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용열차
- 감독
- 서광제
- 제작년도
- 1938
- 출연
- 문예봉, 고바야시 주시로, 사사키 노부코, 독은기, 김한, 문동일, 김진암, 길영희, 박무명, 김초부, 이인순, 이채전, 왕평
전문직 여성 기술 스태프로서의 편집기사 편집기사 김영희(金英姬)를 조명하는 것은 한국영화를 추동한 큰 힘이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기술 인력의 존재를 한국영화사에 기입한다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2007년 김영희의 구술채록은, 감독이나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영화사 연구의 작가주의적인 비평의 전통을 벗어나 한국영화사의 이면과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연구방법론으로서의 구술사의 힘이 더 발휘될 수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주요 스태프들보다는 ‘뒷 스태프들’(편집, 미술, 특수효과, 녹음 등)의 구술을 보다 더 충분하게 채록하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김영희를 상세히 기록하는 일은 씨네-페미니즘의 틀로 한국영화사를 재구성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전문직 여성 영화인의 존재와 그 역사에 대한 재발견이기도 했다. 근현대 한국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활동이 많지 않았던 데다가 얼마 안 되는 여성 전문인의 역사적 자취를 찾기 힘든 것처럼, 영화계에서도 여성 전문 인력이 활발하게 활동한 공적인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까지 여성 영화감독은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이미례 네 명뿐이었고, 여성이 영화계에서 담당한 분야는 주로 배우였다. 그나마 일부가 연출부, 시나리오, 스크립터, 의상과 편집의 분야에서 활약했다. 특히 한국에서도 여성이 기술 인력으로서 전문성을 담보하고 분야로서는 편집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1, 2] 서울 미공보원 시절 편집하는 김영희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시작한 영화 인생 김영희가 영화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큰 언니(김갑순)의 남편인 촬영기사 양세웅의 덕분이었다. (양세웅의 딸 양성란도 김영희에게 편집을 배웠으니 가히 영화인 집안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녀는 1924년 충청도 공주에서 김동화와 김옥봉의 6녀 2남 중 다섯째 김옥례로 태어났다. 운송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덕분에 꽤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라도 순천으로 이사 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녀를 다니고 있을 때만 해도 그저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하고 영화 보기를 좋아하던 소녀였다. 김영희가 광주고녀 재학 중에 가족은 서울 청량리로 옮겨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자신의 학업은 포기하게 되고 큰언니의 부탁으로 형부의 손에 이끌려 일제의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었다. 19살이 되던 1943년부터 1970년 즈음까지 김영희는 수백 편의 문화영화, 뉴스영화, 기록영화와 극영화를 편집하며 27년 가량을 현역에서 활동했다. [사진 3, 4] <춘풍>(박기채, 1935)의 한 장면(상)과 스태프 사진(하). 이 영화로 박기채는 연출로, 양세웅은 촬영으로 조선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도아키네마에서부터 수련을 같이 한 이 둘은 이후 콤비가 되어 활동했다. 김영희의 형부 양세웅(1906~?)은 일본 교토의 1924년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촬영부에 입사해 영화를 시작했고, 동활영화(東活映畵) 촬영부에서 다년간 촬영을 연마해 1932년 조선인 최초로 촬영기사가 되었다. 귀국 후 양세웅은 <순정해협>(신경균, 1937). <군용열차>(서광제, 1938), <한강>(방한준, 1938), <애련송>(김유영, 1939), <새출발>(1939), <처녀도>(1939)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후반 촬영기사로 맹활약하면서, 조선의 촬영 기술을 도약시키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 5, 6] 귀국 후 양세웅이 촬영한 작품 <순정해협>(신경균, 1937)의 한 장면(상)과 영화 <한강>(방한준, 1938) 속 장면(하) 1940년대부터 양세웅은 친일영화 제작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41년 <반도의 봄>(이병일)의 촬영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노래를 잘 불렀던 17세 김영희는 큰언니의 추천으로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를 기회가 있었지만 형부의 반대가 심했다. 