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정치의 원리
- 감독
- 김곡, 김선
- 제작년도
- 2003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육체다. 아아. 저 한마디 뱉는 순간 벌써부터 무수한 항변과 반론들이 들려온다. 기실 땅바닥만 찍지 않는 이상(헤어조그가 그런 적이 있었다고 재반론하고 싶지만 참는다) 육체를 찍지 않는 영화는 100년 동안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체의 범위를 문자 그대로(“corpus”) ‘물체’로 조금만 확장하면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모든 피사체가 이미 육체다. 심지어 카메라도 육체이고, 그걸 찍고 보는 작가도 관객도 죄다 육체다. 하지만 고전적 육체와 현대적 육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이미지의 변화를 표현하는 주인행세를 함에는 어떤 차이도 없겠지만 말이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의 담지자로서 먼저 나타난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적 가치보다 더 앞설 수 없다는 의미다. 물론 드레이어와 베리만의 영화에도 육체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하얗게 지워져서 지금이라도 얼른 복원되어야 할 정신의 심도보다 먼저이진 않다. 그저 정신이 심도를 복원할 때까지 느릿느릿 움직여주고, 그에 필요한 말씀(<오데트>)을 전달해주면 그만이다. 고전육체는 정신의 수단인 셈이다. 반면 현대적 육체는 (신을 잃어버려서 그런지) 비틀거리고 넘어질 때 나타난다. 즉 진짜 육체는 피 흘리고 다칠 수 있는 육체다. 진짜 육체는 죽을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다. 팔다리만 있다고 육체가 아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수 있어야, 그에 비명 지르고 펄쩍 뛸 수 있어야 진짜 육체다. 프레이밍에 의해 가려져 있던 잔 다르크의 가멸력을 화형대로 옮겨놓은 브레송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육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의 심도? 뜨거워 죽겠는데 무슨 심도 타령일까. 온몸의 신경이 화염에 불타오를 때 심도보단 비명이 먼저다. 요컨대 고전적 육체가 불멸의 정신적 가치(정의ㆍ믿음...)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 현대적 육체는 소멸의 물질적 가치를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 된다. 누구 말을 빌리면, 진짜 육체는 가멸성의 “순수수단”이다. 표표히 사라지는 서부극 인물 죽을 수 있는 육체만이 진짜 육체라고 한다면, 고전 서부극엔 육체가 없다. 아무리 역마차의 속도가 빨라 봤자 그 종착지는 아메리카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셰인과 링코 키드는 죽지 않는다. 그저 표표히 사라질 뿐(물론 죽은 거나 진배없다는 추가해석이 가능하지만). 더욱 결정적인 사례는 종교영화들의 경우다. 종교적 상황들을 다루었던 고전시대극들에서 육체는 바리새인이나 유대인 할 것 없이 모두 휘황찬란한 의상들로 가려져 있다. 드밀과 와일러의 영화에서 육체보다 색깔이 먼저인 이유는 다시 색깔이 정신의 심도를 방해하거나 도와주는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테크니컬러 총천연색에 모세의 남루한 넝마주이 패션이 극한의 대조를 이룰 때,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가열차게 기도 모드에 돌입할 수 있음이다. 즉 고전종교영화에서 의상은 정신의 척도만을 내어주지, 육체의 척도를 내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로마 군인들이 바닷물에 휩쓸려 죽는 것마저도 그나마 파도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육체가 죽었단 사실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그의 폭정이 죽었단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육체의 출현을 방해하던 고전적 문법은 클로즈업이라고 할 수 있다. 얼굴 한 방이면 세계의 모든 것이 거기서 표현되고 있었다. 베리만은 이걸 한껏 즐겼다. 클로즈업은 육체의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영혼의 가속도로 대체한다. <잠입자Stalker> (1972) 반대의 상황들로 가보자. 