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문
- 감독
- 김동진
- 제작년도
- 2018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1931년 《동아일보》(4.14.)와 《조선일보》(4.15.)에 조선영화제작연맹의 제작발표회 기사가 실렸다. 당해 4월 8일에 일어난 홍옥임과 김용주의 철도동반자살 사건을 기반으로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소식이었다. 기사에는 <명일의 여성>이라는 제목뿐 아니라 출연과 제작진도 함께 발표되었다. 감독 및 각본 홍개명 , 각색 김서정, 촬영 한창섭 , 진행 홍찬 , 출연 나웅 · 윤봉춘 · 김연실 · 임운학 등이 제작 동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두 젊은 여성이 자살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지 이제 막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음에도 한두 달 내에 제작에 착수할 것이며 야심 차게 상해로 수출할 것이라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관련된 후속 보도는 이어지지 않았다. 홍옥임, 김용주 철도동반자살 사건 관련 《조선일보》 기사(1931.4.10.) 당시 식민지 조선의 영화계를 보면 1923년 윤백남 의 < 월하의 맹서 >가 개봉된 이후 본격화된 조선의 영화제작이 점차 그 수를 늘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특히 1926년 < 아리랑 >(나운규, 1926)의 전국적인 흥행으로 1927년에는 무려 14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MGM이나 파라마운트와의 특약 계약을 통해 영화를 수입하는 회사도 세워져 외화배급이 원활해졌다. 영화와 관련된 담론 역시 활발해져 농민과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을 구현한 영화를 옹호한 카프와 작품성이나 상업성에 주안을 둔 그룹이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무식한 광견(狂犬)’, ‘무지한 필님충(film蟲))’으로 날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이르면 세계 영화계는 발성영화의 시대에 진입하고 극장은 신기술을 도입할 새로운 자본과 혁신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명일의 여성> 제작발표 기사가 났던 1931년에는 조선 총독부의 검열이 체계화되고 경제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1 』) 개봉되고 제작된 조선영화는 그 수가 대폭 줄었다. 영화창작을 향한 열망은 여전해서 <명일의 여성>처럼 제작발표를 했지만 실제로는 아예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완성되지 못한 영화 목록이 꽤 길었다. 한국 퀴어 영화의 역사 쓰기를 고려할 때 <명일의 여성>은 흥미로운 위치에 있다. 이 영화는 아마도 제작조차 들어가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만들어진 적 없는 ‘허구의 영화’다. 하지만 제작되었다면 첫 번째 레즈비언 영화로 불렸을 수도 있는 영화다. <명일의 여성>은 그런 면에서 허구의 기원, 기원 없는 기원이다. 그러나 이 허구야말로 늘 퀴어 역사와 존재에게는 실재의 또 다른 말이 아닌가? 존재하면서도 부정당하거나 가짜와 위장으로 의심받는 섹슈얼리티, 정체성 그리고 수행. 심지어 스크린 위에 가시화될 때도 마치 없는 것이나 오점처럼 지워지는 역사들. <명일의 여성>은 시간을 특정할 수 없다. 백퍼센트 제작이 안 되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영화, 그래서 영원히 제작 ‘중’인 영화. 과거의 사건이지만 지속적으로 현재일 수밖에 없으며 어딘가에서 비틀어지고 왜곡된(pervert) 씨를 뿌리는 시간 속에 있는 영화. 어제의 시간 속에 있으면서 오늘일 수밖에 없는 영화다. 과거라는 시간(1931년)에 단단히 묶여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현재와 미래로 열려 있을 수밖에 없는 기이한 시간의 모양을 갖는다(“시간의 구속Time Binds”이란 용어는 엘리자베스 프리먼[2010]의 저작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과거는 희뿌옇고 부실하고 오염되어 있으며, 현재와 미래는 부재 중이다. 