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시대
- 감독
- 김보라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엄태구, 박선민, 김다흰
한국영상자료원은 2006년 2월 2일,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를 오픈했다. 그리고 오늘 2026년 2월 2일. KMDb는 20주년을 맞이한다. 우리는 KMDb를 기획·구축하며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한참 고민했다. 누군가 ‘무비씨’라는 이름을 제안한 적이 있다는 것은 기억나고, 그러나 아무래도 어딘가를 따라 한 것 같지만 그 이상의 이름은 없다고 판단해 KMDb로 지었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은 kmdb.or.kr 도메인을 구매했다. KMDb에는 20년간 생겼다 없어진 콘텐츠와 기능이 많다. 초기에는 사용자가 직접 정보를 입력하는 기능도 상당했으나 생각보다 양질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고 무엇보다 관리가 어려워 하나둘 폐기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과 독립영화 전용 KMDb를 따로 만들었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 통합된 상태에서 최대한 간결한 기능과 콘텐츠로 운영하는 중이다. KMDb를 준비하며 호기롭게 “풀 크레딧을 가지고 갑시다!”라는 (제안을 내가 한 것 같고 그래서) 고생문이 활짝 열린 정책을 시작하며 힘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로 인해 어디에도 없는 데이터를 보유하게 된 KMDb는 영화·영화인 DB 서비스뿐 아니라 VOD로 한국고전영화 스트리밍을 시작했고, 영화글로 다양한 필자의 글을 소개했으며 리스트와 컬렉션이 순차적으로 오픈해 지금에 이르렀다. 2006년 2월 1일. 오픈 전날 디지털정보화팀의 담당 세 명은 그제야 동명이인에 대한 이슈를 발견하는 사고를 친다. 비슷비슷한 나이의 정유미 배우가 하나가 아니고 무려 세 명이래! 라는 비명을 한밤중에 지르며 당시만 해도 30대 초반이었던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인물을 분리하며 밤을 지새다 퇴근해 다음 날 오픈시켰다. 그리고 그 동명이인 이슈는 지금까지도 완전하지 않다. 완전할 수가 없다. IMDb도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이슈를 KMDb 라고 별수 있겠는가. IMDb 매니저는 이름이 짧은 한국 인명으로 동명이인에 대한 고충이 더 심하겠다며 나를 위로했다. 성명이 “정유미”인 배우 3인에 대한 KMDb 영화인 정보 KMDb는 영화·영화인 데이터의 완벽함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며, 이제는 영화인이 자신의 필모를 증빙하기 위한 웹사이트로 그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문득 KMDb에 쌓인 데이터가 어떤 모양새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사용자들도 궁금해할까? KMDb 20주년 이벤트를 근사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데이터로 가득한 사이트의 20년 묵은 통계를 소개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축하가 아닐까 생각했다. 별다른 코멘트 없이 지난 20년의 통계 10선을 소개한다. 1.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극·비극) 의 수: 50,787편 2.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인 의 수: 83,279명 3. 가장 많이 접근된 영화인 페이지 정윤희(1위), 임권택(2위), 신성일(3위) / 사진: 전승열, 정기성 1위 | 정윤희 2위 | 임권택 3위 | 신성일 4위 | 김기영 5위 | 이상사 6위 | 김지미 7위 | 박노식 8위 | 김진규 9위 | 신상옥 10위 | 안성기 4. 