웨스턴을 지나 네오웨스턴으로 가보면, 거기엔 육체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육체가 있어도 너무 육체만 있다. 정의감이나 신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금 한 덩이 차지하기 위해서 동물적 본능만 남은 네오웨스턴의 육체들은 가히 ‘사막의 좀비들’이라 할 수 있다. 페킨파의 < 와일드 번치 >에 한 총잡이는 기관총 드립에 사망하여 널부러진 한 시체에서 금니를 캐내려고 한다. 이것은 모세의 정신적 넝마주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동물적 넝마주이다. 심지어 페킨파는 육체의 가멸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을까 슬로우모션으로 죽는 순간을 찍어댔고, 많은 평론가들에게 상욕을 들었다. 페킨파의 슬로우모션은 클로즈업이 표현하던 영혼의 가속도와 대비되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가속도다. 헐. 현대의 신학영화는 그렇지 않을 거야! 여전히 신학은 정신이다, 육체가 아니라! 라고 울부짖는 그대에게 일독을 권장하는 영화는 타르콥스키의 영화다. 비록 그가 인터뷰에서 열심히 “영성”과 “희생”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그의 이미지들을 보라. 거기엔 안개와 유황 가스를 뒤집어쓰고 어쩔 줄 몰라하는 육체, 자신의 존재를 잊을까 봐 초원 위에 마치 비디오데크가 고장 난 것처럼 일시 정지된 상태로 몇 분이고 서 있는 육체, 무엇보다도 공중부양하는 육체가 있다. 이른 결론으로 건너뛰자면, 정신성의 회복을 위해 타르콥스키에게 먼저 고양되어야 할 것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인 것이다(물론 이건 인간의 육체만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타르콥스키는 클로즈업을 마뜩잖아 했다. 클로즈업이 보고 싶나? 말씀을 쏟아내던 입이 삭제된 뒤통수 클로즈업이나 봐라(< 스토커 >). 현대적 육체는 클로즈업을 경멸한다. 얼굴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다. 얼굴들을 겁나게 이어 붙여서 줄줄이 비엔나로 엮어낸 후 맥놀이 하듯 겁나게 흔들면 다시 육체가 나타난다. 이것이 카사베티스의 경우이고 그의 독특성이었다. 천의 얼굴은 하나의 육체와 맞먹는 셈이다(<얼굴들>). 오발탄 (1961) “가자...가자..” 요컨대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고통’이다. 고통이 없는 모든 영화를 고전적이라고, 고통이 있는 모든 영화를 현대적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터다. 현대 신학영화는 이 기준의 반대급부이기는커녕, 이 기준을 가장 먼저 밀고 나갔던 고통의 첨병들이었다. 유현목 의 영화들이 타르콥스키보다 이른 현대적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거기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근만근의 짐짝”에 짓눌릴 때의 압사의 통각이고, “가자...가자..”의 환청에 고막이 찢어지는 통각이다(< 오발탄 >). 아무리 클로즈업과 의상으로 가려봐도 이 고통의 파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얼굴 안에 충치는 하나쯤 박혀있기 마련이고, 파동은 육체의 신경과 힘줄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이다. < 막차로 온 손님들 >에서 도마질 소리에서 괘종시계 소리로의 이행을 들어보라. 모세가 듣는 신의 목소리는 노래방 마이크에서와 같은 에코라도 걸려 있었다. 그러나 유현목의 세계는 노래방이 아니다. 십계현판이라는 마이크도 없는데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그 마이크는 내 뇌 속에, 내 신경 속에 이미 있다. 이건 거의 고막의 화형식이다. 너는 죽는다. 육체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에 대한 통각 없이 아무것도 아니다. 신은 압력이 되었다(타르콥스키는 “시압time-pressure”이라 불렀던 그것). 이것이 유현목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다. < 순교자 >에서 신부를 휘어 감는 문제는 신이 있냐 없냐가 아니었다. 그건 신은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있느냔 것이다. 저기에 우뚝 서서 이 폐허를 압박하고 있는 파동의 중심으로서의 십자가가. 이 모든 측면들이 유현목을 한국최초의 육체적 작가로 만든다. 유현목이 영화는 “체험”이라고 강조함을 잊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몸의 경험인 것이다. 고통으로만 존재하는 신념의 상태.
