들의 세계에서 비장애인들이 맞닥뜨리게 된 장벽(barrier)에 대해 감독은 굳이 해석해주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언어를 받아들이고 교감할 수 있는 길을 터준다. 각자가 마주한 장벽을(barrier) 허무는(free) 것은 관객 본인의 몫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눈과 귀를 예민하게 열고 감독의 카메라 워킹을 따라가야 한다. 감독의 카메라는 복합장애인들의 교육 활동에 어떠한 서사도 부여하지 않는다. 가령 학생들이 수업을 받거나 선생님들이 커리큘럼을 고민하는 과정은 문학으로 치면 묘사와 대사로만 이뤄진 씬들이 교차편집되어 있을 뿐이다. 매일 매시간 학생들의 수업 내용이 달라지듯이 영화 또한 다양한 장애를 지닌 여러 학생들과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교육 활동의 나열만으로 그들의 하루를 보여준다. 수평적으로 연쇄되는 각 씬 사이에 영상적 빈칸은 없다. 다만 비순차적으로 병치된 씬들이 축적될 때마다 마치 문단 사이의 여백 같은 것들이 생성된다. 그 빈칸을 채우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감독의 발걸음을 쫓으며 머리 속에서 자꾸 생성되는 공란을 채워나가다 보면 비로소 발견되는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람 중인 ‘나’의 눈과 귀가 어디에 붙들렸는지,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장애를 둘러싼 세간의 윤리와 편견에 앞서 일단 잘 모르던 세계를 영화로나마 경험하고 감각해 보는 게 우선이다. 사진: “ 복합 장애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물론 이 영화를 통한 경험이 VR을 쓰고 여러 감각 장애를 체험해 보거나 복합장애인이 되어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적어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는 관람객들은 시각과 청각이 어느 정도 온전하게 기능하는 자들이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처럼, 그의 카메라와 녹음기기처럼 관람객들은 오직 두 눈과 귀에 의지해 복합장애인들의 하루를 지켜봐야만 한다. 영화에서는 때때로 이 부분이 충돌을 일으킨다. 이 충돌이 윤리적인 문제로 확산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에 감각 장애를 앓고 있는 학생들을 어떻게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 와이즈먼의 다소 차갑고 거침없는 카메라 워킹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뇌경화증을 앓고 있는 사촌동생을 만날 때마다 그가 내는 괴성과 자해에 가까울 만큼 세게 몸을 치는 행위가 어릴 땐 좀 무서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소리와 급변하는 온도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른들은 우발적이라며 그를 제지하는데 급급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때 그의 몸은 더욱 크게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요동치는 감정이 그의 몸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까이서 지켜보고 감각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아니면 평생 그를 무섭고 괴팍한 장애인으로만 여기며 기피했을 거다. 그를 마주할 때 교육받은 윤리의식과 사전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끊임없이 소통의 방식을 찾아야 하는데, 그 과정이 좀 느리고, 광범위하며, 때때로 막막해 다소 시간이 걸릴 뿐이다. 헬렌 켈러 학교 학생들을 보며 사촌동생과의 소통의(혹은 소통불능의) 경험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들의 배움은 깜깜한 눈, 적막한 귀, 무성의 입 중 2개 이상이 교집합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상한 소리가 삐져나오는 몸으로는 수건 하나 접는 일조차 쉽지 않다. 비장애인들이 너무도 익숙하고 쉽게 해내는 모든 일들을 이들은 매우 느린 속도로 배우고 익히며 각자의 고비를 꾸역꾸역 넘어서야 그나마(학교와 선생님들의 교육이 지향하는) 사회화가 가능하다. 그 배움에 나이와 단계에 따라 자동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일관된 커리큘럼은 없다. 