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도 눈물도 없다
- 감독
- 김강윤
- 제작년도
- 1969
- 출연
- 이순재, 문희, 김진규, 사미자, 전양자, 서미경, 김주오, 윤신옥, 전영주, 성소민, 석운아, 박달, 최재호, 석인수, 김지영, 공시훈, 이영호, 조덕성, 지방열, 주일몽, 추봉, 최일
우리는 이미 안다(고 생각한다). 심훈의 <상록수>는 식민지시대 대표 농촌계몽소설이며, 영화 < 상록수 >는 1960년대 계몽적 문예영화다. 대중의 상식에서 문예영화는 문학작품의 충실한 재현이다. 신상옥 의 <상록수>는 사실 이러한 문예영화적 충실성에서 벗어나는데, 오늘날 우리가 <상록수>를 발견의 영화로 재고해야 한다면 신상옥만의 각색과 연출의 특이성에 놓여있을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신상옥의 대표 문예영화는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다. 하지만 1961년 명보극장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이어 선보인 영화가 <상록수>였음을 기억하는 자는 드물다. <상록수>는 < 동심초 >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이어지는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 신상옥 영화의 고유한 아름다움, 즉 풍경을 정서로 이어가는 로케이션 촬영의 형식적인 특징을 잇고 있다. 다른 한편 < 로맨스 빠빠 > 및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이어지는 한국적 교양의 보편적 지평을 넓히는 영화로 과잉과 신파성을 배제한 담백한 연출도 <상록수>로 이어진다. 영화 <상록수>는 식민지 영화인 심훈 의 이루지 못한 영화의 꿈이었다. 소설가,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심훈은 영화 < 장한몽 >(1926)의 주연 배우, 영화소설 <탈춤>(1926)을 비롯한 다수의 시나리오 작가, 영화 < 먼동이 틀 때 >(1927)의 감독이자 1920년대 중반 이후 중요한 글들을 남긴 영화평론가였다. 스스로도 “처음부터 문필로써 미염(米鹽)의 대를 얻으려 함이 본망(本望)이 아니었”으며 벽촌에 은거할 때조차 생활이 단조로울수록 “‘인’이 박힌 것처럼 영화”를 애착했던 시네필이었다. 1) 심훈의 영화 <상록수>는 당시 신문연재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고려영화사에서 감독 심훈, 촬영 양세웅, 주연 강흥식에다 총 출연 2000명이 넘는 대규모 발성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시나리오만 남긴 채 심훈은 36세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좌측부터 영화 <상록수>의 각본 심훈, 주연 강홍식, 촬영 양세웅, 제공 이창용(동아일보,1936.3.18.) 소설 <상록수>는 잘 알려져 있듯 1961년 신상옥 감독에 의해, 1978년 임권택 감독에 의해 2차례 영화화되었다. 신상옥의 <상록수>는 원작 및 심훈(의 시나리오)과 임권택의 동명 영화와 상당히 다른 전개를 보인다. 소설 <상록수>는 동혁의 시점에서 시작해 서신 왕래라는 장치를 통해 자연스럽게 동혁과 영신의 시점을 오가다 최후에는 동혁의 시점에서 끝난다. 심훈의 남겨진 시나리오도 남주인공 ‘동혁’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임권택의 영화 <상록수> 역시 동혁과 그의 고향마을 농우회를 중심으로 사건이 펼쳐지며 영신의 야학활동은 영신의 전언을 통해 플래시백 장면으로 에피소드화 된다. 반면 신상옥의 <상록수>는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여성인물 영신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깊은 산골마을에 버스가 도착하고 짐을 싸매고 온 아가씨가 버스에서 내려 깊은 산골의 호젓한 길을 걸어간다. 배경으로 놓인 눈 덮인 산맥은 그녀가 겪을 인생에 대한 인유적 풍경인 양 놓여있다. 마치 2차례 영화화 된 <무정>이 원작소설처럼 근대적 지식인 이형식을 중심으로 한 계몽과 각성의 서사가 아니라 구여성 영채를 중심으로 한 ‘영채전’의 멜로드라마로 소비되었듯, 대다수 한국인들의 관람의 무의식 속에서 (영화와 소설을 포괄한 서사체로서의) ‘상록수’는 헌신적인 여선생 채영신의 이야기로 기억되는데, 그 기억의 원형을 제공한 영화가 신상옥의 <상록수>인 것이다. ‘상록수’에 대한 원형적인 서사로 기억되면서도 오랜 기간 동안 신상옥의 <상록수>가 저평가된 까닭은 무엇일까. <상록수>가 2차례 영화화된 시기는 1961년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회의)시절부터 1978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 말기에 이르는 시기다. 그런 탓인지 영화화 된 <상록수>는 박정희 정권기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계몽영화로 알려져 있다. <상록수>가 개봉한 것은 1961년 9월 20일이었다. 