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 커버스
- 감독
- 김보성
- 제작년도
- 2014
1980년대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때, 과거에 가장 의존적이었던 장르는 하이틴 무비와 청춘 영화일 것이다. 모든 건 1970년대에 결정되었고, 1980년대 충무로에서 만들어진 틴에이저와 청춘의 이야기는 대부분 과거의 답습 혹은 각색이었다. 여기서 ‘1975년’은 기억할 만하다. 이 해에 얄개 영화가 시작되었고, 하길종 감독의 < 바보들의 행진 >이 나왔다. 이후 1980년대는 물론 21세기까지도, ‘스물 즈음’을 다룬 한국영화는 1975년이라는 시간에 정박되어 있었다. 먼저 하이틴 무비를 보자. 조흔파의 소설을 각색하고 안성기 가 주연을 맡은 1965년의 < 얄개전 >( 정승문 )이 있었지만, 얄개(얄미운 개구쟁이) 영화의 물꼬를 튼 영화는 10년 후인 1975년의 < 여고 졸업반 >( 김응천 )이었다. 1976년 문여송 감독의 ‘진짜진짜’ 시리즈가 이어졌고, 1977년 석래명 감독의 < 고교 얄개 >(1977)가 나오면서 ‘얄개의 전성시대’가 열렸으며, 1978년에 김응천-문여송-석래명 3인방은 옴니버스 영화 < 우리들의 고교시대 >에서 만난다. 1, 2. < 고교 얄개 >와 < 대학 얄개 >( 김응천 , 1982). 얄개 영화의 전통은 1980년대도 지배했다. 3, 4. < 바보들의 행진 >과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 ‘병태’의 청춘 스토리는 지속된다. ‘얄개 영화’는 유신 시대를 살아가는 10대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이었다. 최고 권력자를 정점으로 국가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시기를, 입시의 중압감과 칙칙한 교복과 ‘교련’으로 상징되는 군대식 학교를, 게다가 남녀 공학마저 없었던 시대를, 한참 꿈 많고 호기심 충만한 틴에이저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여기서 얄개 영화는 작은 해방구이자, 참고 견디며 현실에 순응하자는 국책성 메시지였다. 각자의 개성과 고민이 있지만 결국엔 흐뭇한 웃음으로 무마되고, “그렇게 우린 성장한다”는 식의 찡한 엔딩으로 마무리되던 영화들이었던 셈이다. 한편 < 바보들의 행진 >은 아직까지도 ‘한국 최고의 청춘 영화’로 꼽히는 작품이다. 실제 대학생들을 캐스팅 한 이 영화는 당시 캠퍼스 청춘 문화를 배경으로 로맨스와 청춘의 고뇌를 담아내고, 동시에 숨 막히는 시대에 대해 절규한다. 그리고 한 친구는 죽음을, 한 친구는 군 입대를 선택한다. 장발 단속과 통금과 휴교령의 시대에 “한 마리 예쁜 고래를 잡는 것”이 꿈이었던 젊음의 이야기. 이 영화는 이후 청춘 영화의 정전이 된다. 그렇다면 1980년대의 양상은 어떠했을까? < 바람 불어 좋은 날 >( 이장호 , 1980)처럼 청춘들의 모습을 사회적 메시지와 결합시킨 작품도 있었지만, 여전히 ‘털보’ 김응천 감독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매우 흥미로운데, 그가 이룬 자가발전은 곧 10대를 다룬 하이틴 영화와 20대 초반을 다룬 청춘 영화를 아우르며, 이 장르들 자체의 역사가 된다.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교복 자유화가 이뤄진 1980년대에 얄개 영화는 지속될 수 없었다. 이때 김응천 감독은 대학 문화를 얄개 영화 방식으로 접근한다. < 꽃밭에 나비 >(1979)부터 조짐이 보였고, < 모모는 철부지 >(1980) < 달려라 풍선 >(1980) < 내 이름은 마야 >(1981) < 갈채 >(1982) 등을 거쳐 그는 드디어 < 대학 얄개 >(1982)와 < 대학 들개 >(1983) < 대학 괴짜들 >(1984)에 도달한다. 이 영화들의 테마는 꽤 익숙했다.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진실한 우정에 대한 깨달음, 부모의 강요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해, 학교생활의 낭만과 로맨스,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 김응천 감독의 ‘대학 청춘 영화’들은 여전히 얄개 영화의 세계관 안에 있었다. 고등학교는 대학 캠퍼스로, 교복은 사복으로, 치열한 입시는 머리 싸매는 고시로, 제과점은 나이트클럽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1. 김응천 감독은 1970년대 틴에이저 무비를 개척해 1980년대 청춘 영화로 변형시켰다. 그는 1980년대에 20편의 하이틴 청춘 영화를 만들었다. 2. 이규형 감독은 1980년대 청춘 영화의 대표적 감독이었다. 3. 이장호 감독의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1980년대의 포문을 연 이 영화는 < 바보들의 행진 >과는 다른 방식으로 청춘의 현실을 다룬다. 4. 전상국 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 우상의 눈물 >(1982). 얄개 출신인 진유영 은 이 영화에서 사뭇 다른 톤의 십대 연기를 보여준다. 배우들도 여전했다. 