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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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cast][원포인트 레슨] 김보경 프로 - 롱아이언 쉽게 치기 위한T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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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예고편 모음 No.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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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님의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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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연기로 좋은 걸 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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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칸 직행티켓' 홍상수감독 러브콜, 2작품 거절"..왜?(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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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sh on] 야구 다큐멘터리로만 한정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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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주어진 삶을 단지 받아들이는 거야. 뒤돌지 말고
한 시절이 끝나고 하나의 챕터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대나무 줄기처럼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면 그 마디의 끝은 5년, 10년 같은 숫자가 아닐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갈 때 비로소 한 시대가 나뉘는 마디를 느낀다. 2022년에도 많은 영화인들이 떠났다. 국내만 돌아봐도 김보경 배우, 이춘연 대표, 강한섭 영화평론가, 신정원 감독, 강수연 배우 등 각 분야의 영화인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니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세상을 떠났고 장 폴 벨몽도가 영면에 들었다. 장 마크 발레는 별이 되었고 시드니 포이티어는 역사에 새겨졌다. 그리고 마침내 장 뤽 고다르가 영원이 되었다. 장 뤽 고다르의 죽음과 함께 20세기 영화도 막을 내렸다는 탄식은 그저 수사가 아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한 세기가, 영화의 한 챕터가 과거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현재는 과거다. 많은 이들이 현재를 산다 착각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대체로 과거, 현재, 미래에 동시적으로 겹쳐 있다. 오늘을 살면서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고 내일의 일을 걱정하는 식이다. 물리적으로 접근하자면 과거의 흔적들이 축적되어 오늘의 토대가 되고 그렇게 조성된 환경 위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이건 과거에 얽매이는 집착과는 다르다. 해결될 수 없는 과거의 문제를 끌어안고 끙끙대는 게 집착이라면, 과거를 제대로 돌아보는 건 ‘나’를 나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성찰의 시간에 가깝다. 몇 해 동안 사사로운 베스트 영화를 꼽았지만 올해만큼 유달리 ‘되돌아보는’ 시간이 길어졌던 적도 없었다. 어떤 해는 내가 다시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위주로 골랐고, 언젠가는 온전히 취향을 고백하며 영화를 고른 적도 있다. 완전히 떠나보내기 위해 이별 편지를 쓰듯 영화 평을 남기기도 했다. 올해는 지난 1년 뿐 아니라 영화 보고 글 쓰는 일을 업을 삼은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며 영화를 골랐다. 그리하여 지금 나와 마주보고 있는 영화는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 아마겟돈 타임 >이다. 과거라는 이름의 오래된 미래 그러고보니 매년 습관처럼 하는 서두의 말이 있다. <아마겟돈 타임>이 제임스 그레이의 최고작은 아니다. 감독의 최고작은 감독이 세상을 떠난 뒤에나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세상을 떠난 감독들의 지난 작품들을 살펴보니 애시당초 그런 건 불가능하다. 