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철길
- 감독
- 김래원
- 제작년도
- 2013
- 출연
- 기주봉, 김경민
타인의 사랑을 비웃지 마라, < 가장 보통의 연애 >( 김한결 , 2019) 2010년대 한국 영화는 많은 자본이 투입된 시대극이나 범죄 영화 등의 상업 영화에 치중하면서 코미디나 멜로드라마 같은 소소한 재미를 주는 장르는 점점 힘을 잃었다. 특히 TV에서 흔히 즐기는 로맨틱 코미디를 스크린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돌이켜 보면 200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를 필두로 젊은 여성의 일과 사랑을 주제로 한 칙릿 영화 열풍이 불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인턴>(2015) 같은 여성 서사 영화들이 호응을 얻은 상황에서 국내에선 과거와 달리 보다 현실적인 연애에 기반한 로맨스 영화들이 기획되었다. 톡톡 튀는 대사와 입심이 재미를 주는 스크루볼 코미디처럼 수다가 늘어났지만, 세련되고 지적이라기 보다는 남녀의 반복되는 다툼, 질투, 이별 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 러브픽션 >(2011)은 사랑하는 그녀의 겨털(취향!)과 과거사를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충고했고, < 연애의 온도 >(2013)는 서로를 아프게 상처내는 연인이 이성을 잃고 치고받도록 내버려두었다. 이 영화들은 "다신 안 그럴게!", "나, 사랑하긴 해?" 같은 대사로 가득 차 있었다. 즉 누구나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여러 번 내뱉은 말이다. 물론 이런 일상적인 대사는 관객과 쉽게 교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헤어지자!"라는 대사와 생채기가 난무한 가운데 남성의 이기심과 욕망이 느닷없이 심판대에 올랐다는 데 있다. < 봄날은 간다 >(2001), < 클래식 >(2003) 같은 2000년대 영화들이 순둥이 남성의 순애보에 방점을 찍은 것을 떠올린다면 분명 급격한 변화였다. 이제 진흙탕 로맨틱 코미디는 남성 캐릭터의 감추고 싶은 민낯(무책임감과 찌질함)이 모조리 드러나는 무대가 된 것이다. 남성용 면죄부는 소멸하고 그들의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멜로드라마 < 건축학 개론 >(2012)이 첫사랑의 판타지를 극대화하고 남성의 욕망에 충실히 부합(심지어 과거의 첫사랑 여인을 현실에 소환해 사랑 고백을 들으며 판타지를 완성)했던 것과 다른 노선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남녀가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다시 만나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가장 보통의 연애>(2019) 역시 흔하디 흔한 로맨틱 코미디다. 새로운 회사의 출근 첫날, 직장까지 찾아온 남친과 헤어지려고 싸우는 선영( 공효진 )과 파혼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매일 술을 찾는 재훈( 김래원 )의 직장 연애담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쉽게 요약하면 "같이 한잔 할래?"로 시작해 취중진담, 두주불사, 설왕설래로 발전한다. 그들이 안내하는 술자리에서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술 권장 영화지만 다소 성급하게 저평가받는 것과 달리 의외로 급진적인 면모가 있다. 사랑과 성공에 대한 판타지나 위로를 내세우는 대신 상처뿐인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기 때문이다. 2010년대 한국 영화는 잊힌 과거를 다시 복기하는 문제작을 많이 내놓았지만, '지금, 여기'라고 칭할 수 있는 현재의 문제를 담으려는 기획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 82년생 김지영 >(2019)이라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업 영화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접근한다면 보통의 연애 속에서 ‘가장 보통의 현실’을 찾을 수 있다. 이 영화가 담아낸 직장 에피소드(뒷담화 문화)나 남녀 사랑법은 현실의 지표일 수밖에 없다. 