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허설
- 감독
- 강정수
- 제작년도
- 1995
- 출연
- 최민수, 박영선, 최용석, 방은희, 손숙, 이호재, 윤문식, 전무송, 김부선, 이성훈, 강신구, 정웅인, 김용태, 김봉석, 현경선, 양지영, 방영준, 권성환, 이시은, 조상현, 이형길, 이선미, 이홍표, 박상욱, 최태환, 신범식, 정창현, 정봉연
처음으로 좋아한 격투기는 프로레슬링이었다. 김일의 박치기와 천규덕의 당수를 보며 가슴 졸이고 환호했다. 홍수환, 유제두, 박종팔 등의 복싱도 열심히 봤다. 그리고 프라이드와 UFC 등을 접하며 종합격투기에 빠져들었다. 격투기는 원초적인 스포츠다. 프로레슬링은 번외로 하자. 프로레슬링은 육체의 기술을 갈고닦아 캐릭터와 스토리를 더해 만들어진 쇼다. 육체의 화려함과 열정을 최대한으로 뽑아내는 엔터테인먼트. 프로레슬링은 쇼이지만, 복싱과 종합격투기는 일상의 싸움과 다르지 않다. 후두부와 성기 등 급소를 때리지 않는 정도의 규칙만 있을 뿐이다. 맹수의 공격을 방어하고, 동물을 사냥하고, 인간끼리의 다툼에서 필요한 생존의 기술은 격투기로 발전했다. 내가 격투기에 빠진 이유는 단순했다. 싸우는 그들에게 끌렸다. 격투기의 결과는 승패로 갈린다. 하나는 이기고, 다른 하나는 진다. 오로지 승리하기 위해 그들은 상대를 때리고, 걷어차고, 꺾는다. 혼자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싸운다. 하지만 격투기를 보면서 승자에게만 열광하지는 않았다. ’졌잘싸‘라는 말이 있다. 졌지만 잘 싸웠다, 의 줄임말이다. 비록 승부에서는 패배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는 이를 보면 가슴에 무엇인가 일렁인다. 오로지 승리하기 위해서, 치사한 전략으로 일관하는 놈을 보면 짜증이 일어난다. 단지 지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녀석을 보면 그저 한심하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미야케 쇼의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격투기의 감흥을 떠올리는 것은 어딘지 이상하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격투기, 복싱의 희열이 무엇인지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복싱을 택한 청각 장애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에 가깝다. 복싱은 케이코에게 중요하지만, 생활을 압도하거나 대체할 수 없다. 케이토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복싱을 택했을 뿐이다. 누군가가 아니라, 세상을 때리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싸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던져진 것이니까.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일본 최초의 청각장애인 여성 복서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서전 <지지 마!>(2011)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미야케 쇼는 오가사와라의 모든 이야기를 영화에 담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모든 시간과 사건을 그리지 않는다. 미야케 쇼는 말한다. ‘복싱을 다룬 것만이 아닌, 하루하루 링 위에서 그리고 링 밖에서 싸워나가는 한 여성을 그린 영화다.‘ 오가사와라 케이코가 소속된 체육관의 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재능은 없어요. 키가 작고, 리치도 짧고, 스피드도 느리고요. 하지만 뭐랄까. 인간적인 기량이 있어요. 정직하고 솔직하고 아주 좋은 녀석이에요.’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케이코는 반항적인 아이였다. 고등학교 때는 분을 못 이겨 선생을 때릴 정도였다. 보통 아이들과 다른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분이 많고, 쌓인 감정을 발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반항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케이코는 호텔에서 객실 청소 일을 하고, 복싱을 시작한다. 케이코는 말한다. ‘때리면 기분이 좋아요.’ 그리고 또 말한다. ‘맞을 때 아픈 것이 싫어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쉽지 않다. 치열하게 싸우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케이코를 비롯한, 싸우는 사람들에게 끌리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치고받으며 싸우는, 마지막까지 전장에 서 있는 이들을 보면 어딘가 연대감이 느껴진다. 