다르게 표현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 작품이야말로 나와 가장 깊숙이 접속하여 내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세간의 평가, 작품의 완성도, 지난 작품과의 비교를 염두에 두지 않고 말한다면 <아마겟돈 타임>은 2022년 본 영화 중 가장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방문을 두드린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의문이었다. 왜 굳이 이걸 지금 만들어야 했을까. 모든 영화에는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일정 부분 반영되는 게 자연스런 일이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그 농도가 꽤 높은 편이다. 자신이 나고 자란 뉴욕을 배경으로 한 다섯 편의 내밀한 드라마를 만들었던 제임스 그레이는 어느 날 갑자기 아마존 정글로 떠나더니(< 잃어버린 도시 Z >) 내친 걸음 아예 우주까지 다녀왔다가(< 애드 아스트라 >) 다시 집으로 귀환했다. 아니 단지 고향인 뉴욕 퀸즈로 돌아온 것을 넘어 가장 내밀하고 자전적인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아마겟돈 타임>의 전반부는 픽션이라기보다는 거의 일기에 가깝다. 제임스 그레이는 유대인 이민자의 자녀였고 아버지는 배관공이었다. 기술직인 아버지는 혹독한 환경에서 치열한 노력 끝에 중산층에 겨우 편입한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그랬듯 교사였고 사친회의 회장이었다. 주말이면 조부모와 대고모,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대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했고 부모님의 성화로 사립학교인 큐 포레스트로 전학을 간다. 제임스 그레이는 전학을 가기 전까지 학교에서 친하게 지낸 흑인 친구를 기억한다.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던 친구는 양아버지가 보내준 아폴로 미션 패치를 보물처럼 아꼈다. 어느 날 학교에서 흑인 친구와 마리화나를 나눠 피던 걸 걸린 제임스 그레이는 학습부진아로 낙인 찍힌다. 제임스 그레이의 어머니는 이 제안에 분노하며 제임스 그레이를 사립학교로 전학 시킨다. 불행히도 함께 잡혔던 흑인친구에겐 대신 보호해줄 보호자가 없었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흑인 친구는 사회복지사들에 의해 보호시설에 들어갈 처지에 놓이고 도망치듯 가출한다. 제임스 그레이는 그 친구가 자신의 집 뒷마당에서 얼마간 몰래 숨어 있던 나날을 기억한다. 오해하지 마시길. 이건 제임스 그레이의 어린 날이다. 동시에 영화 <아마겟돈 타임>의 전반부 내용이기도 하다. “상상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기억에 의존”했다는 감독의 고백처럼 거의 다큐멘터리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영화와 실화의 길이 갈라지는 건 6학년 폴(뱅크스 레페타)가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출을 결심하는 지점부터다. 폴은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흑인 친구 죠니(제일린 웹)을 설득해 사립학교의 컴퓨터를 훔쳐내기로 한다. 하지만 결국 이들의 범죄는 발각되고 두 사람은 함께 경찰서로 끌려간다. 여기서 또 한번, 한층 더 가혹하게 둘의 운명이 갈라진다. 다시 돌아와, 왜 하필 지금인가. 제임스 그레이가 자전적인 체험담을 굳이 지금 이런 방식으로 제작한 이유가 무엇일까.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70년대로 돌아가 < 리코리쉬 피자 >를 찍었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6년 만의 복귀작 <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 >를 통해 지난 생을 통째로 반추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중심으로 한 첫 번째 자전적 영화 < 더 파벨만스 >를 선보였다. 스필버그의 첫 번째 자전적 영화라니, 이미 여러 번 꾼 꿈을 다시 목격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건가. 중견 감독들이 왜 새삼 지금 자전적 이야기에 몰두하는가. 일련의 유행 아닌 유행이 코로나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활동이 축소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며 ‘되돌아보는 이야기’가 일종의 시대정신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분명한 건 지금이 잠시 멈춰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대나무 마디 같은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행위는 목적에 따라 도착지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제임스 그레이가 일기에 가까운 자전적 영화를 만든 이유를 한번 상상해보았다.