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KBS 지키기 위해 기자들이 나섰다
- 제작년도
- 2008
1984년 9월 23일 저녁, TV에 등장한 한 벽안(碧眼)의 남자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스라엘 출신의 마술사 유리 겔러는 KBS 1TV에서 방송한 ‘세기의 경이 초능력 유리 겔러 쇼’에 출연하여 숟가락을 구부리고, 시계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초능력을 부려 충격을 주었다. 방송을 본 원근각지의 시청자들 중에서는 숟가락 구부리기 기적에 동참한 사람들의 체험담이 답지했는데, 이 불가사의한 순간에 유리 겔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중요한 걸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숟가락을 구부린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보일 수도 있죠. 그러나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대관절 웬 헛소리인가? 숟가락 구부리기가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니. 유리 겔러의 초능력 쇼는 88 서울올림픽 30주년을 기념하여 KBS에서 제작한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 88/18 >에 삽입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간절히 염원하는 것은 이루어지고 만다, 는 의지를 칭송한 초능력자 혹은 사기꾼이 남긴 선문답은 이 혁신적인 다큐멘터리의 핵심을 향하는 메타포처럼 들린다. 방송 다큐멘터리의 영역을 개척했을 뿐 아니라 다큐멘터리 문법의 전형을 다시 생각하게 한 <88/18>는 2019년 ‘모던 코리아’ 연작으로 계승되어 올해 공개된 시즌3에 이르고 있다. 독립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이태웅이 기획, 연출한 <88/18>은 서울에서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1988년과 2018년 사이에 놓인 30년의 시간차를 왕래하며 1980년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를 정의하려 한다. 과거와 미래, 파괴와 재건, 거짓과 환멸은 그 시대를 규정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일까? 서울올림픽을 앞둔 한국인들에게 혼연일치된 마음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초능력자, 진짜로 우리에겐 초능력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가 말한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과 세계평화 사이의 상관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관계를 조직하는 것’은 기록과 보존, 배열, 편찬, 재배치, 해석, 재맥락화 등 동시대 다큐멘터리의 주요 의제들을 관통하는 이 문제적 다큐멘터리의 에센스이다. 기록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한 <88/18>는 공영 방송국 기록 보관실에 안장된 거대한 영상 아카이빙 자료들을 모아 현재 시점에서 연출된 인터뷰와 엮는다. 파운드 푸티지 또는 편찬 다큐멘터리의 관례들에 비추어 <88/18>의 참신함은 영상 아카이브 자료가 만들어진 시점의 문맥을 폐기처분하는 담대한 결정에서 나온다. 최초의 문맥을 폐기한다는 것은 새로운 문맥을 형성하겠다는 의지와 상통하는 바, 아카이브에 담긴 흔적을 모으고 이어 붙여서 재구성한 장면들은 본래 연결되지 않았던 푸티지들의 논리를 형성하여 원본에 속하지 않은 의미와 맥락을 창조한다. 환언하면, 이 다큐멘터리는 1980년대 영상 기록을 추출하여 2018년의 시점에 재배열한 뒤 시청자들에게 30년의 시간을 성찰하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가공과 재해석이라는 행위는 특정 시공간의 좌표에 놓인 기록에 부과된 고정적이고, 단일한 의미에 저항하면서 창조적 글쓰기를 실천한다. 재배열은 재해석을 요구하며 제3의 의미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대중들의 집단기억 또는 악몽을 초월하여 새로운 사유의 경로를 개척하는 활동이다. 아카이브를 매개로 한 과거와의 네트워킹이 역사, 자료, 사실에 기초한다는 가설을 이 다큐멘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가공과 변형, 재구성을 지향하면서 자료의 역사는 창조적인 의미에 자리를 기꺼이 내어줄 태세가 되어 있다. 냉전과 근대화, 도시 개발, 기술혁명, 계급 분화 등 시대의 풍경들이 경쾌하게 흘러가며 시청자들은 말과 이미지 사이의 거리, 틈새를 메워야 한다. 