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의 도착
- 감독
- 루이 뤼미에르, 어거스트 뤼미에르
- 제작년도
- 1895
20세기 말 뤼미에르 형제의 < 기차의 도착 >(1895)은 활동사진이라는 신(新) 예술의 도착을 알렸다. 시오타 역 플랫폼으로 진입하는 기차의 현실감에 압도당한 관객들이 겁에 질려 소란이 일었다는 거짓말 같은 일화도 전해진다.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하나의 ‘기차 영화’가 이목을 끌었다. 2000년 1월 1일 0시에 개봉한 < 박하사탕 >(1999)에 기차가 도착한 순간 한국영화는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시대로 진입한다. 이창동 의 기차는 거꾸로 간다. <박하사탕>에서 기차 장면들은 서사의 가장 중요한 마디들에 배치되었다. 회색 양복을 입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김영호(설경구)는 원근법적 구도로 찍힌 선로에 위태롭게 서 있다. 곧이어 영호의 몸은 이미지의 소실점으로 이끌리듯 뒤로 기울어진다. 뒤에서 기차가 굉음을 내면서 다가오자 영호는 휙 돌아서 기차의 정면으로 향하고 금속 기계로 빨려 들어간 관객의 눈은 카메라의 시점에 동기화된다. 팔을 위로 뻗은 채 영호는 비명을 지른다. “나, 다시 돌아갈래!” 영호의 회전과 동시에 시간도 회전하고, 절규하는 영호의 얼굴 위에서 이미지는 얼어붙는다. <박하사탕>의 내러티브 궤적 내에서 이 얼어붙은 이미지는 형식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박하사탕>은 혁신적인 스토리텔링에 의해 전달되는 파괴적인 드라마였다. 이창동의 거꾸로 가는 기차는 스토리텔링의 본질에 관한 은유이다. 캄캄한 터널을 지나 점점 확대되는 햇살 속으로 기차가 빠져나가면서 영호의 여행도 시작된다. <박하사탕>의 시간여행은 통상적인 플래시백과 차이가 있다. 영화에서 플래시백이 누군가의 시점(point of view)을 경유한 회상으로 정의되는 데 반해 <박하사탕>에서는 시점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서사 안에는 시간의 고정점이 부재하며 따라서 후진하는 기차를 따라 기술되는 과거 스토리는 영호의 회상이 아니다. 기차는 시간을 거슬러 여행한다기보다 시간을 이동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창동은 앞으로 진행하는 시간과 매몰된 시간들을 소환하는 시각적인 은유로 기차를 활용해 역사의 닫힌 경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는 인간의 비극을 다룬다. 한편으로 기차는 당시까지 이창동의 영화 세계를 표상하는 시간-장치였다. 그의 데뷔작 < 초록물고기 >(1997)는 덜컹거리는 기차의 외경 쇼트로 열린다. 군에서 막 전역한 막동(한석규)은 집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미애(심혜진)와 우연히 교차한다. 기차 문에 걸터 선 막동에게 미애의 자줏빛 실크 스카프의 날아드는 장면은 고전적인 러브스토리에서 로맨스가 피어나는 순간을 재연하는 것 같다. <박하사탕>의 기차 장면들은 1979년부터 1999년까지 영호의 삶을 망가뜨린 7개의 삽화들 사이에 배치되어 시간 이동을 위한 프레이밍 장치로 사용된다. 각각의 삽화는 기차의 마지막 칸에 배치된 카메라 앵글로, 철도 선로 위의 움직임을 찍은 짧은 막간 쇼트들과 연결된다. 이 막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디제시스를 뒤로 당기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영화의 스토리는 앞으로 전진한다’는 관객들의 경험을 따라간다. 스토리 시간은 뒤로 가지만 스토리는 앞으로 가는 플롯의 효과가 창조되는 것이다. 기차는 영호의 삶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이후에 등장하여 그의 삶을 치욕과 악행, 파멸로 몰아간 궁극적인 원인을 찾도록 한다. 행동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인과관계는 사실상의 테마가 된다. 중요한 삽화들을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관객은 행동과 동기를 지속적으로 추적하면서 캐릭터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고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기 위해 애쓴다. 각각은 이미 발생한 최종 결과, 즉 영호의 자살을 설명할 이유를 찾도록 주문한다. 통념상 전진하는 스토리 안에서 목표 달성은 가장 중요하며 이를 달성하는 수단은 부차적이지만, <박하사탕>과 같은 형식은 클라이맥스에서 시작하여 인과론적 미스터리를 탐색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내러티브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은 이미 공개된 현재 상황을 설명할 과거의 기원을 탐색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순수와 완전성에 대한 상실감과 애통이 스토리의 해결책을 제공하므로 영호의 개인사는 한국 현대사와 연결되어야 한다. 