시계를 읽지 못하는 학생, 이름과 주소를 겨우 읽어내는 학생, 상대의 수어를 직접 만져야 대화가 되는 학생 등. 헬렌 켈러 학교라는 하나의 교육기관 안에서 작동되는 교육 과정은 온전히 학생들의 신체 상태에 맞춰 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수어로 대화가 가능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혼자서 몸을 일으켜 밥을 먹는 것조차 쉽지 않다. 때문에 학생들 각자의 배움과 앎의 과정에 학년, 과목 등 시스템에서 정한 용어를 붙이기가 어려워 보인다. 어느 정도의 사회화와 점자, 수어 등 기본 언어도구를 익힌 뒤 그들은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직업을 구하기 위한 교육을 받지만 그마저도 쉬워 보이지 않는다. 복합 장애를 극복하고 대학에 진학 후 사회 운동가가 되었던 기적의 헬렌 켈러는 영화 속 복합장애인들이 재학 중인 학교 기관으로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영화 속 선생님들은 수돗가에서 짐승처럼 날뛰던 7세의 헬렌 켈러를 헌신적으로 붙잡고 그녀의 손에 끝내 “WATER”란 글자를 새겨 무지를 깨우쳐준 설리번 선생처럼 할 수 없다. 그들은 헬렌 켈러 학교에 재직 중인 피고용인이다. 교육 제도와 학교의 교육 시스템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 학생들이 받는 수업과 생활지도 또한 학교의 예산안과 지침 하에 시행된다. 그들이 소속된 교육기관의 목적은 헬렌 켈러의 기적이 아니다. 복합 장애 학생들은 학교에서 필요한 교육을 받고 장차 직업을 구해 사회인으로서 기능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교육 시스템의 고리가 느슨해질 때가 있다. 식사 후 휴식 시간이다. 휴게 공간의 티브이가 켜지고 아이들과 선생님들 각자 편한 자세로 앉아 쉰다. 교육의 공백 속에서 아이들은 몸을 뱅글뱅글 돌리거나 반복적 입소리를 내고, 목적 없이 뛰어다닌다. 신기한 건 앞이 잘 안보이고 몸의 제어가 힘든 상황에서도 부딪치지 않게 서로의 간극을 조율해 나가기도 한다. 이때 허밍음 혹은 가스펠 같은 나지막한 한 선생님의 노래소리가 들린다. “One more river to go”로 시작되는 노래다. 가사는 ‘건너야 할 강’의 반복이다. 우선 ‘내’가 건너야 하고, ‘그녀’가 건너야 한다. 마치 선생님 자신과 그녀의 학생들을 위한 노래 같다. 선생님과 학생들의 느리고 더뎌 힘든 교육 활동이 일단락된 순간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노래가 또 있을까.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눈앞의 강이었던 배움 하나가 또 그렇게 실현된 셈이다. 영화는 헬렌 켈러 학교의 하루를 넘어 또 다른 하루인 주일로 넘어간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도 하에 교회에 간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아름다움이란 말이 오직 신으로 일원화된 곳에 놓여 있다. 아이들의 수어는 설교와 찬송가의 내용을 번역하는 수단이 되고 성경과 신에 대한 의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곳에서도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잘 말하지 못한다. 그들의 몸이 흔들리며 반향어를 내뱉어도 돌아오는 건 신을 향한 찬양과 성경구절뿐이다. 교회에 가기 전까지 이어졌던 무수한 몸짓, 소리, 그들의 언어가 모두 무력화 되어버린 것 같다. 설교자는 아이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직 성경의 내용만 전달한다. 모든 것들이 교회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 같다. 무진형제(미디어 작가 그룹) l 무진형제는 3명으로 구성된 작가 그룹이다. 세간의 지배적인 가치와 믿음체계로 굳어져버린 것들을(眞) 의심하고 해체시켜(無) 동시대의 ‘인간-환경 시스템’을 재구성한다. <삼속(三俗)의 담(談)>, <궤적(櫃迹)-기술된 선인(善人)들> 등을 작업했다.