대신 그는 처제를 조선영화주식회사 촬영소의 현상실 조수로 취직시켰다. 김영희가 출근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 현상실은 광희동(본사는 남대문 근처)에 있었다. 그는 현상과 편집을 하던 양주남 밑에 있었다. 먼저 현상 기술을 익히고, 곧 양주남이 책임지고 있는 편집실에서 편집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한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막 들어가자마자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해변 장면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던 에피소드가 있지만 이 영화는 그녀가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 [사진 7, 8] 김영희가 주제가를 부를 수도 있었던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촬영 스틸(상), 그리고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인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한 장면(하) 해방이라는 열린 시공간 속에서 조선의 영화 인력들은 민족영화 제작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때 김영희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조선영화주식회사 시설에서 후반작업을 하고 있던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의 편집조수를 했다. 1946년부터 1년 간 김영희는 ‘이필우 프로덕션’이라고 회고하는, 중앙청에 위치했던 미군정청의 공보부 영화과로 자리를 옮겨 문화영화, 기록영화, 뉴스 등에 자막을 입히는 작업과 편집을 담당했다. 그러다 짧은 미군정기가 끝날 무렵인 1947년 이필우의 권유로 미공보원(USIS)으로 자리를 옮겨 편집기사로 함께 일했다. 6.25 전쟁 당시 곧바로 피난을 가지 못해 인민군 100일 적치(敵治)의 서울에 있었다. 그때 강홍식에게 평양국립촬영소로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보위국에 끌려가 자술서를 쓰는 등, 중앙청 공보실의 편집실에서 북한군에게 9일 동안 북한군의 전쟁 촬영분에 대해 편집을 강요당했다. 식민지 시기, 해방, 건국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김영희는 무비올라 앞에서 조선-일본/한국/미국 영화를 잘라 붙이고 있었다. [사진 9, 10] 진해와 상남 시절 미공보원에서 일하는 김영희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지자 그 틈을 타 북한군에게서 탈출하여 숨어 지냈는데, 이때 형부 양세웅은 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1950년 12월에 미공보원이 진해로 피난하면서 김영희도 공보원을 따라 진해로 왔다. 이후 계속 진해(2-3년), 상남(2년)에서 미공보원에서 편집기사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55년 즈음에는 1년가량 진해의 해군 교재창(敎材廠)에서 교육영화를 편집하기도 했다. 이때 미공보원이 제작한 <주검의 상자>(김기영, 1955)를 촬영하러 온 최무룡과 강효실을 만난 일도 있다. 진해와 상남에서 일하던 김영희가 충무로와 연을 맺은 것은 잠시 서울에 올라왔던 길에 일주일 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편집을 담당해준 덕이었다. 이 즈음 충무로는 폐허를 딛고 활력을 띠기 시작했는데 김영희는 아예 서울로 터전을 옮겨 와 이만흥의 <결혼진단>(1955), <원한의 성>(1955)를 시작으로 극영화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1 이 시기 아시아재단의 지원으로 정릉에 만들어진 정릉촬영소에서 2년 간 편집 일을 하기도 했다. [사진 11] 해군 교재창의 편집실 모습 충무로 입성, 신필름 편집실 생활 [사진 12, 13] 김영희가 편집한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상)과 <원한의 성>(이만응, 1955)의 신문 광고(하) 2, 3년 간은 알음알음 충무로의 호텔을 전전하며 <백치 아다다>(이강천, 1956), <황진이>(조긍하, 1957), <무영탑>(신상옥, 1957) 등을 편집했다. 편집 1세대 양주남, 유재원을 이어 김영희는 편집 2세대라 할 수 있는 김희수, 이경자, 김덕진 등과 함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충무로 극영화를 맹렬히 이어 붙였다. 1958년부터 4년 간 신필름 편집실로 출퇴근하면서 편집조수로 박양자와 조카 양성란을 편집 인력으로 키워내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시절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지옥화>(신상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성춘향>(신상옥, 1961), <연산군(장한사모 편)>(신상옥, 1961) 등 신필름의 작품 대부분이 그녀의 손을 거쳤다. 