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착지
- 감독
- 이영춘
- 제작년도
- 1939
- 출연
- 윤봉춘, 최운봉, 전택이, 최엽, 노재신, 고영란, 임해림
< 빈집 >에서 방랑자 주인공 태석(재희)이 비어 있는 집들을 떠돌아다니는 스산한 세계부터 투명인간이 출몰하는 미스터리한 세계까지 서사의 순열은 이야기의 초점을 누구에게 귀속할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현실로, 무엇을 상상의 세계로 규정할 것인지를 두고 서사가 길을 잃기 때문이다. 이러한 효과는 플롯의 끝에서 장자의 다음과 같은 문구로 강조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그 귀착지는 교도관에게 거듭 구타를 당하고도 상처를 입지 않고 죽어가는 태석의 꿈으로, 또는 남편과 공존할 수 있게 된 선화(이승연)의 꿈으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에 세 번째 해석을 더해야 한다. 이미지는 실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태석은 투명인간이 되는 법을 학습하였다. 세 가지 해석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영화 안에 새겨져 있다. 표제어로 쓰이는 ‘빈집’은 장소, 공백, 고립이라는 관념을 전달하면서 존재하는 것보다 부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의 첫 번째 쇼트는 그물망 뒤 조각상을 보여주고 다음 쇼트는 보이지 않는 골프공이 그물망에 부딪히는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 골프채 타격음과 함께 들린다. 이때 초점이 맞지 않는 조각상과 그물의 롱 쇼트는 시공간의 좌표에 대한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첫 쇼트에 등장한 조각상과 그물이 태석이 선화를 만나는 집에 놓인 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이는 사물이 전달하는 가치를 하나의 극에서 다른 극으로 전환하는 전형적인 김기덕식 수사학을 전제한다. 몰래 들어간 첫 번째 집에서 어린 아들이 태석이 수리한 장난감 총을 발사하여 엄마를 상해하는 장면에서도 이미지의 전환이 발생한다. 고생스러운 가족여행으로 불만이 가득한 엄마를 향해 소년이 플라스틱 총알을 발사하자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리지만 이어지는 쇼트는 창문 밖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태석을 보여주는 식이다. 가족 간 불화와 폭력은 두 번째 방문지인 선화의 집으로 전이된다. 아내를 학대하는 남편을 향해 태석은 골프공을 발사한다. 소년의 플라스틱 총알은 태석의 골프공이 되고, 그것은 소년-태석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어 학대를 저지하는 사물로 기능한다. 커플을 이룬 태석과 선화가 자신의 집에 침입하여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한 권투선수가 태석을 폭행하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태석을 때리는 권투선수 대신 권투선수의 사진을 클로즈업한다. 남편이 선화를 학대할 때 분노한 태석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과 같은 패턴이다. 이처럼 우리는 두 주인공의 침묵을 채우는 것과 유사하게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간극을 채우는 이미지와 대면한다. 이처럼 <빈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침묵이다. 태석은 대사가 없지만 선화는 영화의 마지막 몇 분 동안 “사랑해요”와 “식사하세요”라는 두 마디 대사를 말한다. 대사는 없지만 다른 수단을 통해 의미가 전달된다. 예를 들어 웃음과 울음은 대화의 중요한 요소이다. 가혹한 폭행 뒤에 욕조에서 우는 선화, 골프 연습을 하다 무고한 여자를 피투성이로 만든 뒤 우는 태석의 모습 따위를 볼 수 있다. 누군가 감정을 드러내면 상대방이 이에 반응하기 때문에 이 모든 장면은 대화의 기능을 한다. 때론 클로즈업이 이와 같은 기능을 대신한다. 클로즈업은 시공간의 좌표로부터 얼굴을 추상화하여 정서를 표현하는 기교이다. 태석과 선화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숙고해 보자. 대화는 없고,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의 침묵하는 얼굴이 역전된 쇼트들을 통해 제시된다. 태석과 선화가 서로를 바라볼 때, 우리는 표정이 없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 놀라움, 혐오감, 피곤함, 그리고 용서를 읽는다. 해석적 표면으로서의 얼굴의 위상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태석의 얼굴은 벽에 걸린 선화의 사진과 나란히 배치된다. 태석은 경찰의 심문을 받을 때 침묵을 유지한다. 심문이 끝난 후 경찰은 죽은 노인이 정원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는 선화가 심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태석 만이 제공할 수 있는 정보이다. 