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기차역
- 감독
- 임진아, 허정은
- 제작년도
- 2004
복장전환(cross-dressing) 영화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1960년대에 정점을 찍는다. 복장전환 영화는 당대 성별성의 역동적 변화에 대한 신경증적 반응이자 퀴어적 놀이터로 작동했다. 이들 영화는 크게 남장여자와 여장남자 컨셉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체로 전자는 진지한 사극에서, 후자는 그보다는 가벼운 코미디에서 발전한다. < 별 >(1961)과 < 십오야(의 복수) >(1969)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 미인도 >(2008)와 < 도리화가 >(2015)처럼 남장여자 사극은 가부장제 비판과 남성동성애의 서브코드를 수반한다. 과거를 시대배경으로 하는 사극의 특성상 강력한 가부장제 체제에서 여성의 사회적 활동과 역할은 극도로 제약되고 여성 주인공은 남장을 하고 남성동성사회에 침투할 설득력을 얻는다. 특히 1960년대 남장여자 사극의 주인공은 남성성의 과시와 영웅적 모험을 스펙터클화하기 위해 무사로 성장하는 서사가 두드러졌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십오야(의 복수)>가 대표적이다. 적대적인 두 가문에서 동시에 태어난 남녀 아이가, 남아선호를 이유로 뒤바뀌고 여자아이는 상대방 가문의 아들로 키워져 복수의 칼을 간다. 이 과정에서 뒤바뀐 두 남녀는 사랑을 느끼지만, 남장여자인 매화(남정임)가 마지막에 남자의 부모가 자신의 친부모라는 비밀을 알고 나서도 살해를 감행하자 각자의 길을 떠난다. 성별뿐만 아니라 복수의 대상까지 전환된 상태에서 남아있는 감정을 해소하지 않은 채 끝나는 결말은 두 주인공과 관객 모두를 혼란과 당혹 속에 빠트린다. 매화는 그녀가 남자가 아닐 거라는 다른 남성들의 끊임없는 의심 속에서도 그리고 근친살해라는 도덕적 문제에도 끝내 남자의 자리를 고집한다. 마치 그녀의 목표는 사랑하는 남자도, 가문의 복수도 아닌 남성성의 획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매화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남장을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에게 특히 로맨스의 대상인 거목(남진)에게, 그가 진짜 남자인지를 의심받으며 패싱에 자주 실패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매화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그녀의 당황하는 표정과 여성스러운 외모를 스펙터클화한다. 즉 매화는 이성애 로맨스 대상으로서 그녀의 여성성을 해칠 정도로 남장이 충분치 않다. 여기서 타인의 의심스러운 시선에 남장이 벗겨지는 순간의 취약함의 노출과 여성성이 교묘하게 결합된다. 그녀의 남장은 지워지지 않는 강력하고 진정한 여성성을 강조하는 데 이용된다. 이렇게 대부분의 남장여자 사극이 ‘남성동성애’라는 방해물을 ‘극복’하고 최종적으로는 진정한 이성애적 결합을 목표로 달려가긴 하지만, 시각적으로 남성동성애적 환상이 순간적으로 무대화된다는 면에서 그리고 <십오야>처럼 자신의 남성성을 고집하는 서사처럼 퀴어적 실천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지정성별이 남성인 주인공이 여장하는 영화는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장르가 주를 이루며, 여성으로 패싱될 때 전환된 욕망, 관계, 직업유지 등을 생활밀착형 에피소드로 상세하게 묘사한다. 남자들이 여장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직업이나 생계다. < 남자는 안 팔려 >, < 내 것이 더 좋아 >, < 남자와 기생 >, < 신입사원 얄개 >, < 치마 입은 남자 >의 주인공은 모두 남자로서 직업을 찾거나 거주지를 찾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해 여장을 한다. 이 영화들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뤄지던 1960년대 도시는 여자들이 살기에 더 좋은 장소라고 주장한다. 영화에서도 묘사되다시피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여성 일자리가 증가했지만 주로 제조공장, 식모, 비서, 판매원, 공연, 미용, 버스 안내양, 성판매 등의 특정 직업에 국한되었다. 노동조건이 좋지 않아서 남성이 꺼리는 직업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직업에서는 남성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여장남자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자신이 취직을 못 하는 것을 여성의 탓으로 돌리고, 도시의 젊은 여성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침입자로 묘사한다. 산업 시스템이 변하고 도시의 구성이 달라질 때, 성 역할도 변할 수밖에 없다.