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지만 단언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자전적 상황의 재현 자체가 <아마겟돈 타임>의 목적은 아니라는 점이다. 되돌아보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영화들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아름답고 행복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거나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애상에 잠긴다. 지금 시점에서 과거를 낭만화 하는 필터링, 이른바 노스텔지어의 정서에 흠뻑 젖은 영화들. 그런 의미에서 <아마겟돈 타임>은 되돌아보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 <아마겟돈 타임>은 건조하고 담담하다. 최소한 그런 위치를 유지하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쓴다. 제임스 그레이가, 아니 소년 폴이 그리워하는 시절은 소년 폴의 시절이 아니라 차라리 아버지 어빙(제레미 스트롱)의 시절, 더 거슬러 올라가 할아버지(안소니 홉킨스)의 시절이다. 소년이 직면한 상황은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그야말로 멸망 직전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면 <아마겟돈 타임>의 ‘지금’은, 1980년은 희망도 낙관도 없는 망해버린 세상의 초입이기 때문이다. 핵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는 불안과 위협의 시대.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된 해. 아메리칸 드림이 종말을 고한 해. 소년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어른으로서 생존의 시간. 그래서 ‘아마겟돈 타임’이다. 유령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1980년을 이야기의 무대로 택한 건 그 때 자신이 사립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 망가진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1980년에 도달한 쪽에 가깝다.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 두터운 유리천장과 사라진 사다리, 무엇보다 연대에의 희망이 사그라들고 분리, 차별, 혐오에 잠식당한 미국의 오늘을 어떻게 마주 봐야 할 것인가.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다 발견한 변화의 첫 번째 분기점이 레이건이 당선된 1980년이었게 아닐까. 다시 말해 <아마겟돈 타임>의 자전적 이야기와 회상은 목적이 아닌 도구다. 오늘의 폐허를 환기시키는 거울의 무대라고 해도 좋겠다. 아버지 어빙 역의 제레미 스트롱 배우는 말한다. “1980년 레이건 당선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여둔것과 같아요.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아주 사적인 렌즈를 통해 큰 이야기를 만든 거죠.” 사실 제임스 그레이가 그리워하는 시절은 소년 폴의 시절이 아니라 차라리 아버지의 시절, 더 거슬러 올라가 할아버지의 시절이다. 할아버지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미국에 정착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시절이 있었고 아버지가 간신히 중산층의 끄트머리에서 간신히 버틸 수 있는 시절도 지나가는 중이다. 이제 폴이 바야흐로 맞이해야 하는 시대는 계급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지고 3루에서 태어난 이들이 3루타를 치고 노력했다고 당당히 말하는 시대다. 2022년의 제임스 그레이는 이미 폐허가 된 세상에 서서 과거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그리움보다는 어떤 결연함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이미 폴의 미래를 알고 있다. 폴이 할아버지처럼 약자를 존중하고 차별을 멀리하고 불의에 분노하며,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조언대로 “남자답게 맞서며” 살 수 있을까. 양심을 가진 사람들도 “인생은 불공평해. 행운이 찾아오면 감사해야 해.”라고 자조하면서 자신을 지키기도 급급한 세상에서 말이다. 조금씩 비겁해진 세상은 이윽고 고개 숙이고 침묵하며 각자도생 하는 지옥이 되었다. 계급의 사다리에서 추락할까 전전긍긍하는 개인의 비겁함과 소심함을 탓하는 게 아니다. 모두가 투사가 될 수 없음을 안다. 다만 침묵에 저항하는 걸 실패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저항할 수 있다. <아마겟돈 타임>은 세상을 바꾸자고 설득하는 영화가 아니다. 망각에 맞서, 최소한의 저항을 시도하는 영화다. 할아버지가 살았고, 믿고, 꿈꿨던 낙원은 이제 없다. 