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도
- 감독
- 김기영
- 제작년도
- 1955
- 출연
- 김삼화, 조용수, 김승호, 박암, 고선애, 고설봉, 이기홍, 고일연, 최룡, 이영옥, 박행철, 장진영
소중한 인물은 당대에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이 말이 더욱 실감난다. 그때 내가 왜 이 일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을까,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 미비한 언급에 대해 확인하지 못했을까, 실례를 무릅쓰고 집안을 뒤져서라도 그분의 희귀 자료들을 얻어오지 못했을까. 그때 깨달았다면 불완전한 영화 역사의 한 조각이라도 더 메울 수가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 가슴을 저리게 한다. 안종화 (安鍾和)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1902년 서울에서 태어난 안종화 선생은 나운규와는 동갑이지만 영화계에서는 선배였다. 부산에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첫 작품 < 해의 비곡 >(1924)에 이월화 와 함께 주연을 맡고, 이후 자신이 끌어들인 나운규 에게 데뷔의 기회를 준 < 운영전 >( 윤백남 감독)에 출연했다. 하지만 1930년 < 꽃장사 >로 메가폰을 잡으며 감독이 된 뒤 잇따라 < 노래하는 시절 >(1930), < 청춘의 십자로 >(1934), < 은하에 흐르는 정열 >(1935), < 인생항로 >(1937) 등 여섯 편을 내놓고, 광복 후에도 < 수우(愁雨) >(1948), < 나라를 위하여 >(1949), < 춘향전 >(1958) 등 7편을 연출하여 모두 13편을 남기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한국영화측면비사>(춘추각,1962)라는 귀한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경험과 주변의 얘기를 담은 이와 같은 주관적인 회고담은 객관적인 정사(正史)가 놓친 일들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맺은 인연의 끈 내가 안종화 선생을 직접 뵌 것은 제주도에서였다. 동국대학 3학년 때인 1959년 초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해 2월 월간 <사상계> 신인작품 추천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신출내기 시인이었다. 1년 전 <현대문학>과 경쟁하던 문예지 <문학예술>에 첫 추천을 받았으나 폐간되는 바람에 등용 지면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다소 들뜬 기분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참이었다. 이때 나는 ‘안종화 감독이 영화 <견우 직녀>를 찍기 위해 제주도에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종화 선생을 먼발치에서나마 처음 본 것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다닐 때였다. 그는 이웃에 있는 연극영화과의 교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분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다. 그저 막연히 한국영화 초창기에 활약한 영화인이라는 정도, 국도극장에서 본 < 사도세자 >(1956)의 감독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이 영화에는 몇 달 전 전창근 감독의 < 단종애사 >로 나란히 데뷔한 황해남 과 엄앵란 이 출연했다. 그들이 나 또래의 나이라서 더욱 관심이 갔었다. 나는 안 선생이 묵는 데가 서울여관임을 확인하자 무작정 숙소로 찾아갔다. 이 여관은 제주시 번화가 칠성통에 있는 남궁다방 바로 뒤에 있었다. 내가 서울여관으로 찾아갔을 때는 촬영 팀이 다음 날 예정된 로케이션에 대비하느라 분주했다. 그 가운데 조감독인 황학봉 이 눈에 띄었다. 뒷날 영화 < 무기와 육체 >(1968) 한 편을 내놓고 후속작을 기다리다가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다. 나보다 두 살쯤 위였지 않나 싶다. 가깝진 않았지만 다행히 서울에서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의 도움으로 마침 방에서 나온 안종화 선생을 뵐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시 쓰는 친구라며 영화에도 관심이 많다고 소개해주었다. 선생은 내가 서라벌예술대학을 다녔다고 하자 마치 제자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그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일반적인 예술가와는 다른 인자하고 기품 있는 선비의 모습이었다. 뒤에 확인됐지만 과묵하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은 성품의 소유자였다. 스태프 가운데는 황학봉 과 마찬가지로 뒤에 감독이 된 진천 (陳天)과 김성수 도 끼어 있었다. 이들은 각기 조명과 기록을 담당했다. < 견우 직녀 >는 당시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구전설화를 추식이 각색한 것이다. 