신파는 한국 영화의 척추다. 아무리 성형수술을 가해도 척추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만큼 신파는 그가 출현한 시점부터 100년을 반복해왔다. 더 이상 신파는 싫고 좋고의 문제도 아니다. 마치 한국인의 밥상에서 된장찌개가 무한 반복되듯이, 신파는 한국영화판에서 무한 반복된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신파를 대하는 가장 모범적인(혹은 가장 ‘모던한’) 태도는 그러한 신파의 반복성을 비웃는 일이 되어버렸다. “또 신파야?”라고 비웃으면 그만이다. 그 모든 눈물과 운명의 신비에 나도 모르게 감응하는 본능적 반응에 대해서 여타의 지성적(다시 ‘모던적’) 해석과 변명을 꾸며댈 수고를 스스로 덜어내며, 그저 비웃으면 그만인 게다. 하지만 그처럼 잘도 반복되는데, 한낱 비웃고 말면 그만일 구닥다리 인습에 불과할까. 무한루핑되는 된장찌개가 한국 혼의 척추이듯, 신파는 또 그렇지 아니할까. 신파의 핵심은 모던인들이 비웃는 바로 그 반복에 있다.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확인되는, 신파의 짐짓 ‘모던한’ 정의는 ‘개연성 없는 감정의 과잉 반복’이다. 다시 말해보면, 신파는 ‘개연성의 공백을 채우는 감정의 반복’이다. 이 정의를 하사해주신 모던인들에게 감사드린다. 하지만 모던인들께서 하나 잊은 게 있다면, 바로 그 개연성의 출처다. 신파에서 개연성이 없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 없어서가 아니라, 여기에 없고 딴 데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땅에 없고 저기 저 하늘에 있어서다. 왜냐하면 신파에서 모든 사건을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운명, 즉 천명(天命)이기 때문이다. 신파의 진짜 주인공은 하늘이다. 신파극에서 망막에 진물이 날 때까지 반복되는 하늘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려보지 않더라도, 기실 신파를 볼 때 가장 신비로운 점은, 죄는 있는데 죄인은 없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바로 이 역설을 가장 첨예하게 밀고 나갈수록 좋은 신파극이 된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엇갈렸을 이수일과 심순애 때부터 그랬다. 이수일과 심순애가 죄인이 아닌 것처럼, 김중배와 심순애의 어머니도 악인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악역일 뿐이다(그들에겐 나름의 사정이 있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뉘우치기까지 한다). 실상 신파에서 진짜 죄를 짓는 것은 하늘이다. 하늘은 운명적 사랑을 개시한 진짜 범인이다. 신파의 인물들이 죄지은 적도 없이 고통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다시 한번- 이걸 잘해야 안타까움은 배가되고 좋은 신파극이 된다). 그들은 하늘의 잘못 때문에 상처받고, 하늘의 죄를 뒤집어쓰는 자들이다. 이 모든 것이 현대신파극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 미워도 다시 한번 >( 정소영 , 1968)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딱히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시작한 남녀가 있다. 그리고 그 나름 생의 무게 때문에 “나예요? 저 여자예요?”라고 운명의 선택을 강요하는 본부인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갈라놓고 또 각자 가둬놓는 침묵과 투명성, 공기의 벽들이 있다. 그들은 하늘에 감금되어 있다. 실상 두세 명의 인물들이 엇갈리게, 혹은 서로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정소영의 샷은 한국 신파(막장드라마 포함)가 앞으로도 부단히 참조하게 될 하늘감금샷의 원조다. 정소영은 하늘감금샷의 끝판왕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희망고문의 이미지다. 운명에 의해 시골어촌으로까지 유배당한 여인을 진정 가둔 것, 또한 그녀가 기다림과 노란 풍선으로 채워나가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이다. 한국신파는 하늘감옥으로 정의된다. 하늘이 잘못했네. 이것이 신파를 대하는 가장 올바른 반응이다. 그런데 분노를 거두기엔 아직 이르다. 더 얄미운 것은 잘못을 해놓고 또 그것을 애써 고쳐보려고 하는 놈도 하늘이란 사실이다. 신파의 하늘은 병 주고 약 주는, 우주의 에너지 자체다. 개연성 없는 사건의 해결과 진전? 개연성은 바로 그 하늘의 보이지 않는 약손에서 온다. 이 엄청난 약손을 거의 최초로 선보였던 장일호 감독의 < 사랑하는 사람아 >를 보라. 양색시였던 어머니의 혈통 때문에 연인이 파혼되자, 어머니가 돌연사하고 남자의 본처가 돌연사하고 아버지가 돌연사하고... 