좀 더 전문적이고 적극적으로 편집 일을 하기 위해 충무로 3가 스타다방 맞은편에 김영희 편집실을 차리고 독립한 그녀는 1970년 영화계를 떠날 즈음까지 120여 편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14, 15] 신필름 편집실에 근무하던 시절, 조카 양성란과 함께 편집한 신상옥의 <열녀문>(1962) 속 장면들. 이 영화로 김영희는 제2회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스타다방 옆 김영희 편집실, 인서트의 재발견 1편당 5만원을 받고 한 달에 서너 편씩 편집을 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밤낮없이 김영희 편집실이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어떤 편집 기계를 썼던 것일까, 극영화 편집 규칙과 스타일은 어땠을까. 감독과 편집자의 관계란 어떤 것이었을까. 미공보원에서 일했던 그녀는 스플라이서(splicer)와 무비올라(moviola)를 일찍이 접했다. 충무로에 개인 편집실을 내고 극영화를 편집했던 1960년대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와 미공보원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직접 편집대를 주문⋅제작해 돋보기와 스플라이서로 편집을 하였다. 완성된 16미리 영화의 경우는 본인이 소유한 영사기에 돌려보고, 35미리의 경우는 영사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시사했다. 편집에 철두철미했던 신상옥,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조긍하와 이강천 감독 같은 이들은 김영희가 재촬영을 요구해도 용인해 줄 정도로, 믿고 맡기는 편집인으로 그녀를 택했다. 이 시기 편집의 장면 전환은 커트(cut)-커트(cut)로 연결되어 급박하게 전환되는 편집 스타일보다는 부드럽게 장면이 전환되는 방식이 더 선호되었다. 그래서 페이드인(fade in)-페이드아웃(fade out)과 오버랩(over lap)을 사용하여 ‘스무쓰(smooth)’한 장면 전환 능력이 편집자에게 있어 가장 요구되었다. [사진 16] 조긍하 감독 [사진 17] 이강천 감독 “편집을 하면서 느끼는 점인데요. 왜 감독들이 「인서트·카트」를 쓸 데에다 안 쓰느냐 하는 것을 역설하고 싶어요.” 2 인서트(insert)는 영화에서 극의 흐름을 전환하고 또 잠시 극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휴지기를 주기 위한 장치로 연출자는 이를 종종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용해 자신의 미학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무쓰(smooth)’한 편집이 대세였던 당시 김영희는 감독들에게 인서트 장면의 삽입을 제안하곤 했다. ‘화면이 부드럽고 좋기’로 입소문을 타자 인서트 장면이 필요한 감독들은 종종, 촬영 시에 충분히 인서트를 따놓지 못해서 난감할 때 그녀를 찾았다. 특히 기록영화에서 길게 찍어 두었던 설경, 바닷가 모래사장 경치, 석양의 풍경 같은 것은 하나 둘 모아두었다가 연출자가 특정 장면을 요구하거나 극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편집기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인서트 커트가 삽입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단풍이 짙은 명산, 비 오는 서울 거리 같은 커트는 촬영기사들의 손에서 만들어져 항상 편집실 한쪽에 걸려있었다. 우리가 쉽게 넘겨버렸던 혹은 감독의 미학으로 불렸던 소소한 그 인서트는 어쩌면 편집기사의 손에서 만들어졌던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충무로의 걸출한 그녀들, 삼바가라쓰(さんば-がらす) [사진 18, 19] 1984년 충무로의 '삼바가라쓰' 김영희와 박남옥(상), 김영희와 홍은원(하)의 사진 김영희: 인제 남옥이랑 웬만큼 알게 되니까요. 그리고 역시 감독, 여감독이라놔서 그런지 서로 신경이…… 나도 응, 홍은원 씨 보고 싶고, 또 홍은원 씨는 또 김영희라는 사람을 보고 싶고. 이러니까 저 서이가 인저 만나노니까 ‘삼바가라쓰’ 3 라고 서이서 아주 그냥 정이 들어가지고, 면담자: ‘삼총사’ 이런 말이에요? 김영희: 예, 삼…… 여자니까 삼총사 이런 말은 못하고, 우리는 일본말로 ‘삼바가라쓰’. <중략> 서이서 잘 돌아다녔었어요, 만나서. 그때 친해진 게, 여자니까 서로 기냥 말도 못 하게 친해지드라고요. <중략> 그니까 지가 바쁠 때는 “야, 홍 감독. 자고 가라, 우리 집에 가서 자자.” 그러면 “느이 영감 있는데……” “영감, 저 방에 가라 그러고 나하고 자면 되잖아.” 이러면서 지냈었어요, 서로가. 우리 집에 오면 또 영감님하고 얘기도 잘하고요, 말이 통하니까. 그리고 응, 오면은 같이 밥도 먹고, 드뤄 눠 자고, 차도 먹고, 이러고 참. 