올림픽을 다루고 있지만 경기 중계화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올림픽이라는 이벤트의 내외, 전후를 규정하는 다양한 맥락들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흡사 북한 방송을 보는 것 같은 어조로 말하는 사람들은 시간의 덧없음을, 그 위에 얹힌 그래픽 디자이너 김기조의 형형색색 타이포그라피는 충돌과 부조화의 파토스를 자아낸다. <88/18>의 또 다른 특성은 전지적 나레이션의 부재이다. 나레이션을 통한 설명이나 정리를 회피하고 하나의 의미에 이미지를 정박시키는 틀에 박힌 배열을 경계하면서 다원적인 출처들을 드러내는 것이 플롯의 목적이다. 나레이션이 없는 대신 시청자가 최소한의 이야기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은 하나의 주제와 방사형으로 얽힌 이들의 인터뷰이다. 아카이브와 인터뷰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지 않으며 독립적인 존재감을 가지며 투트랙으로 나란히 병치된다. 아카이브 이미지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말도 발화 시점의 의도를 배반하면서 다른 관점의 논평을 제공한다. 전체 서사를 주재하는 인물로 5공의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이었던 허화평, 건전가요 ‘아! 대한민국’을 부른 가수 정수라,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를 디자인한 디자이너 김현, 예술의 전당의 건축 설계를 맡은 건축가 김원,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정화의 명목으로 철거된 빈민촌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 상계동 올림픽 >(1988)을 만든 영화감독 김동원, 상계동 철거민 김진홍, 컴퓨터 엔지니어 이철수 등이 각자의 위치에서 증언자의 역할을 한다. <88/18>은 잠자는 이미지를 깨어나게 하고 자료에 생명을 부여한다. 프로듀서 이태웅은 시청각 이미지를 통해 지적인 의미를 생산하는 아이디어를 탐구하고자 한다. 상호 독립적인 두 쇼트 사이에서 파생하는 아이디어를 추적하면서 관객의 마음에서 실제로 펼쳐지는 연상의 순서를 뒤집는다. 도입부에 1988년과 2018년을 평행하게 놓아 30년의 간극을 묘사하는 한 시퀀스를 사례로 들 수 있다. 1988년 ‘제5 공화국 언론통폐합 청문회’에서 국회의원 이철은 증인석에 앉은 허화평을 “5공의 핵심적인 인물”로 지목한다. 1988년의 허화평은 이철이 들려준 세평(世評)을 수긍한다. 이어지는 쇼트에서, 2018년의 카메라는 의자에 앉은 초로의 노인이 된 허화평의 깍지를 낀 채 모은 두 손을 시발로 하여 헤드를 살짝 들어 그의 몸통을 찍는다. 얼굴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화면 바깥에서는 또 다른 국회의원으로 추정되는 성명불상의 목소리가 “보안사의 실세”를 이야기한다. 다시 쇼트는 전환되어 1988년의 청문회에서 허화평이 보안사의 실세들이 누군지 설명을 요구한다. “삼 허씨(허화평, 허문도, 허삼수), 이학봉 씨, 이런 것이 실셉니다, 알았습니까? 알았지요”라고 추궁하는 화면 바깥 보이스오버에 대항하여 허화평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립니다”라며 부인하는 취지의 답변을 한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1988년의 허화평과 2018년 허화평의 얼굴이 교차하면서, 2018년의 허화평은 “내 자신이 5공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을 해본 일은 없고, 다만 확실한 것은 5공을 이야기할 때 허화평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노라”고 말한다. 1988년의 허화평과 2018년 허화평의 나란한 배열은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이기도 한 ‘88/18’의 꼴을 제시하고 있다. “5공의 핵심적인 인물”과 “보안사의 실세”의 차이, 저 두 가지 수사와 “5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허화평”의 간극은 무엇인가?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과 “세계평화”사이의 거리만큼일까? 아카이브 자료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저 말들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다. 인과적 논리에 따라 조합되지 않는 요소들을 재구성하여 상상적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것, 기록을 생산하는 시점의 맥락에서 벗어나 그것의 처리방식이 의미를 생성하는 전기(轉機)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인간의 마음을 조형하는 이 접근법은 의미를 생성하는, 관습적이고 자의적인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생성의 과정을 활력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생각의 대상을 제시하는 것과 생각의 과정을 탑재하는 것의 차이를 보여주는 아카이브 다큐멘터리의 수사학은 의미에 대한 세뇌를 넘어 미묘하고, 보는 사람이 알아채기조차 어려운 지적인 체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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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1983년 가수 정수라가 부른 노래 <아! 