따라서 침묵은 일종의 내러티브 장치로 관객들이 텍스트의 폭정에서 벗어나 이미 말해진 레퍼토리들을 기초로 하여 스스로 빈칸을 채우도록 돕는다. 더 나아가 예측을 통해 관객은 사건의 과정을 설정하고 세계의 구조에 대한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태석과 선화가 빈집에 거주할 때 그들의 은밀한 동거가 들통날 것인지 아닐지를 추측하는 것도 이러한 매커니즘을 통해서이다. 텍스트는 관객의 예측을 확인하거나 부정하기 위해 작동한다. 따라서 두 방랑자가 권투 선수의 집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그 집에 다가오는 자동차의 쇼트는 마침내 저들의 존재가 드러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그렇게 되면 텍스트는 관객의 예측을 확인시켜준다. 이러한 침묵의 매커니즘은 영화의 초반부까지만 작동한다. 태석이 감옥에 갇히고 투명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면서 관객은 개연성의 세계에서 초현실적인 세계로 서사가 순환하는 것을 목격한다. 교도소라는 상징적인 헤테로토피아에서 태석이 투명 골프공과 투명 골프채로 연습하는 장면에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건, 특이점, 전환점이 있다. 1부에서 부재가 단순히 하나의 가치였다면, 서사의 세계가 순치된 2부에는 부재로 인해서 표시되는 것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골프공과 클럽의 부재가 골프공을 타격하는 소리로 표시될 때 부재는 현전(現前)과 양면을 이루게 된다. 태석의 변신과 대칭을 이루는 선화의 변신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선화는 태석을 대동하고 자신의 사진을 찍어온 사진작가의 집을 점거한다. 사진 속 선화의 몸은 폭행으로 상한 그녀의 몸과 대조를 이룬다. 태석은 빈집에 침입하여 자신의 몸에서 빠져 나오지만 선화는 자신의 육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선화가 사진을 벽에서 떼어내어 재구성하는 모습에서 상한 육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녀의 욕망과 좌절이 드러난다. 이 장면은 태석의 보이지 않는 골프 게임과 유사한 사건이자 주체성을 획득하려는 선화의 의지를 드러낸다. 다음 날 선화는 태석이 하는 것처럼 손빨래를 하고 있다. 태석이 감옥에 가는 동안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선화는 남자와의 관계를 거부하고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외출을 하는 등 이전과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선화가 살아남은 것은 반항을 통해서가 아니며 새로운 질서, 새로운 존재의 상태를 확립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새로운 존재의 모습은 폭력과 권력이 아닌 환대와 공존의 양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선화는 남편의 권력과 폭력을 약화시키면서 동시에 남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잠시 침묵을 깨고 남편(실질적으로 그의 뒤에 있는 태석)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한다. 남편은 선화의 생경한 고백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가 태석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선화를 끌어안는다. 선화가 부정했던 상징의 도구로서 “사랑해요”라는 말은 이제 기만의 장치로 전락하였다. 선화가 터득한 생존 전략은 타인을 오류에 빠지게 하는 의미의 표면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태석이라는 투명인간을 모른 채 남편이 그 빈칸을 채우게 함으로써 세 사람의 공존이 가능해진 것이다. 태석의 손바닥에 그려진 눈의 형상은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작품 ‘잘못된 거울’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의 시각이 가진 한계와 속임수, 그리고 주관성을 초래할 수 있는 지각의 오류를 표현한 거울상은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나온다. 선화의 집에서 태석은 빈번하게 유리에 반사된 이미지로 재현된다. 태석은 투명인간이 됨으로써 바로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법을 배운다. 아이러니하게도 태석은 교도관의 시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카메라 자체의 시선, 그리고 관객의 시선에서도 벗어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재를 인정해야 보거나 이해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교도관은 투명인간이 된 태석을 감지할 수 있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선화는 180도로 볼 수 있는 거울을 통해 그의 존재를 볼 수 있게 된다. 