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
- 감독
- 윤성호
- 제작년도
- 2012
- 출연
- 이승준, 손재호, 이준영
R(문성근)과 J(강수연), 둘은 끊임없이 서울 시내를 배회한다. 1990년대 초중반 한국 사회와 영화계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이듬해 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6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올림픽 이후에도 노동자와 학생들이 탄압받는 공안 정국은 계속되었고, 여당은 정권 재창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0년 1월 ‘3당 합당’을 깜짝 발표한다. ‘민주투사’ 김영삼이 평생을 싸워온 그들과 손잡은 것이었고, 결국 그는 1993년 2월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강준만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역사의 자연스러운 발전이라기보다 인위적인 결단에 의해, 즉 정치적 야합으로 인해 한국의 ‘이념의 시대’는 몰락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문화의 시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비의 시대’로 들어섰다(「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권」). 1990년대 초반 한국 소비문화의 핵심적인 이미지는 바로 자가용이다. 1992년 자동차 대수가 500만 대를 돌파하며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로 접어들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자동차 산업은 정경유착의 산물이었고, 할부 판매 그리고 이와 결합한 광고라는 ‘판촉’(마케팅을 당시 사용하던 용어로 표현하자면) 기술은 은행과 언론에도 호황을 안겨주었다. 1991년 4월 시인 유하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이듬해 4월 소설가 이순원이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를 내놓은 것은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소비문화와 한국식 자본주의를 예단한 것이었다. ‘오렌지족’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10대가 부상한 것도 바로 이때다. TV의 트렌디 드라마와 그 스타들이 출연하는 광고는 대중문화를 소비문화에 밀착시키며, 우리의 일상 깊숙이 소비라는 감각을 안착시켰다. 현대 한국 사회의 자본 중심적 가치관과 그 양상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영화계도 변화의 기로에서 요동쳤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투쟁의 강도를 높여갔지만, 외화 직배로 상징되는 글로벌 기업의 시장 진입은 한국영화가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면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1989년 110편, 1990년 111편, 1991년 121편, 1992년 96편 제작된 한국영화는 1990년대 중반 들어 60편대로 제작편수가 줄었고, 한국영화의 상영 비중 역시 1990년 28.7%에서 1993년 15.4%로 준 이후 1990년대 내내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할리우드 직배 영화가 보여준 흥행 파워는 시장 개방의 결과를 명백히 보여줬다. 상영 외화 중 직배의 비중은 15% 내외였지만, 동원 관객 수로 치면 50%를 훨씬 넘겼기 때문이다. 파라마운트와 유니버설이 합자한 비디오 회사 CIC가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서고, 뒤이어 대기업들이 판권 경쟁에 뛰어들며 형성된 비디오 시장은 한국 영화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관 흥행 외에도 수익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제작자유화 조치로 생겨난 영화사들의 제작 기반이 되어준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다수의 프로덕션이 비디오용 에로티시즘영화에 몰두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1990년대 초 영화기획사의 영역이 만들어지고 이른바 ‘기획영화’가 등장한 것은 산업의 변화가 가져온 순기능이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했고, 대통령 연례보고에 할리우드영화 < 쥬라기 공원 Jurassic Park >(스티븐 스필버그, 1993) 한 편이 벌어들인 수익이 자동차 150만 대의 판매 수익과 맞먹는다는 보고가 올라가면서, 영화는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비디오와 케이블TV 프로그램이라는 창구 효과(window effect)를 기대한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속속 진출하면서, ‘흥행업’으로 비하 받던 충무로 영화산업은 혁신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지방 흥행업자의 돈을 모아 영화를 만들던 방식에서, 조사기획을 거치고 대기업의 결제 라인을 통해 자금이 집행되는 제작 환경으로 바뀐 것이다. 이 흐름과 맞물린 것이 바로 ‘기획영화’라고 기록되는 제작 방식이다. 제작자유화 물결을 타고 1980년대 후반 영화판에 들어온 젊은 기획자들은 비디오 판권 형식으로 대기업 투자를 이끌어내며 한국영화가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 시작은, 1992년 신씨네의 기획으로 익영영화사가 지방배급업자와 삼성으로부터 제작비를 투자받아 만든 < 결혼이야기 >(김의석)다. 