대한민국>의 가사와 달리 1980년대 서울은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롭진 않았다.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이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단행했고, 하루 뒤인 5월 18일 광주 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서울의 봄은 오래 가지 못했다. 5공화국은 ‘새 봄이 왔네, 새 시대 왔네’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눈 가리고 아웅하기 바빴지만, 새 봄도 새 시대도 오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킬 구실이 필요했다. 그렇게 꺼내든 카드가 88 서울 올림픽 유치이다. 이태웅 KBS 스포츠국 PD가 연출한 < 88/18 >(2018)은 지난해 서울 올림픽 3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다큐멘터리다. 공영 방송이 만든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서울 올핌픽의 치적을 칭송하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드라마, 개그 프로그램, 뉴스, 인터뷰 등 당시 방영된 여러 영상 클립들을 재구성해 올림픽이 부여한 시대적 과제인 변화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푸티지 다큐멘터리다. 당시 한국 사회는 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도심 가시권을 정비했다. 공중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꾼 뒤 ‘외국인 전용 화장실’이라고 구역을 따로 정한 결정이며, 방송 기자가 뉴스에 출연해 “카메라가 오니까 (쓰레기를) 치우느라 바쁘신 것 같은데 좀 (깨끗하게) 치워주세요”라고 시민에게 말하는 장면은 ‘웃프’다. 올림픽을 미국과 소련의 대립에서 기인한 냉전 이데올로기 각축장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다. 또, “정권 유착은 하나의 필요조건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충분조건은 절대로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인 <유머1번지>에서 선보인 코너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에서 회장(김형곤)이 강조한 말대로 올림픽은 정치와 재벌의 유착이 얼마나 끈끈하게 이루어졌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이벤트이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시 대한수영연맹 회장을,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대한 레슬링협회장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복싱협회 회장을 맡았다. 5공화국 실세 중 하나인 허화평 당시 대통령 정무수석이 “그거 (재벌이 스포츠를) 안 하면 세금조사 안 하겠습니까. 농담입니다. 하하하”하고 말하는 장면은 올림픽이 정권과 재벌의 연결고리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양한 매체에서 선별된 영상들이 서울올림픽을 앞둔 당시 한국사회를 다양한 시각으로 풍자한다는 점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국 씨름 현대사를 2부작으로 구성한 다큐멘터리 <천하장사 만만세>, 홍명보 감독이 이끈 런던 올림픽 축구 대표팀의 일거수 일투족을 생생하게 담아낸 <공간과 압박>과 <선택> 등 이태웅 PD가 만든 많은 스포츠 다큐멘터리가 그렇듯이 <88/18> 또한 내래이션이 없고, 김기조 디자이너가 작업한 단순한 폰트의 자막이 꼭 필요할 때만 쓰인다. 그것이 내레이션과 자막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요즘의 방송 다큐멘터리와 사뭇 다르다. 또, DJ 소울 스케이프의 음악은 각기 다른 매체에서 골라낸 영상들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한다. <88/18>은 극장용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공영방송이 가지고 있는 아카이브를 적재적소에 활용해 서울 올림픽의 이면을 때로는 날카롭게, 또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들추어낸 수작이다.
