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x김무열x조은지 프로젝트
- 감독
- 정지우
- 제작년도
- 2012
문득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다가올 때가 있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낯설어져서 무서워질 수도 있고, 식상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색다르게 재배열 되는 과정이 신선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2020년 상반기 한국영화 중에 < 침입자 >(2019)를 마주한다는 건 단순히 텍스트를 분석하거나 장르적인 성취를 설명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스릴러에 기반을 둔 장르의 연장선에서 볼 때 <침입자>는 명백히 관객의 기대를 배신한다. 설정도 흥미롭고,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흥미로운 클리셰들이 꽤 많지만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후반부의 전개과정에서 개연성이 부족해 중반까지는 나름 긴장감을 유지해 가던 이야기가 후반부에 이르러 급격히 무너진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일정부분 동의 한다. <침입자>는 혼란스럽다. 마땅히 설명되어야 할 것들을 미뤄둔 채 모호하게 남겨져 방치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전반에 차곡차곡 쌓아나갔던 긴장감은 후반부 작위와 우연의 남발로 씻은 듯이 사라지고 끝내 엉뚱한 길로 접어든다는 인상을 남긴다. 장르영화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여러 방향에서 이야기 될 요소가 다분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침입자>를 실패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과잉과 오해의 서사 때문이다. 우선 과잉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이 영화는 잔가지가 지나치게 많다. 미스터리 장르로서의 긴장감, 가족의 의미와 익숙한 것들이 주는 공포,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 기억과 공간의 관계등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짧은 시간 안에 정리해내지 못했다. 좀 더 심도 있게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는 건 오해에 관한 부분이다. <침입자>의 콘셉트는 한 줄로 정리된다. ‘내 가족 안으로 낯선 존재가 침입해 들어와 나를 밀어낸다.’ 영화의 전반부는 홈 인베이젼 장르의 길을 충실하게 따른다. 안전해야 할 공간, 집과 가족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긴장과 공포가 피어난다. 철저히 서진( 김무열 )의 시점에서 쌓아나가는 서스펜스는 제법 효과적이다. 하지만 ‘유진이 친동생인가 아닌가’를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시키던 영화는 어떤 상황을 기점으로 ‘유진이 왜 이 집으로 들어왔나’로 질문 자체를 선회 한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오컬트의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이 터닝포인트가 상당히 급작스럽고 논리적인 공백들을 자아낸다는 점이다. 결정적으로 손원평 감독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거나 설득시키는데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침입자>가 확실히 성취해내는 건 모호한 불안감의 확산이다. 한국사회의 현재를 녹여낸 결과물로서 이 영화는 믿음이 사라진 시대의 불안을 투영한다. 기억과 공간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믿음에 관한 상식들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침입자>는 익숙한 레퍼런스로 지은 집이다. < 오펀: 천사의 비밀 > < 요람을 흔드는 손 > 등 할리우드 홈 인베이젼 장르부터 < 유전 >, < 미드 소마 > 등 아리 에스터의 영화들, <어스>나 < 겟 아웃 >을 연상시키는 전환과 설정, 심지어 < 하녀 >나 < 화차 >와 같은 사회계급 속 여성의 위치를 그린 영화까지 찾고자 하면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조합의 결과물은 사뭇 낯설다. 보는 관점에 따라선 레퍼런스를 제대로 녹여내지도, 정리하지도 못한 연출력의 부재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낯설고 어색하고 당황스럽기까지 한 전후반의 전환이, 과장해서 말하자면 관객을 농락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철저히 무너지는 내러티브가 곧 <침입자>가 전하고 싶었던 감각 또는 목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익숙한 것들을 차용하고 뒤섞어 잘 이끌고 가다가 별안간 쌓아올리던 구성을, 비유하자면 레퍼런스라는 집을 송두리째 부숴버리는 것이다. 인물들이, 이야기가, 그리고 장르라는 패턴이 믿었던 것들을 해체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마도 감독은 믿음과 진실이 사라진 시대 자체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전체 이야기 구조로 환원시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침입자>는 진실을, 혹은 진실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정보들을 설명하고 나선, 정작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거나 사실로 믿을 수 있게 증명하지 않는다. 