작품 리스트(필모그라피) 가 가장 많은 영화인 1위 | 현동춘 | 편집 | 994편 2위 | 김희수 | 편집 | 863편 3위 | 최형래 | 음향효과 | 850편 4위 | 손인호 | 음향효과 | 793편 5위 | 김기범 | 배우 | 753편 6위 | 허장강 | 배우 | 687편 7위 | 임해림 | 배우 | 660편 8위 | 김재경 | 음향효과 | 657편 9위 | 윤일주 | 배우 | 650편 10위 | 최남현 | 배우 | 609편 5. 한 작품(장편영화)에 가장 많은 크레딧 을 올린 영화인 1위 | 노영석 | THE 자연인 (노영석, 2023) | 17개 공동 2위 | 박용철 | 싸이더:애,심 (박용철, 2019) | 16개 공동 2위 | 준오 | 휴게소 (준오, 2016) | 16개 ※ 노영석 감독은 <THE 자연인>에서 감독, 각본, 출연, 프로듀서, 촬영, 조명, 편집, 음악, 미술, 의상, 동시녹음, 사운드(음향), 시각효과, 색보정, 예고편, 포스터, 기타스탭(캘리그라피)을 담당함. 6. 참여 스태프 가 가장 많은 영화 <한산: 용의 출현>(1위) 1위 | 한산: 용의 출현 (김한민, 2022) | 1,665명 2위 | 백두산 (이해준, 김병서, 2019) | 1,612명 3위 | 안시성 (김광식, 2018) | 1,502명 4위 | 미스터 고 (김용화, 2013) | 1,492명 5위 | 신과 함께–죄와 벌 (김용화, 2017) | 1,487명 7. 상 을 가장 많이 받은 영화 1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58회 2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45회 3위 | 추격자 (나홍진, 2007) | 41회 4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40회 공동 5위 | 괴물 (봉준호, 2006) | 31회 공동 5위 | 벌새 (김보라, 2018) | 31회 ※ KMDb에서 관리하는 영화제·시상식에 한함 8. 리스트에서 본 영화로 가장 많이 체크된 작품 <올드보이>(1위), <괴물>(2위), <기생충>(3위) / 사진: 디씨어터 1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2,581명 2위 | 괴물 (봉준호, 2006) | 2,355명 3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2,178명 4위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 2,055명 5위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2001) | 1,672명 6위 | 아가씨 (박찬욱, 2016) | 1,648명 7위 |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0) | 1,574명 8위 | 마더 (봉준호, 2009) | 1,533명 9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1,515명 10위 |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1998) | 1,438명 ※ 박찬욱 감독 작품 4편, 봉준호 감독 작품 4편 9. 리스트에 본 영화 체크를 가장 많이 한 사용자 1위 | bo**** | 2,076편 2위 | ha**** | 1,865편 3위 | gs**** | 1,747편 4위 | ba**** | 1,696편 5위 | in**** | 1,636편 ※ ****는 ID의 글자 수와 일치하지 않음. 10. 가장 많은 조회수의 영화글 1위 | “ [시네필 안내서]서문: 시네필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은 당신에게 ” (영화천국 Vol.48) | 정성일 | 91,634회 사실 진정한 20주년 이벤트라면 올해 KMDb가 전면 개편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득하지만 어찌 됐든 2026년 말 새로운 KMDb가 문을 열 것이다. 오랜 KMDb 관여자로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는다면, 20년이 지난 이젠 누구나 KMDb를 KMDb(b를 소문자)로 써주길 바란다는 것 정도. 소박한 바람으로 글을 마친다.