처참하게 패배할지라도, 함께 끝까지 싸워보고픈 마음이 든다. <내일의 죠>의 명대사처럼, 마지막까지 ‘하얗게 불태워’버리고 싶은 마음이랄까. 실베스터 스탤론의 < 록키 >처럼, 지더라도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쏟아내고 난 후 링 위에 꿋꿋하게 서 있고 싶어진다, 할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젊을 때는. 나이가 들면서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미야케 쇼는 인터뷰에서 ‘나는 솔직히 말해 10대부터 20대까지 꾸준히 성실하게 살자, 라고 하는 구호에 약간의 반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이대에 접어드니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숏 한컷 한컷이 쌓여 완성되는 영화처럼 인생의 의미란 것이 결국 아주 조그마한 것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가는 게 아닌가, 그렇게 느리고 작은 움직임이 소중하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영문 제목을 떠올려 보니 ‘Small, Slow But Steady’다. 작고, 느린 것이 소중함을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케이코의 위대한 승리나 처절한 노력을 말하지 않는다. 케이코는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체육관에서 열심히 훈련한다. 그것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편해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합에서 지는 일은 벌어진다. 그렇다고 상대가 엄청난 것도 아니다. 그 역시 케이코와 마찬가지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운동하며 살아가는 생활 복서다. 천재도, 셀럽도 아닌 그들의 성취는 작고 느리게 이루어진다. 미야케 쇼는 케이코의 일상을 세심하게 그려낸다. 케이코는 들을 수 없지만, 세상에 가득 찬 소리들. 케이코가 다니는 체육관과 강변 그리고 골목길 등을 채우는 햇살과 공기 그리고 먼지들. 우리들의 일상은, 문득 멈추어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작고 느린 것들로 가득하다. 16밀리 필름으로 촬영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다정하고, 섬세하다. 그리고 사려깊다. 소리도, 공기도, 어느 하나도 허투루 쓰이지 않고 각자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한다. 작고 느린 것들은 꾸준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나아간다. 아니 존재한다. 케이코는 아픈 것이 싫다. 복싱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있다. 세상도 그렇다. 때리고 싶고 싸우고 싶은 마음만큼 도망치고 싶고 피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넘친다. 그런 케이코를 붙들어주는 존재는 타인이다. 오랜 시간 권투를 했고, 지금은 후배를 키우는 체육관 관장. 나이가 들어 육체는 쇠하며 병이 들었고, 재개발로 인하여 체육관을 닫아야 한다. 세상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케이코를 가르친다. 청각 장애인인 케이코가 싸워나가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은 일상의 싸움을 무수하게 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공감했을 것이다. 관장만이 아니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인물들은 모두 예사롭지 않다. 음악을 하는 케이코의 남동생은 말한다. 누나는 강하다고. 자신은 누나처럼 강하지 않다고. 흑인 혼혈인 남동생의 애인 하나는 케이코에게 선뜻 다가가 인사를 하며 친해진다. 하나는 케이코에게 춤을 알려준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재능이 있고, 최고가 아닐지는 몰라도 서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무엇을 가르칠 정도는 된다. 그들은 자신의 길에서 작고 느리게, 꾸준하게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윗세대인 케이코의 엄마와 체육관 관장은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미리 판단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면서, 세파에 움추러든 아이들의 등을 따뜻하게 두드려준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따뜻한 영화다. 