출연진은 김삼화 를 비롯한 이예성 , 이경희 , 김정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다음 날부터 이들과 행동을 같이했다. 무엇보다도 영화 촬영 장면이 궁금했고, 좋아하는 배우의 모습도 보고 싶었다. 진행상 도움이 된다고 믿었는지 안 선생은 나의 동행을 묵인해주었다. 첫 로케지는 북제주군에 있는 안덕계곡이었다. 화창한 여름날, 그늘도 없는 계곡 양쪽 벼랑에는 들백합이 만발했다. 계곡에는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흘렀다. 그만큼 물이 맑았다. 여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직녀(김상화)가 멱을 감다가 나무꾼에게 옷을 빼앗기는 장면이 촬영되었다. 그 배경은 나중에 찍은 천지연폭포 화면과 연결되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으로 한 달 가까이 제주에 머물며 촬영을 마친 <견우 직녀> 팀은 부산 서면의 로케이션을 거쳐 상경했다. 이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1960년 늦가을 명보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그러나 흥행엔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알게 된 안종화 선생과는 1960년대 중반까지 드물게나마 만날 수 있었다. 윤봉춘 감독과 공동 연출한 < 애정삼백년 >(1962)을 촬영할 무렵에는 우연히 명동 거리에서 만나자 손을 꼬옥 잡으며 기대가 크니 열심히 하라고 격려까지 해주었다. 그 무렵 나는 영화평론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가슴 저리게 하는 것은 1965년 12월 20일 서울 YMCA홀에서 열린 월간 영화예술사 제정 제2회 영화예술상 시상식 때의 모습 때문이다. 선생은 와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유공영화인 패를 받기 위해 참석했던 것이다. 시상식이 끝나고 선생의 자리로 찾아가 인사를 하자 불편한 몸을 겨우 지팡이에 의지한 채 아무 말 없이 손만 꼭 쥐시는 것이었다. 이미 말을 잃은 상태였다. 초점이 흐린 그의 눈에 어느새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선생을 본 마지막 모습이다. 세상의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뒷날 내가 대학의 강의시간에 선생의 저술을 활용하고, 뒤늦게 찾아낸 < 청춘의 십자로 >의 공개 자리에서 해설을 하게 될 줄을, 아니 이 작품이 근대 문화재로 등재하는 데 선정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되리라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따지고 보면 안종화 선생 역시 제주도와 인연이 깊은 분이었다. 데뷔작 < 해의 비곡 >을 촬영하기 위해 왔던 이 섬에 무려 35년 만에 다시 찾아와 < 견우 직녀 >를 찍게 되었으니 말이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 < 하녀 >를 말할 때 주로 강조되는 것은 주인공 동식( 김진규 ) 부부의 2층 양옥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지만, 이 영화의 분위기를 주조하는 것은 비단 이 밀폐된 공간만이 아니다. 초반부 동식과 여공 곽선영(옥경희) 사이의 에피소드는 뒤에 이어질 동식의 운명을 예견케 하는 복선인 동시에, 상경한 여성들의 불안정한 지위와 이를 방치하는 비정한 사회를 보여주는 독립된 사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곽선영에게 정직 처분을 내리는 사감 선생으로 나오는 이가 바로 고선애 (高善愛)다. 동식의 신고에 처벌을 잠시 주저하지만 사감실로 불려온 선영에게 정직 처분을 통보하는 그녀의 표정은 단호하다. 이 장면에서 무엇인가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선애의 얼굴이다. 양미간의 찌푸린 주름과 직삼각형 모양으로 힘을 준 눈매, 깎아지른 양볼 위로 윤곽이 드러나는 광대뼈, 그리고 단호하게 다문 작지 않은 입은 뒤돌아 서 있는 곽선영의 처연한 어깨와 확연히 대비를 이룬다. 그 입술 사이로 굵고 건조한 그녀의 음성이 ‘에누리’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고선애 는 특유의 인상과 목소리로 프레임을 장악하는 힘을 지닌 배우였다. 이를 알아본 것은 역시 김기영 감독이었던 것 같다. 고선애가 본격적으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한 첫 작품은 김기영의 두 번째 장편 < 양산도 >였고 이 작품에서 그녀는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아들을 둔 어머니로 나온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필름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반 실성한 상태로 아들 수동(조용수)의 무덤 앞에서 곡을 하다가 혼례 가마를 타고 그 앞을 지나는 아들의 연인에게 비수를 꽂는 여인을 연기한다. 