영화는 서울에서만 52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하며, 한국영화의 ‘산업’적 모델을 만들었다. 현대 한국영화의 특질을 특유의 완성도 높은 상업영화로 정의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영화가 출발점일 것이다. 산업으로서의 성장이 길을 넓히면서, 한국영화의 미학도 확장되어갔다. 1990년대를 작가주의 감독의 시대로 명명하는 이유인 것이다. 바로 직전인 1980년대 말 ‘코리안 뉴웨이브’의 작가주의 감독군과 ‘장산곶매’ 등 독립영화 진영의 장편 극영화 활동이 있었고, 특히 장선우 는 이후 작가주의 감독들의 미적 터전을 마련하며 홍상수 , 이창동 등의 작업을 예고했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 작업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이후의 작가주의 영화를 연결한 가장 핵심적인 흐름이었다. 장선우 감독 도발적 화두와 거침없는 실험, 가장 논쟁적인 감독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난 장선우는 1971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 진학해 1976년 시위 주도의 여파로 방위병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민중문화운동의 최선전에서 활동했다. 영화판으로 발을 옮긴 것은, 1980년 복학 후 민주화운동에 합류했다가 6개월간의 징역을 살고 나서였다. 이효인 교수와 한 인터뷰(「한국의 영화감독 13인」)에 따르면, 합법적이고 생활이 되는 예술을 하고 싶었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영화예술로 표현해야 한다는 판단 역시 그를 영화계로 이끌었다. 1980년 11월 이장호 의 < 바람불어 좋은 날 >을 관람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후 장선우는 이장호 감독의 <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1981)의 각본(크레디트: 장민승 )과 연출부로 영화계에 입문한 후, 영화사 기획실에서 일하며 영화평과 시나리오를 썼다. 이장호 연출부의 조감독이던 선우완 과 같이 < 서울황제(원제: 서울예수) >(1986)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지만, 검열의 수모 끝에 극장 개봉에도 실패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둘은 <MBC 베스트셀러극장>에서 작가와 PD로 호흡을 맞추며 영화 복귀를 준비했다. 장선우의 실질적인 데뷔작은 < 성공시대 >(1988)다. 자본주의 사회를 우화적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흥행과 비평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며, 그의 이름을 충무로에 각인했다. 그가 비평적으로 주목받는 지점은 영화적 화두와 미학적 스타일이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영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 우묵배미의 사랑 >(1990)과 하일지의 소설을 영화화한 < 경마장 가는 길 >(1991)에서는, 사회에 대해 직접 발언하는 것에서 한발 물러나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전환했다. 전자는 서울 근교 하층 계급의 삶을 해학과 연민 어린 시선을 통해 보여주며 ‘묘사의 진실성’을 화두로 삼았고, 후자는 지식인 계층의 허약한 내면을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포착하며 ‘주관적 객관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후 < 화엄경 >(1993)으로 베를린영화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하는 등 해외에서도 인정받았고, 1995년 영화 탄생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한국영화 씻김>을 거쳐, 1996년 최윤의 원작을 영화화한 < 꽃잎 >을 내놓으며 광주항쟁을 대중예술 매체인 영화로 표현하겠다는 그의 목표를 이루게 된다. 한국의 영화 문화가 폭발하던 1990년대 중반, 이 영화는 비평뿐만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하며, 충무로의 상업영화를 통해 처음 광주를 환기시켰다는 작품의 가치를 배가했다. 한편 그는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1994년 성을 전면에 내세운 장정일 원작의 < 너에게 나를 보낸다 >로 흥행과 화제의 중심에 선 후, 1997년에는 한국영화사의 대표적인 문제작 < 나쁜 영화 >를 디지털 질감으로 선보였다. 세기말에는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화한 < 거짓말 >(1999)을 내놓으며 한국 사회의 오래된 논쟁거리인 창작물의 표현 수위 문제를 부각했다. 당시 장정일의 소설은 음란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장선우의 영화는 무혐의 처분과 등급 보류 판정을 받았다. 이후 그는 「성냥팔이 소녀」를 모티프로 한 한국형 블록버스터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002)을 연출했으나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차가운 평가를 받았고, 현재 시점에서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지식인 남자 R의 비루한 현실 영화는 공항을 나서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R( 문성근 )이 돌아왔다는 ‘누군가’(실은 감독의 목소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5년 만에 돌아온 R은 파리에서 동거한 J( 강수연 )와 재회한다. 