< 아파트 생태계 >는 작년에 고인이 되신 손정목 선생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라는 5권짜리 책을 읽으면서 시작되었다. 손정목 선생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는 무척 쉽게 읽히면서도 애잔한 감정을 전해주는 책이다. 선생의 거리낌 없는 주변에 대한 디스와 도시 덕후로서의 면모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특히 본인이 서울시의 도시계획국장으로 일했던 1970년대에 대한 서술은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일 듯 생생했다. 2014년 봄에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다섯 번의 인터뷰 촬영을 진행했고 일상의 모습도 촬영해 두었다. 당시 선생은 자신의 도시계획에 대한 모든 자료를 서울시립대학교에 기증하고 그 기증자료실에 매일 출근해서 새로운 책을 집필 중이셨다. 이때만 해도 이 인터뷰가 어떻게 영화에 쓰일지는 알 수가 없었다. 손정목 선생은 인터뷰 당시 혼자 거주하던 전농동 래미안아파트 내부까지 촬영을 허락하셨고 솔직담백한 말로 자신이 속한 한 세대의 종언을 예고하셨다. 나는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구상을 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손정목 선생에게 작품의 완성 시기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했다. 손정목 선생은 자신도 쓰다가 나중에 완성하려고 쌓아둔 원고 뭉치들이 많다고 했다. 그 비슷한 거냐고 했다. 나는 딱 알맞은 비유라고 답했다. 2015년에 건축가 조성룡 선생에게 연락이 왔다. 올해의 건축가로 선정된 건축가에게 제공하는 작은 전시 기회가 있다고 했다. 그 전시에 본인이 설계한 아시아선수촌아파트에 관한 영상물을 상영하고 싶다고 하셨다. 1986년에 완공된 아시아선수촌아파트는 건축가에게 아파트 설계를 맡긴 파격적인 프로젝트였다. 나는 아파트 단지 곳곳을 둘러보았다. 정말 좋은 아파트였다. 그리고 무지하게 비싼 아파트였다. 다양한 나무들과 다채로운 길들이 공원으로 이어진다. 아파트 단지 안을 거닐면서 느껴지는 거리감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 인간과 인간의 적절한 거리 감각을 아파트에서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최근에 만들어지는 고급 아파트들과 달리 공간들은 열려있으면서도 개인의 사적인 영역은 존중되었다. 진짜 고급아파트라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일주일 정도 촬영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목적으로 촬영된 푸티지들로 올해 봄부터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구성해보기 시작했다. 서울 아파트 역사를 개인들의 삶과 기억을 통해 전개시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다큐멘터리 만드는 방식이나 서사에 좀 변화를 추구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장기간 지속되는 다큐 촬영에 지쳤던지라 제작의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고 스토리텔링의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구성해 보고자 했다. 먼저 아파트 전문학자들의 자문과 자료조사를 통해 촬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아파트들을 리스트업 했다. 배우를 캐스팅하는 심정으로 아파트 헌팅을 다녔다. 그렇게 세운상가아파트, 여의도시범아파트, 남산제2회현아파트, 서소문아파트, 반포주공아파트, 상계동아파트단지, 목동아파트단지 등을 영화에 담았다. 시민아파트로 시작된 아파트가 어떻게 중산층을 위한 단지형 아파트로 변화했는지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주거의 의미에 대해서도 표현해보려 시도했다. 아파트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과, 경제 가치를 위해 그저 아파트를 사고팔고 재건축하기에 급급한 삐뚤어진 사랑 사이에서, 우리가 잊은 것은 없는지 질문해 보고 싶었다. 아파트에도 우리의 역사, 우리의 기억이 있다. 도시의 역사와 함께 형성된 다양한 생태계가 있다. 무책임한 주거정책과 건설자본의 비윤리성에 대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사는 아파트와 도시가 애정과 관심의 대상임을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 다큐멘터리의 역사는 주거 공간에 대한 투쟁을 기록하는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8년 만들어진 김동원 감독의 < 상계동 올림픽 >에서처럼 하루아침에 재개발로 삶의 공간에서 내몰리던 사람들을 기록하며 시작된 것이 한국 다큐멘터리였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이 무단 점유해 삶의 공간으로 변화시켰던 구도심의 산동네와 개천변을 공유지라는 이유로 철거하던 시대를 경유해 이제 그 공간들은 아파트로 빽빽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파트들이 이제는 재건축이라는 새로운 화두에 직면해 있다. 쫓겨나면 갈 데가 없었기에 절박했던 폭력적인 재개발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그 아파트 단지로 이루어진 공간들이, 이제 재건축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공간 파괴의 시작점이 되고 있다. 