세간의 부당한 평가와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선영을 통해 남성 중심적인 한국 사회의 단면이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은 피해 등을 부수적으로 고발한다. "남자랑 여자랑 같냐?"라는 말하는 재훈에게 "같지!"라고 외치는 선영의 말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 코미디로 가볍게 풀어냈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일상 속에 얼마나 스며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들이 스산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여전히 주목하게 만드는 것은 남성 캐릭터다. 재훈은 <러브픽션>의 주월( 하정우 )과 <연애의 온도>의 동희( 이민기 )가 보여준 찌질함과 무모함에 비해 한 단계 성숙한 인물이다. 선영과 재훈, 두 사람은 또래지만 사랑의 가치를 믿는 재훈이 사랑의 환상을 믿지 않는 선영에 비해 훨씬 보수적으로 비춰진다. 언뜻 마초(속칭 '꼰대')처럼 보이지만, 재훈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포장 없이 밝히는 솔직함을 지녔다. 강하면서도 나약한 모습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남자. 그의 이상과 욕망은 현실에서 무참히 배반당하지만 그렇게 무너지면서 스스로 자신의 환상에서 벗어난다. 엔딩에서 선영과의 재회는 로맨틱 코미디의 예정된 컨벤션이지만, 그는 섣불리 사랑이라는 단어를 동원하기 보다는 "보고 싶었어"라고 고백하는 그녀의 입술을 읽어낸다. 이 순간 술자리에서의 게임이 ‘사랑의 게임’으로 이어지고 연장된다. 모든 게임은 동등한 파트너가 필요한 법이고, 그 룰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연애의 시작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이제야 남성은 자신의 거울인 여성을 통해 욕망과 대면한 것일까?). 시시껄렁한 농담과 반복되는 투정, 술에 의존하는 밀당이 자유롭게 성행하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다. 무모하게 사랑을 갈망하고 실험하는 스크린의 연애 생태계는 우리의 현실과 일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놀랍게도 우리가 감추고, 잊고 싶어하는 기억과 추억들을 다시 살려내고 있다. 그 남자, 그 여자가 일으키는 사건사고가 그리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나, 자신의 사랑을 돌이켜보게 만드는 ‘로맨틱 정글’로의 초대는 아찔하지만 언제든지 환영이다.(*)
2004년 | 컬쳐캡미디어 감독: 김호준 | 각본: 유순일 | 각색: 조중훈 김요석 | 제작: 최순식 | 촬영: 서정민 | 미술: 윤도환 | 음악: 히드라 CAST 박상민: 김래원 | 서보은: 문근영 | 보은 조부: 김인문 | 상민 부: 한진희 | 상민 모: 김혜옥 | 보은 부: 송기윤 | 보은 모: 선우은숙 | 혜원: 신세경 | 동구: 류덕환 2004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은 무엇이었을까요? < 실미도 >( 강우석 , 2003)에 이은 두 번째 ‘천만 영화’ < 태극기 휘날리며 >( 강제규 , 2004)였습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1위였죠. 당시 충무로가 만들 수 있는, 아니 당시 충무로의 수준을 뛰어넘는 대단한 작품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2위는 어떤 영화였을까요? 놀랍게도 < 어린 신부 >였습니다. 비수기인 4월 초에 개봉한 이 영화는 전국 관객 315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권상우 를 스타덤에 올린 < 말죽거리 잔혹사 >( 유하 , 2004), 정우성 손예진 의 < 내 머리 속의 지우개 >( 이재한 , 2004),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 < 범죄의 재구성 >(2004), 류승완 감독의 액션 판타지 < 아라한 장풍 대작전 >(2004), 원빈 신하균 의 < 우리 형 >( 안권태 , 2004), 강동원 조한선 의 < 늑대의 유혹 >( 김태균 , 2004)... 이 모든 영화들을 <어린 신부>가 제쳤고, 당시 대한민국은 ‘국민 여동생’ 문근영 신드롬으로 들끓었습니다. <어린 신부>는 24살 대학생 상민과 16살 여고생 보은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보은의 할아버지는 꾀병을 부려, 죽기 전에 보은이 상민과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하죠. 