하지만 J는 한국과 프랑스는 다르다는 석연찮은 말로 R과 섹스하기를 거부하고, 화가 난 그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간다. R은 오랜만에 아내( 김보연 )와 자식들을 만나지만 이미 이혼을 통보한 탓에 전혀 반갑지 않다. R은 오로지 J와 섹스하기만 갈망한다. 그는 서울에 올 때마다 그녀를 만나 다방과 식당을 전전하며 관계를 요구하지만, 여관행은 번번이 거부당한다. 한편 대구의 집에 내려가면 아내는 이혼을 거부한다. R은 자신이 써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J가 자신이 써준 글로 문학비평가로 데뷔한 사실을 알고, 또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라며 그를 떠나려고까지 하자 극도의 배신감을 느낀다. 하지만 R은 좀처럼 J를 떠나지 못하고, 되레 한국을 떠나 같이 프랑스로 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J는 끝내 R을 거부한다. 영화의 중심 인물은 지식인 남자 R이다. 그는 프랑스라는 1세계와 한국이라는 3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인데, 특히 3세계에 처한 그의 비루한 현실은 대구의 가난한 고향집을 통해 그려진다. R은 J를 만날 때마다 프랑스를 떠올리며 “우리 모처럼 산책이나 할까”라고 제안하지만, 그녀는 밑도 끝도 없이 걷는 건 산책이 아니라 노동일 뿐이라고 대꾸한다. R은, 그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프랑스에서 동거한 서울의 J 혹은 그녀와의 섹스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J는 계속 R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그는 (한동안 회자된 대사인) “너의 이러한 행동의 이데올로기는 뭐냐”라며 지식인의 허세를 노출한다. 그는 그녀를 회유하고 때로는 협박하지만 그녀는 완강하게 섹스를 거부한다. R의 추궁에 J가 결혼할 남자가 있다는 고백을 하자 그의 비참함과 지질함은 극에 달한다. R은 J에게, 결혼할 남자에게 프랑스에서 3년 반 동안 동거한 이야기를 했느냐며 “그런 소릴 하면 너를 그토록 사랑한다는 그 사람은 충격을 받을 것이고 그 고통 때문에 바람을 피우게 되고 끝내는 파탄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R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말이기도 한데, 그는 아내와 이혼하는 사유로 나를 키워줄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를 대지만, 실은 아내의 혼전 남자관계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J가 R의 글을 문예지에 내서 당선되었다고 사실을 털어놓은 후, 그의 요구는 애걸과 협박 사이에서 후자로 무게를 옮긴다. 급기야 R은 J에게, 자신의 글로 문학박사가 되고 문학평론가가 된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재판을 걸겠다는 것이다. 결국 섹스는 하게 되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후에도 둘의 지난한 만남은 계속된다. J가 R이 아닌 결혼할 남자를 택하겠다고 말하자, 이제 그는 J에게 한국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3,000만 원을 내놓으라고 한다. 둘은 또 관계를 가지지만 결국 J는 R을 떠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갈 곳을 잃은 R이 시외버스를 타고 우유를 마시려 하다, 시골 아낙들이 있는 바깥 풍경을 보면서 우유를 흘리는 장면이다. 장선우가 “일종의 경련처럼 찾아온 깨달음”이라고 표현한 이 장면은, 한국영화사의 가장 불가해한 상징 중 하나일 것이다. 도대체 R은 불현듯 무엇을 깨닫고 메모하는 것일까. R(문성근)과 그의 아내(김보연) 카메라와 합일하는 남자 R 이 영화는 완결된 이야기를 목표로 하지 않고, R과 J, 두 남녀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에 치중한다. 영화의 초반부 R이 J에게 대전까지 같이 가자고 할 때, 둘의 대사와 풍경을 잡는 숏들을 통해 당시의 한국 사회에 대한 발언이 잠깐 등장하기도 한다. 서울은 이제 차가 많아지고 올림픽대로가 생기는 등 길이 얼마나 복잡한지 모른다는 J의 말과 함께 보이는 자동차 광고판이 그것이다. 또 십자가 가득한 서울 도심의 야경을 보여주는 숏 다음에 마치 유럽의 공동묘지 같다고 말하는 R의 대사가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원래의 목적대로 곧바로 둘의 관계에 집중한다. 카메라는 줄곧 자동차 안, 다방과 여관방의 R과 J를 포착하며, 지식인 남녀의 내면을 해부라도 하려는 듯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영화평론가 장병원의 지적처럼, “그럴듯한 이야기의 창출보다 현실의 표면을 기록하는 것”에 치중하는 이 영화의 목적은, 분명 이후 홍상수의 작업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는 R의 지인으로 추정되는 ‘누군가’(나)의 내레이션으로 열고 닫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프랑스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R이다. 장선우 역시 포착했듯, 하일지의 원작 소설은 3인칭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3인칭을 탈피해 나라는 존재가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R이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이다. 