아파트에 살던 세입자들은 재건축이 결정되면 그냥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이주비를 받아서 떠나는 세입자들에게 재건축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혜택을 주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공적인 녹지공간을 줄이고 최대한의 사적 공간 확보와 고층화를 원하는 것이 이전처럼 정부나 서울시가 아니라 아파트 소유자들이 주축이 된 재조합이라는 것이다. 현재 강남3구의 아파트 재조합들과 서울시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나는 과거 국가권력의 폭력적인 철거를 탓하는 것은 차라리 쉬운 편에 속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내부 안에 아우성치는 아파트 재건축을 통한 불로소득에 대한 통제 불능의 끝없는 욕망은 정말 알아갈수록 답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국가권력에 대해서는 공공성의 잣대로 비판할 수 있지만 내 이웃의 이기적인 탐욕과 욕망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답을 찾기가 힘들다. 재건축을 통해 불로소득의 맛을 본 노령세대의 부동산 사랑은 이제 우리 모두의 열망으로 자리 잡았다. 다들 자기가 사는 아파트의 자산가치가 재건축을 통해 한 번 더 뻥튀기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서울은 다시 아파트 재건축의 시대에 돌입하고 있다. < 아파트 생태계 >를 촬영하며 그 욕망을 비교적 가깝게 볼 수가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국가권력에 대한 분노를 보여줄 수 있다. 대기업의 불법성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 내부의 부동산 열정을 각성하게 하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집과 거주가 본연의 의미를 찾게 될 수 있을까. < 아파트 생태계 >를 완성해 몇 개의 영화제를 통해 공개했다. < 말하는 건축가 >와 < 말하는 건축 시티:홀 >에 이어지는 건축 3부작의 세 번째 작품이다. 주변에서 언제 극장에서 개봉하는지,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묻곤 하지만, 현재로서는 개봉을 고려하고 있지는 않다. 다큐멘터리의 개봉이란 나에게 100번의 관객과의 대화를 의미하고, 친구와 지인들에게 각종 민폐성 부탁을 해야 하는 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배급이 결정되지 않은 영화의 창작 활동이 피해갈 수 없는 그! 예정된 가시밭 길을, 이번에는 왠지 피하고만 싶다. 나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극장배급이 아니라면, 어떤 경로로 관객과 만날 수 있는가를 모색 중에 있다. 그 모색에 대한 간단한 생각을 피력하며, 이번 연재분을 마치고자 한다. 많은 개인들이 다큐멘터리 제작에 뛰어들고 있다. 그들은 의뢰를 받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풍덩 뛰어들어 일단 촬영을 시작한다. 만들고 나면 배급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촬영을 하고, 마침내 작품을 완성한다. 그러나 배급의 방법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최근 들어 공적 매체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는 다양한 내용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다. 한국 다큐멘터리 창작자들의 질적, 양적 성장을 지켜보노라면 놀랍기만 하다. 혼자만의 기대일 수도 있겠지만, 곧 다큐멘터리가 한국영화를 이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방송 쪽에서 창작의 자유를 위해 넘어온 다큐멘터리스트, 관객과의 접점을 넓히려고 미술의 영역에서 다큐멘터리를 시도하고 있는 아티스트들, 데뷔작으로 다큐멘터리를 선택한 신인 감독들까지, 서로 다른 영역에서 다른 목표로 다큐멘터리에 입문하고 있다. 그러나 배급에 있어서는 그저 극장용 예술영화 배급시장에서의 개봉만을 바라보고 있다. 독립적인 시선과 개인적인 접근을 허용하는 방송 다큐멘터리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독립다큐들이 방송 편성권에 들어갔을 때 언제나 완성도 문제를 지적받는다. 매끄러운 전개와 친절한 방송어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송되기가 힘들다. 다큐멘터리의 영화적, 개인적 표현을 인정하고 ‘KBS 독립영화관’ 같은 프로그램으로 독립다큐들을 정기적으로 방송해 주면 좋겠다. 다큐멘터리는 지식이나 정보의 입체적 전달이 가능한, 교양을 쌓는 데 무척 우월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정보나 보도 중심의 다큐가 아닌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시선에 포착된 이야기들로도 충분히 새로운 교양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공영 방송국이 시민 교양의 향상을 위해 제 기능을 다 하기를 바라본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아파트 문화를 대략 10부작 정도의 시리즈로 만들어 보고 싶다.(계속) #1. 아파트 생태계(Ecology in Concrete) -재개발에서 재건축으로 #2. 말하는 건축 시티:홀(Talking Architect City:Hall) -우리가 공간에 대한 결정에 직면했을 때 #3. 말하는 건축가(Talking Architect)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