케이코는 결코 외롭지 않다. 언제나 그들이 있고, 풍경이 있다. 케이코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풍경 속에서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소리와 공기가 가득 차 있다. 케이코도 우리도, 언제나 함께, 세상 안에 있는 것이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았다. 마을 수영장에 간 과체중의 사라를 친구들이 놀린다. 지독한 말로 조롱하고, 물에 들어간 사라를 뜰채로 괴롭힌다. 한때는 가깝게 지냈던 클라우디아도 수동적으로 가담한다. 그들은 옷과 휴대폰이 들어있는 사라의 가방을 가져간다. 사라는 수영복 차림으로 집까지 걸어가야 한다. 그런데 사건이 생긴다. 한적한 도로에 멈춰 있던 밴이 걸어가던 사라를 지나쳐 간다. 밴의 뒷 창문에 누군가의 손이 올라온다. 피묻은 손이 멈추고, 클라우디아의 얼굴이 비친다. 도와달라고 소리 지른다. 사라는 얼어붙는다. 보고만 있다. 밴의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사라를 지켜보고, 눈이 마주친다. 남자는 사라의 가방을 남겨두고 그대로 가버린다. 여기까지가 카를로타 페레다가 2018년에 연출한 단편 <피기>(Cergita)의 내용이다. 페레다는 2022년, 단편을 각색하여 장편 < 피기 >를 만들었다. 단편의 내용은 심플하지만, 생각할 거리가 넘친다. 사라를 놀리던 아이들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일까? 범죄를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사라는 정당할까? 아마도 남자는, 사라가 괴롭힘 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납치의 이유일 수도 있다. 남자의 범죄는 이해할만한 여지가 있는 것일까? 가방을 집어 든 사라는 범죄자인 남자와 공감대를 형성한 것일까? 아이디어로 충분한 단편과 달리 장편은 캐릭터에도, 사건에도 설명을 해줘야 한다. 장편 <피기>는 사라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정육점 장면으로 시작한다. 고기를 썰고 다지고, 소시지를 만든다. 인간이 먹기 위해 존재하는 동물의 고기들을 다루는 곳이다. 정육점에 앉아 공부를 하는 사라의 시선에는 거리에서 날씬하고 멋진 남녀들이 어울리는 모습이 보인다. 사라는 절대 낄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다. 또래들은 사라를 보면 돼지, 미스 베이컨이라 놀려댄다. 또래에게 사라는 살찌고 못생긴 ‘고기’일 뿐이다. 아이들이 조롱한다는 사실을 안 엄마는 당장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며 사라에게 채식을 강요한다. 모두가 모두를 알고 있는 작은 마을. 그곳에서 사라는 집 밖을 나가는 것조차 두렵다. 눌리고 눌려서, 터져버릴 것만 같다. 혐오가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요즘, <피기>의 사라는 폭력의 박스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온라인도 위험하다. 또래들은 정육점에 있는 사라의 가족을 촬영하고 ‘아기 돼지 삼형제’ 태그를 붙여 온라인에 올린다. SNS는 도피의 공간이 아니라 더욱 지독한 혐오의 난장판이다. 현실에도, 온라인에도 도망칠 곳이 없는 사라에게 낯선 남자의 출현은 일종의 판타지로 작용한다. 남자가 친구들을 납치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라는 두려워한다. 꼼짝할 수 없고, 소리도 못 지른다. 겁에 질린 사라를 보면서 남자는 고민했을 것이다. 남자의 선택은 일종의 믿음이다. 남자는 친구들이 사라를 괴롭히는 것을 목격했고, 사라가 쉽게 그들의 편을 들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사라의 마음은 한층 복잡하다. 작은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들. 그러나 한때 친했던 친구조차 지금은 사라를 조롱하는 놀이에 가담한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은, 그들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한쪽 편이 되지 않으면, 누구라도 밀려날 수 있다. 당하는 사라의 입장에서는 세상 자체가 지옥이다. 어디로도 갈 곳이 없다. 막막함 뿐이던 순간에 남자는 사라에게 해방을 안겨주었다. 지독하게 사라를 조롱하는 마카와 친구들을 납치했고, 아마도 죽일 테니까. 낯선 남자도, 사라도 마을의 이방인이다. 외부인이거나, 마을에서 따돌림당하는 존재다. 사라는 헤드폰을 끼고,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리고 핸드폰으로 야한 동영상을 본다. 그 남자를 생각한다. 어쩌면 그는 나를 구원해줄 왕자님일지도 몰라. <피기>는 동화적 은유로 사라와 남자의 미묘한 관계를 드러낸다. 