가장 가혹한 장면은 기차 뒤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아름다운 전원의 풍광을 배경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일부 장면에서 시간은 우울한 현악 4중주 음악과 함께 잔혹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권위주의 정부와 학살, 고문, 물신주의가 어떻게 순수를 독살했는지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후진하는 내러티브는 순수하고 도덕적인 청년이 어떻게 회복할 수 없이 망가졌는가를 강조한다. <박하사탕>의 스토리는 혁신적 구조와 다층적인 플롯, 여러 가지 의제를 제공하는 효율성에 힘입어 추진력을 얻는다. 관객은 장면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상황이 영호를 어떻게 타락시킬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창동은 한국 현대사의 요점들을 훑어가면서 공동체의 관습이 도덕성과 대립하는 방식, 개인의 행복과 성취를 추구하는 방식을 서사화한다. 보이지 않거나 말하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춘 이창동의 영화 세계에서 영호는 한국 사회가 잊고 싶은 모든 것, 존재하지만 보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대표한다. 무구했던 삶에 가해진 악의적 영향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왔으나, 실패에 실망이 더해지고 절망에 낙담이 더해지면서 비극과 재앙은 잔해더미처럼 쌓였다. 시작점에서 끝나는 이 순환 구조는 대비를 분명하게 한다. 생애 초기 순진한 영호의 이미지와 대조되는 임박한 죽음은 스토리의 시작부터 이 남자를 지켜보던 관객들을 놀라게 하면서 평범한 세계의 경험을 초월적인 높이로 끌어올린다. 물론 이와 같은 이야기 서술법이 완전히 새로운 형식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하사탕>의 서사구조는 영화의 테마를 존재론적인 단계로 밀어 올리고, 그것들을 움직이는 이미지의 시간성과 연결함으로써 창의적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에필로그는 프롤로그와 연결되어야만 했다. 마지막 장면은 청년 시절 영호의 사랑이 피어나는 고요하고 아름다움의 순간이다. 영호는 20년 후 목숨을 앗아갈 철로 아래에 눕는다.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내는 영호의 머리 위로 기차 소리가 웅웅댄다. 에필로그에서도 기차는 변함없이 서사의 전진 움직임을 비유한다. 프롤로그의 얼어붙은 이미지와 반향하면서 재등장한 영호의 뺨 위에서는 관객들이 이미 목격한 그의 불행한 미래를 암시하듯이 두 줄기 눈물이 흐른다. 흡사 그는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여 우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과거 -현재 - 미래의 시간성은 영화적인 시간 조작술의 마법에 홀린 것 같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올해는 나에게 충만한 한 해였다. 무엇보다도 오랜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단지 영화를 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을 만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왕빙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가까스로 완성할 수 있었다. 지난해와 달리 올해 나의 영화를 고르면서 순식간에 16편의 제목을 썼지만 규칙에 따라 아쉽게도 6편의 영화를 명단에서 제외시켜야 했다. 만일 내일 다시 고른다면 이 중 몇 편의 영화가 빠지고 그중 몇 편의 영화가 들어갈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렇지만 나는 이 명단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배려도 하지 않았으면 어떤 균형도 잡을 생각이 없었다. 그냥 지금 떠오르는 대로 그저 내 두뇌 속의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명단을 차례로 적어나갔다. 차라리 이 명단은 베스트 10이라고 부르는 대신 ‘나의 몹시 사적인 동시상영관’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들의 목록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영화는 < 무무면 >이다. 이 영화가 올해의 나의 (단 한 편의) 영화는 아니다. 그러므로 오해하지 말아 주었으면 고맙겠다. 