남옥이는 남옥이 대로 바뻤지만은, <중략> 서이 만나노면 아주 그냥, 남옥이가 그냥 사내 같이 굴었어요. (웃음) <중략> 그런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지냈지, 뭐 감독, 편집기사 이런 정도로서, 따악 한계를 지어놓고 일을 한 게 아니었었어요. 4 김영희의 구술문을 보면, 남성의 활동이 단연 독보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영화인들 간의 공적 사적 교류와 우정에 대해서 전면화하는 구술들이 있다. 이 부분이야 말로 여성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부분인데, 가정을 가진 동시에 같은 직종의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우정과 일을 어떻게 함께 병행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미망인>(1955)을 만든 박남옥 감독과 <여판사>를 만든 홍은원 감독은 충무로의 ‘삼바가라스’였다. 홍은원의 작품 <홀어머니>(1964), <오해가 남긴 것>(1966)은 친구 김영희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배우를 제외한 여성 스태프들만의 모임이었던 영희회는 남성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 스태프의 권익을 위해 모였다. 김영희의 구술을 통해,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남성적인 작업 환경 속에서 비교적 보조적인 역할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직업 생명이 짧은 여성 스태프들은 모임을 지속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모임은 아쉽게도, 곧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20, 21] 홍은원의 <홀어머니>(1964)와 <오해가 남긴 것>(1966)의 포스터. 두 작품 모두 김영희가 편집을 담당하였다. 격변의 시기 국가기관과 영화, 그 속에서 활약한 영화인 김영희 공식적으로는 이봉래의 <역전파출소>와 <장미의 성>(1969)를 마지막으로, 1970년 즈음 그녀 나이 마흔 아홉에 편집실을 접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27년을 재봉틀 같은 편집기 앞에 앉아 바느질 하듯 밤낮없이 일을 했고, 이 중 15년은 충무로에서 극영화를 자르고 붙였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인화와 현상을 익혔고, 워낙 ‘기계에 관심이 많아’ 영사 일도 배우고, 결국은 양주남의 편집조수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편집을 배웠다. 일본인 스크립터에게서 일본에서는 어떻게 편집을 하는지 들어보고, 외국영화를 보면서 편집하는 방법들을 공부했다. 김영희의 영화 인생은 역경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국가 기관과 관련해 그 줄기를 연명해왔던 한국영화사 제작 인력들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치하의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근무하던 상황과 광복 후에는 다시 미국의 영향 하에 군정청 공보부 영화과에서 일하던 주변 상황, 이후 미공보원으로 다시 재편⋅흡수되었던 제작 인력들의 활동 경로가 그녀의 행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녀는 연출자가 요구하지 않아도 인물의 행동 시간을 스스로 계산해서 맞추고, 조심스럽게 편집 순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보다 안정적이고 ‘스무쓰’한 극의 흐름을 위해서 인서트 필름을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모두는 그러한 것이 영화의 원활한 흐름과 조화를 최우선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편집자의 능력으로 꼽았다. [사진 22, 23, 24] 김영희가 충무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편집한 이봉래 감독의 작품 <역전파출소>(1969)와 <장미의 성>(1969) 숨겨진 여성영화인의 역사, 한국 최초의 여성 편집기사 김영희 편집기사 마가렛 부스(Margaret Booth, 1898~2002)는 1915년 데이비드 그리피스의 네가편집자로 함께 일하면서 <동도Way Down East>(1920)의 명장면을 만들어냈고, 1919년에는 MGM으로 가 일하면서 할리우드의 편집 규칙을 만들어갔다. 5 제인 게인즈가 언급했던 것처럼 무성영화기를 비롯,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성 영화 인력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배우로, 감독으로, 제작사 사장으로, 편집자로 오늘날 못지않게 넓은 분야를 점령했었다. 6 숨겨진 영화사를 발굴해낸, 지난 100년 간의 여성 편집기사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편집 : 여성 편집기사(Edited By: Women Film Editors)>(Su Friedrich, 75min.)에서 던지는 질문을 살펴보자.