적대감을 화해하는 영화적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새로운 지각의 차원이 우리들에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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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청년 감독 에두아르도 윌리엄스는 모든 감독들이 일생을 들여 추구하는 예술적 야망을 데뷔작 한 편에 집약함으로써 젊은 유망주들에게 쏠리는 흔해빠진 기대를 훌쩍 넘어선다. 서너 편의 단편영화를 통해 ‘미래가 기대되는 작가’로 점쳐졌던 윌리엄스의 고대하던 장편 데뷔작 < 더 휴먼 서지 >는 영화 서사의 담대한 모험을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환경 아래 놓인 세계의 분리된 조각들을 한데 모은 < 더 휴먼 서지 >의 서사는 아르헨티나와 모잠비크, 필리핀을 횡단하면서 무정형의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남미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이야기는 지구의 중심을 관통하는 경이적인 디졸브를 통해 시간을 확장하면서 로컬 공간과 경제 구역들, 들판과 숲, 지하와 통신케이블을 종횡무진 한다. 화면이 열리면 카메라는 어두컴컴하고 흐릿한 이미지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집 안을 유랑한다. 미끄러지듯 유연한 카메라의 이동을 따르는 첫 챕터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슈퍼마켓 일로 근근이 생활하는 한 소년이 웹캠 시장에서 포르노 동영상을 거래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일상에서 터져 나오는 짧은 충격 뒤에 카메라는 컴퓨터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두 번째 챕터의 주인공을 소개한다. 모잠비크 마푸토에 사는 그는 역시 온라인 포르노그래피 분야에 종사(?)하는 소년이다. 육체노동과 사무노동 사이에 끼어있는 새로운 유형의 노동에 대한 가치중립적인 기록은 세 번째 챕터로 이어진다. ‘개미’를 매개로 연결되는 세 번째 챕터는 집을 찾아가기 위해 필리핀의 정글을 횡단하는 뿌리 뽑힌 젊은이들의 짧은 유랑을 따라간다. 맥락을 짐작하기 힘든 세 여행지를 통과한 뒤 도달하는 귀착지는 비(非)인간적인 컴퓨터 연구소의 냉랭한 풍경이다. 한 줄로 요약되지 않는 < 더 휴먼 서지 >의 서사는 동일한 중요성을 갖는 스토리 조각들이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구성을 취한다. 분절된 조각들로 이야기를 진술하는데 있어 이와 같은 플롯이 효과적인 이유는 기나긴 도입부 신과 이어지는 조각난 신들의 대조를 통해서 입증된다. 고립된 채로 보였을 때 분리되고 무관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다르지 않고 연관된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전략이다. 도막 난 스토리들이 하나의 사건에 의해 연결되는 네트워크 내러티브에서 곤란한 문제는 우리의 주의를 지배하는 네트워크의 양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각들 자체라기보다는 조각들의 밀접한 관계이다. 이러한 스토리의 연결성은 탐구의 주제에 있어서 핵심적인가? 이야기는 내러티브의 통일성이라는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의 통념에 도전하면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종속적인 요소들 주변에 사건을 배열하고 구성하는 방식으로 짜인다. 분리된 공간을 가로지르는 언어와 문화 사이의 이동은 불규칙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내러티브의 명징한 중심, 고정되지 않은 것을 향한 욕망으로 충만한 이 영화의 구조는 인과율의 관념을 묵살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누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분별은 좀체 허락되지 않는다. < 더 휴먼 서지 >는 글로벌 자본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는 노동의 조건, 불통(不通)의 시스템, 관음의 테크놀로지, 존재의 불안한 내면을 형상화하기 위해 조각난 삶의 동시성과 우연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익명의 청년 주인공들은 직업을 찾아, 머물 장소를 찾아, 또는 놀 곳을 찾아 목적 없이 방랑하면서 부챗살처럼 연결된다. 홍수로 물에 잠긴 도시의 어두운 방으로부터 세 대륙을 가로질러, 태블릿 컴퓨터 검사실의 형광빛 조명 아래로 이동하는 여정은 흡사 마젤란의 항해처럼 새로운 지정학적 감각을 창조한다. 파편화, 낯설게 하기, 21세기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창시한 새로운 관계에 대한 조망, 이 모든 것이 영화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 국경과 언어를 혼합하는 이 영화는 경계, 네트워크, 존재의 상태를 가로지르면서 웹캠을 통한 포르노 산업, 사무직, 제조업 등 다변화된 노동이 디지털 공간에서 어떻게 새로운 관계를 잉태하는가를 지도 그린다. 