사진: " Larks on a String ", Národní filmový archiv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실 세계 어디엔가 있을 법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와 인물들을 다소 직설적이며 담백하게 표현하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희로애락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이 일상에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후에 남겨진 감정들은 온전하게 이해되거나 소화되지 못한 채 한동안 멍때림 혹은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고는 한다. 내게는 영화가 이러한 감정들의 번역기이자 소화제였기에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서 직접 참여하기에 이르렀던 것 같다. 많은 파트 중에서도 왜 하필 촬영이었을까를 묻는다면, 루빼에 눈을 파묻었을 때 현실의 많은 부분과 단절됨과 동시에 주시하고 있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담아야 할지와 같은 형식에 대한 고민보다 내용과 대상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던 탓에, 가끔 나의 촬영에 영향을 끼친 영화를 촬영적으로 풀어 답을 해야 할 때 어려움을 느낀다. 내게는 동전의 양면처럼 영화와 촬영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결국 오늘날의 내가 촬영에 대해 갖는 시선이나 태도에 영향을 끼친 영화가 무엇인지, 촬영을 하고 싶은 열망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는 질문과도 같기 때문이다. 영화를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헤매던 시간을 지나 촬영팀 생활을 거쳐 촬영에 대해 참으로 느리지만 꾸준히 배워나가던 시절 우연히 보게 된 한 감독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2006년 겨울,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체코 영화제가 열렸고 당시 본 여러 작품 중 < 가까이서 본 기차 >(이리 멘젤, 1966)를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소시민적인 캐릭터들과 소소한 사건들을 담아내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현실을 해학으로 드러내는 방식 때문이었다. 사회 초년생이자 연애 초보자인 밀로쉬(바츨라프 네카르시)의 역무원 적응기와 연애기, 그리고 본인과 관객 모두 예상치 못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연신 미소를 짓게 만들다가도 일순간 당혹감과 애처로운 감정을 모두 경험하게 만드는 감독의 스타일에 푹 빠지게 되었고 그렇게 ‘이리 멘젤’이라는 감독의 이름을 마음에 새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의 차기작 < 줄위의 종달새 >(이리 멘젤, 1969)가 개봉을 하였고 이 영화는 내가 영화인으로서의 삶을 살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시간을 보낼 때도 항상 마음이 향하는, 가본 적 없는 고향과도 같은 영화가 되었다. (좌) 사진: " The Power of the Powerless: Five Banned Films from the Czechoslovak New Wave: Larks on a String ", Film at Lincoln Center (우) 사진: " Skrivánci na niti ", IMDb <줄위의 종달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1948년 2월 혁명 이후 공업단지에 위치한 한 폐철 처리장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곳은 부르주아로 찍힌 자들이 과거의 만행을 보상하기 위해 사실상 강제 동원에 가까운 노동을 하는 곳이며 전직 철학 교수, 검사, 목수, 이발사, 색소폰 연주자, 호텔 요리사가 등장한다. 또한 이곳에는 해외로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고 노역 중인 여성 수감자들도 등장하는데, 이 두 집단의 교류를 막는 자는 집시 여인과의 결혼을 앞둔 한 젊은 간수다. 그리고 겉으로는 이들과 동등한 노동자임을 강조하면서 주어진 작은 권력을 최대한 휘두르는, 등장부터 퇴장까지 ‘청결'을 외치는 관리자도 등장한다. 주요 사건은 요리사 파벨(바츨라프 네카르시)이 여성 죄수 중 한 명인 이트카(이트카 젤레노호르스카)와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다. 죄수라는 이트카의 신분으로 인해 파벨은 그녀 없이 당 관리자 앞에서 혼인 선서를 하게 되고 이트카 또한 감옥에서 3시간 전 그와 결혼했다는 증명서를 받게 된다. 동료들이 마련한 허름한 초소에서의 합방을 불과 몇 걸음 앞두고 파벨이 ’그'라고 불리는 당 최고직 위원의 환영 행렬에 강제로 동원되며, 둘의 만남은 잠시 유예되는 듯 흘러간다. ‘그'에게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던 시절은 어디로 갔는지 질문을 던지는 파벨. 이 도발적인 질문으로 인해 행사 후 이트카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듯 사라지고 둘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는다. 수개월이 흘러 복역을 마친 이트카. 이제 그녀는 2년 형을 선고받고 지하 탄광으로 내려가는 파벨을 기다리며 함께 할 그날을 꿈꾼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충격과 감동을 준 장면들이 있었다. 