탈춤을 추며 언덕을 올라오는 혼례 행렬과 그 사이로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가는 수동 어머니, 칼을 맞고 수동의 무덤으로 기어가는 옥랑( 김삼화 )의 모습이 연극적으로 이어지는 이 장면에서 고선애는 원시적인 모성을 발산하며 내러티브를 주술적인 단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이 직후에 옥랑과 수동의 영혼이 줄을 타고 승천 하는 장면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가 없다). 1911년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태어난 고선애 는 대구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한동안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인텔리 여성이었다. 스물넷이 되던 해에 순회공연 중심으로 신파극과 희극을 주로 상연하던 극단 신무대(新舞臺)에 입단하면서 무대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녀를 배우로 살아가도록 바꿔놓았다. 해방 전까지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한때 극단 금성좌(金星座)를 경영했을 정도로 무대생활에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 박제행 (朴齊行), 고설봉 (高雪峰) 등과 함께 해군본부 정훈감실 보도과 소속으로 극단 예술극회(藝術劇會)를 창립해 활동했으며, 국방부 정훈국 후원으로 제작되어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21일에 개봉한 영화 < 나라를 위하여 >를 통해 영화 데뷔했다. 전쟁 중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신극무대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전쟁이 끝난 후 1955년에 < 구원의 애정 >과 < 양산도 >를 통해 영화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비범함을 알아본 김기영 감독의 작품과는 달리 다른 대부분의 작품에서 고선애 는 비중이 적은 단역을 맡아야 했다. 작은 역할일지라도 연기의 폭은 상대적으로 넓은 편이었는데, 평범한 아낙네에서부터 교사처럼 지적인 여성이거나 상층계급의 부인까지 소화해냈다. 열사 유관순의 이화학당 스승(< 유관순 >)이나 YWCA 총무(< 상록수 >)처럼 식민지 시기의 엘리트 여성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교편을 잡았던 배경 덕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 양산도 >의 비극적인 어머니라든가 < 서울의 지붕밑 >에서처럼 미신을 믿는 교육수준이 낮고 가난한 아낙 역할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만의 장기가 발휘된 작품은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었는데 신필름의 영화들은 그런 그녀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본처들의 모임 ‘꿀벌회’의 회장으로 단호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 로맨스그레이 >나 YWCA 총무로서 농촌계몽을 위해 젊은 학생들을 불러모아 가르치는 백현경 역할을 맡은 < 상록수 >는 고선애 의 지적인 인상을 정형화해서 사용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이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신상옥 감독의 눈에 들었던 것인지 큰 역할은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신필름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고 그런 그녀를 ‘신상옥 사단’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일찍부터 < 천지유정 >이나 <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로 한·홍합작 영화에 출연했던 그녀는 신필름의 합작영화 제작에도 함께 했다. < 대폭군 >, < 반혼녀 >, < 흑발 > 등 필모그래피 후반의 영화들 상당수가 합작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며, 특히 <반혼녀>에서는 주인공 연화(리칭)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이승과 저승을 잇는 주선자 역할을 하는 늙은 유모로 극을 끌어가고 있다. / 글: 김한상
1961년 5월 당시 [국제영화]는 손미희자 , 전계현 , 남미리 , 문혜란 , 엄앵란 , 나애심 , 이빈화 등의 당대의 여배우들의 그래머 채점표에서 이빈화를 단연 선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의상을 새로 맞출 때는 언제나 같은 상점을 이용하는지,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맡기는지, 누구를 사귀기 좋아하는지, 입었던 옷을 새 옷이나 유행하는 의상으로 바꾸어 입었을 때 기분이 어떤지, 향수나 의상의 색깔 등에 대한 질문으로 채워지고 있는 이 설문지는 당시 이 여배우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답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50년대를 지나 60년대에 