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전통적 남성 주체성은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여장남자 코미디는 남성들이 자신의 남성성이 비난받는 이유를 여성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서사를 제공해 주는 동시에 근대 도시에 더 적합한 유연하고 '여성적인' 새로운 남성성을 연습할 수 있는 쿠션이 되어 준다. 변화에 대한 부적응 그 자체와 적응을 위한 고투로 인해 발생하는 고단함은 기존 규범에서 벗어난 신체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발생시킨다. 한편 여장남자 코미디는 근대화된 도시에서 여성의 노동시장의 진입에 대한 남성들의 두려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그것을 조정하고 협상하려는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영화들은 여장남자 주인공의 좌충우돌 해프닝을 통해 여성의 직업 세계에서 일어나는 갖은 차별과 혐오를 폭로하고, ‘여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또한 < 여자가 더 좋아 >나 <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 >, < 내 것이 더 좋아 >, < 남자와 기생 >, < 치마 입은 남자 >처럼 여장남자들은 이미 주류 남성들과는 이질적인 ‘여성적인’ 남성이다. 그들은 다른 남성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자신을 스펙터클화 하는 신체적 퍼포먼스에 능하며, 요리와 뜨개질을 좋아하고, 성적으로 여성에게 위협적이지 않고 잘 어울린다. 여장한 이후에는 실제로 ‘독특한’ ‘본 적 없는’ ‘다른 여자와는 다른’ 여자로 남자의 인기를 독차지 한다. 여장남자에 대한 다른 남자들의 성적 접근은 대부분 성폭력에 해당하지만 말이다.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는 앞서 말한 주제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퀴어적 관계를 가시화하는 영화다. 고향을 떠나 상경한 성춘(서영춘)은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봉수(구봉서)의 집에 얹혀살면서 그의 아내 노릇을 한다. 봉수는 헤어진 전 아내의 체구가 성춘과 비슷하다며 이미 내재해 있는 그의 여성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봉수의 전 ‘아내’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시스젠더인지 트랜스젠더인지, 혹은 크로스드레서인지 알 수 없다. 낯선 성춘을 거리낌 없이 집으로 데려오는 봉수의 태도나, 체격이 비슷했음을 강조하는 것을 봤을 때 봉수의 전 파트너 역시 ‘남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성춘은 주인집에 들키지 않기 위해 완벽한 ‘아내’ 역할을 하려 노력한다. 그러던 중 봉수는 그들의 집 건너편에 레즈비언 커플인 강자(이금희)와 분임(고은아)이 살고 있다고 알려준다. 성춘은 남성적인 ‘바지씨’ 강자와 여성적인 ‘치마씨’ 분임을 관찰하며 ‘아내’ 역할을 수행한다. 봉수와 성춘에게 이 레즈비언 커플은 전통적 성역할을 모범적으로 제시해주는 좋은 예이다. 이 영화는 오프닝부터 여성성은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눈, 입술, 코의 클로즈업은 주류 카메라가 여성성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시골에서 올라온 성춘의 무지를 드러내기 위해 삽입한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서울에 올라와 쇼윈도우 너머에 있는 마네킹을 처음 본 성춘은 ‘고운 여자가 갇혀 있다’고 착각한다. 여성성이라 것이 프레임, 즉 무대에서 수행되는 것이라는 것을 성춘의 순진함을 이용해 형식화한다. 또한 봉수와 성춘이 함께 데이트를 나간 장면에서 둘은 영화관을 지나가는데 간판에 구봉서와 서영춘이 주연한 ‘내 것이 더 좋아’라는 제목의 영화가 걸려 있다. 이 영화는 끊임없이 프레임 속의 프레임, 영화 속의 영화를 통해 젠더, 특히 여성성이 수행적이고 구성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든다. 이중 가장 중요한 프레임은 바로 강자와 분임이 사는 집의 창문이다. 봉수는 성춘이 다른 아내들과 달리 애교가 없다고 타박하고 성춘은 건너편 창문을 통해 분임의 얼굴표정, 제스처, 분임이 강자에게 하는 ‘애교’를 모방하고 학습한다. 성춘은 분임이 강자에게 회사에 잘 다녀오라고 키스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출근하는 봉수에게 키스를 해준다. 성춘과 분임이 동일하게 가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퍼포먼스가 강조되는 가수라는 꿈은 분임의 여성성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성 역할을 수행하고 노력한 결과라는 것을 드러낸다. 성춘이 옆집 창문에서 보이는 분임의 제스처와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고 따라할 때, 창틀로 프레이밍된 그리고 무대화된 여성성의 수행은 정확히 이중적으로 영화적인 것이 된다. 