단짝이었던 김정훈 이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이승현 은 여전히 ‘사고뭉치’ 캐릭터로 이 장르를 이끌었다. 그는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고등학생으로 시작해 대학에 가고 결혼을 하고 취직을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과 ‘앙토완 드와넬’ 시리즈의 장 피에르 레오처럼) 한 감독의 영화 안에서 배우가 성장하는 ‘감독-페르소나’ 관계였던 셈이다. “흥, 절교야!”라며 홱 토라질 때 남학생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깍쟁이 강주희 , 완력을 앞세우던 ‘마초 고교생’ 진유영 , 어눌하면서도 인간적이며 낙관적인 의리파 손창호 ,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김보연 ,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의 활동파 전영록 , 동안의 감성파였던 전호진 과 박재호 (이후 < 내일로 흐르는 강 >(1996)으로 감독 데뷔), 얄밉게 고자질하던 강남길 …. 그들은 여전히 얄개 시절의 캐릭터를 지닌 채 대학생이 되었다. 오토바이 사고로 활동을 중단했던 이덕화 는 < 대학 얄개 >에 ‘얄개 1기 선배님’으로 불리며 등장하기도 했다(단 20대에 접어든 임예진 은 연기 변신을 시도하며 이 대열에서 이탈한다). 인력 충원도 있었다. 송승환 김주승 강문영 이미영 조용원 등이 ‘포스트 얄개’ 시대의 청춘스타가 되었고, 이미숙 이나 원미경 도 이 장르에 적잖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특기할 사랑은 가수들의 진출이었다. 전영록 의 사례가 있긴 했지만, 1980년대엔 가요계와 영화계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두드러졌고, 청춘 영화 장르는 그 격전지였다. 일단 당대 최고 인기 밴드였던 송골매가 있다. 처음엔 카메오처럼 등장하더니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와 < 대학 괴짜들 >에 이르면 배철수 와 구창모 는 주요 배역을 차지한다. 숨은 강자는 김형용 이었다. ‘김형용과 톱니바퀴’의 리더로 ‘해변가요제’ 출신인 그는 당대는 희귀한 미소년 스타일로 어필했다.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의 김수철 , < 졸업 여행 >( 오성환 , 1985)의 김범용 도 가세했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의 전환점(사실 하강점)이 되는 영화는 이상아 와 하희라 주연의 < 말괄량이 대행진 >(1986)이다. 여기서 그는 다시 고교 시절로 돌아가며, 다음 해 < 얄숙이들의 개성 시대 >(1987)를 이어간다. 이런 회춘이 가능했던 건, 새로운 스타덤의 등장 덕분이다.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하희라 이상아 김혜수 김희애 이응경 최수지 이미연 , 그리고 강석현 이재학 민규 최재성 최민수 허준호 박중훈 김민종 김보성 김세준 등은 좀 더 화려한 아이돌 스타덤을 이루었다(1980년대에 한국의 아이돌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은 기존의 청춘스타를 조연으로 기용하고, 신진 세력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나름의 ‘절충’을 이룬다. 1. 김응천 감독의 < 대학 들개 >(1983). 전영록 과 이승현은 1980년대에도 여전히 얄개로 활동했다. 2. < 스물한 살의 비망록 >( 김응천 , 1983)의 송승환 과 강문영 . 1980년대 초에 새롭게 등장한 청춘 배우. 3.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의 김형용 . 가수이자 배우로 1980년대 초 청춘 영화를 잠시 이끌었다. 4. < 대학 괴짜들 >의 배철수 . 그가 속했던 밴드 ‘송골매’는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청춘스타 중 하나였다. 스타 지형도만 변한 게 아니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의 틴에이저 무비는 1970년대의 영향권을 벗어나 드디어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 김응천 의 세계관’을 벗어나기 시작한 십 대의 이야기는 훨씬 더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작은, 당시로선 충무로에서 정말 드물었던 ‘20대 여성 감독’ 이미례 의 데뷔작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1984)이었다. 호즈미 다카노부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한국영화의 10대들이 더 이상 얄개 영화의 해피 엔드에 갇혀 있을 순 없다고 말한다. 폭력적 사회와 무관심한 가정 사이에서 콤플렉스를 지닌 16세 소녀 유리( 김진아 )는 갈 길을 잃고 저항한다. 1985년 동명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 차현재 , 1986)은 밤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의 사연 속으로 들어간다(< 나쁜 영화 >( 장선우 , 1997)의 선배격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비디오 다방, 술집, 대학로, 만화가게, 성인 오락실, 나이트클럽, 여관 등을 휘저으며 단속에 걸린 10대들을 경찰 보호실로 내몬다. 