<그래도, 사랑해.> 중 /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1년간 관객을 찾은 영화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올 한 해 영화가 불러온 고민들을 정리합니다. “흔히 문화의 역할이란 지하철역 구내에 보다 세련된 의미있는 장식물이나 걸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네 삶에서 문화란 그런 작은 디테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다 본질적인 것, 즉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의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문화의 역할입니다.” - 이창동 , “처음 드리는 인사말”, 문화체육관광부 열린장관실, 2003년 3월 14일 영진위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는 1,0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으며, 2004년 이래 최초로 연간 관객 수 1억 명 시대가 붕괴한 해다.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종말 ...... 물론 이건 시장 얘기다. 업계에 발을 담그지 않은 나로서는, 그저 인상적으로 보았던 작품들을 주루룩 고른 다음, 개별 작품들로부터 몇몇 자질을 선별해 자율적으로 테마화한 뒤, 안온하게 정리해도 그만일 것이다. 그렇지만 비행기 타본 기억이 까마득한 토종 한국인이자, 비평가 이전에 관객일 수밖에 없는 나는 OTT가 새롭지 않은 이 시기에도 어두운 극장에서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말하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모양새를 자막 없이 보고 듣는 일상의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다(애국자 아닙니다). 통계를 근거로 한 종합적인 분석과 전망이라면 이미 숱한 기사와 글이 많으니, 엄격한 틀은 내려놓되 몇몇 영화 안팎으로 사적인 근심과 관심을 조금 얹고 싶다. 올해의 한국영화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거나 화가 나는 경우는 있었지만, 아니 많았지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보았던 영화는 김준석 의 < 그래도, 사랑해. > 뿐이다. 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의 향기를 풍기며 사랑스럽고 여유롭게 걷는다. 올해 한국영화들이 내게 신통치 않았던 것은, 대개 상업영화라면 지독할 정도의 장르적 콘셉트가 부여되어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고, 한편으로 독립영화판에서는 형식적 장치에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반대로 소재에 기대어 특정 환경에 놓인 인물의 처지를 강조하며 관객과 스크린 사이에 두툼한 방벽을 세웠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가 아는 선에서 <그래도, 사랑해.>는 2025년의 한국영화들 중 현실과 영화가 자연스레 길항할 수 있으며, 그 사진적 이미지에 기반한 20세기적 시청각 경험의 아름다움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 거의 독보적인 사례다. 게다가 이 영화의 세계는 내가 쓰는 언어와 내가 갈 수 있는 장소와 내가 어쩌면 만날 수 있을 법한 사람들에 의해 전달되기에 친밀함마저 느끼게 된다. 지금 한국영화에 필요한 것은 난장과 자극이 아니라 이런 기복 없는 흐뭇함과 상쾌함이 아닐까? 물론 <이혼숙려캠프>(JTBC)가 인기 좋은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부부가 주인공인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욕지거리와 패악질의 향연이 아니라 우리네 삶 여기저기에 놓인 일상적 규모의 상황과 마음들이다. 관객은 우리를 닮은 영화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미소 지을 권리가 있다. <그래도, 사랑해.>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 돌아보면 올해 세상은 그리 돌아가지 않았던 것 같다. 연초 우리네 봄날의 콘텐츠였던 ChatGPT 지브리풍 이미지 생성에서부터 10월 말 젠슨 황의 깐부치킨 회동에 이르기까지, 2025년을 지배한 키워드가 있다면 어딜 가도 들려오는 AI일 것이다. 영화계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영화제에서는 AI 관련 이벤트와 컨퍼런스가 열렸고, 극장가에도 적극적으로 AI를 활용한 시험작 < 중간계 >가 개봉하기도 했다. 하지만 창작 과정에서의 실제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올해의 한국영화들을 통과하며 AI 프롬프트의 예제본처럼 뻣뻣한 인간형이 여기저기서 출몰했다고 느낀다. 