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투
- 감독
- 박훈정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박희순, 진구, 고창석, 김갑수, 전국환, 최일화, 장희진, 이종수, 김형종, 정세영, 최광락, 정영기, 장인호, 이정은, 고예원, 김성범, 방병훈, 위서율, 최교식, 최영도, 유상재, 김형범, 기세형, 홍기준, 김영훈, 김길동, 김용기, 권혁석, 송용호, 조명행, 김병삼
이화정(이하 ‘이’) < 내 깡패 같은 애인 >과 < 찌라시: 위험한 소문 >(이하 ‘찌라시’) 모두 대사에서 두드러진 강점을 보인다. 아마도 감독 이전의 이력이 작용하는 것 같다. 국문학을 전공했고, 영화감독 이전에 방송작가로 활동한 적이 있다. 어떻게 글을 쓰게됐나? 김광식 (이하 ‘김’) 어릴 때부터 소설가가 꿈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내 글로 누군가를 재밌게 만드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내 감정을 모두 끌어내어 글을 쓰기보다, 내 글로 타인의 기분을 가지고 노는 것이 재밌었다. 예술가적 기질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후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갔는데 대학가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종말’이라는 말이 돌면서 문학이 중심에서 변방으로 물러나는 분위기였다. 그게 1990년대 초반인데, 소설 외에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영상으로 관심을 돌렸고 단편영화 스태프로 일했는데 현장에서 무거운 장비를 많이 들어야 했다. 세상에서 무거운 짐 드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일동 웃음) 지금의 몸을 보면 아무도 안 믿지만 당시에는 순수한 문학청년이라 몸도 여렸다.(일동 웃음) 그때부터 방송용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베스트극장>에서 단막극으로 몇 편 방송이 나갔는데, 마감을 정해놓고 글을 쓰는 것이 너무 지치는 일이더라. 그래서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됐고 영상원에 시나리오 전공으로 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감독이라는 직업이 기술의 영역인 줄 알았는데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고 오랜 경험이 쌓여도 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의 감수성으로 내가 직접 연출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해 직접 연출을 하게 됐다. 단편 작품을 만들다가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 조감독을 하게 됐고, 이후 본격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 이 첫 작품 < 내 깡패 같은 애인 >(2010)이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바로 후속 작품을 제작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김 < 내 깡패 같은 애인 > 이후 여러 영화에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늑대>(가제)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탈북한 특수부대원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꽤 괜찮은 작품이라 생각해 시나리오 수정 작업을 시작했다. <내 깡패 같은 애인> 개봉이 끝나고 반년 즈음 지나서였다. 사실 이미 개봉한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 중 당시 나에게 감독 제안이 들어온 영화도 있었다. 난 모두 거절하고 <늑대> 초고를 마무리하고 캐스팅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 사이 그 영화들이 개봉하더라. 시작은 먼저 했는데 시나리오를 다듬다보니 캐스팅이 늦어진 것이다. 그렇게 유사한 장르의 영화들이 개봉되면서 <늑대>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그렇게 1~2년을 보냈는데, 이후 < 찌라시 > 시나리오를 받았다. 초고가 나온 상태여서 시나리오 수정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원래 정치?사회적 이슈가 담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어서 <찌라시>를 선택하게 됐다. 이 < 찌라시 >도 그렇고, 비록 제작되진 않았지만 이야기 구성만 봐도 <늑대>란 작품 역시 < 내 깡패 같은 애인 >보다는 제작비 면에서 규모가 커 보인다. 김 < 내 깡패 같은 애인 >의 순제작비가 10억 원이었다. 이 영화를 만들고 배급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예산 영화가 배급과 마케팅 면에서 블록버스터 영화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래서 다음 작품의 규모를 키워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제작이 중단되긴 했지만 <늑대>의 경우 제작비를 70억~100억 원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영화를 연출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더 잘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소재의 < 용의자 >만 보더라도, 이 영화를 연출한 원신연 감독은 누구보다 액션을 잘 표현하는 감독이다. 내가 과연 액션에 적합한 감독일까 생각하면 아니라는 결론이 난다. 이 < 찌라시 >의 순제작비는 30억 원 규모였다. 다른 상업영화들에 비해 여전히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라고 볼 수 없지만 이전 영화에 비해 제작비가 늘어났다. 연출하는 데 수월해진 부분이 있지 않았나? 김 흔히 우리나라 블록버스터 영화를 ‘독립 장편 블록버스터’라고 한다.(웃음) < 찌라시 >는 30억 원이 투입됐는데, 사실 그 이상, 100억 원이 투입된 영화라고 해서 그 돈이 스태프에게 더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주.조연급 배우의 캐스팅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화는 제작 예산이 빠듯하다. 제작비가 많다고 감독이 진행비를 더 쓰는 것도 아니다. <찌라시>가 < 내 깡패 같은 애인 >에 비해 제작비 규모가 커졌다고 해서 연출이 수월해지진 않았다. 100억, 150억이 투입되는 영화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찌라시 > 역시 30억 원으로 ‘찍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 30억 원에 ‘찍어야 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그 예산에 맞춰 연출했다. 사실 <찌라시>는 영화의 내용에 비해 제작비가 많이 투입된 영화라 볼 수 없다. 