윌리엄스의 테마는 사회적, 경제적, 지리적 환경이 오늘날 젊은이들의 삶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가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아니다. <더 휴먼 서지>는 진부한 리얼리티의 표면을 넘어 완전히 다른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선을 따라간다. 저들이 놓인 상이한 맥락과 풍경, 지역적 특수성, 사회경제적 배경은 어떤 차이와 동일성의 논리 안에서 구성되는가? 획일화된 기술자본주의, 고용 불안정, 세대의 불안, 도시화 과정에서 주변화된 공간은 아주 멀리 떨어진 이 장소들을 잇는 끈이다. 이러한 ‘연결’의 감각을 따라 <더 휴먼 서지>는 오늘날 세계를 일련의 망들로, 미디어 네트워크의 한 구성요소들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섬유공학과 모바일 네트워크처럼 떨어진 공간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맥박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인간, 동물, 물질, 환경, 기계 등 모든 주체들을 통과하면서 흐르는 이 에너지는 거역할 수 없는 완력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에두아르도 윌리엄스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넘어 고도의 비주얼 전략으로 미디어의 환경과 인간의 조건, 시공을 초월한 관계의 망을 시각적으로 기술한다. 세 챕터는 모두 다른 포맷으로 찍혔다. 첫 번째 챕터는 수퍼 16미리, 두 번째 챕터는 블랙 매직 캠코더, 세 번째 챕터는 레드 기종으로 촬영했다. 세계의 불확실성과 모호성은 시종일관 몽롱함을 유지하는 이미지의 색감과 질감으로 구축된다. 인위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 픽셀과 그레인, 유연한 것과 딱딱한 것 사이를 진동하면서, 스크린은 사실적인 것에서 몽환적으로 변화한다. 불투명함과 흐릿함은 상이한 공간의 차이를 지우고 감각을 마비시키는데, 조명이 있더라도 인물들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이다. 한편으로, < 더 휴먼 서지 >는 임기응변식 촬영이나 비전문 배우를 기용함으로써 얻어지는 사실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경험과 그것을 보는 경험을 이끄는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윌리엄스는 오늘날 영화가 점점 상실하고 있는 진실에 대한 감각이다. 곡예를 부리듯 흔들리는 카메라, 어둡고 입자가 거친 이미지,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풍경들 가운데에서 미묘한 균형과 리듬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기우뚱한 핸드헬드는 아주 다른 표현적인 기능을 부여한다. 이 영화에는 시각적으로 강력한 순간들이 있지만 그 순간의 진정한 힘은 누적의 효과이다. 개별적인 조각들은 더 큰 그림의 다른 양상들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이한 스토리는 우연한 만남에 의해 인위적으로 연결된다. 더욱 미묘하게 그들은 ‘테크놀로지의 숲에 갇힌 인간’이라는 테마와 주제적으로 연결된다. 글로벌 자본주의, 테크놀로지의 네트워크 과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 국가, 민족, 인종과 관련한 더 큰 윤리적 문제들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 더 휴먼 서지 >에서 조각난 그림은 더 큰 그림의 다른 양상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리된 스토리는 우연한 만남에 의해 인위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종합적인 결론이나 엔딩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유사한 계열의 사건을 경험한다. 간간이 외설적인 이미지들을 보면서 관객이 느끼는 것은 일종의 수치심 또는 불쾌함이다. 이러한 감상으로부터 테크놀로지의 참화에 의해 와해된 인간의 삶에 대한 비판으로, 고립된 채 살아가는 거주자들에 대한 독해로 이 영화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불완전하고,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정돈된 언어로 표현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윌리엄스는 하나의 현상을 균질화하려는 고전적 내러티브 영화의 준칙들에 대해 저항하면서 쉽게 정의되지 않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주목할 만하다. 컴퓨터 랩에서 살균되는 기계들처럼 인간의 조건은 위태롭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사는 이 영화가 도달하려는 궁극의 목적지는 아니다. 테크놀로지에 갇힌 인간과 노동이라는 테마를 특정한 사회적 공간 또는 비판적 틀에 놓음으로써, 윌리엄스는 인간이라는 종(種)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예리하게 읽어내고 있다. 지난 1년간 일별했던 미래 작가군의 영화 중 이토록 서늘한 각성을 일으키는 ‘괴물 같은 영화’는 없었다.