어쩌면 우리는 <명일의 여성>에서 허구의 세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어디에도 없는 곳이자 결코 규정되지 않아 끊임없이 규정이 필요한)유토피아’를 조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허구’라는 방법론으로 퀴어의 역사를 쓴다면 어떤 역사를 쓸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먼저 ‘허구’는 그저 공상이 아니라 공통세계에 공존하는 틀을 만들 수 있는 도구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흥미로운 영화의 ‘허구’에 어떤 현실감, 수용가능성, 개연성을 불어넣어줄 수 있을까? 먼저 두 범주로 나눠 질문들을 던져 보자. 조건의 질문들과 상상의 질문들. - 조건의 질문들 : 당시 비극적인 자살사건이 일어난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어떻게 이렇게나 빠르게 동인을 모아 제작발표를 할 수 있었을까? 더불어 영화가 (아마도) 제작을 할 수 없거나 완료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젊은 여성의 동성애 소재는 신선함, 대중성, 이국성을 갖는 매혹적인 영화 소재였을 것이다. 당시 엘리트들에게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들 간의 동성애는 이질적이고 새롭지만 거부감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신문칼럼이나 잡지는 여성 동성애 ‘유행’을 자세히 소개하면서도(1930년대 잡지 <별건곤>의 ‘여류명사’들의 동성연애기 투고기사) 제대로 된 남성을 만나기 이전의 소녀들의 일시적 실험이나 정사 없는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가부장제 이성애에 위협을 주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남성 엘리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항문성교를 한다고 알려진 남성 동성애자들이었다(《동아일보》 1932.3.17.). 더군다나 이 영화는 당시 젊은 세대의 연애관과 결혼관을 비판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볼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반드시 두 여성의 시점에서 서사가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홍옥임(21세)은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홍석후의 딸이자 음악가 홍난파 의 조카였으며, 김용주(17세)는 종로 덕흥서림 사장 김동진의 딸이자 비행사 심종익의 아내였다. 스스로도 엘리트 교육을 받은 신여성인 동시에 조선 최고 엘리트 집안이었기 때문에 세간의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도 연인관계에 있던 노동계급의 젊은 여성들의 철도동반자살 사건이 있었지만 해당 사건은 워낙 유명한 집안이었던 만큼 더 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박차민정의 『조선의 퀴어』(2018) 참고). 또한 상해 수출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이 주제가 그만큼 해외에서도 수용될 만한 소재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소재의 대중적 매력만으로 영화를 완성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자본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동인들 간에 이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복의 처녀Mädchen in Uniform>(1931) 중 한편 독일의 유명 레즈비언 영화 <제복의 처녀Mädchen in Uniform>(1931)가 같은 해 독일에서 개봉되었다는 것은 우연이지만 조선영화가 세계적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성작가인 크리스타 윈슬로가 쓴 극본 <어제와 오늘>을 여성 감독 레티오네 사강이 연출한 <제복의 처녀>는 1933년 3월에 조선에도 개봉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변사 박창원의 녹음으로 1936년 12월 영화해설 음반이 발매되었으며, 일본에서는 1934년 《키네마 준보》에서 최고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언론은 영화의 인기에 여학교 학생들을 ‘제복의 처녀’라 부르기도 했다. - 상상의 질문들 : 실제로 이 영화가 모종의 이유로 제목을 바꿔 해당 영화인지 알 수 없게 제작되었는데 개봉을 할 수 없어 프린트의 일부가 상해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 당시 <명일의 여성>의 출연 및 제작 동인(이름을 올리지 않은 이들을 포함)에 퀴어는 없었을까? 