영화는 뮤지컬 형식을 통해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며, 소외당한 아이들의 외침을 들려준다. 이런 시도들은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강우석 , 1989)를 통해 대중적 폭발력을 지닌다. 1990년대 초 기획영화의 포문을 여는 ‘신씨네’의 신철 대표는 이 영화의 기획을 맡았는데, 그는 수백 명의 중고등학생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었고, 취재를 바탕으로 김성홍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으며,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와 로맨스를 배치함으로써 얄개 영화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 영화는 당시 아이들이 실제 모습을 영화에 담아낸다. 이후 <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 김성홍 , 1990) <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 이미례 , 1990) <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 조금환 , 1990) < 열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 >(강우석, 1991) < 인생이 뭐 객관식 시험인가요 >( 강구연 , 1992) 등 ‘긴 제목 영화’들이 쏟아진다. 다소 나이브한 태도는 있지만, 이 영화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포착했던 영화들이었다. 리얼리즘에 좀 더 기운 영화들도 있었다.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 황규덕 , 1990)는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와는 다른 방식으로 입시 지옥을 보여주는데, 담임 교사( 문성근 ) 캐릭터를 통해 ‘참교육’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변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의 움직임과 맞물리는 부분으로, 1989년에 ‘전교조’를 계기로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그 문제의식은 영화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독립영화 단체 ‘장산곶매’에서 제작한 < 닫힌 교문을 열며 >( 이재구 최호 김숙 김건 강경환 황길재 , 1990)는 바로 전교조 문제를 담아낸 첫 영화였다. 1. < 방황하는 별들 >의 이상아 . 이상아는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새로운 아이돌 스타덤의 기수였다. 2. < 캠퍼스 연애특강 >( 조금환 , 1988)의 강석현 하희라 민규 . 3.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의 김진아 . 4.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은 다큐멘터리, 극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결합된 실험적 작품이었다. 틴에이저 무비 계열에서 ‘현실’이라는 화두가 떠오르며 얄개 영화와의 결별이 서서히 이뤄졌다면, 청춘 영화 계열에서도 작은 변화는 있었다. 이 시기 조금씩 시도되던 청춘 로드 무비가 그렇다. < 바보들의 행진 >의 병태( 윤문섭 )가 꿈을 찾아 떠나듯, < 고래사냥 > < 열아홉 살의 가을 >( 김응천 , 1984) < 가슴을 펴라 >( 최원영 , 1987) < 굿모닝! 대통령 >( 이규형 , 1989) 등의 그들도 길 위에서 인생을 배운다. < 내일은 뭐 할 거니 >( 이봉원 , 1984) 같은 실험적 영화도 등장했다. 1960년 4.19 때 도주 중이던 대학생과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B( 강석현 )은 대학생이 된 1980년대에 마치 사회 부적응자처럼 방황한다. 아마도 < 바보 선언 >( 이장호 , 1984)과 함께 가장 파격적인 스타일과 내러티브의 1980년대 영화로 기억될 <내일은 뭐 할 거니>는 당시 젊은이들의 무기력함에 대한 메타포였다. 새로운 흐름을 만든 사람은 이규형 감독이었다.