다시 온다해도 그것은 할아버지가 겪었던 낙원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낙원을 부활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지옥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그럼에도 지옥에서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희망을 꿈꿀 수 있다. <아마겟돈 타임>은 내게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읊조린 것처럼 들린다. 영화는 말한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네게 주어진 삶을 단지 받아들이는 거야. 뒤돌지 말고.” 이것은 유령의 목소리다. 유령은 사라진 존재가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옆에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유령은 지나간 과거가 아닌 축적된 현재의 흔적이다. 마찬가지로 “뒤돌지 말라”는 영화의 속삭임은 타협도 낙담도 포기도 아니다. 내가 나로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다. 언젠가 다음 세대를 이어받을 너의 손을 놓지 않고, 기꺼이 유령이 되어 이 폐허 속을 함께 걷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유령과 함께 오늘까지 생존했다. 내일도 그럴 것이다.
부민관
부민관은 1935년 12월 지금의 서울 중구 태평로 1가에 세워진 다목적 회관으로 각종 연극과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 장소이다. 부민관은 경성전기회사의 기부금으로 경성부에서 지었다. 1932년 전기사업을 독점하며 막대한 부를 획득하고 있던 경성전기주식회사에 대해 경성부민들을 중심으로 부영 계획을 세우는 등 움직임을 보이자, 경성전기주식회사는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100만원의 기부금을 경성부에 내놓는다. 거액의 기부금을 받은 경성부는 부민의 복리향상을 위해 이 기부금의 절반을 다목적 회관인 부민관을 짓는데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자료] “불원 착공할 부민관 정면도”(《매일신보》, 1934.06.27) 경성부는 일본기독교청년회관 부지 1,083평과 이왕직 소유의 덕안궁 터 873평을 매수하여, 부미관의 터를 마련하였다. 매수비용으로 이왕직에 4만원을 지급, 일본기독교청년회관에 대해서는 장곡천정 사회관 건너편 테니스장 561평을 대체부지로 제공하고 별도로 4만 2천원의 매수비용과 2만 3천원의 건물 이전 보상비를 지출하기로 한다. 부지 매수비용이 늘어나면서 예산은 60만원으로 증가했다. 공사의 시작을 알리는 지진제는 1934년 8월 15일 개최되었다. 1935년 7월 13일 상량식이 거행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0일 준공했다. 건축청부는 이키(三本) 합자회사, 냉•난방과 환기는 스기요시(杉由)제작소, 전기 시설은 가토(加藤)상회, 무대조명 시설은 가와베(川部)제작소가 맡았다. 부민관은 부지 1,780평, 건평 1,678평, 철근 콘크리트의 근대식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상자형태의 건물에 7층 높이의 높은 시계탑이 결합된 형태로 지어졌다. 내부에는 대강당, 중강당, 소강당, 담화실, 집회실, 부속실 등을 갖추었으며 이중 대강당은 3층 높이에 건평 301평 좌석 1,800석 규모였으며, 400석 규모의 좌석에 147평의 면적의 중강당과 40평에 좌석 160석의 소강당도 있었다. 경성부는 완공을 앞두고 부민관 사용 조례를 만들었다. 입장료는 무료입장, 유료입장, 영리목적으로 구분되어 차등적으로 정했다. 예컨대 1,800석의 대강당의 경우 주야간을 통틀어 사용할 시에는 하루에 60원(무료입장), 120원(유료입장), 300원(영리목적)의 사용료를 받았으며 난방이 필요한 시기에는 30원씩 사용료를 더 책정하였다. 1935년 12월 10일 개관식이 거행되었다. 개관식에는 조선총독이 참석하였고, 3일간 경성 5권번이 총출동하는 연예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부민관에서는 1936년 음력 설을 맞아 무용의 조택원, 만담의 신불출, 영화의 나운규가 출연하는 조선중앙일보 주최 “조선 3귀재 경연회”와 같은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다. [자료] 부민관에서 개최된 <3귀재 경연회> 신문광고(《조선중앙일보》, 1936.01.24) 거액의 운영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책정한 비싼 대관료로 인해 대관이 이루어지지 않는 등의 문제점이 개관초부터 발생했고, 그 타개책으로 토키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영사기와 발성기를 설치하는 방안이 고려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흥행업자들이 부민관을 대관하여 영화상영과 연극공연 등을 진행하자, 부민관이 흥행장으로 활용되는 것에 대한 다양한 비판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1939년 9월에는 본정서 관내의 명치좌, 낭화관, 중앙관, 약초극장, 희락관 등 5곳의 상설관이 부민관에서 흥행물 공연을 하지 말아달라는 진정을 당국에 제출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흥행업자들의 반발에도 부민관의 흥행은 계속되었다. 