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빅터 플레밍, 1939)를 편집했고, <알렉산더 네브스키([Alexander Nevsky]>(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1938)를 편집했고, <400번의 구타(The 400 Blows, 1959)>(프랑수아 트뤼포, 1959)를 편집했고, 아카데미 편집상을 가장 많이 수상했고, 그저 ‘자르는 사람(cutter)’을 ‘편집 기사(film editor)’라는 전문 분야 종사자로 명칭을 바꾼 사람.” 7 그렇다, 모두 여성 편집 기사였다. 한국영화 100년, 우리 영화사에서는 김영희가 그 처음이었다. 신필름 황금기, 신상옥의 많은 작품이 김영희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김영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3』,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한국영상자료원, 2007과 「원로 여성영화인의 삶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 편집기사 김영희와 이경자의 구술채록을 중심으로」, 『영상예술연구』 vol. 18, 2011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김영희의 구술과 달리, KMDb에는 <춘향전>의 편집은 이성파로, <구원의 정화> 편집은 홍일명으로 되어있다. 2) 「예술의 주변 8 : 영화편집의 마무리 김영희 영사 필름 다루어 20년」, 『경향신문』, 1962년 3월 20일자 4면. 3) 삼바가라스(さんば-がらす), 어떤 분야에 특출한 세 사람을 말한다. 4) 심혜경·김영희, 『2007년도 원로영화인 구출채록 자료집 : 김영희 편』, 한국영상자료원, 125∼127쪽. 5) Kristen Hatch, "Cutting Women: Margaret Booth and Hollywood’s Pioneering Female Film Editors." In Jane Gaines, Radha Vatsal, and Monica Dall’Asta, eds. Women Film Pioneers Project. New York, NY: Columbia University Libraries, 2013. https://wfpp.columbia.edu/essay/cutting-women/ 6) Girish Shambu, “Hidden Histories: The Story of Women Film Editors”,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6582-hidden-histories-the-story-of-women-film-editors 7) 이는 프린스턴 대학 시각예술 교수이자 실험영화 작가인 수 프레드리히(Su Friedrich)가 만든 서베이 다큐멘터리로, 206명의 여성 편집기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프로젝트이다. 비메오(https://vimeo.com/310219288)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womenfilmeditors.princeton.edu 참고.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지면 펼쳐진 풍경도 달라진다.”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에는 폐부를 저미는 날카로운 대사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그 중 유난히 뇌리 깊숙이 박힌 저 대사가 요즘 자꾸 되살아난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상황이 바뀔 수 있음을 표현한 대사지만 내겐 텍스트와 해석의 묘를 압축하고 있는 말로 다가왔다. 사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본 것을 말한다는 건 적지 않은 용기와 확신이 필요한 일이다.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보편적인 정답의 존재를 믿는 메아리가 거대한 조류로 변해, 작지만 용기 있는 의견들을 순식간에 삼키고 지나가기 십상이다. 최근 < 택시운전사 >와 < 군함도 > 등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을 둘러싼 담론의 탁류를 접하며 가벼운 회의에 사로잡혔다. 지금, 새삼 서광제 감독의 < 군용열차 >를 꺼내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 때문이다. 1938년 제작된 <군용열차>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친일영화로 분류된다. 실제로 당대의 대다수 관객들에겐 이른바 어용영화로 소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다시 본다면 당대엔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것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 군용열차 >는 두 개의 기둥으로 이뤄진 영화다. 하나는 얽히고설킨 남녀의 통속극, 다른 하나는 친일 어용의 열차기관사 이야기다. 당대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열차 기관사 점용은 기관사들의 선망의 대상인 군용열차를 몰 기회를 얻는다. 