퀴어적 관계나 정체성을 가진 제작진이 포함되었다는 상상 속에서 <명일의 여성>을 갖고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영화가 실종되었거나 완료되지 못한 이유를 추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의 1930년대 버전이 될 것이다. 조선의 영화현실 뿐 아니라 당시 젊은 여성 동성애자들에 대한 성적 억압과 다른 여러 불만들(가부장제, 교육, 계급, 식민지적 억압 등)을 교차해 서사화할 수 있다. : 조선영화가 1930년대 이미 여성 동성애 소재로 트랜스내셔널하게 연결되었던 역사와 현재 식민지 조선 혹은 경성이라는 시공간이 종종 퀴어화 되는 것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 청연 >(윤종찬, 2005), <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이해영, 2014), < 아가씨 >(박찬욱, 2016), < 유령 >(이해영, 2022). <명일의 여성>처럼 시간의 구속을 가진 퀴어화된 영화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나는 이 모든 질문에 답할 수도, 답하려는 욕망도 없다. 단지, 시간의 구속에 얽혀 실종되고 왜곡되고 흐릿한 퀴어 영화들의 파편 더미들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경성 퀴어로 시작해보고자 한다. (계속)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해영, 2014) 중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영화 <낙동강>과 교향시 <낙동강의 시(詩)> <낙동강의 시(詩)>는 윤이상의 미발표곡이다.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17년에 자필 악보가 발견되어 2018 통영국제음악제 공식 공연 프로그램으로 추진되었고, 2018년 4월 5일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한스-크리스티안 오일러가 지휘한 하노버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세계초연했다. 윤이상이 1956년 11월 30일 아내 이수자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윤이상은 한국에서 <낙동강의 시>를 작곡하다가 1악장과 2악장을 파리에서 완성했고 그곳에서 3악장을 써서 11월 29일 저녁에 전곡을 완성했다[편지상의 제목은 '낙동강시'이며 자필악보상의 제목은 'Poems of the Nak-tong River'이다]. 윤이상은 같은 해 4월 <현악사중주 1번>으로 서울시문화상을 받고 6월에 유학길에 올랐으며, 처음에는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유학하다가 서베를린 국립음대(현 베를린 예술대학)로 옮겨서 그곳에서 학업을 마쳤다. 제목과 작곡 시기 등을 고려하면, 관현악곡 <낙동강의 시>와 영화 < 낙동강 >의 관련성을 의심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낙동강의 시>가 초연되던 2018년 당시에는 영화 필름이 유실된 상태였으며, 인터넷 검색으로 접근 가능했던 주변 정보에는 영화 음악을 담당한 사람이 김동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낙동강의 시> 세계초연을 앞두고 쓴 프로그램 노트에서, 글쓴이는 영화 <낙동강>과 교향시 <낙동강의 시> 사이에 간접적인 관련성 정도가 의심된다고 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의혹을 남겼다. "1악장은 웅장한 팡파르로 시작하고, 핵심이 되는 4도 상행 음형이 악곡 전체의 씨앗이 됨으로써 작품을 지탱하는 형식적 일관성을 확보한다. 이 팡파르와 그에 이어지는 선율 사이의 급격한 텍스처 대비는 마치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에서 실제 영화로 이어지는 장면전환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이 과연 영화 <낙동강>과 무관한지 의심해볼 만한 대목이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유실된 영화 필름을 발굴함으로써, 이제 기존의 잘못된 정보를 다음과 같이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 오해 ①: 영화 <낙동강>의 음악을 맡은 사람은 김동진이다. ☞ 진실: 영화 크레딧에 김동진 