1941년 4월 언론에 발표된 1940년 부민관 사용건수를 보면 영화, 음악, 연극과 같은 흥행이 342건, 결혼식 200회, 간담회 162건, 총회 132건, 이하 강연, 강습회, 전람회 순이었다. 부민관이 흥행장화 되는 것에 대한 다양한 방면의 염려는 있었지만 전기료 등 고액의 고정비용을 부담하기 위해서는 흥행장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부민관의 호화로운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단체와 인물들이 많았기에 다양한 형태의 무대공연들이 끊임없이 부민관에서 개최될 수 있었으며 텐카츠(天勝)와 같은 일본의 유명 흥행단체들도 경성 공연 시 부민관을 흥행장소로 활용하였다. 최승희, 배구자 등의 무용공연과 계정식, 이인범 등의 서양음악과 아악이나 여류명창대회와 같은 전통예술 공연, 극예술연구회나 조선연극협회, 중앙무대 등의 신극공연과 “째즈와 무용의 밤”이나 “대중연예의 밤”과 같은 이름의 김해송, 이난영, 박향림 등 유명 가수들의 공연이 개관 초 큰 인기를 끈 프로그램이었다. 이중 1937년 5월 김영길과 미우라 타마키가 공연한 오페라 <나비부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공연으로 기록된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부민관을 시국강연장으로 활용하였는데, 방공방첩을 중심으로 한 사상전을 전개하기 위해 1939년 8월에는 연극인, 영화인, 가수 들을 총동원하는 방공음악영화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필름 수급이 불안정해지면서 연극이나 악극과 같은 무대극이 큰 인기를 끌었다. 박노홍은 부민관 무대에 가장 많이 공연한 단체는 조선악극단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외 라미라가극단, 반도가극단 등과 극단으로는 극예술연구회, 극단 고협, 극단 아랑, 현대극장 등도 이곳에서 다수 공연을 거듭했다고 전한다. 부민관 공연 중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소위 조선연극문화협회가 개최한 국민극경연대회이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극단들이 참여하여 3차례에 걸쳐 개최된 국민극경연대회의 1차, 2차 대회가 부민관에서 열렸다. 1942년 9월 18일부터 11월 25일까지 개최된 1회 대회에서는 현대극장, 극단 아랑, 극단 고협, 극단 성군, 극단 청춘좌가 각기 1주일씩 공연을 펼쳤고, 1막짜리 국어극(일본어 연극)이 추가된 제2회 대회(1943년 9월 16일부터 12월 26일까지)에는 1차 대회에 참여하지 못한 예원좌와 황금좌, 극단 태양이 추가되는 등 참여 극단의 수가 늘었다. 두 차례의 국민극경연대회가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자 3회 대회는 부민관이 아닌 부내의 일반 극장에서 나누어 개최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다양한 시국강연장으로 활용되던 부민관에서는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친일민족반역자인 박춘금이 개최한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이 폭탄을 설치하고 이를 터트려 대회를 무산시킨 소위 부민관 폭탄 의거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사실상의 마지막 의거였다. 해방 후 미군이 사용하던 부민관은 1949년, 서울시에 이관되었다. 1950년 4월 29일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로 2회 공연을 끝으로 국립극장으로써의 역할은 끝났다. 1954년 환도 이후 1975년까지 이곳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1975년 여의도에 새로운 국회의사당이 신축되면서 시민회관으로 그 용도가 변경되었고 1976년 시민회관인 세종문화회관이 신축되자 그 별관으로 사용되었다. 1991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서울시의회 건물로 용도가 변경되어 현재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던 당시의 모습(국가기록원) [ 자료 ] 《 동아일보 》 , 1935.12.06. 부민관 준공 부내 태평통 ( 太平通 ) 에 건축 중이든 부민관 ( 府民館 ) 은 드디어 7 일로써 공사는 완전이 끝낫으므로 오는 십일에 성대히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엇다 한다 . 그리고 동관을 일반에게 소개하기 위하야 십일부터 십삼일까지는 매야 육시를 기하야 연무 ( 演舞 ) 를 공연한다는 바 그 료금은 일등 오십전 , 이등 삼십오전 , 삼등 이십전씩이라 한다 . [ 자료 ] 《 동아일보 》 , 1936.01.29. 오십만원 들인 부민관 , 부민은 비난 부청은 두통 , 사용료는 비싸고 수지도 안맞아 , 사회과는 대책에 고심 경전 ( 京電 ) 이 전긔 독점 기한 연장의 조건으로 경성부에 백만원을 기부하야온 돈 중 오십만원을 뚝 띠어서 사십만 부민의 오락전당 ( 娛樂殿堂 ) 을 맨들겟다고 부내 태평통 ( 太平通 ) 에 지어 노흔 부민관 ( 府民館 ) 은 준공 후 겨우 일개월 밖에 되지 안흔 이즈음부터 부민의 비난에 싸혀 잇으며 또 부 당국으로서는 수입이 예상 의외로 적어서 경영이 곤난하다 하야 그에 대책에 머리를 알코 잇다 한다 . 