다만 < 내 깡패 같은 애인 >을 10억 원이라는 저예산으로 연출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30억 원에 제작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전작도 그렇고 < 찌라시 >에서도 세트 촬영보다 로케이션 촬영을 많이 진행했다. 이것도 예산을 절감한 효과를 가져왔을 것 같다. 김 두 가지 이유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선호한다. 제작비 규모를 맞추기 위해 로케이션 촬영을 많이 한 것이 첫 번째 이유다. 결과적으로 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제작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영화는 카메라에 인물만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물과 함께 주변 공간을 담아내는 것이 감독으로서 나의 주된 관심사다. 따라서 세트보다는 로케이션 촬영을 선호하는 편이다. 이 < 내 깡패 같은 애인 >과 < 찌라시 >를 보면 사실적인 공간에 대한 감독의 욕심이 보인다. 김 세트를 활용하면 사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세트 촬영을 지양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이명세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같이 세트를 활용하면서도 그 공간을 미술적으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감독이라면 세트 촬영을 많이 했을 것이다. 이 < 찌라시 >라는 제목이, 실제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핵심 이야기와 조금 동떨어진 느낌이 든다. 영화 제목을 정할 때 마지막까지 고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전작 < 내 깡패 같은 애인 > 역시 제목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었다. 왜 유독 제목에 대한 지적이 많이 나온다고 생각하나? 김 솔직히 나도 < 찌라시 >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원래 이 영화의 제목은 <예언자들>이었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더라. SF나 판타지 장르의 느낌이 난다는 이유였다. 마지막까지 제목을 결정하지 못하다가 결국 <찌라시>로 결정했다. 사실 내가 국문과 출신이라 일본어, 비속어를 제목으로 사용하는 것이 내내 찜찜했다. 하지만 간단하게 생각하면 이영화는 사설 정보지, 즉 ‘찌라시’에 대한 이야기다. <찌라시>라는 제목이 이 영화를 가장 잘 그리고 독창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제목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찌라시>가 가장 적합했다고 생각한다. 이 < 찌라시 >뿐만 아니라 < 내 깡패 같은 애인 >도 멜로가 기반이지만 88만원 세대의 고충이 이야기의 한 축을 구성한다. 특히 세진( 정유미 )이 입사 면접에 들어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무척 씁쓸한 현실 보고였다. 주로 어떤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갖고 영화에 담아내고자 하는가? 김 의도적으로 특정한 사회적 이슈를 영화에 담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영화가 반드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줘야만 하는 매체도 아니지 않나? 개인적으로 전쟁물이나 < 반지의 제왕 > 같은 판타지 영화도 즐겨 보는 편이다. 판타지 장르 영화는 논외로 하고, 영화가 드라마든 멜로든 어떤 장르든지 시대성, 사회성을 배제했을 때 무슨 의미가 있을까? < 내 깡패 같은 애인 >의 경우, 건달과 취업준비생의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배제하고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만 할 경우 관객이 그 영화를 볼 가치가 있을까? 속된 말로 ‘지들끼리 잘살면’ 되는 것이다.(웃음) 그 둘의 관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안에서 녹아들어오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 찌라시 >도 마찬가지다. 단순하게 배우와 매니저의 관계로만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은 의미 없는 멜로영화가 될 수 있다. 어떻게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안으로 끌어들여야만 그것이 장르적 재미로 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라면 한국의 시대성을 반영해야 한다. 그래야 이야기의 구성이 촘촘해지고, 관객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제작사(영화사 수박) 성향으로 볼 때 (※ 영화사 수박은 < 이태원 살인사건 >(2009), < 특수본 >(2011), < 찌라시 >(2013)를 제작했으며, 오는 10월 < 제보자 > 개봉을 앞두고 있다. 편집자 주) 초고는 조금 더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각색했나. 김 사실 초고 시나리오에서는 제목 그대로 ‘찌라시’ 유통업자 세계를 다룬 영화였다. 원래 내용은 매니저가 배우의 불미스러운 죽음을 캐내다가 결국 ‘찌라시’ 유통업자로 성공하는 이야기였다.(일동 웃음) 나는 이 구조에 동의할 수 없었고, ‘찌라시’를 통해 정치, 경제 등 이 사회의 권력구조가 어떻게 연계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많은 이가 < 부러진 화살 >( 정지영 , 2012)이나 < 26년 >( 조근현 , 2012)과 같이 사회적인 소재를 담은 영화와 비교해주신다. 하지만 두 영화는 소재 자체가 영화의 내용인데 반해, 나는 사회적 이슈를 영화의 배경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들과 < 찌라시 >가 다른 지점에 있다고 본다. 이 실제로 ‘찌라시’라는 것이 워낙 보안 유지가 철저한 유통 자료이다보니 자료 조사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 개봉 이후 TV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사설 정보지의 정보 생산과 유통에 관한 내용을 보여주었는데 영화의 내용와 매우 흡사하더라. 관객 역시 영화에 나오는 ‘찌라시’에 대한 내용이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궁금할 것 같다. 김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전 자료 조사와 관련자 인터뷰를 많이 했다. 하지만 조사를 하면서 이 사설 정보지를 유통하는 업자, 정보를 생산해내는 ‘정보맨’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전문적이거나 대단한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 대기업 홍보팀이나 전직 기자 수준이었다. 기자의 세계를 다룬 영화를 보면, 관객은 무척 전문적으로 보이겠지만 기자가 봤을 때 일상적인 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찌라시’ 유통업체들을 실제로보니 영화에서보다 더욱 영세했다. 이들이 결코 우리 사회를 움직이지 못한다. 