창문은 젠더의 표정을 드러내는 ‘얼굴’이 된다. 분임을 보는 성춘과 성춘을 보는 관객. ‘여성적인 남자’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을 학습하고 장착하는 과정은 충분히 퀴어적이다. 하지만 다른 복장전환 영화들처럼 이 영화도 성춘의 여장을 벗겨내고 이성애 관계로 짝을 교정하면서 퀴어적 실천과 욕망을 봉합하려 한다. 결말에서 성춘은 분임과, 봉수는 강자와 새롭게 맺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짝짓기는 이성애적 결합이나 ‘규범적 정상성’으로 보기에 매우 의심스럽다. 커플 스와핑이라는 실천과 이성애적 교정을 통해 오히려 동성애적 함의가 더 짙어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분임은 성춘을 여자로 알면서 좋아하게 되었다. 또한 성춘은 부부란 모름지기 아들 딸 낳고 살아야 한다며 ‘정상성’을 강조하고 공원에서 분임에게 해코지 하는 남자들을 물리치며 자신의 ‘규범적 남성성’을 과시한다. 하지만 분임을 괴롭힌 남자들은 성춘이 돈을 주고 산 사람들이다. 이 장면은 남성성 역시 수행되고 구성됨을 강조할 뿐이다. 한편 봉수와 강자는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내들’ 욕을 하며 친해지게 된다. 봉수는 수염 많은 집사람보다 피부도 부드러운 강자가 더 마음에 든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강자도 성춘처럼 봉수와 이어지기 위해 치마를 입고 귀걸이를 하며 자신의 여성성을 찾으려 하지만 이 역시 여장을 한 부치처럼 보일 뿐이다. 결국 강자는 봉수의 집에서, 성춘은 분임의 집에서 함께 산다. 마지막에 영화는 두 집의 창문을 번갈아 보여주며 끝난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규범적 정상성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의 창문을 통해 여전히 서로를 모사하고 구성하며 초월해 나가는 방식으로 젠더(적 관계)가 구성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동일하게 남성성을 수행하는 봉수와 강자, 여성성을 수행하는 성춘과 분임은 어느 커플보다도 더 동성애적이다.
이 연재에서 존 포드의 1930년대 작품 중에는 1939년의 신화적인 두 영화 < 역마차 >(글)와 < 젊은 날의 링컨 >(글)을 제외하면, < 굽이도는 증기선 >(글)(1935) 밖에 다루지 않았다. 이것이 존 포드의 세계가 1930년대 말에야 원숙해졌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인상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위의 세 편만 만들었다 해도 존 포드는 영화사의 만신전에 등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대의 포드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빛나는 순간을, 압도적인 걸작들에 가려진 영화들 곳곳에 새겨놓았다. 그중에서도 < 순례여행 >(1933)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들이 전사한 어머니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 순례여행 >은 무성영화 < 네 아들 >(글)(1928)을 곧바로 연상시킨다. 캐릭터의 면에서라면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 독일 시골 마을이 무대인 <네 아들>의 어머니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이고 순박한 전통적인 어머니이다. 반면 미국 시골 마을이 무대인 <순례여행>의 어머니는 거의 정반대로 권위적이고 배타적이며 이기적이다.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외아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더 많은 땅을 가지길 원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들에선 찾아보기 힘든 이 비정한 가모장은 아들의 아이를 가진 연인과 떼놓기 위해 아들의 입대서류를 제출한다. 아들이 프랑스에서 전사한 뒤에도 아들의 아이를 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10년이 지난 뒤, 프랑스 전장에서 아들을 잃은 미국 어머니들의 프랑스 순례여행에 마지못해 참여하면서 그녀는 비로소 바뀐다. < 순례여행 >은 곡예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이 드라마엔 두 가지 난제가 있다. 어머니 한나 제솝(헨리에타 크로스맨)은 포드의 주인공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에 속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에서 이만큼 부정적인 중심 캐릭터는 < 아파치 요새 >(글)의 써스데이 중령(헨리 폰다) 정도지만, 그의 곁엔 요크 대위(존 웨인)라는 포드적 영웅이 있었다. 한나는 <순례여행>의 유일한 중심인물이다. 