하지만 올해 이 영화를 가장 오랫동안 끈질기게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올해 차이밍량의 < 행자 行者(Walker) > 연작을 일거에 볼 기회가 있었으며, 또한 그가 이 영화를 확장시켜 무대에서 진행한 <삼장법사>를 눈앞에서 볼 기회가 있었으며, 게다가 8개월의 시간 차이를 두고 두 번에 걸쳐서 만나 그의 작업에 대해서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행자> 연작은 (차이밍량의 영화 작업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 떠돌이 개 >를 본 다음 아주 우연히 유튜브에서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을 여기서 보게 되었다고 말하자 무슨 말에도 친절한 차이밍량이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가장 나쁜 방법을 선택했다고 거의 나무라듯이 내게 말했다. 그런 다음 약간 덧붙였다.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보아야만 해요. 이 영화를 일상생활 바깥에서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반문했다. “당신은 영화를 이제 버린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차이밍량은 파안대소를 하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그건 잘못된 소문입니다. 아마 내 이야기를 들은 기자가 부주의했음이 틀림없어요. 나는 단지 상업영화들이 배급하는 방식을 더 이상 선택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건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 행자 >는 단순하다. 당나라 승려 삼장법사가 천축에 가서 불경을 가져오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데서 모티브를 가져와 이강생이 낡고 남루한 승복을 입고 그저 천천히 홍콩의 침사추이를, 프랑스의 마르세유 거리를, 커다란 한지 위를, 얕게 깔려있는 물 위를, 동경의 밤거리를 아주 느리게, 천천히, 때로는 멈춘 듯이 걸어간다. 여기에는 다른 어떤 이야기도 없다. 물론 이 작업에 대해서 매우 복잡한 이론을 열거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만일 그러다가 내가 여기서 가져본 어떤 마술적인 기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감돌기 때문이다. <행자> 연작은 매우 가냘픈 작업이다. 어딘가를 잘못 건드리면 순식간에 부서져 버릴 것만 같다. 대신 내가 느껴본 것을 말하고 싶다. 맨 처음 보았을 때는 두 가지를 의식하게 된다. 거의 슬로우 모션처럼 걸어가면서 다른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걸어가는 보행 사이에서 서로 다른 속도가 마치 두 개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이강생은 거의 멈춘 것처럼 걸어가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강생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풍경에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카메라가 거의 멈춰있기 때문에 이제 풍경 위로 흘러가는 날씨의 조건을 보기 시작한다. 거기 떨어지는 햇빛, 혹은 지나가는 구름. 이강생은 구름이 지나가는 것보다 더 느리게 걸어가기 때문에 그의 걸음 위로 구름이 지나가면서 때로 햇빛을 가렸다가 다시 화창한 날씨를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그때 우리가 보는 것은 더도 덜도 아닌 시간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시간을 이야기했고, 또 많은 예술가들이 시간 속에서 작업을 해왔다. 차이밍량은 시간을 다룬다기보다는 그것을 음미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는 오래전부터 시간 안에서, 곁에서, 사이에서, 뒤에서 영화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를 고심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영화 안에 시간을 놓아두고 싶어 한다. < 떠돌이 개 >는 그의 영화에서 하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의 자리에 가져다 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영화는 마치 자신의 제목처럼 영화관이 아닌 다른 장소를 찾아 떠돌아다녔다. 나는 이 영화를 전혀 다른 장소에서 세 번 보았다. 세 번째는 광주 한복판의 전남도청 강당에서 한밤중에 보았다. 올해 광주 예술극장 개관행사 중의 하나였다. 