이름이 없으며 '음악·작곡: 윤이상'이라고 되어 있다. • 오해 ②: 영화 <낙동강>에 나오는 윤이상 작곡 <낙동강>은 오늘날 알려진 <낙동강>과 다른 곡이다. ☞ 진실: 영화 <낙동강>에는 오늘날 알려진 곡과 동일한 윤이상의 <낙동강>이 사용되었다. • 오해 ③: 윤이상이 <낙동강> 제목으로 쓴 노래는 두 곡이며, 윤이상의 또다른 <낙동강>은 '경남도민의 노래'처럼 불렸다. ☞ 진실: '경남도민의 노래'처럼 불렸던 노래는 윤이상 곡이 아닌 박태현 곡이다. • 오해 ④: 영화 <낙동강>과 윤이상 교향시 <낙동강의 시> 사이에는 간접적인 관련성 정도가 의심된다. ☞ 진실: 영화 <낙동강>에 사용된 음악은 윤이상 교향시 <낙동강의 시>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확인된다. 영화의 도입부와 교향시의 도입부 영화 <낙동강>은 트럼펫 팡파르로 시작하며, 그 주제선율은 윤이상 교향시 <낙동강의 시>의 1악장 도입부 주제와 사실상 동일하다. 4도 상행 음정을 핵심으로 하는 팡파르 주제는 영화 곳곳에서 변형·반복되며 국면 전환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팡파르와 함께 화면에 나오는 짧은 시는 이은상 시 <낙동강>의 3연 구조와 호응한다. (윤이상 <낙동강의 시> 1악장 팡파르 주제) 낙동강 / 흐르고 흘러서 / 쉬임 없는 낙동강 겨레의 전통을! / 겨레의 승리를! / 겨레의 희망을! 한줄기 물결에 / 담아싣고 / 오늘도 / 낙독강은[sic] 흘러간다 팡파르에 이어서 윤이상 작곡 <낙동강>이 합창으로 나온다. 이때 화면으로는 무용수의 춤, 강변의 풍경 등과 더불어 '구상 양성봉, 원작 이은상, 음악·작곡 윤이상' 등의 크레딧이 나온다. 이은상 시 <낙동강>은 ① 전통의 낙동강 ② 승리의 낙동강 ③ 희망의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3연 구조로 되어 있고, 영화 <낙동강>의 플롯 구조는 이은상 원작시와 호응한다. 윤이상의 <낙동강>은 이은상 시 <낙동강>을 가사로 하며, 3절까지 이어지는 노래가 영화 도입부에 모두 나옴으로써 이은상 시 전체를 노래하는 동시에 영화 전체 내용을 개괄한다. 이것은 오페라에서 서곡(overture)이 오페라 전체 내용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것과 비슷하다. (윤이상 <낙동강의 시> 2악장 오보에 주제) 영화 <낙동강> 제1절: 전통의 낙동강 보아라 신라 가야 빛나는 역사 흐르듯 담겨있는 기나긴 강물 잊지마라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이 강물 네 혈관에 피가 된줄을 오 낙동강 오 낙동강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 윤이상 곡 <낙동강>이 3절까지 끝나면, 음산한 현악 트레몰로 음형과 더불어 구슬픈 오보에 독주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 오보에 주제와 현악 음형은 윤이상 교향시 <낙동강의 시> 2악장 주제와 사실상 동일하다. 강변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과 더불어 '낙동학원' 현판이 보인다. 남녀 주연인 박일령(이택균 분)과 백옥남(최지애 분)이 등장하고, 옥남이 낙동학원 홍보물로 짐작되는 전단지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이때 어린이들이 배를 타고 노래하는 모습을 일남이 지켜보는 장면이 지나가듯 나온다. 노래는 이은상 시 <낙동강>을 가사로 하며, 1절 전체와 2절 일부가 영화에 나온다. 작곡자는 알 수 없다. 박일령이 낙동학원에 모인 마을 사람들에게 낙동강의 문명사적·문화사적 의미에 관해 강의한다. 수업이 시작되면서 영화는 다큐멘터리처럼 변하며, 관객은 마을사람의 일부가 되어 수업을 듣게 된다. 이때 <영산회상(靈山會相)>을 비롯한 한국 전통음악이 배경으로 나온다. 영화 <낙동강> 제2절: 승리의 낙동강 산 돌아 들을 누벼 일천 삼백리 구비 구비 여흘 여흘 이 강 위에서 조국을 구하려는 정의의 칼로 반역의 무리들을 무찔렀나니 오 낙동강 오 낙동강 소리치며 흐르는 승리의 낙동강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하고, 실제 전쟁을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일령과 옥남이 마을 사람들 앞에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발언을 하고, 마을 사람들이 식량과 귀중품을 땅에 묻어두고 피난을 떠난다. 피난 장면과 함께 비통한 합창곡이 흐른다. 