한편 영화는, 카메라의 시점과 3인칭 주인공의 시점을 합치는 방식으로 감독이 목적한 ‘주관적 객관성’을 실험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절대적인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주관적인 관찰자를 벗어난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R이 공항에서 빠져나오는 영화의 첫 장면부터 확인할 수 있다. R의 주관적 시점으로 마중 나온 환영 인파가 보이지만, 카메라가 옆으로 회전하면서 즉 카메라의 시점으로 전환해 R을 잡는 식이다. 또 R을 포착하던 카메라가 즉 카메라의 시점으로 시작된 숏이 R의 주관적 시점처럼 움직이기도 한다. R이 지나가는 사람이나 들려오는 소리에 관심을 가지면 카메라 역시 그쪽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장면들이다. R이 다방에서 껌을 사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시점으로 시작된 숏이 껌 파는 여성으로 시선을 옮기는 그의 주관적 시점으로도 활용된다. 또 J와 만난 다방 장면에서, R을 비추던 카메라가 그의 시선을 따라 다방의 어항을 비추다가 다시 돌아오면 카메라의 숏이 되는 식이다. 하지만 다음 숏이 J를 향한 그의 시점 숏이라는 점에서 숏의 논리는 한층 복잡해진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1인칭 화자가 날짜를 혼동하는 것처럼, 이 영화의 시간은 순전히 R의 주관적 감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카메라와 R의 주관적 시점이 합쳐지는 숏 운용은, 객관적 진실을 거부하는 감독의 태도를 지지하는 동시에 시간의 모호성을 탁월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1990년대 작가주의 영화의 계보 ‘코리안 뉴웨이브’ 작업은 1990년대에도 진가를 발휘했다. 장선우의 영화는 물론이고, 박광수 의 < 그 섬에 가고 싶다 >(1993),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 정지영 의 < 하얀전쟁 >(1992), <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1994), 이명세 의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 (1990), < 첫사랑 >(1993) 등이 작가주의 미학과 대중적 감각 사이의 균형점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임권택 은 < 서편제 >(1993)의 흥행 성공으로 국민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1996년과 1997년은 2000년대 해외 영화제를 통해 인정받은 작가주의 감독 홍상수, 김기덕 , 이창동이 각각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 < 악어 > (1997), < 초록물고기 >(1997)로 데뷔한 해다. 특히 <그 섬에 가고 싶다>의 각본과 연출부에 참여하며 영화계에 입문한 이창동은, 소설가 출신다운 이야기꾼으로서의 내공에 영화 매체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결합하며 작가주의 감독으로서 신중한 행보를 시작하고 있었다.
주성철(이하 ‘주’) 첫 질문은 배우 원진 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영화에서 원진은 청량리역 지하보도에서 과격한 액션도 선보이고, 그동안 잘 관리한 상체도 드러내고, 벽 찍고 돌고. 예전에 예광했던 원진의 모습을 보면서 “이 영화는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라는 느낌이 왔다. < 용의자 >는 이 배우를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만족시킨 것 같다. 원신연 (이하 ‘원’) 사실 공유 는 워낙 팬이 많고, 김성균 이 최근 <응답하라 1994>로 인기가 많아져 관객들이 이 둘의 격투 액션에 관심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용의자> 개봉 후 무대인 사를 다니면서 관객들의 반응을 보니 지동철(공유)과 SA1( 원진 )의 이야기에 관심을 많이 보이더라. 솔직히 액션의 퀄리티로 만 보면 아쉬운 점이 많았다. 촬영 당시 추운 겨울이었고, 청량리역에서 촬영할 때에는 장소 섭외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유동인구가 많은 장소다보니 일반인 통제도 어려웠다. 3분마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서 이들이 지나갈 때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섭외한 엑스트라보다 일반인이 더 많이 나왔다.(웃음) 이런 상황이다보니 액션을 구현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관객들은 액션을 액션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원진 이 맡았던 SA1 캐릭터의 변화에 대해 많은 반응을 하더라. 과거에는 아크로바틱 액션이 많았는데 현대물에서 소위 ‘고전적인’ 액션이 등장하니 그게 관객들 인상에 깊이 남은 것 같다. 더군다나 와이셔츠가 찢어지면서 몸이 드러나는데, 얼굴은 50대 중반이지만 몸은 공유 와 비슷하니(웃음) 그게 강렬했던 것 같다. 주 < 용의자 >의 액션 신만 놓고 봐도 이 배역을 탐낼 만한 다른 배우도 많았을 것 같다. 하지만 고집스럽게 과거 액션 스타를 기용한 것은 감독의 이 영화에 대한 의지 혹은 열정이 보이는 부분이다. 원진 을 캐스팅한 것 하나만으로도 감독이 이 영화를 어떻게 끌고 나가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원 사실 캐스팅이 쉽지 않았다. 원진 은 나에게 영웅이다. 이분은 여전히 액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분이다. 나는 예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계속 같이 작업하고 싶다. 