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강의 비객
- 감독
- 김시현
- 제작년도
- 1976
- 출연
- 장일도, 황인식, 김정중, 김기주, 김지혜, 이예민, 최민규, 김기종, 홍성중, 한명환, 마도식, 주일몽, 태일, 정규영, 안진수, 윤일주
“31층? 떨어져 죽기 편리하겠다. 꺄르르.” 시골을 떠나 친구와 함께 서울로 향하던 명자( 윤여정 )는 서울에 31층짜리 빌딩이 있다는 얘기에 그렇게 말한다. 당시 충무로에서 이른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라는 흐름 안에서 이제 막 상경하여 서울의 고층빌딩 앞에 주눅 든 ‘시골 여자’라는 전형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거기에는 이후 김수현의 TV 드라마를 지나 최근 < 죽여주는 여자 >(2016)와 예능 프로그램 <윤식당>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그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배우로서의 어떤 불균질한 비범함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당대의 표현주의 거장 김기영 감독과의 만남으로부터 비롯됐을 것이다. 1966년 T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윤여정에게 바로 < 화녀 >(1971)는 25살의 나이의 영화 데뷔작이다. 순박했던 시골 처녀 명자가 가정부로 들어간 그 집에서 남편( 남궁원 )과 불륜을 저지르고, 결국 임신과 낙태 끝에 그 집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당시 흥행 부진으로 고민하고 있던 김기영 감독을 기사회생시켰고, 놀랍게도 윤여정은 이 데뷔작으로 대종상, 청룡상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윤여정의 시작’을 알고 싶다면, 굳이 이 영화가 데뷔작이어서가 아니라, 지난 50여 년 동안 윤여정 이미지와 스타일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너무나도 중요하다. 지난 4월 「씨네21」에서는 창간 22주년 기념으로, 영화인 2백여 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영화 최고의 여성 캐릭터’ 설문을 진행했다. 박찬욱 감독 < 친절한 금자씨 >(2005)의 금자( 이영애 )와 봉준호 감독 < 마더 >(2009)의 엄마( 김혜자 )가 공동 1위였고, 김기영 감독 < 화녀 >(1971)의 명자( 윤여정 )는 10위였다. 김기영 감독의 또 다른 작품 < 하녀 >(1960)의 하녀( 이은심 )는 4위였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도 영화감독과 영화평론가의 의견이 의미 있게 갈렸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영화감독은 <친절한 금자씨>를, 영화평론가는 <마더>를 지지하는 형국이었다. 마찬가지로 김기영 감독의 필모그래피로 보자면 영화감독은 <화녀>에, 영화평론가는 <하녀>에 손을 들어주는 양상이었다. 그 경계를 가르는 지점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거의 논문 한 편을 써야 할 정도일 텐데, 그를 거칠게 정리한 한 설문자는 이렇게 비교했다. “<하녀>의 의미나 스토리보다 <화녀>의 재미와 스타일에 더 끌린다.” 그리고 또 다른 설문자는 이렇게도 말했다. “배우로서 윤여정만의 독창적 스타일은 <화녀>로 시작하여 < 충녀 >에서 완성됐다.” 김기영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 하녀 >(1960)로부터 뻗어 나간 여(女) 시리즈는 <하녀>를 포함해 총 5편이다. <하녀>를 시작으로 < 화녀 >와 < 충녀 >(1972)까지 3부작이라 할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모두 <하녀>의 변주인 가운데 그를 70년대의 사회현실에 맞게 바꾼 것이 <화녀>이고, 나중에 거의 같은 내용으로 < 화녀82 >(1982)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충녀>를 리메이크한 것이 < 육식동물 >(1984)이다. 60년대의 시작이었던 <하녀>로부터 거의 10년 뒤에 만들어진 <화녀>에는 당시 산업화와 경제개발에 대한 비판적 요소가 강하다.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하는 여자들, 문화예술계로 진입하려는 여자들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한없이 적극적이다. 김기영 감독 특유의 원시성에 대한 탐닉이 변화하는 세상과 맞물리는 것. 특히 도시 속의 양계장이라는 설정 아래 급기야 사람의 시체를 닭의 사료로 이용하는 장면은 지금 봐도 충격적이다. 그때 명자의 대사도 압권이다. “사료는 역시 동물성이 최고야. 어제 먹이가 좋았는지 오늘 달걀은 크네.” 불륜 이후, 갑자기 죄를 지은듯한 표정으로 욕조에 담긴 물을 손으로 퍼서 마시고, 급기야 집의 부인( 전계현 )과 함께 낙태 수술을 받으러 갔다가 마음이 바뀌어 달아나듯 철문을 흔들다 쓰러지는 장면은 별다른 대사 없이도 급박한 감정의 전이가 일어난다. “이 집 남자는 애를 배게 하고 이집 여자는 애를 떼게 하고 내 몸을 장난감처럼 다룬다”고 항변할 때도 오직 그녀만의 화법과 정서가 발생한다. 