이 곡의 음 소재와 영화의 다른 곳에서 사용된 관현악 음형이 유사성을 띄는 것으로 보아 이 합창곡은 윤이상이 영화를 위해 작곡한 것으로 짐작된다. (가사는 '낙동강'으로 시작하는데, 글쓴이는 그 이상의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령이 옥남에게 입대 결심을 밝히는 듯한 장면과 더불어 이은상 시 <꽃다발>이 자막으로 나온다. "조국을 구하려고 뛰쳐나선 그대앞에 / 황금을 바치리가 진주를 바치리가 / 값주고 못살 꽃다발 한아람을 바칩니다." 일령이 배를 타고 마을을 떠나고, 마을 사람이 태극기를 흔들며 일령을 환송한다. 옥남은 높은 곳에 올라가 마지막까지 일령이 탄 배를 지켜본다. 일령의 입대를 기점으로 전황은 반전된다. 영화 <낙동강> 제3절: 희망의 낙동강 두 언덕 고을 고을 정든 내 고장 불타고 다 깨어진 쓸쓸한 폐허 돋아 오는 아침 햇빛 가슴에 안고 나가라 네 힘으로 다시 세우라 오 낙동강 오 낙동강 늠실늠실 흐르는 희망의 낙동강 군복을 입은 일령이 아내 옥남에게 돌아온다. 옥남이 묘비를 세운 '장송의 무덤' 앞에서 일령이 묵념한다. 마을 곳곳에, 나룻배에, 아이들의 손에 태극기가 휘날린다.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연다. 아이들이 박태현 작곡 <낙동강> 중 1절을 부른다. 사람들이 마을을 재건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오고, 일령과 옥남이 함께 강물을 바라본다. 윤이상 작곡 <낙동강> 중 3절이 흐르는 가운데 영화가 끝난다. 윤이상의 '영화 주제가' <낙동강>과 교향시 <낙동강의 시> 영화 <낙동강>은 1951년에 제작이 시작되어 1952년에 발표되었고, 음악학자 김용환에 따르면 윤이상이 <낙동강> 노래를 작곡한 것 또한 1952년이다. 또 영화 개봉 당시의 기억에 관한 진의장 전 통영시장의 증언에 따르면, 윤이상이 작곡한 <낙동강>이 영화에 삽입된 사실은 그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진의장은 박태현이 작곡한 <낙동강>을 윤이상 곡으로 오해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윤이상의 노래가 영화 개봉 당시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윤이상은 처음부터 영화에 삽입할 목적으로 <낙동강>을 작곡했을 가능성이 있다. (좌측 박태현의 <낙동강>, 우측 윤이상의 <낙동강>)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추측하자면, 처음에는 김동진이 영화음악을 맡기로 했다가 영화 제작 도중에 윤이상이 맡는 것으로 바뀌었을 수 있다[김동진은 양명문 시에 곡을 붙인 <낙동강>을 1951년에 남긴 바 있으나 영화 <낙동강>과는 관련이 없다]. 또 영화음악에 관한 전권이 윤이상에게 있었을 것 같지는 않으며, 영화 곳곳에 삽입된 음악의 완성도가 고르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을 수 있다. 그래서 윤이상은 영화음악을 작곡한 이후 그 일부를 따와서 관현악곡 <낙동강의 시>를 별도로 작곡하겠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낙동강의 시> 자필악보의 목차는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黃昏(황혼)이 물들 때, 3악장 嘉俳節(가배절; 한가위), 4악장 갈대밭, 5악장 豐年歌(풍년가), 6악장 에필로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완성된 작품은 3악장 짜임새로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洛東江(낙동강)의 저녁, 3악장 舞曲(춤곡)으로 되어 있다. <낙동강의 시>는 1·2악장과 3악장 사이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3악장은 윤이상이 유학을 떠난 이후에 작곡한 것이며, 어쩌면 윤이상이 6악장 구성을 3악장 구성으로 바꾼 것 또한 이와 관련 있을 수 있다. 윤이상이 이은상 시의 3연 구조 또는 영화의 세도막 구조를 의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악곡의 음악적 서사 구조는 영화 또는 이은상 시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윤이상은 파리 시절 아내 이수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때때로 배움에 대한 조급함을 드러냈으며, <낙동강의 시>에 관해서는 "너무 통속성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자신 없는 태도를 보였다. 