이 소재가 영화에 표현되면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조사해보니 별거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최대한 사실감을 살려 ‘찌라시’에서 파생되는 권력관계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사실 모든 국민이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 권력이 정치와 경제 분야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한 번 더 각인시키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우리 사회에서 유통되는 ‘찌라시’는 어감 자체도 그렇고, 그 기능 역시 부정적인 측면이 많다. 하지만 박사장(정진영)이 매니저 우곤( 김강우 )에게 “자, 알았으면 이제 추가 취재를 하러 가자.”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찌라시’는 취재 기자들의 좋은 소스가 되기도 한다. 언론의 취재 형태를 어느 정도 상당 부분가지고 있다. 김 동의한다. ‘찌라시’는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위해 유통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보로서 유통된다. 그리고 그것이 주식, 사업 투자 등 돈과 관계되기 때문에 신속하게 입수하려고 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정보를 생산하거나 유통하는 사람도 있고 그 어감 자체도 상당히 부정적이지만 여전히 필요한 사람들에 의해 고급 정보로 유통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 영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어가보자.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만 해도, 미진( 고원희 )이 살해당하는 장면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 일반에 유포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영화적인 설정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불과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유튜브나 SNS를 통해 무척 선정적인 영상이나 이미지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예컨대 얼마 전 유병언 사체 사진이 인터넷상에 유포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과거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전문가들만 볼 수 있었던 영상을 대중이 모두 공유하는 것이다. 대중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보고 있달까? 미진이 살해당하는 영상. 이것은 오히려 2014년 현재 우리에게 더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김 영화적인 리얼리티와 그것의 의미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영화에서 미진의 동영상이 SNS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고 공유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미진의 동영상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것이 약간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더라도 관객에게 더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보면 언론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찌라시’ 유통업자 박사장은 결국 자신의 본업(기자)으로 돌아가 진실을 캐내려고 한다. 우리 시대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묻는 듯하다. 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권력은 정치계와 대기업이다. 보통 사회권력을 이야기할 때 언론을 언급하진 않는다.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심각한 모순이 언론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기자나 언론에 초점이 맞춰진 것은 사실이나 애초에 우리 사회에서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불의의 사고로 숨진 배우를 위해 진실을 캐내는 매니저 우곤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영화의 중심이 박사장일 수도 있었는데 특별히 매니저를 소시민의 영웅으로 내세운 이유가 있나? 김 영화에 다양한 직업이 등장한다. 이 영화가 정치인, 대기업, 언론을 다루는 영화이기는 하나 이 사람들의 시점으로 영화가 표현되면 자칫 정치적인 영화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한 정치권력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매니저에 관객이 감정이입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미진과 강우의 관계 설정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 단순히 배우를 아끼는 매니저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배우를 위해 진실을 밝히겠다는 것은 조금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나 생각한다. 김 그것엔 동의하지 않는다. 매니저와 배우는 서로 관계된 직업일 뿐이다. 영화의 인물이 반드시 가족이나 연인을 위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어야만 움직이나?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우곤을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부조리에 맞서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을 만들고 싶었다. 물론 둘 사이의 관계가 좀 더 명확했다면 관객의 입장에서 한결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대중적인 지지를 더 받을 수는 있겠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 사사로운 감정을 떠나 순수하게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 않나?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싶은 마음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제하려고 했다. 이 악한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절대악 차성주 역을 맡은 박성웅 의 연기가 돋보였다. 차성주의 역할을 계속 나쁘게 몰아가면서 선과 악의 대비가 더욱 더 조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김 사실 박성웅 은 < 신세계 >( 박훈정 , 2013)류의 조직폭력배 역할이 반복적이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나는 차성주 역할은 회사의 CEO, 국정원 직원이라며 그를 설득했다.