영화 후반부에 다시 만난 인력소개소 직원에게 “그전의 내가 아냐”라고 말할 때처럼 명자, 아니 윤여정 은 같은 영화 안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등장한다. 김기영 감독 특유의 독창적인 표현주의 세계 안에서 파격적인 상황설정과 비일상적인 대사, 그를 넘나드는 욕망의 지도는 윤여정의 힘을 빌어 완성된다. 어쩌면 그로부터 10년 전 < 하녀 >를 만들던 당시에도 윤여정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녀를 캐스팅하지 않았을까. < 파계 >(1974) 연출부로 일하며 김기영 감독과 인연을 맺은 유지형 감독은 그와의 인터뷰를 담은 「24년간의 대화」의 마지막 에필로그를 “김기영 감독님의 괴물”이라고 시작한다. 그렇게 < 화녀 >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서울 주자동 골목에 2층 양옥을 구입했는데, 흉가여서 시세보다 싸게 구입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흉가에 사는 거구의 영화감독이라. 「이영일의 한국영화사 강의록」에서 영화평론가 이영일도 “김기영은 괴팍스러운 사람이다. 한국영화사에 있어서 다소 이색적이고 이질적인 감독”이라며 “자기가 생각하는 주제를 결코 미화하지 않는다. 그는 과학자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처럼 노골적으로 적나라하게 인간을 바라보는 사람은 국내외에 드물다”고 썼다. 말하자면 <화녀>는 괴물 감독과 괴물 배우, 달리 말해 당대 가장 독창적인 감독과 배우가 만나 빚어낸 걸작이다.
독립영화와 예술영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극장이 대구에 있다는 것과 그 극장이 동성아트홀이라는 건 웬만하면 아실 법하다. 그런데 이 극장이 지금 대변신 중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아시다시피 대구 동성아트홀은 지난 2004년부터 지금까지 2천 편 이상의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상영한 대구지역 영화문화의 메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작년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예술영화관 지원 사업에서 탈락하며 오히려 더 알려지게 된 이 극장에서, 필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간단히 역사를 말씀드리면 지역의 대표적인 극장 만경관에서 간판 화가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배사흠 대표가 1992년 오랜 꿈인 자신의 극장을 열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지금의 동성아트홀이다.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몰라도 당시에 지은 극장 작명의 의미가 ‘대구의 중심가 동성로에서 아트한 영화들을 상영하는 극장’이라는 것이었다. 인수 후 당시로써는 상당한 비용인 3억 원가량을 들여 시설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렀는데 멀티플렉스가 본격화 된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 지속적으로 내리막길을 걸어 비디오 관으로까지 전락한 상황이었다. 그러다 2004년, 시네마테크를 운영하며 상영관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필자와 위의 상황에 직면한 동성아트홀이 만나 곧바로 협력을 약속하고 함께 영진위 예술영화관에 지원해 극장의 성격을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극장의 성격을 알리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2000년대 후반에 이를 때까지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 극장을 서울 대학로의 동숭아트홀로 부르곤 해서 필자는 매번 이를 설명하느라 설움 아닌 설움을 겪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대구경북시네마테크의 전용관에 상응하는 기능을 동성아트홀이 맡아 줌으로써 해외의 많은 고전 작품들을 지역에 소개할 수 있었던 큰 기쁨이 있었다. 지역에서 예술독립영화의 첨병 역할을 해왔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CGV대구에 무비꼴라쥬가 생기고 롯데시네마대구에 아르떼라는 예술영화관이 생기는 등 치열한 시장 환경에서 살아남기 매우 힘들어진 상황이 전개되었다. 또한 이 극장들이 모두 몇백 미터 거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상영작들도 겹치게 되는 상황이 지속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작년 영진위의 예술영화관 사업에서마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탈락하게 됨으로써 급기야 올해 2015년 2월 25일 동성아트홀은 폐관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여러 자구노력이 있었고 지역에서도 폐관을 안타까워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많은 언론이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여기서 다시 기사회생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현재의 대표인 광개토병원 김주성 원장이 이 안타까움을 알고 선뜻 극장인수에 나서 주었고 그 결과 동성아트홀은 회생할 수 있었다. 