접어들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여배우를 바라보던 하나의 시선을 상기시킨다.BB(브리짓드 바르도), MM(마릴린 먼로), CC(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등의 이름을 붙이던 시대에 매력적인 여배우로서 미에 대한 관심도를 테스트해보는 이 설문지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여 자기자신을 잘 적응시키는 것과 함께 자기를 감추거나 죽이지 않는 자신감과 자주성을 잃지 않는 사교성의 요구와 풍부한 감정의 소유자인가를 강조함으로써 이전까지의 전통적 여성상과는 분명히 선을 긋는 새로운 여성상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당신처럼 키 큰 여자들이 많은가요?' 1961년 일본에서 그곳에 촬영온 이브 몽땅이 던진 질문에 한국에서는 키가 커서 언제나 곤란을 느낀다고 털어놓을 만큼 이빈화는 당시 한국 여배우치고는 상대적으로 큰 키에다, 신체 사이즈를 자신 있게 밝힐만큼 균형잡힌 체형을 갖추고 있어, 때로는 지나 롤로브리지다에, 때로는 소피아 로렌에 비유되기도 했다. ''B.B. 붐의 시대'', 즉 신체사이즈로 배우를 설명하는 ''육체의 시대''에 이제 모두들 여배우의 몸에 주목하면서 신체 사이즈에 따라 그들을 분류했다. 수영복을 입은 여배우들이 등장하는 해수욕장 장면이 자주 나와 관객의 눈길을 끈 것도 이 즈음부터였다. 1934년 서울 돈암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이숙한(李淑翰)으로 알려져 있는(국제영화 58년 4월) 이빈화 는 여학교 시절부터 무용과 음악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으며 국악원 고전무용연구소에 적을 두기로 한다. 이 곳에서 받은 3년간의 수련은 그녀에게 우아하고 세련된 멋스러움을 갖추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까지도 선사했다. 1952년 부산 피난 시절, 이빈화는 윤봉춘 감독의 징병을 설득하는 < 성불사 >에서 승무를 추는 여주인공 역을 맡으면서 스크린에 데뷔한다. 그녀가 우아하게 춤을 추는 모습은 ''갑분이는 팔자 좋아''하는 노래에 맞춰 동네 처녀들과 춤을 추는 오영진 원작의 < 맹진사댁 경사 >( 이용민 감독,196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보다 가문과 체면을 중시하는 얼치기 양반들을 풍자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버리자니 대감댁이요, 주자니 무남독녀''라서 혼인날 자기 대신 입분이를 절뚝발이로 소문난 판사댁 자제에게 보내고 나중에 진실을 알고 발을 동동 구르는 갑분이역을 맡았다. 따라서 당시 잡지의 글들은 동양무용 서양무용에 조예가 깊은 이빈화와, < 양산도 >로 데뷔한 김삼화 를 호적수로서 ''다같이 무용계에서 진출한 스타일 좋은 내일의 스타요, 앞길이 양양한 젊은이''로서 소개한다. ''1950년도 한국영화계에서 얻은 가장 보람된 일 중의 하나가 신인 이빈화 양의 등장''이라고 소개되던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일련의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1956년작 < 청춘쌍곡선 >에서 요염한 자태와 실감나는 연기로 영화와 다시 인연을 맺은 이빈화는 과식으로 병이 난 부자 양훈 과 가난한 학교교원으로 그와 정반대의 병으로 괴로움에 처해있는 황해 가 한 의사의 권고를 듣고 2주일간 서로 집을 바꾸게 되는 이 희극에서 양훈의 여동생으로 출연하여 황해와 짝을 이룬다. 이 영화에서 성적으로 자유롭고 분방한 부자의 딸을 연기하여 호평을 받은 그녀는 뒤이어 한 감독의 작품 < 마인 >(1957)에서도 무리 없이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빈화의 출세작은 박계주 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전편에 박애주의와 낭만주의 그리고 이국적인 풍광이 특징적이던 < 순애보 >(1957)이다. 스타메이커로도 유명한 한형모 감독은 이 영화에서 아직 조연급에 지나지 않던 이빈화를 여주인공역에 기용함으로써, 스타로서 그녀의 입지를 굳힌다. 현대적인 감각과 균형잡힌 체구를 가진 이빈화에게 ''멜로드라마 시대''가 눈독을 들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근대적 가족을 상상하는 형식으로서 멜로드라마에서 그녀에게 맡겨지는 역할이란 전통보다는 현대를, 수동적이기 보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사랑을 기다리기 보다는 쟁취하는 역할이 맡겨지곤 했다. < 순애보 >에서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사랑에 적극적이다가 결국 살해당하고마는 에어걸(당시는 스튜어디스를 이렇게 불렀나 보다.) 인순(김의향)과 달리 이제는 눈이 멀고 누명까지 쓴 화가 애인을 기다리는 제목 그대로 순애보(殉愛普)적 사랑을 보여주는 명희역의 이빈화 는 오히려 예외적인 셈이다. 따라서 기다림과 통절의 미학을 보여주는 멜로드라마에서 그녀의 자리는 조연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광수 원작의 < 흙 >(1960)에서 기생 백선희역으로 등장하여 현대적인 역할을 기대했던 관객들을 다소 실망시켰던 이빈화는 이후 비비안 리가 나온 < 애수 >를 연상시키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멜로드라마인 <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1959)를 비롯하여, < 사랑의 역사 >(1960)에서는 과부인 은선( 최은희 )의 다방업을 하는 친구로, 연속방송극을 각색한 < 다시는 놓지 않으련다 >에서는 종합병원의 여의사로 등장하였다. 