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1987)가 흥행작이지만, 먼저 그가 20대 때 만든 데뷔작 < 청 블루 스케치 >(1986)를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는 당시로선 드물게 ‘청춘 비가’ 스타일의 영화였으며, 이야기보다는 모던한 공간 감각과 비주얼에 더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 비 오는 날의 수채화 >( 곽재용 , 1990)나 < 비트 >( 김성수 , 1997)의 장르적 근원을 더듬다 보면 <청 블루 스케치>를 만날 수 있는데, 로맨스와 범죄 세계의 폭력과 비극적 서사 장치를 결합한 청춘 영화는 1980년대에 만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밋밋한 흥행(서울 관객 약 4만 명) 이후 이규형 감독은 ‘얄개의 세계’에 더 접근했고,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로 서울 관객 약 26만 명을 동원한다. 대학 초년생인 영문과 미미( 강수연 )와 신방과 철수( 박중훈 )의 연애담인 이 영화는, 미래지향적 분위기와 젊은 날의 고뇌를 동시에 담았고, 이규형 감독은 청춘 영화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극한다. 이 영화로 청춘의 아이콘이 된 또 한 명은 배우 박중훈이었다. 그는 < 이장호 의 외인구단 >(1986)으로 상한가를 치던 최재성과 투 톱을 이뤄 <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 >(1988)와 < 내 사랑 동키호테 >(1989)를 이끈다. 메가폰의 주인은 얄개 영화의 장인이었던 석래명 감독. 그런데 두 영화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두 편 모두 젊음과 사랑과 도전과 우정을 다루지만, <내 사랑 동키호테>는 당시 입시 현실을 다루던 하이틴 영화와 접점을 지닌다. 두 주인공이 개발한 ‘쿨쿨 머신’은 수면 중에도 뇌파 조작을 위해 학습을 할 수 있는 기계. 이것은 당시 밤낮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입시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십 대의 현실에 대한 풍자였다. 이처럼 1980년대 말에 오면, 이 장르 안의 그 어떤 영화도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게 된다. 1.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는 하이틴 영화가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영화다. 2.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는 ‘참교육’을 이야기한다. 3. < 내일은 뭐 할 거니 >는 실험적 스타일 속에서 억압적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4.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는 1980년대에 가장 흥행한 청춘 영화이다. 1970년대 얄개 영화와 청춘 영화는 1980년대 시기 변형을 겪은 후 1990년대에 리얼리즘으로 방향을 잡았다. < 숲속의 방 >( 오병철 , 1992)이나 < 세 친구 >( 임순례 , 1996) 등이 ‘현실’이라는 프리즘으로 방금 고등학교를 벗어난 아이들의 삶을 바라본다면, < 정글 스토리 >( 김홍준 , 1996)처럼 힘겹게 자신의 길을 가는 청춘의 이야기가 있었다. < 비트 > < 태양은 없다 >( 김성수 , 1999) < 질주 >( 이상인, 1999) 등은 ‘도시 청춘’을 스타일리시한 영상과 결합시켰다. 흥미로운 건 1990년대 말에 나타난 장르화 현상이었는데, 남녀의 성이 바뀌는 판타지 < 체인지 >( 이진석 , 1997), 아이돌 문화나 밴드 콘셉트와 결합했던 음악 영화들인 < 세븐틴 >( 정병각 , 1998)과 < 짱 >( 양윤호 , 1998) 그리고 호러 장르를 부활시킨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등이 등장했다. 어떻게 보면 1980년대 하이틴 청춘 영화는, 이 장르의 역사에서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 셈이다. 전통은 수정되었고, 관습은 변주되었으며, 배우는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수많은 젊음의 테마들은 좀 더 시간이 흐른 2000년 이후 독립영화와 저예산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그렇다면 얄개 영화의 전통은? 거의 희석되었고, <학교> 시리즈 같은 TV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졌다.
영화란 무엇인가.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이제는 아무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손에 들어보았을 앙드레 바-쟁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에는 이제는 어렴풋한 향수마저 깃든 느낌이다. 이런 질문을 할 때에는 보통 영화를 알고 싶다는 욕망이 전제된다.(그냥 폼 잡으려고 책장에 비치해놓은 사람도 적지 않은 모양이긴 하지만) 움직이는 그림과 소리가 만들어내는 이 매체는 재미있게도 ‘시간’에 대해서 마술을 부리며 ‘예술’의 이름을 부여받았다. 