배사흠 대표를 명예관장으로 하여 그 정신을 계승하고 기존 직원들이 운영을 맡아 운영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첫 사업으로 노후화된 시설을 개보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공중이용시설인 극장이라는 특성도 있어 메르스가 대구에 퍼지던 시점인 6월에 곧바로 휴관공지를 하고 리모델링에 착수했다. 리모델링 중인 동성아트홀 이상 지난 20여 년의 역사를 숨 가쁘게 말씀드렸다. 지금은 상영시설과 휴게시설을 중심으로 대변신을 하고 있는데 실제 그 폭과 깊이를 정하는 데는 상당한 고민과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현재의 시설을 개보수한다 해도 근본적으로 건물의 취약점이 있어 보수에 드는 비용을 어느 선에서 정할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동성아트홀에서 보다 안정적이고 확고한 시설로 운영해야 한다는 고민과, 다른 곳에 좀 더 안정적인 예술영화관을 하나 더 설립한다는 중장기적인 계획이 함께 하기 때문에 개보수의 규모를 산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예술독립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목마름을 외면할 수 없었고, 현재의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보자는 결심이 서 바로 리모델링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향후 동성아트홀은 어떤 극장이 될 것인가. 현재 주변 환경을 보면 CGV아트하우스가 앞에 있고, 옆에 실버영화관이 있으며, 그 근처에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이 있다. 그러한 지리적 여건과 함께 영화관의 성격이 함께 결정되는데, 실질적으로 대중성이 있는 예술영화의 경우 CGV아트하우스가 많이 상영하게 될 것이고, 국내 독립영화의 경우 전용관인 오오극장이 전담하는 형국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성아트홀은 (CGV아트하우스에서 소화하지 못하는) 다양한 예술영화 전시장으로써의 역할과 독립영화에 대한 일정 역할도 함께 담당하게 될 것이다. 이전에는 이 모든 영화들을 동성아트홀이 담당해왔는데, 어떤 면에서 그 스펙트럼이 많이 좁아진 셈이다. 극장 자체로 보면 수익성은 더 나빠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간 시설의 노후화도 관객들에게 상당한 불편을 준 셈이라 이러한 부분을 개선한다면 근처의 극장들과 더불어 예술영화와 독립영화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 향상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있다. 동성아트홀 근방 극장 지도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지역에 소개해 지역민의 영화문화를 더 넓고 튼튼하게 한다는 소명의식을 뒷받침할 종합적 플랜의 일환이 아닌, 저마다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만의 방식에 의해 유사한 극장이 늘어나게 된 점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지만, 동성아트홀은 그 존재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대구 지역에서 다양한 영화를 소개한 산파로서의 자긍심을 안고 있기에 오늘 스크린 너머 들리는 망치 소리에서 희망을 본다. 또한 보다 안락한 여건에서 보다 다양한 영화들이 동성아트홀을 메우고 거기에 환호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영화문화의 다양성과 문화 복지라는 큰 꿈을 꾸며 다시 재기할 동성아트홀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리고 싶다. 아울러 지자체를 비롯한 다양한 기관에서도 문화도시 대구를 말로서만이 아닌 보다 실질적으로 이룰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으로서 동성아트홀에 대한 관심과 접근이 있기를 바라며 개봉관이 없어 힘들어하던 많은 감독들과 영화사, 그리고 스크린 독과점으로 영화선택권이 박탈당한 채 답답함을 하소연하던 그 관객들의 열정이 다시 동성아트홀에 가득 담기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힘들지만 보람찬 여정에 함께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언제까지나 간직하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