즉 그 리유는 동관의 사용료 ( 使用料 ) 가 턱없이 비싸다는 것인데 가장 부민이 많이 이용하게 될 대 “ 홀 ” 의 사용료는 하로밤에 이백사십원 , “ 피아노 ” 대가 삼십원 , 겨울이면 “ 스팀 ” 값까지 붙여서 하로밤에 삼백여원의 사용료를 지불하게 된다고 한다 . 이와 같은 현상임으로 일반 흥행업자 또는 음악가협회 ( 音樂家協會 ) 같은 데서는 보고도 못 먹는 떡이라 하야 부에 대한 비난이 자못 높으며 , 따라서 동관의 수입으로써 동관의 유지를 꾀하든 부 당국에서는 수입이 적음으로 어떠케 경영해 갈 바가 문제인지라 직접 관게를 맺고 잇는 부 사회과 ( 社會課 ) 에서는 아직까지 동관의 예산 편성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한다 . 동관이 준공된 후 지금까지 사십팔일 동안에 대 “ 홀 ” 을 유료 사용한 날짜는 십삼일밖에 되지 안는다 한다 . [ 자료 ] 《 동아일보 》 , 1939.3.18. 영화연극으로 일할 ( 日割 ) 독점 , 영리장화한 부민관 , 부회 ( 府會 ) 에도 상정되어 상당히 파란 일 듯 , 본정서 ( 本町署 ) 에서 개선에 진출 최근 태평통 ( 太平通 ) 부민관 ( 府民館 ) 은 설립 당초의 취지인 일반 부민에게 이편을 주는 여러 가지 개최물을 하는 동시에 회합장소로 이용한다는 본래의 사명을 전연 망각하야 영리 ( 營利 ) 위주의 영화연극을 매일 같이 상영하야 업자들은 물론 학동을 가진 가정에서도 물의가 등등한데 이 문제는 금일 부회 ( 府會 ) 에서도 상정되어 상당한 파란을 이르킬 것인데 부민관은 상설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설관과 똑같은 역활을 하고 잇다 한다 . 이리하야 영화 재상연으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무리들이 오 , 육개월 전부터 날짜를 전부 게약하야 노아 보통 사람이 일반대중을 상대로 하는 강연 회합을 하려고 해도 날자가 비여 잇지 안어 부민관을 결국 사용치 못하는 형편이라고 한다 . 특히 모극단 모극장에서는 부민관과 결탁하야 언제나 토요 , 일요 , 휴일이 끼인 조흔 날이면 언제나 사용할 수 잇게 되어 잇다하니 이 역시 상설관 업자들이 불평을 일으키는 초점이라고 한다 . 그리고 상설관에 출입하는 생도 학생이면 학교당국과 보도연맹 ( 報導聯盟 ) 이 취체하야 엄벌에 처하지만 이 부민관은 상설관이 아닌 관게로 학생생도가 나뿐 영화를 보아도 무간섭하므로 이용자의 대부분은 남녀학생들이므로 학생교화상 ( 敎化上 ) 여간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 그런데 날짜를 미리 잡아 두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수수료를 받고 파는 뿌로커도 잇다는데 이 현상이 그대로 계속되면 앞으로는 영화 , 연극 상설관과 조곰도 다름없는 상설관으로 화할 터이니 일반은 회합에 이용할래야 도저히 이용할 수 없을 터이니 부민관 창설 본래의 사명은 잊고 말 것으로 이 문제는 학교와 사회 , 영화업자에게 큰 파문을 던질 것으로 그 귀취는 매우 주목되고 잇다 .
명치좌(국제극장, 시공관, 명동예술극장)
명치좌는 1936년 10월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가 명치정에 세운 최신식 영화관으로 해방 후 시공관으로 사용되었다. 명치좌가 자리한 곳은 조선철도호텔(현 조선호텔)에서 조지아백화점(롯데영플라자)을 지나 명동성당과 중앙관(중앙극장)으로 이어지는 명동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길 한 가운데 있었다. 명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간 곳인데 그 초입에는 1909년 설립된 낭화관이라는 작은 극장이, 명치좌에서 명동성당 방향으로는 1922년에 들어선 활동사진전용관 중앙관이 있었고, 명치좌에서 본정 방향으로는 1915년 설립된 닛카츠 영화의 개봉관인 희락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명치좌를 세운 인물은 명치정 마루빌딩(丸ビル)의 경영자 이시바시 료스케였다. 원적이 나가사키현(長崎縣)인 그는 일찍이 조선으로 건너와 카페와 마루빌딩을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1935년 5월 마루빌딩의 한 모퉁이 부지 100평을 14만 5천원에 매수한 후 이곳에 영화관 설립을 추진한다. 그는 우선 쇼치쿠 영화의 경성 흥행권을 획득하기로 하고 만주 관동군의 실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동생 이시바시 이치로(石橋一郞)를 통해 도쿄영화계에 접근했다. 동생 이시바시 이치로는 고바야시 도쿠지로(小林德次郞)를 통해 쇼치쿠의 중역들과 쇼치쿠 흥행권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였고, 쇼치쿠의 기도 시로우(城戶四郞) 소장, 시노야마(篠山) 차장, 이노우에(井上) 오사카지점장, 시라이 신타로(白井信太郞) 상담역 등을 움직여 이시바시 료스케가 쇼치쿠 흥행권을 얻을 수 있게 힘썼다. 기존 쇼치쿠 흥행권을 가지고 있던 송죽좌의 도쿠나가 구마이치로는 쇼치쿠 측에 부율 조정을 제의한 상태에서 미쓰코시 뒤편에 극장 신축을 추진하고 있었다. 부율 조정을 요구한 도쿠나가의 행동에 불쾌함을 가지고 있던 쇼치쿠의 중역들은 미쓰코시 뒤편 보다는 명치정 한가운데 극장을 설립하는 편이 경쟁회사인 닛카츠의 영화를 상영하는 희락관을 견제하기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이시바시 료스케와 계약을 체결하기로 한다. 결국 1935년 7월 13일 도쿠나가가 쇼치쿠 상영권을 포기하자, 이시바시 료스케는 7월 23일 도쿄로 건너가 28일 쇼치쿠 영화에 대한 선만봉절 계약을 체결했다. 