사악한 약탈자이지만, 뒤틀린 시스템을 부숴버릴지도 모르는 이방인. 한밤에 가방을 찾으러 숲으로 간 사라는 남자와 마주친다. 아이들을 찾으러 온 부모들이 숲을 헤매자, 사라와 남자는 구석진 곳에 몸을 피한다. 남자와 사라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숨을 죽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혹시 키스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진다. 남자는 정말로 사라를 폭력적인 공동체에서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일까? 마을 사람들은 사라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어른들은 무시하며 방관하고, 아이들은 조롱하고 폭력을 가했다. 사라가 수영장에 갔다는 것을 안 경찰과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도움을 요청한다. 클라우디아의 남자친구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의심을 풀기 위해, 사라가 증언해달라고 부탁한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존재는, 그들이 필요할 때만 인식된다. 무사히 아이들이 돌아온다면, 모든 상황은 똑같아질 것이다. 무시하고, 조롱하고, 폭력을 가할 것이다. 그러니 피기의 마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남자는 사라의 주변을 맴돈다. 사라가 좋아하는 사탕을 사서 침대에 올려놓는다. 사라를 조롱하는 남자들을 차로 밀어버린다. 남자의 본성이 무엇이건, 지금 남자는 사라를 바라보고, 무엇인가를 주고 있다. <피기>의 후반부, 피폐한 건물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은 1970년대 유럽풍 그라인드하우스 영화를 연상시킨다. 거칠고 잔인한 폭력은 그대로 노출된다. 사라의 액션이 대단하지 않을 것임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후반부 <피기>의 긴장감이 탁월했다. 학교와 가정에서 끔찍한 조롱과 폭력을 당하던 캐리, 스티븐 킹 원작이고 브라이언 드 팔마가 연출한 < 캐리 >(Carrie, 1976)의 주인공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조롱하던 친구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시나리오를 올리버 스톤 스타일로 연출한 < 내츄럴 본 킬러 >(Natural Born Killers, 1995)에서 맬로리는 폭력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범죄자 믹키의 폭력에 기꺼이 동참한다. 밤중에 벌어진 사라와 남자의 기묘한 행각을 보고 나면, 궁금해진다. 사라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만약에 복수를 한다면, 누구에게 할 것인가. 일상의 폭력을 저지른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 사람을 몇 명이나 죽인 낯선 남자? 무엇을 택하건, 딜레마다, <피기>의 포스터는 온몸에 피가 잔뜩 묻은 사라가 길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체중의 사라는 포스터를 가득 메우고 있다. 압박감이 느껴진다. 사라의 과체중 때문일까? 피 묻은 사라의 모습이 낯설기 때문일까? 사라는 슬래셔영화의 공식인 ‘최후의 그녀’와는 많이 다른 캐릭터다. 최후에 살아남은 것은 사라 혼자가 아닐뿐더러 사라는 어쩌면 공범일 수도 있다. 처음부터 범죄를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방조하고 은폐했다. 사라의 도덕적 딜레마는 최후의 최후까지 그녀를 괴롭힌다. <피기>는 쉽지 않은 질문을 마지막까지 유지한다. 페레다는 사라가 근본적으로 공동체를 거부하거나 파괴하는 지점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결국 <피기>는 안전한 선택을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사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한 선택이기도 하다. < X >와 < 펄 >의 주인공 펄은 욕망이 좌절되면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선택을 한다. 펄은 되찾아야 할 것이 있었고, 살인을 통해서 대리만족한다. 사라에게는 판타지적 욕망이 존재할 뿐이다. 완벽하게 망상에 빠지기에 <피기>의 세계는 상식적이다. <피기>에서 그려지는 마을과 주변 사람들의 행동은 평이하다. 애초에 <피기>는 아주 극단적인 상황으로 사라를 몰아가지 않는다. 현실적인 고난을 겪고, 상식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피기>는 영리하면서, 꽤나 파괴적인 영화다.