그 대표 주자라고 한다면, 초기에는 대안적 움직임으로 출발했으나 오늘날 상업영화와 함께 또 다른 제도로 딱딱하게 굳어진 독립영화라는 포지션을 기회주의적으로 활용한 연상호의 < 얼굴 >이다(이 영화는 KOBIS 상에서 ‘일반영화’로 분류된다). 2억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는 이 가성비 좋은 저예산 영화 속 유명 배우들의 몸짓과 얼굴에서 유연함과 여유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기실 생성형 AI 이미지에 가까운 그 1차원적 자질은 시장주의에 입각하여 경제적 효율성의 늪에 빠진 동시대 이미지의 사멸적 풍경을 저절로 돌아보게 만든다. < 좀비딸 >, < 야당 >, < 히트맨2 >, < 보스 >, < 승부 > ...... 성급히 땜질하듯 만들어진 올해의 몇몇 한국영화들은 창작자의 존재 유무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야기의 유기적인 흐름은 수시로 중단되고, 유튜브 숏츠 시대에 걸맞은 단발적 자극만이 연쇄적으로 나열되는 작중 내 세계에서 인물은 극단적으로 캐리커처화된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야단스럽게 선보이는 개인기 섹션의 한 토막처럼 위축되며 실재감을 완전히 상실한다. 이쯤 되면 실사는 그저 명목적 알리바이이며, 우리는 우연과 돌발의 가능성을 품은 사진적 이미지가 전면적으로 폐지된 AI 영화라는 미래를 이미 살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올해의 수많은 애니메이션 작품들의 흥행권 진입은 그 무의식에 대한 반영일까? <중간계>, <얼굴>, <좀비딸>, <야당> 중 / 사진: 네이버 영화( 1 , 2 , 3 , 4 ) 그런가 하면 이제는 한국영화의 기성세대권으로 진입한 두 아버지, 봉준호 와 박찬욱 의 인물들은 중심을 잃고 허둥댄다는 느낌이다. < 미키 17 > 속 인물들에게는 슬랩스틱과 삑사리의 미학으로 불리던 봉준호의 미시적이고도 생활밀착적인 신체의 율동과 액션이 온데간데없으며, 메인 빌런은 느긋함을 갖추지 못한 채 무대에 오른 초보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독재자의 전형적 모델을 대문자적으로 모방하며 허우적거릴 뿐이다. 인물의 결심과 행동 전개로 극이 진행되는 < 어쩔수가없다 >는 서로 간섭을 일으키는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이 긴장의 끈을 풀어버리기 일쑤이며, 인물의 내면적 특질은 구체적으로 조성되기보다 외삽적으로 제시된다. 적어도 외연적으로는 리얼리즘을 표방했음에도 인물들의 욕망과 주관은 앙금처럼 애매하게 남겨지고, 다소 과장스럽게 발생하는 코미디와 요란한 촬영과 편집 너머로 연출자의 불안만이 느껴질 뿐이다. 두 편 모두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를 내세우고 있지만, 웃지 못한 내가 감지한 것은 화면 너머에 있는 조급함이었다. 게다가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이들은 개봉 전후로 방송인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하며, 온갖 유튜브 채널과 TV 프로그램에서 프로모션을 진행하지 않았던가. 개봉 이후 좋지 않은 평가로 인해 박찬욱 본인이 직접 자신의 영화를 해설하는 <알려줄 결심>이 제작된 것은 갈 데까지 가 버린 올해의 한국영화계를 요약하는 한 단면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관객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 이들을 ‘거장’으로 호명하는 일 아닐까? 왠지 무한히 재생되어 죽지 않는 복제 인간과 AI에게 대체될 위기에 놓인 인물이 이들 영화의 중심으로 설정된 것은 OTT가 스크린을 대체해가는, AI가 실사를 대체해가는 이 시기에 그저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올해의 한국영화들 중 시선, 거리, 말투 등 대화의 미시적인 결이 생생히 살아있는 이재원 의 < 두 시간 >, 서울의 달동네 풍경과 오래된 골목을 주름진 노인들의 육체와 함께 화면에 담은 < 사람과 고기 >가 사사롭게 다가온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미키 17>, <어쩔수가없다>, <두 시간>, <사람과 고기> 중 사진: MUBI , 네이버 영화 , 전주국제영화제 , 네이버 영화 기술이 발전하고 정서가 침잠함에 따라 신체도 변화해간다. 두 편의 미국 블록버스터를 보면서도 그 무의식적 징후가 스크린에 투영된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 서사적으로 두뇌의 작동을 철저히 둔화시킨 이 영화는 눈과 귀의 즐거움에 올인할 뿐, 가족영화라는 설정임에도 일말의 정서적 울림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숏츠 시대에 걸맞은 무지성 블록버스터가 되었다. 