그렇게 ‘어린 신부’는 탄생합니다. 촬영 공개는 바로 그 결혼식 신이었습니다. 촬영이 공개된 날은 2003년 12월 17일이었습니다. 청담동에 있는 어느 결혼식장이었는데요, 날씨가 엄청 추웠습니다. 배우들은 촬영이 없을 땐 추위를 막기 위해 두꺼운 옷을 입어야 했죠. \ 현장에서 짬이 날 때 전화 통화를 하는 문근영의 모습입니다. 당시 문근영은 실제로 극중 나이와 같은 16세였고, <어린 신부>의 리얼리티는 배우와 캐릭터의 연령대 일치에서 생겨난 셈입니다. 김래원도 캐릭터와 같은 연령대였고요. 문근영이 주로 부각되었지만, <어린 신부>가 성공할 수 있었던 토대엔 분명 김래원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있습니다. 당시 TV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로 승승장구 하던 김래원은 <어린 신부>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남자 주인공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게 되죠. 신부 입장을 기다리는 문근영의 모습입니다. 영화 속에서 하객들이 “예쁘다, 정말 예쁘다”라며 감탄하던 그 장면이죠. 당시 문근영은 TV에서 영화로 옮겨 오면서 < 장화, 홍련 >( 김지운 , 2003)으로 영화배우로서 자리를 굳히던 시절이죠. 그리고 <어린 신부>가 이어집니다. 사실 <장화, 홍련>의 수연과 <어린 신부>의 보은은, 극과 극의 감정을 필요로 하는 캐릭터죠. 1년 사이에 그 극단을 오가는 건 10대 중반의 배우에겐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문근영은…… 그 어려운 걸 해냅니다. 이 영화의 모든 사건은 바로 보은의 할아버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인문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특유의 구수하면서도 정다운 연기가 이 영화에서도 관객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죠. 이 영화에서 양가 부모 캐릭터는, 주로 TV에서 활동하시는 중견 연기자들이 맡았습니다. 상민의 아버지는 한진희 씨, 어머니는 김혜옥 씨가 맡았습니다. 곧 있으면 신혼 여행을 떠날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충고를 하지만, 아들은 듣는 둥 마는 둥이네요. 보은의 엄마 역은 선우은숙 씨가 맡았습니다. 아직 어린 딸이 안쓰럽기만 한 표정입니다. 대신 상민의 엄마는 며느리가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어린 신부>는 김호준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일본에서 영화를 전공한 김 감독은 1990년대 초부터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했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 축제 >(1996), 이정국 감독의 < 편지 >(1997) 등을 거쳐 10여 년의 도제 시스템 끝에 자신의 첫 영화를 만들게 되었죠. 한편 카메라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서정민 촬영감독이 잡았습니다. 지난 번 < 몽정기 >( 정초신 , 20002) 포스팅 에서 자세히 설명 드렸던, 바로 그 분입니다. 촬영 당시 70세셨고, 2015년에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영화 속에서 결혼식은 보은의 수학여행 날에 치러집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보은의 결혼 사실을 모르죠. 단, ‘베프’인 혜원은 예외였는데요, 당시 14세였던 신세경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문근영보다 어린 유일한 배우? 당시 두 사람은 같은 소속사(나무 액터스)였는데요, 지금도 그곳에 함께 있네요. 상민의 선배인 지수 역은 김보경 이 맡았습니다. < 친구 >( 곽경택 , 2001)의 진숙 역으로 떠오른 그녀는 이 영화에 특별 출연을 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양가 부모가 딸과 아들을, 며느리와 사위를, 배웅합니다. 보은 아빠 역은 탤런트 송기윤 씨가 맡았습니다. 선우은숙 씨 옆에 보은의 동생 동구 역을 맡은 류덕환이 보이네요. 실제로는 문근영보다 한 살 많은 오빠지만 영화에선 동생으로 등장했습니다. 아담한 웨딩 카. 그리고 그 안의 신혼 부부입니다. 실제 촬영 때는 아니고 차 안에서 대기하는 모습입니다. 