진실과 사실의 경계마저 희미해져가는 혼란 혹은 불안. 이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이 여기에 있고,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도 여기에 있다. 때로 어떤 영화들은 어떻게 파헤치고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스스로도 몰랐던 비밀을 들려주기도 한다. <침입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의 반응 혹은 부조화가 흥미로운, 문제적 영화다. 우리는 이 영화를 좀 더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한국영화가 발명한 장르가 있다. 바로 ‘ 마동석 이라는 장르’다. 배우에게 일반적으로 ‘변신’이 미덕으로 여겨진다면, 마동석은 그 반대편에서 범죄 스릴리라는 장르 안에 자신만의 둥지를 틀고 있다. < 악인전 >( 이원태 , 2019)는 그 정점이다. 클리셰로 구성된 장르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마동석은 자신이 구축해왔던 나름의 영역을 완성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악인전>은 두 겹의 텍스트다. 표면적으로 <악인전>은 조폭 두목과 미친 형사와 연쇄살인마라는, 범죄 장르에서 지겹게 반복되었던 캐릭터를 한 데 모아 새롭게 재조합한 영화다. 여기서 마동석은 또 하나의 겹을 만든다. 그는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면서 ‘마동석 영화’의 본색을 보여준다. 마동석은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기를 거부하는, 스스로 페르소나를 만들어가는 배우다. 그가 맡은 캐릭터들은 모두 마동석의 분신이자 배우 자체처럼 여겨지는데, 이런 위력은 한 명의 배우가 장르와 동의어가 되는 원동력이다. 세 악인의 팽팽한 대결처럼 보이지만, <악인전>의 중심은 마동석이 맡은 캐릭터인 장동수다. 여기서 ‘마동석 영화’의 첫 번째 법칙. 마동석은 언제나 ‘룰’(rule)을 만드는 사람이다. 응징이든 복수든 정의 구현이든, 그는 언제나 자신이 원칙을 만들고 그 안에서 움직인다. <악인전>에서도 이 영화에서 ‘게임의 법칙’을 만드는 사람은 장동수다.(“먼저 잡는 사람이 갖는 거지”) 이 과정에서 그는 형사 정태석( 김무열 )과 상의 같은 건 하지 않으며(“우리 애들 쓰고, 진행비도 내가 내. 정보 공유하고”), 현실의 법 따위엔 관심 없다.(“법으로 못하는 일 하는 게 우리 일이니까”) 그리고 최후의 응징자가 된다.(“사내 셋이 목숨 걸고 게임을 했는데 끝을 봐야지”) 여기서 장동수의 포지션은 흥미롭다. 법을 만들지만 그는 법 밖에 있는 사람(조폭)이다. < 범죄도시 >( 강윤성 , 2017)의 마석도처럼 형사일 때도 있지만(그럴 때조차도 그는 법을 따르지 않지만), 마동석의 캐릭터는 공권력을 부여 받지 않았음에도(범죄자인 경우에도) 법의 집행자가 된다. 그는 평범한 승객(부산행), 수산물 가게 주인(성난 황소), 체육 교사(동네 사람들), 유도 도장 관장(원더풀 고스트)이면서 악당과 맞선다. 그는 한국영화에선 드문 일종의 자경단원 같은 역할을 반복하는데 그 상징적 시작은 카메오로 출연했던 < 베테랑 >( 류승완 , 2015)의 ‘아트박스 사장’이다. 화면에 그가 등장했을 때 관객들이 느꼈던 기대감, 즉 ‘완력을 이용한 즉각적 응징’은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지니는 가장 큰 장르적 매력이다. 압도적인 피지컬로 그 어떤 적도 제압할 것만 같은 파워의 소유자. 마동석은 그런 면에서 범죄 영화 장르의 슈퍼히어로 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마동석의 액션이 절대 판타지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개인적 동기가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악인전>에서 장동수가 강경호(김성규)를 잡으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 이남 최고의 조폭인 자신에게 칼을 꽂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개인적 복수는 연쇄살인마를 감옥에 가두는 결과로 이어진다. < 성난 황소 >( 김민호 , 2018)에서 아내를 구하는 과정에서 납치 조직을 소탕한다. < 부산행 >( 연상호 , 2016) < 동네 사람들 >( 임진순 , 2018) < 원더풀 고스트 >( 조원희 , 2018) 등도 그런 구도다. 가정과 이웃을 위하는 소박한 행동은 집단에 위협적인 존재를 처단하는 공익적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같은 이미지를 지나치게 소비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마동석의 행보는 한국영화가 오랜만에 접하는 경험이다. 서민극의 김승호 , 청춘 영화의 신성일 , 액션의 박노식 과 장동휘 , 멜로의 문희 등 과거 한국영화는 스타와 장르의 반복적 결합을 통해 전성기를 누렸다. 이후에도 박중훈 (코미디), 최민수 (액션), 전도연 (멜로) 등의 배우들이 한때 그런 역할을 했다. 지금은 마동석이다. 그는 범죄 스릴러 장르에서 형사든 범죄자든, 한국영화 100년 사상 가장 두꺼운 팔뚝을 휘두르며 강렬한 ‘한 방’의 액션을 선보였고, 그것은 이미 익숙한 쾌감이 되었다. <악인전>은 엔딩의 ‘살인 미소’와 함께 그 쾌감의 끝을 보여준 영화이며, 아마도 마동석이라는 장르는 좀 더 우리 곁에 머물며 이어질 것이다.