(웃음) 이 배우를 계속 설득한 것은 무엇보다 잘 어울려서였다. 차성주라는 인물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등장과 동시에 관객에게 악한 이미지를 줄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다. (‘이’ 다음 작품에 로맨틱 코미디를 약속하고 < 찌라시 > 출연을 설득했다고 들었다.) 나도 언론의 인터뷰를 봤다. ‘만약 내가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연출한다면’ 같이 하겠다는 말이었는데, 주연을 시켜주겠다고 받아들였다.(웃음)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봐야겠다.(일동 웃음) 이 영화에서 액션이 차지하는 비중도 높다. < 찌라시 >에서는 액션이 적재적소에서 특정한 기능으로 사용된다. 가령 박사장의 은거지인 ‘찌라시’ 유통 회사를 찾아간 우곤이 번개(윤영균)와 격투를 벌이는 신은 나중에 이들이 한 팀이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둬 조금 가벼운 합이 된 것 같다. 김 맞다. 사실 그 격투 신은 굉장히 진지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찌라시’를 유통시키는 사무실에 대한 이미지가 무척 부정적이다. 결국 이들은 주인공과 한 식구가 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깰 필요가 있었다. 초반에 등장하는 ‘번개’도 그렇고, 백문(고창석)도 그렇고, 조금씩 부족해 보이는 설정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극복해나가려고 했다. 이 영화 초반 추격 신도 인상 깊었다. 자동차를 쫓아가는 사람. 애초에 불가능한 설정인데 도심의 빌딩을 잘 활용하고 계산해 결국 사람이 차를 따라잡게 만들었다. 상당한 재미를 주는 장면이다. 김 우곤이 번개의 차를 추격하는 것이 일반인이 ‘찌라시’를 추격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정보 없이 무모하게 쫓아가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해 쫓아가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그건 다른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라 이 방법을 택했다. 나중에 설명이 되긴 하지만 그래서 우곤을 전직 200미터 육상선수라고 설정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우곤이 매니저 일을 그만두고 발레파킹 일을 할 때 입고 있던 옷도 육상협회 옷이다.(일동 웃음) 그 추격신은 소공동에서 찍었는데 워낙 유동 인구가 많은 거리이고 최근 관광객도 많이 늘어 1주일에 한 번만 촬영할 수 있었다. 연기한 김강우 씨가 고생을 많이 했다. 이 이 영화의 세 번째 액션으로 차성주의 ‘손가락 부러뜨리기’를 얘기하고 싶다.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찌라시’라는 상징성 때문에 손가락을 부러뜨려 글을 쓰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가 함축된 것인가? 김 맞다. 애초에 시나리오상에는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장면이 한 번 등장한다. 하지만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은 깊은 인상을 줄 것 같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손가락이 부러진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그 느낌을 알기 때문에 더욱 잔인하게 느끼는 것 같다. 사실 차성주는 O&C라는 대기업의 대리인이다. 이 그룹의 악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차성주를 더 악한 인물로 나타내야만 했다. 사담이지만 영화 촬영 중 실제로 촬영감독의 손가락이 부러졌다. 근데 사실 별로 안 아프다고 하더라.(웃음) 더 잔인하게 손가락을 부러뜨려야 했다.(일동 웃음) 이 < 내 깡패 같은 애인 >과 < 찌라시 > 두 편에 모두 출연한 배우 이준혁 이 감독님을 두고 ‘조곤조곤 순해 보이지만 칼을 가진 감독’이라고 하더라. 현장에서 애드리브를 하면 좋다고 웃고서는 결국 그것을 다 편집해버린다고. 현장에서 쉽게 다가가 까다롭게 관철하는 스타일인가보다. 전략인가?(웃음) 김 나는 내 스타일을 잘 모르지만, < 찌라시 >를 함께 한 배우 정진영 도 비슷한 말을 했다. “배우가 현장에서 무엇을 요구하면 다 들어줄 것처럼 하다가 결국 감독 마음대로 한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다.”라고 하더라. 의견을 많이 듣는 편이나 결국 내 뜻대로 하는 편인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 관계가 좋다면 좋은 일 아닌가? 현장에서 강압적이거나 독단적인 모습을 보이진 않는데, 가능한 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설득하고 칭찬하면서 서서히 몰아가는 편이다.(웃음) 이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대중적 기호와 코드에 맞는 영화를 연출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 찌라시 > 역시 대중의 취향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인가? 김 < 찌라시 >를 그렇게 대중적 코드에 맞춰 연출하고 싶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영화를 연출하면서 어떻게든 대중과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는 나의 영화 전반에 대한 연출 철학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사실 ‘찌라시’라는 사설 정보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소재 자체가 일반적이지도 않고, 대중적이지도 않다. 그렇지만 해보고 싶었다. 오히려 <찌라시>는 대중적 흥행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이 < 내 깡패 같은 애인 >도 성과가 있었고, < 찌라시 > 역시 흥행 면에서 성공했다. 두 영화 모두 대진운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감독의 흥행운이 좋은 것 같다. 김 지금 < 명량 >이 10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시점에 나에게 흥행운이라니….(일동 웃음)