용납하기 힘들 정도로 이 부정적인 주인공의 긍정적 변화를 서사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 또 다른 난제는 희극의 도입이다. < 순례여행 >은 기본적으로 스산한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희극의 표정이 있고 유머러스한 사건이 있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아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죽음을 맞게 한 어머니의 이야기에 어떻게 조금이나마 희극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아들을 죽게 만든 어머니가 참회 이전에도 유쾌하게 웃는 장면을 관객이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심지어 함께 웃도록 만드는 게 가능할까. 포드의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다. 두 난제를 단 몇 쇼트의 배치와 간단한 대사만으로 해결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드라마적 곡예라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만큼 경묘한 솜씨다. 미학적 전위성을 앞세운 나머지 이야기꾼으로서의 포드의 장인적 능력을 경시해선 안 될 것이다. 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작가이고, 그의 작가로서의 위대성은 스튜디오 시스템이 요구하는 서사경제를 경유해 발현되었다. < 순례여행 >은 포드가 이미 1930년대 초반에 어떤 이야기라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걸출한 장인이 되었음을 증언한다. 물론 포드가 훌륭한 이야기꾼이라는 말이 그가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이야기 자체의 자질은 시나리오작가의 능력에 속하며, 1930년대부터 < 웨건 마스터 >(글) 외에 그가 직접 각본을 쓴 영화는 없다. 세 편의 포드 영화에서 각본을 쓴 누널리 존슨은 포드가 “자신의 생각을 종이에 써서 전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대신 포드는 시나리오를 끊임없이 고치면서 특히 “대사에 대한 눈부신 감각”을 발휘했다. 포드와 13편의 영화를 함께 한 시나리오작가 프랭크 뉴전트는 그래서 완성된 영화는 “언제나 포드의 것이었고, 시나리오작가의 것이라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 순례여행 >은 이야기꾼으로서의 포드의 능력이 위대한 단순성이라는 부를만한 특유의 간결한 터치에 있음을 입증한다. 이 터치의 중심에 한나 제솝이라는 여인, 혹은 그 여인을 연기한 헨리에타 크로스맨의 얼굴이 있다. 이 영화 외엔 영화사가 기억할만한 작품을 남기지 않는 이 배우의 시선과 표정의 쇼트에 포드는 분노와 집착, 불안과 연민, 망설임과 혼란의 긴 이야기를 새겨 넣는다. 태그 갤러거의 표현을 빌리면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은 이 여인의 눈 속이다. 포드는 영화적 풍경의 발명가이지만 배우 연출의 대가이기도 했다. “영화의 비밀은 배우의 눈을 찍는 것”이라는 인상적인 말도 포드의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순례여행>은 여인의 표정과 시선의 영화다. #1 #2 #3 #4 < 순례여행 >은 한나의 표정과 시선에서 시작된다. 들판에서 일하는 아들(#1)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2)은 만족스러운 것 같다. 아들과 농장이 그녀의 소유다.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이 땅에서 한나는 제왕이다. 아들과 땅의 소유자인 그녀는 동시에 시선의 권력자이다. 그녀는 적어도 여기선 다 볼 수 있다. 농장이 원경으로 보일 때도 지평선은 보이지 않거나 화면의 상단에 드러난다. 게다가 이 농장은 < 선라이즈 >의 마을을 연상시키듯 안개와 옅은 어둠에 갇혀 있다. 이곳은 한나의 시선이 편재하는 그녀의 폐쇄된 왕국이다. 그러나 그 소유와 시선의 권력은 처음부터 금이 가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들은 울타리를 넘어간다. 그는 연인 마리에게 달려가는 중이다(#3). 한나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소유물인 아들을 앗아갈 대상인 여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권력의 위기를, 전 장면과는 다른 불안한 표정의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4). #5 #6 #7 #8 아들 제임스가 연인을 만나는 장면은 아름답다. 제임스는 무언가를 보면서 환한 얼굴로 연못에 돌을 던진다(#5, #6). 연못의 물이 파문으로 너울거리다 파문이 가라앉으면서 마리의 얼굴 윤곽이 수면에 드러나고 카메라는 틸트업으로 마리의 얼굴이 비춘다(#7). 연못을 사이에 둔 수줍은 두 연인의 애틋한 유희. 그런데 더없이 아름답게 촬영된 이 유희에는 어딘지 모를 불안과 비애가 있다. 