음악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여기서 '통속성'이란 영어 'conventional'에 대응하는 말로 유럽의 최신 아방가르드 음악이 아니라 전통적인 기능화성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윤이상은 오늘날 서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 현대음악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낙동강의 시>는 현대음악 작곡가 윤이상이 서구적 의미에서 전통적인(conventional) 음악 어법으로 작곡한 마지막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작곡가 생전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윤이상은 3악장에 나오는 민요풍 선율을 훗날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에 사용한 바 있다. 백기완의 시를 사용한 해당 부분의 가사는 "북을 쳐라, 새벽이 온다." 등이다. 참고문헌 김용환, "윤이상: 그의 삶과 음악." 『음악과 민족』 (부산: 민족음악학회, 1996), 제11권 0호, pp.11-48. 김원철, "윤이상: 낙동강의 시(詩)." 『Returning Home (2018 통영국제음악제 프로그램북)』 (통영: 통영국제음악재단, 2018), p.122. 노동은, "새로 발굴한 윤이상의 50 년대 글과 노래." 『민족음악의 이해』 (부산: 민족음악학회, 1994), 제3권 0호, pp.325-341. 박태현, "낙동강." 『한국애창가곡 88』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3), pp.90-91. 윤이상, Poems of the Nak-tong River. 미출판 자필 악보. 윤이상, "아내 이수자에게 보낸 편지." 1956년 11월 30일. 이용민, "영화 <낙동강> 개봉 당시의 기억에 관한 진의장 전 통영시장 인터뷰." 2018년 2월 경. 이용민, "박태현 작곡 <낙동강>에 관한 진의장 전 통영시장 인터뷰: 영화에 삽입된 음원을 듣고 한때 '경남 도민의 노래'처럼 불렸던 노래가 맞다고 증언." 2022년 8월 4일.
홍은원 (洪恩遠)은 영화계에서 그 본명과 예명 홍설아(洪雪娥)·홍진아(洪眞娥)만큼이나 여러 일에 종사했다. 그는 스크립터로 출발해 조감독을 거쳐 시나리오작가, 작사가, 감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능을 보인 충무로의 정통파였다. 두 예명에 예쁠 아(娥)자를 넣을 만큼 그는 눈처럼 아름답고 참되게 살려고 했던 것일까. 실제로 스튜디오에선 언니로 통할 만큼 영화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1950년대 중후반 그는 전창근 , 유두연 감독과 허백년 평론가 등 영화인들이 즐겨 찾던 명동 나일구 다방에 자주 나타났다. 명동에는 이 다방과 함께 김승호 , 김동원 , 장민호 와 같은 배우들이 드나든 동방살롱 등이 있었다.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에서 명동 방향 골목에 있던 예술인들의 찻집이었다. 충무로에 스타다방, 청맥다방과 같은 영화인들의 휴식 공간이 미처 생기기 전이었다. 아침에는 으레 날계란을 띄운 모닝커피가 나왔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이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창근 감독 일행과 한자리에 있던 한 여성이 담소 중에 크게 웃었다. 누군가가 야한 농담을 한 모양이었다. 궁금해서 돌아보니 바로 홍은원 씨였다. 작고 가냘픈 몸매였지만 베레모를 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정작 그와 알고 지내게 된 것은 훨씬 뒤였다. 자주 마주치다 보니 은연중에 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직접 만나고 보니 활달하고 정이 깊은 분이었다. 그의 두 번째 감독 작품 < 홀어머니 > (1964)가 개봉된 시기였다. <오해가 남긴 것> 촬영현장 홍은원은 명문가 출신이다. 구한말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홍철주(洪澈周)의 손녀로, 1922년 9월 24일 은행가인 홍우만(洪佑晩)의 2남2녀 중 둘째 딸로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교육자인 어머니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서울 재동국민학교를 거쳐 경기고녀(경기고등여학교, 現 경기여고)에 입학한 뒤에는 학과보다 오히려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광복 전 경기고녀를 졸업했으나 집안 형편이 나빠지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들어가게 된 것이 마루젠(丸善)주식회사였다. 다행히 서적부 소속이라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1년 3개월을 보내고 아버지를 따라 만주 신경(新京)의 반관반민의 직장으로 옮겼다. 1940년 초여름이었다. 