단순히 활동사진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영화들이 나타나면서 오히려 ‘영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의 답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진리와도 같았던 이른바 아트 하우스 영화들이 몰락하고 오히려 쓰레기 취급을 받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마술을 부리기 시작하고... 아아 도대체 영화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질문에 온몸으로 부딪힌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도 거칠거칠한 최야성 감독. 그는 무려 20세에 < 검은 도시 >를 감독하며 (아직도 깨지지 않는) 최연소 감독의 기록을 가지게 된 사람이다. 2014년 현재까지 총 7편의 영화를 감독한 그는 충무로의 아웃사이더였고 영화광들의 조롱거리였으며 본인 스스로는 ‘여자 대신 고정관념을 벗기며’ ‘창작, 독창성으로 세계적 쇼부를 치는’이라 말하는 영화감독이었다.(다 본인의 실제 언급이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본인만의 영화제작 3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남들이 한 것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둘째, 최소한의 제작비만을 사용한다. 셋째, 가장 사실적인 것이 가장 영화적인 것이다. 라는 것이다. ( < 로켓트는 발사됐다 >의 DVD 서플먼트에 들어간 이 인터뷰에서 3대 원칙 중 2번째 원칙을 설명하며 술값을 아끼려 사무실에서 김치에 병맥주를 마시는 알뜰 넘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최야성 감독 3대 영화제작 원칙 < 로켓트는 발사됐다 >는 이 세 가지 원칙을 충실하게 지켜나간 작품이다. 이 영화의 홍보 카피이기도 했던 ‘노 시나리오, 스냅무비’(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로 남들이 했던 것을 피해갔고, 모든 배우들을 ‘이게 세계적으로 되는 영화예요. 한 번 도와주세요.’로 잠깐잠깐 우정 출연시켰기에 제작비가 거의 안 들었다. 또한 가장 사실적인 것을 위해 최야성 감독은 이 영화의 스토리라인으로 ‘영화를 찍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감독’인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일단 본인의 3원칙은 지킨 셈이다. ‘영화를 찍는 것에 대한 영화’를 생각하면 일단 톰 디칠로의 < 망각의 삶 >이 떠오른다. 스티브 부세미가 분한 독립 영화감독은 촬영장에서 발생하는 온갖 변수와 상상도 할 수 없었던(그러나 일단 발생하니 어쩔 수 없는) 사건들을 겪으며 자신이 그렸던 완성과 점점 멀어져가는 상황을 속 터지게 지켜본다. 그래도, 그런 영화 현장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버릴 수 없다는 결론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웃음과 낭만, 그리고 씁쓸함이 교차하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로켓트는 발사됐다>는 안타깝게도 그런 영화 만들기의 고단함보다는 땡처리 옷 장사의 어려움이 더 리얼하게 그려져 있었으니... 만약 어떤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상영시간을 비례로 ‘핵심내용’을 말해야 한다는 법 같은 게 있다면 애석하게도 < 로켓트는 발사됐다 >의 내용은 영화를 찍는 것과 별로 상관이 없어진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땡장사(‘사장님이 미쳤어요!’류의 문구로 호객하여 떨이로 의류를 판매하는 형태) 옷 장수 최야성 사장이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결국 아르바이트로 위장한 양아치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옷을 도둑맞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90분의 상영시간에서 60분이 대충 이런 내용에 유명 배우들의 우정 출연으로 연출된 ‘썰렁 때리는’ 개그들이다. 우리는 시나리오 없이도 충분히 훌륭한 영화가 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로켓트는 발사됐다>는 그런 류의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의 감독이자 제작자이며 주연배우이기도 한 최야성 감독이 당시로선 신선한 시도를 한 것은 그럭저럭 인정해줄 수 있다. 한 가지 그가 착각했던 것은, ‘아무도 안 한 것’이 ‘아무도 생각 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에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이름이 자주 호명된다. 독창성, 신선함의 상징으로 최야성 감독이 닮고 싶어하는 감독인데, 그는 옷가게 구석 소파에 누워 < 저수지의 개들 >을 보며 ‘타란티노를 재끼는’ 영화를 만들겠다며 중얼거린다. 문제는 그 중얼거림이 영화를 만들기 전의 다짐 같은 것이 아니라 관객이 보고 있는 영화의 한 숏 이라는 것이 문제다. 