같은 해 10월 11일, 유달영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은 농촌계몽을 소재로 한 영화 <상록수>를 국민에게 추천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이듬해인 1962년 1월 19일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은 젊은 지식인들이 농촌진흥을 위해 삶을 바친 소재를 다룬 심훈 원작의 영화에 깊은 감명을 받아 <상록수>와 같은 영화를 많이 만들어 농촌으로 보내도록 지시한다. 박정희가 <상록수>를 좋아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며, 유달영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은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인 ‘최용신’의 전기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일련의 과정은 <상록수>라는 영화가 자체의 작품성을 떠나 5.16 군사 쿠데타와 군부정권에 의해 ‘사후적’으로 정권의 계몽영화의 상징이 된 과정을 보여준다. 이렇듯 전형적 농촌 계몽영화라는 표지는 영화 <상록수>를 정권홍보용 문화정치 영화라는 관념으로 둘러쌓아 두었던 것은 아닐까. <상록수>가 신상옥에 의해 영화화 되면서 1960년대식 개발주의 영웅서사로 자리매김했다는 역사학의 평가는 영화 자체가 의도하지 않았던 역사적 우연들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는 아닐까. 신상옥의 <상록수>는 시작부터 영신의 시골행을 보여주며 맑고 깨끗한 여성 주도적 서사를 분명히 했다. 소설의 전개과정과 달리 영화는 영신이 청석골에 들어가 야학을 일구고 농촌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과정을 덤덤히 보여준다. 그저 나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고학으로 학문을 익혔고 이념과 생활이 일치했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 입장도 분명했다. 영화 속 동혁과의 만남은 과거회상으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영신 중심 시점은 임권택의 <상록수>가 동혁과 농우회 즉 남성 영웅과 남성 집단성을 강조한 경우와 반대가 된다. 신상옥과 임권택의 두 영화의 각본은 김강윤으로 동일하므로 이 차이는 연출의 차이임이 분명하다. “여자가 배우면 생지랄이야”라며 딸 교육을 홀대하는 시골 어른들을 설득해서 여자도 배우면 판사도 하고 변호사도 한다고 부드럽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품성,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독립적인 면모, 사랑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일도 중요한 굳건하고 부드러운 성격. 영신이 이끌어가는 여성 중심적 서사는 신상옥 감독이 195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온 멜로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에 대한 섬세한 연출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구시대적이며 내성적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달리 진취적이며 자립적인 여성 영신을 선보인 <상록수>가 신상옥 감독의 연이은 문예물이며 주연배우 또한 최은희라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1) 심훈, 「다시금 본질을 구명하고 영화의 상도에로」, <조선일보> 1935.7.13. >> 상록수 고화질 VOD 보러가기 <<
해방 후 스무 번째 배출된 배우 최남현(崔湳鉉)은 해방 후 스무 번째 영화계에 진출한 배우이다. 주증녀(<돌아온 어머니>(이규환)), 황정순(<여성일기>(홍성기)), 주선태(<청춘행로>(장황연)), 황해(<성벽을 뚫고>(한형모))와는 1949년 데뷔 동기인 셈이다. 그가 첫 선 보인 <돌아온 어머니>는 남편이 원양어선을 타고 나간 사이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던 아내(김연실 분)가 아편중독으로 죽고, 원양어선에서 돌아온 남편은 고아가 된 아들을 어렵게 찾게 된다는 얘기다.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내 역을 맡은 김연실(1911~1997)이 월북하고 최남현은 연극으로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가 영화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기영(金綺泳)의 감독 데뷔작 <죽엄의 상자>(1955)부터였다. 