결혼식 신에 대해, 김래원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거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신”이라고 말합니다. 한편 문근영은 “어떤 마음으로 연기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편하게 촬영한 신”이라고 말합니다. 호기심 많은 성격인 보은이 ‘결혼 그 자체’만 생각하고 있다는 설정이었다고 하네요.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2000년은 한국 슬래셔 영화계의 원년이었다. 갑작스레 한국형 슬래셔 영화 네댓 편이 동시다발적으로 개봉을 했다. 대체 왜? 그게 다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 탓이다. 덕이 아니다. 탓이다. 다 내 탓이오 고등학생들의 살인을 다룬다는 이유로 수입이 금지됐던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1996)은 1999년 뒤늦게 개봉했다. 슬래셔 영화는 장사가 안 된다는 시장의 법칙에도 불구하고 이 끝내주는 메타-호러영화는 서울에서만 36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같은 해 개봉한 < 스크림 2 >역시 서울 관객 17만을 동원했다. 1999년으로서는 꽤 괜찮은 성적이었다. 두 영화의 성공을 보며 충무로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뻔하지 않은가? 그즈음 충무로 제작자들이 입봉 준비 중인 신인감독들을 커피숍에서 앉혀놓고 했을 법한 대화를 한번 상상해보시라. “어이 김 감독, 요즘 시나리오 하나 쓰고 있다고?” “네. 대표님. 끝나면 보여드리겠습니다. 고다르적인 영화적 개념을 상업적으로 한번 풀어보려고….” “에이 그걸로 언제 입봉하려고? 마흔 돼서? 그러지 말고 공포영화부터 하나 만들어서 돈부터 번 다음에 김 감독 하고 싶은 거 해” “공포….영화요? 저 공포영화 무서워서 못 보는데…” “에이. 포르노는 뭐 섹스 잘하는 놈만 만드나? 그 뭐더라 ‘ 스크림 ’인가 그거 봤어? 그거 비슷하게 하나 만들면 무조건 되는 거야. 이거 잘 되면 내가 김 감독 지금 쓰는 걸로 꼭 영화 만들어줌세”. 오오 통제라. 2000년을 수놓은 슬래셔 영화들 여하튼, 2000년 여름에 개봉한 한국형 슬래셔 영화는 < 가위 >, < 찍히면 죽는다 >, < 해변으로 가다 >와 < 하피 >다. 이 중 성공한 건 안병기 라는 장인의 대표작인 <가위> 하나뿐이다(서울 관객이 30만이 넘었다). <해변으로 가다>는 할리우드 슬래셔 영화의 가장 심심하고 슴슴한 오마주로 남았다. <찍히면 죽는다>의 부제는 ‘또 찍으면 죽는다’로 공식화하는 게 마땅하다. 그렇다면 <하피>? 이게 좀 문제다. 다들 이 영화를 < 맨데이트: 신이 주신 임무 >(2008)와 함께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졸작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 영화에 관한 거의 유일한 리뷰라고 할 수 있을 네이버 독자 리뷰 하나는 “나중에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원본 필름을 없애야 합니다”라고 절규하며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런 리뷰도 영화를 본 적이나 있어야 쓸 일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당신은 < 하피 >라는 영화를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보기는 쉽지 않을 거다. DVD를 출시할 만큼 배짱 있는 제작사도 없고, 무엇보다도 주연인 김래원 과 이정현 이 DVD의 출시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게 어떤 영화냐고? 수연, 현우, 예림 내용은 아주 간결하다. 전반부에서는 모범생 수연( 이정현 )과 불량소녀 예림( 김꽃지 )이 양아치 현우( 김래원 )을 둘러싸고 연애질을 벌이다가, 중반부에서는 세 명이 주축을 이루는 영화동아리(대체 이딴 세 명이 왜 영화 동아리의 주축 인물인지는 미스터리미스 어쨌든….)가 단편공포영화를 만들러 외딴곳으로 가고, 후반부에서는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아마도 장르 영화광이었던 모양인 라호범 감독은 심지어 90년대의 가장 핫한 단체인 ‘대학 영화동아리’를 배경으로 설정한 뒤 일종의 메타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정말 못 만든 영화다. 하지만 못 만든 영화가 어디 한둘이던가. 