이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당신에게 다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강당은 이미 어두웠고 여기저기에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차이밍량은 마치 보물찾기 하듯이 일일이 나를 데리고 다니며 소개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장소가 지닌 1980년 5월 그날의 의미에 대해서 차이밍량에게 설명했을 때 자신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 다음 덧붙였다. “그분들(의 영혼) 중의 누군가 오늘 밤에 이 영화를 보러 와 주셨으면 좋겠군요” 그 말을 듣고 문득 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차이밍량은 가볍게 안아 주었다. <떠돌이 개>는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 행자 >를 시작하기 위한 이 위대한 거절. 마치 이 영화는 내게 허우 샤오시엔에게서 <남국재견> 같은 결단으로 다가왔다. 예술가들에게서 두 번째 데뷔작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차이밍량은 왜 그럴 필요가 생겨난 것일까. 두 번째를 말할 차례이다. 내게는 이게 더 중요하다. 홍콩에서 진행된 < 행자 >는 이 작업이 영화 안에서 진행된 퍼포먼스인지 반대로 퍼포먼스를 영화가 기록한 것인지 쉽게 분간하기 힘들었다. 물론 차이밍량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찍었다. 이런 종류의 작업을 미술이 했을 때 나는 언제나 실망했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차이밍량은 어디 서 있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고, 얼마나 멀리 있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으며, 언제 시작해서 언제 멈춰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 무무면 >에서는 새로운 단계가 도입되었다. 갑자기 카메라는 이강생을 내버려두고 전철에 올라탄 다음 창문 바깥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심야에 달리는 이 전철 바깥으로 풍경이 하염없이 흘러간다. 나는 이 역의 출발역과 도착역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상철인 이 열차는 하염없이 흘러가는 풍경을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는 창문과 정확하게 수평을 이루기 때문에 전철 안의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 잠겨있는 도시는 어떤 지표도 노출하지 않고 그저 어둠과 불빛의 풍경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쳐갈 뿐이다. 이걸 바라보다가 문득 영화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찍은 영화를 이미 이전에 본 적이 있다.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대부분 영화사 책은 <기차의 도착>과 <공장에서의 퇴근>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뤼미에르 형제의 다른 영화를 보지 않는다. 뤼미에르 형제의 전작을 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만든 영화를 잠시 동안 파리에 머물 때 시네마테크에서 하루 종일 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 영화들이 보여준 것은 모든 대상들은 이미지로 지각되고 모든 이미지는 대상의 감흥을 불러일으킨다는 배움이었다. 영화의 문법이 잃어버린 것은 그 배움이다. 21세기가 되었을 때 일부의 예술가들이 그것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 애를 썼다. 차이밍량은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중이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나는 그것을 뤼미에르 효과(Lumiere-effect)라고 부르는 중이다. 영화에서 유일한 진실은 영화 스스로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때 그 활동은 영화의 시간이며 생명이다. 나는 점점 더 두 개념 중에서 후자에 이끌린다. 무엇이 영화에 생명을 부여하는가. 어쩌면 이 열 편의 영화들은 그 질문에 대한 각자의 방식의 대답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 열 편의 영화는 좌표의 의미이며 표류하고 있는 내게 등대선들이다. 그들이 비춰주는 빛. 그 가냘픈 빛. 하지만 그 빛이 없으면 어떻게 내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국민학교 시절, 당시 ‘토요명화’에서 방영된 코미디 영화의 한 컷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당시는 ‘유머 일번지’와 같은 극강의 코미디 프로가 거의 모든 어린아이들의 사유체계를 뒤흔들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토요명화(인지 아니면 주말의 명화?)