이후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1955)을 비롯,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 <유전의 애수>(유현목, 1956), <아리랑>(김소동), <잃어버린 청춘>(유현목), <봉이 김선달>(이상 1957, 한홍렬), <돈>(김소동), <자유결혼>(이병일), <인생차압>(이상 1958, 유현목), <오 내고향>(김소동), <젊은 아내>(이강천),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이상 1959, 전창근), <흙>(권영순, 1960), <어부들>(강대진, 1961), <인목대비>(안현철, 1962), <또순이>(박상호, 1963), <혈맥>(김수용, 1963), <추풍령>(전범성, 1965), <하숙생>(정진우, 1966), <싸리골의 신화>(이만희, 1967), <망각>(이만희, 1967), <내시>(신상옥, 1968) 등에 주연과 조연으로 기용된다. [사진] 영화 <돈>에서의 최남현, 왼쪽은 배우 김승호 최남현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최무룡 주연)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진섭은 그의 역할에 대해 “전 화면을 통해 압권이며 무대경험에서 쌓은 액팅이 오버함이 없이 적으나 자연스러운 연기” ( 「능한 연출, 능한 연기 / ‘유전의 애수’를 보고」, 『한국일보』, 1956.07.26) 였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런 호평에 힘입어 1년도 안 돼 타이틀 롤을 맡은 <봉이 김선달>로 ‘최남현이라는 배우의 하나의 지위를 주장’ (「비교적 정돈된 야담영화 / 최남현의 ‘봉이 김선달’」, 『한국일보』, 1957.10.25) 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서게 된다. 이후 탈세와 횡령을 일삼다 법망에서 벗어나려 거짓 자살극까지 꾸민 아우(김승호)에게 "생눈 파먹은 날도적"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형 이중건(<인생차압>),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정책에 맞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스승(<이름 없는 별들>), 드센 아내의 성화 속에 품팔이로 어렵게 살아가는 남산기슭 해방촌의 ‘3.8따라지’ 깡통영감(<혈맥>), 국군 낙오병을 숨겨줘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결단을 내려야하는 산골마을의 강노인(<싸리골의 신화>) 등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진] <혈맥>에서의 최남현과 김승호(왼쪽) 이를테면 <봉이 김선달>, <인생차압> 등에서 보인 해학적인 요소, 처녀를 유린하고, 남의 애인을 가로챈 <유전의 애수>의 건달(인수 역), 피폐한 농촌에서 고리대금으로 농민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돈>의 억조, 딸(윤정희)을 왕의 후궁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을 시켜 딸이 사랑하는 하급 관리의 아들(신성일)을 성불구자로 만드는 <내시>의 김찬판 등 악역과 <이름 없는 별들>의 역사 교사 송선생,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싸리골의 신화>의 주인공 강노인이 보인 카리스마적 면모가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최남현. (사진제공 : 김종원) 그러나 최남현은 배우로서 절정기에 이른 1968년 어느 날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져 카메라 앞에 다시 나서지 못하게 된다. 10여 년에 걸친 투병생활 끝에 1977년 유현목 감독의 <문>을 계기로 재기, <한네의 승천>(하길종, 1977), <고가(古家)>(조문진, 1977), <족보>(1978, 임권택), <심봤다>(정진우, 1979), <짝코>(임권택, 1980), <물보라>(김수용, 1980) 등에 출연했으나 예전과 같은 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화의 물결 속에 전통을 고수하려는 <고가>의 주인공 김노인, 아집에 사로잡힌 <물보라>의 지초시, 뜬 구름 같이 살아온 <심봤다>의 조연, 인생을 달관한 <짝코>의 배역에서 열연하였다. [사진] <물보라>에서의 최남현. 아래는 하용수 광물성의 카리스마와 최다 출연 기록 노경에 접어들면서 기세가 많이 꺾이긴 했으나 누가 뭐라 하든 최남현은 개성이 강한 성격파 배우였다. 그의 연기에서는 쇳소리가 난다. 갱도의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광물성의 낮은 울림- 최남현 연기의 장점은 누구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내려 한 데에 있다. (김종원, 「인물영화사 / 중후한 조연 최남현」, 『일간스포츠』, 1987.07.08) 하지만 그에게는 1미터 75센티의 훤칠한 키와 상대를 꿰뚫어 보는듯한 눈매, 중후한 외모가 풍기는 무게감이 있는 반면 유연성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그 대신 뛰어난 연기감각과 형상력,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이런 결과는 결국 제1회 부일영화상 조연남우상(1958, <인생차압>), 제4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화부문 대상(1967, <싸리골의 신화>), 대종상 남우조연상(1966, <추풍령>) 등의 수상으로 나타났다. [사진] <싸리골의 신화>에서의 최남현. 