하나는 청결을 이유로 전라의 한 소녀를 목욕시켜 왔던 관리자의 행적이 관객과 또 다른 동료 모두에게 발각되는 장면이었다. 동료 또한 이 만행에 동참하는 서사 상의 귀결도 충격적이었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인해 더욱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 영화가 초반부터 유지해 온 공간 속에서, 여러 인물과 상황을 함께 담아내는 풀숏(full shot)과 니숏(knee shot) 정도의 비교적 널찍한 숏 사이즈(shot size)를 통해 가감 없이 상황을 드러냄과 동시에 유린의 손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클로즈업으로 강조했는데, 시공간을 압축하지 않고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특정 순간만큼은 카메라가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 촬영하는 방식이 내게 강렬하게 다가왔고 이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사진: " Skrivánci na niti ", FDb.cz (원자료 출처: Filmové studio Barrandov / 저작자: Josef Janoušek) 다른 하나는 엔딩 장면이다. 트럭에 실린 채 탄광으로의 노역을 앞둔 파벨에게 이트카가 거울을 이용해 햇빛을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나는 진실과 결혼했어요”라는 대사를 던지고 갱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파벨. 냉혹한 현실 덕분에 진실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는 철학자의 말에 옅은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이 화면 가득 등장하고 마치 아내를 향하는 듯 시선을 위로 올리는데, 이어지는 장면은 지상을 향하되 그로부터 더 멀어지는 일종의 엘리베이터 시점 숏(POV)이다. 어찌 보면 인물의 익스트림 클로즈업에 이은 POV라는 단순한 쇼트의 구성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점점 더 작아지는 지상의 빛의 사각형을 계속해서 바라보다 암전되는 이 마지막 장면이 희망과 동시에 여전히 녹록지 않은 현실을 표현한다고 느꼈고, 음악과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희비의 양가감정이 끊임없이 교차로 밀려들며 입가에는 미소가, 눈에는 눈물이 고였던 기억이 난다.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은 이리 멘젤 감독의 카메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그 특징이 느껴진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회주의 체제가 지닌 부조리를 고발하는 성격이 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자, 반대하는 자, 그리고 그 중간 지점에서 갈등하는 자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어떤 가치 판단에 근거한 차별적 시선이라기보다는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내려는 듯 꽤나 담담하다. 이러한 시선과 일관된 태도들이 쌓이고 쌓여 특정 순간에 이르러 감독이 의도가 더욱 강렬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줄위의 종달새>는 감독의 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카메라가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카메라’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작품이기도 하다. 사진: " RECEDING WAVE: ON JIŘÍ MENZEL & LARKS ON A STRING ", Metrograph 시나리오를 받아 읽거나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을 바라볼 때 촬영을 고민하는 나의 마음 속 어디엔가 이리 멘젤 감독의 영향이 생각보다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 특히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와 대상과의 ‘거리두기’의 정도를 고민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만날 때 더욱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 나의 피투성이 연인 >(유지영, 2023) GV 때 객석에 앉아있던 내게 정말 감사하게도 정성일 평론가님께서 쇼트 구성에 대한 질문을 하신 적이 있다. 카메라가 인물의 감정을 앞서가지 않으려 했고 영화 후반부 영안실에서의 건우( 이한주 )와 그가 바라보는 대상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기준으로 전후의 쇼트들을 자연스레 정리한 것 같다고 답을 했었다. 돌이켜보니 내게 ‘생각하는 카메라’를 심어준 작품들이 있었기에 현장에서의 마법 같은 순간들을 잘 담아낼 수 있었고, 그 시작에는 <줄위의 종달새>가 있었다. 이제는 ‘올드의 올드 시네마’가 되어버린 영화이지만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 의해 다시 한번 발견되기를 소망한다. 김보라(촬영감독) | 이야기와 인물을 화면에 담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 아이 >(김현탁, 2021), < 퇴직금 >(전재연, 2021) 등 촬영.