내 삶에서 은교의 시간이 언제였는지는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이적요의 시간이 조만간 혹은 확실히 언젠가는 닥칠 거라는 걸 안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라고 힘겹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던 그 노인인 듯 청년 같던 그 남자가 떠오른다. 어느 날 그의 삶 속으로 은교가 왔다. 그리고 세상이 열렸다. 일흔의 ‘국민시인’ 이적요( 박해일 )의 인생에 불쑥, 열 일곱 여고생 은교( 김고은 )가 뛰어든다. 은교의 등장으로 인해 ‘커다란 관’ 같던 시인의 집은 여름 숲으로 바뀌고, 느려져가던 노인의 맥박은 다시 힘차게 고동친다. 하지만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으로 평생 스승 이적요의 곁을 지키던 소설가 서지우( 김무열 )는 은교의 등장이 탐탁지 않다. 은교의 깃털 같은 발걸음은 두 남자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은교에 대한 마음을 담은 시인의 노트는 서지우의 거짓 명성을 흔드는 일대 사건의 발화점이 된다. < 은교 >는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문학동네)를 < 해피엔드 > < 사랑니 >의 정지우 감독이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소설과의 유사도를 묻는 질문은 당연한 수순이지만 동시에 무의미하다. ‘거울’이 ‘별’이 ‘연필’이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가지듯 박범신의 ‘은교’와 정지우의 ‘은교’는 다를 수밖에 없다. 대신 400페이지가 넘는 동명 소설은 영화 <은교>의 견고한 뿌리이자 절대적 ‘시제’로 자리 잡는다. 가림없는 노출신과 적나라한 섹스신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그것들이 그들에게도 존재함을 보여주는 목적으로 배치된다. 가슴과 성기 그리고 사랑과 욕정, 그것은 여고생에게도 명망 있는 노시인에게도, 젊음에게도 늙음에도 공평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박범신의 소설 「은교」가 ‘납으로 된 옷’을 입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시인 이적요의 폭풍 같은 사랑과 쓸쓸한 소멸을 후일담으로 회고한다면, 정지우 의 영화 < 은교 >는 이적요와 은교 그리고 서지우의 관계를 현재적 멜로드라마로 풀어놓는다. 복원 될 길 없는 젊음, 공유할 수 없는 관계의 역사, 훔칠 수도 따라 잡을 수도 없는 재능. 이적요와 은교과 서지우는 각자 서로를 질투하고 욕망하고 또 사랑하며 낭떠러지를 향해 뒤엉켜 굴러간다. 또한 ‘시인의 노트’ ‘서지우의 일기’ ‘변호사의 목격담’이 교차되는 소설 속 ‘은교’가 세 남자에 의해 묘사된 ‘대상’이라면, 영화 속 은교는 능동적인 화자가 되어 제 목소리를 낸다. 극 초반을 경쾌하게 이끄는 유머나 후반의 드라마 역시 은교의 행동과 자각을 통해 이루어진다. 입구를 발견한 것도 출구를 찾는 것도 은교다. 너무 늦게 쓰여진 노인의 연서. 그것을 너무 일찍 읽어버린 소녀. 답장 없는 편지를 평생 써왔던 미련한 청년. 그들에게 불어닥친 짧지만 강렬했던 폭풍이 잦아든 자리에 남는 것은 쓸쓸함과 외로움이다. 바로 뒤에 있는 사랑을 차마 뒤돌아 안지 못하는, 본능을 이기는 슬픈 체념이다. 잘 가라, 은교야. 잘 가라, 더는 나의 것이 아닌 청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