그리고 감독으로서 액션배우라서 액션으로만 소비되는게 아니라 배우로서 같이 영화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더라. 상업영화의 시스템에서 보면 사실 ‘이 사람이 과연 연기를 잘 소화할 수 있을까?’ ‘이 정도 비중의 배역이라면 기존의 배우를 캐스팅하는게 좋지 않을까?’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감독 입장에서 관객으로부터 잊힌 배우를 기용하는 것에 대한 논리를 만들어 설득해야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과거 우리에게 꿈을 심어주었던 액션 주역들이 영화에 등장한다는 것은 단순히 재미를 넘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게 나와 같은 감독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유창국 과 원진 은 액션의 대가였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분들에게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같은 드라마를 뽑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더 도전하고 싶다. 무술감독 원신연 vs 영화감독 원신연 주 감독 이전에 액션 배우, 무술감독의 경력이 있다. 이런 경력으로 미루어 이전에 작업한 < 구타유발자들 >이나 < 세븐데이즈 >보다 앞서 이 영화가 감독의 데뷔작으로 하고 싶었던 영화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원 반대다. 사실 < 용의자 >를 연출하는 것도 아직 이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1990년 중반에 무술감독을 시작해 < 테러리스트 > 등 몇 편의 영화에서 무술 지도와 대역을 했다. 사실 먹고살기 위해서도 했지만 액션을 할 때 가장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 조폭마누라 >( 조진규 , 2001)의 무술감독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단편 < 세탁기 >(2001)를 준비할 때였다. <조폭마누라>에 참여하면 경제적으로 분명 여유가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빚을 내어 단편을 제작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당시 연출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액션을 깊이 있게 담아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드라마 요소가 강한 영화로 감독 제안도 많이 들어왔지만 상업영화로는 < 가발 >(2005)로 데뷔했다. 그리고 < 세븐데이즈 >(2007)와 <용의자>(2013)까지 만들게 되었다. 액션이라는 장르는 여전히 나에게 보물창고이고 욕망이다. 그리고 현재 시류와는 안 맞더라도 기술적 요소만 강조된 액션, 디지털 기술로 표현되는 액션보다 몸으로 소화하는 액션을 꼭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다가 < 용의자 >의 시나리오를 받았고, 액션이 주가 되지만 그 안에서 드라마를 보았기 때문에 연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동철뿐 아니라 민대령( 박희순 )과 김실장( 조성하 ) 캐릭터의 감정도 관객들에게 표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관객들이 잘 봐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주 < 조폭마누라 >를 거절하고 단편영화에 투신한 것은,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결국 연출가라는 꿈을 추구한 것이다. 원 그렇다. < 테러리스트 > 무술지도를 하면서 정두홍 감독과 처음 만났다. 그때 정두홍 감독이 나에게 “우리 액션의 길로 멋지게 가보자.”고 했는데 나는 거절했다.(웃음) 만약 내가 그때 정두홍 감독과 함께 액션을 계속했다면 나도 지금 경기도 어딘가에 집 한 채 장만했을 것이다.(웃음) 쌀도 임금님표 쌀 먹고 있을 것이다.(일동 웃음) 하지만 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즐거움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내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직업이라기보다 나의 삶 자체인 것 같다. 주 < 세븐데이즈 >의 김윤진 , < 용의자 >의 공유 의 캐릭터는 일종의 워커홀릭이다. 그리고 <용의자> 초반에 등장하는 항공촬영이나 영화 전반에서 보여주는 도심 액션을 보면 이전 영화에 비해 액션의 강도가 무척 높다. 개인적으로 ‘촉감이 느껴지는’ 액션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렇게 영화 속 캐릭터, 그리고 영화자체를 봐도 감독의 집요함, 전투성이 느껴진다. 개인적 성향과 유사한 면이 있나? 원 나의 개인적 성향이나 욕구가 장르를 통해 발현되는 것 같다. 감독이라는 직업은 평소 한없이 게으를 수 있지만 작업에 들어가면 그 순간만큼은 최대한 몰입해야 하는 직업이다. 나는 영화말고 다른 유희가 없다. 오늘도 여기(영상자료원) 오면서 영감을 얻기 위해 OST를 들으면서 왔다. 이게 생활이 되었다. 하지만 꼭 이런 성격이 꼭 장점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성격은 아마도 제도권 내에서 영화를 정식적으로 배우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감이 아닐까 한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나 자신을 용납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열등의식은 없는데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있다. 