어찌어찌 유명 배우들을 만나 영화출연을 타진하며 ‘세계적으로 쇼부를 보겠다’고 수 없이 다짐을 하지만 그 다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다짐하는 과정을 봐야만 하는 관객은 그래서?? 어쩌라고?? 뭐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로켓트는 발사됐다>의 크랭크 인 장면에서 끝난다. “하여튼 영화 하나 찍기 되게 힘드네.” 라고 지나가듯 말하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봤던 배우들이 사실 영화의 스태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내가 본 장면들의 촬영이 이제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끝과 시작이 맞붙어 있는 순환구조. 돌고 도는 인생사. 색즉시공 공즉시색. 감독이 자신만만(사실 그리 자신만만하지도 않다. 영화상 보이는 그의 태도나 말투는 거의 기어들어가다시피 하다. 안쓰러워...) 하게 말한 것 같은 영화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28살의 어린 영화감독이 뭔가 다른 것을 하고자 하는 안간힘을 볼 수 있어 재미있다. 카메오 비슷하게 출연하는 중구난방의 배우들. 그 리스트는 다음과 같은데, 최종원 , 김보성 , 현석 , 독고영재 , 허준호 , 박준규 , 조상구 , 박상면 , 가수 정광태 , 개그맨 김용 (이 분은 아예 조연급 분량이다), 시인 원태연 , 영화감독 김기덕 , 김두영 (영화 마니아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 주글래살래 >의 바로 그 감독이다.) 등 그야말로 다국적군이라 불릴만한 우정의 무대를 보는 재미가 있다. 어떻게 캡쳐 뜨나 했더니... 감사한 포스터 1997년은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스타트 같은 해였다. 이창동 감독의 < 초록물고기 >, 김성수 감독의 < 비트 >, 송능한 감독의 < 넘버 3 >가 차례로 개봉했고 장윤현 감독의 < 접속 >, 임권택 의 < 창 >, 배용균 감독의 <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 역시 이해에 개봉했다. (흥행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박찬욱 감독의 < 3인조 >도 같은 해 공개되었다.) 이런 좋은 작품들이 쏟아질 때, < 로켓트는 발사됐다 >는 개봉관을 한 곳도 잡지 못하고 3주간의 무료 상영을 했다. 다시 언급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거나 당시 평가받지 못한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영화가 이상이며 꿈이었던 시절의 향수가 남아있는 작품 같아 길티 플레져 비슷한 호감이 생긴다. 신선한 시도와 트래쉬 무비 사이 어디쯤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이 영화를 뭐라고 평가하든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why not? 아님 말구! 감독 최야성 은 <로켓트는 발사됐다> 이후 2편의 영화를 더 제작, 감독하고 현재는 MC야성 이라는 이름의 가수로, 3건의 특허를 등록한 발명가로, 중견화가 조범제 화백의 매니저로... 하여간 바쁜 삶을 살고 계신다. 과연 도전의 귀재라 불리는 사내답다. 최야성 독고영재 김보성 감독: 최야성 각본: 최야성 개봉극장: 시네마천국(서울) 관람인원: 693명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 김기영 감독의 이상한 영화’라고 부르기엔 석연찮은 기분이 가시길 않는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 중 이상하지 않은 영화가 있었나? 그는 초기작인 < 양산도 >부터 ‘악취미의 영화’, ‘국산영화의 품위를 타락시킨 불성실한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영화 인생을 시작한 감독이다. 그가 최고의 흥행사이자 ‘작가’로서 인정을 받게 한 작품인 < 하녀 >는 당시의 어떤 영화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뛰어난 작품이지만, 그래서 더 이상하다는 생각도 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당시 한국영화로선 상상하지 못할 놀라운 완성도와 뉘앙스를 구현해낸 걸작. 척박한 토양에서 이상하게 혼자 뛰어난 영화. 개인적으로 알프레드 히치콕의 < 싸이코 >에 비교해도 전혀 꿀릴 것이 없는 영화라 생각한다. 네알 안경 김기영 그런 김기영 감독의 작품들이라고 해도,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는 개중에서도 특히 기괴하다. 감독의 괴상한 상상력이 만개한 작품인 것은 알겠으나, 관객이 영화가 진행되는 걸 따라가려 스스로 이야기를 꿰맞추고자 노력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멘-붕의 나락에 빠져버리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이 영화는 대학생 김영걸( 김정철 )의 이야기다. 