에서 코미디 영화계로서는 분명 ‘명화’일지 모르는 한 영화가 방영되었다.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주커 형제의 < Top Secret! >, 방영제목으로는 <일급비밀>이었다. 서사를 추적하기 힘든 요상한 서사, 씬의 연속성을 무너뜨리고 순간의 이미지와 재치에 영화 전체의 견적을 부가한 상상력, 미국식 유머의 몰지각 때문에 몰상식으로 몸부림쳐야 했던 소년에게 이 영화는 그야말로 ‘파괴적’인 영화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직도 선명하게 박혀있는 한 장면이 있다. 바로 주인공이 탄 ‘기차의 출발’ 장면이다. 카메라는 주인공이 타고 있는 객석에서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풍경으로 보이는 간이 기차역이 창문 좌측으로 흘러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기차가 출발하고 있을 것으로 상상했던 믿음은 기차역이 사라진 뒤 공간에 남겨진/멈춰있는 배경에 의해 이내 무너진다. 이윽고 카메라는 차창 밖으로 미끄러지듯 나가더니 멀리 떠나가는(!) 역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것은 기차의 출발 장면이 아니라 ‘역의 출발’ 장면인 셈이다. 기가 막힌, 누구나 경험했었을 시각적 망각, 또는 마술적 경험. 영화의 관람행위가 일종의 믿음과 상상의 계약이라고 했던가? 이날 이후부터 개인적으로 기차역에 가거나, 열차를 탈 때마다 그 장면의 시각적 경험이 떠오르곤 했다. 영화라는 프레임과 달리는 기차의 창틀, 그리고 기차의 좌석과 영화관의 객석 등의 조합으로 구성되는 영화관과 기차의 모습은 일종의 다중 프레임의 성격을 가진 시각적 극장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기차가 도착하거나 떠나는 장면들이 있는 영화들을 왠지 모르게 마냥 좋아한다. < 베를린-대도시 교향곡 Berlin-Die Sinfonie der Grosstadt >(1929), < 배드 데이 블랙락 Bad Day at Black Rock >(1955), < 옛날 옛적 서부에서 Once Upon a Time in the West >(1968), < 리스본 특급 Un Flic >(1972)나, < 미션 임파서블 >, < 바보들의 행진 >, < 일대종사 >, < 백투더 퓨처 >, < 설국열차 > 등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기차의 도착과 출발 장면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주요 시퀀스를 채워나가지 않았던가? 마치 최초의 영화라고 알려진 <열차의 도착>처럼 말이다. 굳이 19세기 말의 기차여행과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상관관계를 추적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나에게 영화라는 시각적 경험은 기차여행에서 겪는 창틀 너머의 시각적 경험과 다르지 않았다. 영화가 그러하듯 시각의 향연은 기차의 창틀 하나하나에서 비롯되는 움직이는 씨네마(Cinema) 이었던 셈이다. 열차의 도착과 출발, 그리고 다시 정차로 이어지는 스톱모션/퍼팻 애니메이션인 < 마담 투틀리-부틀리 Madame Tutli-Putli >(2007)도 단편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각적 향연의 잔칫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기차역의 플랫폼에서 수많은 짐들과 함께 열차를 기다리는 한 여성으로부터 시작된다. 행선지와 목적지가 명확하지도 않고, 객실에 탄 사람들의 정체도 불분명한 이 기차는 그 자체가 형이상학적이다. 때문에 이 작품은 주인공 여성이 기차에 탑승하여 여행을 떠나고, 겪는, 체험의 연속에 한정되어 있어서 이곳에서 서사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신 열차가 도착하고, 객실의 사람들을 만나고, 잠이 들고, 끔찍한 범죄의 현장이 재현되고, 추적과 도망의 이미지들이 겹치는 지점에서 구분되고 확인되는 이미지의 전시와 향연이 있다. 여기에 이 작품이 지니는 시각적 체험이 있다. 먼저 이 작품이 가지는 매체적 특성으로 기인하는 시각적 체험이다. 이 작품은 흔히 말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지만, - 더욱 은밀하게 말하자면 - 제작 방식으로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며, 사용되는 오브제는 라텍스를 이용해 만든 인형을 이용했기 때문에 퍼팻 애니메이션 이라 할 수 있다. 