이시바시는 아직 극장을 설립하기 전이라 극장이 설립되기 전까지 쇼치쿠영화를 낭화관에서 상영하기로 한다. 이로써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낭화관이 1935년 9월부터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이시바시는 극장을 신축하기 위해 용산 개성좌의 흥행권을 인수받아 설립허가를 신청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성좌가 자리했던 용산 지역이 아닌 본정서 관내에 영화관 설립을 신청하였기에 허가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정서에서는 경성의 영화관을 쇄신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 명치좌의 신축을 허가해 주었다. 명치좌는 대지 505평에 건평 856평, 총공사비 536,000원을 들여 지은 지하 2층, 지상 4층의 철근콘크리트 영화극장이었다. 다마타(玉田)건축사무소의 설계와 미키(三木)합명회사의 청부로 1935년 11월 공사에 착수, 1936년 10월에 낙성을 보게 된다. [자료] 명치좌 개관 광고(《경성일보》, 1936.10.07) 1936년 10월 7일 개관한 명치좌의 개관 프로그램은 쇼치쿠 오후나(大船)촬영소에서 제작한 다나카 키누요(田中絹代) 주연의 <여성 대 남성>(女性 對 男性)과 쇼치쿠 교토촬영소에서 제작한 하야시 죠지로(林長二郞) 주연의 <춤추는 명군>(踊る明君)이었다. 개관 이후 명치좌는 경성의 조선인, 일본인 관객 모두를 휩쓸었다. 1940년 신년 3일간 관객 집계를 보면 명치좌가 1만 6천여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2위인 희락관의 9천 8백명과는 큰 차이로 관객수를 압도했다. 명치좌가 약진하면서 조선의 영화흥행계를 주도하게 된 이시바시 료스케는 전통적으로 서양영화를 즐겨 보는 조선인 관객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 일환으로 1939년에는 박정현이 운영하던 단성사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명치좌 체인 안에 넣었다. 1907년 개관 이후 조선인의 손으로만 운영되었던 단성사가 이시바시 료스케에 의해 운영되는 것은 조선 흥행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이시바시 료스케에 의해 인수된 단성사는 명치좌의 2번관으로 전락하여 이름도 대륙극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기억해야할 부분은 명치좌와 같은 대형 토키영화관이 들어서고 남촌의 대형 영화관에 조선인 관객들이 몰리면서, 지역과 언어에 의해 구분되던 종래의 극장문화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시바시 료스케가 단성사를 인수 한 후 명치좌는 단성사가 이름을 바꾼 대륙극장과 더불어 조선영화를 다수 개봉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명치좌를 통해 개봉된 주요 조선영화만도 1939년 <애련송>, <국경>, <새출발>, 1940년 <수업료>, 1941년 <반도의 봄>, <그대와 나> 등이 있었다. [자료] 명치좌에서 개봉된 최인규 연출의 <국경>(《매일신보》, 1939.05.19) 개관 이후 조선의 영화흥행계를 좌우했던 명치좌는 8·15해방 후 적산극장으로 미군정의 관리를 받게 된다. 조선에서 가장 가치 있는 영화관이다 보니 이를 불하받아 운영하려고 손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중 미군정의 인맥을 가진 김동성이 적산 관리인이 되어 국제극장이란 이름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이 영화관이 조선영화흥행계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보니 문화예술계에서는 이 극장을 공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다. 과거 서울시민들의 각종 행사와 공연이 펼쳐지던 부민관을 해방 후 미군이 사용하면서, 시민회관이 없었던 서울시는 국제극장을 인수하여 시공관(市公館)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시민회관으로 사용하게 된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쟁터가 된 서울을 대신해 부산이 임시 수도였다. 1954년 서울로 환도하면서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소실된 국가기관을 대신할 건물을 물색할 때 국립극장으로 활용되던 과거 부민관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게 되자 국립극장은 시공관을 활용하도록 했다. 국립극장이 시공관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민회관이라는 본래의 기능과 옮겨온 국립극장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 문제는 새롭게 시민회관을 신축하고 과거 시공관을 오롯이 국립극장으로만 이용하기로 정리하면서 해결된다. 이를 위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우남회관이라는 이름의 시민회관을 짓기 시작하였고 이 건물은 4.19이후 완공되었는데 우남회관이란 이름 대신 시민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게 된다. 