이번 <영화천국>이 주목하는 영화는 김영탁 감독의 < 슬로우 비디오 >다. 이 영화는 2014년 10월 2일 개봉해 누적관객 116만 9546명(영진위, 2015. 6. 2 기준)을 동원했으며, 개성 있는 연출로 그만의 독자적인 영화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김영탁 감독의 스타일이 잘 반영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지난 6월 1일, 영상자료원 인근 카페에서 김영탁 감독과 <씨네21> 김성훈 기자가 만났다. 김성훈 기자 지인의 소개로 인연을 맺은 후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늘 만나는 친한 친구처럼 <슬로우 비디오>에 대한 편안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기록 및 정리 _ 민병현 경영기획부 min@koreafilm.or.kr 사진 _ 이준구 포토그래퍼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성훈 기자(이하 ‘훈’) 칸 국제영화제 출장 때문에 어제(5월 31일) 비로소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 >(조지 밀러, 2015)를 봤다. 오늘 인터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면서 감독님 생각이 나더라.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큰 범위의 주제가 < 헬로우 고스트 >(2010)나 < 슬로우 비디오 >(2014)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조지 밀러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치의 희망도 없는 황량한 공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살아갈 곳이 없다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데, 감독님의 두 작품과 맞닿는 점이 있다고 느꼈다. 김영탁 감독(이하 ‘탁’) 너무 부담스럽다.(웃음) 사실 극장에 잘 가지 않는 편인데, < 매드맥스 >는 개봉하는 날 예매해서 봤다. 비교 자체가 조지 밀러 감독에게 미안하지만 일부 동의하는 점이 있다. <매드맥스>를 보면서 ‘사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느꼈고, 절망적인 시대에 무언가를 찾으려는 노력이 절절하게 보였는데, 나 역시 영화를 만들면서 큰 틀에서 이 두 가지를 담고자 노력한다. 나 같았으면 그 과정을 디테일한 스토리로 표현했을 텐데, 매우 단순한 플롯으로 리얼하게 보여줘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70세의 조지 밀러 감독이 오랜 세월 고민한 흔적이 보여 더욱 와 닿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그날 술을 많이 마셨다.(웃음) 훈 < 슬로우 비디오 > 개봉 전 비공개 시사회에서 영화를 봤다. 당시 스릴러 영화가 많이 개봉돼 이런 영화에 대한 피로감이 쌓여 있었다. 스릴러는 분명 매력적인 장르이고, 장르 특성상 창작자가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하기에 유리한 점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타 장르에 비해 투자가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최근 스릴러 영화들이 인물들을 도구로만 사용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야기 전개를 목적으로 작가가 필요한 지점에 인물을 설정한다고 할까. 그런 피로감이 생길 즈음 <슬로우 비디오>를 본 것이다. 영화가 무척 차분하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이 영화가 미학적 성취를 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평가받진 않았지만 소소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담아낸 영화를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다. 그래서 개봉 당시 <씨네21> 내에서 기획회의를 할 때 이 영화를 지지했다. 먼저, 전작 < 헬로우 고스트 >가 300여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서 투자도 잘되는 상황이었는데, 왜 이 영화를 선택했는지를 묻고 싶다. 탁 < 헬로우 고스트 >가 흥행에 성공하니 차기작에 대한 투자를 많이 제안받았다. 심지어 영화 편집 과정에서도 투자가 들어왔다.(웃음) 하지만 대부분을 거절했다. 원래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이야기 만드는 작업을 좋아하다보니, 내가 쓴 이야기 외에는 관심이 생기지 않더라. 그때 다 받았어야 하는데 후회된다.(일동 웃음) 사실 < 슬로우 비디오 >에 미안한 것은 원래 이 영화를 차기작으로 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너무 따뜻한 감독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차기작으로 스릴러 장르의 어두운 성장물을 준비했다. 국내의 메인 투자배급사와 계약도 하고 톱 배우도 캐스팅이 완료된 상태였다. 그렇게 팀을 꾸렸는데 크랭크 인 두 달 전 그 배우가 사정이 생겨 하차했다. 투자배급사와 계약을 했기에 다른 배우를 기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애초에 염두에 둔 배우가 아니면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태프들에게 그동안의 급여를 주고 해산하니 손실이 발생해 빨리 다른 작품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급하게 쓴 작품이 <슬로우 비디오>다. 그 후 시나리오 문제로 의견 차이가 있어 다른 투자배급사를 알아보던 중 20세기폭스사가 하겠다고 나섰다. 폭스로 옮기면서 이전 투자배급사와 갈등이 있진 않았다. 이해해줬고, 원만하게 잘 해결할 수 있었다. 훈 < 슬로우 비디오 >를 보고 20세기폭스사에 연락해 왜 이 영화에 투자했냐고 질문한 적 있다. 시사회 다음 날 시나리오도 구해서 읽어봤지만, 비평가로서 구성이 좋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만약 내가 투자배급사였다면 투자를 안 했을 것 같다. 흥행이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탁 대담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잘 정리해달라.(일동 웃음)) 하지만 폭스의 대답이 흥미로웠다. 폭스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우선 시나리오가 원작이라는 점이었다. 직배사가 로컬 시장에서 영화를 제작할 경우 원작의 권리관계가 복잡하다거나 이야기 외적인 문제의 소지가 있을 것 같으면 일차적으로 골라낸다. 최근 주목할 만한 한국영화는 원전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슬로우 비디오>는 원작이고 작가의 개성과 독창성이 뚜렷해서 투자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탁 그런 면에서 제작 투자를 총괄한 허성일 프로듀서에게 감사하다. 초고를 보고 내가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해줬다. 여러 투자배급사와 일해보지 않아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폭스의 경우 사소한 개입을 하지 않아서 원활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훈 영화의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개인적으로 < 슬로우 비디오 >가 좋았던 이유 중 하나가 CCTV다. 통상적으로 영화에 나오는 CCTV는 으레 누군가를 몰래 훔쳐보는 범죄의 도구, 결정적 단서, 음침하고 음흉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CCTV는 우리 주변을 따뜻하게 비춘다. 이 점이 재기발랄해 보였다. 