점용의 성공 뒤에는 오빠를 철도학교에 보내기 위해 기생이 된 동생 영심의 희생이 있다. 영심은 점용의 절친 원진과 사랑하는 사이다. 하지만 원진이 영심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기생집에서 데려올 거액의 몸값이 필요한데 평범한 원진은 도저히 그 돈을 구할 길이 없다. 한편 점용의 주변을 맴돌다 혼쭐이 난 수상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원진에게 접근하여 점용이 모는 군용열차가 들어오는 시간을 알려 주면 거액의 돈을 주겠다고 회유한다. 원진은 업무수첩을 훔쳐 남자에게 전달하지만 이내 가책을 느껴 괴로워하다 점용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결국 군용열차를 파괴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점용은 군용열차 기관사의 꿈을 이룬다. 점용을 중심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일본 제국의 승리와 동양영원평화를 위해’ 매진하는 철도기관사의 이야기다. 점용은 황국신민으로써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용열차를 노리는 테러리스트, 그러니까 독립군의 계획을 분쇄한다. 이를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고 친구를 버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실상 영화의 뼈대를 차지하며 이목을 사로잡는 건 영심과 원진의 애틋한 로맨스 파트다. 반면 영화에서 점용의 심리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는 에피소드는 사실상 거의 전무하다. 당위나 설득 없이 충성과 보국이라는 답변을 반복하는 점용의 캐릭터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능에 가깝다. 일제강점기를 버텨온 남녀의 안타까운 현실을 포장하기 위한 일종의 위장 내지는 일제강점기에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기계적 알리바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 원진과 영심의 캐릭터는 피와 살이 도는 생생함을 안긴다. 원진은 변변한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조선 청년의 애환을 안타깝게 드러낸다. 영심은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하는 당대의 여성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데, 이 지점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한국문학에 빈번히 등장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누이’의 변형이라 할 만한 설정이다. < 군용열차 >는 몇몇 장면에서 연출적 괴리를 숨기지 않는다. 가령 원진이 독립군과 이야기 할 때 영상과 음성이 불일치하는 장면들을 보며 제작 후 녹음 과정에서 불가피한 수정이 가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원진이 황국신민의 의무를 외치면서도 굳이 한복을 입고 선로에 뛰어드는 것도 의아하다. 프로파간다적인 주제와 충돌할만한 단서들을 곳곳에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영화 읽기란 이야기의 틈새에서 좋은 질문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간혹 창작자 본인도 의식하지 못했던 시대의 흔적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 군용열차 >는 친일어용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일제 치하의 아픔과 저항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다. 당대 일본인, 친일어용 지식인, 핍박받는 조선인 등 어떤 위치에서 보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를 감상했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본래 습자지처럼 붙어있되 전혀 다른 성질의 두 서사를 분리해내기 위해서는 본래 적극적인 독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촘촘한 거름망을 지난 지금 우리가 <군용열차>에서 친일영화의 뼈대를 발라내고 그에 저항했던 속살을 발라먹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의 표리부동한 양식에서 최근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고전 영화를 읽는다는 것은 평자의 위치와 좌표를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때로 고전은 시간을 거스른 시금석이 되어 당대에는 쉽게 읽어 내지 못하는 정보들을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낸다. 오래된 영화가 끊임없이 되살아나 생명을 유지하는 비결은 거기에 있다. 서 있는 위치가 바뀔 때마다 영화는 다시 태어난다.