시공관이 시민회관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이전까지 시공관 건물은 명동예술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국립극장으로 활용된다. 명동예술회관은 본래 영화관 건물이라 연극 공연에는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다. 1961년 연극공연에 걸맞게 대대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진 후 명동예술회관은 1962년 3월 21일부터 본격적으로 국립극장의 역할을 맡게 된다. 명칭도 명동국립극장으로 불리게 된다. 1973년 10월 17일 남산 국립극장이 개관되면서 10여 년간 국립극장으로 역할해온 명동예술회관은 대한투자금융(현 대한종합금융)에 매각되어 금융업체 건물로 사용된다. 이후 이 건물은 경매에 붙여져 낙찰가에 따라서는 헐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다행이 문화관광부가 2002년 명동 국립극장을 복원하기로 결정, 2004년 400억원에 건물과 땅을 사들여 건물을 공연장에 맞게 다시 수리하여 2009년 ‘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하게 된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명동국립극장 당시의 모습(국가기록원) [ 자료 ] 《 매일신보 》 , 1939.08.20. 명치정 환락가에 대화 ( 大火 ), 작야 ( 昨夜 ), 전반소 ( 全半燒 ) 십사호 ( 十四戶 ), 손해 삼만원 십구 일 오후 십 시 십 분쯤 부내 명치정 ( 明治町 ) 이정목 오십사번지 전중심길 ( 田中甚吉 ) 의 목제 이층집에서 불이 나서 불길은 삽시간에 그 집을 다 태우고 옆집으로 올마부터 강본 ( 岡本 ), 지전 ( 池田 ), 최 ( 崔 ) 의 집과 편산 ( 片山 ) 려관 석광 ( 石光 ) 『 아파 - 트 』 추강어망 ( 秋岡魚網 ) 점의 창고 , 명치좌 『 ᄲᅩ - 이 』 방 등 팔호를 전소시키고 불길은 다시 그칠 줄을 모르고 좌등 ( 佐藤 ) 빙수점 , 추강어망점 , 북곡 ( 北谷 ) 양산점 , 연희 ( 延禧 ) 식당 등 육호를 반소시킨 후에 소방대와 부근 가정방화조합원들의 필사적인 활동에 의하여 열시 사십분쯤 진화하엿다 . 손해는 약 삼만원 가량이라고 하는데 불탄 집들은 통틀어서 집주인인 명치좌에서 일만 오천원의 보험에 들엇고 가장 집물은 제각기 보험에 든 사람도 안든 사람도 잇슴으로 자세치 안타 . 화재원인은 목하 본정서에서 조사 중인데 불난 곳이 환락가 ( 歡樂街 ) 의 중심지엿음으로 부근 일대는 갈팡질팡하는 사람과 구경꾼으로 일대 혼잡을 이루웟다 . 그런데 불난 바로 엽힌 명치좌에서는 마침 영화가 끝나기 바로 전이었는데 손님들은 불난 것을 몰낫기 ᄯᅢ문에 다행히 큰일은 업섯스나 불을 ᄭᅳ든 경성소방조 소방원 관춘웅 ( 關春雄 )( 三二 ) 은 전치 ○ 주일가량의 타박상을 입엇다 . [ 자료 ] 《 동아일보 》 , 1940.02.09. 구경열 ( 熱 ) 은 40 도 이상 , 정원초과와 위생 , 풍기 상 나뻐 , 입장요금까지 통제 요사히 본정서 ( 本町署 ) 관내에 잇는 영화극장으로 명치좌 ( 明治座 ) 를 비롯하여 기타 극장에서는 일반의 관극열 ( 觀劇熱 ) 이 고조됨을 기화로 하여 부당한 고급 요금을 증수함은 물론 정원 ( 定員 ) 이상의 사람을 입장시켜 소위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초만원을 일우어 관극 목적을 다 할 수 없음은 물논 위생 상 또는 풍기 상 조치 못한 점이 만허 경기도 경찰부 보안게에서는 그대로 방임할 수 없다 하여 미구에 입장요금의 통제는 물논 정원 이상의 입장을 엄금할 방침이라 한다 . 특히 요사히 비와 눈이 오지 안허 각지에서 화재가 발생하야 총후 물자 확보정책에 반하는 사실이 속출하는 현상에 비추어 보아 무리한 관객 수용과 입장자 초과가 화재발생의 위험성도 잇는 만큼 방화의 필요와 기타 재해 , 풍기 , 위생 각 점을 생각해서 단호한 방침을 세우기로 확정하엿다 한다 . 본정서 좌등 보안주임 담 ( 本町署 佐藤 保安主任 談 )= 극장에서 입장요금을 올리는 것은 이제부터 절대로 허가하지 안흘 방침이다 . 영화렬이 팽창한 것을 기화로 해서 입장료를 함부로 올리는 것은 업자들로서 반성해야 될 점이다 . 정원 이상의 입장에 대하여서도 풍기 , 재해방지 등 필요에서 도경찰부의 지시가 잇는대로 단호히 통제할 방침이다 . 운운 [ 자료 ] 《 매일신보 》 1941.07.25. 명치좌 기구 확충 , 송죽 ·SY 계 제휴강화 시국 하 영화의 사명이 점차 중대하여서 기 ( 其 ) 사회적 발전에 박차를 가하여 오고 있는 이ᄯᅢ 시내 명치좌에서는 이에 상반 ( 相伴 ) 한 기구 확충과 내용 강화를 꾀하여 종래는 단지 송죽의 봉절관인 관계엿든 것을 다시 확대하야 긴밀한 제휴 강화의 계약을 맷고 금후는 종전의 배가한 비약을 ᄭᅬ하리라고 한다 . 이리하여 금후 명치좌에서는 전 ( 全 ) 송죽계의 『 애트랙슌 』 은 물론 S·Y 계의 양화 상영도 일층 확장하기로 되어 그 약진은 자못 주목된다 . 松竹○ 의 책임자는 神戶 松竹座 지배인 大矢 ○ 信 씨로 결정되어 근간 부임하기로 되었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1.10.15. 『 반도의 봄 』 내월 ( 來月 ) 명치좌 봉절 명보영화의 이색편 . 신인 이병일 감독 작품 『 반도의 봄 』 은 그간 봉절권 획득의 문제로 봉절관이 결정되지 못하고 잇든바 송죽과 타협되여 내월 중순경 경성 명치좌에서 상영키로 되엇는데 송죽계로 전국 봉절하게 되리라고 한다 .( 사진은 그 한 장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