이 부정적인 느낌의 장치를 긍정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좋은 아이디어였고, 그래서인지 일종의 판타지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CCTV를 어떻게 달리 보여주고자 했는지 묻고 싶다. 탁 글을 쓸 때 여러 가지 화두를 가지고 쓴다. < 슬로우 비디오 >의 시작은 ‘본다’였다. 사랑하는 여자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남자가 여자를 제대로 본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친구 중에 ‘안구진탕증’이라는 병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눈이 떨리는 병인데,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그래서 째려본다고 오해도 받고,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고 친구들이 싫어했다. 이 친구에게서 모티프를 얻어 그런 아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똑바로 쳐다보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안구진탕증’을 ‘동체시력’으로 바꾸긴 했지만 말이다.(동체시력이라는 용어는 있지만 영화에 나오는 증상은 지어낸 것이다.) CCTV가 우리를 따뜻하게 바라본다는 설정은 내가 영화를 만들 때마다 늘 마음에 담고 있는 일종의 영화 철학과 관련이 있다. 영화감독 혹은 작가의 삶을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러울 때가 많다. 굳이 다른 이타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언급하지 않아도, 너무 이기적인 직업이다. 주변 환경이 어떻든 난 집에선 글만 쓰고, 현장에서는 영화에만 매달린다. 사실 이기적으로 살지 않으면 잘할 수 없는 직업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작가, 감독이 그렇진 않다. 그래서인지 적어도 나는 내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현재로서는 그렇다. 더 나이가 들고 또 다른 영화를 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예민한 편이라 평소 CCTV가 무척 거슬린다. 분명 나를 훔쳐보는 것도 맞는데, 잘 생각해보면 저 렌즈 너머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이 결국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우리를 옥죄어오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CCTV 센터 안의 사람들을 캐스팅할 때도 신경을 썼다.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누가 봐도 불편함보다는 친숙함을 줄 수 있는 배우들로 센터가 채워져 있다. 훈 캐스팅 이야기로 넘어왔는데, < 슬로우 비디오 >에서 차태현 씨를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이전 작품부터 함께하면서 신뢰를 쌓았는데, 배우 입장에서 소속사에서 말리는 배역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던가? 그리고 여장부(차태현)라는 인물에 대해 어떤 자세로 임했는지 궁금하다. 탁 우선, < 헬로우 고스트 > 이후 작업을 한 번 더 하자는 제안을 했다. 차태현 씨는 늘 고맙게 생각하는 배우이자 동료다. 동갑이라 말도 잘 통하고, 배우이자 예능인이다보니 늘 타인에게 자신을 잘 맞추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지만 실제 성격은 나와 비슷하게 어두운 면도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나의 유머 코드를 좋아한다. 시나리오를 보고 여장부를 “그냥 감독님 같다. 딱 김영탁 이다.”라고 하더라.(웃음) 말했듯이 평소에 CCTV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 시나리오는 훔쳐본다와 지켜본다의 균형감이 있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태현 씨가 캐스팅되면서 지켜본다 쪽으로 기울어진, 판타지가 가미된 휴먼 스토리가 되었다. 그 방향이 태현 씨에게 맞는 옷이라 생각했다. 훈 차태현 이라는 배우는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에서 보여주는 밝고 쾌활한 이미지가 있고, 이전에 출연했던 영화나 드라마 역시 그런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인지 차태현 씨가 어쩌면 작가적인, 개성 있는 영화에 갈증이 있지 않았나 싶다. < 슬로우 비디오 >를 선택한 것도 배우 차태현의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한다. 탁 < 헬로우 고스트 > 촬영 때 차태현 씨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여러 번 있다. 한번은 자신의 연기를 바꿔준 세 명의 감독이 있다고 하더라. 1999년에 방영된 SBS 드라마 < 해피투게더 >의 오종록 감독, < 엽기적인 그녀 >(2001)의 곽재용 감독, 그리고 세 번째가 김영탁 이라고 했다. 그때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오늘 술을 많이 마셨구나, 그리고 지금 기분이 좋구나.(일동 웃음) 아마도 태현 씨가 그전에 만난 감독들과 나는 조금 다르긴 했던 거 같다. 내가 현장에서 차태현 씨에게 한 디렉션은 그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것이었다고 한다. 보통 감독들은 차태현 씨에게 “조금 더 웃기게” “조금 더 밝게”를 요구했단다. 하지만 난 그런 요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 헬로우 고스트 >에서 차태현 씨는 애드리브 연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철저히 짜인 구성대로 연기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를 통해 연기적인 측면에서 인정받은 부분이 있어 만족하지 않았나 싶다. < 슬로우 비디오 > 때는 차태현 씨가 시나리오를 아내에게 보여줬는데, 아내가 “글은 좋은데 이건 관객 50만 명도 안 든다.”라고 하고, “그래도 할 거잖아.” 했단다. 그리고 영화 개봉 후, 아내가 좋아하더라는 말을 태현 씨에게 들었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았다. 사실 배우 입장에서는 영화 대부분의 장면에서 눈을 가리는 것에 대한 부담감 내지는 거부감이 들 수 있다. 소속사 역시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현 씨는 영화의 80% 분량에서 선글라스를 써줬다. 차태현 씨가 무한한 신뢰를 보여준 것이 정말 큰 힘이 되었다. 훈 여장부라는 캐릭터는 현실적이지 않다. ‘동체시력’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판타지스러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여장부는 누가 봐도 차태현 이 적격이다. 국민 대부분이 그 부분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캐릭터가 되었다고 본다. 감독 입장에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 같다. 