해방 후 영화인들은 재빠르게 변신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 군용열차 >(1938)를 시작으로 조선 영화계는 친일 국책영화의 시대로 선회하였고, < 아리랑 >(1926) 이후 짧은 기간 애써왔던 민족문화로서의 ‘조선영화’ 활동은 수명을 다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어느 날 해방이 되었다. 해방 후부터 전쟁 전까지를 일컫는 해방기에 영화인들은 해방을 기뻐하는 항일영화, 나라의 재건을 독려하는 계몽영화, 독립지사들을 기리는 전기영화를 재빨리 만들었다. 그리고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는 사상적 갈등을 그리는 반공영화가 추가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조선(한국)영화는 어떠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두고 영화인들 사이에 활발한 담론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조선영화는 ‘민족문화를 담은 계몽영화’이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신생 국가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민족적 로컬 컬러를 담은 계몽적인 예술영화를 만들어 내기 위한 염원으로 활동에 매진한다. 그즈음 만들어진 영화가 < 해연 >(1948)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3개월 후 일취월장한 작품이 나왔는데, 그 작품이 바로 1949년 2월에 개봉한 < 마음의 고향 >이다. 이 영화는 극작가 함세덕 이 1939년에 쓴 희곡 「동승」을 각색한 작품으로 많은 비평가들이 입을 모아 “해방 후 조선영화 최고봉의 신기록을 지은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그런 만큼 물자와 인력이 부족한 해방기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화적 구성과 만듦새가 탄탄하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조선영화를 지키고자 했던 영화인들의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영화는 조선영화에 의례적으로 따라오는 신파성을 배제하려 하고, 모정을 그리워하는 소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세계를 서정적인 감각으로 구현한다. 극적인 서사 진행을 위한 억지스러움에 가까운 우연성이 있지만, 이는 당시 영화적 수준을 고려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다. 당시 필름 공급원이 일정치 않아 코닥, 후지, 아그파 등 쪼가리 네가 필름으로 촬영하여 완성된 작품의 화질이 고르지 않은 문제가 있지만, 이 영화를 제작하고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이강수가 1993년 세상에 내놓은 < 마음의 고향 >의 16mm 필름은 해방기에 제작된 68편의 영화 중 현재 남아있는 7편 중 한 편이며,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선물이다. 이 작품은 종로3가에 위치했던, 지금은 사라진 수도극장에서 개봉돼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절간에 버려진 12살 소년 도성은 친어머니가 언젠가는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주지 스님과 젊은 스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도성은 어느 날 자식을 잃고 공양을 드리기 위해 절로 온 젊은 미망인 서울 아씨를 보고 마음을 빼앗긴다. 도성이 서울 아씨와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는 에피소드들은 연인들의 줄다리기처럼 애틋하면서도 흐뭇하게 전개되며 영화에 골고루 잘 스며들어있는 희로애락은 보편적인 인간적 감정에 호소한다. 영화에는 떠나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슬픔, 아씨와 도성이 새롭게 맺는 따스한 정, 아씨의 수양아들로 가게 된다는 기쁨, 그리고 주지 스님의 노여움으로 인한 파국 등이 여러 차례 서사의 굴곡과 함께 펼쳐진다. 