상당히 정교한 세트와 소품 등은 셀이나, 2D 애니메이션, CG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느낌을 가진다. 1초당 24프레임 이상의 움직임으로 촬영되어, 상당히 부드러운 움직임을 가진 데다가,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된 움직임들이 최대한 절제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스톱모션/퍼펫 애니메이션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실제의 머리카락과 같은 오브제를 사용한 것도 인상적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실제로 현실 세계에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이미지를 사진 촬영하여 만들어낸 이미지라는 점과, 이는 평면상으로만 존재하는 2D애니메이션, 비물질적 공간에서만 존재하는 CG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의미로 인해 독특한 시각적 특색을 가진다. 물론 조금 공을 들여 찍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라면 이러한 시각적 차별성은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두 번째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독특한 촬영방식이다. 많이 알려져 있듯이 이 작품에서는 인물들의 눈은 모두 실제 인간의 눈을 촬영하여 합성하였다. 현재까지 존재하는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 중 가장 오래된 기법인 스톱모션기법에 배경이나 소품의 단순한 합성이 아닌, 인물의 - 그것도 가장 중요한 - 얼굴의 눈을 합성했다는 것은 상당히 주목할 부분이다. 사실 영화(Live Action Film)는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게 해 주었던 유일한 예술이라 하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카메라라는 기술적인 요건과 더불어 인간의 얼굴이 가진 미묘한 이미지 - 이를 두고 들뢰즈는 정동(精動, affection)이미지라 일컫는다 - 의 조건 속에서 가능하였다. 전통적인 스톱모션의 경우에는 영화와 동일하게 카메라를 이용함에도 불구하고, 쇼트의 크기는 주로 풀쇼트 미디엄 쇼트로 구성되었고, 클로즈업은 사용되는 분위기가 적었다. 이는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주요한 요인으로는 바로 실사영화와는 다른 애니메이션의 얼굴 때문이었다. 애니메이션의 얼굴은 실제 인간 얼굴의 미묘한 감정의 동요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운 실제의 추상화(抽象化)의 단계를 지닌 것이었다. 아니메의 캐릭터가 큰 눈을 가진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일 수도 있다. 눈은 인간의 심리적 양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마음의 창’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 마담 투틀리-부틀리 >에서는 실제 인물의 눈을 촬영한 소스를 라텍스로 만들어진 인형에 과감하게 합성을 하고, 다양한 영화적 앵글을 구사하며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추적해 나간다. 그녀가 기차에서 겪는 즐거움, 불안함, 공포, 절망과 환희는 구체화된 눈에서, 합성된 라텍스 인형과 배경의 전체에서 드러난다. 특히 그녀의 심리적 불안의 팽배를 보여주는 이 작품의 백미는 기차의 객실에서 도망쳐 나와 앞의 객차로 달려가는 장면에 있다. 트랙쇼트와 시점쇼트, 다양한 앵글로 구성된 카메라, 그리고 그 속에 함께 달려가는 캐릭터의 무빙을 통한 파트너쉽은 웬만한 실사영화의 그것을 압도한다. 특히 결국에 - 이는 마치 린 타로의 < 은하철도 999 >나 봉준호 의 < 설국열차 >를 떠오르게 하는 - 그녀가 기차의 앞부분으로 이동하면서 잠시 들린 식당 칸에서 겪게 되는 형이상학적인 경험, 낯선 공간의 구성은 그녀의 낯선 얼굴과 더불어 깊은 사념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공간의 연속적인 나열, 움직이는 기차를 통해 만나게 되는 외부의 풍경과 그것이 펼쳐진 영화적 스크린-객실의 창틀들은 초기영화가 그러하였던 시각적 향연을 펼쳐냈다. 상대적으로 원시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을 가진 스톱모션 촬영방식을 이용한 < 마담 투틀리-부틀리 >는 마치 초기의 영화(Film)가 도달하려 하였던 - 무성(無聲)의 시각적 기호들만을 통해 삶의 이미지와 개념들의 나열 하였던 - 이미지의 언어들을 현실과 꿈을 오가는 기차와 같은, 또는 현실의 공간에 펼쳐진 환상적 이미지들이 공존하였던 오래된 극장과 같은 공간에 풀어놓았다. 이것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꿈결 같거나 환상 같아서 서사로 구체화되거나 언어로 포착/포섭되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하지 말자. 예술은 - 벤야민이 그랬던가 - 아담의 언어가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지 않은가? 온라인 상영관 : https://www.nfb.ca/film/madame_tutli_putli_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