그는 새 직장에서 합창단원으로 뽑히고 다시 1년 만에 신경음악단의 홍일점 가수가 된다. 그때 받은 월급이 120원, 웬만한 봉급자의 갑절이 넘는 고액이었다. 조선영화사에서 음악을 담당한 친지를 졸라 최인규 감독을 소개받은 것은 여름휴가를 얻고 경성(서울)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최 감독은 그에게 < 태양의 아이들 >이라는 시나리오를 건네주며 하고 싶은 역할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연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8·15 광복을 맞아 서울에 돌아온 것은 1946년 11월 초순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박계주 작가 일행을 따라 돈암동 최인규 감독 집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는 < 자유만세 >의 주인공인 전창근, 황려희 와 감독을 꿈꾸는 박남 옥도 와 있었다. 최 감독은 그에게 다음 작품인 < 죄 없는 죄인 >(1947)의 스크립터 일을 제의했다. 이때 그가 촬영 현장에서 터득한 것이 영화제작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홍은원은 이 일이 끝나자 다섯 살 아래인 극작가 이용찬과 결혼했다. 그러나 양가 부모의 반대 속에 이루어진 부부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딸(이희재 숙명여대 교수, 박물관장 역임)을 낳고 4년 8개월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여판사> 촬영현장 1953년 초가을 그는 전쟁이 할퀴고 간 서울의 한 모퉁이에서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촬영기사 한형모 였다. 그는 결혼에 실패한 후배를 위로하며 영화로 보람을 찾으라고 권유했다. 이에 힘입어 조정호 감독의 < 여군 >에 조감독 겸 스크립터로 들어가 현장 감각을 익히고, 잇따라 전창근 감독의 < 불사조의 언덕 >(1955), < 단종애사 >(1956)와 이강천 감독의 < 백치 아다다 >(1956), < 사랑 >(1957)의 스크립터 겸 조감독 일을 했다. 특히 “초여름 산들바람 고운 볼에 스칠 때/ 검은 머리 큰 비녀에 다홍치마 어여뻐라”로 시작되는 그의 작사곡 ‘백치 아다다’(김동진 작곡)는 여주인공인 가수 나애심이 불러 크게 히트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홍은원은 그사이 시나리오에도 손을 댔다. 신경균 감독의 < 유정무정 >(1959)과 유두연 감독의 < 젊은 설계도 >(1960) 등이 대표적인 예다. 영화계에 들어선 지 11년 만이다. 이후 시나리오작가 유두연 의 콘티뉴이티 담당 수석 조감독으로 들어가 그의 감독 데뷔작 < 조춘(早春) >(1959)과 < 사랑의 십자가 >(1959)를 완성시키고 윤봉춘 감독의 < 여인천하 >(1962), < 애정삼백년 >(1962) 등에 참여하며 시대물을 익혔다. 그에게 메가폰을 잡을 기회가 온 것은 이 무렵이다. 1962년 4월 <사랑의 십자가>를 찍은 장환(張煥) 기사가 원고 한 뭉치를 들고 찾아온 것이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어느 여판사의 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 여판사 >(1962, 명보극장 개봉)였다. 뜻밖에 화폐개혁이 단행되는 악조건 속에서 어렵게 완성한 문정숙 주연의 <여판사>는 “여감독다운 섬세한 플롯의 전개에 명확한 커팅은 몇 사람의 중견감독을 조감독으로서 오히려 길러낸 숨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새영화 ‘여판사’, 「경향신문」)는 호평을 받았다. 이어 조미령 주연의 < 홀어머니 > (1964, 아세아극장)와 김지미 주연의 < 오해가 남긴 것 >(1965)을 만들었다. 그런데 세 작품 이후 그에게 좀처럼 연출의 기회가 오지 않았다. “홍은원은 환갑이 지나도 다람쥐처럼 영화계를 누비고 다닐 것”이라던 유두연의 예상과 달리 그는 스스로 표현했듯 “환갑은커녕 50세도 못 돼서”(여류감독의 비애, 「세대」 1976년 1월호) 영화 현장에서 물러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앓다가 1999년 1월 5일 세브란스병원에서 76세의 생애를 마쳤다. 37년 전인 1981년 늦은 봄, 첫 여감독과 함께 셋이 커피를 마시며 추억의 영화를 얘기하던 서울 서대문 근처의 다방 정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김영희 편집기사와 홍은원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