등장인물의 설정이 비현실적이면 초반부에 이 캐릭터에 대해 관객을 설득해야만 한다. 여컨대 왜 여장부가 동체시력을 갖게 되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차태현 씨가 여장부를 연기하면서 그 과정을 생략했다고 관객들에게 불친절한 느낌을 주진 않았을 것이다. 탁 동의한다. 차태현 씨는 워낙 사적으로도 가까워 현장에서도 잘 맞는다. 그리고 다른 배우분들의 힘도 컸다. 오달수 선배님은 베테랑 배우이고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선배지만 현장에서 5~6번 재촬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워낙 연기를 잘하시지만 호흡이나 연기톤 등 그간 보여줬던 연기와는 조금 다른 방식의 연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잘 따라주셨다. 그리고 그 이상을 보여주셨다. 고창석 선배님 역시 고맙다. 영화에는 많이 등장하지만 사실 단 하루만 촬영하셨다. 원래 카메오 형식으로 출연하려고 했는데, 대사도 철저히 준비해주셨고, 짧은 시간에 완벽한 연기를 해주셔서 감탄했다. 사실, 출현해주신 모든 배우 분한테 고맙다. 게다가 이번엔 편집도 많아서 미안한 마음도 있다. 훈 < 헬로우 고스트 > 개봉 당시 기자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있었다. 부정적으로 보는 기자들 대부분은 이 영화가 호흡이 느리다는 것이었다. 호흡이 느리다는 것은 지루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 지루하지 않더라.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을 쏟는 작업이라고 봤다. 하지만 최근에 <헬로우 고스트>를 다시 봤는데 약간 촌스럽다고 느꼈다. 카메라가 인물에 가까이 가다보니 상대적으로 배경이 드러나지 않아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 슬로우 비디오 >는 배경을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인물이 더욱 풍성해 보였고, 인물의 성격도 유추할 수 있게 해줬다고 생각한다. 시나리오 작업할 때, 그리고 촬영할 때 여장부를 둘러싼 여러 인물을 설정하면서 전작과 차별되는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탁 < 헬로우 고스트 >를 돌이켜보면 세 가지 패착이 있었다. (훈 패착이라는 표현은 가혹하다.(웃음)) 그럼 아쉬운 점이라고 하겠다.(일동 웃음) 우선 무지했다. 난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하지 않았고, 연출부 경력도 없다. <헬로우 고스트>가 데뷔작이다보니 카메라 앵글 등 기술적인 부분에서 미흡한 점이 많았다. 두 번째는 오만했다. 난 내가 데뷔하면 역사에 남는 영화를 찍을 것이라 생각했다.(웃음) 내가 평소 즐겨보고 좋아하던 영화, 그 감독만큼 영화를 잘 찍을 줄 알았다. 그래서 <헬로우 고스트>의 구성을 기존의 ‘기-승-전-결’이 아닌 ‘기-승-승-결’로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도 완성도가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오만이었다. 마지막으로 고집스러웠다. <헬로우 고스트> 시니라오를 쓸 때 서른세 살이었다. 당시 인생을 산다는 것이 매일 즐겁진 않더라. 우리는 특정 순간의 좋은 기억으로 남은 세월을 사는 것 같았다. <헬로우 고스트>로 우리 일상이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보는 관객에 따라 이 영화를 지루하게, 그리고 호흡이 느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밖에 못 찍는 것이 아니고 원래 이렇게 찍은 영화라고 생각해주셨으면 한다. 반면 < 슬로우 비디오 >는 좀 더 관객의 입장에서 만든 영화다. 실제로 전작에 비해 “영화가 많이 좋아졌다.”는 말씀도 많이 해주시더라. 하지만 난 여전히 <슬로우 비디오>의 호흡이 급했다고 생각한다.(웃음) 훈 영화 호흡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다. 영화에는 천천히 걷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원래 느린 호흡을 선호하는 감독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장면들이 후반부에 그림 지도를 완성해나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작 과정에서 호흡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 탁 < 슬로우 비디오 >는 편집이 한 번 크게 바뀌었다. 원래는 내레이션과 여장부의 속말이 많지 않았다. 1차 편집 후 제작진은 너무 만족해서 신속하게 블라인드 시사를 열었는데, 난리가 났다. 재미없다고 말이다.(웃음) 내 성격상 단순히 재미만 없다면 편집을 바꾸지 않았을 텐데, 많은 경우 재미라는 건 주관적인 판단이니까. 한데 반응을 체크해보니 주인공의 심리 파악이 힘들다는 의견이 많았다. 감독으로서 주인공이 이해되지 않는 영화를 만들면 안 되지 않나. 그래서 내레이션과 속말을 넣었다. 이후 다시 블라인드 시사를 했는데 점수가 많이 좋아졌다. 폭스 인터내셔널 대표도 좋아하더라. 훈 < 슬로우 비디오 >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상업영화에서 한 공간, 작은 범위의 공간을 애정 있게 다룬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 등장인물들과 밀접하게 관련 있기도 하다. 탁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을 통해 최대한 일상을 지지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다. 다시 말해,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함께 동네를 산책하는 느낌이 들게 하고 싶었다. < 슬로우 비디오 >에 나오는 공간 대부분은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곳들이다. 등장인물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장소 헌팅 때 이런 콘셉트를 요구하면 대부분 보기 좋은, 예쁜 공간을 조사해 와서 애를 많이 먹었다.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동네, 공간은 여러 곳이 내가 살았던 곳이다. 또한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곳들이기도 하다. 훗날 나이를 더 먹고 아내와 함께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함께했던 공간들을 추억하고 싶다는 약간의 사심도 담겨 있다.(웃음) 훈 차기작을 준비 중이다. < 헬로우 고스트 > < 슬로우 비디오 >와 다른가? 탁 외적으로는 좀 더 대중적인 개연성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구상 중이다. 영화의 대중성에 대해 요즘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차기작은 사극인데, 고집스럽게 혼자 작업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처음으로 공동각본을 진행 중이다. 전작 두 편 모두 내 자식이라 좋아하지만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서둘지 않고 한 편 한 편 성장하다보면 관객들이 좋아하는, 또한 나 스스로 보다 만족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 같다.