연못이라는 작은 격리, 장난이자 신호이지만 수면에 비친 연인의 이미지의 훼손을 경유해서 비로소 마리가 등장할 때 마리의 얼굴은 놀랍게도 기쁨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다(#8). 마치 앞으로의 서사에서 펼쳐질 격리와 훼손을 이미 예감하고 있다는 듯. #9 #10 마리의 클로즈업은 이 영화의 가장 훌륭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이 장면과 비교하기 위해 어머니와 아들이 마주 보고 대화할 때의 숏-리버스 숏을 떠올려 보자. 어머니의 클로즈업과 아들의 클로즈업은 얼굴의 크기가 다르다(#9, #10). 한나의 강조된 클로즈업에는 프레임을 지배하는 모종의 표정이 있다. 하지만 제임스의 평범한 클로즈업에는 단순한 리액션의 표정만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사람의 권력관계를 뜻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서사 내에서의 둘의 다른 지위를 반영한다. 이 영화는 아들 제임스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11 #12 마리의 클로즈업(#8)이 인상적인 것은 그 크기와 표정의 강도에서 연인인 제임스의 쇼트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마리가 제임스를 바라볼 때, 그녀는 연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랑을 가로막고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갈 어머니를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리의 클로즈업은 제임스의 클로즈업의 리버스숏이 아니라, 이 프레임에 존재하지 않는 한나의 클로즈업(#4)의 리버스숏이다. 한나의 시선의 편재성이, 그 권력의 강력함과 비정함이, 그리고 자신들의 비극적 운명까지 이 기묘한 클로즈업에 담겨 있다. 포드는 불과 4분 만에 이 모든 상황과 예감을 단 몇 개의 숏만으로 압축한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인의 현실적 대면은 조금 뒤에 이루어진다. 한나는 마리를 찾아와 아들을 떠나라고 강요한다. 이 장면의 숏-리버스숏에서의 두 인물은 정확히 같은 크기와 강도로 담겨있다(#11, #12). < 순례여행 >은 두 여인의 이야기인 것이다. #13 #14 제임스가 프랑스 전장으로 떠나는 기차역에서의 가련한 두 남녀의 마지막 조우 장면(#13)도,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한나는 보고 있었다. 이 장면과 대조를 이루는 기차역 장면이 얼마 뒤에 등장한다. 제임스가 전장에서 생매장당해 죽은 지 10년이 지난 뒤, 한나는 프랑스로 가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멀찍이 있던 마리와 아들 지미는 기차로 다가와 창가에 앉은 한나에게 자신과 아들을 위해 제임스의 묘지에 놓아달라며 꽃송이를 내민다(#14). 두 장면을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모두 최종 목적지가 프랑스이며 주요 인물이 모두 등장하지만, 전자의 제임스는 후자의 꽃으로 대체되었고, 마리의 배 속에 있던 태아는 이제 열 살의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전자의 장면에서 보이지 않았으나 시선으로 존재했던 한나는, 제임스 대신 기차를 타고 있다. 이 영화에서 단 한 장면을 꼽으라면 바로 이 숏(#14)이다. 이 장면의 요점은 꽃을 받아드는 한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전 장면에서 한나는 땅을 20에이커나 더 샀다. 그녀의 왕국은 더욱 커졌고, 그 강대한 왕국에 마리와 아이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미혼모의 자식이라고 놀림받는 아이는 한나를 할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고 제임스의 개에게 접근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한나는 마리의 꽃을 받았고, 포드는 그녀의 얼굴을 찍지 않았다. 이 카메라의 시선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나가 자신의 얼굴을 숨긴 것인가. 아니면 카메라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찍은 것인가. 달리 말하면, 인물이 보지 않는 것인가, 카메라가 보지 않는 것인가. 물리적으로는 후자가 맞지만, 심리적으로는 전자가 맞다. 우리는 사실상 양자를 식별할 수 없다. 포드는 인물을 볼 수 없는 지점에 카메라를 두는 것으로 그 인물을 진정으로 드러낸다. 극 중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객관적 시점의 카메라가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보는 것이 불가능한 자리를 선택함으로써 인물의 태도와 심리를 표현하는 것, 아니 그 인물의 고통을 존중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표현해도 다 드러낼 수 없는 인물의 감정을 카메라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포드가 감정의 미스터리를 찍는 방식이다. 