왼쪽 박기태 최남현은 1918년 1월 7일 김소월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최찬수와 박이윤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나온 후, 법관이나 은행가를 지망하는 급우들과는 달리 무대를 동경했다. 해방 이듬해에 월남하여 극예술협회(신협의 전신)에 들어갔으나 한동안 잔심부름을 하며 따분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런 그에게 출연의 기회가 온 것은 1944년 스물여섯 살 때였다. <은하수>라는 연극이었다. <범선 천우호(帆船 天佑號)>(1949)의 무대에 오를 무렵 영화 <돌아온 어머니>에 발탁됐으나 6.25전쟁으로 후속작이 이어지지 못했다. 그 대신 <명우 추해당(秋海棠)>(상록극회, 1951), <통곡>(극협, 1952) 등 연극 활동을 하며 어려운 전란기를 보냈다. 영화 촬영이 계속된 뒤에도 <한강은 흐른다>(신협, 1958) 등에 출연하여 연극과의 인연을 끊지 않았다. 공연이 없는 날엔 주선태, 박암 등 극협 단원들과 술로 회포를 풀었다. [사진]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에서의 최남현 최남현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외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80년대 이후에는 술과 마작, 화투놀이로 소일하다시피 했고, 장기간의 투병으로 고급주택 등 모든 재산을 날렸다. 말년에는 양로원 생활을 하며 병상에 있는 아내까지 뒷바라지하다가 1990년 1월 7일 일흔 한 살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마지막 출연작은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 사건을 다룬 신상옥 감독의 <마유미>(1990, 단역)였다. 30대 초반부터 노역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스크린을 누볐던 최남현은 40여 년 동안 720여 편에 출연하는 최다 기록을 세웠다. *
불량소녀 역할로 변신 시도 이후 조미령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십대의 반항>(김기영, 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1959),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 <이별의 종착역>(박영환, 1960), <박서방>(강대진, 1960), <지상의 비극>(박종호, 1960), <마부>(강대진, 1961), <에밀레종>(홍성기, 1961), <골목안 풍경>(박종호, 1962), <견습부부>(이봉래, 1962), <원효대사>(장일호, 1962), <인목대비>(안현철, 1962), <아빠 안녕>(최훈, 1963), <로맨스가족>(최영철, 1963), <혈맥>(김수용, 1963), <신식할머니>(백호빈, 1964), <홀어머니>(홍은원, 1964) <비무장지대>(박상호, 1965), <주홍 스카트>(이봉래, 1965), <사랑보다 강한 것>(이규웅, 1966), <나운규의 일생>(최무룡, 1966), <역마>(김강윤, 1967), <안방마님>(고영남, 1967), <로맨스 마마>(최인현, 1968), <몽땅 드릴까요>(유현목,1968), <춘원 이광수>(최인현, 1969), <두 아들 2>(조문진, 1981) 등에 출연했다. [사진] <신식 할머니>(백호빈, 1964)에서 조미령 <아들의 심판>(1960, 안현철)에서는 기생(황정순)의 딸로, <원효대사>(62, 장일호)에서는 원효(최무룡)를 따르는 아사다로, <에밀레종>에서는 명종의 완성을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리는 참마루(김진규)의 아내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십대의 반항>(1959)을 전후하여 배역의 변화를 꾀한다. 숏커트의 헤어스타일로 건달과 사귀는 뒷골목의 불량소녀(필녀)에서 영문 주간지 『타임』을 읽고 가족들에게 성문제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신식 할머니>(1963)의 노인으로, ‘여존남비’를 앞세워 전통적인 삶을 거부하는 여성잡지의 독신 <여사장>(1959) 요안나로 나타난다. [사진] <여사장>(한형모, 1959)에 출연한 조미령, 왼쪽은 상대역인 배우 이수련 이울러 그녀는 이지적이기보다는 백치미를 추구한 작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졸지에 맹진사댁 규수를 대신하여 꽃가마를 타게 된 <시집가는 날>의 대리 신부는 물론, 남편에게 얻어맞고 친정으로 쫓겨 온 <마부>의 벙어리 맏딸(옥례), 재취를 미끼로 구두쇠 영감(김승호)의 전대를 훔치고 도망간 <혈맥>(김수용, 1963)의 벙어리 여인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진] <혈맥>(김수용, 1963)에서 조미령, 오른쪽은 배우 김승호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미령은 현대적인 양장보다는 가냘픈 선의 맵시가 드러나는 전통적인 한복 차림이 더욱 돋보인다는 점이다. 학업마저 포기한 여덟 살 소녀의 도전 조제순(趙濟順)이 본명인 조미령은 1929년 2월 4일 경남 마산 출신이다. 