못 만들었기로 말하자면야 같은 해 개봉한 < 찍히면 죽는다 >가 더 격렬하게 못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찍히면 죽는다>는 컬트가 되지 못하고 < 하피 >가 일종의 컬트가 된 이유는, 이 못 만든 영화를 못 만든 스태프들이 어떻게든 ‘일부러 못 만든 영화’처럼 보이려 편집실에서 행한 놀라운 투쟁 덕분이다. 아마도 스태프들은 < 스크림 >을 대충 흉내 내면 꽤 근사한 한국형 슬래셔 영화가 나올 거라 생각했을 거다. 막상 다 찍어놓고 보니 그렇지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당대의 성우 이선영 을 뒤늦게 섭외해서 내레이션을 깔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아 < 하피 > 내레이션의 오묘한 힘은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다. 현우( 김래원 )가 살인마의 목을 쇠사슬로 조르는 장면에서 “아저씨는 왜 저렇게 괴로워할까? 쇠사슬이 아니라 플라스틱 소품일 뿐인데”라고 이선영의 내레이션이 흐를 때, 2000년 여름의 극장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한번 떠올려 보시라. * 내레이션 컬렉션 * “잠깐, 이 영화의 모든 끔찍한 장면은 고등학교 영화 동아리가 제작하는 공포영화의 표현이므로 실제 살인과는 무관하다” “아이들은 나이트클럽이 콜라텍인 줄 알고 왔다. 아이들을 속이는 건 어른이다” “담배가 많이 등장하지만 이건 다 소품일 뿐이다” “이 줄은 사실 플라스틱이다. 따라서 임산부나 노약자가 놀랄 필요 없지만 이 여자의 연기를 흉내낼 필요도 없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잠깐, 이 영화의 모든 끔찍한 장면은 고등학교 영화 동아리가 제작하는 공포영화의 표현이므로 실제 살인과는 무관하다”는 내레이션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은 걸까. “아이들은 나이트클럽이 콜라텍인 줄 알고 왔다. 아이들을 속이는 건 어른이다”라는 내레이션은 공익광고에 대한 스태프들의 준엄한 농담인 걸까? “담배가 많이 등장하지만 이건 다 소품일 뿐이다”라는 내레이션은 추후 한국 TV에서의 방영을 염두에 둔 일종의 검열적 예언일까? 내레이션으로는 부족했던지 스태프들은 후반 작업에서 효과음으로도 농담을 시도한다. 단추가 떨어지면 엔진음이 나온다. 농구공이 골대를 맞으면 “띠오오옹”하는 만화 속 효과음이 나온다. 이거 내가 지어내서 쓰는 게 아니다. 정말로, < 하피 >에는 그런 내레이션과 효과음이 끝도 없이 나온다. 아마도 < 하피 >의 제작진은 편집실에서 첫 번째 편집을 하던 중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공멸하느니 차라리 웃기기라도 하자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라호범 감독은 이런 식의 메타장르영화적 농담이라도 넣으면 헛발질에 유독 열광하기 쉬운 극소수의 비평가와 장르광들이 상찬하고, 그 덕에 어찌어찌 다음 영화라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최종 편집실에 모인 스태프들의 가당치도 않은 모험은 결국 <하피>를 몇 안 되는 한국형 컬트영화 중 하나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김완주 전주시장. 노력했으나 영화 속 출연장면 찾지 못함. 사족으로, < 하피 >는 전주에서 촬영된 가장 최초의 영화 중 하나다. 당시 전북도민일보에는 전주시장의 첫 번째 영화 출연이라는 기사가 났다. 기사는 “김완주 전주시장은 문화영상산업의 도시, 전주를 알리기 위해 빅히트가 예고되는 영화 <하피>에 출연하게 됐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돼 “시장의 영화출연으로 이정현 양을 비롯한 유명영화 배우와 출연진 모두를 전주시의 홍보요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김 시장은 ‘테크노의 요정 이정현 양을 지도하는 체육교사’를 연기했다. 당시 전주 지역의 흥행 성적은 KMDb에 남아있지 않을 터인데, 전주시청 공무원 수만큼의 흥행 성적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누구든 테크노의 요정 이정현양을 만나면 나 대신 누가 좀 물어봐 주시길. 당시 <하피>의 시사회장에서 이정현과 김래원 을 비롯한 주연배우들이 영화가 너무 민망했던 나머지 도망가버렸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여전히 확인할 길이 없다. 이정현 김래원 김꽃지 감독: 라호범 각본: 권소연 개봉극장: 피카디리 등 관람인원: 26,59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