이런 장면 앞에서 카메라의 시점에 관한 복잡한 기호학적 논의는 사실상 거의 무용하다. 나는 이런 카메라를 경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과 40여 분이 지났을 뿐이지만 여기서 영화가 끝났고 이후는 여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한나는 자신의 죄의식과 고통을 감춘 채 순례여행을 떠날 것이고, 결국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이 미스터리의 감정 숏에는 영화 전체에 값하는 긴 이야기가 담겨있고 그 이후에는 웃음이든, 참회의 눈물이든 허용되지 못할 것이 없다. 그 모든 예감이 이 신비로운 숏 안에 모두 담겨 있다. 이것이 앞서 말한 두 가지 난제의 해결하는 포드의 방식이다. #15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이후의 프랑스 장면들은 전반부와 대조적이다. 한나의 농장을 감싸던 폐쇄적 안개는 사라지고, 개방된 세상 앞에서 이제 한나는 제왕이 아니라 낯선 순례자가 된다. 자신의 왕국을 노려보던 한나의 시선은 이제 감시의 시선이 아니라 방황과 발견의 시선으로 바뀐다.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아들과 같은 고뇌에 빠진 청년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이기적 어머니를 만나고, 자신의 왕국에는 없던 축제를 발견한다. 이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와, 감췄던 자신의 표정을 마리와 아이에게 보여줄 일만 남았다. 아들의 아이와 사실상 처음으로 마주 볼 때(#15), 순례는 끝난 것이다.(계속)
정씨( 김진규 )와 노영달( 백일섭 )과 백화( 문숙 ). 하얀 눈 위에서 만난 세 사람은 서로 아웅다웅 하면서 정처없는 길을 떠난다. < 삼포 가는 길 >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내겐 인물들에 관한 영화였다. 소설 속 글로 표현된 내용들이 인물들의 구어체 대사로 표현되면서 생동감있는 드라마가 눈앞에 펼쳐지는 경험이었다. 때문에 더욱 리얼하게 느껴졌고, 시대의 아픔과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상처가 가슴 깊게 각인된 영화였다. 특히 백화라는 인물은 보기 드물게 살아있는 캐릭터였다. 그녀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어린 나이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술집 작부의 포스를 느끼게 했다. 거리에서 만난 낯선 남자들에게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한마디도 지지 않는 백화는 갓 스무살이지만 거친 풍파 속에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화류계 여자의 강한 풍모를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혹 남자의 완력이 가해질라치면 익살스런 애교로 남자의 너털 웃음을 끌어내는 능숙함은 팜므파탈을 흉내내는 여느 캐릭터가 보여줄 수 없는 담백함을 표현한다. 백화를 연기한 문숙 의 연기 또한 두말할 필요없이 발군이라 할만하다. 나중에야 그녀가 이만희 감독과 연인 사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럼 그렇지!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감독과 연기자가 서로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작품에 얼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가. 그녀가 내뱉는 ''''''''''''''''그게 어디 내 잘못인가요?''''''''''''''''라는 말에는 스스로의 삶을 비관하지 않으려는 당당함이 묻어나며, 개인의 힘으로 어쩔 도리없는 사회적 상황이 드러난다.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어디 그들만의 잘못이겠는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형무소에서 10년을 살다 나온 정씨의 표정 역시 선함과 동시에 묵직함과 단호함을 품은 얼굴이다. 상대의 말투와 표정 만으로 살아온 과정을 짚어낼 수 있는 삶의 무게가 그의 얼굴에서 느껴진다. 백화의 아버지 행세를 하는 장면에서는 백화 스스로도 그를 아버지라 여길 정도이며, 실제 아버지라고 느낄만한 풍모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거칠게 살아온 뜨내기 노동자이지만 남의 장례식장에서 태연하게 울어제낄 만큼 넉살좋은 뻔뻔함과 과거에 잘나갔다고 허풍을 떠는 영달 역시 마음 한구석에 깊은 상처와 간여림을 갖고 있다. 백화와의 하룻밤 후 살림을 차리자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며 백화를 떠나보내는 그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 잘 아는 나약한 인물이기도 하다. 강인한 노동자이지만 남자로서는 용기없는 모습은 그를 다중적 캐릭터로 만든다. 