요즘은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예전 영화를 많이 재개봉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 회로 >를 다시 봤고, 스탠리 큐브릭의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을 4K로 봤다. 미이케 다카시의 < 오디션 >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봉했다. 비디오나 DVD가 나온 적이 없었고, 영화제에서만 상영했다. 해외에서 꽤 화제를 모았던 영화이고, 한국에도 마니아들이 있었지만, 그동안 정식으로 선보이지 못했다. 마니아들은 해외 DVD를 사고, 그것을 복사하거나 파일로 변환해서 돌려봤다. 과거에 봤던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면, 새로운 감흥이 일거나 기억과는 다른 장면과 대사에 혼란스럽기도 하다. <오디션>은 3, 4번 봤었는데,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한 10여 년 만에 다시 보니 느낌이 약간 바뀌었다. 그 남자는 자연재해처럼 난데없는 불행에 휩싸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여자의 마음은 모두 진심이었다. 애타게 전화를 기다린 것도, 완벽한 사랑을 갈구한 것도. 물론 다리를 자른 것도. 미이케 다카시는 V시네마의 걸작들을 다수 연출하며 유명해진 감독이다. 1989년,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 도에이의 산하에 있는 도에이 비디오는 ‘V 시네마’라는 레벨명으로 <크라임 헌터>를 출시한다. 20, 30대 남성을 타겟으로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고 바로 비디오로 출시되는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극장용 영화보다 제작비는 적지만, 일반적인 인디 영화보다는 훨씬 스케일이 크고 상업적인 장르 영화를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도에이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고, 다른 제작사들도 V시네마에 뛰어들었다. 미이케 다카시는 1991년부터 <돌풍! 미니파트대> 등으로 감독 데뷔를 하며, 일년에 서너 편의 영화를 만드는 강행군을 시작했다. 1995년부터 만든 ‘흑사회 3부작’-<신주쿠 흑사회>, <극도흑사회>, <일본흑사회>는 극장 개봉도 했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이케 다카시는 V시네마를 대표하는 감독이면서 종종 극장 개봉작과 해외영화제 수상작을 연출했고, 2000년대 중반 순조롭게 메이저로 진출했다. 1999년에 연출한 <오디션>은 2000년 로테르담영화제에 출품되어 국제비평가연맹상을 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영화를 본 한 관객은 미이케 다카시를 보고 ‘악마’라며 욕을 했고, 보다가 나가버린 관객들도 아주 많았다. 이후 해외에서 개봉을 했을 때, 충격을 받아 병원에 실려 간 관객이 나오기도 했다. 주간지 <타임>이 2007년 발표한 ‘공포영화 톱 25’에 선정되었고, 영국의 영화지 <토탈 필름>의 ‘공포영화 역대 베스트 50’의 29위에도 올랐다. 메이저에 간 후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는 다소 느슨해졌고, 평범해지기도 했지만 2천년대 초반까지 미이케 다카시는 가장 기발하고, 독특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 이치 더 킬러 >, < 극도 공포대극장 우두 >, < 비지터 큐 >, <중국의 조인> 등을 만들었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 원작인 <오디션>은 중반이 넘어가기까지 큰 사건 없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호러영화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모호함이 맴돌 뿐이다. 아오야마는 아내가 죽은 후 7년 동안 아들 시게히코와 함께 살아왔다. 시게히코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아오야마의 사업도 안정됐다. 하지만 일본은, 그들의 세계는 불안정하다. 당시 일본은 장기 불황의 한복판이었다. 아오야마는 재혼을 하기 위해 오디션을 만든다. 명분은 영화의 주인공을 찾는다는 것. 지원서를 뒤지던 아오야마는 한 여인에게 꽂힌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했지만 부상으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던 아사미. 아사미에게 끌린 아오야마는 오디션이 끝난 후 연락하고 만나기 시작한다. 아오야마의 친구는 뭔가 의심스럽다며 신중하라 하지만, 푹 빠진 아오야마는 무시한다. 아사미도 아오야마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두 사람은 함께 바닷가의 호텔로 여행을 간다. 아사미는 어린 시절 학대받은 과거를 고백한다. 아오야마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첫 섹스를 한다. 아마도.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섬뜩한 장면이 가끔 등장하지만 아오야마와 아사미의 연애가 진행되는 중반까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변한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깬 아오야마는 호텔 방에서 아사미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아무 연락이 없고, 수소문해도 행방을 찾을 수 없다. 