이 영화를 함께 본 친구는 촌철살인으로 비평했다. “이 영화 속 사람들한테는 뼈가 없는 것 같다.” 그의 말마따나 일종의 지점토처럼 인체를 연성화하는 작업을 거쳐 리얼리티를 제거한 화면을 보며 관객은 스크린 속 사태와 전혀 연루되지 않은 채, 시원하게 깔깔댈 수 있다. 영화 속 인체는 연양갱이나 하리보 젤리보다도 말랑한 지방이인데, 이들은 거의 AI ASMR에서 엿볼 수 있는 액체괴물이나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비슷한 것이 되어 신나게 터지고 짓뭉개진다. 이에 반격하듯 아날로그 신체에 불굴의 책임의식을 강박적으로 수혈한 블록버스터 <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은 AI와 맞서는 에단 헌트, 아니 톰 크루즈의 눈물겨운 원 맨 쇼다. 여기서 그는 “세상을 구한다”라는 거창하지만 피상적 맥락 외의 사적인 욕망이나 목적이 제거되어 캐릭터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차력쇼의 단원이 된다.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잠수함 신은 숏츠 시대에 훈시하듯 대사마저 소거한 채 느린 호흡을 가져가는데, 여기에는 에단이 대적해야 할 상대도 없으며, 그에 따른 액션영화의 장르적 쾌감도 불투명하다. 영화는 잠수복을 벗고 알몸으로 헤엄치는 톰 크루즈의 몸짓을 고요한 바다 배경과 조명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팔다리를 태아의 형상처럼 구부려 ‘에단 헌트-톰 크루즈’라는 ‘인물-배우’를 거룩하게 비추지만, 어느 누구와도 합이 맞지 않는 듯한 이 영화 속 톰 크루즈는 마치 모든 것을 짊어지고 인간계를 떠나는 유령처럼 보인다. 시리즈 내내 “리얼한” 액션을 제 몸으로 수행해 온 그의 강박이 올해는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 사진: IMDb , © 2025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중 / 사진: IMDb AI가 도래한 마당에 내가 떠올리는 리얼리즘은 이런 것이다. 그곳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얼마간의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간격이 설정되는 세계이며, 실천적으로는 출퇴근길 과속과 욕설로 버스를 몰고 가는 어떤 중년 기사의 심통 맞은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깊게 팬 주름들 사이로 상상을 끼워보듯, 일상 속 적대와 부재, 거절을 맞대며 이해력과 상상력을 기르는 내면적 과정이 동반되는 장소다. 타자라는 낯섦과 불편함은 리얼리즘의 조건 중 하나였지만, 그것들이 편리함으로 제거되어가는 테크놀로지와 디스플레이의 시대에 리얼리즘은 이제 그 의미를 서서히 재정립해가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올해의 영화들 중 마이크 리의 < 내 말 좀 들어줘(Hard Truths) >가 딸려온다. 이 영화는 소통 불가와 심리적 불안이 일상화된 우리 시대의 수축된 시공을 에두르거나 외면하지 않고 길바닥과 노동자의 리얼리즘으로 정면 대결한다는 점에서 포스트 코로나 영화의 빛나는 사례가 되었다. 정답 없이 문제의 구체적인 양상만을 현미경처럼 충실히 제공하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내려치는 탓에, 마땅히 극장에 몸이 묶여 봐야 할 영화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이 들 정도다. 결말부 사각 프레임을 가득 채운 두 얼굴, 그들을 잇는 숏-역숏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마음이 그렇게 된다. ...... 어쩌면 이건 다 옛날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일상 속 원격 만남과 딥페이크 범죄가 여전하고 이미지의 사실성이 의심받기 일쑤인 작금에, 인간의 얼굴이 신비와 기적을 발생시키는 특권적인 장소라던 벨라 발라즈의 말을 과연 언제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렇다. 지나치게 발전한 미래에서 한때의 리얼리즘은 환상이다. <내 말 좀 들어줘> 중 / 사진: IMDb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 비평의 편지 ’ 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