숲은 빛이 춤추는 사원이자 대성당이다. -제인구달 어느 날, 아이를 재우며 제인 구달의 책 <내가 사랑한 침팬지>를 읽게 되었다. 아이는 일찌감치 잠이 들고, 책장을 덮으려는 순간 한 구절이 다가왔다. ‘숲은 빛이 춤추는 사원이자 대성당이다’ 성미산 마을 연작다큐멘터리 첫 번째 작품의 제목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춤추는 숲 >은 우리 가족이 성미산 마을에 터를 잡은 지 5년째 되던 해, 강석필 감독(마을별명 맥가이버)이 마을 다큐를 기획하면서 시작되었다. 도시에서 아이를 키울 수 밖에 없다면, 아이에게는 믿을만한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했고, 우리에게는 동네 친구 몇 명쯤은 사귈 수 있는 곳이었으면 했다. 서울을 조금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에 수도권 일대의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홍피디가 살던 지금의 성미산 마을에 깃들게 되었다. 이후 아이가 어린이집을 졸업할 무렵, 맥가이버(줄여서 맥)와 호호는 비로소 ‘마을’이라는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맥가이버!” 도시의 어떤 곳에서 이런 인사가 가능할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물처럼 흐르는 따뜻함.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좋은 관계이고, 그런 관계가 생활에서 확장된 것이 마을이다. 바로 그 마을에서 성미산 사람들은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 성미산 마을에는 한가지 특별한 매력이 더해진다. ‘모두에게 꼭 필요한, 더 나은 길은 없을까?’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결과가 실패든 성공이든 용감하게 길을 찾아간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람을 춤추게 하는 마을의 힘은 무엇일까?’ < 춤추는 숲 >은 바로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다큐멘터리다. 물론 이 질문에는 다큐멘터리 감독의 시선과 더불어, 마을의 일원인 내부자의 시선이 동반되는 독특한 입장이 담겨있다. 지금이야 한국사회 전역에서 ‘마을’이 화두지만, 6년 전 맥이 <춤추는 숲>을 기획할 때만 해도,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서 20여 년 전 한 줌의 부모들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세우고 성미산 마을의 씨앗을 뿌릴 때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마을’은 죽은 말이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한국형 마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성미산 마을이 시작된 것이다. 낙지가 달려오고, 굼벵이가 실려가다. 마을의 일상을 다루고 싶었던 마을연작 중 1부는, 2010년 성미산 개발이라는 돌발상황을 맞으며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 춤추는 숲 >에서 성미산 개발을 둘러싼 상황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개발 그 자체가 작품의 화두는 아니다. 마을로서는 특별한 위기의 순간을 맞았으나, 제작진의 관심사는 그것을 풀어가는 마을과 사람들에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사회에서 개발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곧바로 환경다큐멘터리로 규정하거나 머리띠와 구호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춤추는 숲>은 다른 맥락에 기대어 있다. 영화에는 낡은 가치를 뒤집는 성미산 사람들만의 유쾌한 해법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즐겁되, 함께 행복한 방법’을 찾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쾌한 반전은 파란만장한 싸움의 과정에서도 늘 숨어있었다. 어느 날 새벽, 용역들이 대거 투입돼서 성미산 지킴이 텐트를 부수는 상황이 끝나고 기자회견이 있었다. 상황을 보고하는 기자회견에서 진행자 멘트가 압권이었다. “굼벵이가 쓰러지자, 낙지가 달려오고, 토끼가 몸싸움을 했습니다!” 푸하하! 눈물겨운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잠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맥가이버와 호호처럼 마을에서는 별명을 쓴다. 그런데 그날 산에 있었던 사람들이 ‘굼벵이와 낙지, 토끼’였던 것이다. 이런 기막힌 순간은 촬영되었지만, 영화의 흐름상 아쉽게도 쓰이지는 않았다. 쟁이와 꽃다지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다. 6년 동안 공들인 < 춤추는 숲 >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상영되면서, 영화의 주연배우들인 주민들이 동행하게 되었다. 영화제에 배우로 참석하는 특별한 경험을 나누고 싶기도 했고, 제3자인 관객들로부터 자신들이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자리라 설레고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3분 동안 끊이지 않고 박수가 이어졌다. 객석에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커플이 첫 번째 포문이 열었다. “가슴 아픈 상황이라 보는 내내 대성통곡했습니다. 동시에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울다가 웃다가 정말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날 저녁 진하게 뒤풀이를 하고 서울로 가는 쟁이가 감독에게 문자를 보냈다. “맥가이버와 호호! 영화를 만들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쟁이와 꽃다지는 여전히 마음의 상처를 돌보는 중이다. 행복한 영화, 마을이 움직인다. ‘한 아이가 자라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오랜 속담이 있다. 아이가 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돌봄 속에 자라듯, < 춤추는 숲 > 역시 비단 제작진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품을 거쳐 마을에서 나고 자란 특별한 영화다. 이 행복하고 감사한 영화가 만들어낼 의미 있는 기적을 예감하면서, <춤추는 숲>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유쾌한 바람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사진설명_ 1. 상단사진: .< 춤추는 숲 > 청소년 홍보팀과 홍형숙 PD 2. 중간사진 (좌) 강석필 감독과 홍형숙 PD (사진 김성곤) (우상) < 춤추는 숲 > 예고편 촬영한 김우영 촬영감독과 연출한 자경 감독 (사진 가림토) (우하) < 춤추는 숲 > 예고편에 출연한 마을 주민 배우 고창석 님의 가족 (사진 가림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