일설에는 서울 효자동 태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덟 살 때 연극 팬인 언니의 권유로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 ‘청춘좌’에 들어가 <임자 없는 자식들>(1937)로 첫 발을 디뎠다. 김승호의 연극 데뷔작이기도 하다. 『한국연예대감』(1962, 성영문화사) 등 일부 인쇄물에는 중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다. (「비약을 꿈꾸는 여우 조미령, 그는 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나」, 『한국일보』, 1958.11.02) 여덟 살 때 이미 극단(청춘좌)에 들어가 동양극장 후반기의 최대 히트작 <어머니의 힘>(1943, 이서구 원작)에 출연하는 등 해방이 될 때까지 11년 동안 무대생활을 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조미령은 그 뒤 <해연(갈매기)>(1948)으로 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으나 6.25전쟁과 결혼으로 화면에 얼굴을 비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 등 연극 단체에서 활약했다. 서울 신당동에 신접살림을 마련하고 두 남매를 키우는 일에만 매달리던 조미령이 <춘향전>으로 다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해연> 이후 5년 만이었다. 남편이 전주(錢主)를 끌어들여 만든 이 영화는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미령의 실신소동이다. 여배우 숙소에 밥을 지어 나르던 중년의 아낙네에 의해 처음 알려진 이 소동은 의처증이 있는 이철혁이 아내가 남주인공인 이민과 심상치 않는 관계로 의심한 데서 비롯되었다. 화가 난 그가 집어 던진 목침이 조미령의 뒷머리에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숙소에 있던 석금성(월매 역) 등 배우의 간호로 한참 뒤에야 깨어날 수 있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9)] 난산」, 『중앙일보』, 1980.02.20.)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 왼쪽은 이도령을 맡은 상대 배우 이민 그런 남편이 그로부터 3년이 채 안된 1958년 3월 16일 밤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당시 46세였다. (「문화소식, 이철혁씨 급서」, 『서울신문』, 1958.03.19) 장례는 20일 아침 열시부터 ‘영화인동지장’(장의위원장 안종화)으로 고인의 자택인 신당동 앞마당에서 거행되었다. (「내외문화단신, 영화인 동지장으로」, 『한국일보』, 1958.03.20)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영화출연을 삼가던 조미령이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화랑 감독의 코미디 <사람팔자 알 수 없다>(1958)를 전후한 시기였다. 잇따라 중매결혼을 반대하고 자유결혼을 구가하는 <자유결혼>(1958, 이병일)의 셋째 딸 역을 맡아 종전과 다른 활달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박암 사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다는 말을 들어온 조미령은 남편이 죽은 지 4년이 채 안 돼 하와이 이민 2세 최동원과 결혼(1962년)하고 6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 역시 김소영, 김신재 등 선배배우와 마찬가지로 말년을 타국에서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가 브로드웨이의 연극을 볼 수 있는 뉴욕으로 옮겨 10여년을 지내고 1988년 아들딸이 사는 하와이로 건너가 토산품점을 경영했다. 하와이 민속박물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지 2천 4백여 평, 건평 1백 12평 규모의 큰 가게였다. 그 사이 ‘영화의 날’(1991년 10월) 행사와 1958년 첫 개봉이후 11년 만에 다시 리바이벌하는 하한수 감독의 <눈 나리는 밤>(1969), 조문진 감독의 <두 아들 2>(1981)에 출연하기 위해 잠시 귀국하기도 했다. 조미령은 무성영화시대에 처음 나온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 감독의 <춘향전>(1923)과 발성영화시대를 연 문예봉 주연의 <춘향전>(1935)에 이어 한국 독립 후 최초로 만든 <춘향전>(1955)의 히로인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필름이 보존되지 않아 후대의 최은희(성춘향, 1961)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미령은 분명 해방 후 60년대 초까지 선배인 최은희, 후배 김지미와 더불어 삼각구도를 이루며 한국영화의 중흥에 이바지한 소중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