충청도 조그만 산골의 산지기 딸( 이경희 )과 그 산주의 아들( 박노식 ) 사이의 애정을 다룬 < 꽃피는 시절 >(1959)에서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녀역을 맡은 이빈화 는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다. 그녀는 이 삼각관계에서 계층적으로 자기 보다 못하지만 자신의 남자를 사로잡고 있는 연적 이경희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가 하면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낸다. 아담하다기 보다는 큰 키에 현대적이고 세련된 그래머의 몸매를 가진 그녀에게 부여되는 역할이란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수동적인 이경희의 전통적인 여성상과 대조되는 적극적이고 사랑을 쟁취하는 역할이 적역이었을 것이다. 여교사인 문현주( 조미령 )의 말썽꾸러기 학생중 한 사람인 상호( 안성기 )의 누나로 나오는 < 어느 여교사의 수기 > 역시 이빈화는 부모 없이 자라는 상호의 빠걸인 누나로서 정부가 오는 밤이면 번번이 동생 상호를 쫒아내고 다음날 동생이 책보를 찾으러 왔을 때도 내려진 커튼 틈으로 책보와 아침밥값을 내주고 창문을 닫아버리는 연기를 매정하게 해내었다. 상호 주변의 차가운 환경을 보여주기 위한 이빈화의 이 계산된 연기는 분명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균형이 잡히고 요염한 육체미에 예리한 혹은 앙칼진 내면적인 정신의 자세가 포함되어 있었던 이빈화 만큼 근대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떠맡은 영화의 고유한 기능안에서 마음껏 헤엄칠 수 있는 배우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녀는 한마디로 자신의 멋을 알고 또 그 멋을 세련되게 보여줄 수 있는 배우였기 때문이다. 화려한 생활과 서울-동경-홍콩 등지의 국제적인 무대를 통해서 그녀의 자태를 빛냈으며 선천적인 재질, 용모가 장기간의 연기생활을 통해서 비교적 꾸준히 인정을 받는 행운도 누렸다. <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1959)이라는 일련의 홍콩 스타일 합작영화에서는 ''홍콩 마카오를 무대로 이국적 향취를 풍기면서 삼각 러브스토리를 전개하면서 적당히 액션 맛도 가미하여 대중 취향의 쇼우''로 만들어 놓았고 친구 사이인 박노식 과 독고성 이 각각 암흑가와 경찰을 대표하여 등장한 < 현금은 내 것이다 >에서는 박노식을 사랑하여 그를 구하는 거칠지만 순정파인 바의 마담으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69년까지 연기활동을 한 이빈화 연기의 만개(滿開)는 < 안개 >(1967)인 듯 하다. 비록 화면에 등장하는 시간은 길지 않지만 그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60년대 한국 모더니즘영화로서 <안개>는 기준( 신성일 )의 시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의 고향인 무진으로의 공간의 이동이자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무진으로의 여행은 떠나고싶지만 떠날 수 없는 서울에 대한 기준의 자기 합리화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에서 기준의 서울 생활은 아내로 표상되며 그것은 그의 권태롭지만 풍요로운 현재와 미래를 받치고 있는 물질적 기반이다. 이빈화는 이 영화에서 바로 그 아내이며 기준에게 무진으로 내려가거나 올라오라고 지시하는 인물이자 기준을 통제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김수용 감독은 ''세련되고 돈이 많아 보이고 연상으로 위엄이 있어보여야 하는'' 기준의 아내역으로 이빈화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감상에 빠지는 것이 내 휴식의 비법''(국제영화 63년 4/5월)이라고 밝혔던 이빈화 . 괄괄하지만 품위 있으며 세련된 팔방미인인 이빈화의 화려함은 어쩌면 언젠가 그녀가 수필에 쓴 것 처럼 너무도 소박한 꿈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꼭 따뜻한 인정속에서 살고싶다. 야박스런 감정에서 자신을 괴롭히고싶지는 않다. 이것이 아마 스크린에서 사라질 때까지의 생활신조인지 모른다. ' 후리후리한 키에 스마트한 양장을 하고 유행을 몰고와서는 어느 날 은막에서 사라져간 이빈화에 대한 대중들의 끊임없는 관심은 당시의 그녀가 얼마나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남성들은 물론 동성인 여성들에게까지 질투와 선망을 느끼게 했던 이빈화를 관객들은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다. 변재란 (순천향대교수) / 2002년 <프로필> 본 명 : 이숙한 출 생 : 1934년 2월 3일 서울 데 뷔 : 1952년 윤봉춘 감독 < 성불사 > 주요 작품 : < 성불사 >, < 청춘 쌍곡선 >, < 순애보 >, < 마인 > 등