사건의 심화와 갈등의 해결을 위해 갑자기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이러한 인물들에게서, 저승사자가 되어버린 하늘이 아니라면 그 개연성은 당최 무엇일쏘냐. 하늘의 폭력적 개입, 자연(自然)의 돌연(突然)으로의 변신,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아> 연작으로 장일호 감독이 한국신파극에 남긴 엄청난 유산(막장 드라마로까지 이어지는)이다. 하늘은 제멋대로다. 제멋은 모든 운명의 조각을 맞추는 것 외에 다른 어떠한 맵시도 알지 못한다. 실상 한국 신파영화는 하늘의 위대한 변주들이다. < 엄마 없는 하늘 아래 >( 이원세 )에서 지평선을 대들보로 해서 만든 하늘감옥이 그렇고, < 만추 >( 김수용 )에서 연인마저 낙엽으로 만드는 가을바람이 그렇다. 병도 주고 약도 주는, 또 감옥도 되고 집도 되는 공기(空氣)는 신파극의 진정한 주연이다. 신파에서 진정 반복되는 것은 바로 그다. “개연성 없는 과잉감정”이 아니라. 신파는 하늘이 그 자신만의 법률을 제정하는 과정이다. 신파극 인물들은 수동적이지 않다. 바로 이 제헌과정에 참여하여 그를 몸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늘은 팔다리가 없다. 심순애와 이수일의 팔다리를 빌어야 한다. 신파극은 하늘의 자율성(말 그대로- 스스로 다스림)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신파극의 소중한(동시에 독특한) 계승은 이송희일 의 작품들일 게다. 이송희일 영화는 한국사회의 육체적이고 정신적 법규들을 가로지르는 가장 끈적이는 바람에 도전하고 있다(< 후회하지 않아 > < 백야 > < 야간비행 >). 이송희일은 젠더의 자율성이다. 난 잘 모르겠다. 모던인들이 신파를 비웃는 이유를. 반대로 그들은 비웃는 통에 하늘과 땅을 혼동한다. 그들은 대지 위에서의 감정의 반복을 말하지만, 실상 신파에서 먼저 반복되는 것은 하늘이다. 한국신파에서 감정은 반복되기보다는 바로 그 반복을 “버티는 힘”이다. 하늘이 자율성의 원환을 완성할 때까지 병 줌과 약 줌을 버티고, 감옥과 집을 버티는 힘. 버팀도 밉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대 모던인의 밥상에도 된장찌개는 오늘도 버티고 있다.
남자들로 구성된 한국의 특수 집단, 학교와 군대. 폭력과 권력으로 대변되는 주류 남성성은 이 폐쇄적 남성공간을 통해 획득되고 구성된다. 말하자면 남자 고등학교는 ‘예비 남성’인 소년들의 병영체험소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곳은 의리와 우정으로 대변되는 남성 결합의 공동체인 동시에 숭배, 질투, 분노의 감정이 오가는 잔인한 결투의 장이다. 왕성한 발육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들의 의식상태는 잔혹한 공격성향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른바 왕따(집단따돌림) 현상은 그러한 정념의 발화일 것이다. 차이에 대한 이질감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또는 그저 재미있으므로 강자는 약자를 괴롭힌다. 이 풋내기 수컷 문화로 점철된 남고에 마선과 마택이 있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우팅 당한 마선은 급우들 사이에서 ‘호모새끼’로 낙인 찍혀 집단 괴롭힘을 당한다. 같은 반의 마택은 그에게 안쓰러운 감정을 느끼지만 주변의 시선으로 인해 선듯 마선의 편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얼굴 가득 여드름 꽃이 핀 두 인물은 배우가 아닌 실제 고등학생이다. 반의 아이들은 마선을 향해 “호모새끼”, “더러워, 역겨워”, “진짜 저 새끼 너 애인이야?” 등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한 마초적 대사들을 시종일관 쏟아내는데, 그것이 뻔한 설정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그 또래의 문화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등장인물들이 또래의 비전문 배우로 캐스팅했기 때문이리라. 한편, 둘에게는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으니 바로 음악이다. 마선은 드럼, 마택은 베이스를 연주한다.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두 사람은 나란히 교내 밴드부에 합격하게 되고, 밤새 연습을 하면서 미묘한 감정을 쌓아간다. 둘은 말이 아닌 음악의 언어로 교감하기 시작한다. 밴드 음악에서 전체적인 리듬을 형성하고 받혀주는 드럼과 베이스의 긴밀한 관계만큼이나 이 둘의 합주는 찹쌀떡 궁합을 보여준다.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이들의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동물 왕국의 아이들은 둘을 연인으로 간주하여 공개재판을 연다. 마택은 자신마저 따돌림을 당할 상황에 놓이자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마선에게 배반의 장미를 던진다. “김마선, 니 애인한테 가서 똥구멍이나 핥아!” 