이런 성격이 영화를 만드는 데 직간접적으로 표현되는 게 아닌가 싶다. 주변 사람들이 좀 쉬면서 작업하라는 조언을 많이 한다. 너무 숨 가쁘게 달리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진 더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 용의자 >의 등장인물을 말하다 주 캐릭터 얘기를 해보자. 최근 < 용의자 >를 전후로 ‘북에서 내려온 과묵하고 초인 같은 남자’ 캐릭터가 영화에 많이 등장한다. < 베를린 >이 그렇다. 그리고 < 은밀하게, 위대하게 >처럼 다양한 양상으로도 퍼졌다. <용의자>의 지동철은 그중에서도 가장 과묵한 남자다. 이 남자를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나? 원 지동철의 대사를 다 합쳐보면 A4 두 장이 채 안 된다. 그래도 지동철의 대사를 더 줄였어야 했다.(웃음) 영화를 만들면서 도전을 받을 때가 많다.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한국영화들은 너무 설명적이란 느낌이 든다. 관객 중심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때문이긴 하지만 관객이 생각할 틈이 없이 너무 떠 먹여준다는 인상을 준다. 스토리나 이야기 구성은 관객들에게 친절할 수 있다 쳐도 극중 캐릭터의 감정까지 그렇게 친절히 설명해야 하나 생각한다. 과묵하고 말 없는 지동철을 통해서도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눈빛 하나로 관객이 더 궁금해하고, 그러면서 관객이 더 몰입하고 이해하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대사보다는 표정,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을 더 많이 잡고 싶었다. 주 < 용의자 >는 지동철이라는 큰 줄기를 따라간다. 그리고 극중에 나오는 기자 선후배, 최경희( 유다인 )와 주 기자( 김민재 )의 관계도 눈여겨볼 만하다. 주 기자는 자신이 기자의 사명감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서서히 자아를 찾아가는 캐릭터다. 주 기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사인>의 주진우 기자를 암시한 것인가?(웃음) 그리고 극중 기자라는 직업을 그렇게 그린 데에는 또 다른 메시지가 있나? 원 난 <씨네21> 정기구독자다.(웃음) 얼마 전 <씨네21> 기획특집 ‘기레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를 봤다. 그리고 최근 에스콰이어의 신기주 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들이 현재 기자의 세계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더라. 영화에는 그냥 ‘주 기자’로 나왔지만 영화에서 이 기자의 본명은 주진웅이다. 하지만 (물론 그러시지 않겠지만)자신의 캐릭터가 영화에 등장하는 것에 대해 불쾌해할 수도 있고, 관객의 몰입도도 떨어질 수 있어서 그냥 ‘주기자’로 표현했다. 아무튼 영화에서 난 사회의 문제와 이슈를 펜으로 표현하는 기자에 대해 가감 없이 보여주고 싶었다. 주진우 기자의 책은 물론 기자들이 쓴 책을 많이 읽으며 기자에 대해 공부했다. 사실 극 중 주 기자보다 최경희(유다인)의 캐릭터가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기자상에 더 가깝다. 지금와서 밝히지만 최경희의 핵심 대사가 있었다. 사실 유다인 씨가 이 한 문장의 대사에 애착을 갖고 영화에 참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지보다 높지 않고, 대통령보다 낮지 않은 게 거지다. 씨발!”이다. 결국 이 대사가 내가 표현하고 싶은 강도보다 세서 빠지게 되었지만 이런 성격을 가진 최경희가 내가 바라보는 이상적인 기자다. < 용의자 > vs <본 시리즈> 주 < 용의자 >를 <본 시리즈>와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 원 한국 관객들이 한국영화에 박한 면이 있다. 하지만 어떤 특정 영화에 대해서는 관객들의 배려심이 깊다. 이를테면 < 도둑들 >을 보면서 <오션스 시리즈>를 깊게 얘기하진 않잖나? 사실 < 용의자 >가 <본 시리즈>를 표절했다고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독립 다양성 영화가 아니고 상업영화 시스템 내에서 제작되는 영화라면 <본 시리즈>뿐 아니라 유사한 장르의 영화에 등장하는 흥행 요소들을 배치해 적절히 균형을 맞추는게 일종의 협의사항이다. <용의자> 시나리오를 처음 받고 6개월 동안 시나리오 수정 작업을 했다. 수정하면서 주인공의 감정, 정서를 많이 강조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감독이 생각하는 대로 수정 하다보니 ‘이 프로젝트(<용의자> 제작)가 무산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결국 최초 시나리오의 톤앤매너를 바꿀 순 없었다. 한국의 대중은 이런 속사정을 모르니 어찌보면 <본 시리즈>와 비교하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어쩔 수 없었던 부분들도 있지만 앞으로 소재적으로나 장르적으로 관객들에게 좀 더 충격을 줄 수 있는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 추격 신의 경우 어떤 면에서는 <본 시리즈> 이상이라 생각했다. 기존의 한국영화 액션에서 볼 수 없었던 장면도 많이 나온다. 원 시각적 요소를 위해 준비도 많이 했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결론적으로 <본 시리즈>와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반성을 했다. 유사한 것을 인정한다기보다 오히려 <본 시리즈> 뿐 아니라 기존의 영화들과 차별되는 전혀 새로운 것에 대해 더 고민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이다. 