2019년 8월 29일 개봉한 김보라 감독의 < 벌새 >가 얼마 전 개봉 2주년을 맞았다. 영화를 지지하는 관객들인 ‘벌새단’은 2주년을 기념해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에 기부 이벤트를 했다고 한다. 영화 관람과 유통의 주기가 지극히 짧아진 시대에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특정 영화와 관련 활동을 지속하는 건 드문 일이다. 관객들은 영화가,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이, 세계 내 다른 존재들처럼 살아간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이러한 ‘존재의 보편성’이야말로 <벌새>가 갖고 있는 고유의 정동이다. 영화 포스터에 각인된 “1994년, 가장 보편적인 은희로부터”라는 태그라인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를 잘 알려준다. ‘은희’라는 개별적인 이름과 ‘1994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 사이에 붙은 ‘가장 보편적인’이라는 수사는 얼핏 모순처럼 보인다. 왜 은희는 가장 보편적일까? 질문을 고쳐 이어보자. 왜 은희는 보편적이면 안 되나? 누가 보편성을 대표하는가? 보편성은 대표될 수 있는가? 영화에서 보편성이 왜 중요한 화두인가? 영화는 시청각적 재현을 경유해 제공된다. 재현(representation)은 세계를 다시 표현하거나 어떤 대상이나 집단을 대표한다. 무언가의 재현은 당연히 전체를 보여줄 수 없다. 역량의 결핍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전체라는 것 자체가 실재하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문제는 재-현이나 대표의 과정에서 주류(mainstream), 대중(mass), 평균(average), 중위(median)를 떠내는 작업을 하면서, 즉 생략, 환원, 모순·우연·예외의 제거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그 이미지와 서사가 전체나 보편을 그려내고 있다고 주장할 때이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는 텍스트 내적으로 지나치게 인과적이고 그럴 듯해서 우리는 배제가 발생하거나 실재가 무시된다는 것을 종종 잊는다. <벌새>는 평균적이거나 주류적 인간상이야말로 보편과 가장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보편성이 세계의 전체에 관계되어 있는 공통성이라면, 그것은 존재이다. 즉 은희를 포함해 모든 존재는 누구든, 어느 시간에 있든 보편적이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보편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음에 대한 예민한 감각, 존재에 대한 의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벌새>는 즐거움이나 환희와 함께 실망, 절망, 단절, 고립, 상실 등 다양한 감정의 파고를 안겨주는 수많은 시간들이 독자적으로 표현될 때 존재의 보편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어떤 행위가 다른 행위의 그리고 어떤 시간이 다른 시간을 위한 원인이나 자원으로만 표현되면서 이전의 행위나 시간은 그 자체의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끊임없이 지연된다면, 존재는 그저 최종적으로 의미가 결정되는 죽음을 향해 가는 양상으로만 설명될 것이다. <벌새>는 이러한 진보적 서사를 거부한다. 그런 면에서 <벌새>는 성장영화이면서 성장영화의 정형성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날갯짓을 한다. 은희의 유년은 성인이 된 은희를 설명하는 근거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비교대상이 아니다. 1994년의 은희의 자기 존재와 사랑에 대한 탐색 그리고 재난과 상실의 경험은 물론 성인이 된 은희와 상관관계가 있지만 또한 독자적이다. 은희의 퀴어 섹슈얼리티 또한 이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통과의례나 지표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은희(박지후)는 자신의 존재 의미와 양상을 탐색한다. 아직은 많은 것이 처음인 은희는 서툴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프닝 씬은 그러한 은희의 상태를 표현한다. 은희는 복도식 아파트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고 엄마(이승연)를 소리쳐 부르지만 누구도 응답하지 않자 급격히 불안에 빠진다. 은희는 타자, 특히 신뢰하는 친밀한 타자의 반응이 없을 때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 옅어지고 초조해진다. 불안을 더 부추기는 건 잔인한 폭력과 차가운 무관심이 일상인 환경이다. 강남 대치동은 친구, 연인, 가족, 학교, 사회에서 끊임없이 줄 세우기를 한다. 사람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비교우위를 통해서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 사회의 중요한 기준인 자산, 직업, 성적에서 상위권에 들지 못하면 그대로 무시당하고 존재 자체를 의심받는다. 이러한 폭력은 은희에게 일종의 재난이다. 은희가 학교 가는 길에 매일 지나치는 철거에 항의하고 생존권을 요구하는 문구가 적힌 벽들처럼 그렇게 일상은 감당하기 어려운 폭력으로 가득하다. 그 폭력 속에서 일상을 살아내다 보면 때때로 그것에 무감해지고, 무감은 다시 존재에 대한 감각을 옅게 만든다. 