유력가 집안의 서울아씨가 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늘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힘으로 부채를 만들어 선물하고픈 도성의 천진함은 결국 살생을 저지르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에 노한 주지 스님은 도성의 입양을 취소하고 절에서 죄를 씻도록 한다. 이 사건을 겪으며 훌쩍 성장한 도성은 봇짐을 메고 홀로 절을 떠나 속세로 내려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 산 아래로 떠나는 도성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하며 그의 뒷모습은 한결 가볍다. 도성의 바람이 좌절로 바뀌며 한없이 슬퍼지던 영화 전개는 마지막에 작은 반전으로 기쁨을 준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역동적인 촬영이 전개되어 놀라움을 주며, 서사는 극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고, 친어머니 존재에 대한 제한된 정보는 미스터리한 분위기까지 만들어낸다. 서울로 떠나는 날 친어머니가 등장하는 다소 억지스러운 우연한 사건이 있지만, 우연과 과잉의 신파성이 특징인 당시 여느 영화들과 달리 절제된 감정과 상징적 장면들, 복선과 반전이 있는 효과적인 영화적 묘사로 영화는 한층 격조 있게 보인다. 또한 해방 후 자유를 향하는 개인들의 집단적 갈망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압축적으로 담긴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는 윤용규 감독으로 1913년 대구 출생이며 일본 도호영화사에서 연출과 이론을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파이다. 그는 이 영화로 데뷔했고, 크게 호평받았지만 한국전쟁 전 월북하였으며, 북한에서 감독 및 배우로 활동하며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롱쇼트에서 산사를 트래킹으로 훑는 역동적인 장면과 도성이 꾸는 꿈과 현실의 유연한 연결, 뛰어가는 그를 따라가는 카메라의 움직임 등 촬영이 돋보이는데, 촬영감독은 다름 아닌 훗날 < 자유부인 >(1956)으로 흥행감독의 반열에 올라선 한형모 이다. 서울 아씨를 연기하는 이는 전쟁 후 최고 스타가 된 최은희 인데, 이 영화에서 20대 초반의 젊고 풋풋한 데뷔 초기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새로운 맹서 >(1947)로 데뷔한 최은희는 < 마음의 고향 >을 통해 확실한 주연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도성을 따뜻하게 감싸는 은은한 정을 발휘하는 그녀의 단아한 모습은 단연 한눈에 들어온다. 섬세한 내면 표현과 절제 있는 대사 전단력은 훗날 < 동심초 >(1959),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 등을 거치며 기품 있는 한국적 여인상으로 자리매김하는 근원이 되었다. 서울 아씨의 어머니를 연기하는 석금성도 일제강점기 영화계를 호령한 배우인데, 기생 출신으로 카프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였다.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인 작가이자 연극인 최승일이 그녀의 남편이다. 석금성 은 남편과 달리 월북하지 않고, < 춘향전 >(1955), < 삼등과장 >(1961), < 김약국의 딸들 >(1963) 등 전후 영화에서 연기파 성격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진다. 주지 스님을 연기하는 변기종 은 김도산 의 신극좌 소속으로 젊은 시절부터 노역 연기를 전문적으로 해온 연극인인데, <마음의 고향>으로 영화에 데뷔하였다. 첫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연기자이기에 카리스마 있는 강한 연기가 빛을 한껏 발한다. 친어머니를 연기한 김선영은 해방 전후 신극무대의 대표 배우로 활약하다가 전쟁 중 월북하여 북한에서 인민배우 칭호를 받을 정도의 최고 배우가 되었다. 이후 이 영화는 두 차례 리메이크되었다. 2002년 주경중 감독의 < 동승 >과 2014년 박영철 감독의 < 내 마음의 고향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