만약 <용의자2>를 만든다면 드라마가 중심이 된 액션이 될 것 같다. 액션으로만 < 용의자 >를 봤을 때 화두는 ‘액션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였다. 대부분 제작 환경이 디지털로 변했는데 그렇게 촬영한다면 실감이 안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수소문을 해보니 액션을 실감 나게 촬영할 수 있는 장비를 보유한 분이 많았다. 다만 이분들이 그 동안 영화에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예산적인 부분에서의 합의도 잘 이루어졌다. 향후 액션영화에도 많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원신연 이 바라보는 액션영화, 그리고 액션배우 주 < 용의자 >에는 이 영화의 무술감독인 오세운 감독이 엑스트라로 등장한다. 아무래도 무술지도나 액션 경험이 많은 감독으로서 무술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원 지금도 오세운 감독과 만나면 많이 싸운다.(웃음) 나도 촬영하면서 아쉬운 부분이 많았고, 무술감독도 나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무술감독의 역할에 비해 대우를 제대로 못 받는 실정이다. 영화 속에서 그들의 다양한 장기를 펼칠 수 있는 충분한 재능을 보유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그런 시나리오가 없다. 그리고 그런 시나리오가 있어서 영화화가 된다해도 그에 맞는 금전적 보상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합리한 부분이 많다. 이것은 상업영화 시스템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무술감독들도 평소에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연출자가 요구를 듣고 현장에서 그 외에 3~4개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만큼 자신감과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 주 개인적으로 국내 무술영화의 < 어벤져스 >라고 할 수 있는, 무술 대가들이 대거 참여한 액션영화를 언젠가 꼭 보고 싶다. < 자장가 >( 원신연 , 2002)에 나오는 권성영 무술감독은 마스크도 훌륭하다. 정두홍 , 원진 … 모두가 출연하는 그런 영화 말이다. 원 정두홍 감독이나 오세영 감독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류승완 감독도 그런 욕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보긴 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영화를 만들기에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 제도권 내에서 타협해서 장르영화를 만들기보다 무술 대가들이 그들의 재능을 내세워 자유분방하게 영화에서 표현되게 하려면 내가, 다시 말해 감독의 힘이 강해지는 게 중요하다. 그래도 언젠가 결과(흥행)에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는 그런 영화를 꼭 한 번 만들고 싶다. (‘주’ 언젠가 꼭 만드신다니… < 어벤져스 >가 아니라 < 익스펜더블 >이 되어도 좋을 것 같다. (일동 웃음)) 얼마 전 < 세븐데이즈 >의 최영환 촬영감독이 자료를 찾다가 < 밥풀떼기 형사와 쌍라이트 >( 신우철 , 1989)을 봤는데, 거기서 대역을 했던 나를 보고 전화를 했더라. “왜 살짝 스쳤는데 두 번 돌아서 화려하게 넘어지냐!”며 면박을 주더라.(웃음) (‘주’ 그 영화는 유창국 과 원진 의 대결을 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영화다.(일동 웃음)) 이 얘기를 한 이유는 그 만큼 여러 감독이 액션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꾸준히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 용의자 >, 그 이후… 주 < 용의자 > 개봉 후 6개월이 지났다. 돌이켜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원 꼭 < 용의자 >만의 얘긴 아니다. 감독에게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작품을 만들수록 제작 환경은 안 좋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억압이 커진 달까? 작품을 판단하고 검토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고민이 커지는 것처럼 말이다. 감독은 누구나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업영화 시스템과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용의자>는 조금 불만족스러웠다. 결국 상업영화 논리에 많은 부분 양보했지만 더 많은 대중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고민하고 반성하는 중이다. 주 < 용의자 > 엔딩이 속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원 속편은 사실 < 용의자 >를 시작하기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 감독이 아무리 준비되었다 해도 시나리오 등 탄탄한 설계가 중요하다. 속편에 대한 욕심도 크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다른 감독이 <용의자> 속편을 만드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용의자>가 프렌차이즈가 되는 것은 반대한다. 아무튼 <용의자> 이후 지동철을 계속 따라가보고 싶은 욕구가 있다. 과연 지동철은 딸이라는 것을 확인했을까? 이후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런 욕구가 남아 있다.