그는 친구들과 MT를 간 장소에서 나비사냥을 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여인이 따라준 오렌지쥬스(스누피가 그려진 플라스틱 컵에 환타를 따라준다)를 받아마시고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 음료는 자살하려는 여인이 혼자 가기 적적해 영걸을 끌고 가려고 독을 타서 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는, “약의 후유증인지 계속 비관적인 생각이 들고 죽고만 싶은” 증상에 시달리게 된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 명장면들이 생각날 것이다. 우선은 ‘의지’로 죽음을 추방한 책 외판원 할아버지가 있다. 영걸의 자취방에 매일 찾아와 「의지의 승리」(레니 리펜슈탈의 나찌 선전영화하고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 가져다 쓴 것 같다.)라는 책을 거의 강매 수준으로 권유한다. 그는 “나는 이 책을 통달하고 죽음을 추방했다. 의지의 승리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집요하게 의지의 중요성 혹은 ‘의지의 승리’의 중요성을 말하던 영감은 자살하려는 영걸을 방해한 대가로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의 삶 속에서 죽음을 추방했기 때문에, ‘세포는 죽었’지만 죽지 않고 입은 살아남아 계속 이야기를 한다. (정말로 죽은 것처럼 누워서 입만 나불거린다.) 영걸은 그를 매장도 해보고 화장도 시키지만, 종국에 할아버지는 해골이 되어 영걸을 찾아와 그의 자살을 방해한다. 의지! 의지만 있으면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의지다! 나는 영원히 산다! 의지다!!!!! 흡사 배우 김보성 이 ‘의리’를 말하는 정도의 횟수로 의지를 이야기하는 이 할아버지는 영걸의 자살을 막는 데 성공한다. 내가 왔다, 죽지 않고 내가 왔다 이후 영걸은 친구 만호( 김만 )가 알고 있다는 종유굴 속에 2천 년간 묻혀 있었던 시체의 유골을 파내어 집으로 가져온다. 어느 비오는 날 밤, 비를 맞은 유골은 살이 붙어 사람이 된다. 그녀( 이화시 )는 신라시대 사람으로, 아버지가 마음에 안 드는 정혼자와 결혼을 시키려 하자 무당에게 방법을 물었더니 동굴에 들어가 30일간 단식을 하면 잠들었다가 2천 년 후에 깨어나 좋은 남자를 만나 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실행해 옮긴 스마트한 여성이었던 것. 모든 좋은 것에 그렇듯 하찮은 부작용이 있는데 열흘에 하나씩 인간의 싱싱한 간을 먹어야 하는 대단찮은 일이었다. 그러던 중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대사, 미장센을 포함한 이 시퀀스 전체가 전 세계 영화사를 통틀어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유례없이 독특하다. 2천년 된 여자의 간지나는 환생 여자 : 30일동안 단식했잖아요. 배가 고프다구요 영걸 : 여긴 라면밖에 없다. 빨리 먹을 수 있어. 인스탄트니까. 여자 : 서방님... 영걸 : 서방님이라니 난 김영걸이다 여자 : 김씨예요? 나도 김씨인데. 같은 성씨끼린 결혼 못 하잖아요 영걸 : 걱정 마. 금년에 동성동본끼리도 결혼할 수 있는 법이 생겼다 여자 : 정말요. 2천 년이나 걸렸으니 우리 백성은 너무 완고해요 (중략) 영걸 : 배가 고프면 내 간도 먹을 건가 여자 : 배고프면 가릴 것이 없잖아요 영걸 : 이것이 여자의 본 모습이다. 하여간 정직해서 좋다. 그리고 이어지는 섹스씬은,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뻥튀기 러브씬’이다. 용돈을 벌겠다고 뻥튀기 기계를 들여놓은 영걸은 신이 나서 기계를 작동시킨다. 그런 후 여자와 대화 도중, 쌓여있는 뻥튀기 위에 누워 사랑을 나눈다. 옛날 한국 영화에서 성적인 행위가 시작되면 타는 장작, 도는 물레방아를 보여주듯 카메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행각을 뒤로하고 뻥튀기 기계를 클로즈업 한다. “욱” “아니 왜 그래” “무당이 그러는 데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도 싼 건 못먹는 댔어요.” (기껏 끓여주니까..!) 뻥튀기 러브씬. 중앙 좌측으로 날아가는 것이 뻥튀기. 영걸은 이 유골을 가지고, 오래된 유골을 분석하여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진 인간의 변화를 연구하는 고고학자 이박사( 남궁원 )에게 가져가 그의 조수가 된다. 그의 집에 들어간 영걸은 이 집의 ‘여왕’으로 군림하는 경미( 김자옥 )를 만나고 영화 초반 그에게 음료수를 건넨 여자는 경미와 동반자살을 약속했던 친구이며, 경미 역시 죽음에 매료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영걸은 이박사의 집에 죽은 자의 머리를 매주 하나씩 소포로 보내져 오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크게 세 가지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어 옴니버스 영화의 틀을 가지고 있는 < 살인 나비를 쫓는 여자 >는 영화 내내 ‘삶’과 ‘죽음’의 싸움을 보여주는 듯하다. 