아사미의 흔적을 찾아가는 곳에서 두 발이 잘린 남자를 만나고, 여자가 토막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파고들면 들수록 아사미라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집에 있던 아오야마는 아사미의 습격을 받는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커다란 바늘이 몸에 꽂히고, 발이 잘려나간다. 도대체 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무라카미 류의 소설 <오디션>은 1997년 <펜트하우스 재팬>에 연재되었다. 오로지 환락과 희망, 밝은 미래만이 충만했던 버블경제가 끝난 1990년대의 일본은 혼돈이었다. 1995년에는 한신 대지진과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사건이 있었다. 범죄의 잔혹성과 대담성, 14세의 범인이라는 사실에 모두 당혹스러워했던 고베아동연속살인사건은 1997년이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무차별 살인과 범죄도 증가했다. 버블 붕괴 후의 일본은 모든 것이 닫힌 회색의 시공간이었다. 모두가 외롭고, 모두가 누군가를 혹은 자신도 모르는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영화 <오디션>에서는, 공룡에 심취한 아오야마의 아들 시게히코가 가장 현명해보인다. 호사로운 향락에 빠지지도 않고, 불투명한 미래에 절망하지도 않는다. 중년의 아버지에게 재혼을 권하고, 자신의 미래를 담담하게 준비해간다. 아오야마도, 아사미도 누군가를 만나 완전한 소통을 바라는 기성세대다. 타인과의 완전한 사랑을 통해 자신이 완전해질 것이라 믿는다. 그들은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다. 친척의 학대, 어머니의 남자가 가한 폭행은 아사미를 고립되게 만들었다. 아사미는 자신을 이해해 줄,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해 줄 남자를 갈구한다. 하지만 둘만의 완벽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한 그녀는 남자가 도망갈 수 없도록 발목을 잘라버린다. 아사미는 아오야마를 고문하며 말한다. “말은 거짓이어도 아픔만은 믿을 수 있죠,....아프니까 잘 알겠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깨달을 수 있을 때는 괴로울 때나 힘들 때죠. 정말 괴로울 때만 자신의 마음이 보여요.” 아사미는 아오야마를 사랑했다. 아니 사랑하기 위해 아오야마를 들여다봤다. 나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아오야마는 그렇다고 말하지만, 그건 거짓이다. 아오야마는 세속적인 인간이다. 크게 악하거나 선하지 않다. 욕망에 충실하고, 자신의 이익이 제일 중요하다. 아마도 아오야마의 부하 여직원은, 그에게 크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발목을 잘라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사미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녀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강렬하게 타인을, 타인의 사랑을 원하고 있다. 자신의 순수한 사랑이 좌절되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그들은 폭력적으로 변한다. <오디션>의 세계는 세기말의 일본만이 아니라 지금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원작에서는 아오야마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안 아사미가 충격을 받은 것으로 설명된다. 나만을 사랑하겠다는 아오야마의 말이 거짓이었으니까. 영화 <오디션>에서는 이유가 없다.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랑의 과정으로 보였지만, 갑자기 아사미가 사라져버렸다. 미이케 다카시는 인터뷰에서 ‘이유 없는 재난’이라고 말했다. 길을 가다가 건물 공사장 위에서 떨어진 벽돌에 머리를 맞는 사고 같은 것. 이유가 없고, 예측할 수 없고, 막을 수도 없는 사고. 하지만 미이케 다카시는 영화의 꿈 장면에 많은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아오야마는 아사미의 고문을 당할만한 이유가 분명하게 있다. 너무 가혹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잘못은 있다. 아오야마만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럴만한 이유와 공동 책임이 있다. 미이케 다카시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그대로 각색하면서도, 자신만의 시선을 분명하게 투사한다. 아오야마는 좋은 남자이지만, 중년의 회사 사장이라는 위치에 걸맞는 비열함을 또한 지니고 있다. 그리고 자루 속의 남자와 아오야마의 고문, 계속 머릿속에서 들리는 ‘끼릭끼릭’ 소리 등 <오디션>을 보고 나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은 그 시절의 미이케 다카시만이 연출할 수 있는 기괴한 풍경이다. 지금 봐도 너무나 선명하고 강렬하다. 아마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