이렇게 뜨내기 세 인물이 커다란 사건없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영화 속 인물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아픔과 상처와 성격이 드러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최근 영화에선 이렇게 존재 자체에서 절실함이 묻어있는 캐릭터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점은 매우 아쉽다. 물론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원작의 힘에 빚진 부분이 있겠지만, < 삼포 가는 길 >은 문학적 인물을 영화 속에 살아있는 캐릭터로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인물들의 표정과 연기 이외에도 < 삼포 가는 길 >에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다. 광활한 눈밭을 걸어가는 세 인물을 익스트림 롱 샷으로 잡아낸 장면에서는 갈 곳 없는 뜨내기 군상들의 고립감이 드러난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그들이 머물 곳은 그 넓은 벌판에 아무 곳도 없다. 백화와 헤어졌다가 흉가에서 다시 만난 세 인물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옷을 말리는 장면에서는 훈훈함과 온화함. 갈등과 화해 속에 드러나는 상처와 고독이 보여진다. 백화와 영달이 싸울 때 먼발치에서 보이는 쥐불놀이 불빛의 은은함은 절대 꺼질 것 같지 않은 민초들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한적한 산골이지만 마을 곳곳은 이미 공사중인 장소가 많다. 1970년대 불어닥치기 시작한 개발의 광풍이 영화를 통해 은연중에 드러난다. 또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영달이 바위산을 뚫는 공사현장에서 착암기를 사용하는 장면이다. 1970년대 경제개발의 가운데는 이런 뜨내기들의 강인한 노동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바위산 위에서 착암기를 사용하는 노동자의 실루엣은 잠깐이지만 노동의 숭고함과 노동자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영달이 과거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이야기의 내용과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플레쉬 백의 활용도 인상적이다. 상대가 듣는 내용과 반대되는 영달의 회상이 겹쳐지면서 영달의 상황을 더욱 절박하게 만든다. 또한 사운드와 음악의 사용도 세련되고 현란한데, 음악으로 감정을 이어가다가도 문득 사운드를 무음으로 처리하면서 감정의 기복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울림을 크게 만든다. 사운드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인물의 상황과 요동치는 감정의 기복을 손쉽게 드러내는 방법도 당시로는 흔치 않은 기법이었다. 이만희 감독은 이 영화의 후반작업 중에 간경변으로 병원으로 실려갔으며, 병원에서도 편집실을 오가면서 영화의 완성을 위해 애썼다고 한다. 영화는 그가 명을 달리하고 한달 후에 극장에서 개봉했다. 때문에 다소 미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장면이 있다. 백화는 살림을 차리길 바라고, 영달은 빈털터리인 자신이 떠날 수 밖에 없음을 아는 기차역 장면은 정지화면처럼 촬영됐다. 기다리는 백화의 얼굴. 기차표를 전해주는 정씨와 영달의 손. 멈춘 정씨의 얼굴. 울먹이는 노영달. 하지만 영화 속 장면은 멈추지 않고 어색한 테이크로 잡혀있다. 결정적 장면들이 정지화면으로 잡혔다면 영화의 울림이 더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최근 복원된 엔딩 버전에서 정씨가 탄 버스가 남해대교를 건넌다. 백화가 기차역에서 다방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 끝을 맺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만희 감독의 디렉터스 컷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영화의 묘미는 세 명의 주연배우들이 펼치는 연기의 향연에 있다. 삶의 흔적을 느끼게 만드는 구어체의 대사와 인물들의 표정은 그 자체로 드라마를 생성시킨다. 눈밭을 걷거나 누워있는 세 인물을 잡은 롱 샷들은 설원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세 인물을 단단히 묶어주는 기능을 한다. 넓은 벌판에서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정작 갈 곳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허허롭게 담아낸다. 눈길 여행을 통해 뭉쳤던 세 인물은 결국 뿔뿔히 흩어지고 만다. 그렇지만 그들의 여행은 강한 삶의 의지를 간직한,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