영걸은 의지로 죽음을 추방한 책 외판원, 이미 죽었으나 다시 삶을 얻어 영걸 앞에 나타나지만, 차마 영걸의 간은 빼먹지 못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랑을 얻었으니 됐다’고 말하며 다시 유골로 돌아가는 신라 시대 여자. 마지막으로 ‘죽음은 사랑의 극치요, 생의 절정’이라고 말하며 동반자살을 집요하게 권유하는 경미를 만난다. 그는 “난 언제나 라면 신세를 면하나. 하루 여섯 번을 먹어도 배가 고프니 성가셔서 얼른 죽어야겠다”고 말할 만큼 생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것처럼 말하지만, 끝없이 자살을 ‘유혹’하는 경미에겐 “여자랑 죽는 것도 좋다. 하지만 내가 죽고 싶을 때 원하는 사람 앞에서 죽겠다”며 자세를 바꾸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를 관통하는 영걸의 행동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단정적인 문어체 대사를 읊으며 개폼을 잡고는 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청년에 불과하다. 결국 영걸은 괴한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효수되어 이박사의 집에 소포로 보내지고. 그는 책 외판원 할아버지가 그랬듯, “의지가 있으면 죽지 않는다!”고 외친다. 이박사의 칼부림을 억척스럽게 이빨로 받아내는 그는 의지라고 보기엔 너무 살벌하고 광기로 보기엔 이상하게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며 크게 웃고 만다. 난 죽지 않아! 그리고 영화는 만호와 영걸이 쓰러져 있는 장면을 비춘다. 경찰이 나타나고, 이들이 만취하여 목이 잘렸다는 둥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영걸이 사건에 휘말릴 때마다 영걸을 심문했던 형사다. ‘내가 어릴 때 신 나게 놀아보지 못해 이 정도는 봐줄 수 있다’며 호기롭게 대신 계산을 마치는 형사를 보며 만호와 영걸은 외친다. “사나이는 의지다!! 의지야!!!”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마지막 장면은 어디서부터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이었는지도 모르게 하고, 검은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남궁원 을 쫓아가는 김자옥 을 보고 있노라면 살인나비가 이박사였단 말인가? 하는 허탈한 충격에 휩싸이게도 된다. 대체 이 영화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검은 나비 남궁원 스틸은 좀 더 멋있음 영걸이 이런 모습인 이유는 아무래도 당시 김기영 감독의 상황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기영 감독은 생전에 이 영화를 회고하며 “생각하기도 싫은 쓰레기”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고 한다. 화려한 60년대를 보내고 맞은 1970년대는, < 충녀 > , < 화녀 >로 괜찮은 출발을 했으나 점점 더 심해지던 검열과 반공, 선전영화로 대충 편수를 채워 외화를 할당받으려는 영화 거간꾼들의 술수들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는 때였다. 걸작 < 이어도 >를 찍은 이듬해 만든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마치 예술적 에너지를 다 쏟고 난 후에 그간의 서러움과 불만을 폭발하듯 쏟아낸 영화처럼 보인다. 내내 나타나는 삶과 죽음의 대비는 영화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유로 느껴진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찍으라는 대로 찍을 것인가, 찍고 싶은 대로 찍을 것인가. 김기영은 그 갈림길에서 결국 ‘의지’라는 답을 찾은 것 같다. 영화 속에 셀 수 없이 들리는 ‘의지’라는 말은 곧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다. 세월이 지나 그는 이 영화를 “쓰레기”라고 칭했지만, 78년 당시의 그에겐 반드시 필요한 배설이자, 스스로 만든 극약 처방이 아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길 위를 말 그대로 활보하는 만호와 영걸을 보면, 흡사 “이제 되었다. 나는 내 영화로 돌아간다.” 는 김기영 감독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P.S :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는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1시간 57분의 놀라운 경험을 추천하는 바이다. 남궁원 김자옥 김정철 김만 감독: 김기영 각본: 이문웅 개봉극장 스카라극장 관람인원 14,275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