한해 지구촌 곳곳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들을 어림잡아 헤아려도 그 수가 몇 백 개를 훌쩍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 우리에게 익숙한 몇몇 해외 영화제들을 굳이 꼽자면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행사로는 세계 최대 규모와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비롯하여 예술 지향의 일본의 히로시마와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북미를 대표하는 캐나다 오타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그리고 세계 컴퓨터 그래픽스 역사의 궤적을 함께 그려온 미국 시그래프 컴퓨터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정도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영화제라 할 수 있겠다(물론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말이다). 이외에도 전 세계에는 수 없이 많은 영화제들이 그 나라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 위에 개성을 입혀 신선하고 톡톡 튀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로 애니메이션의 다양성과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며 축제의 장을 선사하고 있다. 정말 우연한 기회로 국내 어느 한 학생 애니메이션 페스티벌로 시작한 영화제 인생이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났다. 처음 영화제를 시작했을 때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그렇게 덤벼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모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영화제 운영이 뭔지도 모르는 제로베이스에서, 소위 4대 영화제라고 불리는 페스티벌들의 홈페이지를 일일이 뒤져가며 그렇게 시작했으니 말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단 표현이 그저 적절할 뿐이다. 그래도 역시 세월만한 스승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영화제 프로그래머란 직업적 특성 상 세계 여러 나라의 페스티벌들을 다니며 작품들을 찾아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색다른 경험과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되는데 바로 이런 즐거움과 설렘이 지금도 내가 영화제를 계속하는 이유인 것 같다. 세계의 애니메이션 페스티벌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을 담아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행사를 찾는 관객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참신한 작품들을 끊임없이 수혈하고 새로운 포맷을 제시하며 진화해 나간다. 실사 영화제들처럼 레드카펫 위에 세계적인 스타들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하는 것도 아니요, 세계 영화산업의 흐름을 좌지우지 할 만큼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지만, 여기에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마다 ‘변화’ 혹은 ‘지속’이라는 나름대로 지켜나가야 할 명제와 철학을 담아 행사를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때로는 잘나가던 페스티벌도 정체된 철학만을 고수하다 한계에 부딪치기도 하며 도태되기도 한다. 자그레브와 함께 가장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영화제 스타일을 고수해 왔던 히로시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 지난 2004년 10회째를 고비로 산업 논리를 일부 수용한 마켓을 유치하면서 변화를 꾀했고, 2008년까지 비엔날레로 개최됐던 홀랜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연례행사로 전환하면서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안시 역시 수년전, 정체된 페스티벌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연간행사로의 변모를 꾀했고 상업지향적인 페스티벌로 전향하면서 다른 이종 행사와의 교류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애니메이션 페스티벌과 fmx행사와 같이 영화제와 컨퍼런스가 만나면서 시너지 효과를 노리는 하이브리드적 페스티벌 포맷도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다. 이렇게 세계의 애니메이션 영화제들은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하는 애니메이션 환경과 장르를 수용하며 발빠르게 적응해 나가기도 하고, 뚝심과 열정으로 전통과 역사를 지켜나가기도 하면서 애니메이션의 활성화와 과거에 누렸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꿈꾸며 제 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여러 페스티벌들 중에서도 독특함과 세심한 친절함, 그리고 페스티벌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의 열정 때문에 그 매력에 흠뻑 빠져드는 영화제가 있다. 규모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페스티벌이 보여주는 참신한 아이디어와 개성 가득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프로그램과 함께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영화제가 갖춰야 할 덕목은 바로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해마다 그곳을 가면 오랜 친구를 만날 수 있고, 보고 싶은 작품들을 챙겨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은 영화제를 지속적으로 찾는 원동력이 된다. 이제는 고인이 되셨지만, 히로시마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가면 늘 뵐 수 있었던 분이 바로 퍼펫 애니메이션의 거장 카와모토 키하치로 감독이셨다. 그리고 시그래프에 가면 현존하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대가들을 모두 만날 수 있고, 영국 브래드포드 애니메이션 영화제를 찾으면 영국을 대표하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거장 닉 파크 감독과 매혹적인 연필 드로잉의 조안나 퀸 감독 등도 볼 수 있다. 또 어느 영화제에서 운이 좋으면 <나무를 심는 사람>의 프레데릭 벡 감독과 잠시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된다. 페스티벌과 같이 성장하고 발전해 온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며 한 걸음에 달려와 열심히 참여해 주는 페스티벌들. 페스티벌이 변화의 기로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도 페스티벌의 존재 이유를 피력하며 끊임없이 진화해 나가고 있는 해외의 페스티벌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우리는? 어렵고 힘들게 쌓아올린 한국의 애니메이션 역사와 함께 지켜나가고픈 페스티벌을 우린 지금 만들어 가고 있는가? 변화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역사와 전통은 절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페스티벌을 만드는 사람들의 노력과 애정이 있어야 하고, 다양한 비전을 보여줘야 관객들이 영화제를 계속 찾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변화에 성공한 영화제들에서 그런 의지와 열정을 읽었다. 해마다 규모가 쪼그라드는 국내 애니메이션 영화제를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동시에 우리도 안시나 히로시마, 시그래프 행사들처럼 오랫동안 지켜나갈 가치가 있는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제의 대표선수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