영화는 학교 내 남성 동성애자의 현실을 다루기는 하지만, 성적지향에 따른 차이보다는 집단 괴롭힘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호모포비아라는 특정한 소재를 토대로 누구나 겪을 수 있을 법한 왕따 현상을 다루고 있다. 말하자면 마택이 왕따를 당하는 이유를 가난, 외모, 장애, 성적 등으로 치환하여도 무리 없이 볼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다. 차이가 있다면 다른 이유들은 급우들에게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될 여지가 있겠지만, 동성애자란 정체성은 혐오와 경멸만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일 듯이다. 이같은 경계의 불확실성은 둘의 관계와 정체성도 해당된다. 우리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마선이 동성애자인지 아니면 단순 루머에 의한 따돌림의 피해자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스스로 긍정도 부정도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선을 향한 마택의 감정이 약자에 대한 연민인지, 혹은 음악적 연대감을 나누는 우정인지 모호하다. 심지어 마택 역시 클로짓 게이로서 마선을 향한 묘한 애정을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가 마선을 특별히 신경 쓴다는 것 외에는 무엇도 확신할 수가 없다. 이런 감정의 모호성은 영화의 단점이기보다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흔히 우리가 확연하게 선을 긋는 사랑과 우정의 경계란 것이 실상 불명확하고, 또한 남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동성애자에 대한 특수한 차별과 폭력의 문화를 보편적인 따돌림 현상으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보자면 자칫 영화가 평범하게 설명되는 듯하다. 분명 < Bomb! Bomb! Bomb! >은 관습적인 내러티브를 거부한 채 실험적인 영화를 제작해온 쌍둥이 감독 김곡 , 김선 의 이전 영화와는 달리 친절한 내러티브를 구사한다. 그러나 비타협창작집단 곡사의 인장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드러난다.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동물원’의 제물이 된 마선은 홀로 책상에 앉아 수치심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소위 ‘동물원’이라 불리는 이 놀이는 교실에 왕따 한명을 가둬넣고 동물 취급을 하는 집단따돌림의 한 종류이다. 이 잔혹한 놀이는 광기에 사로잡힌 수컷집단에 의한 희생양의 정신적 화형식이다. 창문을 두드리며 광분하는 아이들을 비집고 이내 마택이 나타난다. 그는 아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교실문을 열고 마선에게 다가간다. 동물원의 동물로 만난 마선과 마택. 이때 침묵을 지키던 마선이 말한다. "마택아, 쟤들 다 죽여버릴까?" 그리고 정말 음악과 함께 모두를 죽여 버린다. 내가 이 영화를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는 마지막 두 주인공이 선사하는 전복의 쾌감을 발휘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원 제의를 보며 분노에 휩싸여 스크린을 찢고 들어가 교실을 폭파 시키고 싶은 기분에 휩싸일 때, 카운트다운하듯 영화의 타이틀이 등장(Bomb! Bomb! Bomb!)하며 안과 밖은 역전된다. 광분하던 창밖의 아이들은 마선과 마택의 연주에 열광하는 군중으로 변하고, 우리의 분노와 슬픔은 흥분과 전율로 뒤바뀐다. 윗옷을 벗은 채 그들만의 상상적 공간 속에서 발광하듯 합주하는 마선과 마택의 모습은 그 어떤 영화에서보다 폭발력있는 오르가즘을 발휘한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한 세계의 전복. 모든 아름다운 영화가 그렇하듯 < Bomb! Bomb! Bomb! >은 보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영화적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PS: < Bomb! Bomb! Bomb! >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시선 시리즈 중 < 세 번째 시선 >(2006)에 포함된 작품이다. 시선 시리즈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옴니버스 영화로, 2003년 < 여섯 개의 시선 >에서 시작돼 박찬욱 , 류승완 , 임순례 , 장진 , 김태용 등 총 52명의 쟁쟁한 한국 영화감독들이 참여했다. 알려진 바로는 2015년 정지우 감독의 < 4등 >을 끝으로 제작비를 구하지 못하여 잠정적 중단 되었다고 한다. 이 훌륭한 기획이 올해는 부활할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