최운봉 (崔雲峯, 1914(?) ~ ?)의 공식적인 영화 이력은 최초의 조선어 발성영화 < 춘향전 >(1935)의 단역으로 출발한다. 원래 그는 기술 분야에 뜻을 두고 영화계에 입문해, 경성촬영소의 < 홍길동전 후편 >(1936)의 촬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38년 방한준 감독의 < 한강 >에서 한강 뱃사공 중 한 사람으로 출연하면서부터 배우로 전향해, < 도생록 >(1938), < 국경 >(1938), < 귀착지 >(1939) 등으로 점차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실질적인 데뷔작 < 한강 > 이후 최운봉 이 주연급 연기자로 이름을 알린 영화는 최인규 감독의 < 국경 >이다. 여기서 그는 빚쟁이에 몰려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밀수를 하고, 그마저도 성공하지 못해 귀향한 날 과실치사(過失致死)로 징역을 살게 되는 ‘세림’ 역을 맡았다. 국경지대의 음울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했던 이 영화는 일본에서도 호평을 얻었는데,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는 ‘영자’ 역을 맡은 김소영 에게 집중되었을 뿐 최운봉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 방한준 감독이 정비석 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 성황당 >(1938)에서는 산에서 숯을 구우며 살아가는 ‘현보’ 역을 누구보다도 잘 소화하며, 그때까지 출연작 중 가장 좋은 연기였다는 호평을 얻었다. <국경>과 <성황당>에서 그가 맡은 배역의 이미지는 자신이 속한 세계(‘고향’ 혹은 ‘자연’)가 외부의 폭력에 위협당한 선량한 사람이었다. ‘애인’이나 ‘아내’를 빼앗아가는 식민지 근대의 위력, 그리고 그러한 위기에 몰린 남성 주체의 무기력이란 나운규 의 무성영화들로부터 이어지는 조선영화의 일관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최운봉이 연기한 인물들은 나운규의 영화처럼 그 무기력이 살인이나 방화로 이어지는 ‘피의 세계’가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자연의 섭리를 믿는 ‘땅의 세계’에 존재했다. 이러한 그의 남성 이미지는 1940년대 들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박영희 원작을 안석영 이 연출한 < 지원병 >(1941)에서 최운봉 은 우울과 무기력에 휩싸여 있는 ‘춘호’ 역을 맡았다. 중학을 중퇴하고 부친의 뒤를 이어 마름 일을 하고 있는 ‘춘호’는 김 첨지의 모략으로 마름 자리에서도 밀려나고, 사랑하는 약혼녀 ‘분옥’( 문예봉 )과도 오해가 쌓여 궁지에 몰린다. 영화는 이러한 춘호의 무기력과 우울,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갈등 상황을 ‘조선인도 황군(皇軍)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춘호에게 출정(出征)의 기회를 던져줌으로써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지원병이 되어 출정 기차에 올라타는 마지막 순간 좀처럼 웃지 않는 ‘춘호’=최운봉의 얼굴에서 출정의 감흥을 읽기는 어렵다. 이 장면에서 클로즈업되는 최운봉의 표정에서는 연인과 노모(老母), 어린 여동생을 남겨두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식민지 청년의 비애를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후 최운봉 은 < 그대와 나 >(1941) < 병정님 >(1944) < 감격의 일기 >(1945) < 우리들의 전장 >(1945) 등 여러 편의 선전영화에 출연한다. 그러나 모두가 적극적이고 자발적이며 건강하고 명랑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던 그 시기에, 우울하고 무기력한 식민지 남성의 이미지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법인 조영에서 남승민과 같은 새로운 배우가 부상하는 가운데, 최운봉은 조연이나 단역으로 밀려났고, 때로는 코믹 릴리프(comic relief)를 담당하는 희극적인 역할을 맡았다. 해방 후 그는 한때 조선영화동맹에 가담하여 서울지부 집행위원으로 영화 대중화 운동에 참여했고, < 똘똘이의 모험 >(1946) < 새로운 맹서 >(1947) < 마음의 고향 >(1949) 등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많은 월북영화인들이 그러했듯이, 남한의 영화 제작 환경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미 그의 ‘좋았던 시절’은 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1950년 5월 정인택 원작을 영화화하는 <하얀 쪽배>에 출연할 예정이라는 기사(「<하얀쪽배> 영화화」, 「경향신문」 1950년 5월 18일 자)를 마지막으로 최운봉 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한국전쟁 중 월북했으리라 짐작되는데, 월북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