그렇다고 폭력으로 인한 상처나 상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잠복해 있다가 예기치 못하게 튀어나온다. 은희는 학교나 가족뿐 아니라 개인적 관계에서도 상실과 좌절을 경험한다. 은희를 좋아한다고 했던 지완(정윤서)과 유리(설혜인)로부터 일방적으로 단절되고, 유일하게 신뢰하던 친구 지숙(박서윤)은 위기의 순간에 배신을 한다. 한문학원의 영지 선생님(김새벽)은 그런 은희의 마음을 돌봐준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은희에게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저항하라고 말한다. 또한 지완의 엄마가 은희에게 ‘방앗간집 딸’이라며 계급적 낙인을 찍는 말을 듣고 자기혐오에 빠졌을 때 영지 선생님은 스스로의 마음과 존재를 먼저 돌아볼 것을 제안한다. 그가 수업시간에 알려줬던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라는 명심보감의 구절은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마음을 돌보고 존재를 감각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이 장면에서 은희는 매일 지나가던 철거민들의 현수막을 보며 ‘불쌍하다’고 하지만 영지 선생님은 ‘함부로 동정하지 말라’고 한다. 동정 역시 비교 우위를 점하려는 태도이고 실제로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지 선생님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손을 보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움직여서, 신비롭게도 자기가 존재함을 감각해보라고 제안한다. 손과 손가락은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한다. 영지 선생님은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린 은희와 지숙의 긴장을 풀어주려 노래 <잘린 손가락>(김호철)을 불러준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잔 마시는 밤/덜걱덜걱 기계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잘린 손가락 묻고 오는 밤 시린 눈물 흘리던 밤/(이하 생략)” 영지 선생님은 현재 있는 손가락뿐 아니라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고 감각라고 한다. 존재는 현재 있는 것뿐만 아니라 상실한 것을 포함한다. 은희가 침샘 수술을 하고 떼어낸 혹을 궁금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지 선생님과의 교류 이후 은희는 오프닝씬의 순간을 반복한다. 은희는 아파트에서 저 멀리 보이는 엄마를 여러 차례 부르지만 충분히 가까운 거리가 돼도 엄마는 응답하지 않는다. 엄마는 은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무에 쏟아지는 빛을 바라본다. 일상에 지쳐있던 엄마는 지금 ‘손가락’을 보고 신비를 느낀다. 그리고 결국은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첫 번째 장면에서는 은희가 아파트 층수를 헷갈려 다른 집을 두드린 해프닝이었음이 드러나지만, 두 번째 장면에선 엄마가 눈앞에 보이는데도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은희는 두 번째 장면에서는 첫 번째 장면처럼 불안정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은희는 다소 서운하지만 엄마의 세계가 자신과 독립되어 있음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의 마음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은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 한다. 그것은 마음을 속속들이 안다는 것과 다르다. 은희는 엄마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그의 세계가 독자적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첫 번째와 달리 두 번째는 분리불안이라기보다는 세계의 독립이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라는 끔찍한 재난이 일어난 후 은희는 언니 수희(박수연)를 잃을 뻔 하고 실제로 영지를 상실한다. 사고 이후 은희는 수희 그리고 수희의 남자친구와 함께 한강 둔치에서 사고현장을 목격한다. 이때 영화는 화면에서 주인공인 은희가 아니라 수희를 앞쪽에 배치하고 그의 감정에 몰입한다. 사고 당시 많은 피해자가 나왔던 학교에 다닌 수희의 마음을 돌보는 이 장면은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라는 구절을 확장한다. 은희는 자기를 알아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것에서 자기 스스로를 돌보는 것으로 그리고 다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는 것으로 옮겨간다. 영지 선생님은 “방학 끝나면 연락할게.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얘기해줄게”라고 말하지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은희는 재난을 응시하며 영지 선생님과 함께 잃어버린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려하고 그 마음을 기억하고 감각하려 한다. 그래서 존재는 현실이지만 동시에 판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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